오늘 참 예쁜 것을 보았네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38
모리야마 미야코 지음, 타카하시 카즈에 그림, 박영아 옮김 / 북극곰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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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린이책

맑은책시렁 216


《오늘 참 예쁜 것을 보았네》

 모리야마 이야코 글

 타카하시 카즈에 그림

 박영아 옮김

 북극곰

 2018.9.11.



“그럴 리가! 여기 꽃 위에서 쭉 잤는걸.” 돼지는 손가락으로 풀숲을 가리킵니다. 풀숲에는 제비꽃이랑 연꽃이랑 민들레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 (14쪽)


구구단을 외우는데 삼 곱하기 사를 모르나 봅니다. “삼 사는 십이야.” 곰 아줌마는 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탁자 앞으로 돌아옵니다. (25쪽)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은데…….” 할아버지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립니다. 다람쥐가 조르르 달려옵니다. 나뭇가지에서 가방을 내립니다. 다람쥐는 가방을 뺨에 대고 살살 비벼 봅니다. (43쪽)


여우는 엄마에게 토끼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먼저 말을 걸어 보렴. 토끼도 조금씩 적응할 거야.” (59쪽)



  아침나절에 두 아이한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래?” 오늘 큰아이는 “그럼, 케익을 구워 볼까?” 하고, 작은아이는 “그럼 나는 배추된장국을 해볼까?”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는 밀가루를 채치고 반죽하느라 부산합니다. 달걀을 풀고 물이랑 설탕 무게를 잽니다. 오븐을 쓰지 않고도 스탠냄비로 집케익을 굽습니다. 작은아이는 부지런히 배춧잎을 씻어서 썰고, 감자에 버섯에 파에 송송 썰고는 냄비에 불을 올립니다. 두 아이는 스스로 아침거리를 짓습니다. 그래, 너희는 참 하루를 이쁘게 여는구나! 어른이 곁에서 거들지 않아도 스스로 해내는구나!


  어린이문학 《오늘 참 예쁜 것을 보았네》(모리야마 이야코·타카하시 카즈에/박영아 옮김, 북극곰, 2018)는 얼핏 본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얼마나 예쁜 빛인가 하는 대목을 짚습니다. 겉을 곱상하게 꾸미기에 예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지요. 예쁘다고 할 적에는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 때문입니다.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이 많겠지요. 그런데 예쁘장한 모습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끼지 않을까요? 이와 달리 참다이 예쁜 속마음이라면 누구나 매한가지 느끼리라 생각해요.


  오로지 사랑일 적에만 예쁜 마음이겠다고 느껴요. 언제나 기쁘게 춤출 줄 알고 웃을 줄 아는 사랑일 때에만 예쁜 마음빛이 된다고 느껴요.


  문학도 영화도 대단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오늘 하루를 빛내는 즐거운 길도 먼발치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 곁에 흐르는 가장 수수하고 작다 싶은 곳에서 예쁜 마음을 읽고, 예쁜 손길을 읽으며, 예쁜 눈빛을 읽으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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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생물학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35
이상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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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인문책시렁 109


《10대와 통하는 생물학 이야기》

 이상수

 철수와영희

 2019.10.3.



아일랜드 사람들이 럼퍼 외에 다른 감자를 심었다면 어땠을까요? 3000 종류가 넘는 감자 중에 럼퍼 말고 다른 감자 너댓 종류를 섞어 심었다면 사태의 참혹함은 덜하지 않았을까요? (69쪽)


흙을 망가뜨리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식의 농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살충제를 사용하면 당장은 생산량이 늘어날지 몰라도 생물다양성을 해치고 일부 해충만 득세하는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조성하지요. (107쪽)


생명 윤리법이 있다 해도 중국처럼 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는 얼마든지 인간 배아를 실험할 수 있습니다. (175쪽)


이중 나선 구조를 밝힌 왓슨의 능력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동료 과학자를 폄하하고 인격을 조롱하는 그의 행위는 분명 존경받을 만한 태도가 아니지요. (200쪽)


유전체 정보는 모든 계층으로부터 광범위하게 모으는데 그 혜택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가는 기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죠. (222쪽)



  밭고랑을 자꾸 쪼면 흙이 여물지 못합니다. 밭고랑 흙이 여물지 못하면 가랑비에도 흙이 떠내려갑니다.


  온누리 모든 흙은 주검입니다. 풀잎이며 나뭇잎이 시들어서 차근차근 삭아서 바뀌는 흙이요, 풀벌레에 나비에 잠자리에 크고작은 숲짐승이랑 들짐승이 죽으면서 바뀌는 흙입니다. 사람이 누는 똥오줌도 시나브로 흙으로 바뀌고요. 그런데 논밭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는다면, 겨울에 시든 풀잎이나 봄가을에 떨어지는 가랑잎이 내려앉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 흙은 싯누렇게 되어 마치 모래벌 모습이 되겠지요.


  흙이 기름지지 않으니 비료에 농약에 항생제를 쏟아부어서 논일이나 밭일을 하기 일쑤입니다.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흙이라면 비료도 농약도 항생제도 안 쓸 만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오늘날 흙일은 오롯이 농약장사에 비닐장사에 비료장사가 돈을 버는 얼거리로 흐르지 않을까요?


  푸름이하고 함께 읽는 인문책인 《10대와 통하는 생물학 이야기》(이상수, 철수와영희, 2019)를 읽으며 흙을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생물학을 짚은 인문책입니다만, 흙 이야기도 곧잘 흐릅니다. 생물학 이야기에 웬 흙이냐고 고개를 갸웃할 수 있습니다만, 모든 목숨이 살고 죽는 흐름은 흙하고 맞물리니, 흙을 어떻게 바라보거나 돌보거나 아끼는가 하는 길도 생물학을 깊고 넓게 익히는 징검다리가 되어요.


  한 가지만 심는 흙일(단일경작)일 적에는 작은 벌레 하나한테도 몽땅 갉아먹히곤 합니다. 여러 가지를 고루 심는 흙일이라면 온갖 벌레가 있어도 딱히 달라붙지 않는다고 해요.


  늘 풀밭을 마주하면서 살고 보니 ‘잡풀이라고 여기는 풀을 샅샅이 뽑아내어 죽이다 보니, 풀벌레가 먹이로 삼을 풀(잡풀)이 없어, 사람이 심는 푸성귀를 그렇게 갉아먹으려 하지 않나?’ 하고 느끼곤 합니다. 풀벌레는 사람이 심은 푸성귀만 갉으려 하지 않아요. 아니, 사람이 심은 푸성귀도 더러 갉지만, 이보다는 사람이 안 심었기에 저절로 돋는 풀을 매우 달게 먹어요. 햇볕이며 빗물이며 바람을 듬뿍 머금은 여느 풀이야말로 풀벌레 먹을거리라고 할까요.


  푸른인문책 《10대와 통하는 생물학 이야기》는 곁을 찬찬히 보는 눈길로 이끌려 합니다. 먹이사슬 너머 흙을, 뛰어난 과학자이기 앞서 참되거나 착한 마음을, 여러 과학 이론보다는 우리 삶자리를 바라보자고 이끌어요.


  노벨상을 탈 만한 이론을 세웠다고 하지만, 지구라는 별을 아끼거나 온누리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생물학 이론이나 과학 이론은 어느 길로 치달을까요? 싸움판에서 생화학 무기를 지어낸 사람은 바로 과학자였어요. ‘실험실에서 세포를 붙여서 사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이들도 바로 과학자예요.


  사랑으로 맺어서 태어나는 아이가 아닌, 실험실에서 이모저모 짜맞추어 만드는 아이라면, 이 별은 어떻게 될까 싶습니다. 생물학이라는 과학은 바로 이 마음을, 눈길을, 숨결을, 삶을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면서 어깨동무하는 길로 어우러지자는 뜻으로 배우겠지요. 입으로는 ‘목숨을 아끼자’고 읊는 학문이 아니라, 삶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아름다이 피어날 길을 찾는 학교와 사회와 나라와 학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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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2-2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구입했고 다음 읽을 책으로 순번 기다리고 있답니다.
과학책이 아닌 인문책으로 분류해놓으셨지만 과학, 인문, 구분이 중요한건 아니니까요.

숲노래 2019-12-25 20:11   좋아요 0 | URL
끝자락... 진화론 창조론 대목은
같은 얘기를 굳이 여러 벌 되풀이해서 아쉬웠어요.
저는 깊은 시골에서 늘 숲을 곁에 두고 살면서
진화론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엄청난 열매를 늘 보는데
‘과학‘을 다루는 한국 지식인이 좀 결벽이 센 듯해요.
양자물리학을 좀 공부하시면 좋을 텐데요..
아무튼, 그 대목을 빼고는 참 훌륭한 책이라고 느껴요.
과학도 인문도 철학도 종교도,
앞으로는 모두 ‘삶책(삶을 노래하는 책)‘으로 가면 좋겠어요,.
 
진짜 별이 아닌 별이 나오는 진짜 이야기
오카다 준 글, 윤정주 그림, 이경옥 옮김 / 보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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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217 : 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겨루지 않아요


《진짜 별이 아닌 별이 나오는 진짜 이야기》

 오카다 준 글

 윤정주 그림

 이경옥 옮김

 보림

 2008.8.25.



삼 학년이 되자 마코는 야구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스티커 때문이었다. 삼 학년 담임 선생님은 시험을 치러 백 점 맞은 아이에게 스티커를 주었다. 은빛 나는 별 모양 스티커가 참 멋졌다. 마코네 반 아이들은 스티커 때문에 백 점을 맞으려고 애썼다. (4쪽)


“신! 너 때문에 스티커 못 받았잖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냐?” 요시코는 백 점 맞은 시험지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이를 노려보았다. (10쪽)


바보라는 말을 듣자 잇페이는 화가 났다. “그래, 맞아! 우리는 바보야! 네가 우리 같은 애들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 너같이 대충대충 해도 스티커를 받고 우쭐대는 애가 우리 기분을 알 수 있겠어?” 마코의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그러졌다. “난 우쭐댄 적 없어!” “우쭐대지 않는 애가 보란 듯이 모자에 별을 붙이고 다녀!” (35쪽)


“화장실이 뭐가 훌륭하냐?” 잇페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화장실을 칭찬하는 건 신이뿐이야.” 마코가 말했다. “맞아. 화장실이 잘 해도 칭찬하는 사람은 없어.” (42쪽)



  나라지기가 어떻게 다스리느냐를 놓고서 ‘잘한다·못한다’를 이레마다 따지곤 합니다. 어쩌면 날마다 따질는지 모릅니다. 이레마다, 또는 날마다 인기투표를 하는 셈인데,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 싶곤 합니다. 잘하거나 못하거나를 따지는 일이 나쁘다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못마땅하다는 목소리가 있으면 나라지기는 이를 귀담아들을 노릇이요, 한 사람이라도 즐겁다는 목소리가 있으면 더욱 힘내야겠다는 채찍질로 삼을 노릇이지 싶거든요.


  일터 가운데 영업부 쪽에서는 한켠에 성적표를 붙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얼마나 잘 팔았거나 돈을 벌어들였는가를 놓고서 막대표를 붙이지요. 이러면서 첫째하고 둘째처럼 높은자리를 북돋우고 꼴찌에 있는 이를 다그치기도 합니다. 이때마다 첫째자리이든 꼴찌자리이든 고단하기는 매한가지예요. 첫째자리는 그 높이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 테고, 꼴찌자리는 얼른 벗어나고 꼴찌를 남한테 넘겨주려고 악을 쓸 테니까요.


  1983년에 일본에서 처음 나오고, 한국에서는 2008년에 처음 옮긴 《진짜 별이 아닌 별이 나오는 진짜 이야기》(오카다 준 글·윤정주 그림/이경옥 옮김, 보림, 2008)를 읽으며 속이 쓰립니다. 1983년에 일본에서 나온 어린이책이라지만 아직 일본에서 이런 교실이며 교사가 있을 듯하고, 2008년에 한국말로 옮겼다 하더라도 요새에도 한국에서 이런 학교이며 교사가 있을 듯하거든요.


  잘했다고 하는 아이한테 ‘별 스티커’를 붙여 주면서 북돋우는 뜻이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어느새 아이들은 별 스티커 숫자에 목을 매답니다. 동무보다 더 많이 따거나 차지하려 합니다. 동무보다 적게 얻거나 하나도 못 딴 아이는 주눅이 들거나 놀림을 받습니다.


  이른바 줄세우기예요. 앞자리는 잘한다 여기고 뒷자리는 못한다 여기는 셈인데요, 시험성적만으로 줄세우는 이런 일을 배움이나 가르침이라도 해도 될는지 궁금해요. 시험성적뿐 아니라 달리기 성적도 따질 테고, 책을 많이 읽은 성적도 따질 테며, 글솜씨나 그림솜씨도 성적으로 따질 테지요.


  더 빨리 달리면 무엇이 좋을까요? 뒤처지는 동무를 모르는 체하면서 혼자 앞서 나아가면 무엇이 즐거울까요? 넘어진 동무를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첫째나 둘째를 거머쥘 적에 무엇이 기쁠까요? 이런 곳에 사랑이나 꿈이나 노래나 춤이 흐를 수 있을까요? 어깨동무가 아닌 혼자살기로 치닫는 데에서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배우는 한마당을 열 수 있을까요?


  어린이책 《진짜 별이 아닌 별이 나오는 진짜 이야기》는 어린이가 흔히 읽을 텐데, 어린이 곁에서 교사하고 여느 어버이도 같이 읽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둔 어버이가 아니더라도 이 같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읽고 새기면 더 좋겠어요. ‘성과 제도’에 목을 매달지 않도록,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닦달하지 않도록, 서로 아끼면서 도우며 활짝 웃음짓는 즐거운 살림이 되도록, 새롭게 한 걸음씩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겨루지 않아요. 우리는 지구에서 보기에 별빛도 등급으로 가릅니다만, 별빛에 왜 등급이 있어야 할까요? 별빛은 모두 별빛이요, 다 다른 별빛은 언제나 푸근하게 우리 별 지구를 감싸 주는걸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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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내가 살게 네 삶은 네가 살아
옥영경 지음 / 한울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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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시렁 154 : 가려뽑는 입시, 함께가는 교육


《내 삶은 내가 살게 네 삶은 네가 살아》

 옥영경

 한울림

 2019.6.27.



‘입시’는 특정인을 선발해야 하고, ‘교육’은 보편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입시는 선별이고, 교육은 포용이다. 입시는 경쟁이지만, 교육은 너그러움의 문제라고도 하겠다. (12쪽)


아이들은 보는 대로 배운다는 의미에서, 또한 가르치는 대로만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이들은 어떤 공간에 있건 배운다. (118쪽)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쓰는 것 역시 뭘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해야만 할 말을 쓰기도 할 테고. 우리는 못 배워서 못 쓰는 게 아니다. 못 읽어서 못 쓰는 것도 아니다. 쓰지 않았던 것이다. (167쪽)


결국 시간이다! 떼쓰는 아이들한테도 마찬가지. 시간을 들이면 제풀이 꺾이기도 하고, 시간이 들어가면 다른 것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고, 시간을 들여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도 하고 …… (217쪽)


그건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와 함께 겪을 수 있는 생의 신비이기도 했다. 또 다른 내 한계를 보게 되고, 나를 연민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사랑하게 되는 …… (253쪽)



  요즈음은 서울이든 시골이든 학교가 매우 달라졌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도 학급에 스물이나 서른만 있곤 하며, 학년마다 반도 그리 많이 두지 않는다고 해요. 시골에서는 더더구나 학급이며 학년이 작습니다. 예전에는 학교마다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채우고 빈틈이 없었다면, 요즈음은 빈 교실이 넘치면서 이곳을 동아리칸이라든지 여러모로 달리 쓴다고 해요.


  고흥 어느 면소재지 초등학교는 서른이 안 되는 전교생 모두가 탈 수 있는 자전거를 마련했고, 피아노를 여덟 들이고 온갖 악기를 고루 갖추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처럼 조그마한 학교에 갖은 시설을 두루 갖춘다고 하더라도 중학교에 접어들면 대학입시에 맞추고,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입시하고 취업 사이에서 한쪽을 고른다지요.


  그래도 초등학교에서는 입시보다는 교육을 앞세우니 한결 나은 셈일까요. 아니면 중·고등학교로는 이어가지 못하고 초등학교에만 맴도는 교육인 셈일까요.


  충북 영동에서 어느덧 스무 해 넘게 ‘자유학교 물꼬’를 일구어서 이끄는 길잡이인 옥영경 님이 이녁 아이하고 살아온 나날을 갈무리한 《내 삶은 내가 살게 네 삶은 네가 살아》(옥영경, 한울림, 2019)를 읽었습니다. 옥영경 님도 이녁 아이도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고픈 길이 있기에 멧골자락 배움터에서 즐겁게 하루를 누렸다고 해요. 아이는 나중에 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키우면서 자유학교를 떠나 제도권학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제도권학교에서 만만하지 않은 겨룸판을 치러야 했을 텐데, 어느새 이 울타리를 넘어서서 스스로 배우고 싶은 길에 새롭게 선다고 합니다.


  길잡이요 어버이인 옥영경 님이 갈무리한 책에 붙은 이름이기도 합니다만, “내 삶은 내가 살”고 “네 삶은 네가 살”아갑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태어나고 삶을 꿈꾸면서 사랑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자라고 살림을 그리면서 사랑하지요.


  무엇을 배울 만할까요. 무엇을 가르치며 즐거울까요. 무엇을 배우기에 함박웃음을 지을까요. 무엇을 가르치기에 노랫가락처럼 신나는 목소리가 될까요.


  멧골에 깃든 숲배움터 ‘물꼬’는 자유학교라는 이름을 씁니다. 모름지기 학교라 하면 자유롭게 가르치거나 배우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 테지요. 이 자유학교는 멧골에, 이른바 숲에 있습니다. 참말로 학교라 하면 숲에서 태어나 자라는 숨결을 늘 마주하면서 스스로 새롭게 하루를 짓는 길을 누려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숲에서 스스럼없이 스스로 배우는 길을 가는 물꼬는 손수 씨앗을 심어 손수 가꾸어 손수 누리는 살림길도 걷는다고 해요. 책으로 머리를 살찌울 뿐 아니라 몸으로 마음을 살리는 길을 나아갈 적에, 더없이 빛나는 배움마당이 된다고 합니다.


  배움책 《내 삶은 내가 살게 네 삶은 네가 살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뚜렷합니다. 앞으로는 제도권학교이든 자유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우리집학교이든 홀로서기(자유), 숲(자연), 살림(먹고 입고 자는)을 고르게 다루고 슬기롭게 나누며 사랑으로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려뽑는 입시를 없애면 좋겠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들어가는 문턱을 가리는 틀이 아닌, 나오는 숨결을 살피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하되, 마치려면 다시 말해 졸업장을 얻으려면, 이때에 메우 깐깐하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면 되겠지요.


  살아남도록 길들이는 학교가 아니기를 빕니다. 어깨동무하면서 함께가는 길을 그리는 학교로 거듭나기를 빕니다. 더 큰 건물과 더 많은 시설을 들이는 학교이기보다는, 고스란히 숲이 되면서 스스로 살림꽃을 익히는 배움길인 학교로 나아가기를 빕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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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주인은 나 -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로 이끄는 사고 나침반 비행청소년 14
오승현 지음, 안병현 그림 / 풀빛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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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시렁 153 : ‘생각하지 않’기에 따돌림·괴롭힘이 불거진다면


《생각의 주인은 나》

 오승현

 풀빛

 2017.6.30.



괴롭힘이나 따돌림은 결함 때문이 아니라 약해서 벌어지는 거야. 따돌림을 당하는 대상에게 무슨 큰 문제나 결함이 있어서 따돌리는 게 아니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단지 힘없고 약한 사람이야 … 따돌리는 아이들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를 왜 비난하는 걸까?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거야. (38∼39쪽)


주류는 수가 적어. 실제 주류에 속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주류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다수인 거지. 주류의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거야. (90쪽)


대놓고 차별을 부추겨야 자기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은 사회적 불만을 진짜 원인이 아닌 다른 쪽으로 돌리려 하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을 사회적 약자에게 표출하게 함으로써 마치 불만이 해소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거야. (91쪽)


경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까? 아니, 행복을 떠나서 사회의 경쟁력을 높여 줄까? (154쪽)


모든 생명체는 모래알이 아니라 물방울이야. 모래알은 다른 모래알과 부딪히면 튕겨 나가지만, 물방울은 서로 스미고 섞이지. (283쪽)



  “생각 좀 하고 살아.” 같은 말을 들으며 “생각을 안 했나?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데?” 하고 스스럼없이 묻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생각을 안 했다고?”처럼 발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안 하지.” 같은 말을 들으며 “어디에서 생각이 모자랐을까? 알려주면 고맙겠네.” 하고 기꺼이 묻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해서 그렇게 했어!” 하고 자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놓고서 달리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갈래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깝거나 어느 쪽 모습을 자주 보여줄까요? 그리고 손윗사람이 물을 적하고 손아랫사람이 물을 적에 얼마나 다르거나 같을까요?


  어쩌면 오늘날 학교에서 아직 가르치거나 배울 틈이 적다고 할 만한 대목을 짚는 《생각의 주인은 나》(오승현, 풀빛, 2017)를 읽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하는 줄거리인데, 우리 삶터 곳곳에 있는 학교에서는 무엇을 들려주거나 가르칠까요. 참말로 모든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대목에 온힘을 쏟을는지요, 아니면 진도를 나가거나 대학입시를 치르는 길에 온힘을 쏟을는지요.


  배우는 자리라 한다면 ‘사회는 이렇다’를 가르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전은 이러한 얼개요 모습인데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니?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가꾸거나 다스리거나 바꾸면 즐겁거나 아름다울까?’ 하고 물으면서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먼저 스스로 길을 생각하도록 북돋우리라 봅니다.


  ‘역사는 이렇다’나 ‘과학은 이렇다’나 ‘문학은 이렇다’ 하고 잘라서 말하거나 가르칠 학교가 아닌, ‘이렇게 적혔는데, 우리는 이 발자취를 어떤 눈길하고 마음으로 읽어야 할까?’ 하고 물어야겠지요. ‘과학이 이러한 길을 왔는데 얼마나 알맞고,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하고 물을 만하며, ‘이렇게 쓴 문학이 있으니 다 다른 우리 눈길대로 다 다르게 느끼면서 읽어 볼까?’ 하고 물을 만하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의 주인은 나》는 ‘정답은 없다’는 길을 보여주려고 한달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인 정답’이 아닌 ‘다 다른 길’하고 ‘저마다 즐거운 생각’이 피어날 적에 아름다운 삶터를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달 수 있어요.


  생각하기에 산 목숨이겠지요. 생각하지 않기에 휩쓸리거나 휘둘리겠지요. 생각하기에 오늘이 새롭고 어제가 새삼스러우며 모레가 빛날 만하겠지요. 네 생각이 아름답다면 ‘네 생각이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를 내가 생각해서 판가름할게’ 하고 말하면서,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일는지 안 받아들일는지를 따질 수 있는, 이러한 배움터이자 삶터가 되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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