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코의 술 애장판 12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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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58



목숨을 다스리는

― 나츠코의 술 12

 오제 아키라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2.2.25.



  시골에서는 으레 새벽 일찍 하루를 엽니다. 동이 트기 앞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매한가지입니다. 하루를 일찍 열고 일찍 닫습니다. 이른 새벽에 멧새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일손을 여밉니다. 고요하게 맞이하는 새벽이면서 하루이고, 가장 맑고 밝은 기운으로 여는 삶입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지난날에는 지구별 모든 곳이 시골입니다. 지구별에 도시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어느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이 트기 앞서 하루를 열었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지구별 모든 사람은 가장 맑으면서 밝은 기운으로 하루를 열었고, 언제나 싱그러우면서 기쁜 넋으로 삶을 지었습니다.


  정치권력이 생기면서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들입니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을 거머쥐려는 이들은 스스로 밥을 짓지 않고 옷을 짓지 않으며 집을 짓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은 ‘스스로 할 일’을 남한테 시킵니다. ‘스스로 할 일’을 안 하면서 주먹힘과 군대힘으로 사람들을 억누릅니다.


  스스로 할 일, 그러니까 ‘짓기(밥짓기·옷짓기·집짓기)’를 안 하는 사람들은 삶을 짓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하루를 새롭게 짓지 않습니다. 늘 똑같은 틀에 따라 움직입니다. 늘 똑같은 틀에 따라 움직이면서 ‘스스로 해야 하지만 스스로 안 하는 일’을 남한테 시키면서, 이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도 이녁과 똑같이 틀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억누릅니다. ‘사회’란 바로 ‘똑같은 틀’입니다. 정치권력을 지키도록 하는 틀이 바로 사회입니다.





- “진정해라, 나츠코. 아직 갈 길이 멀다.” “2주쯤이야 금방인걸! 난 작년부터 기다렸다고. 그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야.” (11쪽)

- “왜 그러냐?” “긴조 상조 때까진 술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아. 2주 동안 참으며 시음에 대비하고 싶어.” (19쪽)



  사회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사회는 틀을 지키면 될 뿐입니다. 사회에는 새로운 바람이 없습니다. 사회는 틀을 그대로 이어야 할 뿐입니다.


  새로움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투표를 민주 제도에 따라 꾸준히 치르더라도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지 못하고, 새로운 정책이 생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틀을 그대로 이으려고 할 뿐이기 때문에, 이 정당이나 저 정당이나 똑같습니다. 어느 정당 아무개가 정치 일꾼이 되더라도 사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당 일꾼은 정당 밥그릇에 따라 ‘사회를 그대로 잇는 틀’을 단단히 하려는 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틀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사회를 이으려는 마음이기에, 학교교육이 불거집니다. 모든 아이한테 똑같은 교과서 지식을 외우도록 시키고, 똑같은 대입시험을 치르게 하며, 똑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이끄는 까닭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학교교육은 오직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 사회를 그대로 건사하는 길, 바로 이 한 가지 때문에 학교교육에 나라돈을 엄청나게 들입니다.


  아주 마땅한 일일 텐데, 사회를 그대로 지키는 뜻을 이으려는 학교교육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시골일을 안 가르칩니다. 시골학교조차 아이들한테 시골일을 안 시킵니다. 그리고, 사회를 지키는 뜻만 가르치는 학교인 터라,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서 돌보기’라든지 ‘마음에 드는 짝꿍을 만나서 사랑스럽게 어울리기’를 안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꿈을 키우는 삶’이라든지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사랑’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셨나요? 볼 수 없습니다. 학교는 이런 일을 하려는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모든 사람을 나이에 따라 틀에 맞추려고 할 뿐이면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빛을 가꾸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면서, 옷차림까지 아주 판에 박도록 길들입니다.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더 틀에 박힐 뿐 아니라, 생각이 갇히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삶과 생각과 마음이 흐르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사랑이나 꿈은 자라지 못하고, 정치권력자가 꾀하는 대로 사회를 따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2년 전 고작 한 움큼의 볍씨였던 쌀이 이제, 조금씩. 들어 봐요! 양조장이 새로운 술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누룩의 속삭임이에요.” (23쪽)

- “준마이 생산량이 늘었다고는 해도 아직 10% 정도입니다. 그렇게 양이 적은 건 아무래도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근대화했다 해도 결국은, 인간의 감이라든가 오랜 경험이라는 미지의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건 음식이나 술을 만드는 데 있어 어쩔 수 없는 숙명이잖아요. 아무래도 살아 있는 것을 상대하다 보니.” (30∼31쪽)



  예부터 마을마다 말이 달랐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을마다 말이 달랐습니다. 정치권력자는 어떤 땅을 이녁 경계로 삼아서 ‘나라’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예부터 지구별 시골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곧 나라’일 뿐입니다. 그러니, 마을마다 말이 다릅니다.


  마을마다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가 다릅니다. 서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예전에는 마을마다 말이 다르고 밥과 옷과 집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삶이 달랐어요. 스스로 삶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삶을 지으니, 마을마다 말과 옷과 밥과 집이 다를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지난날에는 누구나 옷을 손수 지어서 입었습니다. 똑같은 옷이 한 벌조차 없습니다. 집을 스스로 지어서 살아갑니다. 밥을 스스로 지어서 먹습니다. 마을뿐 아니라 집마다 물맛이 다르고 땅 높낮이가 달라요. 그러니, 집집마다 이녁 집안 기운에 맞추어 밥을 다르게 짓습니다.


  밥맛이 다르다는 소리는, 끼니마다 밥맛을 새로 짓는다는 뜻입니다. 밥 한 그릇을 차릴 적에도 늘 삶을 짓는다는 뜻이요, 하루 내내 새로운 이야기가 넘실거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밥을 짓건 풀을 베건 길쌈을 하건 나락을 털건 지붕을 잇건 무엇을 하건 늘 노래를 부릅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누구나 언제나 노래를 불렀어요. 하루 내내 노래를 부르며 살았습니다. 언제나 삶을 새로 지으니, 언제나 새로운 노래가 흐릅니다. ‘민요를 채집하는 학자’가 없어도, 사람들은 마음속에 노래를 담습니다. ‘민속문화를 연구하는 학자’가 없어도, 마을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지어 ‘문화를 이룹’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에는 삶에 노래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루 내내 스스로 노래를 안 짓습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상업노래는 있을는지 모르나, 스스로 이녁 삶에서 길어올리는 노래는 없습니다.




- “같은 술쌀을 같은 방식으로 빚어도 서로 다른 술이 나오는 경우가 있지?” “물론이지. 아니, 오히려 똑같은 술을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나 할까.” (69쪽)

- “나츠코. 올려도 될까?” “물론이지!” “여보. 나츠코와 양조장 사람들이 만들어 줬어요. 당신의 목숨이에요.” (131∼132쪽)



  도시가 커지는 일은 정치권력자가 바라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시골로 떠나는 일은 정치권력자가 안 바라는 일입니다. 요즈음은 정치권력자가 생각을 넓혀 ‘시골로 떠나는 사람을 길들이는 새로운 길’을 만들곤 합니다. 요새는 나라에서 ‘귀농·귀촌 지원사업’을 꾀합니다. 사람들이 시골로 가려는 뜻은 ‘도시에서 이루는 사회가 사람을 죽음 구렁텅이로 내모는 줄 뼛속 깊이 느끼기 때문’인데,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려는 사람들한테 ‘시골에서조차 논밭을 일구어 돈을 버는 쳇바퀴 삶이 되도록 몰아붙입’니다.


  시골살이는 ‘논밭에서 유기농 곡식과 열매를 키워 돈을 버는 삶’이 아닙니다. 시골살이는 말 그대로 ‘시골을 누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내 말’을 되찾으려고 시골에 갑니다. 스스로 ‘내 삶’을 가꾸려고 시골에 갑니다. 스스로 ‘내 빛’을 바라보려고 시골에 갑니다.


  말과 삶과 빛을 되찾고 제대로 바라보면서 가꾸는 동안, 시나브로 ‘밥짓기·옷짓기·집짓기’에 눈을 뜹니다. 오랫동안 도시에서 길든 몸인 터라, 도시에서 묻은 때와 먼지를 털면서 시골빛을 받아들일 몸과 마음으로 가다듬습니다.


  시골에 와서 농약이나 비료나 농기계를 쓰려 한다면, 도시에서 지내는 삶하고 똑같습니다. 시골에 와서 돈벌이를 생각하려 한다면, 도시에서 보내는 쳇바퀴하고 똑같습니다. 삶을 지을 때에 삶이 빛나고, 사랑을 지을 때에 사랑이 따뜻합니다. 꿈을 지을 때에 꿈을 이루고, 노래를 지을 때에 언제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 “내 오장육부가 춤을 추고 있어. 술을 마시고 우는 건 내 평생 처음이라고. 내가 고생해서 지은 쌀이, 이렇게 엄청난 술이 되어 돌아오다니.” (155쪽)

- “중간 작업부터 마무리 작업까지의 시간을 얼마나 줄이나. 그게 포인트란 걸 잊지 마라.” “네.” “우리 역할은 누룩과 효모에게 명령하는 게 아니다. 이 녀석들이 건강하게 활약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지.” (183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나츠코의 술》(학산문화사,2012) 열둘째 권을 읽었습니다. 이태 앞서 열둘째 권을 읽은 뒤 오래도록 곰곰이 삭힙니다. 제대로 거둔 나락은 여러 해 묵힌 뒤 심어도 씩씩하게 싹을 틔우며 자랍니다. 알뜰히 빚은 만화책이라면 여러 해 묵히면서 생각하더라도 아름다운 슬기를 베풉니다.


  가만히 따지자면, 우리가 익힐 이야기란 ‘슬기’입니다. ‘지식’이 아닌 ‘슬기’를 익힐 노릇입니다. 지식 가운데 ‘참다운 지식’을 익혀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만, 삶을 밝히려면 지식이 아닌 ‘슬기’로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똑똑히 바라보면서, 똑똑히 알고, 똑똑히 움직이며, 똑똑히 생각하고, 똑똑히 사랑하는 동안, 똑똑히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는 빛이 바로 ‘슬기’입니다.


  시골에서 논밭을 일구는 ‘지식’을 배울 일이 아닙니다. 논밭이 아닌 흙과 숲과 들을 사랑하는 ‘슬기’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느껴서 받아들일 일입니다. 만화책 《나츠코의 술》 열두 권을 돌아보면, 열두 권 가운데 열한 권은 ‘시골에서 흙을 어떻게 만져야 아름다운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열두 권 가운데 고작 한 권에서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해님과 같은 술을 빚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정한 거라면. 그럼에도 사에키의 가업을 잇겠다 하는 거라면, 나는.” “아버지, 전 이제 24살이 됐어요. 앞으로는 오빠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도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 술을 빚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191쪽)



  목숨을 다스리는 술 한 방울입니다. 목숨을 보살피는 밥 한 그릇입니다. 목숨을 살찌우는 말 한 마디입니다. 목숨을 북돋우는 웃음 한 자락입니다. 목숨을 일깨우는 눈빛 한 줄기입니다. 목숨을 바라보는 사랑 한 타래입니다.


  만화책 《나츠코의 술》에 나오는 나츠코는 열둘째 권을 마무르는 자리에서 스물네 살이 됩니다. 더없이 꽃다운 나이라 할 만하면서, 비로소 피어나는 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둘에 열둘을 더한 스물넷이라는 나이는 스스로 삶을 가꾸어 빛내는 나이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스물네 살은 어떤 나이일까요? 사내들은 군대에서 전쟁훈련에 시달리는 나이인가요? 가시내들은 아직 대학생이거나 취업 후보생으로 보내는 나이인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스물네 살을 맞이할 적에 아이들 스스로 어떤 삶을 꽃피우도록 어떤 슬기를 물려주는가요?


  천천히 동이 틉니다. 멧새와 들새는 일찌감치 들과 숲을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찾습니다. 새끼를 까서 다 키운 어미는 ‘다 자란 새끼 새’와 함께 즐겁게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을 가릅니다. 언제나 아름답게 새로운 하루를 맞이합니다. 4347.7.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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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이야기 2
타니카와 후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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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57



가장 좋아하는 이름

― 솔로 이야기 2

 타니카와 후미코 글·그림

 김진수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2.9.15.



  둘레에서 만나는 수많은 여느 어른들은 아이들을 처음 만날 적에 으레 나이를 묻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것은 묻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이를 묻습니다. 아이한테 궁금한 대목이란 나이 한 가지인 줄 여깁니다.


  둘레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여느 사람들은 어른과 어른 사이에 만날 적에도 으레 나이를 묻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것은 잘 안 묻습니다. 그냥 나이를 묻습니다. 나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내가 나이가 위라 하면, 내가 나이값을 잘 해야 할까요. 내가 나이가 밑이라 하면, 이녁이 나이값을 잘 해야 할까요. 나이란 무엇일까요. 이번 삶에서 누리는 나이가 내 참 나이라 할 만할까요, 아니면 먼먼 옛날부터 살아온 내 나이가 참 나이라 할 만할까요.


  아이한테든 어른한테든 나이를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름을 물으면 넉넉합니다. 이름조차 안 물어도 됩니다. 서로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가만히 느끼면서, 서로 무엇을 사랑하면서 삶을 누리려 하는지 천천히 헤아리면 넉넉합니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20년 간 모태솔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깜짝 놀라며 날 위해서 미팅에 데려가 주곤 하지만, 사실 나는 미팅에 나오는 남자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100% 주정뱅이이고, 나는 주정뱅이가 싫기 때문입니다.’ (6∼7쪽)

- “어머,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네 용돈은 엄마랑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번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야. 그런데 그걸 직접 받으러 오는 게 귀찮아?” (12쪽)






  둘레에서 스치는 수많은 풀과 나무 가운데 ‘이름을 아는’ 풀과 나무가 있으나, ‘이름을 모르는’ 풀과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아는’ 풀과 나무란,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입니다. 내가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어느 풀이나 꽃이나 열매가 우리 몸에 어떻게 좋은가 하는 대목을 안다고 할 적에도, 다른 사람이 알아내거나 살펴본 대목일 뿐입니다. 나 스스로 먹고 마시고 누리면서 온몸으로 알아내거나 살펴본 대목이 아닙니다.


  맨 처음 꽃한테 ‘꽃’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맨 처음 ‘민들레’나 ‘쑥’이나 ‘벼’ 같은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들은 왜 이런 이름을 그대로 따라서 쓸까요.


  그런데, ‘민들레’는 서울말이나 민들레이지, 고장마다 이름이 다릅니다. 고을과 마을에서도 이름이 다릅니다. 요즈음은 신문과 방송과 책과 인터넷과 학교 때문에 모두 똑같은 이름을 쓰고 말지만, 고작 백 해 앞서만 하더라도, 또는 쉰 해 앞서만 하더라도 고장과 고을과 마을마다 다 다르게 붙인 이름을 썼습니다.



- “술 이름이 뭐가 어때서! 마스미는, 마스미는,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다. 제일 좋아하는 것의 이름을 제일 소중한 딸한테 붙여 주는 게 뭐가 나빠!” (18쪽)



  지난달에 아이들과 골짝마실을 하면서 ‘하늘말나리’라는 멧꽃을 처음 보았습니다. 아주 곱게 피어난 꽃을 바라보면서 이름이 궁금했는데, 학자나 남이 붙인 이름이 궁금하다기보다, 내 마음속으로 이 꽃한테 어떤 이름을 붙일 만한지 궁금했습니다.


  이름을 잘 생각해 보셔요. 우리는 감을 굳이 ‘감’이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름을 얼마든지 새롭게 붙이면 됩니다. 남들이 못 알아듣는다구요? 왜 남들을 생각하나요? 나를 생각해야지요. 남들이 못 알아듣는다면, 남들은 ‘내 말’을 배워야 합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말을 배워야 하고, 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말을 배워야 하듯이, 남들은 ‘내 말’을 배워야 하고 나는 ‘남들 말’을 배워야 할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사귀려 한다면, 서로를 제대로 배우고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울릉도 호박엿’이라 말하지만, 이는 아주 엉터리 이름입니다. 울릉섬에서 퍼진 엿은 ‘호박엿’이 아니라 ‘후박엿’입니다. 후박나무 껍질과 열매로 고은 엿이기에 ‘후박엿’인데, 후박나무를 뭍사람이 거의 모르다 보니, 이름을 엉뚱하게 붙였고, 엉뚱한 이름이 오늘날에도 아직 널리 퍼진 채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후박엿’이 올바른 이름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호박엿’이라는 잘못된 이름을 씁니다. 잘못된 이름을 쓰면서 잘못인 줄조차 느끼지 않을 뿐더러, 아예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잘못 쓰면서 길들고 퍼진 이름이나 말이란 무엇일까요? 올바른 이름은 묻히거나 알려지지 못하는데, 참다운 이름이나 말이란 무엇일까요?




- ‘완전하게 혼자가 되어야지. 내가 바란 것은 나 자신. 그날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혼자가 되어야 해. 다시 한 번 완전히 혼자가 되어야 해.’ (38쪽)

- ‘정말 바보 같은 여자. 너 같은 녀석은 평생 혼자 살아야 해. 평생 정신 차리지 말고, 착해빠져서 남자 보는 눈도 형편없는 상태로 울기만 하며 살아가렴. 언제든지 내가 너에게 달려갈 수 있게. 바보는 나야. 사랑해.’ (67∼70쪽)



  타니카와 후미코 님 만화책 《솔로 이야기》(대원씨아이,2012) 둘째 권을 읽습니다. 첫째 권에 이어 살가우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찬찬히 흐릅니다. 나는 이 만화책을 책상맡에 이태나 그대로 둔 채 지냈습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아버지 만화책에 다섯 살 적에 빨간 볼펜으로 곳곳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큰아이는 여섯 살로 접어든 뒤에 아버지 책에 그림을 더 안 그리고, 일곱 살로 넘어선 뒤에는 제가 아버지 책에 그림을 신나게 그린 줄 까맣게 모릅니다. 알려주어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만화책 《솔로 이야기》 둘째 권에서 ‘이름’과 얽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주 아끼는 딸아이한테 주정뱅이 아버지가 ‘술에 붙은 이름’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주 좋아하면서 늘 마시는 술에 붙은 이름이 더없이 사랑스럽다고 느껴, 이 이름을 이녁한테 아주 알뜰한 딸아이한테 붙였다고 해요.




- ‘미안해요. 인정할게요. 난 도쿄로 상경한 후 계속 쓸쓸했습니다. 너무너무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84쪽)

- “물론 결혼도 전업주부도 동경하고 있지만, 난 우ㅜ카타가 좋아. 지금은 그 마음을 소중하게 아끼고 싶어.” (96쪽)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술에 붙은 그 이름은 처음부터 ‘술 이름’이었을까요? 그 이름이 술이 아닌 꽃한테 붙었다면? 나무한테 붙었다면? 구름이나 해나 무지개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면? 이때에 우리는 무엇을 느낄까요? 술에 붙은 이름이니 영 마뜩찮을까요? 이를테면, ‘참이슬’ 같은 이름은 어떠한가요? 그냥 술이름일 뿐일까요? ‘새누리’ 같은 이름은 어떠한가요? 그냥 정당 이름일 뿐일까요?


  ‘참이슬’은 술에 붙는 이름이기 앞서 적잖은 사람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넋을 가꾸려고 쓰던 이름입니다. ‘새누리’ 또한 정당에서 이 이름을 쓰기 앞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사랑스러운 얼을 일구려고 쓰던 이름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가장 살가우면서 애틋하게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갑니다. 이름을 부르는 까닭은, 다 다른 넋을 다 다르다고 느끼면서 다 같은 숨결로 사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빛을 언제나 이루고 싶기에 이름 몇 글자를 지어서 함께 부릅니다.


  풀벌레가 노래하는 여름 밤에 아이들한테 틈틈이 부채질을 해 줍니다. 밤 열 시에서 열한 시로 넘어가면 부채질은 그칩니다. 시골집에서는 밤 열한 시부터는 선선합니다. 바야흐로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찰 때이니, 배와 가슴에는 이불을 잘 여미어 주면서 새벽까지 새근새근 즐겁게 자야겠습니다. 4347.7.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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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연가 2
아소우 미코토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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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55



여기 있고 싶어

― 골목길 연가 2

 아소우 미코토 글·그림

 최윤정 옮김

 시리얼 펴냄, 2011.12.25.



  곁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가운데 ‘우는 아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겪은 일이라 하셨는데, 아이가 우는데 그 아이 어머니 되는 사람이 아이를 달래지 못하더랍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아이를 그 아이 어머니 되는 사람은 가만히 두기만 했다는데, 보다 못해서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 보라고 하셨대요. 그런데 아이를 낳아 키우는 그 어머니는 ‘아이를 안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지요.


  어쩜 참말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러나, 참말 그럴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를 안은 적 없는 어머니가 틀림없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은 적 없는 아버지도 틀림없이 있겠지요.


  나도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아이를 안은 적 없는’ 아버지도 만났고, ‘아이한테 말 한 마디조차 안 건네는’ 아버지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들이 마음씨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더욱이 교육을 못 받거나 생각이 얕은 사람도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을 뿐 아니라, 교육도 높이 많이 받은 사내인데, 아버지 자리에서는 그야말로 ‘아버지 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 “여자에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쓸데없이 친절한 남자. 딱 질색이야.” (27쪽)

- “흔치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정작 본인은 그걸 자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가시로 위협하면서, 혼자 서 보려 아둥바둥.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페어플레이 하려는 그 모습이 남녀관계와 상관없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내가 함께 서로 의지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39∼40쪽)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길이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 되기’를 ‘아이한테 곁을 안 줄 뿐 아니라, 아이 돌보기는 오직 어머니한테 맡기면 되는 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되기’란 ‘집 바깥으로 나가 돈만 잘 벌면 되는 줄’ 생각할 수 있겠지요.


  집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야 아버지가 되는 줄 여기는 사내가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사람은 ‘때 되면 밥을 차려’ 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사내가 있습니다. 밤일을 바라면 몸을 대 주어야 어머니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줄 여기는 사내가 있습니다. 어머니 자리에 있으려면 집 바깥으로 나다닐 엄두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내가 오늘날에도 제법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서로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가꾸어 아이와 함께 슬기로운 빛으로 거듭나는 사랑스러운 숨결인 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 사내와 가시내가 무척 많습니다.



- ‘사츠키 씨, 잘 됐다. 만나러 와 줬구나. 아마 저 사람, 그 말을 하러 온 걸 거야. 정말 다행이야. 저 사람, 사츠키 씨를 포기하지 않았어.’ (61쪽)

- “프랑스 같이 가자. 저금 빼 쓰며 생활하는 거면 여기나 몽마르트르나 마찬가지잖아? 불어라면 내가 가르쳐 줄게. 몽마르트르든 교토든 이 골목길이든 다 마찬가지야. 난 ‘여기(네 가슴)’ 있고  싶거든.” (70∼71쪽)




  학교에서 어버이 노릇을 가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학교는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집에서 아버지 구실와 어머니 구실을 가르치는 일이 드뭅니다. 집에서는 학교와 학원을 보내느라 바쁩니다. 마을에서 아버지 몫과 어머니 몫을 보여주는 일이 드뭅니다. 마을은 온통 가게투성이입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흐르는 사회 얼거리만 있을 뿐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어버이 노릇이나 어머니 구실이나 아버지 몫을 제대로 겪지 못합니다. 새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사회 얼거리에 길들 뿐입니다. 새로 태어나 자라면서 지구별을 새롭게 가꿀 아이들은 마음속에 사랑과 꿈을 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소모품처럼 다루어집니다. 이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마땅합니다. 게다가 사회도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문학도, 아이들한테 빛을 보여주지 못하곤 합니다. 입시지옥이 아니면 놀음놀이입니다. 놀음놀이조차 술과 담배와 살곶이뿐입니다. 삶을 밝히는 노래가 없는 사회이고, 삶을 가꾸는 이야기가 없는 교육이며, 삶을 빛내는 꿈이 없는 정치입니다.



- “제자로 받아만 주신다면 가게 따위 내팽개치고 당장 달려갈 거예요. 난 뭐든 닥치는 대로 만드는 소품점 주인이 아니라, 전문가가 되고 싶거든요.” (82쪽)

- “그런데 스승님이 별로라는 게 잘 팔리니 희한하죠?” “못 만들었다고는 안 했어. 너무 공을 들여 재미가 없다는 거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든.” (88∼89쪽)




  아소우 미코토 님이 빚은 만화책 《골목길 연가》(시리얼,2011) 둘째 권을 읽습니다. 첫째 권에 나오는 사람들이 둘째 권에도 나오는데, 아주 뜻깊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골목길을 떠나 프랑스로 갑니다. ‘여기 있고 싶다’는 말 한 마디입니다.



-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쓸 수밖에. 이젠 만드는 곳이 거의 없거든. 그 쇠꼭지도, 풀도, 주머니로 쓰는 일본 종이도, 감즙도, 자수 장인이 쓰는 바늘도, 업자가 손으로 꼽을 정도밖엔 남지 않았어. 유젠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일본의 문화니까.” (101쪽)

- “고무풀은 제가 직접 만들게요. 그렇게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괜한 걱정이에요. 마음 놓고, 전부 저한테 넘겨주세요.” (103쪽)



  삶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늘 바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아이들 눈을 들여다봐요. 오늘 여기에서 아이들 손을 잡아요. 오늘 여기에서 아이들을 살포시 안아요.


  함께 즐겁게 놀아요. 함께 즐겁게 노래해요. 함께 즐겁게 웃어요. 함께 즐겁게 밥을 먹고, 길을 걸으며, 자전거를 달려요. 함께 숲길을 헤치고, 함께 바닷가에 서며, 함께 이야기꽃을 피워요. 아이들이 살아야 지구별이 사는데, 아이들이 제대로 살아서 숨쉴 수 있을 때에 우리 어른들도 제대로 살아서 숨쉴 수 있습니다. 4347.7.2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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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코 4
쿄우 마치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54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어

― 미카코 4

 쿄우 마치코 글·그림

 한나리 옮김

 미우 펴냄, 2012.1.15.



  보름 넘게 이어지던 비가 드디어 그칩니다. 비가 그치자마자 해가 살짝 고개를 내밉니다. 이러다가 구름 사이로 해가 다시 숨어드는데, 비가 그치니 잠자리가 온 하늘을 채웁니다. 비가 그치기를 참말 오랫동안 기다렸겠다고 느낍니다.


  보름 넘게 비가 내리고 또 내리니 온 집이 축축합니다. 우리 집 옆밭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는 기나긴 비에 해롱거리기까지 합니다. 아직 나무가 어린 탓에 모진 비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구나 싶습니다. 지난해에는 달포 남짓 빗줄기가 듣지 않아 가문 날씨에 애를 먹었는데, 올해에는 지난해와 사뭇 다른 여름입니다.


  비가 없이 땡볕만 내리쬐어도 고단하지만, 비만 줄줄 퍼붓기만 해도 고달픕니다. 지구별은 해와 비와 바람이 골고루 어우러질 때에 아름답습니다. 해나 비나 바람 가운데 한 가지만 드세게 찾아오면 몹시 힘들면서 팍팍합니다.



- “손. 잡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13쪽)

- ‘나오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미도리카와가 금세 나를 앞지를 것이다.’ (18쪽)






  한국 정부는 곧 ‘쌀 수입 완전 자유’를 한다고 밝힙니다. 스무 해 앞서 미리 밝힌 일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 시골은 여러 가지 곡식이나 열매를 키우더라도 쌀농사가 가장 큰데, 그나마 시골사람 삶을 온통 무너뜨리는 정책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펼친 정책을 살피면, 예나 이제나 시골사람을 생각하는 정책은 한 가지조차 없었습니다. 경제개발 가운데 시골사람을 헤아린 정책은 없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오랜 시골빛을 짓밟는 정책이었습니다. 현대문명이나 산업사회 또한 시골마을을 흔들어 도시를 키우는 흐름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학교교육은 시골을 더 빨리 무너뜨리기만 합니다. 한국에 있는 학교 가운데 시골아이가 시골에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온통 도시바라기로 나아가는 교육뿐입니다.


  인문책 가운데 시골살이를 밝히는 지식이 있을까요? 인문학을 말하는 지식인 가운데 스스로 시골에서 조용히 살면서 ‘아름다운 지식’을 들려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도시에만 머물지 않고 시골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소식과 이야기를 알리는 신문이나 방송은 얼마나 있는가요?


  직업교육을 보면, 100% 도시 직업을 알려주는 교육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그저 ‘도시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거나 가르칩니다.



- “오랜만에 이불을 널었거든. 맡아 봐. 해님 냄새!” ‘미안해. 사실은 카토가 아니라 (안아 주는 사람이)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5∼36쪽)

- “미도리카와는 어느 쪽이 예뻐 보여?”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전혀 다르잖아! 꽃과 폼폼인걸!” …… “역시 안 할래! 둘 다 갖고 싶은 건, 둘 다 필요없다는 걸 거야!” (50쪽)





  고들빼기와 부추와 젓가락나물 잎을 뜯어 아침을 차립니다. 호박과 양파와 감자를 끓여 호박감자국을 올립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구우면서 가지를 두껍게 썰어서 함께 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아침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마루에서 놀다가 방에서 놉니다. 마당에서 우산을 쓰며 놀기도 하다가 피아노를 친다든지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피리를 붑니다. 아이들은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손에 쥐어도 놀듯이 종이를 넘깁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책을 읽을 적에는 시험점수를 따져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배우더라도 시험경쟁을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삶을 밝힐 만한 지식을 얻을 때에 즐겁습니다. 동무를 아끼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한식구와 오순도순 살림을 가꾸는 빛을 배울 수 있어야 비로소 교육입니다.


  사랑을 담아 차린 밥을 먹는 하루입니다. 사랑을 실어 부르는 노래를 함께 듣는 하루입니다. 사랑스레 가꾸거나 돌보는 숲에서 푸른 바람을 마시는 하루입니다. 사랑스레 짓는 논밭에서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루입니다.



- “인상파 같은 건 관심 없어. 예술일지도 모르지만 아트는 아냐.” “그럼 미도리카와는 뭐가 좋아?” “팀폼이나 코스모라운지. 그리고 …….” (61쪽)

- ‘돈도 있고, 탈것도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빨간 구두는 땅에 붙어 있었다.’ (74쪽)





  쿄우 마치코 님 만화책 《미카코》(미우 펴냄,2012) 넷째 권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물빛그림이 맑은 만화책 《미카코》 넷째 권에서는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은 아이들 마음이 흐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어디로든 날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날개는 둘레에서 꺾기도 하고, 스스로 꺾기도 합니다. 스스로 날아오르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머뭇거립니다. 스스로 망설이다가 스스로 제풀을 꺾으면서 쳇쳇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아이들은 왜 스스로 생각한 대로 훨훨 날아가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왜 스스로 생각하는 마음을 곱게 펼치지 못할까요.


  남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 그대로 풀면 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남 눈치를 보면서 ‘너를 사랑해’ 하고 말할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 주기를 바라면, 이러한 바람을 스스럼없이 말하면 됩니다. 괜히 마음에만 담다가 오래도록 힘들게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대학입시 때문에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아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그리면 됩니다.


  바라봅니다. 느낍니다. 생각합니다. 움직입니다. 노래합니다. 춤을 추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1년에 한 번 오는 카드. 항상 조금 앞을 비추어 준다.’ (124쪽)

- “미도리카와는 잘 그리는데 담백해서 문제야. 수험 점수가 동점이었을 때 의지가 부족하다고 떨어질 것 같다고 할까. 콘크리트 블록을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게 되면 알고 싶어질 거고! 알고 싶어지면 상상해! 여기에 부딪히면 아프겠다라든지.” (134쪽)



  하늘을 나는 아이들이 귀엽습니다. 하늘을 나는 어른들이 사랑스럽습니다. 하늘을 날며 노래하는 아이들이 어여쁩니다. 하늘을 날며 춤추는 어른들이 멋스럽습니다.


  다른 데를 보지 말아요. 내 마음을 보아요. 다른 데에 눈길을 빼앗기지 말고, 내 마음에 온 눈길을 모아 내 길을 씩씩하게 걸어요. 우리는 모두 이 삶을 저마다 가장 기쁘게 누릴 푸른 숨결입니다. 4347.7.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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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여자회 방황 1
츠바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53



내 동무는 누구인가

― 제7여자회 방황 1

 츠바나 글·그림

 박계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3.5.30.



  예전에는 동무를 마을에서 사귀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느 누구도 동무를 학교에서 사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데, 학교가 선 지는 이제 백 해를 겨우 넘어요. 아이들은 언제나 마을에서 동무를 만나 즐겁게 놀았습니다. 어른들은 늘 마을에서 이웃을 만나 즐겁게 일했습니다. 마을지기이면서 마을동무이고 마을이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 비로소 동무를 사귑니다. 때로는 학교에서 동무를 사귀지 못해, 학원에서 동무를 사귑니다. 때로는 학교나 학원에서 동무를 못 사귀는데, 이때에는 인터넷에서 동무를 사귑니다.


  아이들이 동무를 사귀는 곳은 아이들이 노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함께 놀면서 동무가 됩니다. 동무라고 할 적에는 함께 놀 수 있는 사이입니다.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놀 수 있기에 동무입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사이가 될 때에 동무예요.



- “딴죽 걸 부분은 많지만 오히려 이제 언급하고 싶지 않네.” “우리 같은 소시민은 고작해야 핵 셀터를 사는 일 정도밖에 못하니까.” “못 사!” “하긴, 뭔지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는 많으니 일일이 다 상관할 수는 없어.” “정말 그래. 평생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가야지!” (22쪽)

- “조만간 성별도 이름도 개인정보라고 해서 비밀 취급 될 것 같아.” “응.” “그리고 마지막에는 개인지 인간인지도 모를 세계가 찾아오는 거야!” (27쪽)




  학교가 없던 지난날에는 마을이 배움터이고, 집이 배움터입니다. 아이들은 집과 마을에서 일을 익힙니다. 따로 학교를 가야 일을 익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배울 일이란, 삶을 짓는 일이에요. 집짓기와 밥짓기와 옷짓기를 할 줄 알아야 일입니다. 집과 밥과 옷을 스스로 지을 때에 비로소 삶을 짓습니다.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학교는 집짓기와 밥짓기와 옷짓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는 돈벌기 하나만 가르칩니다. 돈을 벌어서 집과 밥과 옷을 돈으로 장만하는 길을 알려주는 학교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땀을 안 흘리고 돈만 벌도록 알려주는 데가 학교라고도 할 만합니다. 참말 그렇거든요. 학교를 길게 다니면 다닐수록 ‘돈벌기’와 가깝다고 합니다. 학교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회사나 공공기관에서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학교를 오래 다니면 돈은 잘 벌면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짓는 길과 더욱 멀어집니다. 돈을 많이 쌓아서 밥과 옷과 집을 장만하기에는 수월할는지 모르지만, 남이 밥과 옷과 집을 장만해야 돈을 치러 살 수 있어요. 남이 밥과 옷과 집을 장만하지 않는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것도 못합니다.



- “매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사후 디지털 천국에서 재생하는 모양이야.” “이런 일을 해도 하느님한테 혼나지 않을까?” “글쎄? 뭐, 최종적으로는 현실 세계에서 ‘인공 신체’가 만들어지는 것을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그무렵에는 이미 지구 인구보다 많을지도 몰라. 자, 그럼, 수속도 끝났으니 다음은 츠보이 찾기네.” “어디 있는지 알아?” “맡겨 두시라. 죽은 사람에게는 거의 사생활 같은 건 없어.” (49쪽)

- “왠지, 나는 부모님 마음대로 살려두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가짜 천국에서 급히 부활해 버려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아직 전혀 모르겠어. 이건 정말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건가? 싶어서.” (52쪽)





  돈만 벌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학교 얼거리요 사회 틀거리입니다. 아이들이 돈만 벌면 집이든 돈이든 옷이든, 게다가 동무와 이웃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는 듯이 외치는 학교요 사회입니다. 영화나 문학을 보면, 돈으로 사랑까지 살 수 있는 듯이 떠벌입니다.


  참말 그럴까요? 참말 돈으로 사랑이나 꿈이나 믿음까지 살 수 있을까요? 참말 돈으로 믿음을 살 수 있기에 예배당은 자꾸 커질까요? 참말 돈으로 꿈을 살 수 있으니, 정부는 경제개발만 끝없이 외치는가요?


  아이들은 서로 놀이동무가 되어야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놀면서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길을 온몸으로 배울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은 다른 데에서 싹트지 않습니다. 함께 놀고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땀흘리는 사이에 천천히 싹트는 사랑입니다. 제대로 놀지 못한 채 나이만 먹는 아이들은 사랑을 모릅니다. 즐겁게 놀지 못한 채 입시지옥에서 허덕이다가 대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사랑을 모릅니다. 이런 아이들은 살섞기만 알아요. 사랑으로 새로운 아이를 낳는 빛을 몰라요.



- “모처럼 친구가 되었으니까 같이 집에 가자.” “미안. 잠깐만 기다려!” “친구라고 해도, 무늬만이야. 이런 건.” “응?” “왜냐하면 친구는 맞선 같은 거랑은 다르잖아?” (93쪽)

- “아무래도 시간이 된 모양이다. 아저씨도 가련다.” “가, 가다니, 어디로?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쪽의 우주야. 뭐, 이 멋진 기회를 혼자 독점하는 것도 아까우니. 만약 너도 따분하다면.” (123쪽)




  츠바나 님 만화책 《제7여자회 방황》(대원씨아이,2013) 첫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고등학교 아이들 모습은 오늘날 모습은 아닙니다. 얼추 쉰 해나 백 해쯤 지난 뒤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도 과학문명만 앞세워 달음박질을 칠 때에 드러날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만화이기에 만화처럼(?) 말한다고 할 텐데, 먼 앞날 학교에서는 ‘동무 사귀기’가 ‘성적표 점수’에 들어갑니다. 학교에서는 억지로 짝짓기하듯이 ‘동무짓기’를 합니다. 동무하고 어떻게 지내느냐를 늘 지켜보는(감시) 눈길이 있고, 동무하고 제대로 지내지 못하면, 그러니까 ‘사회에서 바라는 동무 사귀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낙제 점수’를 받습니다.


  너무 마땅한 일인지 모르나, 만화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학교에서 아이들이 뛰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뛰놀 겨를이 없습니다. 줄넘기나 공차기 따위를 빼고, 아이들이 참답게 놀이를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노나요? 동네에서 아이들이 노나요?


  아이들은 놀이터가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빈터가 없습니다. 마땅한 빈터는 모조리 주차장이 되거나 가게가 됩니다. 쓸 만한 빈터는 어른들이 쓰레기를 마구 갖다 버려서 지저분합니다.



- “이건 좋은 걸 샀는데!” “나는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들어.” “그래? 왓핫핫.” “나도 웃자. 왓핫핫.” “어? 지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없어도 웃을 수 있다니까!” (123쪽)



  아이들한테 동무는 누구인가요. 어른들한테 이웃은 누구인가요. 아이들이 동무 없이 학교만 다녀도 될까요. 아이들이 또래 동무를 사귀려면 반드시 학교에만 가야 하나요. 아이들은 왜 마을에서 또래나 동무를 사귀면서 즐겁게 뛰놀 수 없는가요. 어른들은 왜 아이들이 못 뛰놀도록 가로막기만 하나요.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집어넣기만 하면서 닦달하나요. 어른들은 왜 아이들한테 집집기와 밥짓기와 옷짓기 같은 삶짓기를 물려줄 생각을 안 하나요. 아니, 어른들은 왜 스스로 집과 밥과 옷을 스스로 지어서 누리려는 생각조차 안 하나요.


  아이들이 그저 학교에만 가야 하는 사회는, 동무도 이웃도 없는 메마른 사회입니다. 아이들이 온통 학교에만 갇혀야 하는 사회는, 동무도 이웃도 없이 차디찬 사회입니다. 4347.7.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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