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 - 전세계 최고 인기 커뮤니티, 셔터 시스터스가 공개하는 사진 비법
셔터 시스터스 지음, 윤영삼.김성순 옮김 / 이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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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책 읽기 345



빛나는 사진보다 수수한 사진이 아름다워

―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

 셔터 시스터스 엮음

 윤영삼·김성순 옮김

 이봄 펴냄, 2012.7.27. 2만 원



  사진을 안 찍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이야기하거나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은 퍽 드물지 싶어요. 예전에 필름으로만 사진을 찍던 무렵에는 기계나 필름을 다룬다든지 암실을 쓰는 길을 하나하나 배워야 비로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어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디지털로 사진을 널리 찍으면서 ‘기계를 잘 몰라’도 사진을 찍고, 필름이나 암실이 없어도 사진을 찍어요. 포토샵으로 사진을 만지기도 하지만, 포토샵은 하나도 모르더라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습니다. 더욱이 사진기 아닌 손전화 기계 하나로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고, 태블릿으로도 사진을 찍어요. 여기에 동영상까지 홀가분하게 찍을 수 있고요.



우리가 있는 곳,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풍경과 환경이 바뀐 훗날에도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13쪽)


나는 이 사진을 소중히 역긴다. 아주 힘든 시기의 내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모습. 눈 아래 다크서클, 무기력한 시선, 거친 세파에 시달린 연약한 영혼. 쾡한 눈 뒤에 고인 눈물바다를 본다. (27쪽)



  셔터 시스터스가 엮은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봄,2012)은 ‘사진을 좋아할 뿐 아니라, 사진을 제법 전문으로 찍는 여성’들이 저마다 어떤 사진을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진이 넘친다고도 할 수 있으나, 어느 모로 보면 누구나 손쉽고 즐겁게 사진을 누리거나 나눌 수 있는 오늘날 흐름에 발맞추어 ‘전문으로 사진을 하지 않는 사람들’한테 ‘사진 찍기를 어려워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 ‘조금 더 재미나고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사진을 즐기는 길’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짚으려 해요.



인물사진을 통해 우리가 줄 수 있는 선물은 사진 속 인물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생명력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29쪽)


빛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 빛을 좇아야 한다. 부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든, 겨울날 오후 해가 지면서 길게 늘어뜨린 마지막 햇살이든 말이다. 멋진 이야기는 눈부신 불꽃이나 섬광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조용하고 음산하고 졸리운 풍경도 독특한 후처리를 통해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52쪽)



  사진은 빛을 담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빛그림’이라는 말을 지어서 쓰기도 해요. 빛으로 그리는 이야기요, 빛으로 그리는 마음이며, 빛으로 그리는 사랑이기에, ‘빛그림’이라는 말은 ‘사진’하고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어요.


  그런데 사진은 “눈부신 빛”이나 “아름다운 빛”만 좇지 않습니다. 사진은 “슬픈 빛”이나 “어두운 빛”도 좇아요. 환한 빛뿐 아니라 흐린 빛도 좇고, 고운 빛뿐 아니라 투박한 빛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작품’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작품을 멋지게 뽐내려고 사진을 찍지 않아요.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짓는 삶을 즐겁게 한 장 남겨서 두고두고 오붓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기에 사진을 찍어요.



집이라고 부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삶을 포착하고 싶다면, 정리를 한 다음에 사진을 찍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바닥이 더럽든 테이블 위가 어수선하든 우리 삶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잡기 전에 먼저 청소를 하려고 뜸을 들이는 동안 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날악가버릴 것이다. (63쪽)


완벽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찍는다면 이런 사진 한두 장으로 나름 진솔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17쪽)



  셔터 시스터스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는 분들은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라는 책에서 내내 이 대목을 짚습니다. ‘완벽한 작품’을 찍으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 이야기’를 찍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남 흉내를 내거나 이름난 전문가 꽁무니를 좇지 말자고 말합니다. 집안이 좀 어질러진들 대수롭지 않다고, 아이랑 함께 지내는 오늘 하루를 환한 웃음으로 바라보면서 사진 한 장 찍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좀 어질러진 집안 모습’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그 모습을 사진으로 돌아보면 꽤 재미난 옛이야기(추억)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즐겁게 찍을 사진이란 ‘잘 찍을 사진’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사진은 잘 찍기보다는 참말로 ‘즐겁게 찍으면’ 된다는 뜻이에요. 남한테 보여주려는 사진이 아니라, 바로 내가 즐기는 사진이고, 바로 우리 식구나 동무나 이웃이 두고두고 건사하면서 누리는 사진이라는 뜻이에요.


  이야기를 담기에 사진이 됩니다. 이야기를 바라보기에 사진을 찍어요. 이야기를 주고받으려고 사진을 읽어요. 내 이야기는 너한테 스며들고, 네 이야기는 나한테 찾아들어요. ‘빛나는 사진’이 아니라 ‘수수한 사진’ 한 장으로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갈무리하고 사랑스럽게 남길 수 있습니다. 2016.12.3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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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안 풍경 그후 - 아! 공중만리
강재훈 지음 / 눈빛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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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43



골목사진가 김기찬 님을 그리는 골목노래

― 골목안 풍경 그후, 아! 공중만리

 강재훈 사진

 눈빛 펴냄, 2016.9.10. 3만 원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 님은 《골목안 풍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을 모두 여섯 권 선보였습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만 사진으로 담지 않았습니다만, 《역전 풍경》이라든지 《잃어버린 풍경》이라든지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 같은 사진책도 내놓았습니다만, 이녁 사진길은 “골목안 풍경”으로 갈무리해 볼 수 있습니다.


  사진가 김기찬 님은 골목길을 거닐면서 골목마을에서 골목사람을 이웃으로 만납니다. 처음에는 이웃이요, 이내 동무가 되고, 시나브로 한마을 사람이 되어요. 처음에는 사진기를 쥐고 마실을 다니던 이웃이자 동무였다면, 어느덧 ‘골목사람’이 되고 ‘골목사진가’로 거듭나요.


  그저 사진만 찍는 매무새가 아니라, 그저 기록만 하는 몸짓이 아니라, 그저 구경꾼이나 손님이나 나그네가 되는 발걸음이 아니라, 그저 먼발치에서 넘겨다보는 눈짓이 아니라, 그저 남남으로 여기는 눈길이 아니라, 온몸하고 온마음으로 다가서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진찍기가 되기에, 김기찬 님이 빚은 《골목안 풍경》은 사람들 가슴을 따사로이 보듬는 너그러운 숨결이 이야기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진 한 장이 될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2016년 9월, 사진책 《골목안 풍경 그후, 아! 공중만리》(눈빛 펴냄)가 나옵니다. “골목안 풍경”이라는 이름을 나란히 붙인 이 사진책은 김기찬 님이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김기찬 님이 지난날 거닐던 골목을 오늘날 새로운 마음으로 거닐어 본 한겨레신문 사진기자 강재훈 님이 찍은 사진을 담습니다.


  한겨레신문 사진기자인 강재훈 님은 집하고 일터 사이를 오가던 길(출퇴근 길)에 골목길을 거닐어 보았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그 길을 굳이 안 걸었다 하며, 지난날에는 일터로 오가는 길에 따로 골목길을 거닐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어느 날 문득 “좁고 가늘고 구불구불한 길”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안쓰러워했던 사진가 김기찬”이 떠올라서, 이녁 발길이 머물던 골목길을 걸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아현동·공덕동·중림동·만리동, 이렇게 네 군데 골목길을 거닐면서 집하고 일터 사이를 오갔다고 합니다.



굳이 행정구역으로 나누자니 나눠진 동네지만 결국은 길 건너 이웃이고 한동네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 이곳이 최근 몇 년 새 재개발에 밀려 옛 모습을 잃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변해 가고 있다. 그 공간을 나는 ‘아! 공중만리’라 이름 붙이고 마지막 남은 골목 풍경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작가 말/175쪽)



  사진가 김기찬 님이 골목길을 거닐던 무렵에도 골목마을은 한창 재개발로 들썩였습니다.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 모두 서울시뿐 아니라 다른 지자체에서도 툭하면 골목마을을 밀어내어 아파트로 우지끈 뚝딱 바꾸는 건설정책만 마련하기 일쑤였어요. 1971년에 ‘광주대단지 사건’이 있기도 했고, 전국체전을 벌이면서 골목마을을 가리켜 ‘외관상 바깥손님한테 보여주기 나쁘다’는 핑계로 하루아침에 쓸어내기(철거하기)도 했어요. 1980년대에 들어선 뒤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곳곳에서 끔찍한 ‘마을 쓸어내기(골목마을 철거)’를 밀어붙였지요.


  철거바람이 한창 불어도 골목마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골목마을에서 조용하면서 조촐하게 살림을 지었어요. 사진가 김기찬 님은 바로 이 대목을 눈여겨보았다고 느껴요. 작고 수수하지만, 바로 이 작고 수수한 살림에서 이웃이 서로 아끼면서 보듬는 모습을 눈여겨보았고, 이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겼어요.


  김기찬 님이 흙으로 돌아간 2005년 뒤부터 2016년까지 헤아리면 예전보다 더 빠르고 크게 ‘마을 쓸어내기’가 불거집니다. 이와 맞물려 ‘마을 살리기’도 조금씩 일어나요. 그리고 예전에는 낮고 수수하며 조용하던 골목마을에 골목집 말고 높다란 빌라가 부쩍 많이 생겼어요. 작은 골목집을 건사하며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던 늙은 할매하고 할배가 돌아가시면, 이 작은 골목집은 으레 헐리면서 빌라로 바뀌어요. 빌라가 골목마을에 늘면서 햇볕이 가려지는 집이 늘어나요. 햇볕이 가려지는 집은 어느새 헐리고 다시 빌라로 서면서, 빌라랑 빌라 사이에는 아무것도 들어서지 못하는 차가운 바람만 불곤 합니다.


  바야흐로 골목집에서 빌라로 바뀌는 골목마을은 지난날하고 사뭇 다릅니다. 마을이 통째로 밀려서 사라진 뒤 아파트가 들어서도 골목마을은 바뀌는데, 빌라에다가 자동차가 늘면서 골목빛이 무척 달라져요. 그러나 빌라랑 자동차로 골목 모습이 바뀌어도 골목마을에 사는 사람은 그대로입니다. 예전보다 ‘햇볕 한 줌 나누기’가 만만하지 않은 ‘빌라+자동차 마을’로 바뀌어도 그 작은 햇볕 한 줌을 헤아리면서 바지랑대를 세우거나 빨랫대를 놓거나 빨랫줄을 잇습니다. 헌 스티로폼에 흙을 담는 꽃그릇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요, 빌라 옥상은 빨랫줄로 춤추거나 옥상텃밭으로 바뀌곤 해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빨랫줄을 높이 치켜세운 바지랑대가 반갑다. 대문간이나 집 앞에 내놓은 건조대에 내건 빨래도 있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펼쳐진 빨래도 있다. 볕에 달궈진 콘크리트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그 위에 식구들의 속옷과 양말 등을 펼쳐 너는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작가 말/178쪽)



  사진기자 강재훈 님이 일곱 해 동안 조금씩 거닐며 지켜본 골목마을 이야기가 사진책 《골목안 풍경 그후, 아! 공중만리》(눈빛,2016)에 살며시 깃듭니다. 지난날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안 모습하고 함께 맞대고 살피자면, 지난날에는 골목마다 어른도 아이도 넘실거렸지만, 오늘날에는 어른도 아이도 크게 줄면서 자동차랑 오토바이가 부쩍 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골목마을 한켠에 아직 평상이 있지만, 지난날처럼 골목 곳곳에 돗자리를 깔고 오순도순 살림을 짓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듯이,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골목마을을 떠나 아파트로 가느라 골목마을이 쓸쓸해 보일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아이들 웃음소리를 찾아보기 어렵듯이 골목마을에서도 아이들 노랫소리를 만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 강재훈 님은 출퇴근 길이라는 짧은 마실길에서도 바지런히 아이들 꽁무니를 좇고 어른들 손길을 살핍니다. 오토바이하고 자동차한테 차츰 빼앗기고 마는 골목길에서 사람들 살림살이를 느껴 보려고 합니다. 다만 조금 더 깊고 넓게 스며들지는 못했구나 싶어요. 지난날 김기찬 님은 골목길만 거닐지 않고, 마당에도 들어서는 이웃이 되었고, 골목집 대청마루에 앉아서 골목사람하고 동무가 되어 이야기꽃을 펼쳤으며, 마을 한쪽에서 자그맣게 피어나는 잔치판에까지 한몫 끼었습니다만, 사진기자 강재훈 님은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며 골목을 오간 터라 이와 같은 ‘속속들이 파고드는 이웃 발걸음’까지는 못했지 싶어요. 출퇴근길에 들른 골목이고, 취재를 가느라 바빠서 얼마 머물 수 없던 골목이었을 테니까요.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 뒤에는 이 골목마을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요? 작고 수수한 마을살림이 앞으로도 곱고 살가이 흐를 수 있을까요? 바뀌는 모습인 골목이든 한결같은 모습인 골목이든, 우리는 이 골목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려나요? 하루아침에 허물리면서 사라지기에 바쁘게 ‘기록’을 해 두어야 할까요? 옛 기억이나 추억을 아로새기려는 뜻으로 기록을 잘 해 두면 한결 값어치가 있거나 뜻이 있을까요? 기록을 한다면 무엇을 기록할 만할까요? 낡은 집? 헐린 집? 빈 집? 스프레이로 뿌린 시뻘건 글씨? 새로 올라온 아파트? 아니면 오늘도 골목에서 정갈하면서 수수하게 짓는 살림살이? 골목집하고 골목길을 이쁘게 가꾸는 골목사람 손길? 우리는 ‘기록’을 해야 할까요,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한 가지를 더 묻자면, 우리는 ‘골목사람 눈길’로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가요? ‘아파트 주민이 골목마을로 마실을 오는 눈길’로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가요? 이 골목이 헐리면 다른 골목으로 옮겨서 살아갈 ‘골목사람 마음’으로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가요? ‘이 골목이 헐리면 다른 골목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을 아파트 주민 마음’으로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가요?


  골목집은 손질하고 고치고 다듬으면서 쉰 해뿐 아니라 일흔 해도 백 해도 거뜬히 버텨요. 아파트는 서른 해만 지나도 재개발을 해야 한다고 들썩여요. 오래된 골목마을이 오래가는 마을살림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다면, 비록 오늘날 이런저런 재개발 정책만 불거진다고 하더라도, 골목마을 사람들 스스로 그 고운 삶터를 고이 지킬 만하리라 느껴요. 어쩌면 앞으로는 한결 따사로우며 살가운 ‘골목꽃 이야기’가 피어날 수 있어요.


  사진책 《골목안 풍경 그후, 아! 공중만리》는 골목길을 거닐면서 이야기 한 자락을 찾으려 했다는 대목에서 반갑습니다. 그러나 골목길을 너무 바삐 거닐었다는 느낌이 짙어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여름에는 새벽 다섯 시에도 골목이 복닥거리고, 저녁 일곱 시가 넘어도 골목이 환해요.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이러한 흐름을 골목 한켠에서 고요히 누려 본다면, “골목안 풍경”을 바라보는 손길이나 눈길이나 발길이나 마음길이나 사랑길은 한결 느긋하면서 너그럽고 넉넉한데다가 즐거울 만하리라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돼요. 기록하지 말고 사진을 찍으면 돼요. 기록도 사진도 없이 그냥 나긋나긋 거닐어도 돼요.


  사진가 김기찬 님은 “골목안 풍경”을 ‘다큐멘터리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어요. 김기찬 님이 한 일은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라 ‘이웃 이야기’나 ‘동무 이야기’나 ‘우리 이야기’를 사진으로 들려주려는 눈빛 밝히기였다고 느껴요. 사진기자 강재훈 님도 어깨에서 힘을 좀 빼고서 ‘우리 이야기’로 느낄 골목을 바라보려 했다면, “골목안 풍경 그 후”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도 스스로 “골목마실”을 새로운 이름으로 붙이면서 즐기는 나날과 사진을 이룰 만하리라 생각해요. 부디 앞으로도 골목길에서 이웃을 만나면서 스스로 골목사람이 되는 마실을 이어가시기를 빕니다. 2016.12.7.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넋)


* 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보내 주어 고맙게 붙일 수 있었습니다 *







* 이 밑에 붙이는 사진은 김기찬 님 사진책하고

  강재훈 사진기자님 사진책을 맞대어 놓고

  사진으로 담아서 함께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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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눈빛사진가선 32
정성태 지음 / 눈빛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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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42



우리는 왜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겼’을까?

― 체르노빌

 정성태 사진

 눈빛 펴냄, 2016.9.6. 12000원



  1986년 4월 26일에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가 터졌습니다. 그무렵 저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데 학교나 마을이나 집에서 핵발전소 이야기를 딱히 못 들었다고 떠오릅니다. 이제는 우크라이나이지만 예전에는 소련이라는 이름이었고,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은 웬만하면 가로막히던 때예요.


  그무렵 어른들한테서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지니, 비가 오면 꼭 우산을 쓰라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습니다. 요즈음은 도시에서 가만히 비를 맞고 노는 아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테고, 어른들도 비를 쫄딱 맞으면서 마실을 다니지 않으리라 느끼는데, 지난날에는 아이도 어른도 으레 비를 맞곤 했어요. 아이들은 비를 맞으며 놀기를 즐기고, 어른들은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쓸쓸함에 젖는달까요. 예전에는 굳이 우산을 챙기지 않았어요. 비가 안 오면 좋고, 와도 안 나쁘다는 생각이었어요.


  정성태 님이 빚은 사진책 《체르노빌》(눈빛,2016)을 읽는데, 책머리를 보면 사진가 정성태 님이 어릴 적에 겪은 ‘비 맞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성태 님은 어릴 적에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먼지” 때문에 비를 맞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요. 저는 이런 말까지는 못 듣고 그저 ‘산성비’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무렵 어른들은 참말을 제대로 털어놓지 않은 셈이지 싶어요. ‘먼지비’도 ‘산성비’도 아닌 ‘방사능비’라고 하는 참말을 털어놓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어른들은 우리가 비를 맞지 못하도록 했다.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먼지가 빗물에 섞여 내린다는 게 이유였다. 그 후로 나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다녔고, 비를 맞지 않았다. 천구백팔십육년 사월 무렵이었다. (사진가 노트/3쪽)



  저는 몇 해 앞서 《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2014)라는 책을 읽다가, 이 책에서도 체르노빌이랑 한국하고 얽힌 이야기를 하나 보았습니다. 1986년에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가 터진 뒤, 유럽마다 목장에서 우유에 방사능이 어마어마하게 나와서 유럽에서는 목장마다 우유를 그냥 다 버려야 했다는데, ‘방사능 우유’를 아무 데나 버릴 수도 없어서 골머리를 앓았대요. 그즈음 유럽 여러 나라는 ‘방사능 우유’를 ‘분유’로 바꾸었고, 분유로 바꾼 ‘방사능 우유’를 아주 싼 값에 한국으로 많이 수출했대요.


  스리마일(드리마일)은 미국이고, 체르노빌은 소련(우크라이나)이고, 후쿠시마는 일본입니다. 무섭게 터지고 만 핵발전소가 있던 세 나라는 지구에서 손꼽히는 힘센 나라입니다. 과학기술도 세 나라가 지구에서 손꼽힐 만큼 앞서지요. 세 나라에서는 핵발전소가 터지리라는 생각을 안 했을는지 몰라요. 세 나라에서 살던 여느 사람들은 제 나라 핵발전소가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다고 여겼을는지 몰라요. 그러나 세 나라 핵발전소는 터졌고, 그 뒤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며, 이 아픔하고 생채기는 아직 가실 줄 몰라요.


  한국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한국은 안 달라질까요? 한국에서까지 핵발전소가 터져야 비로소 이 나라가 달라질까요?


  사진책 《체르노빌》은 1986년에서 서른 해가 지난 오늘날 그 나라 그 마을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모습을 조용히 짚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설 수는 없되, 살몃살몃 다가가서 조용히 지켜보고 조용히 물어보며 조용히 듣습니다. 방사능 바람이 부는 그 쓸쓸한 터에도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새삼스레 바라보고 새삼스레 느끼며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터진 뒤 소련은 시멘트로 이 발전소를 덮었다는데, 서른 해가 지난 요즈음 ‘시멘트 돔’이 낡아서 무쇠로 다시 돔을 덮으려 한다고 해요. 사진책 《체르노빌》을 보면 쓸쓸한 마을에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는 모습이랑 나란히 아주 커다란 ‘무쇠 돔’이 보여요. 유럽부흥개발은행에서 자그마치 1조 8842억 원이나 들여서 지은 무쇠 돔이라고 합니다. 높이는 108미터이고 길이는 162미터인데다가 무게는 36000톤이나 된대요.


  이쯤에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지 싶습니다. 핵발전소 하나를 짓는 데에 돈을 얼마나 들였을까요? 핵발전소 하나가 터지고 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아프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나가야’ 했을까요? 서른 해가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2조 원에 이르는 무쇠 돔을 만들어서 새로 덮으려 하며 그야말로 얼마나 많은 돈을 바쳐야 하나요?


  돈만 따질 노릇이 아닙니다만, 돈 한 가지만 보더라도 ‘핵발전소에 들일 돈’으로 ‘100퍼센트 깨끗한 전기’를 작은 마을과 큰 도시 모두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투자에 썼다면, 어느 누구도 걱정할 일이 없으리라 느껴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예요. 커다란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는 그만 지을 노릇이고, 마을과 여느 작은 살림집에서 조그맣게 자급자족하는 전기로 바꿀 노릇이라고 느껴요.


  사진책 《체르노빌》은 이런 얘기까지 대놓고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사진책 《체르노빌》에 깃든 모습과 속내와 사람들과 마을 흐름을 살피다 보면, 이 작고 수수하며 예쁜 살림을 지으려는 참으로 작고 수수하며 예쁜 사람들이 바라는 삶이란 ‘따스한 사랑’이로구나 싶습니다. 눈이 오면 마당을 쓸고, 손님이 오면 반가이 맞이하고, 집 안팎을 곱게 가꾸고, 아기자기한 살림으로 아이를 낳아 돌보다가 늘그막을 고요히 아늑히 즐거이 누리는 길을 걷고 싶은, 작고 수수하며 예쁜 사람들은 큰 것을 바라지 않아요.


  사람 발자국을 찾아볼 길이 없는 ‘버려진 집과 건물과 마을’을 담은 사진을 바라봅니다. 이 사진을 보면 풀하고 나무는 참으로 씩씩하게 자랍니다. 머잖아 풀하고 나무는 ‘방사능 찌꺼기’를 모조리 덮을 만하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몇 조 원을 들여서 시멘트를 붓고 무쇠로 덮으려 하는데, 풀하고 나무는 그저 스스로 돋고 자라면서 방사능을 걸러 주고 푸른 바람을 새로 내뿜어 줍니다.


  어쩌면 풀하고 나무야말로 더없이 멋진 기운(에너지)이로구나 싶습니다. 풀하고 나무는 해마다 꾸준히 자라요. 예부터 사람들은 풀을 먹고 나무를 때면서 살았어요. 풀 열매는 곡식이 되고, 나무는 땔감뿐 아니라 집을 짓는 기둥도 되어요. 나무로 책걸상을 짜고, 나무로 종이하고 연필을 빚어요. 그리고 이 푸나무는 햇볕하고 빗물하고 바람을 먹으며 자라지요. 100퍼센트 깨끗한 기운(에너지)을 받아서 크고, 100퍼센트 깨끗한 기운을 사람한테 주는 얼거리라고 할까요.


  체르노빌 때문에 아파야 했던 사람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체르노빌 때문에 아플 사람이 많으리라 봅니다. 한국하고 이웃한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때문에 아파야 한 사람이 많고, 앞으로도 후쿠시마 때문에 아플 사람이 많을 테지요.


  한국에서는 앞으로 어떤 삶과 살림이 태어날까 하고 돌아봅니다. 한국에서도 아파야 할 사람이 나오고야 말는지, 이제 한국에서만큼은 아픔을 끝낼 만한 사회 얼거리가 될 만한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하루를 짓는 몸짓인지, 또 우리는 아이들한테 어떤 터전과 마을을 물려주려는 몸짓인지, 사진책 《체르노빌》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새롭게 되새깁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우산을 안 챙기’고도 ‘맑고 싱그러운 빗물’을 혀로 낼름낼름 받아먹을 수 있는 날을 그려 봅니다. 2016.11.18.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 글에 붙인 사진은 눈빛출판사에 말씀을 여쭈어 고맙게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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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보름쯤 앞서 사진책 <꿀젖잠>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글을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보내 보았고,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는 글을 크게 고쳐쓰기를 바라서

인터넷서점에 올린 글하고는 아주 다르다 싶은

새로운 글을 써서 기사로 보냈어요.


새로 쓴 글은 인터넷서점 서평에 따로 더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이 글이 네이버에서 오늘(2016.10.12.)

첫화면(메인) '책-문화' 자리에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무척 고마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알아봐 주어서 고마운 눈길이라고 해야 할까요.

작은 사진가 한 사람이 내민 손길을

우리 작은 이웃님들이 즐거이 알아보아 주시면서

너그러이 사랑해 주시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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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젖 잠 - 돼지가 우리를 본다, 박찬원 사진책
박찬원 지음 / 고려원북스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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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41



아기 돼지를 안으니 따뜻해, 이 숨결을 사진으로 찍지

― 꿀젖잠

 박찬원 사진·글

 고려원북스 펴냄, 2016.6.23. 12000원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시골은 들마다 누런 물결이 일렁입니다. 봄에는 빈논에 유채꽃이 피어나면서 샛노란 물결이요, 가을에는 무논에 나락이 굵으면서 샛노란 물결이에요. 사람들이 흔히 먹는 쌀밥은 겨하고 씨눈을 많이 깎아 하얀 빛깔로 보이지만, 막상 들에서 맺는 나락이라는 열매는 샛노랗습니다. 이 샛노란 열매를 거두어 햇볕에 말리면 차츰 누르스름한 빛깔로 바뀌지요. 겨만 살짝 벗긴 누런쌀(현미)로 밥을 지으면 누런 기운이 뱁니다.


  시골에서 살지 않는다면 ‘쌀알’, 그러니까 ‘벼 열매’가 ‘샛노란 빛’에서 ‘누르스름한 빛’으로 달라지는 결을 알기 어렵습니다. 가게에서 파는 하얀 쌀알만 본다면 ‘벼 열매’ 빛깔이 무엇인지 잘못 알 수 있어요.


  봄에 맨 먼저 심은 나락은 맨 먼저 벱니다. 봄에 심은 대로 논마다 벼를 베는 기계가 들어가서 한두 시간 즈음이면 논배미 하나를 말끔히 거둡니다. 요새는 낫으로 벼를 베는 곳이 거의 없어요. 다들 기계를 부려요.


  기계를 부리면 기계는 바로 낟알까지 훑어서 자루에 담으니 일손을 크게 덜 수 있습니다. 또 기계는 볏짚도 손쉽게 묶어 주어요. 아무래도 오늘날 시골에는 젊은 일꾼이 거의 없으니 기계를 빌지 않고서야 논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시골에 어린이도 젊은이도 많던 때에는 딱히 기계를 쓰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시골에 일손이 많이 있으니 굳이 기계를 다루지 않아도 되었어요. 이러면서 아이들은 어른 곁에서 늦도록 일손을 거들면서 온몸으로 시골살이를 익혀요. 젊은이는 씩씩하게 땅을 가꾸지요. 이동안 어른들은 대견스러운 아이들한테 틈틈이 주전부리를 챙겨 줄 뿐 아니라 노래를 불러 줍니다. 이른바 ‘일노래’인데, 어른들이 부르는 일노래는 고된 일을 쉬는 구실도 하지만, 시골일을 거드는 아이들한테 삶을 배우도록 북돋우는 구실도 해요. 아이들은 어른들 곁에서 일손을 거들거나 놀면서 아이들끼리 노래를 불러요. 바로 ‘놀이노래’입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이나 책이나 영화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어도 시골사람은 스스로 놀이를 짓고 노래를 지으면서 삶을 지었어요.


  오늘날 시골에서는 온통 기계가 논밭을 휩쓸어요. 시골에 어린이도 젊은이도 없기 때문이지만, 논밭에 기계만 드나들면서 예전 같은 일노래는 싹 자취를 감추어요. 아이들은 어른들 곁에서 일이나 살림을 배우지 못하고, 오랜 옛날부터 입과 몸으로 물려주던 노래와 놀이와 잔치도 차츰 잊힙니다. 이러면서 시골 어린이와 젊은이는 도시로 떠나고 시골은 그야말로 고요하거나 쓸쓸하게 바뀝니다.



잠은 꿈입니다. 꿈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전생과 현생, 내생을 훨훨 날아 다닙니다. 잠은 혼과 백이 대화하며 운명을 이끌어 주는 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숨 젖 잠’으로 보면 생명을 보는 시간과 공간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생만이 아니라 전생, 내생을 이어 삶을 보게 됩니다. (36쪽)



  박찬원 님이 두 권째 선보이는 사진책 《꿀젖잠》(고려원북스,2016)을 읽으면서 어쩐지 ‘시골살림하고 어린이’가 떠오릅니다. 사진책 《꿀젖잠》을 읽는 내내 자꾸자꾸 ‘노래하고 놀이가 사라진 시골’이 떠오르고, 노래하고 놀이는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시골일에 기계만 쓰이면서 예전처럼 일노래나 놀이노래가 흐르던 흠벅진 잔치마당도 함께 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도시에서도 다들 저마다 바쁘게 일은 하지만 신나는 놀이마당이나 잔치마당으로 어깨동무하는 일은 거의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박찬원 님 사진책 《꿀젖잠》은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를 찍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진책을 보는 동안 시골마을 가을들이 떠올라요. 오직 기계만 드나드는 논이 떠올라요. 들에서도 마을에서도 자취를 감추는 아이들이 떠올라요. 시골은 시골대로 시골스러움이 사라지는 모습이 이 사진책에서 자꾸 떠오르고, 도시는 도시대로 도시스러움이 무엇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어느 날 어미젖을 가만히 보니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새끼들이 빠는 힘이 의외로 강합니다. 새끼 이빨에 찢겨져나간 젖도 있었어요. 젖은 희생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38쪽)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지난날에 돼지는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었어요. 요즈음처럼 ‘공장식 축산’이나 ‘대규모 축산’으로 돼지를 키우지 않았어요. 소도 돼지도 닭도 모두 예전에는 ‘집집마다 알맞게 키우면서 한식구’로 지냈어요. 예전에는 모든 짐승한테 이름이 있었지요. 사람하고 똑같은 한식구였으니까요. 이러면서도 고기를 먹어야 할 적에는 ‘한식구 목숨을 앗아야’ 하니 괴로운 노릇이었다 했고, 차마 ‘우리 집 고기’를 먹기 어려울 적에는 이웃집한테 주고, ‘이웃집 고기’를 받아서 먹었다고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집에서 알맞게 소나 돼지나 닭을 기르는 집이 아주 크게 줄었어요. 도시에서는 전화만 걸든 가게로 찾아가든 아주 손쉽게 소고기도 돼지고기도 닭고기도 값싸게 먹어요. ‘오래도록 한식구로 살던 짐승’을 손수 잡아야 하는 슬픔이나 아픔을 느낄 새 없이 고깃살을 입에 넣기 바쁘지요.



저는 종교는 갖고 있지 않았는데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가 모르는 제3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사람이나 돼지 같은 동물은 물론 나무, 풀 같은 식물이나 염전, 소금, 바위 같은 무생물도 신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돼지 사진을 찍고 있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돼지를 통해서 보고 있고 듣고 있는 것이지요. (40쪽)



  일흔 살이 넘는 사진가 박찬원 님(1944년에 태어남)은 《꿀젖잠》이라는 사진책을 내놓고 사진전시를 열려고 ‘돼지하고 백 날 동안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스치듯이 구경하는 돼지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돼지우리에서 돼지하고 함께 뒹굴고 뒤엉키다가 문득 한 장씩 찍었다고 해요.


  박찬원 님은 일흔 살이 넘어 돼지를 사진으로 찍기 앞서까지는 돼지를 ‘쉽게 먹는 고기’로만 여기는 마음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처음으로 돼지하고 ‘함께 뒹굴며 사는’ 나날이 되면서 비로소 돼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뜰 수 있었다고 해요. 돼지하고 눈을 맞추면서, 돼지하고 돼지우리에서 함께 낮잠도 자고 함께 놀기도 하면서, 어린 돼지를 품에 안아 보기도 하고, 다 해지고 만 어미 돼지 젖을 바라보면서, 이 새로운 삶과 살림을 마주하는 눈으로 돼지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가슴으로 뭉클하게 올라왔다고 해요.


  돼지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가 모르는 제3의 세계”를 돼지우리에서 느낀다고 하는 말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참말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다른 누리’가 있겠지요. ‘귀로 듣지 못하는 누리’라든지 ‘입으로 먹어 보지 못하는 다른 누리’도 있을 테고요. 그러니까 ‘마음으로만 느끼거나 알 수 있는 다른 누리’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태어난 지 이틀 된 아기 돼지를 손에 안았다. 따뜻하다. 기분 좋은 따스함이다. 살며시 돼지 볼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잘 부탁해’ (76쪽/작업 일기 2015.8.17.)



  꿀이란 무엇이고, 젖이란 무엇이며, 잠이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할아버지 사진가 박찬원 님은 돼지우리에서 돼지하고 벗님으로 지내는 동안 ‘꿀 젖 잠’ 또는 ‘숨 젖 잠’ 세 마디가 떠오르면서 늘 마음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삶을 이루는 꿀이요 젖이요 잠이며, 살림에 바탕이 되는 숨이요 젖이며 잠이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돼지는 생각이 있을까? 배고프고 춥고 아픈 동물적 욕구 말고 다른 생각이 있을까? 새끼가 발에 밟혀 비명을 지르는데도 꼼짝도 않는다. 새끼들이 젖 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모로 누워 한쪽 젖만 내놓고 있다. 그런데 저 표정은 뭐지? (80쪽/작업 일기 2015.10.19.)



  사진책 《꿀젖잠》을 덮고서 아이들을 이끌고 들마실을 나옵니다. 대문 밖으로 마을논이 있습니다. 아이들하고 걷는 길은 가을들입니다. 비바람에 쓰러진 나락은 마을 할배가 짚으로 엮어서 세웠습니다. 논둑 한쪽에 꽃무릇이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개구리가 폴짝 뛰고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잠자리가 날고 나비가 춤을 춥니다. 이제 제비는 더 보이지 않습니다. 제비는 벌써 바다 건너 따스한 고장으로 날아갔겠지요. 참새가 무리지어 논을 덮다가 우리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전깃줄로 올라갑니다. 물까치 여럿이 날고, 박새 한 마리가 논도랑에 내려앉아 물을 쫍니다. 고들빼기가 논둑에서 꽃을 피우고, 도깨비바늘도 꽃을 피우려고 애를 씁니다.


  이 모두를 돌아보다가 잘 익은 나락이 고개 숙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요즈음 논에서 자라는 나락은 키가 매우 작습니다. 요즈음 나락은 볏짚이 얼마 안 나와요. 지난날 나락은 키가 크고 볏짚도 굵었지만, 오늘날 나락은 품종을 바꾸어 키가 작고 볏짚도 가늘어요.


  우리는 오늘날 시골논에서 새로운 눈길로 이 논빛이나 나락이나 농기계나 시멘트나 논도랑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냥 샛노란 들판으로만 바라볼 만할까요, 아니면 이 가을논에서 새롭게 눈을 뜨면서 삶과 살림을 새삼스레 바라보아 깨닫는 넋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돼지우리에서 돼지하고 뒹굴면서 돼지를 사진으로 찍다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돌아볼 수 있었다고 하는 박찬원 님입니다. 그냥그냥 옆에 있다고 여긴다면, 그냥그냥 지나친다면, 그냥그냥 아무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돼지한테서든 가을들한테서든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느끼며 못 배우리라 봅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다가서서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려는 몸짓일 때에 비로소 새로운 이야기를 스스로 깨달으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쓸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아기 돼지를 안으며 따뜻함을 느껴 사진을 찍는 마음에 흐르는 숨결을 고이 헤아립니다.


  따뜻함을 느끼기에 사진을 찍고, 따뜻함을 느낀 마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따뜻함을 나누려고 사진을 찍고, 따뜻한 삶을 이야기하려고 사진을 찍어요. 따뜻한 사랑이 되고자 하며 사진을 찍고, 따뜻하게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짓는 꿈을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2016.9.3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사진넋)


* 이 글에 붙이는 사진은 박찬원 님한테서 고맙게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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