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왜 바다일까? 동심원 18
이장근 지음, 권태향 그림 / 푸른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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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2



바다를 알고 싶으면

― 바다는 왜 바다일까?

 이장근 글

 권태향 그림

 푸른책들 펴냄, 2011.6.20.



  시골에서 살며 하늘과 땅을 늘 마주합니다. 시골이니까요. 밤에는 새까만 하늘을 초롱초롱 밝히는 별을 그득 안습니다. 시골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왜 ‘초롱초롱’이나 ‘반짝반짝’이라는 말마디로 별빛을 가리키는지 곧장 알아챕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만하고, 책으로 읽지 않아도 깨닫습니다.


  민물은 답니다. 바닷물은 짭니다. 졸졸 흐르는 냇물이나 퐁퐁 솟는 샘물을 두 손으로 떠서 마시면 이내 알아차립니다. 냇물이 왜 ‘졸졸’ 흐르고, 샘물이 왜 ‘퐁퐁’ 솟는지는, 스스로 냇물과 샘물을 마주하면 환하게 깨닫습니다. 영화나 영상이나 책으로 배워야 알지 않습니다. 몸소 마주하면 남이 안 가르쳐도 곧바로 배웁니다.


  바닷물은 왜 짤까요? 궁금하면 바다에 가요. 궁금하면 바닷물을 두 손으로 퍼서 입으로 마시고 혀로 맛을 봐요. 그러면 다 알 수 있어요. 머리를 굴리지 말고, 몸을 써요. 지식으로 헤아리지 말고 삶으로 마주하면서 생각을 기울여요.



.. 내가 벤치에 앉아 / 땀을 식히는 오 분 동안 / 개미 열 마리가 지나갔고 ..  (오 분 동안)



  이장근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바다는 왜 바다일까?》(푸른책들,2011)를 읽습니다. 이장근 님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슬기롭게 문학을 가르치고 싶어 이렇게 동시를 쓰기도 하고 청소년시를 쓰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머리를 많이 쓰면서 알록달록 이쁘장한 말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를 읽으면 번뜩이는 재미와 아기자기한 손맛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신나게 되읽을 만합니다. 안쓰러운 여느 학부모 모습이라든지, 답답한 학교 얼거리를 이 동시집에서 낱낱이 돌아보면서, 씩씩하게 기운을 낼 수 있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 숙제 다 할 때까지 / 방에서 나오지 마라 / 쾅! / 방문이 닫혔다 ..  (방에 갇힌 날)



  그런데,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에 흐르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참말 아이들이 누리는 삶일까요? 참말 아이들이 사랑할 삶일까요? 참말 아이들이 앞으로 꿈을 꾸면서 새롭게 지을 삶일까요? 학교교육이 생긴 뒤부터 이 나라 학교에 얄궂게 드리우는 그늘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말놀이는 아닌지 궁금합니다.


  어버이 아닌 학부모는 아이를 방에 가둡니다. 어버이 아닌 학부모이기 때문에 아이를 학교와 학원에 집어넣습니다. 어버이 아닌 학부모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집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오직 학교와 학원에 가야 ‘배웁’니다. 그런데, 학교와 학원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오직 시험문제만 배우지요. 아이들은 삶을 못 배우고 사랑을 못 배웁니다. 아이들은 꿈을 못 배우고 이야기를 못 배웁니다.



.. 우리 가족 그림을 그렸다 / 늦게 들어오는 아빠는 / 그림자를 길게 그렸고 / 공부만 시키려고 하는 엄마는 / 눈을 쭉 찢어지게 그렸다 /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나는 / 축구공을 빵! 차는 모습으로 그렸다 ..  (잘 그렸네)



  아이들은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빠져듭니다. 어버이 아닌 학부모인 탓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집에서 아이들한테 삶이나 사랑이나 꿈이나 이야기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안 가르치거든요. 어버이 아닌 학부모는 아이한테 어느 것도 제대로 안 보여주거든요.


  아이들은 ‘꿈’이 아닌 ‘직업’만 마주합니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나 가수나 연예인만 마주합니다. 아이들은 꿈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하루 빨리 ‘갇힌 집’과 ‘갇힌 학교’에서 벗어나 ‘돈 많이 벌’어서 ‘나 혼자 멋대로 아무것이든 다 하는 직업인’이 될 생각만 합니다.



.. 칙칙 / 압력 밥솥이 달린다 / 폭폭 / 쌀을 가득 싣고 / 어디로 갈까 ..  (압력 밥솥의 여행)



  집에서 아무것도 못하는데, 학교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시험문제 말고는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치는데,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도 학교 문제와 집 문제를 찬찬히 건드립니다. 그러나, 건드릴 뿐입니다. 제대로 짚지 못합니다. 제대로 짚을 겨를이 없을 수 있고, 무엇을 건드려야 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은 어떻게 태어날까요? 압력 밥솥이 나오고 칙칙폭폭 기찻길 나들이 이야기가 나오지만, 정작 쌀 한 톨이 나오기까지 어떤 길을 거치는가 하는 이야기는 이 동시집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 대목을 글쓴이부터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건드릴 수조차 없는지 모릅니다. 글쓴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한계)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틀에서 이 동시를 쓸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바다는 왜 바다일까요? 바다가 궁금하면 바다에 가야 합니다. 책상맡에서 머리를 굴리지 말고, 온몸으로 바다를 껴안으면서 마음속으로 느낀 뒤 생각을 지어야 합니다. 바다를 눈앞에서 마주하지 않으면서, 바다를 두 손과 온몸으로 껴안지 않으면서, 어찌 바다가 왜 바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어요.


  별을 보지 않고 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볍씨를 땅에 심지 않고서 벼가 자라는 흐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무를 네 철 내내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겨울눈과 봄꽃과 여름잎과 가랑잎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 이상한 일이지 / 벽에 / 정민♡희진 / 요렇게 쓰여 있을 뿐인데 ..  (얼레리 꼴리리와 ♡)



  동시는 머리로 쓸 수 없습니다. 동시는 온몸으로 씁니다. 온몸으로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즐기고 누려서 가꾸는 온삶으로 쓰는 동시입니다. 아이들은 동시를 온몸으로 읽습니다. 아이들은 머릿속으로만 동시를 읽지 않아요. 아이들은 모든 것을 쪽쪽 빨아먹습니다. 어른들이 쓰는 예쁜 말과 거친 말을 아이들은 통째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이 거친 말을 쓰는 까닭은, 가까이에서는 어버이가 거친 말을 쓰고, 둘레에서는 다른 어른들 모두 거친 말을 쓰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만 켜도 알지요. 연속극이고 우스개이고 연예인 뒷이야기이고 영화이고 뭐고 온통 거친 말입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어떤 말을 쓰나요? 학교에서 모든 교사가 모든 아이들 앞에서 예쁘면서 사랑스러운 말을 쓰나요?


  온삶으로 부대끼면서 온넋으로 삭히지 않는다면 동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시는 말재주 부리기가 아니라, 온삶을 녹여서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는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동시는 글잣수 맞추기로 말장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야기를 담지 않기에 자꾸 글잣수 맞추는 말장난이 되고 마는 동시입니다. 이야기를 담을 온삶을 부대끼지 않으니, 자꾸 머릿속으로 뚝딱뚝딱 짜맞춘 재주놀이가 되고 마는 동시입니다.


  아무쪼록, 이장근 님 다음 동시집에서는 이녁 삶과 아이 삶을 한결 깊고 넓게 바라보면서 사랑이 어린 즐겁고 따사로운 이야기가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삶을 짓고, 지식이 아닌 생각으로 사랑과 꿈을 밝히는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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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아 푸른도서관 40
안오일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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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1



아이들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란다

― 그래도 괜찮아

 안오일 글

 푸른책들 펴냄, 2010.11.25.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밉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으레 이불을 뻥뻥 차면서 뒹구르르 구르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기저귀를 가느라 밤잠을 못 이루고, 조금 큰 뒤에는 밤오줌갈이를 하느라 밤잠을 못 이루며, 제법 큰 요즈음은 이불깃 여미느라 밤잠을 못 이룹니다. 작은아이가 열 살은 넘어서야 비로소 밤잠을 느긋하게 누릴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집에 찾아온 아이들은 모두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 태어났고, 사랑을 받으면서 살며, 사랑을 오롯이 돌려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마음껏 뛰놀고 어지르면서 즐겁습니다. 신나게 달리거나 구르면서 기쁩니다. 배불리 먹고 목청껏 노래하면서 신납니다.


  할 수 없는 놀이는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곱게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이룹니다. 자전거놀이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인형놀이를 하든 평상놀이를 하든 흙놀이를 하든 꽃놀이를 하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들을 살핍니다. 나무 열매를 함께 따고 들풀을 함께 뜯습니다. 서로 아끼면서 돕는 삶을 날마다 짓습니다.



.. 미술 숙제가 아버지 발 그려오기다 // 술 마시고 곯아떨어진 / 아버지의 발을 그렸다 // 처음으로 아버지의 발을 자세히 봤다 ..  (아버지의 발)



  아이들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어른이 된 사람도 누구나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어른이 되었기에 더 안 자라도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었으니 회사에 나가 돈만 벌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거쳐서 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서 삶을 배우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할 일은 ‘아이한테 사랑으로 삶을 가르치기’입니다. 어버이 누구나 할 일이란 ‘아이를 사랑으로 바라보며 삶을 물려주기’입니다.



.. 빈 화분에 / 꽃씨를 심고 물을 주었다 // 아기 손톱 같은 싹이 나왔다 // 예쁘게 웃어 주었다 ..  (꽃씨와 나)



  대학교에 보내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돈만 버는 기계로 키우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손자나 손녀를 보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먼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 아이를 왜 낳으려 하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은 뒤 이 아이와 어떻게 살아갈 마음인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 아이와 함께 ‘어버이 스스로 어떻게 삶을 지어 가꾸겠노라’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학교가 아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 아이를 도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어버이 곁에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아이 곁에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 / 오랜만에 걸었다 / 차로만 다녀서일까 / 늘 지나던 길이었는데도 / 없다가 생긴 것처럼 낯선 것들이 많았다 ..  (걸어야겠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그저 ‘입시 지옥 구렁텅이’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든 아이를 사랑으로 낳았을 텐데, 정작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지 않고 ‘입시 지식’만 쑤셔넣으려 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배우도록 북돋우지 않고 ‘시험 공부’만 시키려 합니다.


  아이들은 ‘수험생’이 되려고 태어났나요? 아이들은 해맑은 나날을 오직 ‘시멘트 교실’에 갇혀 해도 바람도 비와 눈도 맞지 못하면서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도록 태어났나요? 아이들은 왜 대학교에 가야 하고, 아이들은 왜 교과서 지식에 갇혀야 하나요? 우리 어버이들은 왜 아이들을 끔찍한 시험지옥과 입시지옥에 몰아넣을까요?



.. 체육 시간 /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다 // 깨진 무릎을 감싸는데 / 손 하나가 다가왔다 / 싸우고 이틀 동안 말 안 하던 친구다 ..  (손)



  안오일 님이 쓴 ‘청소년시’를 그러모은 《그래도 괜찮아》(푸른책들,2010)를 읽습니다. 이 시집에 모인 시들은 거의 모두 ‘입시지옥에서 앓는 아이들을 달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오롯이 선 한 사람’이 아니라 ‘번호표를 받고 시험지옥에서 허덕이는 소모품’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을 다룹니다.


  책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시집은 푸름이를 ‘달래’거나 ‘다독이’려는 뜻으로 태어납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회가 온통 입시지옥이니 이러한 시집이 태어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입시지옥을 어찌할 길이 없으니, 입시지옥이 끝날 때까지 더 기운을 내서 버티라고 해야 할까요?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을 건져내야 하지 않나요? 입시지옥을 따순 햇볕으로 녹여 없애야 하지 않나요? 학교가 입시지옥이 아닌 ‘사랑스러운 배움터’가 되도록 슬기를 모아야 하지 않나요?



.. 언젠가는 노란 꽃을 피울 것 같다 ..  (순영이)



  동시도 청소년시도 어른시도 모두 ‘학교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빕니다. 어떤 시이든 ‘제도권 울타리’가 아닌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참말 아픕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여느 어버이 모두’입니다. 대통령이 아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판사나 의사나 변호사가 검사나 뭐 이런저런 기자나 지식인이나 학자나 교수나 교사나 이런저런 어른들이 아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느 어버이 스스로 이 입시지옥에 아이들을 내몰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느 어버이 스스로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만 잔뜩 안기기 때문입니다. 여느 어버이 스스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몰아세운 뒤 ‘삶과 사랑은 아예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시집 《그래도 괜찮아》가 아픈 푸름이를 달래려는 넋은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푸름이가 아파서 달래려고만 해서는 시도 문학도 글도 삶도 이야기도 될 수 없습니다. 푸름이가 아픈 뿌리가 무엇인지 읽어서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픈 뿌리를 뽑아서 새로운 씨앗을 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다음 시집에서는 ‘현상 건드리기’에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겉만 건드린대서 아픈 생채기를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면서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 말한들, 아픈 곳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뿌리를 알아채고,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보듬는 삶을 마주하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배우고 자라는 기쁜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청소년시가 튼튼하게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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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을 뭉개고
나기철 지음 / 문학의전당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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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8



시와 편지

― 뭉게구름을 뭉개고

 나기철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04.12.30.



  종이에 글을 적어 띄우기를 퍽 좋아합니다. 어릴 적부터 꽤 즐깁니다. 나는 혀짤배기라서 ㄹ소리를 제대로 못 내기 일쑤이고, 조금만 빨리 말해야 해도 혀가 꼬입니다. 내 말소리를 듣고 웃거나 놀림으로 삼는 이웃이나 동무가 많았어요.


  그런데 종이에 글을 쓸 때에는 아무도 웃지 않고 놀리지 않습니다. 글에는 혀짤배기 소리가 없고, ㄹ을 소리내지 못하는 일도 없습니다. 입으로 말을 할 적에는 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글로 쓸 적에는 무슨 이야기이든 모두 할 수 있습니다.



.. 그대를 만나러 / 이 드넓은 도시 / 외딴 집 / 아무리 꽁꽁 숨어 / 간다 해도 / 거기 꼭 아는 이를 / 만날 것만 같습니다 ..  (비밀)



  글맛을 본 뒤, 글이란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말은 입으로만 할 수 있지 않고 손으로도 할 수 있으니, 말솜씨가 변변하지 못한 사람한테도 길이 있습니다.


  말을 변변하게 못하더라도 밥을 맛나게 지을 수 있습니다. 말을 시원스레 못하더라도 흙을 기름지게 가꿀 수 있습니다. 말을 똑똑하게 못하더라도 즐겁게 뛰놀 수 있습니다. 말을 또렷하게 못하더라도 옷을 정갈하게 빨아서 갤 수 있습니다. 말을 힘있게 못하더라도 살림을 알뜰살뜰 여밀 수 있습니다.



.. 저는 그저 텅 빈 가을 들녘 / 바라볼 뿐입니다 ..  (먼 길)



  내가 쓰는 글은 내가 나한테 쓰는 글월과 같습니다. 말솜씨가 변변하지 못하고 혀짤배기인데다 우물쭈물거리는 나한테, 찬찬히 기운을 내라고 북돋우는 글월과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고, 글을 쓰는 동안 새삼스레 힘을 내며, 글을 쓰고 나서 즐겁게 숨을 쉬도록 이끕니다.


  누군가는 밥벌이로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문학이나 예술을 하려고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숙제와 보고서 때문에 글을 씁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삶을 지으려고 글을 씁니다. 삶을 짓는 기운을 얻으려고 글을 쓰며, 삶을 짓는 슬기를 북돋우려고 글을 씁니다.


  마음밭에 심는 씨앗 한 톨처럼, 내 수첩과 공책에 또박또박 글을 씁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빙그레 웃으면서 읽습니다. 마음속으로 소리를 내어 읽습니다. 내 입은 혀가 짧지만, 내 마음은 혀가 짧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꼬이던 소리라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는 술술 풀립니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읊고 외치고 노래하다 보면, 나중에 입으로 말을 터뜨릴 적에 냇물이 흐르듯이 부드럽게 말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 유리 깨지듯 우는 / 새소리 푸르름이 / 찰찰 넘친다 // 그래, 이 나무들 / 천 년 만 년 / 살 것 같다 ..  (겨울 비자림에서)



  나기철 님 시집 《뭉게구름을 뭉개고》(문학의전당,2004)를 읽습니다. 뭉게구름을 뭉갠다니, 하늘에서 뭉갠다는 소리일는지, 마음속에서 뭉갠다는 소리일는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시를 쓴 나기철 님한테는 뭉게구름을 뭉개려는 마음이 무척 컸으리라 느껴요. 이 마음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흐르리라 느낍니다.



.. 꽃이 서른 번은 더 피었다 졌습니다. 이제 바다 물소리 가까이 들려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즐거웠습니다. 나뭇잎 몇 번 흔들릴지 알 수 없스니다. 고맙습니다 ..  (편지)



  나기철 님은 나기철 님한테 글월을 띄웁니다. 짤막짤막 끊은 글줄에 이야기를 얹어 글월을 띄웁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고 싶어 글월을 띄웁니다. 스스로 삶을 노래하고 싶어 글월을 띄웁니다. 스스로 삶을 껴안고 싶어 글월을 띄웁니다.


  먼 옛날부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한 까닭이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바로 나한테 들려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서 나오는 모든 글은 바로 나한테 띄우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말이란, 남한테 가는 말이 아닙니다. 나한테 가는 말입니다. 오는 말도, 남한테서 오는 말이 아닙니다. 나한테서 오는 말입니다.



.. 길 가다가 문득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합니다. 누나가 어쩌면 말투하며 목소리가 꼭 그대로냐고 합니다. 누나도 꼭 그대로입니다 ..  (삼십 몇 년 후)



  글월을 적고, 글월을 읽습니다. 내가 나한테 띄우는 글월에 깃든 이야기를 새롭게 읽고, 내가 나한테서 받은 글월에 서린 이야기를 새삼스레 읽습니다. 어제 띄운 글월에는 오늘 살아갈 숨결이 흐릅니다. 오늘 띄운 글월에는 모레 살아갈 숨결이 흐릅니다.


  뭉게구름이 피어납니다. 양털구름이 피어납니다. 새털구름도, 닭털구름도, 토끼털구름도 피어납니다.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도 피어나고, 새빨간 구름과 샛노란 구름도 피어납니다. 이슥한 밤이 지나 새벽이 다가오면 시퍼런 구름까지 피어나요. 한밤에는 달빛에 어린 어룽어룽 하얀 구름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는 저 먼 누리에서 피어나는 미리내가 구름처럼 번집니다. 수많은 별이 깊고 너른 누리에서 피우는 하늘구름이란, 별구름이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 먼 별에서 지구를 바라볼 적에도 지구는 미리내가 될 수 있을까요. 지구도 별구름처럼 다른 별에 보일 수 있을까요.



.. 여선생들 모여 조르르 웃고 몇몇 선생들 컴퓨터 앞 야후 검색 하거나 벅스뮤직 듣거나 화투놀이 하고 있다 ..  (직원실에서 김지하를 만나다)



  비는 비구름이 몰고 옵니다. 눈은 눈구름이 몰고 옵니다. 오늘 나는 일곱 살 큰아이하고 눈구름을 그립니다. 큰아이는 전남 고흥 포근한 시골자락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를 바랍니다. 서른 해나 쉰 해쯤 앞서라면, 이 포근한 시골에도 함박눈이 내릴는지 모르나, 요즈막에는 이곳에 함박눈은커녕 싸락눈이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올겨울에는 함박눈이 몇 차례 찾아오리라 생각해요.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꿈을 꾸니까요. 눈을 꿈꾸면서 그림편지를 쓰니까요. 눈구름을 신나게 그려서 집안에 붙여놓고 날마다 바라보니까요. 이 가을이 저물고 새 겨울이 찾아오면 참말 멋스럽고 어여쁜 눈구름이 우리 마을에 도톰하게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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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엄마도 참 문지아이들 84
유희윤 지음, 조미자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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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0



빨래터 물놀이 하며 시읽기

― 참, 엄마도 참

 유희윤 글

 조미자 그림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7.3.30.



  대나무를 베어 마당에 놓으니, 아이들이 이 대나무를 ‘출렁다리’로 삼으면서 오르락내리락 놉니다. 대나무를 베면서 잔가지를 몇 건사했더니, 대나무 잔가지는 잔가지대로 아이들이 휘휘 휘두르면서 노는 놀잇감이 됩니다.


  출렁다리 대나무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평상에 앉아 인형놀이를 합니다. 아이들 놀이는 천천히 달라집니다. 이 놀이를 하다가 저 놀이로 가고, 저 놀이를 하다가 이 놀이로 오며, 다시금 새 놀이로 건너뜁니다.


  어디에서나 놀고, 무엇으로든 놉니다. 언제나 놀고, 하루 내내 뛰놉니다.



.. 밟지 말랬는데 / 고양이가 밟았다 // 발자국은 / 꽃 모양 ..  (고양이 발자국)



  아이들더러 ‘뛰지 말라’거나 ‘달리지 말라’거나 ‘소리치지 말라’고 다그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기운차게 뛰면서 놀고, 씩씩하게 달리면서 놀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동네에서나, 아이들은 마음껏 뛰거나 달리거나 소리치기 어렵습니다. 학교이든 집이든 동네이든, 아이들이 뛰거나 달리거나 소리치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말을 할까요?


  아이들한테 놀이터를 마련해 준 뒤, 집이나 동네나 학교에서 뛰지 말거나 달리지 말거나 소리치지 말라고 하나요? 아이들이 마음껏 조잘조잘 이야기꽃을 피워서 가슴이 후련하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얌전히 있거나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나요?



.. 왼쪽에 한 개 / 오른쪽에 한 개 // 주머니에 귤 넣고 / 만지작만지작 학교에 가며 ..  (귤)



  어제 낮에는 마을 빨래터를 치웁니다. 막대솔을 어깨에 짊어지고 셋이 빨래터로 갑니다. 아버지는 신나게 빨래터를 치우고, 두 아이는 하염없이 물놀이를 합니다. 먼저 샘터를 치우는데, 샘터를 치우면 두 아이는 작은 샘터에 둘이 함께 들어가서 놀아요. 아버지가 땀을 흘리면서 빨래터를 거의 다 치울 무렵, 슬슬 두 아이가 다가와서 “아버지 도와줘야지!” 하면서 거드는 시늉을 합니다.


  빨래터를 드디어 다 치우면, 두 아이는 가을에도 옷을 적시면서 물장구를 칩니다. 물을 서로 끼얹고 스스로 물바닥에 드러눕습니다.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릴 때까지 놀던 아이들을 햇볕 잘 드는 곳에 서서 몸을 말리도록 합니다. 젖은 옷을 벗고 해바라기를 하면 추운 몸에는 어느새 따순 기운이 감돕니다. 알몸이 된 아이들은 시골마을 빨래터에서 마음껏 더 놉니다.



.. 옆자리 병구가 / 내 손 펴게 하고 / 올려놓았다, 꼭 쥔 제 주먹 // 주먹을 풀어 / 사탕 한 개 내려놓고 / 내 손 꼬옥 오므려 주었다 ..  (병구의 손)



  유희윤 님이 빚은 동시집 《참, 엄마도 참》(문학과지성사,2007)을 읽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엄마’와 ‘아빠’라는 낱말을 참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이 낱말 ‘엄마·아빠’는 아이들이 아기일 적에만 쓰고는 너덧 살이나 예닐곱 살부터는 ‘어머니·아버지’로 고쳐서 알려주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열 살을 넘고 스무 살을 넘기도록 말을 고쳐 주지 못해요.


  아기한테 ‘맘마’ 먹자고 하던 어버이가 열 살 어린이한테도 ‘맘마’ 먹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 젊은이더러 ‘맘마’ 먹으라 하면 스무 살 젊은이는 무엇을 느낄까요? 나를 언제까지 아기로 여기느냐고 투덜거릴 테지요. 아이가 열 살이 되기 앞서 예닐곱 살부터 ‘어머니·아버지’라는 낱말을 쓰면서 ‘아기에서 벗어나 아이가 된 삶’을 깨닫도록 돕고, 열 살 뒤부터는 ‘오롯한 사람’으로 마주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가르치는 일이란, 삶다운 삶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아기 말’에서 ‘아이 말’을 거쳐 ‘어른 말’을 들려주는 일이란, 아이가 앞으로 손수 삶을 가꾸도록 이끌면서 가르치는 일입니다.



.. ‘안경아, / 너도 쉬렴.’ // ‘아빠 깰 때까지 / 조용히 쉬렴.’ ..  (눈길 한 번 더 주고)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귀여운 것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학습이나 교훈이나 시험공부나 대학입시로 달달 볶아야 할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받아야 할까요. 입시교육과 학원교육을 받아야 할까요?



.. 시골집엔 / 콩을 좋아하는 콩쥐가 / 할머니랑 살지요 ..  (할머니 댁 콩쥐)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읽히는 동시에는 사랑을 실어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즐길 동시에는 어른 스스로 짓고 가꾸며 보살핀 사랑을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문학이 아름다운 까닭은 어린이와 어른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문학이 사랑스러운 까닭은 어린이와 어른이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따사로운 숨결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쁘장한 말을 쓴대서 동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삶을 아이와 즐겁게 나누려고 하기에 동시가 됩니다. 짧게 쓰거나 가락을 맞추어 쓰기에 동시가 되지 않습니다. 어른 스스로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을 가꾸는 하루를 찬찬히 담아서 짓기에 동시가 됩니다.



.. 바람 부는 밤 / 함석지붕에 풋감 떨어진다 // 쿵. 쿵. / 잠들만 하면 또 쿵그르 // 할머니도 / 그러려니 / 할아버지도 / 그러려니 // 외양간의 누렁소도 / 멍멍이도 꼬꼬닭도 / 그러려니 ..  (산골의 밤)



  동시집 《참, 엄마도 참》은 살짝 아쉽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는 눈길이 된다면, 아이와 함께 가꿀 삶과 마을과 지구별을 더 넓게 살피는 마음결이 된다면, 한결 따사로운 이야기가 되었으리라 느껴요.


  어른이 어른 스스로 사랑하고 아낄 때에 동시를 씁니다. 아이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른 누구나 어른 스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꾸어야 동시를 쓸 수 있어요. 유희윤 님은 이러한 ‘사랑’을 잘 건사하리라 느낍니다. 다만, 이 사랑을 아이와 어디에서 어떻게 나누면서 꽃으로 피울 때에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까지는 아직 못 짚지 싶어요.


  빨래터에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다가 손을 말린 뒤 동시집 《참, 엄마도 참》을 읽었습니다. 이 동시집에 이어 선보일 다른 동시집에는 ‘즐거운 놀이’와 ‘기쁜 노래’와 ‘맑은 사랑’과 ‘따스한 꿈’이 골고루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0.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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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손가락의 자립 신생시선 36
이은주 지음 / 신생(전망)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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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2



시와 컴퓨터

― 긴 손가락의 자립

 이은주 글

 신생 펴냄, 2013.12.20.



  혼자 먹을 밥을 한 그릇 끓일 때하고 곁님과 함께 먹을 밥 두 그릇 끓일 때하고 아이들과 함께 먹을 밥 네 그릇 끓일 때는 얼마나 다른가 하고 헤아립니다. 다를까요? 다르다면 다릅니다. 그렇지만, 같다면 같습니다.


  다르다면, 혼자 먹을 적하고 넷이 먹을 적에는 밥이나 국을 끓이는 부피가 다릅니다. 혼자 먹을 적하고 여럿이 먹을 적에는 밥상에 올리는 접시 갯수와 수저 숫자가 다릅니다. 여럿이 먹기에 한결 넉넉히 찬거리를 마련하고, 여럿이 먹는 만큼 건더기 푸짐하게 넣고 국을 끓이기도 합니다.



.. 흐린 날 / 흐린 우산을 쓰고 / 흐린 케이크 가게를 찾는다 ..  (우울한 케이크 가게)



  가게에서 푸성귀를 사다가 찬거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당이나 뒤꼍이나 옆밭에서 풀을 뜯어서 찬거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마련하든 모두 내 몸으로 들어와서 즐거운 기운으로 거듭납니다.


  다만, 집에서 뜯는 풀은 풀내음이 한결 짙습니다. 가게에서 사다가 쓰는 푸성귀는 풀내음이 무척 옅습니다. 집에서 뜯는 풀은 아침에 뜯어도 낮이면 시들시들하기에 곧바로 손질해서 그 자리에서 다 먹어야 합니다. 가게에서 사다가 쓰는 푸성귀는 아침에 손질해 놓아도 저녁까지 시들지 않고, 이튿날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게에 놓인 푸성귀는 어느 비닐집에서 가게까지 오는 동안 하루나 이틀은 걸리기 마련이고, 가게에서 더 손질해서 놓기까지 제법 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여러 날, 때로는 이레 즈음 시들지 않도록 여러모로 손을 쓰고 품을 들여야 합니다.


  집에서 뜯는 풀은 그때그때 먹으니, 가장 맛나게 먹을 수 있으면서, 그 자리에서 다 안 먹으면 시들고 말아 다시 흙으로 돌려줍니다.



.. 그 깨알만한 알들의 버무림, 내 손을 잡으시던 따뜻한 부고가 섬뜩하다 외할머니는 내 가슴에 그리움의 지문 하나 남기고 떠나신다 ..  (게알)



  이은주 님이 쓴 시집 《긴 손가락의 자립》(신생,2013)을 읽습니다. 긴 손가락은 스스로 선다고 합니다. 긴 손가락은 씩씩하게 제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섭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 길을 걷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서서 다 함께 어우러집니다. 스스로 제 길을 걷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곳에서도 서로 만나고, 저곳에서도 어깨동무를 합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저마다 만나고, 함께 어우러집니다. 내 이야기를 네가 듣고, 네 이야기를 내가 듣습니다.



.. 마흔 즈음 혼자가 되고 나니 언제쯤 정말 혼자였던가, 혼미해진다 술 취한 애인이,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야, 라고 잠꼬대를 한다 더 혼미해진다 따귀를 날리고 싶었지만 참기로 한다 손바닥이 애인의 얼굴에 닿는 순간 혼자가 아니라고 착각할까봐 두려워진다 ..  (마흔 즈음에)



  읍내 가게에 가서 장만한 큰파를 손질합니다. 뿌리 쪽을 조금 크게 자릅니다. 자른 뿌리는 그릇에 담아 물을 살짝 붓습니다. 파뿌리가 하루나 이틀쯤 물을 빨아들이도록 한 뒤 마당 둘레에 옮겨심을 생각입니다. 옮겨심은 파뿌리를 보면 이내 죽는 아이가 있지만, 기운차게 푸른 잎을 쑥쑥 올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기운차게 푸른 잎을 올리는 아이가 있으면 고맙게 푸른 숨결을 얻습니다. 파뿌리 아이들은 잎을 한 번 두 번 내주어도 다시금 쑥쑥 올라옵니다.


  비가 그친 아침에 뒤꼍으로 가서 감을 넉 알 줍습니다. 엊그제 비가 한 차례 훑고 지나갔으니 틀림없이 감이 떨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제 바깥마실을 갔다가 엊저녁에 돌아왔어요. 오늘 아침에 기쁘게 뒤꼍으로 갔지요. 고맙게 넉 알을 주으면서 감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아직 두어 알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까치밥이 될 수 있고, 톡 떨어져 우리 아이들 밥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묵직하고 커다란 감알을 일곱 살 네 살 아이들이 한 알씩 날름날름 먹습니다. 곁님도 한 알 먹고 나도 한 알 먹으려 합니다.



.. 남자는 씨를 품고 태어났다 씨는 낡은 어둠을 갉아먹으며 자란다 길을 거부한 뿌리만을 뻗어 얽히고설켜 한 덩어리로 숨쉰다 뿌리가 자랄수록 남자의 옹알이가 부서진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말이 되지 못한 소리의 조각들이 동글어져 봉분이 된다 ..  (붉은 혹―과지모도에게 2)



  오늘날은 컴퓨터로 글을 만지면서 책을 내놓습니다. 오늘날은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사진 모두 컴퓨터로 만져서 책으로 엮습니다. 오늘날은 그림도 그냥 컴퓨터로 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책’은 손으로 읽습니다. 전자책을 읽더라도 손으로 움직여서 읽습니다.


  컴퓨터를 만질 적에도 손으로 만집니다. ‘컴퓨터로 만드는 책’이라 하더라도, 알고 보면, 언제나 우리 손으로 만드는 셈입니다.


  컴퓨터도 사람들이 손으로 만들어요. 기계가 만든다고 할 수도 있지만, 컴퓨터를 만드는 기계는 사람이 만들지요. 우리가 쓰는 모든 것에는 우리 손길이 깃듭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컴퓨터도, 자판도 모두 손으로 만져서 이루지만, 연필을 손에 쥐어 종이에 찬찬히 적는 시가 된다면, 우리가 손수 씨앗을 흙에 심어서 손으로 거두어들인 뒤 밥을 짓는다면, 전기밥솥에 맡기는 밥이 아니라, 솥이나 냄비에 불을 알맞게 맞추어 스스로 끓이는 밥을 먹는다면, 시도 이야기도 삶도 책도 달라지리라 봅니다.


  책을 읽으려면 컴퓨터를 꺼야 하듯이, 시를 쓰는 사람과 노래를 읽는 사람 모두 컴퓨터를 한쪽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을 짓는 사람과 사랑을 가꾸는 사람 모두 컴퓨터며 텔레비전이며 신문이며 모두 한쪽에 치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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