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 여림 유고 전집
여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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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6



고졸 아닌 대학 중퇴라는 실랑이

―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여림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5.25. 11200원



  1967년에 태어나 2002년에 흙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여림 님입니다. 여림 님은 1999년에 〈실업〉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뽑혔다고 해요. 시인 최하림 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름 끝 자를 빌어 ‘여림’이라는 글이름을 따로 지었다고도 합니다. 1999년에 신춘문예에 뽑힌 뒤 2002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시 한 줄로 글빛을 펼칠 겨를이 얼마 없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실업)


허름한 옷에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 요즘은 도시 공공 근로자 일을 합니다 / 은빛 피라미 떼 같은 햇살이 자욱한 점심때 / 양은 도시락 하나씩을 찬 손에 꺼내 들고 / 저희들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밥을 먹습니다 (나는 공원으로 간다)



  여림 님이 숨을 거두고 열 몇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시집이 나옵니다. 시와 산문을 모은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최측의농간,2016)이 바로 이 시집입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아련한 옛 자취를 곰곰이 그려 봅니다. ‘실업’이라는 자리에 서서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도 하고, 비둘기하고 말을 섞던 모습을 그려 봅니다. 공공근로를 하는 시인 모습을 그려 보고, 출판사에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대학 자퇴-고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고졸인 학력입니다. 나는 여림 님이 신춘문예에 뽑히던 그해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갔는데 ‘고졸’이면서 이런 자리에 뽑히기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대학 중퇴의 학력은 고졸이라는 출판사 사장과의 면접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뒤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는 대학 동창을 만나 늦도록 술추렴을 하다 귀가한 다음날 나는 책상 위에 커다랗게 대체로 사는 건 싫다라고 써붙여 두었었다. (대체로 사는 건 싫다)



  장마철을 맞이해서 줄줄이 내리는 비가 때때로 멎곤 합니다. 빗줄기가 멎으면 바로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퍼집니다. 빗줄기가 몰아치면 새도 풀벌레도 모두 숨을 죽이는데, 빗줄기가 그치기 무섭게 새랑 풀벌레는 싱그럽게 노래를 불러요.


  나는 내가 고졸인 가방끈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했기에 나로서는 ‘나만 누릴 수 있는 발자국’을 찍습니다. 여림 시인은 여림 시인대로 고졸에다가 실업자로 지낸 발자국이 있기에 ‘여림 님만 쓸 수 있는 시’를 써서 남깁니다.



나 / 오랜 시절 / 꿈으로 지은 집에 세 들어 살았노라고 / 그 집의 세간들에 정 들 무렵 / 홀연 / 먼길을 떠났노라고 (木에게)


몇 년 전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친 다음부터 / 나는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무서워졌다 (계단밟기)



  아침에 밥을 끓이면서 빗자루를 들고 마루하고 방을 쓸었습니다. 밥물하고 국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비질을 했어요. 밑반찬은 미리 해 두었으니 오늘은 아침을 차리면서 손 갈 일이 적어서 ‘불 앞에서 멀거니 지키기’를 하기보다는 비질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가운뎃방을 쓸고 나서 끝방을 쓸 때인데, 구석진 한쪽에서 조그마한 뭔가가 폴짝 뜁니다. 뭔가 하고 허리를 숙여서 쳐다봅니다. 옳거니, 조그마한 풀개구리입니다. 내 손톱보다 작은 가녀린 목숨입니다.

  이 녀석은 어떤 구멍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을가요? 창호종이로 얇게 가린 문에 구멍을 내어 들어왔을까요? 아니면 모기그물 한쪽에 틈을 내어 살살 비집고 들어왔을까요? 비질을 멈춥니다. 한손으로 풀개구리를 낚아채려고 바쁩니다. 예닐곱 번 손을 휘드른 끝에 잡습니다. 아이들을 부른 뒤 섬돌에 섭니다. “우리 집에 개구리가 들어왔네.” 하고 말하니 두 아이는 “어디! 어디?” 하면서 우르르 달려옵니다. “자, 보렴.” “안 보이는데?” 풀개구리가 워낙 작아서 처음에는 안 보인다고 하더니, 이 풀개구리가 제 손가락에 살그마니 올라타니 그제야 알아챕니다.


  풀개구리는 몇 초쯤 제 손가락을 올라타고 가만히 있다가 힘차게 폴짝 뛰어서 마당에 내려앉습니다.



구름은 바람의 뼈 / 바람은 제 뼈를 조금씩 화장시키며 이 도시를 지난다. (폭죽처럼 터지는 첫눈, 그리운 사람들.)


노래가 없는 밤은 쓸쓸하다 / 어둠을 뒹굴고 있는 / 바람 몇 줄을 잡아 음을 고르고 (낯선 도시의 밤)



  차분하면서 낮술 내음이 흐르는 시를 돌아봅니다. 고즈넉하면서도 힘차게 폴짝 뛰어오르고 싶은 꿈이 깃든 시를 돌아봅니다. 김치도 잘 담근다고 하고 살림도 잘 할 줄 안다고 하는 여림 님이었다는데, 집안도 늘 정갈하게 추스르면서 살았다고 하는 여림 님이었다는데, 참말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바람을 타면서 저 먼 길을 떠난” 여림 님이라고 하는데, 바람내와 구름내와 하늘내를 새삼스레 맡아 봅니다. 비내음이 가득한 여름바람과 여름구름과 여름하늘을 새삼스레 올려다봅니다.


  조그마한 풀개구리처럼 조그맣게 이 땅에 찾아와서 아주 작은 폴짝임을 보여주고는 조용히 스러진 시인 한 사람 발자국이었을까요. 내가 걷는 발걸음을, 아이들이 걷는 발걸음을, 이웃들이 걷는 발걸음을, 모두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짙푸른 여름에 흐르는 바람을 마십니다. 하늘 같은 바람을 마십니다. 2016.7.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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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치야 깐치야
권정생 엮음, 원혜영 그림 / 실천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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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4

 


우리 삶은 늘 모두 사랑스레 노래였어요
― 깐치야 깐치야
 권정생 엮음
 원혜영 그림
 실천문학사 펴냄, 2015.6.30. 1만 원

 


  권정생 님이 엮은 《깐치야 깐치야》(실천문학사,2015)를 틈틈이 아이하고 읽습니다. 아이는 이 책에 깃든 ‘옛 어린이노래’를 아이 나름대로 가락을 붙여서 노래로 부르곤 합니다. 아이더러 노래로 불러 보라 시키지 않았는데, 아이는 아이 스스로 노래로 부르더군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생각했어요. 어쩌면 나도 이 아이만 하던 어릴 적에 이렇게 ‘동시 아닌 어린이노래’를 적은 글을 읽으며 으레 흥얼흥얼 노래로 부르지 않았느냐 하고 말이지요.


  문학을 하는 어른들이 쓰는 동시는 이렇게 노래처럼 부르기 어려워요. 그러나 처음부터 아이들이 재미나게 놀면서 재미나게 부르던 노래를 받아적어서 책 한 권으로 묶은 《깐치야 깐치야》는 ‘동시집’이나 ‘어린이문학’이라고 하기 어렵구나 하고 느껴요. 참말로 이 책에 깃든 모든 ‘글’은 글이기 앞서 ‘노래’이기 때문이에요.


달강 달강 시상 달강 / 서울 가서 밤 한 바리 실어다가 / 살강 밑에 두었더니 / 머리 감는 생쥐란 놈이 / 다 까먹고 두 알 남은 걸 / 부섴에다 묻었더니 / 이웃집 할마씨가 / 볼랑거리라 하고 / 한 알을랑 가져가고 / 한 알 남은 걸 / 껍데기는 할바이 주고 / 허물을랑 할마이 주고 / 알꼬배긴 니캉 내캉 / 달강 달강 시상 달강 / 달강 달강 시상 달강 …… (세상 달강)


  우리 삶은 늘 모두 사랑스러운 노래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은 일을 하며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어른들 노래는 ‘일노래’예요.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노래를 불러요. 그러니 아이들 노래는 ‘놀이노래’이지요.


  어른이 일하며 노래를 부르든 아이가 놀이하며 노래를 부르든, 이 노래는 모두 삶에서 우러나와요. 권정생 님이 그러모아서 엮은 《깐치야 깐치야》에 나오는 모든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른 아이들이 텔레비전이나 책이나 신문에서 배운 노래가 아니에요. 모두 아이들 스스로 지은 노래예요. 아이들이 생각을 빛내어 지은 노래이고, 아이들이 생각을 펼쳐서 지은 노래랍니다.


헝글레야 헝글레야 / 방아찧라 방찧라 / 싸래기 받아 떡해 줄게 (방아깨비)

깐치야 깐치야 / 내 눈에 가시든 거 / 꺼내 다고 / 니 새끼 웅굴에 빠진 거 / 건져 주마 / 졸뱅이로 건질까 / 뜰뱅이로 건질까 / 헛 쉬! (깐치야 깐치야)


  삶에서 우러나와서 삶으로 짓는 노래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삶노래’일 테지요. 살림을 북돋우면서 가꾸려는 뜻으로 지어 부르는 노래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살림노래’일 테지요.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따사로운 사랑으로 짓는 노래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노래’일 테여요.


  글을 쓴다면 글노래가 됩니다. 책을 즐긴다면 책노래가 됩니다. 웃음을 띠는 사람은 웃음노래예요. 눈물이 흐를 적에는 눈물노래일 테지요.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거닐면서 마실노래를 부르고, 자전거를 싱싱 달리면서 자전거노래를 불러요.


  참말로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불러요. 서울에 살며 서울노래를 부르고, 시골에 살며 시골노래를 불러요. 바다에서는 바다노래를 부르고, 숲에서는 숲노래를 부르지요.


쪽을손가 쪽저구리 / 잇틀손가 잇저구리 / 백자동전 놀피달고 / 사실깃을 설피달고 / 횃대끝에 걸어놓고 / 시애각시 어디갔노 (저고리)

 

생아 생아 사촌 생아 / 쌀 한 쪽만 재졌으면 / 너도 먹고 나도 먹고 / 구꾸정물 받았으면 / 소도 먹고 말도 먹고 / 그 누룽지 끓였으면 / 개도 먹고 닭도 먹고 / 생아 생아 사촌 생아 / 어찌 그리 무정튼고 (생아 생아 노래)


  경상도 아이들 말씨가 구성지게 묻어난 《깐치야 깐치야》입니다. 다만 오늘날 경상도 아이들은 이 책에 깃든 놀이노래나 어린이노래를 거의 모르리라 느껴요. 오늘날 아이들은 고샅이나 골목이나 마을이나 숲이나 냇가나 바다나 마당에서 마음껏 놀지 못하거든요. 게임은 할 줄 알고, 텔레비전은 볼 줄 알지만, 막상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놀이를 지어서 새로운 노래를 부를 줄 몰라요. 이리하여 오래오래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재미난 놀이노래는 이제 더는 놀이노래로 잇지 못해요. 책에 남을 뿐이에요. 책에 남은 이 놀이노래를 놀이노래답게 놀면서 부르기 어려워요. 애써 엮은 《깐치야 깐치야》이지만 이 놀이노래를 어떻게 부르거나 즐길 때에 재미있을까 하는 대목을 시디 같은 데에 담아서 들려주기 어려워요.


딸아 딸아 내 딸아 / 멍두딸이 딸인가 / 나무딸이 딸인가 / 수리딸이 딸인가 / 오조밭에 갔든가 / 오지게도 생겼네 / 끌조밭에 갔든가 / 끌지게도 생겼네 / 미조밭에 갔든가 / 미끈케도 생겼네 / 차조밭에 갔든가 / 차지게도 생겼네 (둥게 둥게 노래)

눈굴떼기가 / 배가 불러서 / 다리가 짧아서 / 먼 데 못 가네 (눈굴떼기)


  나는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면서 노래를 불러 봅니다. 나는 내 삶을 노래해 봅니다. 오늘 하루 즐길 살림을 생각하면서 노래해 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하고 기운차게 부대끼면서 꾸릴 사랑을 그리면서 노래해 봅니다. 내 노래는 언제나 삶노래·살림노래·사랑노래·숲노래가 되기를 꿈꾸면서 노래해 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기쁜 웃음이 되기를 꿈꾸면서 노래해 봅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 머리 좋고 키 큰 처자 / 알곰 솜솜 고운 처자 / 밍지 꽁지 짜는 처자 / 들고 치나 놓고 치나 / 얼 없이도 잘도 치네 (곰보 처자)


  아이가 아이 나름대로 가락을 입혀서 《깐치야 깐치야》를 노래로 즐깁니다. 나도 아이 곁에서 내 나름대로 새 가락을 입혀서 《깐치야 깐치야》를 노래로 즐겨 봅니다. 어떻게 불러야 ‘정답’이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놀이를 누리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리라 느껴요. 너는 너대로 부르고 나는 나대로 부르지요. 잘 부르고 못 부르고 같은 금을 긋지 않고 부르지요. 어깨동무를 하면서 불러요. 깨끔발을 하고 뜀뛰기를 하면서 불러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란 바람을 마시면서 불러요. 땅을 내려다보면서 까무잡잡한 흙빛을 가슴에 담으면서 불러요. 나비를 바라보면서 부르지요. 무럭무럭 크면서 길다란 꽃대를 주욱주욱 내밀며 바람에 한들거리는 옥수수를 바라보면서 부르지요. 우리 노래가, 우리 놀이노래가, 우리 꿈노래가, 우리 웃음노래가 언제나 새삼스레 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라면서 목청껏 부르지요. 2016.6.30.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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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맑음 문학의전당 시인선 226
최상해 지음 / 문학의전당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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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5



바람이 세찰수록 밝은 별빛을 노래합니다

― 그래도 맑음

 최상해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6.5.27. 9000원



  비가 오고, 비가 그칩니다. 해가 나고, 해가 집니다. 구름이 끼고, 구름이 걷힙니다. 때로는 무지개가 뜹니다. 그렇지만 요새는 무지개를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지를 만한 터전이 못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소나기나 무지개는 흔했는데, 이제는 시골에서조차 무지개가 매우 드문 날씨입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비가 세차게 몰아쳐도 머잖아 날이 개요. 아무리 어두운 밤이 길어도 머잖아 아침이 밝아요.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머잖아 봄이 찾아와요. “그래도 맑음”이에요.



새벽마다 배냇저고리 같은 밀양강이 콧김을 내뿜고, 씩씩거리는 강줄기를 달래는 영남루와 마주한 삼문송림이 울울창창 위용을 뽐내는 밀양에는, 누구든 한 발 들이기만 하면 쉽게 마음을 내려놓고 만다. (밀양)


강도 아이고 늪도 아이고 첩첩산중에 악어떼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람 사는 마을 앞에 뒤에 위에 해 뜨면 긴 그림자로 머리를 내리눌리고 비만 오면 씩씩거리고 윙윙거리는 악어떼가 지나다닌다는 게 말이 되나 이 말이지요. 소문이 돌 때만 해도 아무도 안 믿었지요. 지난 10여 년의 세월이 꿈만 같아요. (악어떼가 나타났다)



  최상해 님이 선보인 시집 《그래도 맑음》(문학의전당,2016)을 읽습니다. 강원도 강릉에서 나고 자랐다는 최상해 님은 경남 창원에서 아이를 낳아 살림을 짓는다고 합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 ‘그래도 맑음’이라는 시는 없습니다. 이 이름으로 쓴 시는 없지만 시집 이름은 ‘그래도 맑음’입니다. 시집 이름은 ‘그래도 맑음’인데, 이 시집을 읽으면 밀양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아니, 밀양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가 하나씩 태어나서 이 시집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밀양에서 사는 이웃을 마음으로 아끼려고 했기에 이 마음이 고스란히 시로 태어났다고 할 만합니다.



내 당숙 이름은 ‘히도’이다 / 일제강점기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름 / 어릴 적 히도 아재 하고 /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 얼굴 붉히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히도 아재)



  장마가 아무리 길어도 햇볕은 이 땅을 내리쬐어 줍니다. 나락은 볕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옥수수도 콩도 오이도 들깨도 볕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능금도 배도 포도도 살구도 볕을 받으면서 익어요. 그러니까 우리 삶터는 ‘그래도 맑음’이기 때문에 쌀밥을 먹고 여러 남새를 먹으며 온갖 열매를 먹을 수 있어요. 우리 삶자리가 아무리 고단하더라도 마음속으로 ‘그래도 맑음’이라는 꿈을 품기 때문에 다시금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어릴 때는 / 잘 자라는 말이 / 단순하게 / 잘 자라는 말로만 들렸는데 / 지금 생각해보니 / 잘 자라는 말은 / 잘 자라나라는 / 말 (잘 자라)


가난한 소극장에서 / 오디션을 보던 날 / 푹 고개 숙인 내 등 뒤에서 / 살포시 안아주시던 / 어머니 (버릇)



  어머니가 아이를 살포시 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살포시 안는 따사로운 품을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어머니가 됩니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었을 테지요. 할머니는 할머니가 되었어도 이녁 아이는 언제나 이녁 아이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이녁 아이인 ‘어머니가 된 어른’을 늘 곱게 따스하게 살포시 안아 줍니다. ‘어머니가 된 아이’는 어머니로서 낳은 아이를 이녁 어머니(할머니)가 늘 했듯이 곱고 따스하며 보드라운 품으로 살포시 안아 주어요.


  시집 《그래도 맑음》을 읽으면 최상해 님이 낳은 아이가 대학교를 그만두고 용접공으로 일하는 이야기가 나란히 흐릅니다. 퍽 어린 나이에 고된 일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꽤 어린 나이에 고단하게 일을 하는 아이를 마주하면서, 대학교 졸업장이 아닌 용접공이라는 이름을 얻는 아이와 함께 살면서, ‘그래도 맑음’을 곱다시 되새깁니다. 그래요, 참으로 ‘그래도 맑음’입니다. 어떤 일이 있든, 어떤 일을 맞이하든, 어떤 일을 맞닥뜨리든, 우리 마음은 늘 ‘그래도 맑음’이지 싶습니다.



가끔 스무 살 적 창가에 / 나를 꿇어앉히기도 하지만 / 내일은 여전히 맑음 / 깜깜하고 무겁던 그림자를 끌어안고 / 여인숙 골방 깊숙이 / 슬픔의 무게만큼 가둬놓았던 / 한때의 시간, 그래도 맑음 (해피엔딩)



  어둠이 깊은 곳에서는 어둠만 보인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둠이 깊은 곳에 있기에 이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별빛이 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밝은 곳에서는 밝음만 보인다고 느끼기 마련이지만, 이 밝은 낮이 저물면 곧 어두운 밤이 되는 줄 깨닫기도 해요.


  슬픈 무게를 떠올리면서 슬픈 무게에 가라앉기도 하지만 다시금 마음속으로 ‘그래도 맑음’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흐리지만, 모레에는 글피에는 틀림없이 ‘그래도 맑음’이 되리라 여기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세차기에 이 세찬 바람이 곧 그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할까요. 고단한 나날이 깊기에 이 고단한 나날이 곧 멎으리라고 여길 수 있다고 할까요. 마음속에 꿈을 품기에 이 꿈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할까요.



어둠이 / 지독할수록 / 바람이 / 세찰수록 / 빛나는 / 별 하나 / 내 가슴속에 산다 (북극성, 아버지)



  씨앗 한 톨을 땅에 심으면 곧바로 싹이 트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을 땅에 심은 뒤 ‘씨앗 묻은 자리’를 따사로이 보살피면서 지켜보기에,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지나며 사흘이 가고 이레쯤 이를 무렵 빼꼼하고 자그마한 싹이 올라옵니다. 씨앗 한 톨을 손에 쥐면 며칠이나 몇 달이 지나도 싹이 트지 않는데, 땅에 묻으면 며칠 뒤에 감쪽같이 싹이 터요. 참 놀라우면서 대단하지요.


  이 놀라운 씨앗 한 톨처럼 삶을 사랑으로 밝히려는 싯말 한 자락을 조곤조곤 곱씹습니다. 내가 오늘 심어서 가꿀 씨앗을 고요히 되새깁니다. 빗내음을 머금으며 살랑살랑 이는 여름 바람을 느끼면서 시집 《그래도 맑음》을 살살 어루만집니다. 2016.6.22.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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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가 따뜻해졌다 문학동네 동시집 20
오인태 지음, 박지은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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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3



혼자서 집 보는 아이가 마음으로 짓는 꿈

― 돌멩이가 따뜻해졌다

 오인태 글

 박지은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2.3.30. 8500원



  작은아이는 마실길에 돌멩이를 줍는 일이 드뭅니다. 큰아이는 마실길에 으레 땅바닥을 살피면서 돌멩이를 주우려 합니다. 큰아이는 때때로 소리를 칩니다. “와! 예쁜 돌이다!”라든지 “아버지! 여기 봐요! 사랑돌이에요!” 하고 외치지요.


  큰아이가 외치는 ‘사랑돌’은 돌멩이가 꼭 사랑 무늬(♥) 같대서 사랑돌입니다. 돌멩이가 이런 무늬로 있기는 쉽지 않을 텐데 큰아이 눈에는 가끔 나타납니다. 대여섯 달에 한 번쯤 나타나지요.


  돌멩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노라면, 돌멩이를 몹시 좋아하던 내 어릴 적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도 어릴 적에 늘 땅바닥을 살피면서 예쁘거나 멋진 돌멩이를 모으고 싶었습니다. 내 주머니는 돌멩이로 늘 불룩했어요. 물로 깨끗이 씻고 늘 손으로 만지작거리니, 주머니에 든 돌은 반들반들해지지요. 돌멩이를 손에 쥐면 이 돌멩이가 살아온 기나긴 숨결이 마치 내 몸으로 스며드는 듯하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한 시, 두 시, 세 시 넘어도 / 식구들은 아무도 오지 않고 // 혼자서 집 보는 날 // 몰랐다 / 우리 집이 이렇게 넓은 줄을 (혼자서 집 보는 날)


딩동! /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 // 되도록 천천히 열쇠를 넣고 돌리자 / 철컥! // 또 아무도 없구나! (아파트 문 열기)



  오인태 님 동시집 《돌멩이가 따뜻해졌다》(문학동네,2012)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에는 외롭거나 쓸쓸한 도시 아이들이 나옵니다. 아파트에서 혼자 집 보는 아이라든지, 집에 혼자 가서 열쇠를 혼자 따는 아이가 나와요.


  이 아이는 어느 때에는 외롭거나 쓸쓸한데, 어느 때에는 마음이 아픕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어떻게 아직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할 만한 ‘푸대접’에 마음이 멍드는 아이가 되기도 해요. 이를테면 오빠하고 저(가시내)를 가르는 어머니 모습 때문에 멍드는 아이입니다.



우리 엄만 / 내가 크레파스 산다 하면 / 벌써 다 썼니? / 운동화 산다 하면 / 조금 더 신어라 / 천 언짜리만 달랑 내보이시면서 // 오빠는 / 말도 안 하는데 / 아직도 그 책이니? / 학원비 낼 때 되지 않았니? / 몇만 원 몇십만 원도 / 쑥쑥 내주신다. (엄마 지갑)



  외롭거나 쓸쓸한 아이는 모처럼 어머니하고 집에 있어도 마음이 멍들어요. 그런데 이 아이는 학교에서도 마음에 멍이 들고 말아요.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아이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틀에 박힌 대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이끌려고 하면서, 아이들은 꿈날개를 펴지 못하고 말아요. 교과서대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이끌어야 하다 보니, 아이들은 새롭거나 재미난 이야기를 배울 틈이 없기도 해요.



노란색 하늘이 어디 있니? // 미술 시간 / 하늘을 노랗게 칠하다가 / 선생님께 핀잔 들었다. // 조금 전 쉬는 시간 / 창문 너머 하늘을 / 노랗게 덮었던 그건 뭘까? (미술 시간)


어디서 날아온 풀씨 하나와 바위가 / 누가 세나 내기를 했는데 // 석 달 열흘을 꿈쩍 않던 바위가 / 끝내 입을 쫙 벌리며 (바위꽃)



  아이들은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고 싶습니다.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놀고 싶습니다. 이 돌멩이로 땅바닥에 금을 그으면서 뜀뛰기놀이를 하고 싶습니다. 돌멩이를 던져서 톡톡 쓰러뜨리는 돌치기(비석치기)를 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모래바닥에 작은 돌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놀이를 하고 싶습니다.


  놀고 싶은 아이입니다. 꿈꾸고 싶은 아이입니다. 사랑받고 싶은 아이요, 사랑하고 싶은 아이예요. 이 아이들을 꾸밈없이 바라보아 줄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을 가없는 마음으로 넉넉히 안아 줄 수 있을까요?



땅콩 한 알에는 / 땅콩 한 포기의 눈이 있다 // 밤 한 톨에는 / 밤나무 한 그루의 눈이 있다 (눈이 마주칠 때)



  마음에 있는 눈을 뜰 때에 아이들을 꾸밈없이 바라볼 수 있지 싶어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할 적에 비로소 사랑스러운 눈길이 될 만하지 싶어요.


  파란 하늘도 노란 하늘도 빨간 하늘도 모두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파란 마음도 되고 노란 마음이나 빨간 마음도 되면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땅콩 한 알에 깃든 눈을 바라보아요. 밤나무 한 그루에 서린 눈을 바라보아요. 아이 마음을 바라보고, 어른 마음을 돌아보아요. 서로 즐거운 눈이 되고, 서로 고운 눈이 되기를 바라요. 다 함께 노래하는 눈이 되고, 다 같이 웃음짓는 눈이 되기를 바라요. 2016.6.19.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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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디디며 헛짚으며 모악시인선 1
정양 지음 / 모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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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114



벼슬자리도 서울살이도 모두 헛걸음이라는

― 헛디디며 헛짚으며

 정양 글

 모악 펴냄, 2016.4.4. 8000원



  부옇게 동이 트는 기운을 느끼면서 새벽에 일어납니다. 시계가 없어도 새벽을 알고 아침을 느낍니다. 딱히 시계에 기대지 않으면서 하루를 열고, 아침밥을 지으며, 밭자락을 살피다가, 하루 살림을 되새깁니다.


  어버이가 시계에 기대지 않으면서 지내니 아이들도 시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시계를 따지지 않으면서 하루 살림을 지으니 아이들도 그저 하루 내내 새롭게 놀이를 지으면서 누립니다. 이 같은 시골살림을 꾸리면서 옛사람 발자국을 짚어 봅니다.


  어수선한 벼슬자리나 서울살이를 등지고 시골로 가는 사람이 제법 있어요. 많지는 않아도 예부터 꾸준히 있습니다. 벼슬이나 서울을 등지며 시골에서 지내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벼슬이나 서울을 바라보며 지내는 삶이란 또 무엇일까요.



줄 틀리는 아이들을 단속하면서 / 뭉치자 삼천만 깨뜨리자 삼팔선을 선창하면 / 아이들은 머리를 흔들어가며 따라 외쳤다 / 그것들이 모두 통렬한 반미구호라는 걸 / 그걸 만든 친미정권도 선생님도 / 까맣게 모르던 1948년 / 내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깨뜨리자 삼팔선)



  1942년에 태어나 교사로 오랫동안 일했다고 하는 정양 님이 쓴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2016)를 조용히 읽습니다. 이 시집을 펴낸 출판사는 전라북도 전주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 시인하고 소설가 들이 모여서 뜻과 돈을 모아서 출판사를 작게 열었다고 해요. 전북 완주군에 모악산이 있다는데, 모악 출판사는 바로 이 ‘모악산’ 기운을 받아서 삶을 노래하려는 책을 펴내려는 뜻이지 싶습니다.



어느 게 다행이고 / 어느 게 불행인지 / 어느 게 더 만만하고 / 어느 게 더 군색한 건지 // 어딘가로 떠나는 철새들이 / 그게 다 그거 아니냐고 / 살똥스레 저물녘을 끼룩거린다 (그게 그거라고)


거울 속 까맣게 탄 얼굴이 낯익다 / 날더러 몰라보겠다고 하는 이들도 / 정작 나를 몰라보지는 않는다 / 더 탈 데도 없는 내 얼굴을 이제는 / 오뉴월 땡볕도 낯설어하지 않는다 / 이렇게 농사꾼이 되는 거라고 짐짓 / 김칫국도 마셔가면서 틈 날 때마다 / 산밭에 와서 땀을 흘린다 (땀)



  일흔 줄을 넘어선 정양 시인은 ‘산밭’에 틈을 내어 가서는 땀을 흘린다고 합니다. 벼슬자리나 서울살이가 아닌 ‘산밭뙈기’에서 오뉴월 땡볕도 한여름 뙤약볕도 실컷 쬐면서 새까맣게 얼굴이며 살갗이 탄다고 해요.


  요즈음 어느 시골이든 모두 비슷할 텐데, 오뉴월에 밭일이나 논일을 하는 분들은 챙이 긴 모자에 긴소매에 긴바지에 수건까지 목에 두르고 땀을 흘리지만, 이렇게 꽁꽁 싸매도 얼굴이나 살갗은 까맣게 탑니다. 참 용하지요. 햇볕은 어느 틈바구니를 헤집고서 살갗을 까맣게 태울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모자 없이 여름볕을 고스란히 쬐면서 뛰어놉니다. 여름볕이 아무리 따가워도 모자를 쓸 생각도, 뭔가를 걸칠 생각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은 햇볕이 얼굴이나 살갗을 태우는 결을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나도 어릴 적에 개구지게 뛰놀면서 땡볕이나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머리카락 끝으로 땀이 풀풀 날리면서 신나게 뛰놀았습니다.



정년퇴임한 지 여러 해 된 / 목숨도 얼마 안 남은 동료들이 / 남는 건 시간뿐이라며 / 틈만 나면 고스톱으로 시간을 죽인다 (시간 죽이기)


할멈은 안방에서 할아범은 거실에서 / 티비 켜놓은 채 잠든다 / 전기세 아깝다며 먼저 깬 쪽이 / 살살 다가가 전원을 끄면 피차 / 용케 알고 잠이 깨어 / 다시 자려고 다시 켠다 (겨울밤)



  정년퇴임을 한 여러 동무는 “남는 건 시간뿐”이라면서 그 남는 겨를에 고스톱을 친다고 해요.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늘 바빴을 텐데, 여행도 책도 영화도 아닌, 집살림을 건사하거나 요리를 배워 본다든가 하는 살림이 아니라, “남는 시간에 시간 죽이는 고스톱”을 한다고 합니다. 〈시간 죽이기〉라는 시를 읽으면서 조용히 웃습니다. 그러나 이 웃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쓸쓸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재미난 모습이라서 빙긋 웃음이 날 만한데, 어느 모로 보면 어쩐지 애처롭습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삶은 ‘시간 죽이기’를 할 만큼 넉넉할까 하고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시간 죽이기’를 하면서 흘려보내도 될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시인 윤동주가 옥사 당한 것은 / 그가 독립투사나 저항시인이어서가 아니고 / 순결한 조선의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 일본제국주의는 조선 청년의 / 그 순결한 영혼이 본능적으로 두려웠지요 // …… // 바르샤바조약군은 폴란드를 점령하자마자 / 맨 먼저 달려가 쇼팽의 피아노를 / 산산조각으로 때려 부쉈습니다 / 해맑고 아름다운 쇼팽의 선율을 그처럼 / 군국주의는 가장 두려운 것으로 여겼답니다 (갈채, 제5회 눌민문화제)



  어쩌면 우리는 날마다 뭔가를 헛디디는 살림은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으레 뭔가를 헛짚는 삶은 아닌가 싶습니다. 살림이나 삶뿐 아니라, 사랑이나 사람(이웃·동무)까지도 헛디디거나 헛짚듯이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하루는 아닌가 싶습니다.


  벼슬자리도 서울살이도 모두 헛걸음이지는 않을까요. 이름을 드날리려는 몸짓이나 돈을 더 거머쥐려는 몸짓도 모두 헛손질이지는 않을까요. 손수 삶을 짓지 못한다면, 손수 살림을 짓지 못한다면, 손수 사랑을 짓지 못한다면, 손수 꿈을 짓지 못한다면, 이때에는 언제나 헛짓이요 헛놀음이요 헛삶이지는 않나 싶습니다.



눈 덮인 세상 어디나 고향 같고 / 눈길 닿는 데마다 포근하지만 / 아무 데나 가서 아무나 만나 /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도둑눈)



  내가 밭자락에 앉아서 호미를 놀리면 아이들은 어느새 내 곁에 모여서 흙놀이를 합니다. 자전거를 몰아 골짜기나 바다로 마실을 가면 아이들은 내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 “자, 밥 먹을 사람?” 하고 부르면 아이들은 참새처럼 제비처럼 벌처럼 쌩하고 달려와서 밥상맡에 둘러앉습니다. 내가 두 손에 책을 쥐면 아이들도 책순이나 책돌이가 됩니다.


  껍데기나 허울만 있는 헛살림이 아닌, 알맹이와 열매가 소담스러운 속살림을 생각해 봅니다. 함께 짓는 속살림을 생각해 봅니다. 서로 사랑하는 속살림을 생각해 봅니다. 1948년 어느 날 학교에서 시킨 “깨뜨리자 삼팔선” 이야기부터 “산밭에서 땀을 흘리는 할배 농사꾼” 이야기가 흐르는 작은 시집 하나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2016.6.16.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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