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3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작은 나라가 마땅히 어여쁘다
 [책읽기 삶읽기 16] 레너드 위벌리,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를 읽다. 이 책을 쓴 레너드 위벌리 님은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를 1953년에 내놓았고, 《달나라 정복기》는 1962년에 내놓았으며, 1969년에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내놓는다. 1981년에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시장 쟁탈기》를 내놓으며 ‘작은 나라’이지만 이름부터 ‘작지 않은(그랜드) 나라’ 사람들이 펼쳐 보이는 싱그러운 웃음을 베풀었다.

 네 작품 모두 첫머리에 모든 실마리와 줄거리가 나타나지 싶다. 《달나라 정복기》 또한 첫머리에 이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를 낱낱이 드러낸다. 아니, 가만히 생각하면, 첫머리이기 앞서 책이름부터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또렷이 밝힌다고 해야지 싶다. 이 작품이 1962년 미국에서 나왔음을 헤아리며 찬찬히 읽어 본다.


.. 지난해에 마운트조이 백작은 예산을 대폭 확충하여, 공국의 산 주위를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도로를 직선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물론 다른 공약들처럼 이 역시 매년 선거 때마다 반복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랜드 펜윅 사람들은 좁아터진데다가 구불구불해서 위험하기까지 한 지금의 도로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국 내에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고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라고 해 봐야 자전거뿐이어서, 사고가 나더라도 비교적 가벼운 수준에 그친다는 이유도 이런 반응에 한몫하긴 했다 ..  (10∼11쪽)


 “농부들은 미국의 호의를 의심스러워하는 한편, 막대한 자금이 국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까닭에 하나같이 벤트너를 지지했다. 반면 빨래를 할 때마다 주전자에 물을 데워 나무 빨래통을 채워야 하는 주부들은 마운트조이 백작을 열렬히 지지했다(103쪽).”는 대목은 첫머리에 나온 실마리이자 줄거리를 한결 단단히 뒷받침한다. 작은 나라 ‘그랜드 펜윅’ 사람들은 조금도 바보가 아니요 얼간이 또한 아니며 멍텅구리조차 아니다. 그네들 삶에 걸맞을 빠르기를 알고, 그네들 삶을 언제나 알뜰히 즐길 줄 안다.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는 커다란 나라 꿍꿍이를 걱정할 줄 알며, 제 깜냥과 주제에 알맞게 조촐히 살아갈 줄 안다.

 작은 나라에 굳이 자동차가 있을 까닭이 없을 뿐더러,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곳이 없는 한편, 애써 자동차까지 타고 멀리멀리 나다닐 일이 없다. 작은 울타리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내는 삶이 아니다.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서 알콩달콩 웃음꽃 피우는 삶을 잘 알며 즐기기 때문이다.

 엊그제 자전거를 타고 금왕읍 장날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꽤나 굵직한 공사판 옆을 지나갔다. 멀쩡한 4차선 ‘고속화 국도’ 한쪽을 헐어 살짝 구불텅한 길로 바꾸는 공사인데, 이렇게 구불텅한 길로 바꾸면서 바로 옆에 새로 닦는 고속도로(평택과 제천을 오가는 새 고속도로)하고 이어지는 샛길을 잇느라 바쁘더군. 예전 ‘반듯한’ 길은 그대로 둔 채 고속도로하고 이어질 샛길만 이으면 되는데, 애써 산을 또 깎고 아스팔트길을 새로 깐다. 그야말로 세금이 넘치니까 이런 공사를 한다. 복지와 문화와 교육에 쓸 돈이든 이 나라 환경을 알뜰히 건사하는 데에 쓸 돈이든 펑펑 넘치니까 이런 길 공사에 목돈을 퍼붓는다.

 평택과 제천을 오가도록 한다는 고속도로는 아주 우람하다. 충청북도에는 대단히 높은 산은 없으나 갖가지 산이 끝없이 이어진다. 고만고만한 가파른 산이 한결같이 이어진다. 새 고속도로는 이 고만고만 가파른 산꼭대기나 산중턱을 1자로 뚫는다. 거의 산 높이하고 똑같은 높직하고 굵은 기둥을 세운 다음, 이 기둥에 반반하고 두툼한 시멘트덩이를 올려놓는다. 시골마을 모습을 얼마나 망가뜨리는가를 살피지 않고, 시골 논밭을 얼마나 허물어뜨리는가를 돌아보지 않으며, 시골 산자락을 얼마나 무너뜨리는가를 헤아리지 않는다. 공사를 마치고 자동차로 이 고속도로를 씽씽 달릴 사람들 또한 아무것도 안 느끼겠지. 오로지 ‘1분을 더 줄인다’느니 ‘10분을 더 줄인다’느니 하는 숫자에 얽매이겠지. 이 나라 앞날을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고속도로를 더 많이 뚫어 놓아야 한다고 얘기할 테지. 그런데, 이 나라 앞날을 생각할 때에 이 나라 자연 터전을 깡그리 짓밟는 일은 어떻게 도움이 될까. 무엇을 이바지하고 어떤 보람이 있을까.

 고속도로 둘레에 새로 올라서는 아파트가 몹시 많다. 이들 고속도로 둘레 아파트를 볼라치면 고속도로 옆으로 아파트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소리막이(방음)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는다. 소리막이 울타리를 쌓는다고 모든 자동차 소리를 막을 수 없다. 고속도로 차소리는 웬만큼 막는다지만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와 멈추는 차소리는 고스란히 울려퍼진다. 새벽녘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자동차 소리는 고요한 아파트 건물 사이사이에 메아리처럼 울리곤 한다.

 햇볕을 쬘 권리를 바야흐로 말할 수 있고,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 소리를 안 들을 권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연탄공장 옆에서 탄가루를 들이마시지 않을 권리라든지 제철소나 유리공장 옆에서 쇳가루와 유리가루를 들이마시지 않을 권리 또한 겨우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말할 수 있기 앞서까지는 고스란히 들이마시고 새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차길이나 전철길 옆에서 살아 보면 안다. 아마, 돈이 많아 기차길이나 전철길 옆에서 살 일이 없는 이들은 하나도 모를 테지. 그래서 자꾸자꾸 새 자동차길만 닦으려 하고, 더 널따란 길을 놓으려 하며, 고즈넉하며 사랑스러운 삶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뽑아낼 만한 공사와 행정과 사업만 벌이려 하는지 모른다.

 다시 《달나라 정복기》를 들여다본다. “작년에 그랜드 펜윅을 지나간 자동차는 모두 네 대였습니다. 그로 인해 거위 여섯 마리와 오리 다섯 마리가 죽었고, 양 네 마리가 놀라서 새끼를 조산했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모조리 암놈들이었습니다. 또한 테드 페인터의 모친께서 그때의 자동차 소음 때문에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고생하고 계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12쪽).” 하는 대목이 첫머리에 함께 나온다. ‘작은 나라’인 그랜드 펜윅인 만큼, 이 작은 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넉 대가 지나가는 바람에 거위와 오리와 양 몇 마리가 다치거나 죽었는가’를 알 뿐 아니라, ‘마을 할머니 이름이며 마을 할머니 몸이 어떠한가’까지 안다. 이제 우리 나라는 몹시 커다란 나라가 되어 버린 만큼 대통령 자리에 있든 시장이나 군수 자리에 있든 구청장이나 읍장 자리에 있든 동사무소 일꾼이나 읍사무소 일꾼으로 있든 동네사람이나 마을사람 삶을 모른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 산골집 주소랑 이어진 신니면사무소 일꾼들이 산골마을 삶자락을 헤아려 줄 일이란 없다. 인천에서 지낼 때 창영동사무소 일꾼이나 동인천동사무소 일꾼이 골목동네 사람들 삶을 읽어 줄 일이란 없었다. 똑같다.

 이 시골마을에 버스는 하루에 몇 대 지나가고, 버스를 타기까지 어느 만큼 큰길로 걸어가야 하며, 버스는 어디부터 어디로 오가는지를 면사무소 일꾼들은 모른다. 버스는 하루에 몇 대가 오가며, 몇 시 몇 분에 오는지를 면사무소 일꾼뿐 아니라 버스회사 일꾼마저 모른다.

 지난주 음성읍 장날에 갔을 때에, 무하고 배추하고 ‘값이 좀 내렸다’는 푯말을 붙인 푸성귀 장사꾼들을 보았다. 500원인가 1000원인가 내렸다 하는 무하고 배추 값이란 아직도 3000∼5000원 안팎이다. 그런데 이 무하고 배추란 비료와 농약을 먹고 자란 무하고 배추이다. 비료와 농약을 먹지 않고 자라는 ‘유기농’ 무하고 배추는 값이 얼마일까? 이 나라 사람들은 ‘유기농’ 푸성귀 값하고 ‘화학농’ 푸성귀 값이 어떻게 다른 줄을 얼마나 알려나. 유기농 콩으로 빚으며 소포제와 유화제 따위를 안 넣은 두부 한 모하고, 화학농 콩으로 빚으며 소포제와 유화제 따위를 넣은 두무 한 모 값이 어떻게 다른 줄을 얼마나 알려나. 참말로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알면서 살아가는지 모를 노릇이다. 무엇이 ‘살아가는 즐거움’이요, 무엇이 ‘어깨동무하는 마을살이’이며, 무엇이 ‘내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아름다움’인지를 생각하기나 할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작은 나라’ 그랜드 펜윅 이야기를 두 권째 읽었다. 먼저 《뉴욕 침공기》를 읽었고 《달나라 정복기》가 두 권째이다. 《석유시장 쟁탈기》랑 《윌스트리트 공략기》도 재미있으리라 여기지만 석유 싸움이나 주식 다툼은 그리 돌아보고 싶지 않다. 돈을 사이에 놓고 툭탁질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재미있거나 신나더라도 들여다보기 싫다. 하기는, 《뉴욕 침공기》나 《달라나 정복기》 모두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힘센 나라들이 서로 더 많은 돈을 거머쥐려고 아웅다웅하는 사이에 ‘작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 욕심이 없이 ‘조용하면서 즐겁게’ 살고픈 마음에 ‘큰 나라’ 사람들한테 ‘제발 싸우지 말고 조용히 좀 지내자구’ 하는 말을 건네려고 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어느 책을 읽든 오늘날 한국 같은 바보 나라 뒷통수를 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작은 나라에는 군대가 없다. 무기 또한 석궁 말고는 없는데, 석궁은 무기라기보다는 가끔 들새를 잡을 때에 쓰는 사냥 연장이다. 작은 나라에 있는 칼은 밥할 때에 쓰는 부엌 연장이다.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돈을 빼앗는 깡패란 없다. 작은 나라에 있는 쇠붙이란 논밭을 일구는 데에 쓰는 낫과 호미와 쇠스랑과 쟁기이다. 작은 나라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지만, 자전거조차 안 타고 두 다리로 걷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자전거 마실도 즐거웁지만 두 다리로 한결 한갓지고 느긋하게 거닐며 ‘아름다운 자연 터전’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가운데 너른 넋을 가꾸는 삶이 훨씬 즐거우니까.

 대한민국 제주섬에는 올레길이 있다는데, 대한민국이란 나라에는 ‘따로 도보관광을 하는 길’을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두 다리로 걸을 만한 데’가 거의 사라졌다. ‘따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길’을 수백 수천 억원을 들여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자전거로 홀가분하게 다닐 만한 데’가 거의 없어졌다.

 자전거길이든 거님길이든 돈으로 닦을 수 없다. 사람들 삶터이든 보금자리이든 돈으로 지을 수 없다. 마음으로 닦고 사랑으로 지으며 땀방울로 돌본다. (4343.10.22.쇠.ㅎㄲㅅㄱ)


―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레너드 위벌리 글,박중서 옮김,뜨인돌 펴냄,2006.10.28./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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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람 -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을 만나다
이명원 지음 / 이매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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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식인들 수다는 왜 재미없을까
 [책읽기 삶읽기 13] 이명원, 《말과 사람》



 문학평론을 하는 이명원 님이 지식인이라 할 만한 여섯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책 하나로 묶었다.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 이렇게 여섯 사람이다. 여섯 사람 발자취를 곰곰이 더듬는다면 틀림없이 이 여섯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따로 한 권씩 책으로 낼 만하다. 모두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며, 늘 숱한 말을 내어놓는 사람이다. 이들이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또는 어중간하게 있든 대수롭지 않다. 어느 쪽에 있거나 스스로 줏대 단단히 세우며 살아가면 된다. 어느 쪽에서 무얼 하든 옳고 바르며 참된 넋으로 착하고 사랑스러우며 곱게 살아간다면 된다.

 이명원 님은 문학평론을 하기 때문에 《말과 사람》이라는 책에 실린 여섯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주 마땅하다. 이명원 님으로서는 헌책방 일꾼이라든지, 분식집 아줌마라든지, 시골버스 기사라든지, 농사짓는 할배라든지, 이주노동자 아무개 씨라든지, 제도권 학교를 일찌감치 떠난 아이라든지 만나기 어렵다. 아니, 만날 수야 있으나 이들한테서 깊고 너른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거나 고맙게 얻어 듣기는 힘들다.

 사람들을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를 책으로 바지런히 엮는 지승호 님이 있다. 이이는 ‘사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꽤 여러 권을 엮었다. 참 마땅한 일이다만, 이 나라에는 이와 같은 책이 퍽 드물다. 모든 책이란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인 만큼, 저마다 다 달리 살아왔으나 따로 스스로 내 삶을 글로 쓸 겨를을 못 내는 사람한테서 몇 시간이나 며칠쯤 이야기를 듣는다면 책 한 권이 저절로 나온다.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당신 이야기를 책으로 알뜰히 묶지 못해서 그렇지, 어떤 사람이든 당신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놓고 보면 몹시 재미나다. 이름난 사람 이야기이건, 이름 안 난 사람 이야기이건 매한가지이다. 온누리에 이름값을 떨친 적이 없을 뿐더러 이름값 떨칠 일조차 없던 우리 할머니 삶이든 옆집 아줌마 삶이든, 이분들은 하루하루를 견디거나 즐기거나 받아들이면서 눈물과 웃음으로 살아냈다. 이분들이 살아낸 삶이 바로 책이며 ‘감동’이다. 다만, 지승호 님이라든지 이명원 님이 내놓은 책은 제법 이름있거나 꽤 널리 알려진 사람들 삶자락에서 맴돈다.

 《말과 사람》이라는 책은 꽤 재미있다. 먼저, 소설쓰는 이문열 님 이야기를 맨 앞에 실어 더욱 재미있다. 《말과 사람》에 실린 이문열 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분이 오롯이 소설쓰기에 온마음 바칠 수 있었다면 노벨상을 노릴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다만, 노릴 수는 있으나 탈 수는 없겠지. 왜냐하면 소설쓰기에만 온마음을 바친다면 소설에 깃드는 글월을 한껏 빛내거나 훨씬 잘 매만질 수야 있다만, 소설이라는 문학에 담는 줄거리에서 밑바탕이 될 ‘글쓴이 삶’은 한껏 북돋우거나 훨씬 아름다이 여밀 수 없으니까. 글만 잘 쓴다 해서 소설이 아니다. 글솜씨 빼어나고 짜임새 대단하며 줄거리 돋보인다 해서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말과 사람》이라는 책이 더 재미있으려면 어슷비슷한(?) 사람들을 여섯 만나기보다, 아주 다른 자리에서 사뭇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섯 만났어야 하지 않느냐 싶다. 아니면, 아예 한 갈래 지식인들만 만나든지.

 《말과 사람》에 실린 여섯 사람 삶을 헤아려 본다. 이분들 삶은 그리 안 다르다 할 수 있다. 한통속으로(?) 묶을 만하니 이렇게 여섯 사람 이야기를 그러모을 수 있다. 또한, 엮은이 이명원 님 삶이 이 여섯 사람하고 비슷하게 흐르니까 이들 여섯 사람을 만날밖에 없기도 하다. 잡지 〈녹색평론〉을 내는 김종철 님은 ‘한국땅에서 변두리라는(?) 대구’를 떠나 아예 서울로 옮겼는데, 이 책을 낼 무렵에는 아직 대구를 송두리째 버리지는 않고 서울에서 오래 머물며 책을 만들었다. 이명원 님은 김종철 님 같은 사람이라면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갔음직한데 외려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오니 아리송하다고 말한다. 맞는 얘기이다. 김종철 님은 “몸이 편안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생각들도 작아지고, 왜소해지는 것이다 … 우리 문학을 보면 결국 땅에서 멀어지니까 야생의 정신이랄까 하는 게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다(218, 219쪽).” 하고 말한다. 김종철 님은 다른 지식인을 놓고 이렇게 이야기했으나, 나로서는 김종철 님 당신 삶이 이와 같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느낀다. 왜 김종철 님 같은 분이 스스로 땅하고 더 가까와지고자 하지 않는가. 왜 이 땅에 두 다리 튼튼하게 박으려 하지 못할까.

 교수 자리에서 쫓겨난 김민수 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이명원 님은 “해직이 되고 보니 그동안 피상적으로 사회를 읽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121쪽).”고 말한다. 이는 김민수 님도 매한가지이다. 교수 자리에서 쫓겨나 강단이라는 울타리가 아닌 ‘수수한 여느 사람들 자리’를 밟으며 돌아다닐 겨를이 나면서(강의를 할 수 없어 생긴 말미) 이 나라를 더 깊이 보거나 더 널리 살필 수 있었단다. 다만, 김민수 님이나 이명원 님이나 ‘겉훑기로 이 나라를 보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뉘우치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부끄러워 하거나 남우세스럽다 여기지 못한다.

 조금 더 시금털털할 수는 없는가. 조정래 님은 “보수 세력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무능 때문에 기득권을 회복하고 있다(48쪽).”고 말한다. 맞는 말이며 옳은 소리이다. 진보 세력이든 개혁 세력이든, 또는 열린 마음이나 깨친 넋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든, 나 스스로 참다웁고 착하며 고운 삶을 일구어야 한다. 참다웁고 착하며 곱게 살아가며 이러한 삶을 글로 담고 책으로 엮을 노릇이다. 처세와 돈굴리기를 다룬 책이 참말 잘 팔리는 흐름을 슬퍼하기 앞서, 사람들이 즐거이 읽을 글을 담은 책을 내놓을 일이다. 이명원 님은 여섯 지식인과 만나서 들은 이야기로 당신 깜냥을 가다듬거나 북돋았구나 싶은데, 이렇게 주워듣기로만 책을 엮어서는 널리 읽자고 건넬 만큼 깊거나 너른 책이 되기는 힘들다.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나를 더 낮추거나 더 드러내야 한다. 내 목소리를 아예 지우거나 내 목소리를 훨씬 키워야 한다. 스승한테서 배운다는 매무새로 이야기를 듣거나, 동네 깡패한테 뜨거운 맛 좀 보여주겠다는 몸가짐으로 타일러야 한다. 여러모로 재미있다 싶을 짜임새이며 이야기책이 될 만한 《말과 사람》이지만 적잖이 어중간한 자리에서 머물고 만다. 아직 이명원 님한테는 ‘글읽기’가 익숙하고 ‘삶읽기’는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지식인이 끄적여 내놓는 글은 읽더라도 지식인이 살아가며 몸으로 보여주는 삶은 읽지 못하는 탓인지 모른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어차피 이렇게 우리 사회 지식인 생각을 귀담아듣는 이야기책을 엮으려 했다면 ‘남자 지식인’ 여섯을 따로 하나, ‘여자 지식인’ 여섯을 따로 하나 묶으면 어떠했으랴 싶다. 그런데, 지식인이라 하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엇비슷할는지 모르겠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지식인이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으니까. 나는 지식인보다는 ‘살림꾼(생활인)’이 좋은데, 살림꾼을 만나 이야기를 즐거이 들으며 찬찬히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기는 몹시 어렵다. 이를테면 만화쟁이 장차현실 님 같은 분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남다르며 재미날까. 애를 둘 키운 공선옥 님 같은 분하고 만나 삶을 나누었다면 얼마나 새삼스러우며 맛깔스러웠을까. (4343.10.19.불.ㅎㄲㅅㄱ)


― 말과 사람 (이명원 엮음,이매진 펴냄,2008.11.2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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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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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그네가 즐긴 아침
 [책읽기 삶읽기 8]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2010년 10월, 《팬티 인문학》이라는 책이 나왔다. 2006년에 숨을 거둔 일본사람 요네하라 마리 님이 쓴 책이고, 이분 책으로는 열 권째 한국말로 옮겨진다. 참 바지런히 옮겨내 주는구나. 그런데 《팬티 인문학》으로 옮긴 요네하라 마리 님 일본책 이름은 “パンツの面目ふんどしの沽券”이다. 우리 말로 고스란히 적바림하자면 “속옷(팬티) 참모습과 훈도시 값어치”가 될 텐데, 한국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 앞에 ‘팬티’라는 이름을 붙여야 제법 눈에 뜨이며 잘 읽히는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미식견문록》은 일본에서 어떤 이름으로 나왔을까? 간기를 보면 알파벳으로 일본책 이름을 적어 놓는데, “RYOKOSHA NO CHOSHOKU”이다. 뭔 소리일까. 다시 더 알아보니, 이 일본말은 “旅行者の朝食”을 뜻한단다. 아하, 그러니까 “길손이 먹는 아침”이다. “나그네 아침밥”이든지.

 문득 궁금하다. 이렇게 ‘딱딱’하고 ‘똑똑’해 보이도록 책이름을 붙여야 요네하라 마리라고 하는 일본사람 글을 빛낼 수 있는가. 이처럼 ‘뭔가 그럴듯하게’ 붙여놓는 책이름이어야 “유쾌한 지식여행자” 이야기가 되는가.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붙은 책을 읽으면, ‘일본사람이지만 일본 바깥으로 오래도록 떠돌아다녀야 하던 요네하라 마리 님이 반갑게 먹거나 즐겁게 먹은 밥’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견문(見聞)’, 그러니까 “보거나 들어서 얻은 지식”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라, 요네하라 마리 님이 몸소 겪고 살아낸 이야기가 조곤조곤 나온다. 책 첫머리인 15쪽을 보면, “고전어 소양은 교육받을 수 있는 카스트에 속한다는 증거요, 신분의 상징이었으니 그 전통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발언 중에 틈만 나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섞어서 교양을 과시하는 것이 웅변술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별것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리라. 일본인이 고사성어를 즐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같은 대목이 있다. 일본사람이 ‘고사성어(또는 사자성어)’를 즐기는 일이란 거드름을 피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글월을 우리 말로 옮기며 ‘일맥상통’이라는 한자말을 집어넣는다. 딱한 번역이라고 할까. 17쪽에 곧바로 ‘뉘앙스’라는 낱말이 튀어나오는데, ‘느낌-말맛-말느낌-맛-마음’ 같은 우리 말로 옮겨적어야 알맞다. 175쪽 “이거야말로 내가 지으려는 집의 콘셉트가 아닌가”는 뭔 번역이랄 수 있으려나. “집 모양”이나 “집 얼개”나 “집 생김새”나 “집 모습”쯤으로 적어 놓아야 알맞다. 번역이 얄궂은 대목을 하나만 더 든다면, 158쪽 “의학자 디오스코리데스도 양배추의 약재로서의 효능을 칭찬하며”가 있다. “양배추가 약재로 좋다고 칭찬하며”쯤으로 적어 주어야지. 토씨 ‘-의’를 잇달아 쓰는 일본 말투를 그대로 옮기면 어떡하나. 이런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달린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출판사에서 처음부터 요네하라 마리 님 삶과 마찬가지로 애써 치레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좋아하는 흐름에 몸을 맡기어 즐겁게 살아가는 느낌을 북돋는 마음결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번역자는 책이름부터 살포시 붙이는 가운데 한결 따뜻하게 옮겼다면.

 이 책을 읽을 한국사람은 무엇을 느껴야 좋을까. 이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무엇을 생각해야 좋은가. 지식을 다루는 《미식견문록》인가? 삶을 말하는 《미식견문록》인가?

 꽤 거추장스러운 이름이요 속이 빈 이름이며 지나치게 부풀려 놓은 이름 때문에 자꾸 곁길로 샌다. 요네하라 마리 님한테는 ‘미식(美食)’, 곧 “좋은 밥”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펼치며 자랑하려고 이런 책을 썼겠는가. “나는 ‘버려진 아이들이 모험 끝에 성장하여 돌아온다’는 구조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그만큼 빈번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부모들이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옛날이야기는 그런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142∼14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따사로운 손길을 느낀다. 책이름은 어줍잖게 《미식견문록》이지만, 정작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따숩게 마주하는 ‘밥 한 그릇에 얽힌 웃음과 눈물’이지 싶다.

 요네하라 마리 님으로서는 이 책에서 내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듯한 요즘이지만, 자신을 조국에 묶어 두는 가장 튼튼한 동아줄은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좀 걱정스럽다. 요즘 와서 편의점 음식으로 크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217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신이 어린 날부터 가까이 놓고 즐기던 먹을거리란 바로 ‘배고픔만 채우는 밥’이 아니라 ‘내 어버이가 지내온 나날을 헤아리고 내 어버이와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여는 실마리가 되어 주는 밥, 한 마디로 ‘이야기 밥’임을 밝히고 싶었구나 하고 느낀다. 미국사람들이 자꾸 전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에 빠져드는 까닭이란 바로 ‘미국사람 스스로 먹는 밥’ 때문이요, 일본사람 또한 미국사람과 비슷하게 밥을 먹으며 살고 있기에 일본사람들조차 미국사람처럼 전쟁에 무디어지거나 전쟁에 미쳐 버리는 바보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스스로 즐겁게 살고플 뿐 아니라 따뜻하게 살고프며, 스스로 재미나게 살고플 뿐 아니라 아름다이 살고픈 넋을 글줄에 예쁘장하게 엮어 놓은 글쟁이 요네하라 마리 님이겠다고 느낀다. 창작이 아름답다면 번역 또한 아름다울 노릇이다. 다시 번역 얘기를 하고프지 않으나 두 가지를 더 들어 본다.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는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는 노릇을 하는지도”로 다듬어 주고,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는 “틀림없이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밥이다”로 다듬어 주고 싶다. 낱말은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말투는 고쳐야 한다. 낱말을 그대로 두고 싶다만 ‘역할’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둘 수 없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야 하니까. 요네하라 마리 님은 늘 생각을 하면서 살아낸 한 사람일 테니까.

 책을 덮으려다가 끝자락에 붙은 글쓴이 말을 거듭 읽는다.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 못 차리지만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전문가도 아니요, 미각에도 자신이 없다(245쪽).” 그런데 책이름은 《미식견문록》이다. 그지없이 슬프다.

 나는 집 바깥보다 집 안에서 더 오래 지내며 아이를 함께 돌본다. 웬만한 집일은 거의 다 한다. 이렇게 할밖에 없는 집 형편이지만, 집일을 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있어도 ‘집살림 잘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대단하다 말할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하나도 대단할 구석이 없을 뿐더러 제대로 못하는 대목이 많다. 이런 나한테 ‘육아의 달인’이라거나 ‘살림 전문가’란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가시방석일까. 그나저나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새겨진 책에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이란 말까지 덧달린다.

 끔찍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책을 팔아야 하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요네하라 마리 님 글을 읽혀야 하나. 사람들 누구나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좋은 밥을 즐기는 삶을 꾸리는 이야기를 수수하게 나누는 길을 여는 좋은 책으로 만들어서 내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울까. 아무래도 무엇이든 한국으로 들어오면 좋았던 책도 좋게 여기기 힘들고, 고왔던 이야기도 고운 이야기로 아로새기기 어렵구나. (4343.10.12.불.ㅎㄲㅅㄱ)


― 미식견문록 (요네하라 마리 글,이현진 옮김,마음산책 펴냄,2009.7.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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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산책자 - 대영박물관에서 떠난 13갈래 문명기행
이케자와 나츠키 지음, 노재명 옮김 / 산책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대영박물관이 품은 문화유산은 쓰레기
 [책읽기 삶읽기 5] 이케자와 나쓰키, 《문명의 산책자》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가리킨다는 ‘문명(文明)’이라고 합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는 ‘인류(人類)’랍니다. 온누리에 손꼽는 몇 가지 커다란 ‘문명’이 있다고 하는데, 커다란 문명을 돌아보면 모조리 ‘큰 도시를 이룬 터전’입니다. 수수하거나 조촐하게 농사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든지, 짐승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놓고는 ‘문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갖가지 전기·전자 제품을 쓰는 사람을 가리켜 ‘문화인’이라 합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두고 ‘문화인’이라 합니다. 하다못해 손전화를 안 쓴다거나 셈틀을 안 쓴다거나 하면 ‘원시인’이라 합니다. 극장에 갈 일이 없거나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지 않거나 하면 ‘원시인’이라 합니다.

 “대영박물관에서 떠난 13갈래 문명 기행”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명의 산책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명’이란 무엇을 말하고 ‘문화’란 어떤 대목을 가리키는지 자꾸자꾸 알쏭달쏭합니다. 몇 가지 흙그릇이나 돌연장을 남겨야 문명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이나 건물을 지어 놓아야 문명을 이룩한 셈인지 아리송합니다. 조용히 살며 쓰레기(문화재) 하나 안 남기는 삶이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화재로 삼는 ‘유물’이란 “남겨 놓거나 대물림을 하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땅에서 캐낸 ‘쓰레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몇 백 해가 흐르거나 즈믄 해가 흘렀어도 썩거나 바스라져 흙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남아 있으니 ‘쓰레기’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값어치’를 따져 비닐봉지하고 문화재는 다르다 말하지만, 앞으로 즈믄 해가 흐른 뒤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많이 쓰는 비닐봉지를 놓고 ‘2000년대 생활문화 발자국’으로 삼아 문화재가 될는지 안 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 똑같은 비닐봉지 가운데에서도 2005년 대구 중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하고 2008년 광주 동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하고 2010년 인천 서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를 따로따로 뜻깊은 문화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2100년쯤 ‘비닐봉지 박물관’을 누군가 세운다면 이런 비닐봉지는 얼마든지 문화재가 됩니다. 2010년 오늘날에도 1970년대 새우깡 과자봉지나 1980년대 초코파이 과자봉지는 얼마든지 문화재 노릇을 합니다. 아니, 문화재 노릇을 톡톡히 하며 무척 비싼 값에 사고팔립니다. 쓰레기통에 처넣으면 그예 쓰레기입니다만, 1985년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쓰던 ‘까만 봉지’라는 자취가 남아 있으면 이런 비닐봉지 또한 얼마든지 문화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제 구멍가게에서 사다 마신 깡통맥주를 안 버리고 서른 해쯤 놓아 둔다고 생각해 보셔요. 아니, 스무 해나 열 해만 그대로 놓아도 ‘어, 옛날엔 이랬구나.’ 하면서 문화재 구실을 합니다. 베스킨라빈스 얼음과자 주걱이든 700원짜리 얼음과자 막대기이든, 어떻게 바라보거나 다루느냐에 따라 쓰레기가 되거나 문화재가 됩니다.


.. 일본 음식은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음식이라기보다 공업 제품에 가깝다 ..  (25쪽)


 이야기책 《문명의 산책자》는 영국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만난 문화재를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닌 ‘이 문화재가 처음 있던 곳에서 어떤 모양으로 사람들 손을 탔는가’를 몸소 알아보고 싶어 지구 곳곳을 찾아다닌 발자국을 차곡차곡 담습니다. 아무래도 “공업 제품 아닌 밥”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글쓴이라서, 유리 진열장에 처박힌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들 손을 타는 살림살이를 만나고 싶었겠지요. 유리 진열장에 처박히면 무척 값나가거나 값비싼 쓰레기가 되지만, 사람들 손을 타는 동안에는 값어치를 따지지 않을 뿐더러 몹시 값싼 살림살이입니다. 할머니 적부터 쓰던 숟가락이란 집에서 늘 쓰면 그냥 살림살이이며 돈값으로 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밥숟가락 하나일지라도 박물관에 옮겨놓으면 비싸구려 문화유산이 됩니다. 자개장이든 노리개이든 무쇠솥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살아가며 쓰면 소담스러운 살림살이인 지게이지만, 박물관에 들어서면 곰팡이가 슬고 좀이 먹는 나무쓰레기요 짚쓰레기입니다.


.. 인도에서는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 사람이 있다. 이런 햇살 아래에서는 나무 밑이 아니라면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없다. 인도인은 사람이 바깥에서 활동을 해 나가려면 우선 그곳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  (96쪽)


 오늘 이 나라 한국땅 어디에서나 무섭도록 올라서는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바라볼 때면 우리 스스로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문화재처럼 여긴다’고 느낍니다. 2020년이나 2030년이나 2050년에 새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갈 뒷사람한테 오늘날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문화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어하네 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그대로 뒷사람한테 물려주지, 우리가 살아가지 않는 대로 뒷사람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이 살아간다면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 삶자락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사랑하며 살아가면 뒷사람한테는 자동차를 물려줍니다. 우리가 더 많고 큰 돈을 바라며 살아가면 뒷사람한테는 더 많고 큰 돈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면 뒷사람은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물려받겠지요.

 《문명의 산책자》를 쓴 일본사람은 당신 두 발로 이 땅을 단단히 디디며 살아가려는 수수한 몸가짐을 보여줍니다. 이 책 하나는 퍽 알뜰히 엮었습니다. 어디 모자라거나 어줍잖은 구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명을 찾아나선다는 사람”이 찾아나선 문화재라는 물건이 얼마나 어떻게 문화재답다 할 만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이룩한 발전이 드러난 물건’이란 무슨 잣대로 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도사람은 사람이 바깥에서 일하자면 나무그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하지만,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기까지는 몇 해가 걸리는가요. 나무는 어떻게 해야 심을 수 있는가요. 사람이 억지로 심을 수 있는 나무일까요. 씨앗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는 나날이란 무엇인가요.

 쓰다 버린, 또는 쓰다가 버려진, 때로는 잘 쓰고 있는데 권력자가 일으킨 싸움 때문에 그만 망가지거나 나뒹굴고 만, 더군다나 큰 싸움을 일으키며 이웃나라한테서 빼앗은 물건이 제아무리 아름답거나 빛나거나 값있다 하더라도 이런 물건을 살피며 ‘인류 문명’을 따지는 일이란 부질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문명에 앞서 내 삶과 이웃 삶과 동무 삶을 들여다보며 어깨동무할 고운 사람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4343.9.27.달.ㅎㄲㅅㄱ)


― 문명의 산책자 (이케자와 나쓰키 씀,노재명 옮김,산책자 펴냄,2009.8.25./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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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잡히지 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해마다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책이기를
 [책읽기 삶읽기 3] 이란주, 《아빠, 제발 잡히지 마》(삶이보이는창,2009)



 지난 2009년 5월 8일에 장만해서 이해 5월 21일에 다 읽은 《아빠, 제발 잡히지 마》인데, 한 해가 지나고 넉 달이 지나도록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가를 갈무리하지 못한다. 글쓴이 이란주 님 첫 책 《말해요 찬드라》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몇 해 앞서 《말해요 찬드라》 느낌글을 쓸 때에도 책을 다 읽고 곧바로 쓰지는 못했다. 한 번 쓴 느낌글을 나중에 크게 고쳐서 다시 썼다. 이 책을 놓고 나 스스로 삭이며 되뇔 대목이 많아 아직 느낌글 하나로 실타래를 풀기 어려울 수 있다. 아무래도 이주노동자 삶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내 삶이기에 《아빠, 제발 잡히지 마》에 깃든 이야기를 섣불리 풀어내지 못한달 수 있다.

 “인천 부천 사는 사람들은 늘 낡은 전철에, 늘 많은 사람에 시달려야 하니 도대체 무슨 죈지 모르겠다(183쪽).”는 대목에 밑줄을 긋고 한참 싱긋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푸념을 하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생각 밖에 꽤 드물다. 인천이나 부천에 제 삶터가 있어도 이렇게 못 쓸 뿐더러, 서울에 제 삶터가 있는 사람은 도무지 모르는 이야기이다. 서울이나 부산에 제 삶터가 있는 사람은 이런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그래도 부천은 인천보다 훨씬 낫다. 부천은 인천보다 서울이 가까울 뿐더러 인천처럼 어마어마하게 크고 많은 공장들로 산업단지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천은 제국주의 일본이 이 나라를 다스릴 때부터 일본땅하고 경성에 물건을 올려바치는 공장터였다. 서울로 잇는 철길과 찻길을 가장 먼저 뚫은 데가 바로 인천인 까닭을 깊이 살피는 사람이란 아주 드물다. 강원도 산골짜기 군대에서 썩어 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알 텐데, 양구 산골짜기에서 휴가를 나오며 받는 ‘휴가비(그래 봤자 집으로 가는 데에 드는 버스삯일 뿐이지만)’는 인천보다 부천을 더 높게 쳐 주었다. 부천은 서울보다 가깝고 인천이 서울보다 먼 데에도 인천은 휴가급지가 서울과 같이 3급이었고 부천은 2급이었다.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는 1급지였다. 1급지이면 휴가비가 3만 얼마였고 2급지이면 2만 얼마, 3급지이면 1만 얼마였다. 인천으로 가자면 서울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들어가서 전철로 갈아탄 다음 들어가야 하니까 부천보다 멀면 멀지 가까울 수 없다. 이를 놓고 따지니까 윗사람(소대장하고 중대장하고 행정보급관)이란 이들이 하는 말, “인천은 직할시이고 부천은 경기도잖아?”

 “중동이니 상동이니 하는, 같은 부천에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는 흔하디흔한 것이 공원이요 분수다. 그러나 중동과 상동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낡은 동네 도당동에는 쉼터 한 자락 없이 빽빽하여 도무지 숨 돌릴 자리가 없다(108쪽).”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몇 사람 꼽을 수 있을까. 모두들 경부운하나 4대강에 푹 빠져 있는 터에, 내 살림터나 내 고향동네에 깃든 말썽거리와 고름을 들여다보며 땀흘리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울에서 큼지막하게 촛불집회를 한다고 외치며 서울로 모이기만 하면 일이 잘 풀릴까. 서울에서 꼭 큼지막하게 뭔가를 해야 하는가. 서울에서 뭔가를 큼지막하게 할 터이니 다들 모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서울로 오는 데에 드는 찻삯은 누가 댈까. 더구나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때에 걸어서 오겠는가. 하나같이 버스나 기차나 자가용을 탄다.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또 국가보안법이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이밖에 숱한 골칫거리이든, 이런저런 아픔과 생채기를 풀자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4대강 사업을 막자는 뜻은 무엇일까.

 지난 2009년 5월 21일에 《아빠, 제발 잡히지 마》를 다 읽으며 책에 몇 가지 이야기를 끄적였다. 먼저 책 속종이에는 ‘땀으로 쓴 책은 다르다. 온몸 부대끼며 오래도록 껴안고 땀으로 쓴 책은 다르다. 땀없는 사람을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있겠나. 낮거나 얕은 그릇이라면, 그러려니 하거나 해야지.’ 하고 끄적였다. 책 안쪽에는 5월 13일에 끄적인 이야기가 하나 보인다. ‘땅에 뿌리박은 사람, 땅을 보살피는 사람, 땀흘려 일하는 사람, 사랑으로 손잡는 사람, 믿고 어깨동무하는 사람, 모두모두 한국땅에서는 바보.’

 이란주 님이 할 일은 무척 많고 몹시 바쁜 줄 안다. 이런 가운데 바지런히 글을 써서 이주노동자 삶을 두루 알리거나 나눈다. 가만히 보면 나도 내 삶이 참 빠듯하고 바쁘다. 아이 하나랑 아픈 살붙이 하나랑 복닥이며 보내는 삶이란 얼마나 빠듯하고 바쁜지. 마감에 쫓겨 얼른 보내 주어야 하는 글이 아니라면, 이제는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글을 쓸 겨를을 내지 못한다(제대로 말하자면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책을 읽을 틈조차 낼 수 없다). 집식구 모두 잠든 깊은 새벽에 홀로 부시시 일어나 신나게 한꺼번에 몰아서 쓸 뿐이다(제대로 말하자면 밤에는 건넌방에서 불을 켜며 책을 읽기도 어렵다). 여느 때에는 ‘잘 하지 못하며 잘 다스리지도 못하는’ 집안일을 붙잡느라 코가 빠진다. 아이 하나일 때에 이런데 아이가 둘이 되면 어떻게 바뀔까. 형과 나를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아이 셋이나 너덧이나 대여섯이나 ……를 키웠거나 키우는 수많은 어머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어디 먼 나라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내 삶을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이주노동자로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 삶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려는 이 땅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삶과 내 어머니 삶과 내 어버이 삶과 내 이웃 삶을 곰곰이 돌아볼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지 못하니, 따로 배우지 않아도 좋은 우리 삶인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집에서 이르는 대로 받아들이며, 딱히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삶인가.

 얼마 앞서 장정일 님 독서일기 한 권이 새로 나왔다. 1994년부터 장정일 님 독서일기가 띄엄띄엄 나오지 않았느냐 싶은데, 이란주 님이 쓰는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 또한 띄엄띄엄일지라도 더 자주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란다면 해마다 한 권씩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책이 우리 누리에 나온다면 기쁘겠다. 2003년에는 찬드라한테 말하라 했고 2009년에는 어린 친구 샤프라를 만났으니, 2010년에는 또다른 누군가와 사귄 삶을 풀어낼 수 있으면 반갑겠다. (4343.9.24.쇠.ㅎㄲㅅㄱ)


― 아빠, 제발 잡히지 마 (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2009.5.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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