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랑을 읽는 삶과 책과 사람
 [책읽기 삶읽기 33] 김점선, 《점선뎐》



 책이란 줄거리읽기가 아닌 삶읽기입니다. 책이란 지식쌓기가 아니라 이야기나눔입니다. 책이란 정보찾기가 아닌 마음읽기입니다.

 어느 책 하나를 읽으면서 줄거리를 헤아리기만 한다면 참으로 덧없습니다. 흔히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책을 읽히고 나서 독후감을 쓰도록 하는데, 이 독후감이라는 글을 읽으면 하나같이 줄거리를 간추려 줄줄줄 늘어놓기만 합니다. 한자말 ‘독후감’이란 “읽은 다음 느낌”을 뜻하는데, 정작 아이들한테 독후감을 쓰라 하는 어른들부터 독후감이 어떻게 써야 하는 글인 줄 제대로 모릅니다. 차라리, 우리 말로 쉽게 ‘느낌글’을 쓰라 이야기한다면, 아이들도 줄거리 간추리기에 허덕일 일은 좀 줄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름만 느낌글로 고쳐서 쓴다 한들, 독후감이든 느낌글이든 책을 읽고 나서 글 하나를 쓴다 할 때에, 또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에서 ‘책 소개 기사’를 싣는다 할 때에 보면, 어김없이 줄거리 늘어놓기에서 허덕입니다.

 어느 책 하나를 찾고 장만하여 읽어서 얻는 삶이란 고작 줄거리에 머물 뿐인 오늘날 대한민국입니다. 책 하나 읽으며 아름다운 삶을 만났다는 느낌글을 찾아 읽기 너무 힘듭니다. 책 하나 읽으면서 글쓴이하고 살가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느낌글을 마주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책 하나 읽고 난 다음, 글쓴이뿐 아니라 내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마음읽기와 마음얘기를 나누도록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 동료가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것은 곧 내 또래도, 그래서 나 자신도 훌륭할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물을 독자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일, 그것은 훌륭한 일이고, 칭찬받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 시골사람들은 그걸 자선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히 나누어 먹는다. 무엇이든 나눈다. 정보도 나누고 우환도 나눈다. 그런 나눔 문화는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이 아니다 ..  (37, 216쪽)


 그림쟁이였던 김점선 님 발자국을 찬찬히 아로새긴 책 《점선뎐》을 읽었습니다. 김점선 님은 당신이 그리고픈 대로 그림을 그렸다 합니다. 김점선 님은 당신이 살고픈 대로 한삶을 보냈다 합니다.

 김점선 님 그림이 좋은지 안 좋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딱히 제 마음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아니라 더욱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 그림을 흉내내어 그렸다고는 느끼지 않아 반갑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라 해서 더 훌륭한 그림일 수 없어요. 제가 안 좋아하거나 몰라보거나 눈길을 안 두는 그림이라 해서 덜 떨어지거나 형편없는 그림일 수 없습니다. 그저 그림은 그림입니다.

 김점선 님이 꾸린 삶 또한 ‘좋다 나쁘다’라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 김점선 님 삶은 그예 김점선 님 삶입니다. 김점선 님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즐겼다고 흙으로 돌아간 삶이면 넉넉합니다. 아쉬울 대목이란 슬플 대목이란 서운할 대목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따라 씩씩하고 힘차며 슬기롭게 걸어가면 될 삶입니다.


.. 그전까지 어른들이 내 앞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낮춰 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은 한결같이 의욕에 차서, 욕망에 부풀어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까지 어른들은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너희들이 뭘 아니 하면서 잘난 체하든지, 나를 소외시키든지 했었다 … 내가 실컷 놀고 들어가서 져넉 밥상머리에서 오늘은 이런저런 놀이를 했다며 즐겁게 떠들면 어머니는 자기도 어려서 그런 놀이를 했었는데 아주 신이 났었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친구같이 여겨져 아주 기분이 좋았다 … 나는 우리 나라에서 활기차게 아무 데나 다니면서 아무나 만나면서 천진난만하게 살고 싶다 ..  (51, 61, 310쪽)


 책이란 내가 좋아하는 삶에 걸맞게 찾아서 만나는 읽을거리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삶을 억지스레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꾸릴 수 없습니다. ‘뜻을 이룬다(성공)는 생각으로 이름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엉뚱한 데로 흐르도록 한다면 참 안쓰럽습니다. 한 나라에서 손꼽히는 그림쟁이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온누리에 첫손 꼽히는 그림쟁이로 사랑받아야 할 까닭이 있나요.

 나는 내 삶터에서 내 그림을 좋아하며 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넉넉합니다. 김점선 님은 다른 사람 말고 김점선 님 스스로 당신 삶을 사랑하며 당신 그림을 좋아하면 넉넉합니다.

 《점선뎐》이라는 책, 이른바 김점선 님 자서전은 당신 스스로 죽음이 곧 다가왔구나 하고 깨달으며 허물없이 털어놓은 이야기책입니다. 김점선 님 스스로 당신 삶을 참다이 사랑했는지, 거짓스레 사랑한다 말했는지, 아쉬움은 있는지, 얼마나 즐거운 삶이었는지를 곰곰이 돌아보며 적바림한 일기장입니다.


.. 홀로 나의 길을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자신이 가장 원하는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철학적인 사고체계 같은 거는 다 바다에 처넣어 버리고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 결국 그림도 생각을 벗어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생각을 더 많이 해서 생각이 가지게 되는 해석마저 제거해야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는 세상이다. 지금의 청년들을 기른 어른들 자체가 일률적인 가치관이니 이 꼴이 된 것이다. 청년의 부모들이 오직 밥 먹고 사는 데 허덕이던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  (110, 111, 274쪽)


 책을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김점선 님 이야기책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림쟁이 한 사람 삶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삶이요 어디에서나 보는 여느 이웃입니다.

 박수근이면 어떻고 이중섭이면 어떠하겠습니까. 박수근이든 이중섭이든 김점선이든, 하나같이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간 이웃입니다. 또는 동무입니다. 때로는 동생이고, 누군가한테는 살붙이일 테지요.

 대단하다 싶은 사람이 쓰는 자서전이 아닙니다. 내 삶을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자서전입니다. 많은 사람들한테 널리 읽히려고 쓰는 자서전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며 내 한길이 얼마나 즐거웠는가를 짚어 보고자 쓰는 자서전입니다.

 자서전은 뉘우치는 책이 될 수 있고, 아쉬워하는 책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이 저물고 죽음 문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내 한삶을 되짚는 가운데 내 뒤에 선 숱한 사람들한테 한 마디 남겨 놓는 선물입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고 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나한테 어떠하더라 하고 이야기를 걸면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서 보배롭게 보듬을 대목이란 무엇이더라 하고 깨달은 여러 가지를 적바림하는 일기장입니다.


.. 무언가를 아끼고 무언가를 조심하느라 주춤거리고 그러면서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닌 협잡꾼이다 ..  (386쪽)


 김점선 님은 “대기업 앞에 길게 줄서는 청년들의 머리속에, 일류대학에 목맨 부모나 학생들의 머리속에 다른 꿈을 심어 줘야 한다(274쪽).”는 이야기를 남기며 삶을 마무리짓습니다. 생뚱맞은 이야기가 되려나요. 자서전이라는 글을 쓰면서 이 같은 이야기를 적는 사람은 좀 엉뚱하다 싶으려나요. 그렇다고 김점선 님이 제도권 교육을 나무란다든지 자율학습·보충수업 때문에 아이들이 얼마나 시들어 간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잘 안다거나 손사래치는지는 알 노릇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다이 살다가 사람다이 죽는 길을 즐거이 걷자면, 누구보다 당신과 당신 아이를 생각한다면, “대기업 앞에 길게 줄서는 청년들의 머리속에, 일류대학에 목맨 부모나 학생들의 머리속에 다른 꿈을 심어 줘야 한다.”는 말을 되뇔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책을 읽는 삶은 사람을 읽는 삶입니다. 사람을 읽는 삶은 마음을 읽는 삶입니다. 마음을 읽는 삶은 사랑을 읽는 삶입니다. 대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대학교이든 갤러리이든 청와대이든 모두 사랑이 아닌 돈입니다. (4344.1.5.물.ㅎㄲㅅㄱ)


― 점선뎐 (김점선 글·그림,시작 펴냄,2003.3.2./13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왔는가 제1권력 1
히로세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아이한테는 돈 아닌 사랑을 물려주고 싶다
 [책읽기 삶읽기 30] 히로세 다카시, 《제1권력》



 일본사람 히로세 다카시 님이 쓴 책 가운데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소 하나가 터지며 생긴 끔찍한 일이 사람들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를 다룬 빼어난 작품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안 돼!’ 하는 외침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는 이렇고, 원자력발전소를 다루는 정치권력은 이런 모습이야.’ 하고 들려주는 작품입니다. 일본에서 1986년에 처음 나오고, 2010년 3월에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옮겨진 《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라는 책은 영화가 아닌 ‘영화산업’이 전쟁 아닌 ‘전쟁산업’하고 어떻게 맞물려 떨어지는 가운데, 이러한 ‘산업’은 미국 정치나 사회하고는 어떻게 맞닿았는가를 찬찬히 파헤칩니다(이 책은 1991년에 《억만장자는 헐리우드를 죽인다》(두레)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결국 어느 쪽이 대통령이 되든 돈의 흐름은 한 방향뿐이어서 끝내는 깔때기의 주둥이가 그들이 석유나 금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게 되어 있다(344쪽).”로 갈무리할 만한 560쪽짜리 두툼한 이야기인데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전쟁 전과 전쟁중,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반도의 독점 지배 회사나 마찬가지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 관리 회사는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모건의 내셔널시티은행이었다(288쪽).” 같은 대목을 만납니다.

 꼼꼼하게 파헤친 뿌리요, 찬찬히 들여다본 밑둥입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니고, 역사를 바로 알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우리 삶이 이루어진 얼개를 옳게 살피면서, 우리 삶을 꾸리는 바른 길을 가다듬자는 목소리를 담습니다.

 《제1권력》,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라는 책 하나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얼굴에 감추어 놓은 속마음을 헤아리는 눈썰미와 마음밭을 가다듬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어두운 극장엔 즐길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여기에서 에디슨은 다시 한 번 그만의 능력을 발휘했는데, 새로운 기계나 전등을 발명한 게 아니라, 이번엔 에로티시즘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발명한 것이다 … 에디슨연구소는 영화계에서 추방된 보상으로 모처럼만에 모건에게서 새로운 직무를 부여받고 군함용 전화, 대포의 조준과 발사 장치, 연막용 발연통 등을 잇달아 개발하여 듀폰과 호흡을 맞추며 살인 병기의 발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31, 118쪽)


 교과서이니까 배워야 하는 책이 아닙니다. 교과서는 제도권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시험성적을 판가름할 때에 쓰는 장치입니다. 교과서가 아주 그릇된 지식이라 할 수 없으나, 교과서가 아주 바른 지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교과서는 그저 ‘교과서’라는 이름이 붙은 ‘시험 성적 재는 장치’입니다. 모든 아이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워 놓기에 쓸 만한 장치예요.

 교과서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는 시험 교재입니다. 교과서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읽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워 외울 뿐입니다. 교과서 지식으로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교과서로는 시험성적 등수 매기기나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로 시험성적을 가늠하고, 대학교에서는 다른 교재로 학과성적을 가늠한달지라도, 이러저러하여 높은 성적을 거둔 아이가 회사나 공장에 들어가 본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새로 익혀야 합니다. 교과서라는 장치는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제대로 지식을 외워 받아들일 만하느냐’를 따지는 잣대이기 때문에, 이런 잣대 나누기에서 평점이 좋다면, 회사나 공장에 들어가서도 ‘새로운 교과서와 같은 장치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가르칠 때에도 한결 빨리 받아들여 더 빠르게 회사사람이나 공장사람이 될 만한가’를 헤아립니다.

 교과서 지식만큼 시험성적이나 학과성적은 덧없는 숫자놀음이고, 대학교 졸업장이든 중·고등학교 졸업장이든 어느 한 사람 삶이나 넋을 판가름하는 틀이 되지 못합니다.

 아주 마땅한 소리인데, 교과서를 달달 외워 시험성적이 잘 나온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낱 교과서 지식을 잘 추슬렀다뿐입니다. 또한 아주 마땅한 소리로, 교과서를 잘 못 외워 시험성적이 떨어진다 해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에요. 교과서는 시험성적 재는 잣대이지, 삶을 읽는 슬기가 아니거든요.

 시험을 잘 치는 아이가 시를 잘 쓰거나 자동차를 잘 몰거나 착한 사람이거나 책을 옳게 잘 꿰뚫어볼 줄 알지 않습니다. 시험도 잘 치고 소설도 잘 쓰는 아이가 더러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시험은 시험이고 교과서는 교과서이며, 책은 책입니다. 이런 테두리를 찬찬히 가누는 눈썰미로 《제1권력》을 집어들어야 합니다. 《제1권력》은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을는지 모를 섣부른 ‘굽은 지식(선입관과 편견)’을 반반하게 펴도록 돕는 책입니다.


.. 모건과 록펠러가 부를 독점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을 매고, 그들이 보낸 폭력단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당대의 모건 일당은 이를 동물계의 약육강식 원리라고 버젓이 주장했던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다윈이 설파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간의 추악한 욕망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 무지막지한 인간의 행동도 모두 자연의 섭리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이었다 … 록펠러는 세간의 비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판소의 명령대로 스탠더드오일을 몇 개로 분할했지만, 설령 천 개 회사로 분리해도 그 주식을 록펠러가 쥐고 있는 한 트러스트 해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잠자코 있어도 금고의 돈다발이 30%나 불어나는 묘한 현상만을 목격할 따름이었다 … 〈게르니카〉로 반골 정신을 한껏 보여준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록펠러 센터의 벽화 의뢰를 왜 신경질적으로 거절했겠는가? ..  (98∼99, 113, 115쪽)


 돈을 많이 번다고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 가운데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돈과 사람됨은 사뭇 다릅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슬기롭거나 아름다운 사람이지는 않아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착하거나 멋스러운 사람이라 할 만하겠습니까.

 누군가는 100억을 그러모았으나 100조를 거머쥐려고 끝없이 돈굴리기를 합니다. 누군가는 100권을 읽었으나 1만 권을 읽거나 10만 권을 읽어치우려고 책읽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돈굴리기로 나아가는 사람은 돈을 긁어모으면서 참답거나 착하거나 고운 삶을 잃거나 놓치거나 내버립니다. 책굴리기로 뻗어가는 사람은 책을 읽어치우면서 참답거나 착하거나 고운 삶을 잊거나 놓거나 걷어찹니다. 돈을 긁느라 사람다이 살아가지 못하고, 책을 그러모으느라 사람답게 살아내지 못합니다.


.. 모건상사가 무솔리니에게 거금을 융자하던 1925년, US스틸 중역실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때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따로 진행되던 수사국의 권력 확대와 파시즘의 대두가 일거에 결합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그것이다 … 전쟁은 당연히 투기사업이지만, 학살도 역시 세세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투기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인간을 대량으로 죽여야 한다면, 이 일을 청부하는 자들이 하는 일은 어엿한 비즈니스여야 된다. 따라서 그저 이유도 없이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게 아니다 … 이 하버드대학의 총장은 오래전 무고한 노동자 사코와 반제티를 전기의자에 앉히라는 최후의 권고를 한 인물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발표를 받아서 록펠러의 파트너로부터 은밀한 지원을 받으며 백악관에 입성한 트루먼 대통령이 나치스로부터 십자공로훈장을 받은 포드재단의 총재 호프만을 마셜플랜의 책임자로 임명했고 ..  (136, 186, 253쪽)


 ‘돈굴리기’와 함께 ‘책굴리기’라 했습니다만, 책굴리기란 ‘지식굴리기’입니다. 나날이 지식 쌓는 사람 많고, 지식 늘어난 사람 많습니다만, 삶을 올바로 읽는 지식이라거나 삶을 알차게 살찌우는 지식으로는 거듭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소식과 저런 이야기는 훤히 꿴다지만, 정작 이런 소식과 저런 이야기하고 얽힌 속내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지식이란 덧없다고 느낍니다. 운전면허시험에서 100점을 맞는다고 자동차를 몰 때에 느긋하거나 알맞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니라 내 살림을 나누거나 쪼개어 이웃사랑을 아름다이 펼치는 삶이어야 아름답습니다. 내가 날마다 받아드는 밥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찬찬히 살피어 내 밥거리를 내 손으로 일구어 보려고 힘쓰는 삶일 때에 즐겁습니다.

 우리 아이한테 돈을 물려주는 일이란 썩 나쁘지는 않다고 느끼지만, 돈만 물려줄 수 있는 어버이라면 너무 슬픈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느 무엇보다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과 꿈과 나눔과 해맑음과 아름다움을 물려줄 수 있을 때에 참으로 기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한테 사랑 한 줌 믿음 한 줄기 꿈 한 포기 나눔 한 소쿠리 해맑음 한 바구니 아름다움 한 자락 나눌 수 없으면 얼마나 쓸쓸하거나 덧없으랴 싶습니다. 아이한테 대학 졸업장만 남긴다든지, 아이한테 아파트 한 채만 남긴다든지, 아이한테 자동차 열쇠만 남긴다든지 하는 어버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우랴 싶어요.


.. 결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한창 유명해지고 있는 와중에 〈킹콩〉이 등장한 것이다. 〈환호의 선풍〉의 아역배우 셜리 템플은 은행총재의 딸이었다 … 〈그린 베레〉 같은 메시지가 있는 작품보다는 〈킹콩〉이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오락물이야말로 월가의 주가를 높이고 비즈니스를 쉽게 만들어 주는 작품일 것이다 … 이 풍요로운 한 줌의 미국인이 하는 일이란, 이들 자원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조하고 또 다른 자원 확보를 위해 해외 침략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분명 미국 국가 예산의 70%가 ‘국가안전보장’이란 명목하에 쓰였던 1960년대까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도, 오늘날에도 역시 약 30%가 군사비로 책정된다 … 문제는 그 70%가 30%로 떨어지면서 대량의 실업사태를 낳았다는 점이다.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참으로 가련한 국민이 되고 만 것이다 ..  (168, 169, 475쪽)


 《제1권력》이라는 책은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라는 이름을 달고 새로 나왔습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에 붙은 이름은 “억만장자는 헐리우드를 죽인다”입니다. 억만장자는 당신들 돈과 이름과 힘을 더욱 부풀리는 가운데 당신들 돈과 이름과 힘에 다가서려는 이들을 억누르거나 쫓아내려고 헐리우드를 만들었으나, 나중에 이 헐리우드를 무너뜨리려고 라디오방송과 텔레비전방송을 키웠습니다. 헐리우드 배우와 영화작품이 돈과 이름과 힘을 비웃는 한편 돈과 이름과 힘이 어떻게 태어나서 커지는가를 파헤쳐 꾸짖었거든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라디오방송과 텔레비전방송이 태어났을 무렵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두 방송 매체가 ‘돈과 이름과 힘’하고 동떨어진 길을 걸어 본 적은 없다고 느낍니다. 권력과 가까이 손을 잡거나 권력자 손아귀에서 춤추는 방송 매체 틀이지, 권력을 감시한다거나 권력을 비판한다거나 권력 밑바탕을 캐내어 사회를 밝히려 하는 방송 매체라고 느낄 만한 때는 아직 없다고 봅니다. 방송 매체란 돈이 되고 이름이 되며 힘이 되는 길만 걷거든요.

 그러나,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억만장자이든 엄청난 권력자이든, 이런저런 부자나 권력자 아닌 여느 사람이든, 오늘날 삶자락을 살피면 한결같이 돈바라기와 이름바라기와 힘바라기로 기울어집니다. 사랑바라기나 믿음바라기나 나눔바라기하고는 좀처럼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 밥그릇이 더 커지기를 바라지, 이웃하고 나눌 밥그릇을 마련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 자동차가 더 커지기를 꿈꾸지, 이웃한테 길을 내주거나 내 자동차를 버릴 꿈을 꾸지 않습니다. 내 아파트가 너 커지기를 꾀하지, 아파트를 떠나 시골이나 도시 골목동네 자그마한 보금자리에서 어깨동무하기를 꾀하지 않아요.

 미국땅에서 미국을 주무를 뿐 아니라 온누리 구석구석을 주무르면서 돈이랑 이름이랑 힘을 거머쥐는 두 재벌 봉우리인 ‘록펠러’하고 ‘모건’이라 합니다. 《제1권력》이라는 책은 이 두 재벌 봉우리 맡바탕과 속내를 샅샅이 들추면서 빈틈없이 들여다봅니다. 이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나 끔찍한 짓을 따로 다루지는 않되, 이들이 어떻게 오늘날 자리에 올라섰는가를 밝힙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다르게 바라보며 다루었다면 ‘성공신화 자기계발서’가 되었겠지요. 또 다른 눈길로 바라보며 다룬다면 ‘노동자 탄압 역사’를 쓸 수 있었을 테고, 또 다른 눈매로 살피며 다룬다면 ‘미국 사회를 보며 한국 사회 읽기’를 쓸 수 있겠지요.

 그나저나 궁금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데에 바쁜 그분들께서는 당신들 바쁜 나날이 얼마나 즐거울는지요. 돈 버는 재미 하나로만 이 땅에 태어나 흙으로 돌아갈는지요.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펼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재미나 즐거움이란 하나도 모르는 채 한삶을 마무리한다면 그지없이 불쌍한 노릇이 아닐는지요. 아이들한테 고작 돈굴리기 하나를 물려준다면, 이와 같은 삶이란 얼마나 슬플까 궁금합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 제1권력 (히로세 다카시 글,이규원 옮김,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2010.3.20./25000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w0607 2011-02-2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 잘 읽었습니다. 몇몇 문장을 소리내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네요.
이런 좋은 글을 만나는 아침엔... 갑자기 없던 힘마저 납니다.
누군가 나와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좋은 친구 혹은 스승을 만났다는
기쁨에 배가 부르네요 ^^ 기분 좋게 일 시작하렵니다 ^^

숲노래 2011-02-28 11:18   좋아요 0 | URL
언제나 새로운 하루 기쁘게 맞이하셔요.
곧 삼월이 되는군요~
따스하면서 넉넉한 봄이 찾아오겠네요~~~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내 삶은 내가 사랑해야 아름답다
 [책읽기 삶읽기 29] 유미리,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일본책 이름은 “私語辭典”이었으나 한국책 이름은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인 유미리 님 산문책을 읽다. “내 말 사전”이랑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느낌이요 흐름이요 이야기일 텐데, 왜 한국책에는 이런 이름이 붙을까. 누가 이런 이름을 붙였으려나. 문학을 하는 유미리 님은 ‘국어사전(일본에서 살아가니 일본어사전이라 하겠지)에 풀이된 말뜻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고 여겨, 당신이 살아온 나날을 곱씹으면서 “내 말 사전”이라는 책이름을 붙였을 텐데, 한국책에서 책이름을 좀 고쳐서 멋스러이 보인다든지 눈에 뜨이게 한다든지 책 좀 팔아 보겠다든지 한달지라도, 작은이름으로 “내 말 사전”으로 나왔던 책임을 알아보도록 해 주어야 옳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옅은 빛 잔 글씨로 “The Private Glossary”라 적히기는 했구나. 그런데 일본책에는 이런 영어가 아닌 한자로 책이름이 적었잖은가.


.. 사랑이란 “피를 흘릴 만큼 타자에게 관여하는 일”이란 정의도 있을 수 있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 … 진상을 폭로해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진상 따윈 들을 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모두들 진상보다는 소문을 좋아하는 것이다 … 남의 편지(마음)를 훔쳐보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서 얼마 후 그와 헤어졌다 ..  (8, 40, 56쪽)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책이름을 놓고 궁시렁거려 본다. 왜냐하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에는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라는 말마디하고 유미리 님 삶하고는 그닥 이어졌다고는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미리 님은 당신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즐긴다. 더도 덜도 아닌 당신 고운 삶임을 헤아리며 받아들인다. 싫든 좋든 고맙든 달갑잖든 하루하루 목숨줄을 잇는다. 그렇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프던 나날이 길었던 만큼, 또 이런 나날이 있었던 만큼, 이와 같은 나날 이야기를 조곤조곤 적바림한다.

 누구한테 드러내 보이려고 적바림하는 글이 아니다. 그예 쏟아지는 글이다. 누구한테 알린다거나 참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고 밝히는 글이 아니다. 그예 살아가는 하루하루 틈틈이 솟아오른 글이다.

 조그마한 사람으로서 조그맣게 살아가는 유미리 님이라고 느낀다. 수수한 사람으로서 수수한 삶을 보듬는 유미리 님이라고 여긴다. 당신한테 글쟁이나 문학꾼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여느 ‘애 엄마(이 책을 내놓을 때에는 아가씨)’이다. 잘날 구석이 없으나 못날 구석도 없는 소담스러운 목숨이며 삶이다.

 문득 궁금하기는 하지만, 또 앞으로는 어떠할는지 모르는데, 유미리 님이 도시 한복판 사람이 아니라 시골 한구석 사람이라면 어떠한 글을 쓰려나. 아이와 둘이서 꾸리는 삶은 어떠한 결 어떠한 무늬 어떠한 빛깔일는지 궁금하다. 이제 아이가 제법 컸을 텐데, 아이하고 어떤 이야기를 어떤 살림살이로 주고받는지 궁금하다.

 당신이 배를 앓으며 낳은 아이를 젖이 아프도록 물리고 몸이 고되도록 돌보면서 키우는 나날을 어찌 돌아보는가 궁금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유미리 님 다른 산문책 《생명》에 잘 나왔으리라 본다. 《생명》도 곧 읽을 생각인데, 2000년에 나온 작품 《생명》이 아니라, 2010년이나 2011년 삶자락 목소리를 듣고 싶다.


.. 나는 여자를 싫어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던 탓일까 … 내가 처음으로 성욕을 느낀 것은 몇 살 때였을까. 성교가 아니라, 사람과 몸을 나누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라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품고 있었다 … 나는 여자와 작가를 양립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런 데다 엄마나 아내 역할까지 하라고 하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  (18, 34, 99∼100쪽)


 아이하고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한 주 이레, 한 달 서른 날을 꼬박 붙어 지내는 동안, 웃고 떠들며 안고 어르기도 하지만, 이맛살 찌푸리며 꾸중을 하기도 한다. 아이 엄마 말마따나 아이 아빠는 아이 눈높이하고 똑같거나 어쩌면 아이 눈높이보다 낮기 때문에 아이한테 토라지기까지 한다. 하기는, 아이한테 골을 부리는 아빠란 어디에 있을까. 아빠가 아이를 달래기도 하지만, 아이가 아빠를 달래기도 한다. 아이랑 아빠가 다르다면, 아빠는 아이가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가 입을 옷을 빨며 아이가 잠들 잠자리를 추스른다. 아빠는 아이를 수레에 태워 자전거를 달리고, 아이가 먹을 밥거리를 벌어서 값을 치르며, 아이가 누릴 물건을 가방에 짊어지고 다닌다.

 아빠라는 자리는 어떤 삶일까. 엄마라는 자리는 어떤 삶이려나. 아이라는 자리는 또 어떠한 삶인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내가 아이였을 적을 늘 돌이킨다. 아이와 복닥이면서 내가 아이하고 복닥이는 이 느낌이, 내가 아이만 한 나이였을 때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는 어떠했고, 우리 옆지기는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는 어떠했으려나 하고 곱씹는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읽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삶을 읽을 텐데,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서로 제 삶을 여민다. 유미리 님 산문책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를 읽으며 유미리 님 삶을 돌아보는 가운데 내 삶을 돌아본다. 유미리 님은 유미리 님대로 일본땅에서 ,나는 나대로 한국땅에서, 저마다 슬기로우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맞이할 노릇이라고 느낀다.


.. 여성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눈썹, 복사뼈, 엉덩이 사이에서도 … 성은 환상에 지배되기가 예사인데, 여자들이 남자들의 환상을 받아들여 악전고투하는 꼴은 어째 좀 이상하다 … 나 자신은 욕망이 강한지 약한지 잘 모른다. 내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청소기도 없다. 전기밥솥도 없다. 일반적인 집에는 흔히 있는 것이 없는 셈인데, 별로 갖고 싶은 생각도 없다. ..  (48, 71, 118쪽)


 번역은 영 마땅하지 않다. 첫머리부터 “말을 사용(使用)한다(7쪽)”라 적바림하더니, 마지막까지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感謝)를 드립니다(182쪽)”라 적바림한다. 이렇게 번역을 해도 될까. 이런 번역도 번역이라 할 만한가. 이 책을 옮긴 한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우리네 번역은 이러한 말굴레에서 허덕이는지 슬프다. 왜 우리네 창작꾼이나 번역꾼은 우리 말글을 조금 더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는지 서글프다. 왜 우리네 문학은 더욱 넉넉하며 푸진 말잔치가 아니라, 더욱 쪼그라들거나 짓눌린 말다툼으로 그치는지 서운하다.

 “섹스는 의사(擬似)적인 죽음이며(23쪽)”는 번역이 아니다. 일본글을 우리 말이 아닌 한글로만 적은 글이다. “실제와 비슷하다”는 뜻이라는 ‘擬似’인데, 일본사람이 쓰는 일본말 ‘의사적’을 굳이 고스란히 살려야 하는지 아리송하다. 홍세화 님은 우리 말로 ‘너그러움’이라 하지 않을 뿐더러, 한자말로 ‘관용’이라고도 않고 프랑스말 ‘똘레랑스’를 쓰고 말았다. 번역쟁이이든 지식꾼이든 이런 말은 섣불리 쓰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눌 말을 써야 옳다. 여느 사람들과 수수하며 수월하게 주고받을 말을 깨달아야 아름답다. “화제(話題)의 대상(對象)으로 삼는다(73쪽)” 같은 말마디는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라 하면 넉넉하고, “(죽고 만 고양이) 검둥이의 존재감(存在感)을 불식(拂拭)할 수 없을 것 같다(42쪽)”는 “(죽고 만 고양이) 검둥이를 내 마음에서 지울 수 없을 듯하다”로 다듬어야 알맞다고 느낀다. “우리 부모님”이라 했다가 “나의 어머니(153쪽)”라고 적바림한 번역은 귀엽다고 해야 할까나. 그나마 “나의 부모님”이라 하지 않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창작이든 번역이든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다스리지 못하면, 이렇게 책으로 엮은 문학을 읽는 사람한테 얄궂은 말버릇이 퍼진다. 얄궂은 말버릇은 아주 더디 차근차근 스민다. 어느 하루 갑작스레 확 바꾸지 않는다. 차츰차츰 젖어들도록 이끈다.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라는 산문책이 유미리 님한테는 “내 말 사전”임을 헤아린다면, 이러한 산문책을 우리 말로 옮길 때에 ‘어떤 우리 말’로 옮겨야 하고, 얼마나 글을 더 가다듬거나 손보아야 하는가를 한결 깊이 살피며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글 한 줄과 낱말 하나 더욱 마음을 쏟아 바로잡거나 어루만져야 한다고 느낀다.


.. 한국에서 온 유학생 A가 다니는 대학교에 놀러 갔을 때, A의 친구와 함께 전철을 타게 되었다. 그 친구가 이름을 묻기에, “유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럼 한국사람?” “네.” “한국사람치고는 일본말 굉장히 잘하네요.” “일본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럼 일본사람이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재일한국인 2세인데요.” “그게 무슨 소리죠?” 나와 A는 어리둥절하여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재일한국인이란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67쪽)


 유미리 님이 재일한국인(또는 재일조선인, 또는 그냥 한겨레)이 아니었다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일본사람으로 살았어도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같은 책을 쓸는지 모르는데, 그때에는 이 책에 실을 이야기가 아주 다르겠지. 아니, 재일한국인이 아닌 ‘일본사람’ 눈으로 ‘한국에서 온 유학생 아무개’가 참 바보스럽거나 어리숙한 줄을 깨닫는다면 어떤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한국 역사를 아는 일본사람이 한국 역사를 모르는 한국사람을 마주할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 아무래도, 일본 역사를 아는 한국사람이 일본 역사를 모르는 일본사람을 마주할 때하고 엇비슷한 느낌일까. 꼭 같지는 않을 터이나 살짝이나마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낄까.

 “자기 과거의 비참한 사건을 재산이라고 여기는 감각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151쪽).”라는 대목에 마지막으로 밑줄을 긋는다. 책은 세 번째 읽으며 꼭 덮는다. 이제 이 책은 오래오래 가슴에 묻자. 유미리 님 다음 산문책을 읽자.

 우리 집 딸아이는 앞으로 열 해쯤 제 엄마 아빠랑 함께 살아가고 나서 이 책을 들출 수 있겠지. 아쉽게 판이 끊어졌으나 아버지가 이 책을 고이 장만해서 예쁘게 읽은 다음 잘 건사해 놓을 테니까,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아보기 힘들 2020년에도 반갑게 마주할 만하리라 본다. 그나저나, 2020년이나 2030년에는 유미리 님 산문문학을 한국땅 사람들이 어떻게 돌아볼까 궁금하다. 유미리 님이 환갑 나이를 넘어선 뒤에는 한국땅 사람들은 이녁 문학을 어떻게 살피며 곱씹을는지 궁금하다. (4343.12.8.물.ㅎㄲㅅㄱ)


―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글,김난주 옮김,민음사 펴냄,2000.4.24./7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하종강 외 지음, 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보이는창, 철수와영희 기획 / 철수와영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태일은 사랑씨앗 뿌린 예쁜 벗님
 [책읽기 삶읽기 25] 손아람과 다섯 사람, 《너는 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리는 한편, 즐거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일은 꿈으로만 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꿈이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이 곧 꿈입니다. 꿈꾸듯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꿈을 이루며 하루하루 거듭나는 내 삶이에요. 왜냐하면 꿈이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똑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을 어버이로 두어 태어나야 꿈같은 나날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봄날에 볍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면서 곧바로 쌀을 얻지 않습니다. 볍씨를 뿌렸으면 볍씨가 잘 자라 싹이 트고 잎이 나며 열매를 맺기까지 잘 건사해야 합니다. 감자알을 묻었다고 이내 굵은 새 감자가 나지 않아요.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기다립니다. 마냥 손 놓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땀 뻘뻘 흘리는 몸뚱이로 기다립니다. 날마다 바지런히 일하면서 기다립니다. 마음속으로 빌고 온몸으로 흙과 부대끼면서 손꼽아 기다립니다.

 참으로 돈이 많고 이름이 높으며 힘이 대단한 분을 어버이로 두었다면 내 삶이 그야말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어버이가 돈이 아주 많아, 책을 살 때마다 주머니가 거덜날까 걱정할 일이 한 번도 없다면, 내 책읽기가 더없이 신나거나 즐거울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어버이가 이름이 아주 높아, 내가 조그마한 글 하나 끄적였을지라도 널리 알려지거나 읽히며 이름값을 거머쥘 수 있으면, 내 글쓰기가 그지없이 기쁘거나 놀라울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몸을 쓰는 위험한 일이고 바깥에서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하냐,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저는 노동환경 개선이나 그런 것보다는 그냥 관리직 윗사람들의 따뜻한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 수고했다, 한 마디만 해도 되는데 오히려 화풀이 하고 욕질하는 윗사람들이 있어요. 힘들지 않냐, 물 한 잔 마시고 해라, 지나가는 말만 해 줘도 일을 더 열심히 할 텐데. 기분도 좋잖아요.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대해 준다면 …….” ..  (57쪽)


 제 몸에 불을 살라 숨을 거둔 전태일 님이 흙으로 돌아간 지 마흔 돌이 된 2010년 11월 13일입니다. 이날을 맞추어 《너는 나다》라는 이야기책 하나 조용히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라는 이름이 작달막하게 붙은 이야기책입니다. 덧이름 그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또다른 전태일’이란 수없이 많을 뿐더러, 너는 나다란 이름 그대로 전태일이 나요, 내가 전태일입니다.


.. 누군가는 요즘 청년들이 도전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한 번도 동의해 본 적이 없다. 내 주변 청년들은 다들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미 대학에서 학점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누구나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하는 것은 어떤가? 얼마나 필사적이면 그 엄청난 취업 준비, 학점 경쟁 속에서 취미 활동을 할 수 있지 … 이번 달에 택시 한 번 탄 적이 없는데 10만 원 가까운 돈이 교통비로 나갔다. 최근 나가고 있는 단체의 한 여자 후배는 교통비를 아끼려고 자전거를 샀다고 한다. 나도 매달 10만 원에 달하는 돈을 교통비로 쓸 바에 후배처럼 자전거를 살까 생각이 든다 ..  (120, 126쪽)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이룬 젊거나 나이든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서 “공무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다 비슷한 꿈을 꾼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게 돈을 버는 거잖아요(155쪽/단편선).” 같은 아주 마땅하면서 참 마땅히 잊는 생각조각을 끄집어냅니다. 그렇잖아요. 모두들 ‘꿈’을 이루겠다고들 말은 하지만, 정작 이 꿈이 뭔가를 들여다보면 ‘돈’이기 일쑤예요. 얼음판에서 지치기를 잘하고 싶다는 꿈이든, 조그마한 공 하나를 잘 던지거나 잘 차고 싶다는 꿈이든,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 학문 하나 거룩히 세우겠다는 꿈이든, 마지막 자리를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돈’과 맞닿습니다. 끝마음이 ‘돈’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 첫마음은 무엇이려나요.

 새삼스러울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훤히 안다는 이야기인 ‘한 사람한테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돌아볼 수 있으면, ‘나 하나 살아가는 데에 돈을 얼마나 벌어 얼마나 쓸 수 있으면 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 하나 아름다운 삶으로 일구는 동안 나 스스로 손에 쥘 책은 몇 권이면 넉넉한가’라든지, ‘내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귀어 보아야 하는가’라든지, ‘내 좋은 보금자리를 마련하자면 어떻게 땀을 흘리거나 어디에서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가’ 같은 이야기를 톺아볼 수 있겠지요.

 스스로 숨을 거두며 노동법과 노동권을 지켜 달라 외치던 전태일 님이라 합니다. 그러나 1970년이건 2010년이건 노동법이나 노동권을 지키는 공무원이나 기자나 지식인이나 관료나 정치꾼이나 교사는 몹시 드물다고 느낍니다. 하루 여덟 시간 일하도록 하는 일이 노동권이 아닙니다. 최저생계비를 제대로 챙기도록 하는 법이 노동법이 아닙니다. ‘일할 권리’란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권리입니다. ‘일하는 사람을 지키는 법’이란 종이책에 적바림하는 글줄이 아닌, 사람이 사람다이 사랑할 이야기여야 합니다.


.. 그가 죽기 전까지 외쳤던 것은 삶이었다. 그가 주장했던 것은 평범한 삶을 누릴 권리였다 ..  (9쪽)


 길은 어디에나 손쉽게 나 있습니다. 삶은 어디에서나 알차게 일굴 수 있습니다. 사랑은 누구하고나 살가이 나눌 수 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내 살림에 맞게 벌 수 있습니다.

 다만, 길을 못 느끼며 살아가기 일쑤이고, 삶을 못 붙잡으며 헤매기 일쑤이며, 사랑 아닌 수렁에 빠지기 일쑤요, 돈이 아닌 권력과 욕심에 허덕이기 일쑤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내가 아름다이 살아가고 싶다면, 내가 돈을 조금 더 번달지라도 내가 돈을 조금 더 버는 일이 내 삶터와 자연을 망가뜨린다 할 때에도 그냥 돈을 조금 더 벌면 되나요. 가야 할 길이 바쁘니까, 찻길에서 고양이를 치건 사마귀를 밟건 잠자리를 들이받건 개구리를 밟건 아랑곳하지 않으며 씽씽 내달리면 되는가요.

 어여쁜 꽃 한 송이를 꽃집에서 돈 몇으로 장만해서 선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여쁜 꽃 한 송이를 우리 집 한켠에 꽃그릇 마련해서 씨앗 하나 심어 작은 싹부터 어린 잎과 가느다란 줄기부터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돌보며 꽃이 피어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노동권이든 노동법이든 꽃집에서 꽃 한 송이 장만하듯 거머쥐거나 움켜쥘 수 없는 노릇이에요. 언제나 꽃씨 하나 심어 차근차근 알맞춤하게 날씨와 철을 돌아보면서 고마이 얻을 삶이어야지 싶어요.

 사랑씨 하나 심어 사랑싹과 사랑잎과 사랑줄기를 보듬을 줄 아는 좋은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랑씨앗 하나로 사랑꽃을 피운 다음, 이 사랑꽃에서 또다른 사랑씨앗을 얻어 이웃한테 나누어 주는 가운데, 사랑꽃에서 사랑열매를 맺어 나부터 즐기고 내 고운 벗님과 살붙이하고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내고 싶습니다. (4343.11.12.쇠.ㅎㄲㅅㄱ)


― 너는 나다 (손아람과 다섯 사람,철수와영희 펴냄,2010.11.13./13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착하며 참다이 살고 있기에 책을 안 읽습니까
 [책읽기 삶읽기 12] 소노 아야코,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님 책을 틈틈이 챙겨 읽는다. 새롭게 옮겨지는 책도 있고, 예전에 한 번 나온 뒤 다시 나오지 못하는 책이 있다. 나는 스물여섯 나이에 《계로록》으로 이분 책을 처음 만났지만, 헌책방에서 《누구를 위하여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두 번 만나 두 번 사서 두 번 읽은 뒤로 곰곰이 헤아려 보니, 훨씬 예전부터 ‘曾野綾子’라는 이름이 새겨진 책을 읽었구나 싶다. 아직 철이 잘 들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만, 훨씬 철이 덜 들었을 무렵에는 ‘曾野綾子’하고 ‘소노 아야코’라는 이름을 맞대어 헤아리지 못했다. ‘三浦綾子’하고 ‘미우라 아야코’ 또한 마찬가지. 두 이름을 한꺼번에 살피지 못하며 책을 읽어 왔다.

 소노 아야코 님이 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은 글자가 꽤 크며 글이 짧다. 하루가 아닌 한 시간이면 읽어치울 만한 책이다(더 빨리 읽어치울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나이든 분들을 헤아려 이렇게 큰 글자로 책을 엮었지 싶은데, 여느 젊은 사람이 읽을 만한 글자로 책을 엮었다면 쪽수나 부피가 훨씬 줄겠지. 더욱이, 글자를 꽤 크게 하며 내놓을 만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같은 소노 아야코 님 책은 ‘금세 읽어치우고 덮’으면 뭔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삭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무리를 하면 피곤해져 인간성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미움을 사면 미워하라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여 칭찬을 받는다 한들 또 비난을 받는다 한들 다 부질없는 일이다(22, 26쪽).” 같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받아들일 만한 이 나라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잘못 알면서 잘못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재미로 사는 사람마저 있다. 뭐, 한국뿐 아니라 일본부터 엉터리 삶인 사람이 많으니까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일본사람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겠지. 미움을 사느니 마느니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면 된다는 소리이다. 내가 아름다이 살아가는지, 또는 착하게 지내는지, 아니면 참다이 삶을 꾸리는지는, ‘나를 잘 모르거나 잘못 보는’ 사람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 굽어살피니까 애써 마음쓸 대목이 없다.

 “자신의 추한 부분, 불쾌한 부분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또 그것에 비애를 느낄 때라야 그 사람의 정신은 자유로워져 정신 자세도 자연히 건전해진다고 여겨진다(55쪽).”는 이야기를 열 살 어린이나 스무 살 젊은이가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서른이나 마흔 나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맞아들이지 못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쉰이나 예순 나이가 되어도 못마땅하게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하지 않을까. 나한테 한 번 주어진 이 삶을 고맙게 섬기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하루하루 재미난 나날이라고 헤아리며 두 손 곱게 모아 비손을 하기란 얼마나 힘들까.

 “나는 잘못된 일 처리나 뇌물 수수, 배임 횡령의 기사 따윈 신문에서도 거의 읽지 않으므로, 별로 그 일을 떠들썩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70쪽).”는 소노 아야코 님인데, 나는 신문을 아예 안 읽는다. 집에 텔레비전을 안 들여놓고 살아온 지 열다섯 해가 넘는다. 도시에서 전철을 탈 때면 책을 읽으며 전철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광고판을 안 보려 한다. 눈을 쉬게 하고프다. 손전화 걸고 받으며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서 홀가분하고 싶어 책을 펼친다. 요사이는 아이랑 씨름하느라 둘레 사람이 떠들든 말든 아랑곳할 겨를이 없다. 아이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이런 대목이 퍽 쏠쏠하다. 다른 데에 눈이나 마음을 쓸 수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숱하며 자잘한 이야기가 귓결에 스친다. 며칠만 지나고 보면 다 잊는 이야기를 놓고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참말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언론이란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아닌데, 온통 더 큼지막하게 써대려 하고, 된통 더 따갑게 부풀리려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란 무엇이기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기에. 깊어 가는 가을날, 또는 한창 무르익으려는 겨울날, 이리하여 차츰 다가오는 봄날, 앞으로 새삼스레 다시 찾아올 여름날을 그때그때 다 달리 껴안으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알차며 사랑스레 북돋울 이야기를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다루면 장사가 안 되는가. 언론이란 장사가 안 될 이야기를 다루면 안 되는가. 언론이란 삶을 다루는 이야기를 알뜰살뜰 채우면 안 될 노릇인가.

 책을 읽으면서 “좋은 일을 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은 상행위와도 같다(91쪽).”는 대목에서 자꾸 걸린다. 자꾸자꾸 걸려 넘어진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이 대목을 거듭 곱씹는다. 내가 제아무리 아이하고 신나게 놀아 주었다 생각하더라도, 아이한테 내 사랑이 이어갔다고 여길 수 없다. 난 그저 얼마쯤 아이하고 놀았을 뿐이니까. 내가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밥을 안치고 반찬이며 국이며 마련하여 밥상을 차려 놓는다 해서 아이가 아침과 저녁을 맛나게 받아먹으며 제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느껴야 하지는 않다. 고마움을 느끼라고 차리는 밥상은 아니니까. 사랑은 장사가 아니다. 삶은 장사일 수 없다. 사람을 사귀든 글을 써서 책으로 엮든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든 그예 삶이지, 장사이지 않다.

 “아마도 우리들이 정말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결코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며, 권력자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을 맛본 사람들일 게다(16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소노 아야코 님이 쓴 다른 책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를 떠올린다.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라는 책은 그리 사랑받지 못하고, 잘 읽히지 못한다. 적어도 이 책 하나쯤 찬찬히 헤아려 본다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한결 깊이 돌아볼 수 있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책을 읽으며 고개를 숙인다든지 삶을 곱씹는 사람은 드물다. 안타깝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책읽기란 ‘처세’와 ‘자기계발’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책읽기가 삶읽기로 자리잡는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늘 고개를 숙이면서 고맙게 마음밥을 얻어먹는다고 느낀다. 마음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고, 언제나 새삼스레 거듭난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이 더 아프고, 책을 덮고 나서 삶을 부대끼는 동안 내 몸이 더 슬프면서, 내 두 다리와 두 팔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까를 곱씹는다.

 “교육적이려면 좀 특별한 화제를 만들어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가정 내 대화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거다(278쪽).” 같은 이야기란 누구나 뻔히 안다 할 만큼 시시한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래, 참 시시한 이야기이다. 소노 아야코 님 이 책은 참말 시시한 이야기를 구지레하게 담았다 말해도 좋다. 삶이란 시시하지 대단하지 않다. 수다란 시시하지 대단할 구석이 없다. 책이란 시시하지 거룩하지 않다. 앎이란 시시하지 거룩할 까닭이 없다.

 시시하면서 수수한 삶이다. 시시하기에 홀가분하게 웃고 떠드는 수다이다. 시시하니까 스스럼없이 쥐어들어 마음껏 펼치는 책이다. 시시한 만큼 머리에 가두지 않고 몸으로 신나게 풀어 놓는 앎, 곧 슬기이다.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는 ‘머리를 쓰며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내 몸을 내가 스스로 더 힘껏’ 쓰면서 ‘좀 어리석거나 바보스레’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다룬다. 뭐 그리 잘난 삶이라고 용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뭐 그리 똑똑한 삶이라며 어깨를 우쭐거리며 지내야 하는가. 너무 무거운 내 머리를 가볍게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좋은 소리와 궂은 소리 모두 귀담아들으며 살아가면 넉넉하다. 된장찌개나 미역국 한 그릇으로 얼마든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

 다 아는 이야기, 다 알 만한 이야기를 담은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으레 다 알거나 알 만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또는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다 알거나 알 만하다 말하는 사람은, 이 땅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얼마나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살아가는가. 몹시 궁금하다. 이까짓 이야기 훤히 꿰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내 삶과 네 삶을 고이 어루만지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덧말 한 마디 붙인다면, 소노 아야코 님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적어야 했을 텐데. (4343.11.7.해.ㅎㄲㅅㄱ)


―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글,오경순 옮김,리수 펴냄,2005.6.25./9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