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왈 曰曰 - 하성란 산문집
하성란 지음 / 아우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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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도심 학교를 새도심으로 옮기는 한국사람
 [책읽기 삶읽기 39] 하성란, 《왈왈》


 설을 맞이해서 아이를 데리고 여러 어르신을 만나뵈러 다닙니다. 집을 여러 날 비우고 돌아다닙니다. 집에서만 지낼 때에는 돈 쓸 일 없으면서 집일을 하느라 몹시 바쁩니다. 집일을 하느라 바쁘다지만, 정작 집안을 말끔히 치우거나 갈무리하지는 못합니다. 이 일 저 생각에 매여 이것 하고 저것 하면서 어수선합니다. 날마다 고단한 몸으로 잠들고, 새벽마다 다시금 기운을 내어 일어납니다.

 살림집을 떠나 여러 날 바깥에서 잠을 얻어 자고 밥을 얻어 먹습니다. 집안을 쓸고 닦는다든지, 밥을 차리고 치운다든지, 아이하고 놀아 주거나 아이 책을 읽힌다든지, 내 일을 하거나 내 책을 읽는다든지, 이런저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모처럼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밥을 먹고 나서 치우지 않는데다가, 그야말로 방바닥에 얌전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합니다.

 가만히 보면, 설이란 모든 일손을 쉬면서 어우러지는 때라 할 만합니다. 찬찬히 살피면, 설날은 내 일을 내려놓고 서로서로 얼크러지는 자리라 할 만합니다. 바쁜 일이건 느긋한 일이건 안달하지 않아도 좋은 때일 테지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복닥이지 않아도 기쁜 자리일 테지요.

 다만, 설이나 한가위에는 으레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만 더 일해야 하니 설이나 한가위를 못마땅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느 때에는 어떠한가요. 여느 때부터 일하는 사람만 일하지는 않는가요. 여느 때부터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즐기고 함께 나누어 왔다면, 설이든 한가위이든 일하는 사람만 일할 까닭이 없습니다. 설이라 더 힘들고 한가위라 더 고단하지 않아요. 여느 때 여느 자리부터 서로서로 일손을 나눌 뿐 아니라, 다 함께 일손을 붙잡는 보람을 누려야 합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에는 집일을 거들지 않다가 설에만 집일을 거들라 할 수 없습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는 집일은 아랑곳하지 않다고 설이니까 집일을 돌보라 할 수 없어요.

 닥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는 일을 으레 할 뿐입니다. 삼백예순나흘은 엉터리인데 꼭 하루만 제대로 구르도록 할 수 없습니다. 한글날에만 한글을 사랑한다거나, 예수님나신날에만 예수님을 거룩히 섬긴다거나, 광복절에만 제국주의 식민지살이를 돌아본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늘 되새기는 우리 삶입니다. 노상 곱씹는 우리 나날이에요.


- 오늘 중3인 큰아이는 과학고를 탐방했다. 식물원처럼 멋진 학교 건물에 반해 ‘열공’해서 꼭 입학해야지 결심하려는 순간 전학년 성적이 전교 일이 등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에 기가 팍 꺾인 참이다. (10쪽)
- 큰애는 보는 내내 ‘금잔디’가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이 ‘아줌마’에겐 남자보다 꽃이다. 눈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16쪽)
- 아기를 키우면서 글을 쓰던 십여 년이 떠오른다. 아기는 꼭 마감을 코앞에 두었을 때 아팠다. (48쪽)


 소설쓰는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을 읽습니다. 하성란 님은 당신이 살아온 결에 따라 글을 꾸준히 썼고, 이렇게 꾸준히 쓴 글이 모여 책 하나 태어납니다.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에 담긴 이야기는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가를 수 없습니다. 괜찮다거나 어수룩하다거나 잴 수 없습니다. 읽을 만하다거나 읽을 만하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그예 하성란 님 삶입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이름난 대학교에 보낼 마음으로 서울 강아랫마을로 살림집을 옮기려고 애씁니다. 누군가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으로서도 더 돈을 굴리며 더 돈을 긁어모으려고 아파트 사고팔기를 합니다. 가까운 길이니 걸어서 오가는 사람이 있으나, 가까운 길이니까 자가용 타고 휙 다녀오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니 있을 때에 마음껏 쓰는 사람이 있고, 돈이 있기에 이때에 나보다 힘든 가난한 이웃이나 피붙이한테 주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어느 집에나 텔레비전을 모십니다. 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복판에 텔레비전을 모시곤 합니다.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는 집에서는 으레 텔레비전을 켜고, 으레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나누며, 으레 텔레비전 새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텔레비전을 안 모시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아주 드물지만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금잔디’이니 무어니를 다루며 이야기꽃 피울 테지만, 누군가는 금잔디인지 은잔디인지 하나도 모르며 눈길조차 안 두곤 합니다. 정치가 어떻고 겨울아시아대회가 어떠하며 해적이 어떻다는 둥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정치이든 겨울아시아대회이든 해적이든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닌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입니다.


- 어렴풋이 우리가 이사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젊은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젊은 엄마는 리어카를 밀며 쉬며 갔다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것은 그렇게 리어카 한 짐도 되지 않았다 ..  (34쪽)
- 무청이 무성한 데다가 꽃까지 피었다. 무꽃은 처음 보았다. 엄지 손톱만 한 꽃들이 동글동글 맺혀 있다. 대체 어떻게 해서 꽃까지 피울 수 있었을까. (47쪽)


 인천에서는 제물포고등학교를 송도로 옮기느니 마느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벌써 옮길 만한 학교는 일찌감치 옮겼는데, 이제 와서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까닭은 없습니다. 옮기지 말아야 한다면, 제물포고등학교에 앞서 축현초·인천여고·대건고·박문초부터 따져야 하며, 이 학교들을 옛도심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들 학교를 옮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새도심에 새 학교를 지었어야지, 옛도심에서 옛 학교를 파내는 일부터 글러먹었습니다. 새도심에만 사람이고 옛도심에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옛도심 사람들이 새도심 아파트로 옮긴다 하더라도 옛도심에서 죽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며, 옛도심 오래된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옛도심 작은집에서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을 헤아리고, 잇속이 아닌 사랑을 살폈다면, 처음부터 옛도심 학교는 옛도심 학교대로 알뜰살뜰 돌보면서 새도심에는 새도심에 걸맞게 새 학교를 지었어야 합니다.

 인천은 서울 강웃마을에서 서울 강아랫마을로 숱한 학교가 파 옮긴 일을 따라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도 옮기려면 얼마든지 옮길 노릇이요, 인일여고이든 인천여상이든 중앙여상이든 동산중·고이든 박문여고이든 신나게 옮길 일입니다. 학교 하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해 보았자 밑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학교 하나 옮기든 말든 그다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로울 일이란,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일구느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알차며 아름답게 일군다면,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을 옮기더라도 옛도심과 새도심이 서로 슬기로우며 아름다울 수 있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형편없거나 엉망진창으로 내몬다면,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옛도심 자리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더라도 우리 삶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도시 물질문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리에서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 누구하고 이웃하며 누구하고 동무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도시에서 이루려는 꿈은 무엇이요, 도시에서 하려는 일과 놀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갈 앞날은 어떠한 길인지 곱씹어야 합니다. 개발을 해야 한다면 어떠한 개발을 어떠한 크기로 왜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몽땅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 개발인지,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꿀 모습은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꾸면서, 고치거나 보듬거나 다듬을 곳은 고치거나 보듬거나 다듬는 개발인지를 톺아보아야 합니다.

 아파트와 쇼핑센터만 우람하게 새로 지으려는 개발인지, 동네사람이 동네 발자취와 땀방울과 살림살이를 아끼면서 서로 돕고 어깨동무하는 터전을 일구려는 개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짓는다면 이 아파트와 쇼핑센터에는 누가 들어오며 누가 즐기는 터전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개발을 하는 돈은 어디에서 나오며, 개발이익을 누가 거두고, 이 같은 개발 효과는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지며, 앞으로 서른 해 뒤에 똑같은 개발을 다시금 하려는지, 오래오래 동네를 아름다이 보살피려는 개발인지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옮긴다 해서 송도가 더 발돋움하지도 않으나,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옮긴다 해서 옛도심이 폭삭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나와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며, 행정과 정치하는 동네 공무원이 동네를 어떻게 돌보도록 마음쓰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삶이며 삶터입니다.


- 시골이 도시보다 변화가 적고 지루할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하루하루가 변화무쌍했다. 밤이 되면 짙은 풀냄새가 차올랐다. 산 저쪽에서 울던 새가 다음날에는 산 이쪽에서 울었다. 아련히 먼 기억 속의 새소리였다. 빛을 좇아 모기장 틈으로 날아온 날벌레에 기겁한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186쪽)
- 불쑥불쑥 앞을 가로막는 도로턱과 울퉁불퉁한 인도, 거기에다 상점에서 내놓은 물건들 때문에 지나치기도 쉽지 않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는 느리게 달리는 것도 빨리 달리는 것도 위험하다. 때때로 자전거를 메고 차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사대강 사업 중 하나에 둔치의 자전거도로 설치가 들어 있다. 왜 자전거도로를 강에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순간 문앞에서부터 문제에 부딪힌다. 자전거도로가 난 그 강까지 자전거로 갈 생각을 하면 막막해진다. (210쪽)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만 살고, 또 도시 가운데 서울에서만 살며, 또 서울에서도 아파트에서만 사는데다가, 자가용 몰아 이곳저곳 빠르게 싱싱 오가는 하성란 님이 쓰는 글은 저하고는 걸맞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골목동네에서 살았고, 시골마을로 식구들 모두 옮겨서 살아가며, 시골 가운데에서도 멧자락 깊은 데에 깃들고, 자가용은커녕 텔레비전도 없이, 자전거나 시골버스나 두 다리로만 다니는데다가, 꽤나 어수룩하지만 텃밭 하나 건사하는 삶으로 하성란 님 삶을 마주했을 때에는 퍽 따분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면서 우리 아이를 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습니다. 학교가 학교다워야 아이를 학교에 넣습니다. 아이한테 ‘열공’을 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말하는 열공이란 한낱 ‘시험점수 높게 나오도록 내몰기’일 뿐인데, 이런 열공을 시킨다면서 아이 머리와 마음과 가슴을 망가뜨릴 수 없어요. 신문 안 읽고(시골에서 신문을 본댔자 며칠 늦게 봅니다) 방송 안 보며 맛집·멋집 같은 데에는 찾아다니지도 않는 주제이기에, 하성란 님 글은 하성란 님 삶을 소롯이 적바림하면서 수수한 멋을 예쁘게 보듬는다고 느끼면서도, 우리 식구들 삶하고는 참 동떨어졌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성란 님은 살림하고 아이 낳아 키운 어머니 마음으로도 글을 씁니다. 집살림과 아이돌보기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인 글은 저 또한 퍽 읽을 만하다고 느끼지만, 이런 글은 너무 적습니다. 더 수수하고 더 투박하며 더 못나고 훨씬 못생긴 여느 자리 여느 삶 이야기를 솔솔 풀어낸다면, 나로서는 《왈왈》이라는 책을 우리 옆지기나 우리 장모님한테도 선물해 주겠건만, 살짝 수수하려다가 수수한 멋하고는 멀어지고, 조금 투박한가 싶더니 깍쟁이 같은 서울내음이 짙게 배고 말아, 혼자 읽고 혼자 덮습니다.

 하성란 님은 하성란 님 삶을 꾸리기 때문에, 하성란 님한테는 하성란 님 오늘 하루가 아름답습니다. 저는 제 삶을 일구니까, 저한테는 제 오늘 하루가 기쁘며 고맙습니다. 컨테이너집과 비닐집 차가운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저녁에 잠들어야 하는 옆지기네 어르신하고 설날 막바지를 함께 보내면서 이렁저렁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가난하다’는 밑바닥 사람들 20% 살림돈이 자그마치 1억이 넘는답니다. 아래쪽 20%조차 1억이 넘는다니 꿈만 같은데, 이런 푼수라 한다면 우리 살림이나 옆지기네 어르신 살림이란 1%에 들거나 0.1%에 들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 80∼90%는 1억 넘는 돈이나 집이나 자가용이나 재산을 가졌다는 소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가용 한두 대 없는 집이 드뭅니다. 이 나라 60% 안팎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답니다. 어쩌면 벌써 70%를 웃돌는지 모르며, 앞으로는 아파트 사람들이 80%를 훌쩍 넘으리라 봅니다. 아니, 벌써 이와 같다 해야 옳을는지 모르지요.

 가난하다는 사람들도, 또 여느 자리 사람들도, 또 웬만한 사람들도 살림살이 눈높이가 ‘아파트 + 자가용’에다가 온갖 전기전자제품이랑 큰도시 살림살이인데, 하성란 님 같은 분들한테 어떠한 글을 쓰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성란 님은 하성란 님 삶을 살포시 껴안으면서, 이 틀에서 사랑하고 믿는 고운 삶자락을 글꽃으로 여밀 수 있을 때에 아리땁다 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가난한 사람들은 읽을거리가 매우 적고, 가난한 사람들은 바쁘거나 고된 나머지 스스로 글을 쓰지 못하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잡는 삶을 글로 담는 사람이나 일꾼 또한 참 없습니다. (4344.2.7.달.ㅎㄲㅅㄱ)


― 왈왈 (하성란 글,아우라 펴냄,2010.12.10/1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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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일기 - 절망의 수용소에서 쓴 웃음과 희망의 일기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윤소영 옮김 / 막내집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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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삶과 사랑받을 사람과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38] 조반니노 과레스키, 《비밀일기》



- 책이름 : 비밀일기
- 글 : 조반니노 과레스키
- 옮긴이 : 윤소영
- 펴낸곳 : 막내집게 (2010.12.11.)
- 책값 : 1만 원



 (1) 하루살이 이야기


 밤늦게까지 안 자던 아이가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납니다. 밤새 잠을 거의 못 자다가 새벽녘 일어나 주섬주섬 일하던 애 아버지는 그만 한숨부터 쉽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일찍 일어난 까닭이 있을 테지요. 아무리 늦게 잤달지라도, 오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했으니, 일찍 일어나야 하는 줄 아니까요. 그러면 어제는 좀 일찍 자든가 해야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 아이는 고단하고 졸리니까 땡깡만 부립니다. 이런 날을 워낙 숱하게 겪다 보니, 일찍 일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대견하다고 여기지 못합니다. 아이한테 옷을 입힌 다음 마주앉아서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 주어 고맙지만, 네가 어제 그렇게 늦게 자고 오늘 아침에는 이토록 일찍 일어나면 제대로 놀 수 있느냐, 보나 마나 다른 때처럼 또 골 부리고 그럴 텐데, 어머니가 일어나고 아침 차려 먹고 이것저것 치운 다음 떠나야 하니, 이렇게 하자면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하니, 너도 좀 그때까지는 더 잠을 잤다가 일어나서 얼른 밥 먹고 가자 …….

 조금 뒤 아이를 꼬옥 안고는 이부자리로 파고듭니다. 한동안 배 위에 올려놓다가는 옆으로 누여 팔베개를 해 줍니다. 이렇게 삼십 분쯤 있자니 아이는 스르르 잠듭니다.

 겨우 재웠구나 생각하며 일손을 붙잡으려 하지만, 애 아버지도 잠이 모자라 어질어질합니다. 이제 밥물 안치고 국이나 반찬을 해야 할 텐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애 아버지도 벌렁 드러눕고 싶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벌렁 나자빠지고 싶습니다.


.. 우리는 버려진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짐승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빈손으로 우리만의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 … 침묵이 흐른 뒤, 모두들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한 사람 옆에 또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또 한 사람. 이민자의 집에 있는 칙칙한 선반에 쟁여진 물건들처럼, 모두들 그렇게 차곡차곡 침대로 들어간다 ..  (14, 106쪽)


 등허리가 아파 애 아버지도 살짝 누워 봅니다, 바닥이 따스해서 좋습니다. 눈을 감아 봅니다. 아, 느긋하고 좋습니다. 어느덧 살짝 잠이 들었다 싶더니 마음으로 빨래를 합니다. 살짝 잠이 든 채 꿈속에서 빨래를 합니다. 이제 막 빨래를 마치고 헹군다 할 즈음 눈을 도로 뜹니다. 그래, 빨래도 해야 하는데, 빨래감을 가져가서 할머니 댁에서 할까.

 어제부터 드디어 날이 조금 풀립니다. 한낮이 가까우면 앞마당과 집 둘레 멧자락이 두툼히 깔린 눈이 살살 녹는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지난해 겨울에 얼어붙은 우리 집 물은 안 녹습니다. 더 따뜻해야 하고 더 포근해야 하며 더 오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야 합니다.

 멧자락 집에서 물을 못 쓰며 두 달을 살고 보니 일거리는 더 많고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면 한결 고단합니다. 집안에 물꼭지가 있어 언제라도 물을 틀어 쓰는 삶이란 얼마나 수월한가 새삼 깨닫습니다. 물지게를 지며 물을 쓰던 옛사람 삶이란, 물 한 바가지 얼마나 알뜰히 건사할밖에 없는가 싶습니다.

 집에 물꼭지 없이 우물물을 길어야 물을 한결 알뜰히 여기거나 돌보지만은 않겠지요. 집에 물꼭지 있어도 얼마든지 물을 아끼며 살겠지요.

 가난하게 살아간대서 가난한 삶이 무엇인가를 잘 헤아리며 이웃사랑 삶사랑을 하지는 않겠지요. 돈이 많거나 넉넉하면서도 얼마든지 이웃사랑 삶사랑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물꼭지를 언제나 마음껏 틀어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물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가용 있는 분들이 자가용을 꼭 써야 할 때만 쓰고, 여느 때에는 두 다리나 자전거를 알뜰히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있으면서도 알뜰살뜰 꾸리는 살림인 분이 오늘날 얼마나 되나 알쏭달쏭합니다.


.. 독일 제국, 당신 내 주머니를 뒤지고 내 침대의 대팻밥을 들쑤시는데, 다 쓸데없는 짓이라오. 아무것도 못 찾을걸. 하지만 난 아주 중요한 비밀문서들을 숨겨 놨다오. 우리 집의 청사진, 내 과거의 수많은 영상들, 내 미래의 계획과 같은 것들 … 사람의 본질이란 그런 거라오. 바깥에서 명령을 내리는 거야 아주 쉽겠지만, 그 속에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법 … 오늘은 내 아들이 네 살이 되는 날이다. 나는 그 녀석에게서 내 어린 시절을 다시 보았지만, 아들과 떨어져 있는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56∼57, 88∼89쪽)


 첫째 아이가 좀 크면 집일을 나누어 맡을까 궁금합니다. 첫째 아이가 좀 크더라도 집일을 그닥 나누어 맡지 못하면서 둘째 아이 또한 이래저래 마음쓰며 돌볼 일만 잔뜩 늘어날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아이 없이 살아가더라도, 아이 여럿 키우는 어머니 삶을 올바로 읽는 사람은 어김없이 있으리라 봅니다. 혼인을 않고 살아가더라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은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많이 읽었대서 책을 잘 안다 할 수 없습니다. 교사 노릇 오래 했대서 학생 삶을 잘 헤아린다 할 수 없습니다. 여행을 두루 다녔대서 온누리 골골샅샅 깊디깊이 훑는달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야 아는 삶입니다. 스스로 읽어야 아는 책입니다. 스스로 다녀야 아는 마실입니다.

 허리가 쑤시고 결리며 저리니까 바야흐로 집일이란 무엇인가를 뼈와 살로 받아들입니다. 집물을 못 쓰고 다른 집에서 물을 길어다 쓰니까 손가락이 노상 꽁꽁 얼어붙어 콕콕 쏘면서 물이란 어떠한가를 몸과 마음과 발바닥으로 맞아들입니다.

 고단하면서 졸리며 힘든 나날을 날마다 치르면서, 이런 나날이면서 손에 쥐어들 책이란 어떠한 책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나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나 같은 집살림 도맡는 사람이 졸리며 고단한데다가 힘든 몸으로 자꾸 감기는 눈을 비비며 읽을 만한 글을 쓰지 못한다면, 이런 글이 실린 책을 책으로 여길 만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사진을 찍는 사람인 만큼, 나처럼 집살림 아이키우기 도맡을 사람이 바빠맞은 하루하루 겨우 말미를 내어들여다보며 가슴속에 아름다움이 꽃피우도록 할 만한 사진일 찍지 못한다면, 이런 사진도 사진이랍시고 찍은 셈이겠느냐고 돌아봅니다.

 하루살이로 살며 하루살이로 읽는 책이고 사진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니 하루살이로 쓰는 글이며 찍는 사진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랑 붙어 지내며 아이가 웃고 울며 떠들고 조용한 온갖 모습을 지식 아닌 삶으로 곰삭입니다. 아이 말씨 말투 말결을 살며시 되뇌고, 아이 몸짓 눈짓 손짓을 가만히 되짚습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아이 삶입니다. 어제 새롭고 오늘 새로운 아이 모습입니다. 늘 같을 수 없는 나날이며, 늘 다른 나날이기에 이렇게나 고단하고 지치면서도 용케 아침이면 다시 눈을 뜨며 새날을 맞이하는구나 싶습니다.


..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안전한 철조망 안에서― 아버지 시대 젊은이들의 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담배도 피우지 않고, 춤도 추지 않고, 저녁에 외출하지도 않고, 극장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고, 불량식품을 사먹지도 않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 하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면요 …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전쟁의 끝이 초를 다투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시계를 들고 기다린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2분·3분·4분·5분이 지나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  (113, 148쪽)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사람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사랑을 물려줍니다.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지만, 마음으로 사랑을 그리거나 바라거나 기린다면, 스스로 사랑씨를 틔워 차츰차츰 사랑꽃을 맺습니다. 스스럼없이 묻어나는 사랑을 물려줄 수 있고, 어렵디어렵게 피워낸 사랑을 물려줄 수 있어요.

 어떤 사랑이 우리 아이한테 더 낫거나 좋거나 기쁠 사랑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저는 제 나름대로 사랑을 물려줍니다. 고운 옆지기는 고운 옆지기대로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줄 테고, 어수룩하게 집살림 도맡으며 해롱해롱거리는 하루살이 아버지는 해롱해롱 하루살이 아버지대로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이가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군다며 삐지거나 입을 샐쭉거리는 아버지는, 이런 아버지대로 어영부영 어설피 어버이 노릇 한답시고 바둥거리면서, 이렁저렁 사랑을 물려줍니다.

 깊어 가는 저녁나절 아이는 잠들지 않다가 갑자기 “엄마 똥 눌게.” 하면서 변기에 앉아 끙끙 하면서 똥을 뿌직뿌직 누고는 “똥 눴어. 오줌 눴어.” 하기에 밑을 종이로 한 번 닦고 영차 아이를 안아 물로 다시금 닦았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똥 눈다면서 변기에 앉아 다시금 똥을 뿌직부직 누기에 종이로 거듭 닦고 어영차 아이를 또 안아 물로 다시 닦습니다. 아이 밑을 닦으면서 아이가 속이 답답해 똥을 누고 싶어 잠을 안 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갓난쟁이 아이였다면 아이는 그예 곯아떨어진 채 기저귀나 바지에 똥을 부직부직 누었겠지요. 아버지는 똥바지와 똥기저귀를 빨면서 아이가 이토록 힘들었구나 생각하다가는, 아이가 크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더 귀여워 하며 예쁘게 받아들여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뉘우칩니다.

 애 아버지는 조용히 비손합니다. 우리한테 돈이 넉넉하다면 넉넉한 돈으로 무언가 다른 일을 할는지 모르며, 우리 옆지기가 몸·마음이 안 아픈 사람이라면 집일을 많이 나누어 맡아 주면서 애 아버지도 한 시름 덜는지 모르지만, 우리 살림은 쪼들리고 우리 옆지기는 아파 하기에, 애 아버지는 더욱 힘들며 슬프게 살아갈밖에 없지만, 더욱 힘들며 슬프게 살아갈밖에 없으니, 더 몸을 쓰고 더 마음을 쏟으면서 하루하루 집과 식구와 일과 놀이를 건사하는구나, 하고 비손합니다. 이제는 밥을 안쳐야겠습니다.


 (2) 전쟁 겪기·전쟁 읽기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틈틈이, 아이를 재우고서 옆에 나란히 누워 조금씩, 밥물을 안치고 국을 끓이는 사이사이, 아이가 혼자 예쁘디예쁘게 책을 펼쳐 읽으면 이 옆에 마주앉아 얼마쯤 펼치며 읽은 《비밀일기》를 덮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많이 커서 열 몇 살 스물 몇 살이 되면 달라질 테지만, 온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받으며 자라야 하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는, 책 하나 차근차근 차분히 읽지 못합니다. 읽다가 끊어야 하고, 읽다 끊겼기에 다른 책을 뒤적거리고, 다른 책도 읽다 끊어지니 또 다른 책을 읽다 끊고 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이래저래 뒤죽박죽 섞어 읽습니다.

 바야흐로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합니다. 다 읽었으면서 어쩐지 찜찜합니다. 잠든 아이 옆에 앉아서 책을 다시 펼칩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또 읽어 봅니다.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어 읽던 느낌과 어느덧 다 읽어내고 찬찬히 되짚는 느낌은 어떠한가 헤아립니다.

 바로 내가 읽은 내 책인데, 언제부터 이 책을 손에 쥐었는지 떠올리기 힘듭니다. 줄거리는 되새길 수 없고, 그때그때 되새기며 끄적끄적 했던 글월을 되새깁니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나 하고 한 해 두 해 거슬러 짚습니다. 고작 서너 해 앞선 때 일이라든지, 너덧 해 앞선 때 일이 너무 아련합니다. 아득하며 까마득합니다. 사람들이란 이렇게 되나, 여느 어머님들 삶이란 이러했으려나, 내 앞날은 또 어떻게 펼쳐지고 몇 해쯤 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어떠하려나 두렵습니다.


.. 사랑하는 아들아, 너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우편함에서 어느 막사로 출두하라는 소집영장을 발견할지도 모르겠구나. 그곳에 가면 네 이웃을 해치고, 너도 그런 일을 당하게 만드는 장비들을 받게 될 거야 … 그들은 전쟁도 그렇게 한다. 냄비에 인간을 쏟아붓고, 화약 가루와 군사 과학에서 추출한 양념을 섞은 다음, 규율이라는 뚜껑을 덮고, 비타협이라는 밸브를 잠근다. 그러고는 불을 켜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휘파람 소리를 기다린다 … 배고픔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이 어느덧 18개월째다. 하지만 그 감각은 날마다 새롭다 ..  (18, 57, 172쪽)


 《비밀일기》는 ‘수용소 일기’입니다.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로 지내던 삶을 적바림한 ‘포로 일기’입니다. 전쟁 포로란, 독일이 일으켰던 싸움 때문이든 독일에 맞서 나라를 지키든 겨레를 지키든 마을을 지키든 집식구를 지키든 하려며 총을 들고 일어서다가 붙잡힌 ‘전쟁 일기’입니다.

 총과 포탄과 비행기가 날거나 춤추는 싸움터에서 언제 죽었는지 모르도록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은 사람은 아무런 ‘전쟁 일기’를 남기지 못합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훈장 일기’를 남길 테고, 싸움에서 살아난 사람은 ‘생존 일기’를 남길 테며, 조반니노 과레스키처럼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쟁포로 수용소 일기’를 남길 테지요.

 그런데,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이 새삼 지난일을 떠올리며 적바림했던 이 《비밀일기》란 참으로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이 겪은 일이었을까요. 한낱 꿈은 아니었을까요. 떠올리려 애쓰지만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까마득한 일은 아니었을까요.


.. 전쟁이 끝나면, 어떤 이들은 군복 가슴에 자랑스럽게 딸랑거리는 십자가 훈장을 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죽어 있던 날들에 대한 보답으로, 해진 군복에 연필로 표시한 초라한 십자가만을 달게 되겠지 … 30분 전만 해도 우물가에서 세수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죽어 있다니 … 비는 모래 위의 핏자국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 아르투르가 나에게 말했다. “복수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짓이야. 내가 죽는다 해도 누가 복수해 줄 필요 없어. 난 단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  (65, 115, 117, 200쪽)


 전쟁을 치러 살아남은 사람들만 전쟁을 떠올립니다. 전쟁을 치러 죽은 사람은 전쟁은커녕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냥 잿더미가 되거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전쟁통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일기를 남깁니다. 전쟁을 겪었거나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전쟁 일기’나 ‘포로 일기’나 ‘수용소 일기’나 ‘훈장 일기’를 읽습니다.

 새삼스레 궁금합니다. 우리 겨레 우리 나라 우리 터 사람들은 이 땅에서 벌어졌던 숱한 전쟁을 어떻게 글로 남기고 어떠한 느낌으로 읽으려나요. 나라를 지키자면 전쟁이고 뭐고 힘차게 일어서야 하며, 적군은 깡그리 죽여 넘어뜨려야 한다는 넋으로 읽으려나요.


.. 오늘 아침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동쪽 철조망 앞에 있는 밭이 초록빛으로 뒤덮였다. 보리가 팬 것이다. 차갑고 황량하기만 한, 햇살도 없는 이런 하늘 아래서 씨앗이 열매를 맺는 기적이 일어나다니? … 막사 문 앞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그걸로 돌멩이 차기 놀이를 하면서 수용소를 한 바퀴 돌았다 ..  (89, 137쪽)


 누가 일으키는 전쟁이요, 누가 죽는 전쟁이며, 누구를 죽이는 전쟁일까요. 전쟁을 일으킨 이들은 무엇을 얻고, 전쟁을 막으려는 이들은 무엇을 지키려 하며, 전쟁통에는 누가 다치고 누가 살며 누가 아프고 누가 히히호호 웃는가요.

 숨길 까닭 하나 없는 비밀일기인 《비밀일기》입니다. 감추어야 할 대목 하나 없는 비밀일기인 《비밀일기》입니다.

 무엇을 숨겨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감추어야 하나요. 무슨 이야기는 꽁꽁 묻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꽉 틀어쥐어야 하는가요.

 우리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우며, 우리 이웃이란 어느 만큼 사랑스러운가요.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자도 학교를 다녔을 테고,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사랑스러운 손길로 키웠겠지요. 전쟁통에 끌려나가 총칼을 들고 영문도 모를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삼아 죽이고 짓밟아야 하는 맨 밑바닥 땅개 같은 군인들도 사랑스러운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사랑스러운 어린 나날을 거쳐 사랑스러운 젊은이가 되었겠지요.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읽어야 하고, 무슨 책을 가까이해야 하며, 무슨 지식을 쌓아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하고 등돌려야 하나요.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며, 우리 삶은 어떻게 꾸려야 하고, 우리 보금자리는 어떠한 모습이면 아름다울까요.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은 흙으로 돌아간 지 마흔 해가 훌쩍 넘었고, 《비밀일기》는 처음 태어난 지 예순 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한국땅에서 조용히 태어났습니다. 밥물이 끓습니다. 슬슬 아이를 깨워 오줌을 누이고 밥을 먹여야겠습니다. 아이고, 아이를 깨우려고 보니 아이는 그새 이불에 오줌을 흥건히 누었습니다. (434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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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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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한국을 읽지 않는다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38]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 책이름 : 아파트 공화국
- 글 : 발레리 줄레조
- 옮긴이 : 길혜연
- 펴낸곳 : 후마니타스 (2007.2.1.)
- 책값 : 15000원


 (1) 아파트·골목집·살림집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 잘 쓴 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프랑스 학자가 한국 서울땅 아파트 얼거리를 살피며 쓴 ‘논문’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 한국에서도 서울땅 아파트 얼거리를 돌아보며 ‘한국 사회 읽기’를 하고자 쓴 논문이지, ‘한국사람하고 한국 사회 읽기 함께하기’를 하고자 쓴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 《아파트 공화국》을 ‘프랑스에서 한국 읽기’를 헤아리며 읽어 본다면 퍽 잘 썼다고 여길 만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아파트가 좋으냐 나쁘냐’라는 금긋기가 아니라 ‘한국사람한테 아파트란 무엇이요, 한국 정부와 권력자와 재벌 기업한테 아파트란 무엇인가’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 2000년 현재 1960년 이전에 지어진 도시 주택은 5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어진 가옥은 극히 드물다. 간신히 3퍼센트 정도 된다 … 1960년에 존재하던 서울의 문화재 중 2/3 이상이 1990년 현재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섰다 … 아파트와 그 동네가 ‘깨끗하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과 상반되기보다는 오래되어서 낡고 값어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와 상반되는 것이다 ..  (17, 182쪽)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나오기 앞서까지, 한국땅 지식인이나 건축가 가운데 아파트 문제를 찬찬히 다룬 적이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낱권책으로는 거의 나온 적이 없는데, 대학교에서 논문으로 누군가 쓴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 길이 없으니까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나온 지 어느덧 네 해째 지납니다. 그러나, 네 해째 지나더라도 그닥 달라지는 구석이 없습니다. 2009년에 《아파트에 미치다》라는 책이 한 번 나왔으나, 이 책은 ‘아파트 겉모습 훑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파트 속모습 엿보기’라든지 ‘아파트 삶 들여다보기’라든지 ‘아파트 사람들 만나기’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이루지 않습니다. 2006년에 《아파트의 문화사》라는 책이 하나 나왔는데, 이 책은 ‘아파트 = 이제는 한국사람한테 빼도 박도 못할 문화’라는 틀을 먼저 세운 다음 썼습니다. 한국사람이 아파트에서 거의 모두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아파트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아직 퍽 많은데, 너무 섣불리 ‘끝마무리를 틀에 박은 나머지’ 기울어짐 없는 차분한 눈썰미를 엿보기 힘듭니다. 2009년에 나온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같은 책은 책이름 그대로 ‘첫 아파트 발굴, 이 가운데 서울 아파트’에 눈길을 맞추면서, ‘오래된 아파트에 살던 사람 추억 이야기’ 같은 틀에서 헤매고 맙니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는 ‘골목길 = 옛 추억’이라 여기는 흔하디흔한 얼거리하고 똑같습니다. 아파트가 ‘값싸고 목 좋아진’ 땅을 차지하려고 골목동네를 마구 때려부수며 밀고 들어오면서 골목길이 많이 사라졌으나, 아직도 ‘아파트 재개발을 노리는 골목동네’는 무척 많이 남았습니다. 이 책 또한 처음부터 ‘아파트는 꿈조차 꾸지 못한 사람들(그러니까 ‘서민’이라는 사람들이든 ‘하층계급’이라는 사람들이든)’은 싹 도려낸 채 아파트를 바라보고 맙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땅 아파트를 차분하게 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지식인 자리에 올라서거나 대학교수가 되거나 건축가가 된 사람들치고,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아파트 아닌 골목집이나 시골집에서 나고 자랐을 수 있으나, 이분들이 뜻을 이루며 돈을 번 뒤로는 한결같이 아파트로 삶터를 옮깁니다. 아파트에 안 살면서 아파트를 살피며 연구하거나 다루는 지식인이나 건축가가 있기나 할는지요.

 ‘아파트맨(아파트사람이 아닌 아파트맨입니다. 아파트를 재거나 따지는 사람은 ‘남자 여자’ 골고루가 아니라 거의 ‘남자’들뿐이니까요. 게다가 아파트를 설계하고 건축하며 사고파는 사람 또한 죄다 남자라 할 만합니다)’은 아파트사람한테 눈길을 맞추어 아파트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제, 한국땅에서 아파트는 50%가 넘는 살림집, 이른바 ‘과반수 살림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가 과반수 살림집이 되기 앞서까지는 아파트 이야기를 할 때에 눈치를 볼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과반수 넘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가운데에는 퍽 값싸며 작은 아파트도 제법 남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잣대로 보자면 퍽 값싸며 작은’ 아파트이지, 이 작으며 값싸다는 아파트가 처음 설 때를 돌아본다면 조금도 값싸지 않고 하나도 작지 않은 살림집이었습니다. 오늘날 무슨무슨 팰리스나 어떤저떤 샵 같은 아파트하고 따지니 더없이 값싸거나 작아 보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작고 값싸다는 아파트라 할지라도, 여느 골목동네 사람들한테는 너무 크며 너무 비싼 집입니다. 달삯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놓고도 손을 바르르 떠는 여느 골목동네 사람들한테 한 달 관리비가 아무리 싸서 5만∼10만 원쯤 된다는 작은 아파트일지라도 엄두를 낼 수 없을 뿐더러, 작다는 아파트 한 채를 사거나 얻자 하더라도 이런 집에 바칠 목돈을 모을 수조차 없습니다.


.. 개인주택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한옥 마당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은 콘크리트와 포장된 주차장·도로나 놀이터·테니스장 같은 공동 시설로 변모했다 … 시소와 미끄럼틀 옆에 대형 미키마우스가 빈둥거리는 유치원 안마당은 디즈니랜드를 옮겨 놓은 듯하다. 놀이터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노란 닭과 분홍색 토끼들이 용수철 끝에 매달려 유치원이 끝나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이렇듯 화려한 외장과 장식 속에서 아파트단지 내 규격화된 생활양식은 은폐되고 있었다 ..  (25, 74쪽)


 골목동네 살림집 가운데에도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 살림집이 있습니다.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든 여느 주택에 살든 홀가분합니다. 그저 어디이든 살고 싶은 데에 마음대로 살 수 있어요.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으나, 그저 ‘취향’ 때문에 골목집에서 살 뿐입니다. 이러한 ‘있는 사람’ 골목집에는 으레 마당이 널따랗게 있고, 마당가에는 꽃밭과 나무가 자라며, 2층이나 3층이 올라서고, 차를 대는 자리를 한둘쯤 마련합니다. 밥어미나 운전기사가 깃들 작은 곁방으로 드나드는 작은 문이 높다란 담벼락 한쪽에 조그맣게 붙기도 합니다.

 ‘없는 사람’ 골목집은 반듯하지 않은 골목을 따라 왼편과 오른편으로 죽 이어집니다. 지붕이 모두 낮고, 높이도 한결같이 낮습니다. 멀리서 보면 햇볕 한 줌 제대로 들기 어렵다 싶지만, 골목집치고 햇볕이 안 드는 집은 없습니다. 서울처럼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어쩔 수 없이 땅밑을 파고 사람들을 억지로 쑤셔넣는 곳에서나 햇볕 한 줌 못 들지, 서울을 뺀 다른 도시 골목집들은 왼편 집이나 오른편 집이나 햇볕이 골고루 스며듭니다. 골목집 사람들끼리 서로 자그맣게 살림을 꾸리면서 아침이면 아침, 낮이면 낮, 저녁이면 저녁, 이렇게 햇볕을 돌아가면서 받도록 자리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골목동네로 사진찍기 하러 나오는 이들은 ‘골목집에 햇볕이 골고루 돌아가며 내리쬐는 때’를 잘 모르거나 처음부터 생각을 않고 찾아나서기 마련이라, 골목길 사진을 찍을 때에 노상 어둡거나 퀴퀴하거나 빛바랜 느낌이 드는데요, 골목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면서 골목을 모를 뿐 아니라 알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골목동네 사람들 삶자락을 글로 담아 학문을 하든 사진으로 찍어 예술을 하든, 막상 골목동네 사람(주민)으로 살지 않으면서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파트는? 아파트를 글로 담아 학문을 하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아파트를 다루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아니 모두 다라 할 만큼 아파트사람, ‘아파트맨’입니다. 한편, 예술을 할 생각으로 아파트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다 …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새로 지어진 아파트단지들은 시멘트에서 거실의 가구·문틀·비디오 경비 시스템·냉장고와 비디오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재벌 기업의 제품이다. 그리하여 현대나 삼성의 마크가 찍힌 아파트단지들은 점점 재벌기업의 대형 광고판처럼 보이게 되었다 ..  (100∼101, 103쪽)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삶터를 바라보고 사람을 사귀며 사랑을 나눕니다. 살아가는 틀을 벗어나 삶터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걸맞게 사람을 사귈 뿐입니다. 내 삶에 따라 사랑을 합니다.

 골목동네 젊은이가 사랑을 속삭일 때에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자유로를 싱싱 달리겠습니까. 골목동네 젊은이가 ‘잠자는 데에 10만 원이 웃도는’ 호텔방에서 사랑놀이를 나누겠습니까.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은 ‘한국땅 아파트사람(또는 아파트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국땅 골목집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프랑스사람’입니다. 이분이 프랑스에서 여느 삶자락에서 살아가는지, 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퍽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한국땅 아파트를 말할 때에 아파트 권력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아파트 추억에 사로잡히지 않는데다가, 골목동네 추억에도 말려들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무디거나 무뚝뚝하게 한국땅 삶자락을 훑지 않습니다. 아주 따사롭게 손길을 내밀지도 않아요. 학문을 밝히고자 논문으로 쓴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살갑거나 포근한 읽을거리(삶이야기)로 쓴 책은 아닌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아파트가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두루 퍼지는 흐름이라든지, 이 아파트와 얽힌 한국사람들 삶자락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한국땅에서 아파트는 어떠한 빛깔이자 모습인지를 고즈넉히 보여줍니다. ‘손가락질’이나 ‘비웃음’이나 ‘씁쓸함’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또 이 가운데 서울에서, ‘아파트 = 한국 사회 노동자 희생으로 이루어진 경제 발전을 발판으로 재벌기업 상품시장으로 이루어진 살림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책읽기·삶읽기


 내 이웃들이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읽겠다 할 때에는 이 책을 옳게 잘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줄거리를 섣불리 왼다든지, 글쓴이 생각이 무엇인가를 서둘러 파헤치려 한다든지 안 하면 좋겠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 그대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소리입니다.


.. 잠실처럼 평수가 작은 서민 아파트라 할지라도 대부분 한국의 아파트는 중간계급 이상의 주거지라는 특성을 갖는다 … 매매를 기본 원칙으로 한 주택정책이 공식화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원칙은 주택의 소유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기본 골자로 했다. 따라서 최하위 계층을 포함해 누구든 자신 소유의 주택을 손에 넣으려면 그만한 재산을 동원할 수 있기까지 상당한 물질적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 ‘아파트는 현대적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아파트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 상황에 대한 결정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아파트 이외에 다른 선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층 단독주택의 대안을 논쟁에서 배제시킨다 ..  (69, 99, 178쪽)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많이 살아가니까 ‘아파트 공화국’이 아닙니다. 한국땅 화폐경제가 ‘아파트’를 한복판에 세워 놓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진보 빛깔은 아니지만 진보라고 일컫는 신문 〈한겨레〉조차 ‘아파트 투기’와 ‘아파트 재개발’과 ‘아파트 광고’를 기사로 날마다 다룹니다.

 스스로 진보라 말하려면, 또 스스로 진보로 살아가자면 아파트를 떠나야 합니다. 한국에서 아파트가 50%뿐 아니라 60∼70%는 되고, 머잖아 80∼90%까지 될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파트에서 살지 말라 하느냐 하면서 따지고 싶더라도, 진보라는 믿음을 지키고 싶다면 아파트를 버리든 아파트에서 떠나든 해야 합니다.

 진보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떠날밖에 없습니다. 아파트에서 죽치고 살아가면서 외치는 진보는 거짓입니다.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이 《아파트 공화국》에서 밝히듯, ‘아파트 = 돈굴리기를 하는 살림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막상 ‘진보를 이루려 할 때에 내 이웃으로 삼아야 할 사람’하고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부자하고도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진보는 가난뱅이하고도 손을 맞잡으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밝히거나 외치는 사람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을 맞잡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요. 가난한 사람들 골목동네에서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일터를 오가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지요.

 골목동네 여느 일꾼들은 이 추운 겨울에도 장갑을 두툼하게 끼고는 짐자전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 할아버지들도 두툼하게 낀 장갑으로 엉금엉금 달리면서 볼일을 보고 논밭을 둘러봅니다.

 누군가는 까만 빛깔 큰 자가용을 몰면서도 ‘아름다운 진보’나 ‘훌륭한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진보도 알차게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웃하고 벗삼는 진보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난하게 두 다리로 걷는 진보, 가난하게 자전거를 타는 진보도 있어야 하겠지요.

 집에서 살림하는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집 시설과 무상급식에 목매다는 진보도 있어야 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도맡아 돌보는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집 시설은 틀림없이 빈틈없게 갖추어야 하나, 나 스스로 사람됨과 어버이됨을 알뜰살뜰 건사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 사랑은 어린이집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하고 더 오래 더 자주 더 깊이 살을 부비며 마음을 따사롭게 나누어야 비로소 내리사랑입니다.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받아도 좋겠지요. 여기에서 더 헤아려야 합니다.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제 어버이(엄마만 아니라 아빠 또한)가 마련한 도시락을 먹을 때 더욱 즐거우며 한결 기운을 차립니다. 밖에서 맛난 바깥밥을 사 먹여야 아이가 즐겁지 않아요. 조그마한 집에서 조촐히 차리는 저녁밥을 식구들 모두 둘러앉아서 즐길 때에도 저녁잔치를 이룹니다.


.. 대학교수나 유명 건축사 등 엘리트에 속하는 건축가나 도시계획가들의 입장에서 주택 문제, 특히 아파트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아파트는 이미 너무 많이 지어졌고, 이제 와서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 대단지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택 문제에 대해, 대다수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의 입장은 모호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 한국의 중간계급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비공식 금융시장에 기초한 저축과 대출 때문이었다 …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  (110, 111, 144, 147쪽)


 진보란 삶입니다. 보수도 삶입니다. 진보가 더 낫거나 보수가 더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찾을 사람들이고, 착한 삶을 사랑할 사람들이며, 참다운 삶을 아낄 사람들입니다.

 이리하여, 진보를 바라는 사람도 아파트를 버리거나 떠나야 하는 한편, 보수를 꿈꾸거나 외치는 사람도 아파트를 버리거나 떠나야 합니다. 올바른 보수란, 우리 삶터를 아름다우며 참답게 돌보고픈 생각을 지키는 사람들이니, ‘아파트 = 돈굳히기 살림집’이라 할 때에, 돈이 아닌 ‘사랑굳히기’를 하고 ‘믿음굳히기’를 하도록, 지붕 낮고 이웃하고 가까운 골목동네 여느 살림집으로 옮겨야 합니다. 겨울을 맞이해 한두 번 ‘연탄 나르기’를 하면서 사진찍히기를 하지 좀 말고, 겨우내 여느 골목동네 연탄불 살림집에서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면서 ‘참된 보수’를 외쳐야 올바릅니다.


.. 결국 기업에서 월급쟁이 군단의 징집병들이 되는 것은 3년 간의 군 생활로 ‘교육된’ 남자들이다. 고지서의 납부 기한을 알리는 아파트단지의 스피커와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도록 경비원들에게 전달되는 지침은 군사독재의 유신과 관련이 있다. 차단기가 군부대를 연상시키듯, 경제 발전을 추동한 권위주의 국가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군사주의로부터 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233쪽)


 이제 《아파트 공화국》을 덮습니다. 2007년에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섣불리 이 책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아파트 이야기’를 얼마나 더 깊이 헤아리거나 톺아보는가를 기다린 뒤에야 이 책을 말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느덧 네 해가 흐르는 동안, 한국사람 스스로 아파트를 살가이 살핀다든지 속속들이 꿰뚫는다든지 하는 모습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은 아파트만 제대로 못 읽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땅을 제대로 읽지 못해요.

 아니, 한국사람은 이름은 ‘한국’이지만, 정작 저 스스로 발을 디딘 이 나라를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미국을 읽고 일본을 읽으며 프랑스를 읽습니다. 한국사람은 중국을 읽고 러시아를 읽으며 인도를 읽습니다.

 왜 한국사람은 한국을 이리도 안 읽을까요. 어찌하여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을 이처럼 못 읽는가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을 사랑한다면 한국을 못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한겨레로서 한겨레붙이를 아낀다면 한국말을 사랑할 테고, 한겨레 넋이며 얼이며 두루 돌볼 테지요.

 새삼스레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고맙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앞으로 2107년쯤 된다면, 그무렵을 살아갈 뒷사람 누군가가 ‘지식인들 말씨’가 아닌 ‘수수한 여느 사람들 말씨’로 이 책을 되옮겨 되펴낼 수 있겠다 싶습니다. 2000년대에 한국땅 모습을 차분하면서 그윽히 읽어낸 책을 한국사람 스스로 쓰지는 못했기 때문에, 2107년이나 2207년에 2000년대 한국 터전을 돌아보고자 할 우리 땅 뒷사람들은 어김없이 프랑스 판으로 이 책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새로운 우리 말글로 아로새겨 주리라 믿습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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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눈물 2011-01-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3년 정도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저자인 발레리 줄레조와 같은 전공이어서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죠. 우리나라 '아파트'에 관한 논의는 '교육' 문제 만큼이나 어려운것 같습니다. 참고로 줄레조 교수의 <한국의 아파트 연구>라는 책도 있습니다. 절판이긴 하지만. 이 책은 <아파트 공화국>보다 더 딱딱합니다만, 타자의 시선으로 본 우리의 모습이기에 참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1-01-30 23:3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책도 나온 적이 있나 보군요. 말씀 고맙습니다~~~~~ 찾아서 살펴야겠어요.

'딱딱한' 책이라기보다는 '번역이 딱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책 느낌글에는 굳이 안 적었지만, 이분 책을 옮긴 분 '번역은 그야말로 형편없기 짝이 없었'어요.... ㅠ.ㅜ 왜 이렇게 번역에 마음을 못 쏟는지 슬픕니다...
 
새를 사랑한 산
앨리스 맥레런 지음, 김동미 옮김, 최효애 그림 / 꽃삽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책에 담는 삶, 삶을 담는 책
 [책읽기 삶읽기 35] 앨리스 맥레런, 《새를 사랑한 산》



 한국에서 옮겨진 《새를 사랑한 산》은 스물다섯 나라째 옮겨졌다고 합니다. 스물다섯 나라째 옮길 만큼 《새를 사랑한 산》은 대단한 책이라 할 만하고, 우리 나라는 드디어 스물다섯째 나라가 되었다 할 만큼 퍽 늦쟁이라 할 만합니다.

 《새를 사랑한 산》을 쓴 앨리스 맥레런 님 다른 작품으로는 《록사벅슨》(고슴도리,2005) 하나가 있습니다. 나라밖에서는 이름있을는지 모르나, 나라안에서는 이름없는 사람이요 책이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은 이름값으로 읽지 않습니다. 책은 삶으로 읽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나 (사진)찍은이 삶으로 읽는 책입니다. 이름난 분이 썼다 해서 대단한 책이 아닙니다. 잘 팔리거나 많이 읽힌다 해서 좋은 책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사랑받는다 해서 반드시 훌륭한 책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책과 사람과 삶’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곤 하는데, 지난날 일본강점기 식민지 부역을 했으면서 ‘문학만은 아름다웠다’고 하는 책이 있고, 기나긴 독재 때에 독재정권 부역을 했으면서 ‘문학만은 다르다’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2007)라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좋아하며 아낍니다. 1935년에 태어나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살림꾼 노릇을 하며 남편한테 밥해 먹이고 집일을 꾸리며 아이를 낳아 키운 분이 조물조물 적바림한 삶글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 책을 쓴 할머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첫 책을 내놓았습니다. 2011년 1월 22일에 흙으로 돌아간 박완서 님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 소설쟁이로 이름을 올렸다는데,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쓴 할머님은 자그마치 일흔두 살에 비로소 ‘글쓴이’ 이름을 얻습니다.

 일흔두 살에 첫 책을 낸 할머니가 쓴 삶글은 말 그대로 삶글입니다. 살아오고 살림하며 겪고 부대끼며 생각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우리들을 낳고 키운 어버이’를 낳고 키운 할머니들이라면 으레 알거나 겪거나 맞아들인 삶이 글이라는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마음을 먹고 품을 들여 말미를 낸다면, 내 할머니한테서든 이웃 할머니한테서든 넉넉히 들을 만한 이야기예요. 나물을 다듬는다든지 장을 담근다든지 아이를 바라보며 마지막말을 남긴다든지 하는 이야기하고, 여기에 집일을 하는 동안 ‘농사꾼 마음으로 아깝다 여긴’ 똥오줌을 도시에서도 되쓸 수 있는 뒷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을 발명품으로 만든 이야기를 담은 조촐한 책인 《지는 꽃도 아름답다》입니다. 이 조촐한 책을 알아보며 즐길 수 있는 가슴이라면, 그림책 《록사벅슨》이라든지 시그림책 《새를 사랑한 산》에 품은 사랑과 믿음을 조곤조곤 읽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밤이나 낮이나 산이 볼 수 있는 건 하늘뿐이었습니다. 산은 구름이 떼를 지어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지요. 산은 낮하늘엔 해가 뜨고 지는 길을, 밤하늘엔 달이 그리는 길을 훤히 알았습니다 ..  (11쪽)


 책에 담는 삶입니다. 책에는 삶을 담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 또한 책에 담은 삶을 읽습니다.

 지식을 담는 책이 아니라 삶을 담는 책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내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을 내 책에 담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 또한 내 지식을 넓히려는 마음이 아닌, 내 삶을 따뜻하게 돌보면서 북돋우려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 태어나는 숱한 책은 처음부터 지식을 담습니다. 요즈음 이 나라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처음부터 지식쌓기를 할 마음입니다. 글쓴이도 삶을 담지 못하고, 읽는이도 삶을 읽지 못합니다. 글쓴이부터 내 삶을 헤아리지 못하며, 읽는이 또한 내 삶을 살피지 못합니다.

 먼 데에 있는 좋은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한테 있는 좋은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먼 데에 있는 좋은 이야기란 곧 나한테 있는 좋은 이야기하고 한동아리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먼 데에 있는 좋은 이야기를 깊이 받아들이자면 먼저 나한테 있는 좋은 이야기를 널리 껴안을 수 있어야 하는 줄 잊습니다.


.. 다음해 봄, (새) 조이가 돌아왔습니다. 조이의 입에는 조그마한 씨앗이 물려 있습니다. 산은 여전히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조이는 촉촉한 물기를 한껏 머금을 수 있도록 개울 근처 단단한 바위 틈에 씨를 떨어뜨립니다 ..  (34쪽)


 삶을 말하는 책이고, 삶을 밝히는 책이며, 삶을 나누는 책입니다. 사람이 책을 빚은 까닭은 사람 삶을 아끼거나 사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임금님 이름을 적바림하려고 책을 빚지 않습니다. 임금님 발자취를 적바림한 사람은 ‘임금님 이름’이 아니라 ‘임금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모습’을 뒷사람한테 꾸밈없이 내보이면서 ‘좋은 보기’가 되도록 하려는 마음입니다.

 역사는 연표나 도표나 통계가 아닙니다. 역사는 연표나 도표나 통계에 깃든 삶을 읽는 눈길입니다. 밥이란 밥알 숫자가 아니라, 밥그릇에 담은 사랑과 따스함입니다. 밥을 푸는 살림꾼은 밥알을 헤아리며 주걱으로 밥을 푸지 않습니다. 이 밥을 먹고 기운내라는 따스한 사랑을 담습니다.

 적잖은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삶이 아닌 지식으로 다루고 맙니다. 역사읽기란 지식읽기가 아니지만 자꾸만 지식읽기로 치우칩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만 이와 같지 않습니다. 사회학이든 경제학이든 정치학이든 과학이든 매한가지요, 문학마저 똑같습니다. 글솜씨를 부리는 글이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글재주란 문학이 아닙니다. 사람들 삶을 글로 엮어 이룬 꽃이 문학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네 삶을 아끼는 넋을 그러모아 열매를 맺을 때에 문학입니다. 문화란 연예인 춤과 노래와 영화가 아닙니다. 문화란 여느 사람들이 하루하루 일구는 삶입니다. 예술이란 예술쟁이 신선놀음이 아닙니다. 예술이란 여느 사람들이 날마다 부대끼면서 빚은 살림살이입니다.


.. 세월이 흘렀습니다. 개울은 산 주변의 평지에 온갖 생물들을 모아들였습니다. 산은 초록으로 덮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땅에서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서, 갖가지 작은 동물들이 산을 찾아왔습니다. 온갖 생물들이 산의 몸에서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습니다 ..  (48쪽)


 새를 사랑한 산은 아직 많이 어리숙하던 철부지 때에는 새가 민둥산에 둥지를 틀 수 없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새한테는 먹이와 보금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 풀섶 하나 없는 민둥산에서 새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새 또한 민둥산을 알뜰히 아끼거나 사랑하지 못합니다. 새는 열매를 따먹고 나서 민둥산에다가 신나게 똥을 누면, 열매에 깃들던 씨앗이 톡톡 똥덩어리와 함께 민둥산 거친 흙으로 떨어져 언젠가는 뿌리를 내려 풀이나 나무로 자라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새라든지 벌이라든지 나무라든지, 언제나 숲을 가꾸고 산을 푸르게 하는 징검다리 노릇을 오래도록 저도 모르게 하는 이음새입니다. 산한테서 사랑을 받은 새는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이 새끼들이 다시금 새로운 새끼를 낳고 낳은 끝에야 비로소 ‘민둥산이 산다움을 갖추어야 새도 산을 즐거이 사랑하고 산도 새를 기쁘게 사랑할 수 있는’ 줄 알아챕니다. 민둥산은 오래고 오랜 나날 눈물을 흘린 끝에 비로소 민둥산이 할 몫을 느낍니다.

 사랑한다면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입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삶이 아니라, 몸으로 움직이며 함께 땀흘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 껴안는 사랑이고, 입이 아닌 손과 발을 써서 함께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새를 사랑한 산》이라는 책마냥, 이 땅 이 나라 할머님들은 이 땅 이 나라 어머님들을 돌보며 키웠고, 이 땅 이 나라 어머님들은 딸아들을 알뜰히 사랑하며 돌봅니다. 어머니 사랑은 더없이 크다 하고, 할머니 사랑은 그지없이 깊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 사랑’으로 살아가려는 아버지는 드뭅니다. ‘할머니 사랑’으로 살아내려는 지식인이나 교사나 정치꾼은 얼마나 될까요.

 ‘어머니 지구’라 말하는 분들은, 지구별이 얼마나 넉넉하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가를 밝히고픈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지구는 왜 ‘어머니’ 지구여야 하고, 왜 넉넉하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품은 어머니한테서만 찾아야 할는지요. 우리는 ‘어머니 지구’이기 앞서 ‘사람 지구’를 살필 줄 알아야 하고, ‘사람 지구’이기 앞서, ‘지구다운 지구’를 톺아볼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내 몫을 찾고, 내 길을 밝히며, 내 삶을 일구어야 즐겁습니다. 내 꿈을 아끼고, 내 넋을 돌보며, 내 사랑을 나누어야 아름답습니다. “새를 사랑한 산”은 “어떠한 새이든 벌레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기쁘게 어우러질 터전을 스스로 마련하는 삶”에 접어들고서야 비로소 참다이 사랑꽃을 피웁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 새를 사랑한 산 (앨리스 맥레런 글,최효애 그림,김동미 옮김,꽃삽 펴냄,2008.9.25./8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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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줄, 일상의 즐거움
헬렌 니어링 엮음, 권도희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운 책 백 권보다 즐거운 땀 한 줄기
 [책읽기 삶읽기 34] 헬렌 니어링 엮음, 《하루에 한 줄, 일상의 즐거움》



 하루에 책 한 줄 읽기 벅찬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에 책 한 줄은커녕 집에 책 몇 권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안에 책 몇 권조차 아닌 한 권도 없이 지내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흔하다는 텔레비전마저 없는 사람이 있을 테고요.

 집에 책이며 텔레비전이며 있으나, 거의 들여다볼 겨를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 책이 조금 있으나 들추지는 못하고, 텔레비전만 멀거니 바라볼 사람이 있습니다.

 음력설을 보름쯤 앞둔 보름달은 몹시 밝습니다. 음력설을 코앞에 둔 반달도 무척 밝습니다. 음력설을 지나고 난 초승달도 꽤 밝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사는 동안 새벽과 밤마다 하늘을 으레 올려다봅니다. 낮에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저녁에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따로 시계를 들여다보기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며 때를 헤아립니다. 하늘만 한 시계는 시골에 없습니다. 살갗으로 와닿는 바람만 한 시계 또한 멧골자락에 없습니다. 시골마을 일이란 시계 숫자에 따라 하지 않습니다. 하늘 움직임과 바람결에 따라 하는 멧골자락 일입니다.

 저녁 아홉 시에 잠들어 아침 일곱 시나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난다는 틀이란 없습니다. 어두울 때 잠들어 어스름이 물러날 즈음 일어나면 넉넉합니다. 동이 틀 때에도 깨어도 좋고, 어둠이 깔릴 무렵 잠자리에 들어도 좋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바지런히 일한 다음, 겨울 동안 겨울잠 자는 멧짐승처럼 사람도 옹크리면서 더 쉬고 더 자며 더 놀아도 즐겁습니다.

 그러고 보면, 온누리 아름다운 빛을 담은 책이란 하늘바라기 책이고 바다바라기 책이며 흙바라기 책이거나 꽃바라기 책입니다. 들풀 하나와 열매나무 하나를 사랑하는 넋을 싣는 책입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결이란 머리에 쌓는 지식이 아니라, 날마다 받아들거나 마련하는 밥상에 깃드는 고운 손길입니다. 고운 손길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예쁘장한 얼굴이나 잘 빠진 몸매를 사랑할 사람이 아닙니다. 따스한 마음씨를 사랑할 사람이지, 엄청난 돈이나 잘난 이름값을 사랑할 사람이 아니에요. 좋은 사람, 좋은 삶, 좋은 꿈, 좋은 보금자리, 좋은 흙과 햇볕을 사랑할 사람입니다.


- 어딜 가나 사람들로 가득하고 돌림병 퍼뜨리는 불결한 공기가 짓누르는 도시에서 먼지와 매연을 들이마시면서 자기 영혼을 질식시키느니 장미와 재스민 꽃밭에서 살지 않겠는가? (19쪽 - 1666년/에이브러햄 카울리)
- 시골의 농민들은 거친 빵과 간소한 음식밖에 먹지 못해도, 자연이 줄 수 있는 가장 값비싸고 기름진 먹을 것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짐승 같은 식욕을 가지고 있는 도시의 대식가들보다 훨씬 몸이 가볍고 몸놀림이 활발하다. 최고급 음식과 음료에만 익숙한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48쪽 - 1683년/토머스 트라이언)



 헬렌 니어링 님이 엮은 《하루에 한 줄, 일상의 즐거움》을 읽습니다. 지난 2004년에 《헬렌 니어링의 지혜의 말들》로 나왔던 책이 앙증맞다 싶은 판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새판으로 읽든 옛판으로 읽든 슬기로운 말은 슬기로운 말입니다. 백 해 앞선 때 글이 있고 오백 해 앞선 때 글이 있는데, 어느 때 글이든 오늘날 읽으면서 오늘 내 삶을 밝히기에 즐거우면서 슬기로운 말마디입니다.

 다만, 새판이나 옛판이나 번역은 반갑지 않습니다. 새판으로 내놓으면서 번역글을 한결 다숩게 손질하지 못한 대목이 아쉽습니다. 새판이란, 껍데기만 새로 꾸미는 책이 아니라, 옛판에서 어설프거나 어리숙하게 선보였던 글월을 차근차근 북돋우거나 어루만지면서 아름다이 내놓는 새로운 선물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제는 현재의 내 삶의 방식에 대해 만족을 느끼게 되었다(33쪽)”는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이제’를 한자말로 옮기면 ‘현재(現在)’입니다. “이제는 현재의”란 “현재는 현재의” 꼴이거나 “이제는 이제의” 꼴입니다. “이제는 내가 살아가는 하루를 즐겁게 느낀다”라든지 “이제는 오늘 내 하루를 흐뭇하게 느낀다”로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나는 결코 박한 생활 방식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98쪽)”는 “나는 일부러 가난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로 손질해야겠다고 느낍니다. ‘박한 생활 방식’이란 무엇을 가리킬는지요.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많은 물건들을 자신의 농장에서 얻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잉여 작물을 판매해서 구하면 된다(224쪽)”는 “시골사람들은 살면서 쓸 모든 물건을 논밭에서 얻을 수 있고, 논밭에서 얻을 수 없으면 곡식이나 푸성귀를 팔아 사면 된다”로 손질해야겠구나 싶습니다. ‘얻다’를 두 차례 쓰다가 ‘구(求)하다’를 쓰는 모양새는 어설픕니다. 더욱이, 시골사람이 일하는 논밭이나 들판을 가리켜 자꾸 ‘농장(農場)’이라 하는데, 농장이란 “농사짓는 땅”을 가리키는 낱말일 뿐입니다. 농사짓는 땅이란 논밭이고, 짐승을 풀어서 기른다면 들판입니다. 더군다나, 시골사람들 삶을 말하는 글이라면 시골사람들 삶하고 잇닿은 말마디로 적바림해야 옳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들거나 시골사람들은 안 쓰는 도시사람 말마디로 시골사람 삶을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부질없으랴 싶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고된 노동과 궁핍이라는 역경이요(270쪽)”는 “수많은 사람들한테 삶이란 고된 일과 가난이라는 가시밭길이요”쯤으로 손질하면 참 좋겠다고 느낍니다. 좋은 뜻을 품은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책이라면 좋은 말로 옮기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북돋우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책이라면 사랑스러운 말로 쓸 수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 농부의 삶은 계절에 지배당했을지는 몰라도 도시 사람의 삶처럼 시계에 지배되지는 않았다. (86쪽 - 1951년/A.G.스트리드)
- 안락한 피서지를 찾아 이 지역에 오는 사람들은 그 너른 11월의 하늘이 펼치는 장관을 보지 못한다. (134쪽 - 1852년/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헬렌 니어링 님이 ‘옛책’을 뒤적여 ‘새책’을 엮은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할 일이 없거나 말미가 남아돌아 옛글을 오늘날 새로 읽히려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로 이어지는 슬기로운 옛사람 옛삶을 사랑하고픈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식으로 삼을 말이 아니라, 내 하루 삶으로 받아들일 말이라고 느낍니다. 머리에 담을 이야기가 아니라, 몸으로 옮길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좋은 책으로 삼아 머리맡에 놓기보다는, 좋은 깨우침으로 삼아 하루에 한 가지씩 몸소 즐기자고 여기며 이렇게 하나하나 옮겨적었다고 느낍니다.

 백 가지 지식이나 백 가지 멋진 말이 아닌, 한 가지 수수한 삶과 한 가지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당신을 돌보려 했다고 느낍니다.


- 채소든 과일이든 밭에서 난 것은 모두, 자기가 직접 재배한 것을 먹는 가난한 이가 그렇지 않은 부자보다 더 좋은 것을 먹는다. (262쪽 - 1826년/J.C.루던)
- 재산과 지위에 따르는 허울 좋은 불편함은 바보들이나 원하고, 사악한 사람들이나 갖는 것. 그의 단잠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330쪽 - 1668년/에이브러햄 카울리)



 내 아이를 남이 맡아 줄 때에 내 아이가 한결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이 자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못난 어버이나 잘난 어버이는 따로 없습니다. 그저 아이 어버이입니다.

 더 이름높은 대학교를 마쳤다 해서 더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아예 안 다녔거나 중학교나 초등학교만 마쳤더라도 내 삶을 내 손으로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훌륭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더 많은 돈을 들여 더 값진 먹을거리를 사다 먹는다 해서 더 맛나게 즐길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이 다 함께 일하고 마련한 밥과 푸성귀로 차리는 수수한 밥상이 맛나면서 좋다고 느낍니다. (4344.1.18.불.ㅎㄲㅅㄱ)


― 하루에 한 줄, 일상의 즐거움 (헬렌 니어링 엮음,권도희 옮김,씨앗을뿌리는사람,2010.12.20./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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