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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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태어나는 새 숨결
 [책읽기 삶읽기 116]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

 


  “‘변방을 찾아가는 길’이란 결코 멀고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변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144쪽).”고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는 신영복 님 책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를 읽습니다. 신영복 님은 당신 글씨가 걸린 ‘변방’을 찾아 먼길 나들이를 했다는데, ‘변방(邊方)’은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 (괴산) 거리의 가로등에도 고추와 임꺽정이 올라서 있다. 정작 소설 《임꺽정》의 문학적 위상이 어떤 것인지는 관심이 없다. 고추를 먹으면 임꺽정처럼 힘이 넘친다는 마케팅의 소재로 남아 있을 뿐이다 ..  (11쪽)


  신영복 님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들어갔고, 감옥에서 스무 해를 살다가 나온 다음에는, 내처 서울 쪽에서 살아가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곧, 신영복 님한테 ‘한복판(중심)’은 서울이 되고, 고향 밀양은 ‘변두리’가 되었겠지요.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한동안 대학교를 다니거나 출판사에서 일했지만, 이내 대학교는 그만두고 책일 또한 모두 접고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갔다가, 고향에서도 멀어진 시골로 삶터를 옮깁니다. 곧, 나한테 한복판은 시골이 되고, 서울이나 인천은 변두리가 됩니다.


.. 우리가 찾아간 서정분교는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놀라운 것은 학교 전체에서 풍겨 오는 풋풋한 흙냄새였다. 서울의 학교 운동장에는 없는 냄새였다 … (오대산 상원사)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  (40, 100쪽)


  서울이나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내 삶터’는 변두리입니다. 부산에서든 대전에서든, 또는 춘천이나 순천이나 광주나 여수에서조차 ‘내 삶터 시골’은 변두리예요. 더욱이,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라남도 고흥군으로 칠 때에, 고흥읍에서 보아도 우리 식구 깃든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은 한참 깊숙하게 들어간 ‘외딴 곳(변두리)’이에요. 이제 우리 마을 앞으로도 군내버스가 다니지만, 그리 멀지 않던 예전까지 우리 마을 앞에는 찻길이 없어 어떠한 자동차도 못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시골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툭탁툭탁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우리들한테 시골자락은 ‘한복판’입니다. 우리들한테 서울이나 도시는 ‘외딴 곳(변두리)’입니다. 우리 식구는 한복판인 시골자락에서 웃고 떠들며 노래하며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굳이 외딴 데까지 찾아갈 일이 없어요. 햇살을 누리고 바람을 마시며 냇물을 즐기는 한복판 보금자리가 좋습니다. 풀을 뜯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멧새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시골자락 한복판 보금자리가 예쁘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는 새 숨결을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자라나는 새 목소리를 헤아립니다. 시골에서 무럭무럭 크는 새 사랑을 그립니다. 시골에서 시나브로 일구는 새 손길과 눈길을 돌아봅니다.


  깊은 가을날 좋은 볕과 바람과 소리와 빛깔과 내음을 마시고 먹습니다. 마을마다 천천히 익는 감알을 바라보며 배부릅니다. 날마다 더 짙고 환하게 무르익는 나락을 바라보며 흐뭇합니다. 내가 안 심고 내가 안 베는 나락이지만,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나락논이 참 곱다고 느낍니다.


  누구인지 몰라도, 누군가 이 노오란 나락을 빻아 밥을 지어 먹겠지요. 누구인지 몰라도, 누군가 이 노오란 나락에 깃든 해님과 달님과 물님과 별님과 바람님과 흙님을 몸으로 받아들이겠지요. 시골에서 지내든 도시에서 지내든, 모든 고운 넋 깃든 나락 한 알을 먹으며 스스로 우주가 되고 스스로 빛이 되겠지요.


..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오죽헌은 그 규모부터 대궐같이 성역화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 (홍명희) 문학비는 주차장이 되어 있는 텅 빈 제월대 광장 가장자리에서 혼자 가을볕을 안고 있었다 ..  (56, 79쪽)


  이야기책 《변방을 찾아서》는 ‘변방’ 또는 ‘변두리’를 찾아간다고 글을 쓰지만, 시골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보자면, 그예 ‘시골’ 나들이를 하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그래요, 시골 나들이예요. “시골을 찾아서” 도시를 떠나요. 아주 살짝 시골에 머물다 도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흙내음’을 맡고 ‘햇볕’을 쬐며 ‘바람’을 마시다가는 ‘냇물’에 손을 적시고 ‘나무그늘’을 누리려고 시골로 와요. 시골에 참말 살짝 머물다가 이내 도시로 간다 하지만, 시골에서 슬기를 깨우치고 생각을 빛내요.


.. 내가 그동안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료 수집과 집필 구상 등 준비를 많이 할수록 틀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  (12쪽)


  뜻있는 이들이 참다운 한복판에 삶터를 꾸리면 기쁜 일이 되리라 생각해요. 겉치레나 겉꾸밈 같은 한복판이 아니라,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운 한복판을 가슴 깊이 느끼면서 뜻있는 이들 좋은 보금자리가 좋은 마을이 되고 좋은 지구별 쉼터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기쁘리라 생각해요.


  도시가 복닥거리고 어수선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모두 도시에서 스스로 복닥거리면서 어수선하게 살아가잖아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아웅다웅 치고박고 다툰다 하면서, 막상 이처럼 말하는 사람들 모두 도시에서 스스로 아웅다웅 치고박고 다투면서 살아가고 말아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빌어요. 서로 믿고 아끼며 지내기를 빌어요. 서로 돕고 어깨동무하며 살아가기를 빌어요. 서로 좋아하고 서로 웃으며 지내기를 빌어요.


  시골에서 만나요. 나는 이쪽 시골에서 살아갈 테니, 당신은 저쪽 시골에서 살아가셔요. 서로서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실을 다녀요. 나는 오늘 걸어서 당신한테 찾아갈 테니, 당신은 모레에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오셔요. 나는 또 글피에 당신한테 자전거수레에 아이들 태우고 마실을 갈 테니, 당신은 또 이레 뒤에 식구들과 들길을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걸어서 찾아오셔요. 환하게 밝는 아침햇살 맞으며 길을 나서요. 어둑어둑 땅거미 느끼며 밥 한 그릇 나누어요. (4345.9.25.불.ㅎㄲㅅㄱ)


―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글,돌베개 펴냄,2012.5.21./9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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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9-25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의 책인가요? 이 책 좋았는데...

내가 그동안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료 수집과 집필 구상 등 준비를 많이 할수록 틀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 (12쪽)
...그런거군요.

"시골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툭탁툭탁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 행복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

숲노래 2012-09-25 18: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밑줄을 그은 대목 몇 군데를 빼고는
'글쓴이가 있는 이곳(중심)'과 '글쓴이가 없는 저곳(변방)'이
어떻게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좋은 삶을 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시골(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중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데,
시골(변방)에 올 때면 다들 시골(변방)이 좋거나 훌륭하다 말하지만,
정작 도시(중심)를 떠나 시골(변방)로 삶터나 일터를
옮기는 일은 없어요.

언제나 '여행 이야기'로만 남는다고 할까요.

여행 뒷이야기를 넘어
스스로 어떤 삶을 새롭게 빚는다 하는 느낌과 마음을
글에 드러내지 못한다면...
가볍게 읽고 덮은 다음에 그저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요...
 


 헌책 도서관

 


  우리 식구들이 시골마을에서 꾸리는 도서관으로 찾아온 사람이든 안 찾아온 사람이든, 우리 도서관을 말하면서 자꾸 ‘헌책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름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스스로 책을 모르고 책에 눈길을 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쓸밖에 없구나 싶다.


  아주 마땅한 노릇으로, 먼저 국어사전부터 뒤적일 일이다. ‘헌책’이란 무엇인가. 종이가 낡거나 닳은 책이 ‘헌책’이 될 테고, 이 다음으로 누군가 읽은 책이 ‘헌책’이 된다. 곧, 아직 아무도 펼치지 않은 빳빳한 물건일 때에는 ‘새책’이요, 이 빳빳한 종이꾸러미를 누군가 손으로 집어 펼치면 ‘헌책’이 된다. 그러니까, 모든 책은 헌책이 된다. 또한, 모든 책은 새책이 된다. 종이꾸러미로 볼 때에, 사람들한테 읽히는 책이기에 헌책이요, 아직 모든 사람한테 알려지지 않은 책이니까 새책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두고두고 되읽히는 책이기에 헌책이며, 언제까지나 새로운 넋과 숨결을 불어넣기에 새책이다.


  공공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을 헤아려 본다. 지구별 모든 도서관에 깃든 책은 어떤 ‘책’일까. 도서관에서 ‘새책’을 사들여 갖춘다 할 때에, 도서관은 ‘새책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책시렁에서 꺼내어 읽고, 또는 집으로 가져가서 읽는 책들이 있는 도서관은 어떤 책이 있는 곳인가. 가만히 따지면, 도서관이야말로 ‘헌책’이 그득그득 있는 ‘헌책방’인 모양새이다.


  나는 내 책들(우리 식구 책들), 이른바 ‘내 서재’ 책으로 도서관을 열었다. 내 살림돈에서 달삯으로 낼 돈을 덜어 개인도서관을 꾸린다. 그러니까 우리 식구 도서관은 ‘서재도서관’이다. 서재도서관으로서 가장 눈여겨보며 살피는 갈래는 사진책이니 ‘사진책 도서관’이다. 지자체나 정부에서 꾸리는 도서관은 개인이 아닌 공공기관이 꾸리니까 ‘공공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겠지.


  다시금 헤아리면, 이 나라 모든 헌책방들은 ‘책을 파는 가게’이면서 ‘책을 살피는 도서관’과 같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예나 이제나 이 나라 헌책방을 바라보며, ‘헌책방은 가게이면서 도서관’, 곧 ‘헌책방 = 헌책 도서관’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이 헌책방에도 새책방에도 즐겁게 나들이를 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도서관에서도 집에서도 책을 기쁘게 읽으면 좋겠다. 좋은 마음이 되어 좋은 책을 마주하고, 좋은 이야기를 아로새기며 좋은 삶으로 거듭난다면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한다. (4345.9.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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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댕기·비단구두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로 〈오빠 생각〉을 부를 때에, 나 스스로 미처 생각하지 못하면, 어릴 적 국민학교에서 길든 노랫말대로 부르고 만다. 나도 모르게 잘못된 노랫말이 튀어나오면 얼른 노래를 끊고, 숨을 고른 다음 다시 부른다. 사람한테 한 번 잘못 아로새겨진 말버릇은 고치기 힘들구나 싶은데,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틀을 놓지 않기에 내 잘못된 말버릇이 모두 씻기지 못하는지 모른다.


  요즈음에는 〈오빠 생각〉을 부르며 노랫말을 내 나름대로 바꾸어 본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을 “우리 오빠 말 타고 시골 가시면”으로 바꾼다. 그리고, 이 다음 노랫말은 “감알 잔뜩 사들고 오신다더니”로 바꾼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인데, 자꾸 서울 가느니 서울에서 무얼 사오느니 하는 노랫말을 듣거나 부르는 일은, 이 노랫말대로 나와 아이들을 길들이는 노릇이 되겠구나 하고 느낀다. 그래서 시골사람답게 이 시골(여기)에서 저 시골(저곳, 옆마을)로 나들이를 가서 감알을 사온다고 하는 흐름으로 바꾸어 본다.


  1990년에 ‘한겨레신문사’에서 《겨레의 노래》 두 권을 내놓는다. 이 노래책에서 처음으로 ‘그동안 잘못 알려진 노래’를 바로잡는다. 그러나, 이 노래책에서 노랫말을 바로잡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익히 길들던 대로 노래를 부르곤 한다. 이를테면, 최순애 님 〈오빠 생각〉을 부르며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하는 노랫말을 바로잡지 못한다. 비단구두란 없는데, 비단으로 구두를 만들 수 없고, 비단으로 만든 구두는 신지도 못하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노래로 끝없이 부르고 또 부른다. 최순애 님도 이 대목을 무척 안타깝게 여기셨지만, 사람들이 이 노랫말로 길들여져서 고치기 힘든데 어찌 하겠느냐 하고 말씀한 적 있다. 이 안타까움을 1990년에 비로소 바로잡으려 했는데, 너무 작은 움직임이었을까.


  그러나, 누구라도 생각해 보면 ‘비단구두’가 얼마나 어이없고 뜬금없는지 깨달으리라. 나도 국민학생 때에 ‘비단구두’는 뭔가 얄궂다고 느꼈다.


  신영복 님 책 《변방을 찾아서》를 읽다가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며 서울 가신 오빠는(72쪽)”이라는 글월을 본다. 신영복 님도 ‘비단구두’로만 알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나 이 노래 이 대목은 ‘비단댕기’이다. 최순애 님은 처음부터 ‘비단댕기’로 시를 썼는데, 이 시를 노래로 지어 내놓을 무렵, 일제강점기 군홧발이 ‘댕기’를 ‘구두’로 고쳤다. 왜 그랬을까? 뻔한 일이겠지. 아이부터 어른까지 널리 부르는 노래에 한겨레 넋과 얼을 북돋우는 대목이나 말마디가 깃들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 했겠지.


  아이들한테 〈오빠 생각〉을 부를 때에, 곧잘 노랫말 한 마디를 살짝 바꾸기도 한다. 시골에 가서 감알을 사오는 이야기로 바꾸기도 하지만, 참말 시골사람답게 “우리 오빠 걸어서 읍내 가시면, 비단댕기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하고 불러 본다. (4345.9.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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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누가 살아? - 산타와 나무의 "모든 생명과 함께 웃는 세상 이야기" 2 작은돌고래 3
노정임 기획.글, 이경석 그림 / 웃는돌고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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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한테서 선물받은 밥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96] 노정임·이경석, 《땅속에 누가 살아?》(웃는돌고래,2012)

 


  낮에는 날이 참 따스합니다. 저녁이면 날이 퍽 서늘합니다. 한가위를 앞둔 가을날은 낮과 밤 날씨가 꽤 벌어집니다. 저녁 날씨를 느끼자면, 모기가 다 죽어서 잠들 만하건만, 낮 날씨를 헤아리자면, 모기가 아직 용을 쓰며 살아남으려 하겠구나 싶습니다.


  텃밭 가장자리에 모기들이 왱왱거립니다. 모기 날갯짓 소리를 들으면서 풀을 뜯습니다. 돗나물도 뜯고 까마중잎도 뜯습니다. 망초잎도 뜯고 올해에 갓 뿌리를 내려 보드라운 줄기를 올린 여린 산초줄기를 꺾습니다. 부추잎을 꺾고 모시잎을 땁니다. 쑥도 쇠비름도 질경이도 하나하나 뜯습니다. 이밖에 이름을 잘 모르지만 보드랍고 자그마한 풀잎을 뜯습니다.


  모기를 쫓으며 뜯은 풀잎은 흐르는 물에 헹구어 흙을 떨굽니다. 한동안 그대로 두어 물기를 빼고, 젓가락으로 집기 좋게 톡톡 썹니다. 숟가락에 된장 조금 퍼서 나물을 골고루 비빕니다. 왼손으로 석석 비벼서 접시에 담고, 왼손은 쪽쪽 빤 다음 씻습니다.


  텃밭 풀을 뜯자면 후박잎을 걷어야 합니다. 이제 가을날 후박나무 가랑잎이 텃밭에 꽤 떨어졌습니다. 치우고 다시 치워도 새 가랑잎이 춤춥니다. 밤과 새벽에 찬이슬 맞고 오들오들 떠는 풀잎은 시들시들합니다. 사이사이 갓풀이 새로 돋습니다. 이른봄에 쑥 곁에서 쑥쑥 자라는 갓풀인데, 한가을에도 이처럼 먹을 수 있군요.


.. 산타가 하는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흙을 파며 놀았어요. 흙으로 집도 짓고, 기차도 만들었어요. 불도저처럼 손으로 흙을 밀어 작은 산도 만들었지요 ..  (19쪽)


  식구들이 도시에서 살아갈 적에는 흙땅을 밟기 퍽 어려웠습니다. 도시라는 곳은 빈터 하나 없이 촘촘하거든요. 도시에서는 작은 땅뙈기 하나에라도 집을 짓거나 길을 내거나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자동차 대는 터가 돼요. 도시에서는 나무 한 그루 느긋하게 뿌리를 뻗지 못해요. 도시에서는 아이들 신나게 뛰놀 빈터가 없어요. 따로 놀이공원을 만들지 않고서야 아이들 놀이터와 쉼터가 없는데, 이곳마저 푸름이나 어른들 담배터나 술터로 바뀌곤 해요.


  곰곰이 생각하면,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흙이 있어야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거두고, 이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로 밥을 먹어요. 뭍고기를 먹는다 하더라도, 또 뭍고기인 소나 돼지나 닭을 시멘트로 바닥을 댄 우리를 지어서 키운다 하더라도, 짐승한테 줄 먹이(밥)는 흙에서 얻습니다. 사료이든 항생제이든, 또 이것저것 무어라 하든, 집짐승이든 우리짐승이든 흙에서 얻는 먹이를 먹으며 살을 찌워요. 풀을 즐겨먹든 고기를 즐겨먹든, 누구나 흙이 있어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어요.


.. “물속 벌레들도 숲속 땅에 사는 동물들처럼 물속에 쌓인 잎사귀들을 먹어치우며 흙을 만들고, 또 물을 깨끗하게 해. 물 밑에 있는 땅도 온갖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야.” ..  (43쪽)

 

 


  아이들이 쉽고 재미나게 읽을 만한 그림이야기 《땅속에 누가 살아?》(웃는돌고래,2012)를 읽으며 생각을 기울입니다. 《땅속에 누가 살아?》는 어린이가 스스로 읽으며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그림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라면 으레 흙을 만질 테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흙을 만지기 어렵기에, 이 책을 읽으며 무언가 느끼며 깨달을 만해요. 다만, 책을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손수 흙을 만지면서 살갗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머리에 깃든 앎조각은 삶으로 스며들지 않아요. 머리에는 앎조각이 가득하지만, 정작 몸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셈이에요.


  쉽고 재미나게 읽도록 구수한 글과 예쁜 그림으로 어우러진 그림이야기 《땅속에 누가 살아?》인데, 어린이는 이 책을 읽으며 쉽고 재미나게 ‘흙삶’을 익히거나 살필 수 있다지만, 정작 어린이와 살아가고 어린이한테 밥을 먹이며 어린이를 가르치거나 이끄는 어른은 어떤 책을 읽으며 ‘흙삶을 쉽고 재미나게’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깨달을까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이 그림이야기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생각밭을 북돋울까요? 어른들은 이 그림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찬찬히 읽히면서 새삼스레 깨달을까요?


.. 흙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땅 위의 풀들이 다 자란 뒤에 시들면 몇 백 년 동안 썩으면서 부슬부슬한 흙이 됩니다.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들도 썩어서 몇 년이 지나면 흙이 됩니다. 물속에서 자라는 물풀도 시든 뒤에 수십 년 동안 썩어서 흙이 됩니다. 동물들도 죽으면 한참 지나 썩어서 흙이 되고요. 커다랗고 단단했던 바위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잘게 쪼개지면서 자갈, 모래, 흙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렇게 동식물과 바위의 가루로 만들어진 흙들이 다 섞여서 지구를 덮고 있는 흙이 되어요 ..  (61∼62쪽)

 


  자연과 생태와 평화와 민주와 통일 들을 다루는 어린이책이 그림책을 읽을 때마다 늘 궁금합니다. 이 좋고 아름다운 어린이책과 그림책은 아이들한테만 읽혀야 할까 궁금해요. 어른들부터 이 좋고 아름다운 어린이책과 그림책을 읽으면서, ‘어른이 되는 동안 스스로 버리거나 잊은 마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려야 하지 않나 싶어요.


  흙을 먹을 때에 밥을 먹고, 흙을 눌 때에 밥이 살아요. 흙을 만질 때에 내 삶을 보듬고, 내 삶을 보살필 때에 흙 또한 곱게 돌봐요.


  어른들 누구나 자가용은 좀 덜 타면서, 아이들 손을 잡고 들길이건 멧길이건 흙길이건 시멘트길이건 거닐면 좋겠어요. 어른들 누구나 아이들과 함께 이 지구별을 두 발과 두 손과 온몸으로 느끼면서 따순 사랑을 생각하면 좋겠어요. 땅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비롯해, 땅 위쪽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슬기롭게 살피고 곱게 어깨동무할 수 있기를 빌어요.


  그나저나, 이 책 18쪽에 “산타는 먼 곳으로 여행하기 싫어서 마당에 텃밭을 만든”이라 나오는데, 이 책에서 산타가 사는 곳은 서울 남산 꼭대기예요. 이 책에서 산타는 남산탑 아래쪽 숲속에 밭을 일구어요. 곧, ‘마당 텃밭’이 아니라 ‘숲속 밭’ 또는 ‘숲밭’이라고 말해야 올발라요. 다음으로, 이 책 60쪽에 “흙이 두텁고 기름진 땅”이라 나오는데, ‘두텁다’는 마음이나 생각을 가리키는 자리에만 쓸 수 있어요. “흙이 두껍고 기름진 땅”으로 바로잡아야 알맞습니다.


  아무쪼록,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흙한테서 선물받은 밥을 맛나게 먹고 기운차게 삶을 일구면서 날마다 예쁜 사랑을 이웃들과 재미나게 나눌 수 있다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4345.9.24.달.ㅎㄲㅅㄱ)

 


― 땅속에 누가 살아? (노정임 글,이경석 그림,웃는돌고래 펴냄,2012.9.5./9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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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9-25 13:51   좋아요 0 | URL
"흙한테서 선물받은 밥" - 늘 기억해야겠네요.

맨 끝의 그림이 아주 재밌어요. 똥 종합 선물세트... 그런데 똥이 싫다는군요.ㅋㅋ

숲노래 2012-09-25 18:02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보였지만,
이만 하게 빚은 한국 어린이 창작책이 워낙 없기에
점수를 좀 넉넉히 주었어요 ^^;;;

글쓴이와 그린이가
앞으로 더 슬기롭게 발돋움하기를 빌어요~

..

두더지는 똥을 안 먹으니까요 ^^;;;;
 


 사진 한 장으로 읽기

 


  자그마한 헌책방을 찾아갑니다. 찾아가 보니, 크기가 작아 ‘자그마한 헌책방’이라 말하지만, 이곳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곳입니다. 크기가 크대서 ‘더 나은’ 헌책방이 아니요, 크기가 작대서 ‘덜 떨어지는’ 헌책방이 아닙니다. 책을 더 많이 읽었다는 사람이 더 뛰어난 사람이 아니요, 책을 적게 읽은 사람이 덜 떨어진 사람이 아니듯, 책방이나 책터는 크기로 따지지 않습니다.


  갖춘 책이 더 많아야 더 좋은 헌책방이 되지 않습니다. 사고파는 책 가짓수나 숫자가 더 많아야 더 훌륭한 헌책방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헌책방에 들든 내가 읽을 마음이 드는 책 하나 만나면 됩니다. 주머니를 털어 책 하나 장만하지 않더라도, 책시렁을 가만히 돌아보며 책내음을 맡고 책이야기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모습을 남기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어떤 모습을 남기려고 찍는 사진이란 나한테는 아무 값을 못합니다. 오직 하나, 나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이 샘솟는 데에 좋아하는 그대로 찍는 사진만 값합니다. 아이들을 찍든, 내 보금자리와 시골마을을 찍든, 또 헌책방을 찍든, 이웃을 찍든, 자전거를 찍든, 내 마음속 가장 따사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사진기를 들 때에 비로소 뿌듯하고 즐거습니다.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삶을 읽습니다.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내가 마음으로 아낄 이웃 삶을 읽습니다.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지구별 삶을 읽고, 내 발자국이 닿는 아름다운 삶터를 읽습니다. (4345.9.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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