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은 책 2017.10.5.


하동에서 책숲집으로 손님이 오신다. 집에서 두 아이가 골골거린다. 아이들은 골골거리는 몸으로도 책숲집으로 따라나오고 싶어하리라.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배가 고프면 스스로 챙겨 먹도록 죽을 끓여 놓고 나온다. 참말로 아이들은 골골거리며 이마가 후끈거려도 따라나오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이런 놀라운 마음이기에 아픔도 어른보다 훨씬 빨리 씻을 뿐 아니라 늘 신나게 놀 수 있겠지. 책숲집으로 옮겨 놓을 책보따리를 안고서 간다. 손님은 고흥읍에서 뵙고서 함께 낮밥을 먹고서 책숲집으로 들어오기로 했는데, 군내버스를 탈 즈음 생각하니 가방에 책을 한 권도 안 챙겼다. 집이며 책숲집에 그토록 책이 많은데 군내버스에서 읽을 책을 한 권도 안 챙긴 날이 더러 있다. 허허. 책 없는 몸으로 군내버스를 탄다. 가끔 이럴 일도 있으니 스스로 너그럽자는 생각을 하며 빈책을 편다. 오늘은 남이 쓴 글은 읽지 말고 이 빈책에 내가 아이들하고 짓는 하루를 노래로 적어 보자고 생각한다. 군내버스에서 노래를 두 꼭지 쓴다. 고흥읍에 닿아 군청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네 꼭지를 더 쓴다. 좋네. 읽을 책이 손에 없으면 쓸 글이 손에서 춤추는구나. 손님하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손님은 돌아가야 할 길로 돌아가시고 나는 집으로 온다. 집에 와서 《말썽꾸러기 로라》를 다시 읽으며 큰아이한테 물어본다. “어때? 이 책 재미나지 않니?” “재미? 글쎄, 그냥 뭐.” 큰아이한테는 벌써 《말썽꾸러기 로라》가 재미없는 나이인가? 아닐 테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하고 큰아이나 작은아이가 똑같으니까 멋쩍어서 둘러대는 말일 테지?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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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로, 일본 책방 - 어느 헌책방 라이더의 고난극복 서점순례 버라이어티
조경국 지음 / 유유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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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24


일본에서 책방 찾아 오토바이 나들이
―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
 조경국 글·사진
 유유 펴냄, 2017.8.4. 16000원


  저는 두 다리로 살랑살랑 걷기를 즐깁니다. 책방마실을 다닐 적에도 두 다리로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을 골목을 가만히 거닐다가 슬며시 깃들기를 즐겨요. 혼자서 서울에서 살던 무렵에는 저희 살림집을 일부러 종로구 평동에 있던 적산집에 마련했어요. 아파트 재개발이 들어서기 앞서까지 있던 적산집은 오직 나무로 지은 2층 일본집이었어요. 삐그덕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좋았고, 서울에서는 종로구 평동에서 어디로든 걸어서 한두 시간이면 모든 헌책방으로 마실을 갈 수 있었습니다.

  버스도 전철도 많은 서울인데 이런 서울에서 부러 두 다리로 한두 시간을 걸어서 책방을 다녔는데요, 오늘 걸었으면 이튿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두 다리하고 자전거를 갈마들면서 책방마실을 다녔지요. 책방마실을 마친 뒤에는 가방이며 두 손에 가득 책짐을 들고 지면서 낑낑대며 다시 걷거나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일본 만화의 저력은 작가를 사랑하고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꼼꼼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40쪽)

다케오 시립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느꼈던 아쉬움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연간 방문객만 100만 명. 도서관 하나가 인구 5만의 소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85쪽)


  걸어서 골목을 가로질러 책방마실을 할 적에는 우리 보금자리하고 책방 사이에 깃든 숱한 이웃집을 마주합니다. 두 곳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살림을 짓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느껴요. 그래서 때로는 ‘내가 사는 집’도 다른 이웃한테는 그분이 거닐거나 자전거를 달리면서 지나치는 골목집 가운데 하나가 되겠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서 책방마실을 다닐 수는 없습니다. 바퀴걸상으로 다니는 분이라면 자동차로 다니면 한결 낫지요. 오토바이를 좋아한다면 오토바이를 몰면서 골골샅샅 누빌 수 있을 테고요.

  경남 진주에서 책방살림을 짓는 조경국 님은 오토바이(또는 바이크)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오토바이를 몰기 앞서는 조경국 님도 두 다리나 자전거로 책방마실을 다니셨을 텐데, 이제 진주에서 이 고장 저 고장으로 싱싱 오토바이를 달린다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오토바이 책방마실은 한국으로는 좁아 바다 건너 일본으로 뻗습니다.


공공도서관의 역할은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기록물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제대로인 공공도서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92쪽)

짧은 시간 머물렀을 뿐이지만 기조 그림책 마을이 편안하고 좋았던 이유는 책보다 자연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 김병록 님과 백창화 님이 꾸리는 충북 괴산의 ‘숲속작은책방’이나 최종규 님이 전남 고흥에 만든 사진책도서관 ‘숲노래’ 같은 곳에 힘을 모을 수 있다면 기조 그림책 마을 같은 곳을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108쪽)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유유, 2017)은 책방을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책방지기이자 책마실벗으로서 일본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이곳저곳 누빈 이야기에, 이곳저곳 누비는 틈틈이 책방에서 마음이며 몸이며 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마실이라니, 남다르다 할 수 있고 유난스럽다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재미있겠네 싶어요. 일본에서 기차나 버스로 골골샅샅 누빌 수도 있습니다만, 손수 오토바이를 달린다면 가고 싶은 곳으로 더 느긋하게 갈 수 있습니다. 쉴 적에도 하염없이 쉬면서 여러 날 지낼 수 있지요.

  기차가 닿지 않는 시골이나 버스가 드문 시골로도 얼마든지 오토바이로 달릴 만해요. 때로는 고개를 낑낑 넘고 바닷가를 한갓지게 지날 수 있어요. 책방마실도 책방마실이지만 새삼스러이 온몸으로 마주하는 일본마실이 될 만합니다.


나가노행을 결정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을 끼고 달리는 153번, 19번 국도의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가노에 거의 도착해 터널에서 교통 정체 때문에 약간 고생한 걸 빼면 9시간 내내 오토바이 타는 재미를 누렸다. (149쪽)


  우리가 읽는 책은 지은이 한 분이 이녁 삶자리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담습니다. 줄거리만 담긴 책이 아니라, 지은이 땀방울에 발자국에 살림살이에 마을 이웃 모두 고이 담기는 책이에요.

  우리는 지은이가 살던 옛집을 찾아가서 지은이 손자국을 느끼면서 책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지은이가 거닐던 길을 우리도 따라서 거닐어 보면서 책을 짓는 동안 들인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을 크게 한 바퀴를 오토바이로 도는 동안 이제까지 ‘책으로만 만났던 일본’을 살갗으로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요.

  두 손에 책 하나를 쥐면서 책에 이르는 마음길을 거닙니다. 두 손으로 오토바이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아홉 시간을 달리는 동안 숱한 사람들이 이 길에서 빚은 삶과 살림과 사랑을 넘나듭니다. 우거진 숲을 가로지르면서 이 숲이 바로 책이 되어 주었고, 우리가 읽은 책은 우리 마음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숲으로 거듭나는구나 하고 되새길 수 있습니다.


어느 책방이든 책과 다른 책방지기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독자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71쪽)

《모든 책은 헌책이다》와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은 박노인 선생님의 바람에 어울리는 책이다. 그물코 출판사에서 각각 2004년과 2006년에 나왔지만 아쉽게도 두 권 모두 현재 절판되었다. 그사이 사라진 헌책방이 얼마나 될까. 만약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 흔적조차 알 수 없을 책방도 많다. 나는 이 책보다 더 자세하고 방대하게 헌책방에 애정을 가지고 기록한 책을 아직 보지 못했다. (320쪽)


  온나라에 교보문고나 알라딘 지점만 있다면 온나라를 누비는 책방마실은 그리 재미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지점에는 서울에도 부산에도 광주에도 모두 똑같은 책에 똑같은 상품만 있거든요.

  고장마다 아기자기하게 문을 여는 마을책방이나 오래도록 뿌리를 내려온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다니면, 전국 어느 마을책방이나 헌책방으로 찾아가도 저마다 다른 책을 만날 수 있어요. 다 다른 책방에서 다 다른 책을 만나는 재미라고 할 만하지요.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은 일본이라는 나라 어디를 가도 저마다 다른 고장에 맞추어 저마다 다른 책방이 저마다 다른 결로 책꽂이를 짜고 책을 갖추어 저마다 다른 책손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쿄토가 도쿄를 닮을 일이 없고, 도쿄도 쿄토를 닮을 일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대전이 대구를 닮을 일이 없고, 부산이 서울을 닮을 일이 없겠지요. 마을책방은 광주하고 포항이 다르고, 순천하고 속초가 다릅니다. 전주하고 청주도 다르지요.

  다 다른 고장에서 다 다른 이야기가 자랍니다. 다 다른 이야기는 다 다른 지은이가 살며시 길어올리면서 책으로 엮습니다. 다 다른 책이 태어나면 다 다른 고장에 깃든 다 다른 마을책방이 이렇게 다르면서 이쁜 책을 다 다른 손길로 저마다 정갈하게 건사합니다.

  오토바이로 일본을 누빈 책방지기이자 책마실벗 조경국 님은 어쩌면 머잖아 오토바이로 중국을 가로지르고 유럽이며 남미이며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책방마실을 다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길에 숱한 이웃 책벗이 함께 오토바이로, 자전거로, 버스로, 두 다리로 느긋하게 책방마실을 누릴 테고요. 2017.10.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 일본 책방 사진은 조경국 님한테 말씀을 여쭈어 받아서 함께 띄웁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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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밥하면서 읽는 책 2017.10.6.


언제나처럼 밥을 지어 차린다. 두 아이는 이틀째 골골거리느라 밥을 거의 안 먹는다. 어제 큰아이가 누운 자리에서 “아버지, 몸이 아프면 배가 안 고파?” 하고 묻더라. “예전에 아버지가 무릎 크게 다친 적 생각나니?” “응.” “그때 아버지는 이레 넘게 밥은커녕 물도 못 마셨어.” “그래, 생각나.” “몸에서 어디 아픈 데가 있으면 우리 몸에서는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고서, 아픈 데를 씻어서 새롭게 튼튼하게 거듭나게 하려고 힘을 다해. 그래서 아플 적에는 배고프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그렇구나.” 어제는 죽도 안 먹던 아이들이지만, 오늘은 둘 다 한 그릇씩 비운다. 어제 마침 마시멜로를 세 자루 장만해 놓았는데, 작은아이가 “아버지 마시멜로 구워 줄까?” 하면서 싱글벙글 굽는다. 배는 안 고파도 마시멜로를 구워서 먹는 맛은 좋은가 보네. 작은아이가 두 번, 큰아이가 한 번 구워 준 마시멜로를 먹고서 그림책 《다니엘의 특별한 그림 이야기》를 펼친다. 이 그림책을 빚은 분은 바바라 매클린톡 님. 이분 그림책은 아이들한테 바로 보여주어도 좋을 만큼 훌륭하다고 여기지만 번역 말씨를 먼저 가다듬어 놓으려 한다. 서른 쪽이 안 되는 그림책이지만 예순 군데 즈음 번역 말씨를 고쳐 놓는다. 그나저나 《다니엘의 특별한 그림 이야기》는 그린이 어릴 적 이야기라고 하는데, 무척 짠하면서 아름답다. 좋은 어버이에 멋진 이웃을 사귀면서 그림길을 걸어오셨구나. 그림순이 큰아이는 이튿날 이 그림책을 즐겁게 읽고서 새롭게 그림놀이를 하겠지. 부디 새 아침에는 말끔히 튼튼한 몸으로 일어나렴.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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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도화지 우리 그림책 20
홍종의 지음, 유기훈 그림 / 국민서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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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64


뼈만 남은 물고기한테 새숨 불어넣는 꿈그림
― 하얀 도화지
 홍종의 글·유기훈 그림
 국민서관, 2017.6.15. 12000원


  우리는 그림을 얼마나 알까요? 어쩌면 우리는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거의 안 배우거나 못 배운 채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고서 아이를 낳으며,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지는 않을까요?

  아이는 모두 그림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림을 안 좋아하는 아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저 스스로 아이인 나날을 보내고서도 왜 아이가 그림을 좋아하는가를 미처 짚지 못했습니다. 저 스스로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 아이를 낳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에 비로소 그림을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물고기는 땅에 떨어졌어.
그러나 다시 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강물이 깨끗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지. (3쪽)


  그림책 《하얀 도화지》(국민서관, 2017)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도록 엮습니다. 먼저 서울하고 냇물을 엮습니다. 아버지하고 딸을 엮지요. 서울에서 냇가로 마실을 나온 아버지하고 딸이 냇가에서 말라죽어 뼈만 남은 물고기를 보아요. 뼈만 남고 죽은 물고기는 냇물이 너무 지저분해서 더는 살 수 없다고 느껴서 냇물에서 땅으로 뛰쳐나왔다지요.

  이 대목에서 아이는 뼈만 남은 물고기를 눈여겨봅니다. 아이 아버지는 그만 쳐다보라고 하지만 아이는 마음에서 못 잊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뼈만 남은 물고기’를 하얀 종이에 그려요. 그리고 뼈만 남은 물고기한테 요모조모 이쁜 빛쫑이로 비늘이랑 몸을 입혀 주고 눈알까지 새로 그려 줍니다.


‘미안해! 물고기야.’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로 했어.
제일 먼저 물고기 머리뼈를 그렸어.
그러자 강가에 있던 물고기 뼈에서 머리뼈가 감쪽같이 사라졌어.
이상하지? (12쪽)


  제가 아이였던 지난날 학교에서는 반공포스터를 비롯한 온갖 정치 외침말이 춤추는 그림을 다달이 그리도록 시켰습니다. 포스터에 표어에 웅변대회에 …… 지난날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꿈을 그리도록 이끌지 않았어요. 한 학기에 한 차례쯤 ‘상상화’를 그리라고 했습니다만, 여덟아홉 살짜리 아이들이 ‘상상’이라는 한자말을 제대로 알 턱이 없어요. 학교에서는 그저 ‘터무니없는’ 것을 생각해서 그리라고만 가르쳤어요. 다시 말해서 아이들 스스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그림으로 담도록 이끄는 가르침은 지난날에 거의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러면서 절약, 예절, 산불예방, 협동, 새마을, 국군 아저씨 …… 이런 그림만 그리도록 시켰어요.

  사회 흐름대로 아이들을 얽매거나 옥죈 지난날 모습이라고 느낍니다. 스스로 새롭게 짓는 꿈이 아닌, 스스로 곱게 가꾸는 사랑이 아닌, 스스로 동무하고 손을 맞잡고 서로 돕는 길이 아닌, 딱딱한 사회에 길들이는 그림만 가르쳤다고 느껴요.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지난날 학교에서는 스스로 마음에 품고서 가꾸려고 하는 꿈을 하얀 종이에 티없이 맑은 숨결로 그려 넣으면, 이러한 그림을 누구나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뜻을 안 가르쳤지 싶어요.


이제 물고기 그림을 완성하기로 했지.
소녀는 뼈 위에 살을 붙이고, 비늘을 덮어 주었어.
지느러미를 달아 주고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었어. (20쪽)


  그림책 《하얀 도화지》에 나오는 아이는 티없는 마음으로 뼈만 남은 물고기를 그렸고, 뼈만 남은 물고기를 그리고서 빛종이를 붙여서 새로운 몸을 선물했습니다. 아니 새로운 물고기를 꿈으로 빚었지요.

  이때에 냇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말라죽은 물고기한테 어떤 일이 생길까요? 냇물은 맑아질 수 있을까요? 앞으로 냇물에 참말로 물고기가 헤엄치고 아이들은 홀가분하게 냇물로 뛰어들어 신나게 물장구를 치면서 물고기한테 어울려 놀 수 있을까요?

  우리 어른들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맑은 냇물이 흐르는 삶터가 되도록 힘을 모을 만할까요? 우리 아이들이 서울이고 시골이고 정갈하며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물고기하고도 새하고도 풀벌레하고도 나무하고도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땅이 되도록 온힘을 기울일 만할까요?

  꿈을 그려서 꿈을 이루는 작은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 《하얀 도화지》입니다. 아이들이 꿈을 마음에 종이에 그리면서 시나브로 이루는 즐거운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기쁜 꿈을 그리려는 마음을 다룹니다. 고운 사랑을 그리려는 손길을 다룹니다. 함께 노래하고 웃는 마을살림을 그리려는 따스한 눈빛을 다룹니다. 2017.10.6.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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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感에 관한 사담들 문학동네 시인선 45
윤성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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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8



시인마다 다른 삶결

― 감(感)에 관한 사담들

 윤성택 글

 문학동네, 2013.6.27. 8000원



그 살아 있는 순간을 위해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한다

알약 속에 켜져 있는 안개.

창틀에서 뻗어온 가장 시든 잎이 숨을 몰아쉰다 (안개)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지도 어디쯤에서

한쪽 눈을 감고 이곳 장면을 저장해간다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



  말 한 마디에서 결을 읽습니다. 결이란 말결일 수 있고, 말에 담은 삶결일 수 있습니다. 삶결이란 이제까지 살아오며 배우거나 겪거나 듣거나 보거나 읽은 모든 이야기입니다.


  결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옳은 결이나 틀린 결이란 없습니다. 그동안 겪거나 치른 삶은 같을 수 없으니, 삶에서 길어올리는 말 한 마디도 같을 수 없습니다. 누구는 자전거를 달리다가 손잡이하고 몸통이 떨어지면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고도 빙그레 웃으면서 털고 일어납니다. 누구는 이런 일을 치르고 나면 자전거는 엄두를 못 냅니다. 누구는 이런 일을 맞닥뜨리고 난 뒤에 둘레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볼 적마다 그 자전거는 튼튼한가를 살피는 몸짓이 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말 한 마디를 지을 수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는 마음으로 말 한 마디를 꾸밀 수 있습니다. 즐거움이랄 수도 즐거움이 아니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자리에서 멀거니 말 한 마디를 엮을 수 있습니다.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을 읽으면서 ‘결에 얽힌 한 사람 이야기’를 찬찬히 짚습니다. 시인 한 사람은 삶을 이렇게 읽어서 글을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시골집 지붕에 감 떨어지며 나는 쿵 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엽니다. 지붕에 떨어지며 쿵 소리를 내고는 뒷밭에 안긴 감은 사람도 먹고 새도 먹으며 개미나 벌도 먹으며, 딱정벌레도 먹습니다. 달팽이도 지렁이도 먹으며, 때로는 모기하고 파리도 함께 먹습니다. 감 한 알로 숱한 목숨이 이 가을에 배부릅니다. 2017.10.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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