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하나를 되풀이 읽기


 어린 날 만화책을 빌려서 읽을 때면 늘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거듭 읽었습니다. 천천히 읽으면서도 ‘앞으로 읽을 쪽’이 차츰 줄어드니까 아쉬워 아주 더디게 읽지만, 이렇게 더디 읽으면서도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거듭 읽습니다. 얼른 읽자는 마음이 아니라 금세 술술 읽히면서 제발 앞으로 더 남기를 하고 빌었습니다.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기는 만화를 읽을 때에는 ‘부피가 너무 적다’고 느낍니다.

 어느 책을 읽든 예나 이제나 똑같이 생각합니다. ‘앞으로 읽을 쪽’이 얼마나 남았나를 헤아릴 때에 두근두근 조마조마 설레면서 아쉬운 책은 여러 차례 되읽는 책입니다. ‘앞으로 읽을 쪽’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느끼면서 마지막 쪽을 덮는 책은 으레 다시 읽지 않는 책입니다.

 줄거리를 외자고 읽는 책이 아니기에, 줄거리를 간추린다든지 ‘책에 나오는 사람이나 땅이나 물건에 붙는 이름을 줄줄 꿰’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아로새기고픈 책을 읽으니까, ‘책에 나오는 사람이나 땅이나 물건마다 깃든 넋과 사랑이 어떠한가를 가만히 생각’하면서 두고두고 곱씹습니다.

 책을 차근차근 처음부터 끝까지 읽든, 군데군데 뽑아 가며 읽든, 소리내어 찬찬히 읽든, 내 마음으로 스며드는 사랑스러운 책이라면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되풀이해서 읽겠지요. 책마을 일꾼이 땀을 쏟아 내놓는 책은 책마을 일꾼부터 스스로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되읽는 책입니다. 그저 많이 팔아 돈을 벌자며 내놓는 책일지라도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을 읽고, 참으로 좋다고 느껴서 사람들한테 두루 알리고프니까 내놓는 책 또한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을 읽습니다.

 그러면, 책마을 일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책마을 일꾼이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을 거듭 읽으며 내놓는 책을 사서 읽을 사람들이 당신처럼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거듭 읽어 주기를 바랄까요, 그냥 한 번 슥 읽기를 바랄까요. 한 번 읽고 그칠 만한 책을 만드는가요, 숱하게 되읽으며 아낄 만한 책을 만드는가요. 많이 팔리지 않고서야 일하는 보람을 못 느끼는 책을 만드는가요, 알뜰히 읽히며 사랑받을 책을 만드는가요.

 아마 책마을 역사에는 ‘숫자로 쳐서 많이 팔리는 책’이 적바림되겠지요. ‘숫자로 쳐서 적게 팔리는 책’이 책마을 역사에 적바림되는 일이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숫자로 쳐서 많이 팔리는 책’이 우리 가슴이나 마음밭에 알뜰살뜰 스며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꼭 ‘숫자로 쳐서 적게 팔리는 책’이 우리 가슴이나 마음밭에 깊이 아로새겨지지는 않을 테지만, 책을 말하고 책마을을 말하며 책삶을 말할 때에는 팔림새 아닌 읽힘새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듦새에 앞서 책을 마주하는 내 매무새를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되읽다가는 우리 아이한테 물려주어 우리 아이도 거듭 읽을 만한 책을 우리 가난한 살림돈을 바쳐서 장만하고 싶습니다. (4344.2.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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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원


 개구진 계집아이는 언제나 있다. 그렇지만 개구진 계집아이는 늘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오늘날은 여자 권리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니까, 개구진 계집아이도 사람 대접을 받을까. 개구지기는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나 짓궂기 마찬가지일 테니까, 요놈들 철 좀 들으라 말해야 옳을까.

 나는 이향원 님 만화를 즐기던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세모’라는 토박이말 이름이 붙는 착하며 몸이 조금 느린 아이를 먼저 떠올린다. 이와 함께 세모 곁에서 늘 힘이 되는 말괄량이이자 개구쟁이요 힘세고 살림도 잘하며 씩씩한 계집아이를 떠올린다. 세모랑 개구진 계집아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동아리이다. 두 아이가 있기에 이향원 님 만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구진 계집아이를 만화로 그리는 사람은 늘 있다. 그러나 개구진 계집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 믿음직한가를 알뜰히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앞장서서 공을 차고 앞장서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앞장서서 짐을 나른다. 노상 모든 일에서 스스럼없이 나선다.

 그런데, 개구진 계집아이는 제 이름을 날리려고 앞장서지 않는다. 나는 우리 집 책시렁에 얌전히 꽂힌 이향원 님 만화책을 들추어 넘겨야 비로소 개구진 계집아이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난다. 조용하며 얌전한 사내아이 이름은 만화책을 넘기지 않아도 ‘세모’라고 떠오른다. 왜 그럴까. 덜렁대며 억세며 나대는 아이 이름은 왜 떠오르지 않을까. 어쩌면 개구진 계집아이는 늘 저가 아닌 제 둘레 다른 아이를 돋보이도록 이끌며 슬그머니 뒤로 제 모습과 이름을 숨기면서 기뻐하기 때문은 아닐까. 저 스스로 잘나려고 나대는 개구진 계집아이가 아니라, 저 스스로 힘여리고 착하기만 한 얌전둥이를 도와주려고 힘쓰기 때문에, 나중에는 살며시 발을 빼지 않을까.

 말괄량이 삐삐 영화를 보면, 삐삐는 ‘책읽기 좋아하는 토미’한테 조그맣고 예쁜 책을 슬쩍 선물해 준다. 삐삐한테서 하모니카를 선물받은 아니카는 언제나 하모니카를 갖고 다니면서 틈틈이 하모니카 노래를 부른다. 풀줄기를 나팔처럼 불던 삐삐를 본 토미와 아니카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삐삐한테 ‘나팔(트럼펫)’을 선물해 준다. 토미와 아니카는 고작 여덟아홉 살 나이인데에도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손뜨개’한 옷가지를 선물하고, 아홉 살 삐삐 또한 제 사랑스러운 말한테 손뜨개 목도리를 선물한다. 여느 때 보면, 삐삐와 함께 살아가는 원숭이 닐슨 씨는 삐삐가 손뜨개로 짠 옷을 입는다.

 한국 만화쟁이 이향원 님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문득 생각하자니, 이제 내 나이는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 이향원 님 만화를 좋아하던 ‘그무렵 이향원 님이 우리한테 만화를 그려 주던 그 나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향원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조금 일찍 숨을 거두었다 할 만하지만, 흙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었기에 고요히 흙사람이 된 셈이다.

 숨을 거둔 만화쟁이 한 사람이 한창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서 내놓던 무렵은 당신 나이가 가장 펄떡펄떡 살아숨쉬던 나이였고, 나는 이제 내가 코흘리개 때 보던 만화를 그린 분이 펄떡펄떡 살아숨쉬던 나이를 살아간다.

 나는 언제쯤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까. 내가 쓰는 글은 코흘리개 어린이가 읽도록 하는 글은 아니니까, 내가 흙으로 돌아간대서 내 글을 읽던 사람들이 한창 젊거나 바지런히 일할 나이가 되지는 않으리라.

 흔히들, 이향원 님을 두고 야구 만화라든지 강아지 만화를 즐겨 그렸다고들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으리라. 이향원 님 만화감은 야구나 강아지가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나한테 이향원 님 만화는 가난한 살림집에서도 개구지며 씩씩하게 살아가며 바지만 입는 계집아이 하나와 착하디착하고 조용한 ‘세모’라는 사내아이가 이루며 빛내는 수수하며 해맑은 고운 삶이야기이다.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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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1-02-26 08:37   좋아요 0 | URL
말괄량이 이름은 '꼭지'였다. 어느 분 블로그를 보다가 알았다. 마음이 좀 그래서 책꽂이에서 책을 뒤적이지 않았는데, '세모'와 '꼭지'라, 참 잘 어울린다...
 



 찬물 빨래 하고 나서 책읽기


 드디어 더운물이 아닌 찬물로도 빨래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차갑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겨울처럼 손이 찌릿찌릿 아파서 자꾸자꾸 볼이나 팔뚝에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대어야 하지는 않는다. 한겨울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녹이면서 비비거나 헹구거나 짜야 한다. 빨래를 마치고도 한 시간쯤은 손이 얼어서 녹지 않는다.

 날이 참으로 폭하니까 찬물 빨래를 하고 나서도 손이 시리기는 해도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는다.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으니 손가락이 아프지 않다. 바야흐로 봄이라 할 만한 날씨라고 느낀다. 봄이기는 봄인데 아직 우리 멧골집 물은 녹지 않으니 섣불리 봄이라 여기면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제는 기름 걱정을 덜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저녁이나 밤에 보일러를 안 돌릴 수 없다. 저녁과 밤 사이 기름 몇 리터 아낀다는 생각에 보일러를 쉬다가 집식구가 밤추위 때문에 몸이 나빠지면 기름값 조금 아낀다면서 몸이 다친다.

 겨울날 때때로 찬물 빨래를 하면서 생각했다. 춥디추운 겨울날에도 때때로 손 시릴 뿐 아니라 손 얼어붙는 찬물 빨래를 하면서 생각했다. 일부러 찬물 빨래를 하지는 않았다. 따뜻한 물을 쓸 수 없는 날은 차가운 물을 써서 빨래를 해야 했다. 물을 따스하게 덥혀서 빨래를 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 집 살림이란 세무서 사람들이 세무조사를 해 보아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기에, 이달부터 아이 키우는 데에 드는 돈을 얼마쯤 면사무소에서 보태 주기로 했다며 알림쪽지가 날아왔다. 정작 얼마를 주는지는 안 적혔지만, 우리 식구가 아이 몫으로 돈을 조금이나마 모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이 돈을 푼푼이 모아 나중에 아이가 크면 물려줄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뭐, 이러하든 저러하든 가끔 찬물 빨래를 할 뿐, 여느 날에는 더운물 빨래를 할 수 있으니, 가난한 살림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좋은 나날인가.

 가난하니까 누군가 우리를 도와주고, 가난하기에 도움을 고맙게 받는다. 가난이 부끄러울 일이란 없다. 돈 많은 사람이라 창피할 까닭이 없듯이 돈 없는 사람이라 남우세스러울 까닭이 없다. 돈이 많으면 돈이 적은 사람한테 보태어 주면 되고, 돈이 없으면 돈이 넉넉한 사람한테서 얻으면 된다. 책을 조금 더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한테 책에 깃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면 된다.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한테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 된다. 힘이 센 사람은 힘이 여린 사람을 돕는다. 힘이 여린 사람은 힘이 센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은이가 도와주기에 씩씩하게 삶마무리를 짓는다. 어린이는 어버이가 돌보기에 튼튼하게 자라난다. 지식이란 자랑하고자 쌓는 점수가 아니다. 지식이란 남한테 나누어 주려고 즐겁게 갖추는 밥그릇이다. 마음밥이 모자라 마음굶이를 하는 벗님한테 마음밥을 나누어 주려고 책을 읽어 지식을 갖춘다. 마음밥을 바라는 힘들거나 어려운 이웃을 헤아리려고 애써 책을 읽어 장만하여 갖춘 다음 ‘개인 도서관’을 열든, ‘책 돌려읽기’를 하든 ‘책 선물’이든 한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쓰는 느낌글이란 ‘출판사 책팔이에 보탬이 될 서평’이어서는 안 된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쓸 느낌글이란 ‘책을 아직 못 읽었거나 책을 읽을 틈이 없도록 고단하거나 힘겨운 사람들한테 마음밥이 될 좋은 이야기꽃’이 되도록 쓰는 글이어야 한다. 신문기사란 사건이나 사고나 정치나 뭐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뒷얘기를 다루는 글이어서는 안 된다. 신문기사란 날마다 사람들한테 마음밥과 생각밥과 슬기밥이 될 살가운 이야기열매여야 한다.

 찬물 빨래를 하면서 손가락이 얼어붙으면 눈물이 절로 난다. 손바닥까지 얼어붙으면 눈을 질끈 감으면서 흑흑 소리가 새어나온다. 손등마저 얼어붙으면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지면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나 빨래는 날마다 마쳐야 한다. 아이 오줌기저귀는 날마다 빨아야 하고, 집식구 옷도 때가 묻었으면 벗겨서 빨아야 한다. 게다가 빨래만 해서야 무슨 집살림을 꾸린다 할 수 있는가. 밥도 하고 집안도 치우며 아이하고도 놀고, 아픈 옆지기 몸을 주물러야 하지 않겠는가. 구부러진 등허리를 얼른 펴고 얼어붙은 손을 쫘악 펼쳐야 한다. 눈물이야 흐르는 대로 두든 슥슥 문질러 닦든 한 다음, 부리나케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한다. 먼지 쌓인 밥상과 방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걸레와 행주로 닦으며 아이 손에 숟가락을 쥐어 준다. 똥 눈 아이 밑을 물로 닦는다. 아이 변기와 엄마 오줌그릇을 비우며 물로 씻는다. 밤이 되면 그예 털푸덕 드러눕는다. 머리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날마다 한 줄이나마 적으려고 용을 쓰는 ‘아이돌봄 일기’조차 못 쓰고 지나가는 날이 제법 된다.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았고, 추운 겨울 가는 파란하늘을 올려다보며, 날마다 차츰 포근해지는 멧골바람을 느낀다. 봄은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온다. 찬물 빨래가 반가울 여름철 무더운 날씨는 멀지 않았다.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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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책이 하나 태어나기까지


 후루룩 넘기면 다 본다는 사진책일 수 있습니다. ‘읽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본다’고 하는 말로는, 사진책을 후루룩 넘기면 다 보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글로 된 책이라 하더라도 후루룩 넘긴 다음 ‘다 보았네’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림으로 된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루룩 넘기고서는 ‘이제 책 다 보았어요’ 할 수 있어요.

 참말로 다 보았으니까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다 읽지는 않았으니까 읽었다고는 안 하고 보았다고 합니다. 보는 일이란 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는 일이니까, 후루룩 넘기면서도 이쯤은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샅샅이 훑는다든지 줄거리를 살핀다든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이 책을 내놓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나날을 일구어 어떠한 꿈과 이야기를 책에 깃들었는가를 내 가슴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책읽기는 삶읽기가 됩니다. 책을 쓴 한 사람 삶을 읽을 때에 책읽기입니다. 사진으로 된 책이든 그림으로 된 책이든 만화로 된 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게 읽은 만화책이라 한다면, 만화책을 내놓은 사람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면서 당신이 겪거나 부대낀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재미나게 살았으나 책은 좀 따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분하게 살았는데에도 책은 꽤나 재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려 하는 사람은 이 대목을 잘 돌아보거나 느끼거나 헤아려야 합니다. 참으로 줄거리며 알맹이며 ‘글쓴이 삶’이며 나 스스로 재미나게 느끼면서 즐겁게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일 만한가를 돌아보거나 느끼거나 헤아려야 합니다. 시간을 때우거나 심심풀이로 삼으려고 억지로 읽는 책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숙제로 읽는다든지 독후감 때문에 읽는다든지 둘레에서 자꾸 읽으라고 건네니까 읽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읽는 책’ 가운데 만화책처럼 금세 읽어치우는 책은 없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만화책을 ‘읽는다’기보다 ‘읽어치웁’닙니다. ‘읽어서 치우니’까 읽어치운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내놓는 사람은 얼마나 빨리 한 권 내놓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금세 읽어치우는 만화책 한 권이 태어나기까지는 몇 시간? 몇 날? 몇 달? 몇 해쯤 걸리려나요.

 처음부터 펜으로 슥슥 그릴 수 있는 만화쟁이는 틀림없이 있습니다만 몹시 드뭅니다. 만화를 그릴 때에는 먼저 연필로 그립니다. 연필로 원고 장수에 맞게 한 꼭지를 그립니다. 이런 다음에 펜으로 연필 위에 대고 그립니다. 점이 박히거나 뿌옇거나 빗금이 쳐진 ‘톤’이라는 조각을 오려서 붙입니다. 펜으로 그리다가 잘못 그리면 하얗게 지우고 다시 그립니다. 다 그리고 다 붙인 다음에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웁니다. 이렇게 마무리한 만화 원고를 출판사로 손수 가져다 주거나 출판사 편집자가 원고를 받으러 와서 가져갑니다. 이 원고를 출판사에서 그대로 긁어서 엮은 다음 책으로 묶습니다.

 낱권책으로 한 권 묶일 만한 부피가 되는 원고를 주마다 그려서 모을 수 있고 달마다 그려서 모을 수 있습니다. 주마다 이어그리는 작품이라면, 이러한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거의 잠을 못 잡니다. ‘죽은 듯이 산다’고 할 만큼 밤을 지새우면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림만 그려서는 만화가 태어나지 못합니다. 만화에 담을 이야기를 살펴야 하고,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든 회사이든 일터이든 집이든 ‘뒤(배경)’에 그려 넣어야 하니까, 만화쟁이 눈으로 보아야 하고 사진으로도 찍으며 밑그림(스케치)을 그리기도 합니다. 몸으로 뒷모습(배경)을 느껴 보지 않고서야 싱그럽거나 살아숨쉬는 만화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걷는 모습 뛰는 모습 움직이는 모습 자는 모습을 만화로 그리자면 오래디오랜 나날에 걸쳐 ‘사람 모습 그리기’를 갈고닦아야 합니다. 새를 그리든 자전거를 그리든 밥그릇을 그리든, 그림을 그린 오랜 나날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만화로 담아 나누려는 만화쟁이 마음과 꿈을 담습니다.

 금세 읽어치우는 만화 하나 그리자고 만화쟁이 한 사람은 온삶을 바칩니다. 뚝딱 읽어치우고 다음 권이나 다음 책을 기다릴 수 있을 테지만, 이 만화 하나를 그리기까지 어떠한 손길과 땀내가 배었는가를 조금이나마 함께 느낄 수 있다면, 후루룩 본 다음 조금 느리게 다시 읽을 테고, 다시금 더 느리게 세 번 네 번 거듭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읽거나 거듭 읽거나 새삼 읽으면서 비로소 만화책이라고 하는 책을 읽는 참맛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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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몸으로 책읽기


 몸이 아프면 드러눕고 싶습니다. 몸이 아프기에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몸이 아픕니다. 갑작스레 몸이 무거워지면서 끙끙 앓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하며 국을 끓입니다. 나는 못 먹더라도 옆지기랑 아이는 먹어야 합니다. 찬물이 손에 닿으니 찌르르 떨립니다. 소름이 돋습니다. 그래도 쌀을 씻어 불리기를 마칩니다. 새벽나절에 일어나 쌀을 씻어 불린 다음 자리에 눕고, 아침나절에 다시 일어나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합니다. 국물 간을 보는데 짠지 싱거운지 단지 느끼지 못합니다. 그예 머리가 핑 돕니다.

 날마다 새로운 빨래거리가 나옵니다. 아이는 아직 밤오줌을 가리지 못합니다. 아이는 한창 개구지게 놀아야 하니까 때에 절거나 지저분해진 아이 옷가지는 날마다 여러 벌 나옵니다. 물 만지기 싫고 몸이 무겁지만 빨래를 미루지 못합니다. 하루 더 지난대서 몸이 반드시 나아지리란 법이 없고, 몸이 나아지더라도 하루치 밀린 빨래를 하자면 다시 몸이 아플 수 있습니다. 식은땀 흐르는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빨래를 합니다.

 저녁나절 억지로 책 한 권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았다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읽었을까요. 대수롭지 않을 뿐더러 참 얕은 생각에서 허우적거리는 책 하나를 읽으니 머리가 더 어지럽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사진책이 몹시 드물고, 사진을 말하는 책마저 참 드뭅니다. 그래도 사진책이 아예 안 나오지는 않습니다. 몇몇 이름난 상업사진가하고 연예인들 사진책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툭툭 쏟아진다 할 만합니다. 제대로 삭이며 살아낸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아니라, 이름값으로 내놓는 사진책들이라 여기며 밀어젖힐 수 있지만, 온통 이런 책들이 ‘사진책’이나 ‘책’이라도 되는 듯 나오다 보니까, 이런 사진책을 내놓는 연예인들이나 상업사진쟁이한테 들려줄 ‘사진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사진과 삶과 사람을 둘러싼 살가운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오순도순 나누면서 사진을 즐기며 사랑하는 길을 나누고 싶다 생각하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글조각을 붙듭니다.

 고작 며칠 살짝 아플 뿐인데 몸이며 마음이 이렇게 흔들린다면, 오래도록 아픈 사람들은, 열 해 스무 해째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내 옆지기 같은 사람들은, 당신 몸과 마음을 어떻게 건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가요. 몸이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이 나라에서 쏟아지는 책들은 ‘안 아픈 사람’이 써서 ‘안 아픈 사람’이 만들고 ‘안 아픈 사람’이 읽자는 책이기만 하겠구나 싶습니다. 더 들여다보면, ‘비장애인이 써서 비장애인이 만들고 비장애인이 읽는’ 책만 가득합니다. 장애인이 써서 장애인이 만들고 장애인이 읽는 책은 여느 책방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잘난 사람들이 쓰고, 지식이 넘치는 사람들이 쓰며,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들이 쓰는 책만 떠도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아파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으면 좋을 텐데요. 한 번이라도 아픈 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으면 기쁠 텐데요. 아픈 몸과 마음이 낫지 않는 느낌 그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으면 아름다울 텐데요.

 죽음을 한 달 앞둔 이오덕 님이 쓴 일기에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말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와 아프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다릅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처음에는 누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 하고 말할 테지만, 아니 죽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지만, 아픈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낀 채 살아갑니다. 죽음하고 벗하고 죽음하고 길동무를 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습니다. 아픈 사람은 이것도 못 먹고 저것도 못 먹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합니다. 아픈 사람은 이 일도 못하고 저 일도 못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습니다. 아픈 사람은 이 책도 못 읽고 저 책도 못 읽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제 목숨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이어질 줄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아니 제 목숨이 언제쯤 마무리될는지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해야 옳을 테지요. 아픈 사람은 오늘 숨을 거둘는지 이듬날 눈을 감을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일 분 이 분이 애틋합니다. 일 분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책을 읽어 예순 해하고, 일 분을 애틋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책을 읽어 예순 해일 때, 두 사람이 읽은 책은 어떤 책이 될까요.

 오늘날 수많은 글쟁이들은 살아서 이름을 높이 드날릴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백 해나 이백 해쯤 뒤에는 이원수 님이나 권정생 님처럼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아픈 몸으로 아파하면서 살아내는 마음으로 쓴 글이 아니라면 참다이 읽히는 책이 아닙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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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신기루 2011-02-24 08:44   좋아요 0 | URL
저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제가 쉬이 갖지 못할 경험과 지식을 얻을 수 있어 책을 좋아합니다만,
된장님의 글을 읽고 나니 그러한 책에도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네요.
『오체불만족』 등 장애인 분들이 쓰신 책이나 점자책 등 장애인 분들을 위한 책은 간혹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싶습니다.
된장님도 옆지기님도 하루속히 나으시길 빕니다.

숲노래 2011-02-24 09:36   좋아요 0 | URL
저는 나을 수 있으나, 옆지기는 나을 수 없어요..
(그러나 나을 수 없다 해서 장애등급 판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법체계에서는)

오체불만족은 '성공담'이지 '장애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장애인 이야기를 담은 책은 '기류 유미코' 님이 쓴 책쯤은 되어야 비로소 장애인 이야기랍니다. 그러나 이런 책은 거의 안 팔리고 안 읽힌답니다...

그나마 <머나먼 갑자원>이나 <사랑의 집(도토리의 집)>조차 못 읽히니까요...

무해한모리군 2011-02-24 09:13   좋아요 0 | URL
된장님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된장님 글을 읽으니 권정생 선생이 그리 모든 것에 관대하고 따뜻하실 수 있으셨던건 아픈 사람의 시선이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숲노래 2011-02-24 09:3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권 선생님이나 이오덕 선생님, 또 나중에 전우익 선생님 같은 분들이 주옥 같은 글과 책을 내놓을 수 있던 까닭은 바로 '아픈 몸과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에요. 아프다 해서 모두 이러할 수는 없고, 아픔만으로 모두를 담지는 못하지만, 아픈 사람 삶에서 사랑할 수 있는 따스한 손길로 내 끼니를 내가 농사지어 내가 손수 지어 차려 먹고 치우는 살림살이를 꾸리는 매무새일 때에는, 우리들한테 아름다운 이야기를 꽃피운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남이 아닌 당신 손'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해서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