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백기완 님이 어느 땅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 막상 떠올려 보자니 잘 생각나지 않는다. 황해도였던가 평안도였던가. 황해도가 아니었나 싶은데, 함경도이든 전라도이든 크게 보자면 한겨레 삶터에서 태어난 사람이요, 좁게 보자면 여느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백기완 님이 내놓은 책을 모두 읽었다. 예전 책부터 요즈음 책까지 모두 읽었다. 백기완 님이 쓴 시집 《젊은 날》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가지로 나왔던 판에 따라 다 있다. 예부터 백기완 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고 생각했다. 백기완 님은 ‘당신 고향마을을 몹시 아끼며 사랑하는’ 분이다.

 백기완 님을 일컬어 ‘우리 말을 잘 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왜 사람들이 백기완 님을 일컬으며 이런 이름표를 붙이는지 알쏭달쏭하다. 백기완 님 책을 제대로 안 읽었기 때문일까. 엉터리로 읽었기 때문일까. 읽다가 덮었기 때문일까. 백기완 님 삶과 넋을 읽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 말을 잘 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는 백기완 님한테 걸맞지 않다고 느낀다. 백기완 님은 ‘우리 말을 잘 살리는’ 사람이 아니다. 백기완 님은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마을 사람들이 쓰던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마을, 곧 당신 고향마을 사람들 말마디 가운데 ‘한겨레 삶터’ 곳곳에서 함께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말을 즐겁게 나누는 사람이다. 전라도말을 전라도사람만 쓰거나 경상도말을 경상도사람만 쓰기보다, 서로서로 예쁘게 잘 쓰는 말을 다 함께 쓰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생각하며, 몸소 이러한 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백기완 님은 서울말을 표준말로 삼는 흐름을 달가이 여기지 않는다. 서울사람이 예부터 서울에서 살아오며 쓰던 말이 오늘날 서울말이 아니기도 할 뿐더러, 지식인들이 표준말이건 서울말이건 한국말이건 너무 좁다랗게 옭아매는 모습을 몹시 안타까이 바라본다.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 겨레가 저마다 뿌리내린 고향마을에서 살가이 주고받는 말을 한껏 북돋우면서 나누는 말이어야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 백기완 님이라고 느낀다.

 백기완 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 말을 잘 살려서 쓴다고 뽐내지 않는다. 백기완 님은 당신이야말로 우리 말을 알뜰히 사랑한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당신 고향마을 사람들 구성지며 착한 말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온몸으로 아낀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인천사람으로서 인천말을 한다. 인천말은 부천말이나 수원말하고 다르다. 인천말은 서울말이나 경기말하고 다르다. 수원사람이 쓰는 수원말은 수원말대로 곱다. 내가 쓰는 인천말은 내 인천말대로 곱다. 더 곱거나 덜 고운 말이란 없다고 느낀다. 서로서로 똑같이 고울 뿐 아니라, 서로서로 나란히 예쁘다. 고운 사람으로서 고운 넋에 걸맞게 고운 말을 쓴다. 예쁜 삶을 사랑하면서 예쁜 꿈을 품고 예쁜 글을 쓴다. 백기완 님은 당신 고향을 예쁘게 사랑하며 곱게 아끼는 푸근한 할아버지이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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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차와 책읽기


 서울 홍대 앞에서 전철을 내린다. 사람들이 참 미어터진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 가운데 안 바쁜 사람은 아주 느리게 걷는다. 느리게 걸으면서 뒷사람 가운데 바쁜 이가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걸을 때에는 자리를 조금만 차지하면서 한쪽으로 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복판을 널따랗게 차지하며 여럿이 손을 나란히 잡으면서 걸으니, 이리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저리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미적거리는 앞사람 궁둥짝만 멀뚱멀뚱 올려다보면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끙끙거려야 한다.

 나 또한 이 미어터지는 사람들하고 똑같이 미어터지는 한 사람이다. 나 또한 사람물결을 이루는 한 사람이다. 바깥으로 나와도 길에는 사람으로 꽉 찬다. 참 놀란다. 언제 보아도 놀라는 모습이다. 서울에는 어인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곳에 어쩜 이렇게 복닥거리면서 서로서로 만나거나 사귀거나 어울릴 수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숲을 헤치고 만화책방에 들어간다. 만화책 28000원어치 고른다. ㅇ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만화책 두 권을 살까 하고 집어들다가는 150쪽이 안 되는 얄팍한 판인데 자그마치 12000원이나 붙은 모습에 깜짝 놀란다. 얌전히 내려놓는다. ㅇ출판사는 무슨 만화책을 이렇게 비싸게 찍어서 내놓을까. 더 값나가는 종이에 만화를 찍는다고 만화책 품격이 올라가는가. 여느 만화책은 물건값이 올랐어도 요즈음 4200원인데, ㅇ출판사는 왜 이리 비싼값을 버젓이 붙이는가. 여느 만화책 세 권 살 만한 값을 양장도 아니요 애장판도 아니며 빛깔그림이 들어간 만화도 아니면서 지나치게 비싸게 값을 붙인다.

 망원역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책값을 셈한 다음 가방에 넣는다. 헐레벌떡 달려서 길을 건넌다. 푸른불이 깜빡거릴 때에 겨우 찻길 한복판 버스타는곳에 들어선다. 히유, 한숨을 돌린다. 어느 버스를 타야 하나 살핀다. 버스길 알림판을 여러 곳에 붙이면 좋으련만 한쪽에만 붙여놓아서 들여다보기 참 힘들다.

 271번 버스를 탄다. 버스가 들어올 때부터 안에 사람이 꽤 많이 탔다. 타도 되나 고개를 갸웃하는데, 내리는 사람이 제법 된다. 그러면 타고 되겠구나. 두 정류장을 더 가니, 내리는 사람은 적고 타는 사람만 많다. 버스를 모는 일꾼이 새로 타려는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한다. “뒷차 금방 오니까 뒷차 타세요. 너무 밀려요.” 그렇지만 뒷차를 기다려 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이 버스에 오른다. 가뜩이나 미어터지는 버스는 더욱 미어터진다.

 내가 버스에 타려 할 때에 버스 일꾼이 뒷차를 타라 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바삐 가야 한다면 그냥 탔을까. 곰곰이 헤아린다. 음, 나도 그냥 버스에 오르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까. 옆지기하고 아이랑 함께 마실을 와서 서울버스를 타야 하는 몸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아무래도 나는 미어터지는 차를 타지 말고 텅 빈 뒷차를 타라는 버스 일꾼 말을 따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뒷차를 기다리다 보면 ‘버스 일꾼 말처럼 뒷차가 금세 오기’도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뒷차는 올 생각을 않는’ 때가 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때를 맞추어 가야 하기는 하지만, 서울에는 버스도 많고 차도 많으니까 그냥 기다려 보겠지. 그러나, “뒷차 타셔요”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다고 느낀다. 겪어 보니 그렇다.

 시골집으로 옮기기 앞서를 떠올린다. 아직 인천에서 살아가던 때, 식구들과 함께 마실을 간다며 시내버스를 기다리던 일을 떠올린다. 시내버스에 사람이 꽉 차면 으레 이 꽉 찬 차를 보냈다. 좀 홀가분한 뒷차를 기다렸다. 꽉 찬 버스가 지나가면 으레 뒷차는 텅 비기 마련이요, 곧 새로 오기 일쑤인데, 이러하지 않을 때도 꽤 되지만, 홀가분한 뒷차가 금세 오는 적도 잦다.

 나는 새로 나오는 책을 그때그때 읽는 일을 좋아한다. 이와 함께, 새로 나오는 책을 한두 해쯤 묵힌 다음 읽는 일도 좋아한다. 때로는 다섯 해나 열 해쯤을 기다린 끝에 읽기도 한다. 모든 새로 나오는 책을 모두 그때그때 맞추어 읽을 수 없기 때문이요, 내 마음밭을 차분히 가다듬은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내 가슴이 어느 책 하나를 받아들일 만큼 넉넉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면, 책상맡에 오래도록 꽂기만 한다. 때로는 나중에 사자고 생각한다. 요사이는 나중에 사자고 생각하기보다는, 어찌 되든 사 놓고 보기 일쑤이다. 요사이는 한두 해쯤 지나고 나서 품절이 된다든지 새책방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는 책이 퍽 많기 때문이다. 헌책방에서는 한 번 지나치면 두 번 다시 못 만나는 책이 매우 많기도 하다.

 그때그때 새로 나오는 흐름에 맞추어 읽는 책은, 새로 나온 느낌을 곱씹으면서 즐겁게 읽는다. 몇 해쯤 묵힌 다음 읽는 책은, 이 책이 참말로 내가 오래도록 곁에 두면서 읽을 만한 책인가를 돌아보면서 즐거이 읽는다.

 어떠한 책이든 한 번 읽고 치운다면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책이든 한 번 읽고 나서 두 번 세 번 잇달아 읽는다든지, 한두 해 뒤에 다시 읽고프다고 생각할 만큼 되어야 비로소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열 번쯤 되풀이해서 읽는다든지, 여러 사람하고 돌려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살 만한 값이나 보람이나 뜻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뒷차 기다리기를 좋아한다. 앞차를 타고 먼저 간다고 해서 나쁘지 않다. 사람들 물결이 앞차로 쏠리면서 버스타는곳에 미어터지던 사람이 싹 줄어 호젓해지는 느낌이 좋고, 한결 홀가분한 뒷차를 가뿐히 타면서 창밖을 느긋하게 내다보는 느낌이 좋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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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긋하게 책읽기


 돈을 버느라 바쁜 사람은 돈을 버느라 바쁜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또는, 돈을 버느라 바쁜 나머지 책 따위야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집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은 집식구가 맛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또는, 구태여 책을 찾아 읽지 않더라도 밥하기나 빨래하기나 아이돌보기는 거뜬히 잘 해낸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남아돌아 주식을 산다든지 은행계좌에 숫자를 푼푼이 쌓는 사람은 으레 돈굴리기를 다루는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또는, 요사이는 인터넷을 또닥거리면 숱한 정보와 지식이 쏟아지니까, 애써 책이란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농사짓기를 다루는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농사짓기를 다루는 책을 갖추는 책방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시골 읍내에 있는 책방일지라도 농사책은 한 권조차 없습니다. 밑뿌리를 살핀다면, 농사책을 내놓는 출판사부터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는 책방이 남아 나지도 않으나, 잘 살아남은 곳일지라도 흙을 일구는 손길과 넋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결을 보듬는 책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농사꾼은 그예 흙이랑 빗물이랑 햇볕이랑 바람이랑 마주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를 다루는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도시사람은 다른 도시를 다루거나 시골을 다루는 이야기책을 읽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이 읽는 ‘다른 도시나 시골 이야기 다룬 책’이란, 여행책일 뿐입니다. 서울사람은 인천 이야기를 읽지 않고, 인천사람은 수원 이야기를 읽지 않으며, 수원 사람은 당진 이야기를 읽지 않고, 당진사람은 옥천 이야기를 읽지 않습니다. 큰 틀로 따지면 어느 곳 이야기이든 ‘한국사람과 한국땅’ 이야기입니다. 내 이웃 이야기요, 내 동무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한국사람은 내 이웃과 내 동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피거나 찾아보지 않습니다. 우리 이웃과 동무들 살림살이 이야기를 귀담아듣거나 눈여겨보지 못합니다.

 바쁘게 살아간다니까 바쁜 나머지 책을 바삐 읽거나 그냥 안 읽습니다.

 느긋하게 살아간다면 느긋하게 책을 읽기도 하지만, 느긋한 나머지 책은 나중에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잘 읽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잘 읽습니다. 책을 못 읽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못 읽습니다.

 그렇지만, 몸이 몹시 아프기 때문에 몹시 좋아하는 책을 못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무척 괴롭기 때문에 무척 사랑하던 책을 멀리하고 마는 사람이 있어요.

 제아무리 맛나며 좋은 밥이랄지라도, 숟가락을 들어 스스로 떠먹어야 합니다. 손이 없으면 옆사람이 숟가락을 떠서 먹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누가 떠먹여 준달지라도 몸으로 받아들여 삭이는 몫은 나한테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내 몸으로 삭여야지, 옆사람이 삭여서 살아가 줄 수 없어요.

 제아무리 훌륭하며 좋은 책이랄지라도, 스스로 장만해서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때로는 누군가 선물해 줄 수 있고, 옆에서 책을 읽어 주거나 줄거리를 간추려 알려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누가 장만해 주거나 읽어 준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맞아들여 곱새기는 몫은 나한테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으로 곱새겨야지, 옆사람이 곱새겨서 살아가 주지 못합니다.

 해골바가지에 든 물일지라도 나 스스로 맛난 물이라고 여긴다면 내 몸에 도움이 됩니다.

 그야말로 쓰잘데기없을 뿐 아니라 엉망진창 엉터리 책일지라도 나 스스로 좋게 받아들이며 착하게 어루만질 수 있으면 내 마음에 보탬이 됩니다.

 책이란, 쓰는 사람부터 잘 써야 합니다. 책이라면, 만드는 사람부터 옳고 바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책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잘 읽어야 합니다. 책은 책인 나머지, 읽는 사람이야말로 옳고 바르게 읽어서 기뻐해야 합니다. (4344.3.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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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3
― 일본 사진책, 한국 사진책


 일본 사진쟁이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 님이 담은 《실크로드》 여덟 권을 봅니다. 일본에서 1982년에 나온 여덟 권짜리 사진책에 붙은 일본 이름은 《シルクロ-ド》(集英社)입니다. 우리는 ‘비단길’이라 일컫는 문화흐름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일본까지 닿았는가를 밝히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책 1권은 “일본”이고 2권은 “한국”이며 3권과 4권은 “중국”입니다. 파키스탄과 이란과 이라크와 이집트와 아프가니스탄과 터키 들을 거쳐 그리스와 이탈리아로 가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책은 한 권에 5800엔. 요즈음 돈으로 친다면 6만 원 꼴이라 할 텐데, 책 크기와 무게와 엮음새와 사진결을 보았을 때에, 2011년에 이 책을 새로 찍는다면 아무래도 1만 엔, 곧 10만 원이 웃도는 값이 붙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책 여덟 권이면 자그마치 100만 원 가까이 되는 셈이겠다고 느낍니다.

 일본에서 만든 ‘비단길 사진책’이 100만 원쯤 된다면, 이러한 사진책을 거리낌없이 즐겁게 장만할 한국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 이러한 사진책은 한국땅 새책방 책꽂이에 보란 듯이 꽂힐 수 있는가요. 한국땅 도서관 가운데 100만 원쯤 될 일본 사진책 여덟 권을 기쁘게 맞아들여 갖춘 다음, 널리 읽도록 알리거나 보여줄 곳이 있으려나요.

 헌책방에서 시노야마 기신 비단길 사진책을 15만 원을 치르며 삽니다. 매장에서 구경할 수 있는 헌책방이 아닌 인터넷에 목록만 올려진 헌책방에서 삽니다. 매장에서 이 사진책을 보았다면 15만 원이라는 값이 대단히 싸게 붙인 책값이라고 느낍니다. 인터넷에서 목록으로만 보니, 책크기를 알 수 없고, 쪽수도 모르며, 엮음새를 알 길이 없는데다가, 어떤 사진을 담았는지조차 모릅니다. 시노야마 기신이라는 분이 찍은 사진을 생각한다면 이 사진책을 15만 원 들여 장만한다 하더라도 아쉽다 여길 일이 없을 테지만, 오래도록 망설이거나 머뭇거려야 했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 모습을 담아 큼직한 판으로 내놓는 사진책에 붙는 값을 돌아봅니다. 그다지 사랑스레 찍지 못한 작품밖에 안 되는 녀석을 ‘사진’이라 이름붙이며 거들먹거리는 숱한 사진책을 곱씹습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 비단길 사진책 가운데 2권인 “한국”을 읽습니다. 옆지기하고 아이하고 셋이 함께 책을 펼쳐 읽습니다. 제법 잘산다 싶은 사람들 살림집이 많이 나오지만, 잘산다 싶은 사람이건 가난하다 싶은 사람이건, 꾸밈없이 마주하거나 들여다보면서 사진으로 담는 한국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못 담거나 안 담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스스로 잘사는 한국사람이든 못사는 한국사람이든 그럭저럭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든 굶주리는 한국사람이든 사진으로 못 담거나 안 담습니다.

 사진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다음 다시 읽으며 생각합니다. 한국사람 눈으로 볼 때에 이 사진책에 나오는 한국사람은 먹고사는 걱정을 그렇게까지 크게 안 하는 사람이라 여길 만하지만, 일본사람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퍽 가난한’ 사람이 되겠지요. 한국사람이 비싼 요리집 같은 데에 어떻게 섣불리 들어가겠습니까. 1982년에 사진책이 나왔고, 책에 실린 사진은 1970년대 끝무렵부터 1980∼1981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리라 봅니다. 요즈음에도 일본돈과 한국돈을 견줄 때에 한국돈 값어치는 일본돈보다 크게 낮지만, 지난날에는 한국돈 값어치가 더욱 낮았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나 더 생각하고 살피면, 시노야마 기신 님은 한국사람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흑백필름’을 하나도 안 씁니다. 모조리 ‘무지개빛필름’만 씁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시노야마 기신 님이 바라보는 모습은 오로지 ‘무지개빛필름’에 담겨요.

 사진을 함께 보던 옆지기가 문득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쁘게 찍는 사람이네.”

 사진책을 세 번째 다시 읽습니다. 옆지기가 문득 뱉은 말을 되새깁니다. 그래, 문득 뱉은 말이란 사진을 보면서 저절로 느낀 이야기입니다. 저절로 느끼기로 “예쁘게 찍힌 사진”이라면, 시노야마 기신이라는 사진쟁이는 한국을 찍든 일본을 담든 파키스탄을 돌아보든,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터전을 예쁜 모습과 예쁜 이야기 그대로 담아서 나누고픈 마음’이겠구나 싶습니다. 스스로 예쁘게 살아가고픈 마음이기에,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 늘 예쁜 매무새요, 이 예쁜 매무새대로 사람들한테 다가서면서 ‘예쁘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을 낳는구나 싶습니다.

 옆지기는 “한국” 사진 가운데 무엇보다도 ‘아기를 안을 때에 쓰는 포대기 빛깔’을 눈여겨봅니다. “여태까지 포대기 사진을 칼라로 찍은 사람을 못 봤어요.” 하고 말합니다. 옆지기가 이렇게 말하기 앞서까지 나부터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찍은 사진을 수만 장, 아니 수십 수백만 장을 보았을 텐데, 이들 사진 가운데 무지개빛 감도는 필름이든 메모리카드로 담은 사진쟁이는 아직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예전에는 무지개빛필름이 꽤 비쌌기 때문에 흑백필름을 쓴다고도 했지만, 사진쟁이로서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담으려 할 때에는 무지개빛필름을 써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골목 안 풍경》을 담은 김기찬 님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골목사람 골목삶을 마주할 때에는 차마 흑백필름을 쓰지 못했어요. 김기찬 님 또한 무지개빛필름으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았어요.

 일본 사진쟁이는 한국을 사랑하는 넋으로 사진책을 일굽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일본을 사랑하는 얼로 사진책을 일구지 못합니다. 일본 사진쟁이는 일본이든 한국이든 당신들 스스로 사랑하는 결을 고이 아끼면서 사진을 찍어 사진책을 엮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우리 스스로 사랑하는 무늬를 좀처럼 못 느끼는 나머지 사진이든 사진책이든 너무 어둡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고 맙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책은 사랑으로 맺은 열매입니다. 사진은 사랑씨앗입니다. 사진책은 사랑씨앗이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운 다음 피우는 남다른 꽃봉우리예요.

 한국 사진쟁이가 찍은 아름다운 한국사람 ‘이야기’를 만나고 싶습니다. 예쁜 마음과 착한 손길과 고운 넋과 참다운 매무새로 한국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복닥이거나 어깨동무하면서 웃고 우는 이야기를 이루는지 사진으로 고마이 만나고 싶습니다. (4344.3.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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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과 진중권


 김규항 님은 진중권 님을 놓고 “‘진보 행세하는 개혁’을 저리 옹호하는 풍경은 참으로 난감하다”고 이야기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말이 옳다. 진보를 내세우는 ‘진보 아닌 사람’ 쪽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를 말하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하는 일은 잘못이다. 더군다나,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를 이루려고 애쓰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한다면 더 크게 잘못이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기보다 머리와 말로 ‘나는 진보요!’ 하고 외치기만 한다면 끔찍하게 잘못이다.

 나는 진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수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보이거나 수구이거나 대수롭지 않다. 사람다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좋다. 누군가는 개혁이나 진보를 좋아할 수 있고, 누군가는 보수나 수구를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옳고 바르게 즐겨야 한다. 나쁘거나 짓궂게 즐길 노릇이 아니라, 옳고 바르며 착하게 즐겨야 한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낚싯대로 고기를 잡든 그물로 고기를 잡든 누군가 고기잡이를 해 주어야, 등푸른고기이든 속살하얀고기이든 장만해서 먹을 수 있다. 내가 먹는 물고기를 잡아서 팔아 주는 사람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개혁인지 보수인지 알 길이 없다. 물고기를 팔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물고기를 돈 몇 푼으로 사서 먹을 뿐이다. 그저 물고기 한 마리를 사더라도 되도록 생협을 거친 물고기를 사려고 한다. 멸치이든 오징어이든 삼치이든 동태이든, 생협을 거친 물고기를 살 수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나는 짐승을 키우지 않는다. 우리 집은 소이든 돼지이든 닭이든 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소고기이든 돼지고기이든 닭고기이든 먹곤 한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고기를 먹을 일은 참말 한 차례도 없으나,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언제나 고기를 먹어야 한다. 내가 먹는 소나 돼지나 닭을 키우는 사람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개혁인지 보수인지 알 길이 없다. 고기집 일꾼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알 노릇이 없다. 그저 고맙게 먹는다.

 내가 읍내나 면내에 마실을 가려고 타는 시골버스를 모는 일꾼이 진보인지 개혁인지 수구인지 보수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하루에 여섯 대 오가는 시골버스를 때 맞춰 타면서 고맙다고 인사할 뿐이다.

 진중권 님은 “물론 A급 좌파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궁금하다. 사람을 이렇게 등급으로 나눈다고 할 때에 ‘등급으로 나누었’는데에도 스스로 나눈 등급에 드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 님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일까. 진중권 님과 가까이에 있는 동무나 이웃은 누구일까. 진중권 님이 설날이나 한가위 때에 마주하는 살붙이는 어떤 사람들일까. 진중권 님을 낳아 키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진중권 님이 날마다 먹는 밥은 누가 흙을 일구어 마련했을까. 참말로 이 나라에, 또 이 지구별에 ‘A급 좌파’는 없을까.

 두 사람, 김규항 님과 진중권 님이 불태우는 말나눔은 참으로 부질없다고 느낀다. 아니, 덧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토록 부질없고 덧없는 말나눔이 아니고서는 생각을 나눌 수 없는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말나눔으로 서로서로 생각을 펼치거나 생각을 깨우칠밖에 없다고 느낀다.

 나는 딱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삼월 삼일, 곧 삼짓날인 오늘 자가용 아닌 시외버스를 타고 가까운 시골 아무 데로나 가서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논둑길에 돋는 새봄 새 풀싹을 들여다보셔요. 이 풀싹 아무 풀이나 톡 뜯어서 옷섶으로 흙을 슥슥 닦은 다음에 입에 넣어 살살 씹어 보셔요. 풀싹이 겨울을 이겨내어 봄맞이 햇살을 받으며 잎을 틔운 맛과 내음을 맞아들여 보셔요. 진보는 바로 논둑길과 들판과 숲속 봄싹에 있습니다.’ 하고.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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