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손이 어여쁠 때에

 


  아이가 밥을 먹을 때에 손이 참 예쁩니다. 아이가 호미를 들고 어버이 곁에서 땅을 쫄 때에 손이 참 곱습니다. 아이가 동생을 살그마니 쓰다듬으며 함께 놀 때에 손이 참 빛납니다. 아이가 함께 짐을 나르거나 그릇을 나를 때에 손이 참 즐겁습니다. 아이가 책 하나 쥐어 가만히 빠져들어 읽을 때에 손이 참 그림과 같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는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다가 그만 흠뻑 빠져들어, 내가 읽던 책을 덮고 오래도록 들여다보곤 합니다. (4345.3.3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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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책

 


  사진으로 엮은 책을 읽습니다. 사진이 아름답기에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서 고요히 덮습니다. 한동안 다시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면서 마음이 뭉클합니다. 이윽고 고요히 덮고는 한동안 다시 잊고, 또 나중에 새삼스레 들여다보면서 가슴을 촉촉히 적십니다.

  글로 엮은 책에 곁들인 사진을 읽습니다. 글과 사이좋게 어울리는 사진은 아름답습니다. 글하고 동떨어진 채 멋스럽게만 보이는 사진은 밋밋합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인데 왜 사진을 사진답게 살리지 못하는가 싶어 슬픕니다. 글은 글일 뿐인데 왜 사진을 덧붙이려 하는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사진에 붙인 말을 읽습니다. 사진을 북돋우는 말 한 마디는 놀랍도록 빛납니다. 사진에 군더더기로 붙인 말은 지겹습니다. 어느 글은 사진 하나를 더 빛내는 사랑이지만, 어느 글은 사진 하나를 치레하는 껍데기로 그칩니다.


  사진책은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이야기하는 글로 엮은 책입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느끼며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맞아들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 옆에 자질구레하게 덧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림으로 받아들이는 가슴이 되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켜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또한 오직 사진만 덩그러니 보여줄 뿐, 이런 군말 저런 덧말은 바라지 말라고 입을 앙 다문 채 옆에 서서 조용히 바라봅니다.


  그림을 구태여 책 하나로 그러모아서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림 한 장이 깊은 책이고 너른 이야기밭입니다. 사진을 굳이 책 하나로 갈무리해서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고즈넉한 책이며 아리따운 이야기밭입니다. 글 한 줄 또한 따로 책 하나로 꾸려 내야 하지 않아요. 글 한 줄이 애틋한 책이요 사랑스러운 이야기밭입니다.


  사진을 책으로 묶는 까닭은 사진 한 장만 갈무리하면 ‘이 사진 한 장 태어난 때에 이 사진 한 장을 바라볼 수 있던 사람’ 말고는 더 사진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헤아리면서 책으로 묶습니다. 먼 뒷날 새로운 삶을 일굴 아이들한테 ‘사진 하나로 빚은 빛 한 줄기’를 물려주고 싶어서 사진책을 엮습니다.


  온통 사진으로 채운 사진책이 싱그럽습니다. 사진 한 장 없이 글로 사진을 이야기하는 사진책이 해맑습니다. 사진이랑 글이 알맞게 얼크러지는 사진책이 향긋합니다. 숱한 사진들로 잘 엮은 사진책 하나는 푸른 넋을 일깨웁니다. 수수한 글발로 잘 묶은 사진책 하나는 고운 빛을 나눠 줍니다.  사진과 글이 오순도순 어깨동무하는 사진책 하나는 따스한 사랑으로 스며듭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글책으로 삶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그림책으로 삶이야기 여는 길을 열었습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만화책으로 삶이야기 북돋우는 누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지구별 사람들은 사진책으로 삶이야기 일구는 기쁜 웃음과 눈물을 새로 보듬습니다.


  좋은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과 시원한 냇물과 기름진 흙에서 씩씩하고 우람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제 온몸을 바쳐 태어난 종이에 사진과 글이 알알이 맺히며 책 하나 새로 선보입니다.
 (4345.3.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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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사회

 


  신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는 그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맨 처음, 신문은 글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제 신문은 ‘사진 없는 신문’으로 나오리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신문은 어느덧 ‘사진 있는 신문’이 되었고, ‘사진을 보여주는 신문’으로 아주 바뀌기까지 합니다.


  사진 없이 글만 있는 신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진 한 장 안 넣고 글만 넣은 신문을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이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바야흐로 사진이 없다면 신문이 아니라고 여길 만합니다. 학교나 학급에서 조그맣게 꾸리는 신문조차 사진을 넣습니다.


  사진이 쓸모 많기에 사진을 넣는다 할 만하겠지요. 그렇지만, 신문에 사진을 굳이 넣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사진을 넣어야 비로소 ‘신문글’을 잘 읽도록 돕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에서 사진을 써야 한다면 ‘신문글 읽기를 돕는 사진’이 아닌 ‘신문사진으로서 읽을 사진’이어야 걸맞으리라 느낍니다. 곧, 이제 신문은 ‘신문글’과 ‘신문사진’과 ‘신문그림’으로 엮어야 한다고 느껴요.


  신문에 싣는 글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입니다. 이와 함께, 신문에 싣는 사진은 ‘따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에 따로 신문에 깃들 만합니다. 대통령 얼굴이라든지 정치꾼 얼굴을 보여주는 노릇이라면 신문사진 노릇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은 없어도 되는 사진이며, 처음부터 안 찍어도 될 사진입니다. 운동경기 소식을 들려줄 때에도 그래요. 야구선수이든 체조선수이든 농구선수이든, 이런 사람들 얼굴이나 몸매를 보여줄 까닭이 따로 없어요. 오직 ‘이 사진 하나로 새롭게 보여주거나 나눌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사진을 실어야 걸맞아요.


  오직 사진 하나로 이야기를 밝혀야 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사진으로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며 ‘어떠한 이야기가 담겼구나’ 하고 읽으며 알아챌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글에 덩그러니 곁달리는 사진으로는 이 나라를 밝히지 못합니다. 글에 슬그머니 덧붙는 사진으로는 온누리 삶자락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글 한 줄이 사회를 바꾼다든지,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지는 않아요. 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기는 노릇을 할 수 있는데, 글 한 줄이나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긴다 할 때에는 저마다 외따로 가장 깊고 가장 너르며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하는 오늘날이요, 누구라도 글을 쓴다 하는 요즈음입니다. 학자나 지식인이나 권력 계급만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먼 옛날 봉건 계급 사회 때처럼, 돈이나 이름이나 권력을 거머쥔 사람 아니고서는 붓을 쥘 수조차 없는 나날이 아닙니다. 어린이도 글을 쓸 수 있어요. 어린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학교 문턱을 안 밟아 보았어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큰도시 아닌 두메 시골마을 할아버지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이름난 예술쟁이만 사진을 찍으란 법이 없고, 손꼽히는 사진쟁이만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대단하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빚는 사진이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진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다는 소리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이야기를 옳게 깨닫고 곧게 담으며 즐거이 나눌 수 있다면, 바로 이렇게 담아 나누려는 사진 하나가 사회를 바꾸도록 이끄는 힘을 보여줘요.


  멋스러이 보이도록 찍는대서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멋스러이 보인다면 그저 멋스러이 보일 뿐입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찍기에 사진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습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하면 그냥 놀랍게 보일 뿐입니다.


  어떠한 글이든 스스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스스로 즐겁게 나누는 사랑이면서, 스스로 즐겁게 빛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 스스로 문학이라는 자리에 함께 놓여요.


  사진은 사회를 비추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담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글이 사회를 비추지 않으며, 글이 사회를 담지 않고, 글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듯, 사진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으로 일구는 이야기가 사회를 비춥니다. 글로 엮는 이야기가 사회를 담습니다. 그림으로 빚는 이야기가 사회를 보여줘요.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이러한 갈래마다 어떻게 갈무리해서 어떻게 일구는가에 따라, 이들 이야기로 사회를 비추거나 담거나 보여줘요. 잘 찍은 사진이기에 사회를 비추겠습니까. 잘 쓴 글이기에 사회를 담겠습니까. 잘 그린 그림이기에 사회를 보여주겠습니까. 이야기를 일구며 사회를 비춥니다. 이야기를 엮으며 사회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빚으며 사회를 보여줘요.


  이리하여,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면서 사회를 가리거나 숨기려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사회 한켠을 누르거나 짓밟아 그늘이나 어둠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즐겁게 나눌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꽃피우지 못하게끔 제도권으로 꽁꽁 싸매고 입시지옥으로 꽉 틀어쥔 사회에서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주눅들거나 그만 시들고 맙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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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읽던 책

 


  앤소니 드 멜로 님 삶을 그러모은 이야기책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 132쪽에,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깨어 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때 당신은 사랑이 무언지를 알 것입니다.” 하고 읊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함께 지내는 옆지기를 바라볼 때이든, 두 사람 사랑으로 낳은 아이들하고 여러 해째 같이 얼크러지내며 서로서로 마주할 때이든, 꾸밈없이 서로를 느끼며 어깨동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는구나 싶어요. 더 오래 함께 있대서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아주 살짝 눈을 마주치더라도 마음을 나누고 읽으며 보듬을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더라도 사랑이 곱게 꽃송이처럼 피어난다고 느껴요.


  우니타 유미 님이 빚은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08) 둘째 권 65쪽에, “우선은 장래보다 코우키의 현재를 지켜봐 주고 싶어요. 한 2년 정도 지나면 같이 있고 싶어도 자기들이 피해 다니게 될 테니까요!” 하고 외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예쁘게 긋습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사랑스레 돌보며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가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아이랑 오늘 하루 더 즐거이 어울리며 놀고 웃으며 떠들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와 바로 오늘 사랑을 꽃송이처럼 피우고 싶을 뿐이라는 넋을 느끼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생각을 담은 책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사랑을 들려주는 책을 읽으며 기쁩니다. 삶을 곱게 누리면서 이야기 한 자락 어여삐 보듬는 책을 읽으며 흐뭇합니다.


  나는 어떠한 책이든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읽고 싶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지식을 얻거나 저런 정보를 쌓고 싶지 않습니다. 돈을 한껏 잘 버는 솜씨를 굳이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을 널리 드러내는 재주를 애써 북돋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을 나들이 할 수 있으면 퍽 좋더라 하는 말마디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느 논둑길을 걷더라도 즐겁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들새 소리를 듣습니다. 휘파람새인가, 직박구리인가, 노랑할미새인가, 찌르레기인가, 어떤 새인가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갓난쟁이는 품에 안고 다섯 살 개구진 아이는 앞세워 걸리며 봄나무를 바라봅니다. 막 꽃송이 터뜨린 매화나무를 바라봅니다. 아직 새눈 조그마한 모과나무를 바라봅니다. 천천히 꽃송이 터뜨리는 동백나무랑 후박나무를 바라봅니다. 네 식구 나란히 시골마을 곳곳을 두 다리로 걷는 나날을 즐깁니다. 면 소재지까지 사십 분 남짓 천천히 걸어갑니다. 우체국에 들러 편지 한 통 부치고는 다른 길로 에돌아 오십 분 남짓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멧골짝 안쪽에 깃든 절집 언저리까지 한 시간 반 남짓 걸어 오르다가는 풀숲에 깃듭니다. 네 식구 모두 벌러덩 드러누워 풀과 가랑잎과 흙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 받습니다. 한창 뒹굴며 노는 동안 멧새 지저귀는 소리를 고즈넉하게 듣습니다. 골짝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들이를 하는 동안, 우리 집 마당에 드리운 빨랫줄에 넌 갓난쟁이 기저귀며 식구들 옷가지며 따순 봄햇살 마음껏 들이마시며 보송보송 마를 테지요.


  한 시간 사십 분 남짓 다시 천천히 멧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흙길은 흙길대로 즐겁고, 시멘트길은 시멘트길대로 즐겁습니다. 마늘밭 풀 매는 이웃 할머님한테 인사합니다. 시골집 두루 도는 우체국 일꾼한테 인사합니다. 나와 온 식구한테는 종이에 아로새긴 책도 사랑스럽고, 저마다 얼굴에 아로새긴 웃음도 사랑스럽습니다. 까무잡잡 싱싱한 빛 구수한 흙땅 곳곳에 새로 돋는 봄풀과 봄꽃 모두 사랑스럽게 읽는 책입니다. 봄까지꽃, 별꽃, 광대나물꽃, 냉이꽃, 제비꽃 모두 귀엽게 맞이하는 책입니다. 먼 멧등성이 따라 노랗다가 발갛다가 하얗다가 파랗게 빛나는 아침녘 햇살과 하늘 모두 고맙게 마주하는 책입니다.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아로새기는 책은 바로 좋은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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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단 책읽기

 


  서평단을 하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서평단을 하면서 내 삶에 찬찬히 녹아들도록 책을 읽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나를 좋아해 주는 누군가 나한테 책을 선물로 보내 준다면, 이렇게 받는 책선물을 즐거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책선물 아닌 책홍보를 바라는 서평단 책들을 읽으며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실 수 있을까 아리송하다. 누군가는 서평단 책읽기를 하면서 스스로 이녁 가슴을 촉촉히 적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생각으로만 그칠 뿐, 막상 스스로 삶을 일구거나 가꾸는 일하고는 동떨어지지 않나 싶다.


  모든 책은 모든 말에서 태어난다. 모든 말은 모든 삶에서 태어난다. 삶이 있기에 말이 있다. 말이 있기에, 이 말이 글로 피어난다. 글로 피어난 말은 책에 담긴다. 곧, 삶이 말이요, 말이 글이며, 글이 책인 셈이기에, 삶을 스스로 사랑스레 일구는 나날이라 한다면, 다른 사람이 쓴 책을 구태여 안 읽더라도, 내 삶을 일구는 내 삶책이 있는 만큼, 나로서는 언제나 새롭게 책읽기를 하는 셈이다.


  종이책을 읽는대서 책읽기가 되지 않는다. 종이에 아로새긴 책을 읽을 때에만 책읽기라 가리키지 않는다. 이야기를 읽기에 책을 읽는다 말한다. 종이책이든 삶책이든 마음책이든, 또 일책이든 놀이책이든 사랑책이든, 나 스스로 무엇을 하든 내 아름다운 나날이요 빛이며 이야기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읽기’가 되고, 제대로 읽기를 했다면 ‘책읽기’를 이룬다 할 만하다.


  나는 내 삶을 읽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쓰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아끼며 아이들이 스스로 저희 삶을 아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내 삶을 읽는 책읽기일 때에 즐겁다. 나는 내 삶을 쓰는 책쓰기일 때에 흐뭇하다. 나로서는 내 삶이 아닌 내 지식을 글로 쓰지 못한다. 나로서는 내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 삶을 글로 옮기지 못한다. 오직 내가 즐거이 바라보고 마주하며 기쁘게 어깨동무한 내 삶을 읽고 쓰며 나눈다.


  서평단이든 신문·잡지사 기자이든 또 비평가이든 여느 책즐김이가 되든, 사람들은 스스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 테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기쁘며 사랑스럽고 아름다이 책을 읽으며 삶을 읽고 말을 읽어 이야기 한 자락 빛내는 이는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어떠한 책이든 내 삶을 읽는 길에 함께 선 동무, 곧 길동무이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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