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뜨기 책읽기

 


  만화책 《도라에몽》을 보면, 먼 앞날에서 살아가는 로봇인 도라에몽이 ‘오늘날’로 찾아와 진구라는 아이를 돕는데, 진구라는 아이는 매우 착하지만 멍청하고 재주가 없다. 도라에몽은 진구도 잘 하는 재주 한 가지는 있으리라 북돋우지만 진구는 늘 주눅이 드는데, 어느 날 문득 실뜨기만큼 누구보다 잘 한다고 깨달아 “나는 실뜨기 장인이다!” 하고 외치며 집에 문패까지 붙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뜨기 장인’이라니 우습게 여길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곰곰이 돌이키면, 나 또한 어릴 적에 ‘이런 일이나 놀이는 나보다 잘 하는 사람 없어!’ 하고 외친 적 있다. 이를테면 ‘빨리 걷기’라든지 ‘빨리 마시기’라든지 ‘글씨 작게 쓰기’ 같은 여러 가지를 낑낑거리면서 한다. 동무 가운데에는 고무줄놀이를 누구보다 잘 하는 아이가 있고, 흙땅에 잔돌을 손가락으로 튕겨 금을 긋는 놀이를 누구보다 잘 하는 아이가 있다. 몇 미터 떨어진 데에서도 조그마한 동그라미에 척 들어가도록 돌을 튕기는 재주는 참 남달랐다고 느낀다. 멀찍이 떨어진 데에서도 작은 구슬을 던져 맞히는 재주도 참 대단하다고 느낀다. 딱지를 재빨리 접고, 또 이 딱지로 동무 딱지를 척척 뒤집는 재주도 참 훌륭하다고 느낀다. 끝도 없이 제기를 찬다든지, 축구공을 멀리 뻥뻥 찬다든지, 테니스공을 높이높이 던져 올린다든지, 종이비행기를 곧게 멀리 날린다든지, 연을 훨훨 날도록 띄운다든지, 윷이나 주사위를 잘 던진다든지, 참 손꼽히는 재주를 선보이는 동무가 많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런저런 재주가 좀처럼 가 닿지 못했다. 아, 하나 있던가. 오재미놀이를 할 때에 이쪽저쪽에서도 안 잡히고 끝까지 살아남는 재주 아닌 재주 하나 있었다. 오재미놀이를 하며 “난 오재미 하느님이야!” 하고 외친 일이 생각난다.


  이모저모 생각하고 머리를 짜낸다. 나는 참 어떤 뾰족한 재주가 없는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냈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지 못했고, 글을 빼어나게 잘 쓰지 못했으며, 그림을 놀랍게 잘 그리지 못했다. 이럭저럭 하기는 하더라도 그저 그런 높이에서 맴돌았다. 문득 한 가지 떠오른다. 집에서 학교를 걸어서 오가는 아이가 거의 없기에,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걸을 때마다 발걸음 재게 놀려 빨리 걷도록 용을 쓴다든지, 이 길에 기차길을 밟으면서 얕은 철길에서 비틀거리지 않고 오래도록 안 떨어지며 걷도록 애를 쓴다든지 해 보았다. 철길 동네에서 살던 동무라 해서 부러 철길밟기를 날마다 하지는 않으니, 이런 걷기 하나는 누구보다 잘 해내곤 했다. “난 철길에서 이백 걸음을 걷는다!”라든지 “나는 철길에서 천 걸음을 걷는다!”라든지 “난 철길을 빠르게 달린다!” 하고 외쳤다.


  또 한 가지 떠오른다. 50원 넣고 하던 오락실 오락 가운데 두어 가지는 언제라도 끝판까지 가서 오락실 사장님 비위를 거슬리곤 했다. ‘오락기계 가운데 두어 가지’만큼은 끝판임금 같은 이름을 얻었다. 나는 〈1942〉와 〈마계촌〉 끝판임금이었는데, 단돈 50원으로 두 시간 가까이 오락기계 하나를 붙잡고 뒤에 동무들을 구름같이 모이게 해 구경하도록 하다 보면, 사장님이 200∼300원을 쥐어 주면서 가게 밖으로 내쫓곤 했다. 그래서 내가 잘 하는 오락은 20분쯤 하다가 다른 동무한테 슬쩍 넘겨주며 오락실에서 안 쫓겨나려고 눈치를 보았다.


  아이 어머니가 뜨개하는 실을 조금 잘라 ‘뜨기실’을 마련한다. 첫째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먼저 실뜨기를 보여준다. 나도 어린 날 실뜨기 놀이를 했다고 가만히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실뜨기 놀이를 몹시 못 했다. 금세 요 모양 조 모양 만드는 동무들이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며 궁금하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손가락을 잘 놀릴까. 어쩜 저렇게 여러 모양을 쉬 만들 수 있을까.


  동무 가운데에는 실 아닌 고무줄로 실뜨기, 이른바 고무줄뜨기를 하는 녀석이 있었다. 속옷에 넣는 노란 고무줄 끝을 묶은 다음 손가락에 꿰어 끝없다 싶도록 늘리며 고무줄뜨기를 하는데, 저러다 고무줄이 틱 끊어질까 무섭다고 느껴, 동무녀석이 고무줄뜨기를 하면 슬슬 뒤로 물러나 멀리 떨어져서 구경했다.


  내가 실뜨기를 참 못 했다고 떠올리고 보니, 가위질도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 했다고 떠오른다. 집에서 신문종이로 가위질을 끝없이 해 보고, 이모저모 종이접기나 ‘종이 오려 붙여 무언가 만들기’를 수없이 하는 동안 가위질 솜씨가 이럭저럭 모양새 나쁘지 않을 만큼 되었지만 썩 잘 한다고 할 수 없다. 어느 날 국민학교 미술 시간인데, 동무 가운데 어느 하나 가위질을 놀랍도록 잘 했다. 따로 콤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고도 콤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려 가위질을 하는 아이들보다 훨씬 매끄럽고 반듯하게 동그라미를 오려 내곤 했다.


  능금을 잘 깎는다든지 참외를 잘 깎는 칼솜씨도 늘 부러웠다. 누군가는 ‘많이 깎으’면 으레 는다고 하는데, 나는 많이 해도 안 늘었다. 많이 안 해도 익숙하게 잘 하던 한 가지라면, ‘땅콩 껍질 빨리 까며 속껍질 안 벗겨지게 하기’쯤? 굴러오는 공을 뻥 차는 일도 잘 못하고, 멈춘 공을 높이 차는 일도 잘 못한다. 제기를 스무 차례 넘게 찬 적이 없다. 손발 쓰는 몸놀림이 참 굼뜨거나 힘들었다. 체육을 하며 춤추기를 배울 때에 내 몸짓이 참 웃겼다고들 한다. 내가 보여주는 국민체조 몸놀림은 그야말로 우스개였다고 하는데, 나는 내 모습을 본 적 없으니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체육을 하며 달리기가 가장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앞을 바라보며 숨을 찬찬히 고르며 오래오래 달리기가 나한테 가장 맞다고 느꼈다. 오래달리기 하나만큼은 학교에서 첫손이나 두손에 들 만큼 야무지게 달렸다. 이 결은 군대로 이어져, 군대에서 1500명 남짓 몇 킬로미터를 한꺼번에 오래달리기를 시킬 때에 내가 2등하고 몇 분 사이를 벌리면서까지 1등으로 들어온 적 있다.


  첫째 아이가 실뜨기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바라본다. 아버지보고도 실뜨기를 해 보라 말한다. 어린 날부터 참 젬병이던 실뜨기인데 나더러 해 보라니, 참 착하고 예쁜 말이다만, 선뜻 내 두 손에 실을 꿰지 않는다. 잘 하건 잘 못 하건 어찌 되든 손가락 사이에 꿰고 함께 놀아 주면 좋을까. 아이가 실뜨기를 배운 지 사흘째인데, 아직 망설인다. 나도 실뜨기를 같이 할까. 골이 살짝 아프지만, 아이랑 함께 놀며 살아갈 아버지인걸.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함께 놀면 될 노릇 아닌가. 기운을 내자. (4345.4.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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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4-06 00:32   좋아요 0 | URL
ㅎㅎ 된장님도 도라에몽을 즐겨 읽으셨나 봐요.저도 이책이 넘 재미있더군요^^

숲노래 2012-04-06 01:48   좋아요 0 | URL
도라에몽은
참 아름다운 만화랍니다..
 


 열여섯 살 푸름이 책읽기

 


  노래꾼이 되고 싶다는 뜻을 당차게 밝히는 열여섯 살 푸름이는 노래솜씨 겨루는 잔치마당에서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를 목청껏 뽐냅니다. 열여섯 살 푸름이는 열다섯이나 열네 살 적에도 어른노래를 마음껏 뽐냈을 테지요. 열세 살이나 열두 살 적에도 어린이노래보다 어른노래를 한껏 즐겼을는지 모릅니다.


  열네 살 푸름이가 즐길 만한 푸른노래는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합니다. 아마 없을 테지요. 열다섯 살 푸름이가 누릴 만한 푸른노래로 무엇이 있나 알쏭달쏭합니다. 아마 어른노래를 불러야 하겠지요. 내가 푸름이였던 스무 해 남짓 앞서,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에서는 동무들이 ‘어른노래 테이프’를 갖고 다니며 들으면 ‘소지품 검사’를 해서 빼앗았습니다. ‘푸름이가 이런 노래를 들으면 안 된다’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문세라든지 이선희라든지 동물원이라든지 들국화라든지 김수철이라든지 이지연이라든지 김완선이라든지 민해경이라든지 전영록이라든지 서태지라든지 …… 이런저런 대중노래, 곧 어른노래를 중·고등학교 푸름이가 듣거나 부르는 일은 ‘교칙 위반’이면서 푸름이답지 않다고 했습니다.


  내 푸르던 지난날, 푸름이인 우리들이 마음껏 즐길 노래를 가르치거나 들려준 교사나 어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갓 전교조가 생길 무렵, 전교조에서는 중·고등학교 푸름이가 즐길 노래를 지어야 한다며 여러모로 애쓰곤 했는데, 이제 전교조가 합법 노조가 되었으나, 막상 지난날처럼 푸른노래를 지으려 애쓰는 몸짓이나 움직임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예부터 합법 노조였던 곳 교사나 어른이라고 푸른노래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돌이키면, 예나 이제나 푸른노래는 이 땅에 없을 뿐 아니라, 어린이노래조차 싱그럽고 아름다이 짓는 삶가락이 없구나 싶어요. 오늘날 어른들은 오늘날 아이들한테 어떤 어린이노래를 들려주는가요. 아이들이 어떤 말로 어떤 넋을 빛내면서 어떤 삶을 일구도록 이끄는 노래를 지어서 들려주는가요.

 

 ......


  잠자리에서 두 아이를 갈마들며 재우느라 목이 살짝 쉴 만큼 어린이노래를 부릅니다. 몇 가락 부른대서 아이들이 잠들지 않습니다.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즈음 끊이지 않고 고이 부릅니다. 이원수 님이 쓴 동시에 가락을 붙인 어린이노래만 두 아이를 팔베개로 갈마들어 눕히며 조용조용 부릅니다. 어린이노래는 어린이한테 아름답습니다. 어린이한테 아름다운 어린이노래는 푸름이한테도 아름답고, 어른한테도 아름답습니다. 어른한테 아름다운 어른노래 가운데 푸름이한테도 아름다우면서, 어린이한테도 아름다운 노래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4345.4.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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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시노 미치오

 


  호시노 미치오 님 새책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다반,2012)가 나왔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장만하지 않았다. 머잖아 장만할 텐데, 천천히 때를 기다린다. 그동안 읽고 즐긴 호시노 미치오 님 책들을 생각한다. 몇 해 앞서 장만하고는 아직 안 읽은 《여행하는 나무》(갈라파고스,2006)를 떠올린다. 이제 흙으로 돌아간 사람이기에 다른 책이 더 나올 수 없으리라 여겨, 《여행하는 나무》를 몇 해 앞서 장만하고는 곧장 읽지 않았다. 아껴 두었다. 금세 읽기엔 서운했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청어람미디어,2005)와 《노던 라이츠》(청어람미디어,2007)는 읽었기에, 《여행하는 나무》는 한 해 두 해 읽기를 미루었는데,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래 이제 이 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몇 해 앞서 장만한 《여행하는 나무》를 며칠에 한 차례 몇 쪽씩 읽다가 마지막 쪽을 덮으면, 비로소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장만하겠지. 그리고, 이 책도 금세 읽기에는 아쉽다고 여겨 한 해 두 해 찬찬히 묵히겠지. 설마, 몇 해 뒤에 호시노 미치오 님 또다른 책이 한국말로 나올 수 있을까. 아직 한국말로 옮기지 않은 다른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아니, 호시노 미치오 님이 무스를 찍고 카리부를 찍으며 곰을 찍은 두툼한 사진책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어린이들 읽는 판으로 꾸민 《곰아》(진선출판사,2004)와 《숲으로》(진선출판사,2005)는 있지만, 북극땅 누비며 빚은 커다랗고 두툼한 사진책은 언제쯤 어느 출판사에서 선보일 수 있을까. 글로 여민 작은 책과 나란히 놓을 만한, 사진으로 빚은 커다란 책을 기쁘게 누릴 날을 꿈꾼다. (4345.4.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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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 도서관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2.3.31.

 


  도서관 책꽂이를 3.5톤 짐차에 가득 실어 가져왔다. 순천에 있는 헌책방 사장님이, 순천 쪽 어느 도매상이 문을 닫을 때에 책꽂이를 통째로 빼냈다고 한다. 문닫은 도매상에서 책꽂이랑 7톤어치 책을 빼내는 데에 일꾼을 이백만 원어치 썼다는데, 책꽂이를 나누어 받아 짐차에 싣고 도서관에 부리고 보니, 일꾼들 일삯으로 그만 한 돈을 쓸밖에 없겠다고 느낀다.


  책꽂이는 참 크다. 생각해 보건대, 이제 문닫고 만 도매상이 처음 문을 열면서, 가게 안쪽에 나무를 쌓아 벽과 가게 너비에 맞게 짠 책꽂이였을 테지. 한 번 짜서 벽과 가게 안쪽에 촘촘히 붙이고 나면, 두 번 다시 이곳에서 빠져나갈 일이 없도록 했을 테지.


  벽과 바닥에 단단하게 붙은 채 서른 해 남짓 수십 수백만 권을 얹었을 책꽂이는 거의 다친 데 없이 떨어졌다. 높이와 너비가 꽤 되어 둘이 마주 들어도 팔다리가 덜덜 떨리는 커다란 녀석 또한 휘어지지 않고 잘 떨어져 우리 도서관까지 왔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녀석은 문짝을 다 떼내고 창문을 다 떼어도 들이지 못할 만큼 크다. 하는 수 없이 벽이 기대 놓는다. 못을 빼고 나무칸을 뜯은 다음 다시 못질을 하고 싶지 않으나, 이렇게 떼지 않고서야 안으로 들일 수 없으리라.

 


  커다란 책꽂이 하나를 교실 벽에 대 본다. 벽을 높직하게 잘 채운다. 못을 박는다. 나 또한 이 책꽂이가 다시 떨어지지 않기를 꿈꾸며 벽이랑 바닥에 못질을 한다. 골마루 바닥인 교실이기에 못이 잘 박힌다.


  도매상에서 쓰던 책꽂이는 책을 더 많이 꽂도록 빈틈 거의 없을 만큼 알뜰히 짰다. 칸이 휘어지지 않을 만큼 사이를 댄다. 서른 해 남짓 책을 받쳤다지만 휜 자국이 거의 안 보인다. 그래도, 나는 이 책꽂이를 뒤집어서 박는다.


  어느 책을 꽂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퍽 아끼는 손바닥책을 꽂기로 한다. 정음문고이든 박영문고이든 을유문고이든 중앙문고이든 전파과학문고이든 신구문고이든 삼성문고이든, 헌책방을 돌며 호를 빠짐없이 맞출 수 있는 노릇이지만, 나는 그때그때 내가 즐겁게 읽을 만큼 하나씩 사서 모았다. 내가 읽을 수 없는 책이라 한다면, 굳이 사서 어떤 쓸모가 있을까 생각한다. 내가 못 읽은 책을 내 아이가 읽을까. 내가 못 읽은 책을 다른 사람더러 읽으라 내밀 수 있을까.


  내 도서관은 내 서재라고 느낀다. 내 서재는 내 도서관이라고 느낀다. 새로 옮긴 이곳에서 아직 ‘새 봉투’와 ‘새 이름쪽’을 마련하지 않았는데,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는지, 아니면 ‘사진책 서재도서관’이라고 새롭게 이름을 붙여 볼는지 찬찬히 헤아려 본다. ‘사진책 서재’라고만 해 볼까. ‘도서관’이라는 말은 아예 덜고, 다른 이름을 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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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도감 책읽기

 


  맨 처음 구름을 올려다본 날부터 두 아이하고 구름을 올려다보는 오늘까지, 똑같이 생긴 구름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다른 구름이고 늘 새로운 구름입니다. 매화나무 한 그루에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달립니다. 수백 아닌 수천 송이가 나무 한 그루에 달려요. 이 가운데 매실은 얼마쯤 맺힐까요. 멀리서 바라보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든 똑같이 생긴 꽃송이는 없습니다. 아주 닮았구나 싶어도 서로 다른 꽃송이예요. 참 비슷하구나 싶어도 모두 다른 꽃잎이에요. 좋은 푸성귀 나는 흙땅에 쟁기를 폭 찍어 갈아엎는 흙알갱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피면, 수만 수십만 수백만 알갱이는 모두 달리 생겼습니다. 수천만 수억만 흙알갱이는 저마다 다른 크기와 생김새로 얼크러지며 밭을 이루고 논을 이룹니다. 결 곱고 내음 좋은 흙을 만지작거리다가는, 내 몸뚱이도 나중에 이처럼 곱고 좋은 흙으로 바뀌어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과 뒷사람한테까지 고운 결과 좋은 내음 물려줄 수 있을까 어림해 봅니다.


  우리 집 동백꽃 붉은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마을 집집마다 한 그루쯤 으레 건사하는 동백나무 꽃송이 붉은 빛깔을 어디에서나 바라봅니다. 집마다 다 다른 때에 피어나고 다 다른 짙기로 붉게 물드는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크기도 모양도 빛깔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마당이든 이웃집 마당이든, 흔히 얘기하는 동백꽃 모양보다 꽃도감에 안 실리는 모양이 훨씬 많다고 깨닫습니다. 꽃도감에는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에 이르는 꽃송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담겠지요. 꽃도감에 담긴 꽃송이 하나는 ‘꽃 갈래 하나’를 얼마나 잘 보여줄 만할까요.


  누군가 ‘지구별 겨레 사전’이나 ‘지구별 나라 사전’이라며 엮는다 하면서, 겨레와 나라마다 사내랑 가시내 한 사람씩 사진을 찍어 싣는다 할 때에, 이 ‘지구별 겨레 사전’에 실린 사람들 얼굴은 ‘겨레 하나’를 얼마나 잘 보여줄 만할까요. ‘지구별 겨레 사전’에서 ‘한국’ 이야기에서는 가장 잘생겼다는 사내랑 가시내 얼굴을 담아야 할까요. 가장 못생겼다 하는 얼굴을 담아야 할까요.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하다는 얼굴을 담아야 할까요. 아무나 골라잡아 사진을 찍어 담으면 될까요.


  도감을 살피며 꽃이름을 알 수는 없어요. 도감을 살피며 꽃이름을 맞춘다 하더라도 꽃을 알 수는 없어요. 꽃이름을 알자면 내 마음을 가만히 기울이고 내 생각을 찬찬히 쏟으며 꽃을 바라보아야 해요. 꽃을 알자면 꽃이랑 함께 흙땅을 밟고 흙내음을 맡으며 살며시 눈을 감고 느껴야 해요. (4345.4.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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