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네 손 책읽기

 


  2012년 5월 19일, 둘째 아이 첫돌 이틀 앞둔 날, 곰곰이 지난날을 되새기며, 새벽 네 시 오십팔 분부터, 우리 집 처마에 깃든 제비들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데, 인천에서 나고 자란 다음,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고,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썩고서는, 돌아가신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느라 네 해 남짓 충주와 서울을 오가며 지냈는데, 서재도서관을 처음 연 2007년부터 인천에서 다시 살았고, 인천에서 옆지기를 만났고, 도시인 인천 골목동네에서 첫째 아이 낳은 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이제 나는 도시에서 살던 일이 너무나 아스라한 이야기처럼 느낀다.


  시골에서 살아간 지는 이제 이태째. 우리한테는 작은 집 하나만 있고, 시골에서도 똑같이 꾸리는 서재도서관은 아직 빌려서 쓰며, 밭이나 논으로 삼을 우리 땅 또한 아직 없다. 땅 없고 밭일 제대로 못하는 우리는 시골사람이라 할 만하지 않다고들 말하는데, 나로서는 내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아이들과 놀고 하루하루 지내는 터가 시골이라면, 이곳에서 꼭 하루만 살았더라도 시골사람이라고 느낀다.


  고향 인천에서 붙박이를 만나기란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나로서는 나부터 인천 붙박이요 내 동무들 모두 인천 붙박이인 터라, 여기를 가든 저기를 가든 몽땅 인천 붙박이였다. 조용히 살림 꾸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붙박이였구나 싶다. 정치를 하거나 문화를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교육을 하거나, 또 돈을 벌려 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으레 인천 아닌 다른 데에서 찾아왔구나 싶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인천에서 지낼 때에 ‘인천으로 옮겨 산 지 얼마 안 되었다’ 말하는 이들한테 ‘아니에요. 인천에서 하루를 살았더라도 인천사람이에요.’ 하고 말했다. 골목을 잘 모르고 역사를 잘 모른대서 인천사람 아닐 수 없다. 삶터가 인천이면 모두 인천사람이다. 삶터가 인천 아니면 인천사람 아닐 뿐이다. 곧, 잠자리는 인천이되 일하러 지옥철 타고 서울을 드나들며 서울에서 놀고 서울 동무 사귀는 이들은 인천사람 아닌 서울사람이다. 사는 곳(주소)은 인천이되 서울사람이다.


  이리하여, 나는 인천사람이었다가 서울사람이 되었고, 서울사람에서 양구사람이 되었으며, 양구사람에서 다시 서울사람이 되다가, 충주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인천사람으로 돌아왔고, 다음으로는 음성사람이 되었는데, 이제는 고흥사람으로 살아간다.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내 사랑도 내 얘기도 온통 고흥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며 잎을 틔운다.

 

 ..


  마당에서 마음껏 자라는 들풀에 판을 기대어 뜨개옷을 매만지는 두 사람 네 손이 곱다. 후박나무 밑 풀밭에서 후박꽃 내음과 들풀 소리를 함께 느끼며 뜨개옷을 어루만지는 두 사람 네 손길이 예쁘다. 예쁜 손을 바라보기에 내 손은 덩달아 예쁘게 바뀐다. 고운 손을 쓰다듬기에 내 손은 시나브로 곱게 거듭난다. (4345.5.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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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9 21:28   좋아요 0 | URL
뜨게옷 너무 이쁘네요.
무엇을 짜신건가요? 저렇게 판에 대고 다듬으시는건가봐요....

아하, 아래 그림 보고 답을 알았습니다.
너무너무 이쁘네, 벼리도 옷도..

숲노래 2012-05-20 02:00   좋아요 0 | URL
뜨개옷도 손길도 풀도 다 예뻐요.
좋은 하루랍니다.

저건, 어깨에 걸치는 '티핏'이라 하더라구요~
 


 푸른 빛 모 책읽기

 


  모내기를 앞둔 시골마을 논자락에는 모판에서 볏모가 푸르게 자란다. 볍씨에서 막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줄기를 올리는 볏모는 포근하며 시원한 논으로 옮기면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높이 줄기를 올리겠지. 푸른 들판은 푸른 숨결을 내뿜으며 여름을 난다.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몸을 살찌우며 겨울을 맞이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벼에서 알맹이를 먹는다지만, 벼 알맹이를 먹기 앞서까지 논에서 푸른 빛깔 드러내던 볏잎 숨결을 먹었다. 벼 알맹이를 먹을 때에는 한 알이 뿌리내려 수백 알이 되는 너른 목숨을 먹는 셈이다. 한 포기씩 알뜰히 건사하며 모를 낸다. 열 포기 백 포기가 모여 논자락을 이룬다. 사람들은 벼 한 포기가 긴긴 여름부터 가을까지 받아들인 햇살을 함께 먹고, 벼 한 포기가 오래오래 마신 빗물을 함께 마시며, 벼 한 포기가 언제나 쐬던 바람을 함께 쐰다. 볏포기에 스미는 사랑은 숟가락 들어 밥그릇 비우는 사람들 가슴으로 새삼스레 천천히 되스민다. (4345.5.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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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19 08:01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모판이...
밥 먹을 때 쌀알에 숨어 있는 그 숨결, 바람결, 햇살을 느끼며 먹을 수 있는, 그런 마음결이면 참 좋겠습니다.

숲노래 2012-05-19 08:04   좋아요 0 | URL
날마다 잘 헤아려 보셔요.
그러면 더 즐겁게 밧맛이 나요.

..

눈치가 빠른 분은 알아보셨을 텐데,
이 글은 '사름벼리' 딸아이한테 바치는 글이에요.

사름벼리 이름 가운데 '사름'은 바로
모내기하고 얽힌 말이거든요~ ^^
 


 길에서 읽는 책

 


  길 옆으로 흐드러진 나무숲과 논밭과 멧자락과 냇물과 갯벌이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버스를 달리기도 하고 기차를 달리기도 합니다. 자가용이나 자전거를 달릴 때에 이러한 숲과 들과 바다와 냇물을 보기도 합니다.


  길 옆으로 가득한 아파트와 아스팔트와 끝없는 가게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버스를 달리기도 하고 기차를 달리기도 합니다. 자가용이나 자전거를 달릴 때에 이러한 도시 한복판을 보기도 합니다.


  숲을 바라보며 달리는 길은 어떤 마음이 될까요. 아파트를 바라보며 달리는 길은 어떤 넋이 될까요. 들이나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길은 어떤 꿈이 될까요. 끝이 보이지 않는 아스팔트길 끝없는 자동차 물결을 바라보며 달리는 길은 어떤 사랑이 될까요.


  자전거수레에 두 아이를 태웁니다. 옆지기와 나는 따로 자전거에 탑니다. 내 자전거에는 두 아이가 앉아 어버이와 함께 달립니다. 논둑을 달리고 멧자락 옆길을 달립니다. 논둑에서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고, 멧자락에서는 들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큰길로 나와 면소재지와 가까워지면 자동차 소리를 듣습니다. 자동차는 한 대만 지나가더라도 휘잉 바람을 일으키며 시끄럽습니다.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웁니다. 들길과 숲길과 멧길에서는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이야기를 이렁저렁 나눕니다. 자동차 드나드는 찻길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라도 입을 닫아야 하지만, 말소리가 찻소리에 잠겨 하나도 안 들립니다.


  골목길을 두 다리로 걸을 때하고 공장 옆길을 두 다리로 걸을 때에는 아주 다른 느낌이요 삶입니다. 나무 우거진 숲 사이 흙길을 걸을 때하고 아파트 사이 돌길을 걸을 때에는 사뭇 다른 마음이며 하루입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 맞추어 책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에 걸맞게 책을 씁니다. 사람들 스스로 누구하고 이웃하며 무엇을 곁에 두느냐에 따라 책읽기가 달라집니다. 사람들 스스로 누구하고 벗삼으며 어떤 보금자리를 일구느냐에 따라 글쓰기가 바뀝니다. (4345.5.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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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이야기책 《삶말》 2호를 내놓았습니다.

월요일에 빗길을 달려 우체국에서 부쳤습니다.

오늘부터 천천히 집에 닿으리라 생각합니다.

 

즐겁게 받아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삶말》은 ‘도서관 지킴이’한테만 부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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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집에 들어오면서 편지함에서 꺼내 들고왔습니다.
블로그에서 낯익은 내용들이지만 다시 새롭게 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숲노래 2012-05-17 07:45   좋아요 0 | URL
소식지는 '인터넷 안 하는 사람'한테 맞추어 엮기 때문에, 서재에 올린 글이라 하지만, 꼭 더 읽히기를 바라는 글을 추려서 실었어요. 즐거이 사랑해 주셔요~~ ^^
 


 무화과 책읽기

 


  무화과나무에 꽃송이 달립니다. 무화과나무 꽃송이는 다른 나무 꽃송이하고 사뭇 다르게 생깁니다. 언뜻 보기에는 ‘꽃 같지 않다’ 여길 만합니다.


  무화과는 따로 꽃이 피지 않는다 하고 딱히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서 ‘無花果’처럼 한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요. 사람이 바라보는 눈으로는 ‘꽃이 따로 없고 열매 또한 딱히 없다’ 할 터이나, 무화과나무 삶으로 돌아보면, 사람 눈으로 볼 때에는 느낄 수 없는 꽃송이요, 사람 넋으로 헤아릴 때에는 알 수 없는 열매라 하리라 느낍니다.


  무르익는 한여름에 먹는 무화과 꽃송이(또는 꽃주머니)는 오월 한복판에 들어서자 통통하게 물이 오릅니다. 언제 이만큼 꽃송이(또는 꽃주머니)가 부풀었나 싶어 놀랍니다. 내가 날마다 틈틈이 들여다보더라도 무럭무럭 자랄 테고, 내가 따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씩씩하게 자라겠지요.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튼튼하게 잘 크는 첫째 아이 키를 다달이 재 보는데, 다달이 잴 때면 1센티미터씩 높아집니다. 따로 줄자로 키를 재지 않더라도 아이를 안거나 재울 때면 이 아이 키가 느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딱히 아이를 안지 않더라도 가만히 바라보며 이 아이 키가 자란다고 느낍니다.


  어른이 되면 키가 더 늘지 않습니다. 어른은 몸뚱이가 더 커지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면 바야흐로 마음이 자랍니다. 어른이 되었다 할 때에는 날마다 새삼스레 마음이 깊어지거나 넓어집니다. 아니, 마음이 자라고, 깊어지며, 넓어질 때에, 시나브로 ‘어른’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 싶습니다. 마음을 가꾸고, 돌보며, 사랑할 때에, 참말 ‘사람’이라는 이름이 걸맞다 싶습니다.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받아들이는 흙땅에서 무화과나무가 자랍니다. 새잎이 돋습니다. 새 꽃봉우리 터집니다. 비가 멎은 새 아침 하늘은 파랗고, 들새와 멧새는 새벽 일찍부터 신나게 노래하며 먹이를 찾아 마을과 들판을 날아다닙니다. (4345.5.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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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15 07:06   좋아요 0 | URL
꽃 '봉우리'가 맞는가요? 저는 봉오리로 알고 있었는데...
무화과 꽃송이가 꼭 포도씨 확대해놓은 것 처럼 생겼네요.

숲노래 2012-05-15 10: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때때로 잘못 적어요.
산봉우리, 꽃봉오리,
이렇게 생각하면 틀릴 일은 없는데,
새벽에 아기 안고 글을 쓰며 졸음을 참다가
잘못 적었네요 @.@

에구구~

기억의집 2012-05-15 13:40   좋아요 0 | URL
무화과는 꽃이 없다고 해서 무화과라고 알고 있었는데,
꽃송이가 피는군요. 색깔을 보니 나뭇잎하고 색이 같아 언뜻보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알고 있던 지식을 수정해야겠는데요.
근데 왜 아직까지도 무화과로 이름지을까요?

숲노래 2012-05-15 15:44   좋아요 0 | URL
수술이며 암술이며, 저 '주머니' 같은 푸른 싸개 안쪽에만 옹크린 채 있어요. 그러니, 따로 꽃이 없다고도 말하고, 이 '수술 암술 덩어리'라 할 뭉치가 그대로 '열매' 노릇까지 하지만, 이 또한 이 모습 그대로 바알갛게 익으니, '무화과'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느껴요... @.@

노이에자이트 2012-05-15 14:34   좋아요 0 | URL
무화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입니다.광주는 오래된 주택가에서 가끔 볼 수 있죠.우리동네 주변에도 있는데 무화과 딸 때 하얀 액이 나오죠.저는 껍질이고 뭐고 다 먹습니다.그런데 무화과 못먹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고흥에도 대량재배하는 곳이 있나요?

숲노래 2012-05-15 15:44   좋아요 0 | URL
글쎄, 잘 모르겠어요. 어디엔가 있을는지 모르나, 다들 집에서 먹을 만큼만 몇 그루 두시지 싶어요~

인천에도 골목집마다 무화과나무가 꽤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