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푸른 빛깔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2.4.18.


  사람들은 단풍나무라 말하면 으레 붉게 물든 잎사귀만 떠올린다. 나도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살아가기 앞서까지는 단풍나무는 붉은잎으로만 생각했다. 이러다가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뒤 단풍꽃과 단풍씨를 보면서, ‘그래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 학교에서 날마다 보던 단풍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다른 빛깔이었잖아. 게다가 단풍씨앗으로 얼마나 재미나게 놀았나.’ 하고 떠올렸다.


  4월 15일께만 하더라도 새 잎사귀가 돌돌 말린 채 살짝 푸른 점처럼 보이던 단풍나무였는데 4월 17일이 되니 새 잎사귀는 거의 풀린 모습이고, 4월 18일을 맞이해 단풍잎이 모두 활짝 펼쳐진다. 푸른 잎사귀가 싱그럽다. 푸른 잎사귀 사이사이로 봄맞이 단풍꽃이 새로 피려고 한껏 기지개를 켠다.


  책 갈무리 하고 책꽂이 자리잡고 하는 일로 바쁘지만, 한참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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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7월에 나온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이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은 언론 소개를 거의 못 받기도 하고, 이래저래 비평이든 비판이든 서평이든 독후감이든(@.@) 거의 아무것도 못 받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이러저러하다 보니, 골목동네 삶을 이야기하는 책으로서도, 골목길 발자취를 돌아보는 책으로서도, 골목사람 웃음눈물을 들려주는 책으로서도, 즐거이 읽히지 못하면서 출판사 창고에 가득 쌓이고 말았어요 ..


.. 출판사에서 창고에 오래도록 잔뜩 쌓이는 책은, 창고 관리비를 많이 물어야 하니 여러모로 버겁습니다. 이리하여 출판사 창고에서 적잖은 책을 제가 받아서 모시기로 했습니다(@.@) ..


.. 그렇다고,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이 새책방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새책방에서 주문하는 분이 있으면 사서 읽으실 수 있어요. 다만, 이번에 출판사 창고에서 저한테 이 책이 여러 상자 들어오는 만큼, 이 책들이 즐겁게 읽히면서 좋은 이야기꽃 피우면서 찬찬히 알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히고 싶습니다 ..


.. 책을 읽고 싶은 분한테 책을 보내는 일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책을 거저로 주는 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저부터 스스로 모든 책을 제 살림돈을 털어 장만해서 사자고 생각하며 살아가거든요. 제 책 또한 제 책을 읽으려 하는 분한테는 제값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느껴요. 그래서,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지킴이’를 더 받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셨기에 ‘전남 고흥 시골마을 폐교’ 한켠을 빌린 도서관 삭월세를 즐겁게 낼 형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도서관 터가 되는 폐교를 통째로 사들일 꿈을 꾸고 싶어요. 폐교를 통째로 사들이자면, 3만 명한테서 1만 원씩 받을 수 있으면 돼요. 또는 3천 명한테서 열 달에 걸쳐 1만 원씩 받아도 폐교를 통째로 사들일 수 있어요. 1천5백 명한테서 스무 달에 걸쳐 1만 원씩 받으면 스무 달 뒤에 폐교를 통째로 사들일 수 있겠지요.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지킴이’가 되어 시골폐교 한 곳을 통째로 사들이도록 도와주시는 분한테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을 보내려고 합니다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다달이 1만 원 보내기
  → 한 해에 10만 원 보내기
  → 한꺼번에 200만 원 보내기 +.+
   (어디로?)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도서관 지킴이가 되려는 분은 ‘책 받을 주소·이름·전화번호’를 알려주셔요
  →
hbooklove@naver.com
  → 011.341.7125
 ◈ 도서관 지킴이가 된 분한테는 다른 책도 틈틈이 부칩니다

 


.. 사진책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을 읽는 분들이 저마다 고향이나 보금자리에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이야기 한 자락 일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 도서관 지킴이인 분한테는 이 책을 모두 1권씩 부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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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케익 책읽기

 


  빵집이라는 곳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 빨래집이 생긴 지도, 찻집이 생긴 지도, 술집이나 밥집이 생긴 지도, 옷집이나 기름집이 생긴 지도 얼마 안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들 가게집이 언제 처음 생겼는가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백 해조차 안 된 가게집인데 너무 마땅한듯 여기고,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만다.


  나는 아주 어린 나날부터 가게집 물건을 알쏭달쏭하게 여겼다. 왜 가게에서 이런 물건을 팔아야 할까 궁금했다. 왜 집에서 이런 물건을 스스로 만들어 쓰지 못하는가 궁금했다. 나도 모르는 내 어떤 ‘하늘부터 타고난 유전자’에 이런 모습을 생각하도록 하는 넋이 있었다 할 수 있고, 내 어머니가 언제나 거의 모두 집에서 스스로 만들어 써 버릇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이처럼 생각하도록 내 넋을 북돋았다 할 만하다.


  고등학생 때를 되새긴다. 그무렵은 국어사전을 날마다 끼고 한국말을 새삼스레 스스로 제대로 익힐 때인데, ‘가게’라는 낱말이 토박이말이 아닌 줄 깨닫고는 매우 놀랐다. 말밑으로 보면 ‘가게’는 토박이말이 아니다. 다만, 오래도록 널리 썼으니 살그마니 녹아든 한국말이요, 그냥 토박이말로 삼아도 된다. 이를테면 ‘고구마’랑 ‘김치’하고 똑같은 셈이다. ‘고구마’는 일본말이고, ‘김치’는 한자말이다. 그러나, ‘고구마’를 일컫던 일본말 꼴은 모두 사라졌고, ‘김치’ 또한 한자말 꼴이 모조리 사라졌다. 오랜 나날을 거치며 햇볕에 삭아 바스라져 모래가 되듯, 똥오줌이 찬찬히 삭아 거름이 되듯, 주검이 흙 속에서 삭아 또다른 흙으로 녹아들듯, 가게도 고구마도 김치도 그저 그런 토박이말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말을 곰곰이 새기면서 옳게 익히려 한다면 ‘가게’라는 낱말이 왜 토박이말이 아닌가를 짚을 수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한겨레가 먼 옛날부터 살아오던 이 땅에는 ‘가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고구마를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먼먼 한겨레는 김치를 안 먹었다.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 적 사람들은 김치를 안 먹었다 할 만하다. 또는 옛조선 무렵 한겨레는 김치를 안 먹었다 할 테지.


  역사연속극이나 역사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흔히 ‘주막’이라 해서 술집이자 잠집을 그리곤 하지만, 우리 옛사람 살림마을에 ‘술집이나 잠집’ 구실을 하는 집이란 없었다. 이런 문명은 개화기라 일컫는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생겼다. ‘주막’은 한국말 아닌 중국말이다. 게다가 ‘술집’이나 ‘잠집’ 같은 낱말이 쓰인 햇수는 아주 짧다.


  나그네가 밥 한 그릇이나 국수 한 사발이나 막걸리 한 동이 얻어 마신다 하는 집이 아예 없을 턱은 없다. 다만, 나그네가 먼길을 가다가 길모퉁이 어디 살림집에 들어 말씀을 여쭈며 얻어서 먹거나 마실 뿐, 따로 ‘가게’라는 데에서 돈을 치러 사서 먹거나 마시지 못한다.


  곧, 먼 옛날부터 이 나라 이 겨레는 ‘가게’ 문화란 없다. 모든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고 스스로 지으며 스스로 살림했다. 먼길을 떠나야 하는 일도 없을 뿐더러, 먼길을 떠나야 한다면, 스스로 신·옷·밥을 몽땅 챙겨 봇짐을 꾸려야 하고, 나귀나 노새나 머슴 등에 봇짐을 실어야 한다.

 

 ......

 

  집에서 아이 어머니가 케익이나 빵을 굽는다. 가루 무게를 달아 맞추고, 물을 알맞게 넣어 반죽을 하며,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에 넣어 부풀린다. 스텐불판을 미리 달구고는, 가장 여린 불로 맞추어 반죽을 담는다. 이렇게 한참 두고 나면 슬슬 익는 냄새가 나고, 다 익었다 하는 냄새가 날 때에 불을 끄고 뒤집개로 바닥을 슥슥 긁어 척 하고 꺼내면 동그랗게 예쁘장한 케익이나 빵이 태어난다.


  집에서 구운 케익이나 빵을 먹던 아이 어머니가 문득 말한다. 밖에서 케익이나 빵을 사서 먹으면 꼭 배앓이를 하는데, 집에서 구워서 먹으면 배앓이를 하지 않는다고. 오래도록 이 말을 곰곰이 되씹는다. 이달에 한 번 바깥에서 케익을 사다 먹어 보았는데, 참말 이날 저녁부터 이듬날 한낮까지 배가 참 힘들었다. 빵집 케익은 너무 달고 너무 혀가 아프며 너무 느글거린다. 빵집 케익은 온통 설탕덩어리에 기름덩이리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제서야 깨닫는다. 내가 왜 어릴 적부터 빵집 케익을 싫어했는가를 알아차린다. 나는 어린 나날 빵집 케익을 먹으면 언제나 배앓이를 하면서 몽땅 게웠다. 내 생일에, 그러니까 1980년대 어린이였던 내 생일에, 아버지가 모처럼 ‘비싼’ 케익을 사다 주는데, 어릴 적 나는 이 ‘비싼’ 케익을 한두 조각 먹다가 그만 속이 울컥 하면서 게웠다. 생크림도 생크림이지만, 빵집 케익은 내 몸에 아주 안 맞았다.


  나중에 찬찬히 알지만,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할 때에 값싼 ‘화학조합 설탕’이나 ‘화학조합 소금’이나 ‘화학조합 기름’을 안 쓰는 곳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사람이 흙에 풀씨를 심어 거둔 푸성귀로 얻는 설탕이라든지, 바닷물에서 얻은 소금이라든지, 옥수수이든 포도씨이든 깨이든 풀붙이를 짜서 얻는 기름으로 옳게 빚거나 굽는 케익이나 빵은 얼마나 될까. 제대로 흙을 일구고, 제대로 먹을거리를 다루어, 제대로 가게를 꾸리면서, 제대로 값을 받는다면 서로서로 좋을 텐데, 오늘날 도시문명은 온통 더 값싸게 더 많이 사고팔도록 내몰기만 한다.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즐겁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슬프다. 혼자서 몽땅 해내야 할 까닭이 없다. 스스로 할 수 있으면 된다. 혼자서 이것저것 다 치러야 하지 않는다. 스스로 맞추고, 스스로 생각하며,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에 아름답다.


  스스로 글을 쓰고, 스스로 책을 빚는다. 스스로 글을 읽고, 스스로 책을 삶으로 녹인다. (4345.4.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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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4-19 07:12   좋아요 0 | URL
빵집에서 빵이나 케잌을 사는 데는 돈만 주면 바로 내 손에 들어오지만 집에서 저렇게 빵을 한번 만들려면 발효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꽤 시간이 걸리고, 수고를 해야하지요. 음식의 성분도 성분이지만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수고와 시간이 들어가있으니 먹는 사람 몸에 해를 입힐 리가 없을거예요.

숲노래 2012-04-19 07:31   좋아요 0 | URL
빵집 일꾼도 무척 애쓰고 힘쓰실 텐데, 또 빵집 아이들이 빵집 어버이가 마련해 주는 빵을 먹기도 할 텐데, 모두들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탓이라고 느껴요.

삶이 다 같은걸요...
모든 대목에서,
모든 일이..
 


 논풀 책읽기

 


  빈 논에 풀이 가득하다. 빈 논이라 말하지만, 정작 빈 논은 아니다. 논에 볍씨를 심어 벼를 거두기에 벼가 자라지 않을 때에는 빈 논이라 말하는데, 벼를 베고 나서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한 논에는 숱한 들풀이 자라고 들꽃이 핀다.


  아직 괭이질이나 가래질을 받지 않은 논을 바라본다. 논자락 가득 메운 들풀을 바라보고 들꽃을 바라본다. 이렇게 수많은 들풀과 들꽃이 피어난 다음 논을 갈아엎으면 이 풀기운이 흙으로 스며들어 거름이 될까.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기에 논풀을 몽땅 뒤엎어 벼 한 가지를 심어 기르는데, 풀은 이 논에 얼마나 뿌리를 내리고 싶었을까. 문득, 참말 ‘빈 논’이라 하는 ‘묵은 논’을 떠올린다. 시골에 깃들던 사람이 숨을 다해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더는 손길을 타지 않아 묵는 논이 곳곳에 생기는데, 묵은 논은 한 해만 지나도 온통 풀밭으로 바뀐다. 묵은 논은 세 해쯤 지나면 제법 큰 나무가 자란다. 묵은 논은 열 해쯤 지나면 자그마한 숲이 된다.


  정원사나 조경사가 일구지 않아도 묵은 논은 다시 ‘자연’이 되어 천천히 숲을 이룬다. 사람이 따로 씨앗을 심거나 뿌리지 않아도 묵은 논은 싱그러운 풀과 꽃과 나무가 깃들며 새와 짐승이 보금자리를 틀 ‘자연’이요 ‘숲’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가. 사람은 어떤 삶을 꾸리는가. 사람은 어디에서 사랑을 속삭이는가. 논자락 풀들 앙증맞게 바람에 살랑이며 짙은 내음과 숱한 이야기를 흩뿌린다. (4345.4.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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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4-17 13:44   좋아요 0 | URL
정원사나 조경사가 필요하지 않은,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숲노래 2012-04-17 21:20   좋아요 0 | URL
도시 공원도
자연 그대로 잘 살아가도록
예쁘게 보살피고 사랑한다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자운영 책읽기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시골집을 누릴 수 있기를 꿈꾼 적 있는가 곰곰이 돌아본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 하는 꿈은 틀림없이 꾸었다. 다만 ‘이렇게 살아가면 좋겠지만 집은 어떻게 얻나?’ 하는 마음이 으레 뒤잇곤 했다. 걱정하는 꿈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왜 걱정을 뒤잇는 꿈을 꾸었을까. 꿈을 생각하는 삶을 스스로 찾지 않았기 때문일까. 제도권 학교를 탓하거나 누군가를 탓하면서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자운영 꽃잎을 바라본다. 봄 들판에 봄빛을 알리던 들꽃을 헤아리니, 맨 처음은 옅은파랑이었고(봄까지꽃), 뒤이어 하양이었으며(별꽃), 다음으로 옅은빨강(광대나물)이었다. 이윽고 보라였고(제비꽃), 노랑이었으며(유채꽃·갓꽃), 옅은하양이나 하양이 갈마들었다(매화꽃). 자운영꽃은 이 가운데 보라빛 제비꽃과 함께 찾아왔다.


  어느 꽃이든 꽃잎이 참 작다. 어느 들꽃이든 키가 작달막하다. 유채꽃은 좀 멀대 같다 할 만하지만, 그리 큰 키라 하기 어렵다. 흔히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을 헤아리지만, 사람들이 따로 씨앗을 잔뜩 뿌려 유채밭이 되지, 유채 스스로 처음부터 떼로 몰려 피어나지는 않았다. 아니, 유채도 먼먼 옛날에는 스스로 곳곳에 무리지은 보금자리를 마련했겠지.


  들꽃이 피어나는 자리는 다 다르지만, 차례차례 피어나는 꽃이 좁다란 흙뙈기에 나란히 어깨동무하곤 한다. 흙 한 줌은 수많은 들꽃한테 보금자리가 된다. 서로 즐거이 꽃잎을 벌린다. 언뜻 보자면 서로 제 씨앗을 더 많이 더 널리 퍼뜨리려고 애쓰는 듯 여길는지 모르나, 서로 알맞게 제 씨앗을 남길 뿐, 누가 더 넓게 이 땅을 차지하려 든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이 꽃이 피고 나면 저 꽃이 피고, 저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이 핀다. 숱한 들꽃이 찬찬히 피고 지면서 들판을 알록달록 어여삐 일군다.


  논둑과 도랑 둘레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자운영 꽃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너 자운영을 바라보며 무슨 빛깔이라 이름을 붙여야 하겠니. 어떤 빛이름이 너한테 어울리겠니. 별꽃이 흰빛이라 하더라도 아무래도 ‘별꽃빛’ 아니고는 도무지 나타낼 수 없듯, 자운영꽃 또한 그 어떤 빛이름보다 ‘자운영빛’ 아니고는 참말 나타낼 수 없겠지. (4345.4.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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