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만화책 읽기


 지난주에 서울마실을 했을 때에 가방이 넘치도록 책을 장만했다. 천으로 된 가방에도 책을 잔뜩 담아 팔뚝에 걸쳤다. 등허리가 휘겠구나 싶어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한 정류장을 가서 내린다. 전철역에서 내려 만화책방에서 만화책을 사고 나온 길이었기에 갈아타기가 되어 찻삯을 더 치르지 않는다. 걸음으로는 두 정류장이라 두 정류장을 걸어가든 버스로 가든 할 수 있는데, 한 정류장만 버스로 움직인다. 나머지 한 정류장 길에서는 천가방에서 만화책 하나를 꺼내어 읽는다. 어깨가 무거워 버스를 탔지만, 거칠게 모는 버스에서는 속이 메스꺼워 금세 내렸다. 고작 한 정류장을 버티었다. 시골에서 시골버스를 타던 때하고는 너무 다르다. 시골버스 일꾼은 도시버스 일꾼처럼 거칠게 모는 일이 없다. 자동차가 지나치게 많을 뿐더러 길가마다 끔찍하도록 자가용들이 줄지어 섰으니 도시버스 일꾼들이 버스를 거칠게 몰밖에 없지 않을까. 도시에서는 버스 일꾼이 일하는 보람과 값과 뜻을 얼마나 느끼거나 헤아릴 수 있을까. 그저 다달이 돈 버는 일 빼놓고 무슨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사랑을 살필 수 있을까. 버스 일꾼부터 더 보람되이 일하기 어려운 만큼, 버스를 타는 손님들이 고마움이나 홀가분함이나 기쁨을 느끼기는 힘들 테지. 얄궂은 마음이 자꾸 돌고 도는 셈이다.

 그렇지만, 버스에서 내려 걷는다고 그리 나아지지 않는다. 가게마다 시끄러이 틀어대는 노래를 들어야 하고, 엄청나게 많은 자동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라든지 자동차 꽁무니에서 뿡뿡 뿜는 방귀를 마셔야 한다. 찻길 한켠에 차를 대도 모자란 판이니, 거님길까지 자동차가 올라선다. 똑바로 걸을 수 없다. 요리조리 자동차 옆으로 걸어야 한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손전화로 시끄럽게 수다를 떤다. 둘이나 셋씩 짝을 지어 걷는 사람들은 귀가 따갑게 수다를 떤다. 도시라는 곳은 워낙 시끄러운 나머지, 둘이 짝을 지어 걷는다 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다.

 만화책 《유리가면》 45권이 새로 나왔기에 《유리가면》을 읽으며 천천히 걸었다. 가방이 무거우니까 이리 뒤뚱 저리 뒤뚱 하면서 걸었다. 메스꺼운 속에서 뭔가 울컥 하고 올라올 듯한 기운을 잠재우려고 눈알을 책에 처박는다. 시끄러운 소리와 어수선한 간판과 자동차에 눈이 홀리고 싶지 않아,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책 줄거리를 곱씹는다.

 생각해 보면,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몽땅 연극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제 삶을 사랑하며 제 삶을 아끼는 살림꾼이 아니라, 제 돈을 더 거머쥐려고 더 악착같거나 앙칼질 수밖에 없이 연극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예쁘장하거나 멋스러이 보이는 옷을 차려입으면서 남 보라는 듯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껍데기가 아무리 그럴싸하다 한들 알맹이인 줄거리가 엉터리라면 읽을 만한 책이 아니다. 편집은 편집대로 훌륭히 해야 하지만, 편집만 훌륭하고 ‘훌륭히 편집한 책 줄거리’가 엉터리라면 이러한 책은 읽을거리나 마음밥이 되지 못한다.

 말쑥하거나 말끔한 도시사람들이다. 예쁘며 멋진 도시사람들이다. 청소부들은 쉴새없이 쓰레기를 줍는다. 하루만 지나도 쌓이는 어마어마한 쓰레기들이 하룻밤을 지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 도시사람이 먹다 남긴 밥쓰레기를 돈으로 치면 한 해에 10조 원 가까이 된다는데, 이 어마어마한 밥쓰레기는 날마다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디로 버려질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제 넋을 찾거나 차리자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래거나 다스릴 수 있을까. 도시에서 많이 사고팔리는 책이란 온통 지식과 정보와 자격증과 처세를 다루는 책들이요,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착하거나 따사로이 보듬는 책은 거의 안 팔리는데, 이러한 도시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매무새로 이웃을 사귈까. (4344.2.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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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는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6] 후타가와 유키오(二川幸夫), 《日本の民家》(A.D.A. EDITA Tokyo,1980)



 사진기를 늘 갖고 다닌다 해서 내가 바라거나 꿈꾸는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이루지는 못합니다. 사진기를 어디에나 들고 다닌다 해서 대단하거나 놀랍거나 훌륭하다 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일구지는 못합니다.

 사진기를 언제나 갖고 다니는 사람은 나 스스로 바라보거나 부대끼거나 겪거나 느끼는 삶을 차근차근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어디에서나 손에 쥐는 사람은 내 삶에 어떤 이야기가 깃드는가를 가만히 느끼면서 이 삶이야기를 사진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사진이란 그리 멋진 일이 아닙니다. 글이나 그림이 그다지 멋스러운 일이 아니듯, 사진 또한 썩 멋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고, 글은 그저 글이며, 그림은 그저 그림입니다. 사진이라서 더 손꼽을 만한 문화이지 않고, 글이라서 더 돋보이는 예술이 아니며, 그림이라서 더 아름다운 갈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저마다 꾸리는 하루하루를 가만히 담는다든지 차분히 엮는다든지 알알이 빚도록 돕거나 이끄는 문화이면서 예술이고 삶입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권정생 님은 ‘동화 쓴다고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한테 손꼽히는 작품이 몇 가지 있다 해서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작품을 좋아하건 말건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작 대수로이 여길 대목은 나 스스로 내 삶을 얼마나 알차며 아름다이 일구느냐일 뿐입니다. 남들이 나를 우러르거나 섬긴다 해서 내가 똑바르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한대서 내가 멍청하거나 어리석거나 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나는 나요, 내 사진은 내 사진입니다. 나는 내가 즐기는 사진을 할 사람이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일굴 사람입니다.

 가장 뛰어난 글이나 그림은 없습니다. 가장 뛰어난 사진은 없습니다. 때때로 ‘광고사진 가장 잘 찍는’이라든지 ‘사람사진 가장 잘 찍는’이라든지 ‘다큐사진 가장 잘 찍는’처럼 어이없는 꾸밈말을 앞에 붙이는 사진쟁이가 있습니다. ‘가장 잘 찍는’이란 참 쓸데없는 말이지만, ‘아주 잘 찍는’이나 ‘참 잘 찍는’도 참 부질없는 말입니다. 그냥 ‘찍는’ 사진이지, 잘 찍는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그예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나날이지,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가를 수 없는 내 내날입니다.

 기쁜 날은 기쁜 대로 좋습니다. 슬픈 날은 슬픈 대로 좋습니다. 어느 날은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겠지요. 어느 날은 밥을 태우겠지요. 어느 날은 목돈이 들어와 마음껏 돈을 쓰겠지요. 어느 날은 살림돈이 바닥나서 혼쭐나겠지요.

 어떠한 나날일지라도 내 삶이요 어떠한 모습이더라도 내 얼굴입니다. 틀이 조금 기울어지거나 초점이 살짝 어긋나더라도 내 사진입니다. 빛이 조금 안 맞거나 무언가 밍숭맹숭하더라도 내 사진입니다. 어떠한 모습이든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포시 담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만히 담지 못하면서 틀이 빈틈없거나 초점이 또렷하거나 빛이 잘 맞거나 꽉 짜인 작품이라 한다면, 이때에는 무슨무슨 겉치레 작품은 되겠으나,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후타가와 유키오(二川幸夫) 님이 사진을 찍고 이토 테이지(伊藤ていじ) 님이 글을 넣은 두툼한 사진책 《日本の民家》(A.D.A. EDITA Tokyo,1980)를 봅니다. 제주섬 제주시청 둘레 이도1동에 자리한 헌책방 〈책밭서점〉에서 만난 이 사진책을 장만하느라 25만 원을 썼습니다. 헌책방 헌책 하나 값이 25만 원이기에 놀랄 분이 있으리라 보는데, 이 사진책 하나는 25000엔이기도 합니다만, 25만 원이 아닌 50만 원 값을 붙이더라도 제값을 톡톡히 하는 사진책이라고 느껴 주머니를 탈탈 털었습니다. 헬무트 뉴턴 님 사진책보다 값이 더 비싼 이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생각합니다. 헬무트 뉴턴 님 사진책은 돈이 되면 언제라도 살 수 있습니다. 후타가와 유키오 님 사진을 담은 《日本の民家》는 돈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사기 어렵습니다. 일본 헌책방이라면 이 사진책을 찾을 만할까요. 한국 헌책방에 이 사진책이 언젠가 다시 한 번 들어올 날이 있을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으레 서양 사진쟁이 서양 옛집 사진만을 놓고 생각합니다. 으젠느 앗제가 찍은 파리라든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뉴욕이라든지 하면서, 이들 작품을 일컬어 ‘세계 사진이 흘러온 발자취’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 사진 발자취’ 곁에 ‘세계 사진 발자취’ 꽁무니에도 끼지 못한다는 “일본 여느 살림집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습니다. 후미진 골목이나 으리으리한 도심지하고는 동떨어진, ‘흙하고 벗삼아 조용히 살아오던’ 사람들 시골집이나 멧골집이나 바닷가집 사진이 있습니다.

 도시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취입니다. 시골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손때입니다. 도시는 어느 만큼 흐르고 나면 옛집이 스스로 무너지거나 사람손으로 허뭅니다. 도시에서 무너지거나 허무는 집이란 건축쓰레기입니다. 시골은 어느 만큼 흐르면 흙으로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시골에서 허물어지거나 허무는 집이란 쓰레기 아닌 거름입니다.

 아주 마땅합니다만, 도시에서 도시사람들 도시 살림살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도시 내음과 도시 빛깔이 깊이 배어듭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들 시골 살림살이를 사진으로 실을 때에는 시골 내음과 시골 빛깔이 깊이 스며듭니다.

 사진으로 스미는 내음이요 빛깔이면서, 사진기를 쥔 사진쟁이한테 함께 배는 내음이면서 빛깔입니다. 이는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도 나란히 스미거나 뱁니다. 도시사람 도시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한테는 도시 내음과 도시 빛깔이 스밉니다. 시골사람 시골 이야기를 마주하는 사람한테는 시골 내음과 시골 빛깔이 뱁니다.

 사진쟁이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손에 쥐는 곳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에 담을 사람들 삶자락 이야기를 언제 어디에서 어느 만큼 사람들하고 사귀거나 만나는가에 따라, 곧 ‘사진기 쥐고 움직이며’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깊이와 너비에 걸맞게 사진을 낳습니다. 사진기만 쥐면서 막상 사람들하고 사귀지 못한다면, 이러한 몸가짐과 삶자락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진기를 쥐면서 사람들하고 오붓이 어깨동무를 한다면, 이러한 매무새와 삶무늬가 사진에 남김없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사진기를 느끼지 않을 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녹아들어 함께 지내는 이웃이 되어 살아간다면, 이러한 모양새와 삶결이 사진에 알알이 깃듭니다.

 사진책 《日本の民家》는 “일본 살림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붙여야 할 만한, 붙일 수 있을 만한 사진책입니다. ‘세계 사진 발자취’에서 이 사진책을 끼워 주든 안 끼워 주든 이 사진책은 ‘사람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림을 꾸리는 나날’을 사진으로 알뜰살뜰 적바림한 빛살 좋은 사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나저나, 이웃나라 일본에는 “일본 살림집” 사진책이 제법 있습니다만, 이 나라 한국에는 예나 이제나 아직 “한국 살림집”을 말하는 사진책은 거의 안 보입니다. 안승일 님이 일군 《굴피집》(산악문화,1997)을 빼고는 좀처럼 “한국 살림집”다운 한국 살림집 이야기를 펼친다 싶은 한국 사진책은 마주하기 힘듭니다. 도시 골목동네 살림집이든, 도시와 시골을 뒤덮은 아파트 살림집이든, 시골에서 흙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들 살림집이든, “여느 사람 보금자리”를 여느 사람 눈썰미와 손길과 다리품으로 담는 사람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듭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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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과 책읽기


 술을 많이 마셔야 술을 잘 마시거나 즐겁게 마신다고 할 수 없어요. 술을 적게 마시거나 못 마신다 해서 술맛을 모른다거나 술을 못 즐긴다고 할 수 없어요. 내가 마실 수 있는 만큼 마시면서 즐길 수 있으면 되는 술이에요.

 아무리 몸에 좋은 밥일지라도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은 한 사람 몸에 따라 달라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겠지요. 때로는 여러 그릇을 비울 사람이 있고 반 그릇 비워도 배가 부른 사람이 있을 텐데, 몸에 좋은 밥이니까 두어 그릇이나 서너 그릇씩 비워야 하지 않아요. 내 배가 받아들일 만큼 알맞게 먹어야 좋으면서 즐거운 밥먹기가 돼요.

 그런데 책읽기에서는 왜 이렇게들 더 많이 읽어야 더 좋은 줄 생각하고 말까요.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만들어 내놓아야 하는 줄 여기고 마나요.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더 좋은 책읽기가 될 수 없어요. 더 많이 만든다 해서 더 알찬 책마을 살림이 되지 않아요. 내 삶에 알맞춤하게 책을 마주하면서 읽거나 살피면 넉넉해요. 우리네 터전에 걸맞게 한 권 두 권 차분하게 가다듬어 내놓을 수 있으면 즐거워요.

 훌륭하다는 책을 더 많이 읽는다 해서 더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아요. 훌륭하다는 책을 더 많이 내놓는다 해서 이 나라가 더 훌륭한 터전으로 새로워지지 않아요. (4344.2.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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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와 춤추기


 아빠는 책을 읽고 엄마는 뜨개질을 한다. 아이는 혼자 놀다가 아빠가 읽던 책을 빼앗는다. 서른두 달째를 함께 살아가는 아이는 엄마가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어 같이 놀아 주기 어려운 줄을 아니까, 아빠를 붙잡고 놀자 한다. 아빠 손을 놓지 않는다. 빙글빙글 춤을 춘다. 속으로 말한다. 너, 앞으로 몇 살까지 아빠 손을 안 놓을 생각이니? 아니, 아이한테 물을 말이 아니라 아빠 스스로 당신은 아이 손을 몇 살까지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시오, 하고 물어야겠지. 까르르 웃으면서 뱅글뱅글 돌다가는 안아 달라 한다. 하기는, 아직 너한테는 책읽기는 조금만, 또는 안 해도 되지만, 아주 곯아떨어질 때까지 뛰고 놀며 춤추어야 할 테지. 아빠는 오늘이 아니어도 올해가 아니어도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을 테지. (4344.2.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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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sel Adams


 안젤 아담스라 해야 할는지 안셀 아담스라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한 미국땅 사진쟁이 사진책을 하나 장만한다. 지난해 12월에 이 사진책을 처음 마주하고선 이내 장만하고 싶었으나 그때에는 다른 사진책들 장만하느라 벌써 27만 원을 쓴 나머지, 이 사진책까지 장만할 수 없었다. 다음에 서울마실 할 때에 지나가면서 사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달 가까이 좀처럼 서울마실을 할 수 없었고, 사이에 살짝 서울을 거쳐 지나가기는 했으나 나라밖 사진책을 새책으로 많이 갖추어 놓고 파는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못한다. 설마 팔리지는 않았을까. 바깥에 내보이는 책 하나만 남았을 텐데, 이 책이 팔리면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텐데.

 어제 드디어 홍대전철역 안쪽 골목에 자리한 책방 앞을 지나간다. 합정역부터 신촌역까지 책으로 무거운 가방이랑 빨래한 아이 옷가지를 잔뜩 짊어지고 땀 뻘뻘 흘리며 걸어서 찾아간다. 안젤 아담스는 팔리지 않았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여러 해째 안 팔리지는 않았을까. 60리터짜리 내 베낭에조차 안 들어가는 커다란 판크기로 된 꽤 묵직해서 작은 아령 하나 같은 사진책인데, 값이 고작 7만 원. 책방 일꾼한테 묻는다. “와, 이 책은 되게 싸네요.” “네, 이 책은 꽤 싸게 들어왔던 책이에요.” 다른 사진책 값을 가눈다면 이 사진책은 십오만 원쯤은 될 듯했는데, 참 값싸게 샀다. 고작 칠만 원밖에 안 하는 안셀 아담스였는데, 왜 사진쟁이들은 홍대 앞을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거나 오간다 하면서 이 녀석을 알아보지 않았을까.

 나는 안젤 아담스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걷는 사진길하고는 많이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찍는 사진감이 다를 뿐, 사진감을 사진으로 담아내려는 땀이나 품이나 넋이나 뜻이나 꿈이나 씨는 다를 수 없다. 사람과 삶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사진을 할 수 없다. 사람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사진에 다가설 수 없다.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늘 헤아리며 고이 껴안지 않고서야 사진을 껴안을 수 없다. 사진은 삶이고, 사진은 사랑이며, 사진은 사람이다. 안젤 아담스는 너른 자연을 많이 찍은 사진쟁이이지만, 너른 자연만 사진으로 찍지 않았다. 사람도 꽤 많이 찍었다. 안젤 아담스가 찍은 자연은 사람 얼굴이고, 안젤 아담스가 찍은 사람은 자연이다.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거나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생각한다. 헌책방 둘레나 골목길 언저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함께 담아야 헌책방 사진이 더 빛나거나 골목길 사진이 더 어여쁘지 않다. 사람을 따로 더 담아야 할 사진이 아니라, 사람내음과 사람소리와 사람결을 담아야 할 사진이다. 손길을 담지 못하면서 손만 찍는다 해서 제대로 찍은 사진이 아니다. 활짝 웃거나 슬피 우는 얼굴을 찍었대서 이 한 장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말할 수 없다. 사진이 삶이요 사람이며 사랑이라 말하는 까닭은 사진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이루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과 노래와 춤과 연극과 영화도 매한가지이다. 모두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를 다루는 틀이 저마다 다르기에 글이 되고 그림이 되며 노래나 춤이 된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다. 사진은 그림이나 예술이 아니다. 사진은 그예 사진이다. 안젤 아담스는 예술사진이 아니라 사진이다. 안젤 아담스는 풍경사진이나 자연사진이 아니라 사진이다. 사진하는 마음을 안젤 아담스한테서 읽거나 느껴야 한다. 사진하는 삶과 사진하는 사랑을 안젤 아담스한테서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안젤 아담스 사진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안젤 아담스 사진책이 보이면 돈이 얼마가 들든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를 턴다. 주머니를 털어서 안젤 아담스 사진책을 사야 한다.

 유진 스미스 사진책도 사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찾아내지 못한다. 그립다. 돈이 있다 해서 살 수 있는 사진책이 아니니까, 참말 그립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몹시 비싼 판으로든 뜻밖에 아주 값싼 판으로든, 유진 스미스도 안젤 아담스처럼 나한테 스며들 날을 맞이하겠지. (4344.2.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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