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쓰기란 살림하기처럼

재미있고 신나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온갖 글쓰기는

사람들을 너무 쳇바퀴나 굴레에 가두어

마음껏 피어나지 못하게 막는다.

아직도 글힘(문자 기득권) 무리가

옥죄려는 꿍꿍이로구나 싶은데,

맞춤길이나 띄어쓰기는 다 틀려도 좋다.


이야기가 있으면 되고

삶을 줄거리로 짜면 된다.

이뿐이다.

글은 삶으로 그냥 쓰면 된다.

틀린글씨(오탈자)는 편집자가 잡아 주면 된다.

걱정하지 말고 무엇이든 다 쓰면 된다.


2019년 가을을 끝으로 

"말 좀 생각합시다"를

더 안 썼다.

이 글꾸러미를 책으로 내기로 한 곳에서

갑자기 그만두기로 하면서

어쩐지 기운이 빠져서 안 썼는데

누가 책으로 내주든 말든

나도 스스로 즐겁게 쓰면 될 뿐인

우리말 이야기이지.

.

.

숲노래 우리말 2021.5.8.

말 좀 생각합시다 69


 글결


  옛날에는 글꽃(문학)을 한문을 아는 이만 하기 일쑤였습니다. 옛날에도 누구나 입으로 말을 빚었고, 이 말로 이야기를 지었기에, 입에서 입으로 흐르던 노래는 언제나 신나는 살림꽃이었습니다만, 이 살림꽃을 글로 옮겨적은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해요. 옛이야기는 두고두고 흐르며 살아남았으나, 여느 삶자리 사람들이 피워낸 살림꽃은 낱말로는 남되, 낱말을 엮은 짤막짤막한 노랫마디로는 남지 못했어요.


  한문으로 글꽃을 하던 분은 ‘운율·각운·율격’을 헤아리면서 이모저모 비슷하게 맞추는 글솜씨를 부렸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떠할까요? 오늘날에도 우리는 글솜씨나 글잔치를 즐겁게 펴면서 재미나게 노래하듯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가요?

  

 네가 베풀어 주는 숨길

 네가 띄워서 주는 눈길

 네가 내밀어 주는 손길


  우리말로도 얼마든지 결을 맞출 만합니다. 다릿결(각운)도 재미나게 맞출 만하지요. ‘네’하고 ‘주다’를 넣으며 글길이를 똑같이 할 만해요. 끝을 ‘-길’로 척척 붙여도 즐거워요.


 서로 힘을 주며 이루는 일

 서로 틈을 주며 즐기는 삶

 서로 꿈을 주며 짓는 노래


  토씨 ‘-을’을 똑같이 넣고, ‘주며’로 똑같이 받으면서 글길이를 맞추어도 재미있습니다. ‘힘·틈·꿈’은 받침을 ‘ㅁ’으로 맞추기도 했고, 뒤에서는 ‘-는’으로 똑같이 받아서 이어 봅니다. 아주 쉽게 풀어내는 말씨로 말결을 살립니다. 옛날 글꽃은 글쟁이끼리 노닥이는 얼개였다면, 오늘날 글꽃은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면서 놀이하는 잔치가 될 만해요. 석줄글(삼행시)로도 넉줄글(사행시)로도 말놀이랑 글마당을 펴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꽃으로 피웁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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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이야기

말 좀 생각합시다 68


 삶님


  말은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요? 어떤 자리에 어떻게 써야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리에서 짓지 싶습니다. 온누리 모든 말은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살림을 가꾸고 지은 사람이 저마다 제 삶자리에 걸맞게 하루를 살아가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굳혀서 붙이는 소리이지 싶어요. 처음에는 그저 떠도는 소리였을 테지만, 이 소리에 이름을 붙이기에 뜻이 깃들고, 뜻이 깃들면서 말이라는 모습으로 나누는 새로운 숨결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새로운 소리까지 지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이 새로운 소리를 잔뜩 지었고, 숲이나 들이나 바다나 하늘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리를 새롭게 지었으니, 굳이 소리를 더 짓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엄청나게 널린 소리를 잘 살피고 엮어서 말을 새로 지으면 넉넉해요. 이미 있는 말 여럿을 새롭게 엮어 한결 새로운 낱말을 짓습니다.


  한국 한자말로는 ‘식구(食口)’요, 일본 한자말로는 ‘가족(家族)’이라 이르는 사이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집사람’을 가리킬 낱말이 따로 없어도 되었기에 굳이 텃말을 안 지었구나 싶은데, 이를 글로 나타내고 싶던 사람이 있어 한자를 따서 ‘식구·가족’ 같은 낱말을 엮었구나 싶어요.


  저는 이 한자말도 저 한자말도 그리 안 내킵니다. 밥을 먹는 사이란 뜻도 좁고, 씨받이가 모인 집안이란 뜻도 좁구나 싶어요.


  이러다가 삶을 함께할 사람을 만나서 이녁한테 ‘곁님’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저랑 삶을 함께하는 사람도 저를 ‘곁님’이라 부를 수 있어요. 한말(한국말)은 성별이나 나이나 자리를 안 따지고 누구나 아우르는 결이라, ‘아내·남편’을 넘어선 ‘곁님’이란 말을 짓고서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다면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이란, 삶을 함께 짓고 누리는 사이일 테니 ‘삶 + 님’ 얼거리로 ‘삶님’이라 할 만합니다. 한집에서 함께 삶님이에요. 사는 사이는 ‘삶님’이라면, 살림하는 사이는 ‘살림님’이 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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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말 좀 생각합시다 67


 손멋


  손으로 만지면서 헤아리는 느낌이라든지, 손으로 찌르르 오는 느낌이라든지, 손수 차린 밥에서 누리는 맛을 두고 ‘손맛’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손으로 글을 쓸 적이라든지, 손으로 적은 글월을 받는 느낌이라든지, 손수 짓거나 빚은 선물을 주거나 받을 적에도 ‘손맛’을 쓸 만해요. 남이 해 주는 일을 받지 않고 스스로 어떤 일을 할 적에도 손맛을 누릴 만하지요.


  그러면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손멋’ 말이지요. 밥이나 손 느낌을 손맛이라 한다면, 옷을 짓거나 집을 짓거나 살림을 꾸려서 보기에 좋거나 훌륭한 모습을 이룬다면, 이때에는 ‘손멋’이 드러난다고 할 만합니다.


  멋을 부린다거나 살린다거나 뽐낸다고 합니다. 멋을 차리거나 밝히거나 나눈다고도 합니다. 이런 여러 자리를 ‘손멋’이라 할 수 있어요. 마을을 가꾸는 손멋, 고장이나 고을을 아름답게 가꾸는 손멋, 보금자리를 알뜰살뜰 여미면서 돌보는 손멋, 뜨개질이나 바느질로 옷살림을 하는 손멋, 살림지기로서 살림멋을 이루는 손멋, 여러 가지 손멋이 있어요.


  손맛하고 손멋을 나란히 놓고 보면, 손맛은 어떤 일을 스스로 하면서 즐거운 결을 나타내는 셈이고, 손멋은 어떤 일을 스스로 하면서 둘레에 퍼지거나 이웃하고 나누는 결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이런 얼거리를 살피면, ‘길맛·길멋’을 놓고는 스스로 길을 다니는 즐거움은 길맛으로, 어떤 길(골목이나 시골이나 마을에 있는 길)을 꾸미거나 가꾼 아름다움은 길멋으로 나타낼 수 있어요.


  손수 글을 쓰면서 즐거울 적에는 글맛으로, 어떤 글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글멋으로 나타낼 만합니다. ‘말맛·말멋’을 쓸 만하고 ‘삶맛·삶멋’을 쓸 만해요. 스스로 책을 읽으며 즐거우면 책맛이 되고, 아름다운 책을 마주할 적에는 책멋을 헤아리겠지요. 내가 여행을 할 적에는 마실맛(여행맛)이라면, 여행을 아름답고 멋지게 다니는 이웃이나 동무를 두고는 마실멋(여행멋)이 남다르다고 말할 만해요. 그저 보면서 즐거우니 눈맛이고, 누구나 보기에 아름다워 눈멋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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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에서 철마다 펴내는 책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지난 '봄호'에 실은 글을 이제서야 걸칩니다 ^^;;

가을호 글을 마무리지어 보내고서야 생각나서...


..


말 한 마디 사랑 ― 하나. 날씨


햇살·햇발·햇귀·햇볕


우리 곁님은 아이들이 삶하고 살림하고 사랑을 배우도록 어버이가 이끌거나 가르치려면 숲으로 우거진 멧골에서 보금자리를 가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멧골에서 보금자리를 짓는 꿈을 키우면서 시골에서 사는데, 해거름이 되고 난 고즈넉한 시골 밤하늘은 눈부시게 곱습니다. 읍내하고 15킬로미터 떨어지고, 뒤로는 멧자락이, 앞으로는 들이, 들 너머에는 다시 멧자락이 있으니, 또 관광지나 공장이나 고속도로나 기찻길이 없으니 하늘이 참으로 해맑아요. 저는 인천이란 고장에서 나고 자랐는데, 1980년대 첫무렵까지만 해도 인천 골목마을에서는 “눈부신 햇살”을 볼 수 있었고,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길다란 햇발”을 볼 수 있었으며, 소나기가 뿌린 다음에는 “무지개 곁에서 따사히 내리쬐는 햇볕”을 누릴 수 있었어요. 아침저녁을 누리고 밤낮을 보내는 터전에서 보는 하늘에 따라서 우리 살림이 달라지고, 이렇게 달라지는 살림에 맞추어 말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티가 없어야, 새파랗게 보이도록 맑아야, 이때에 햇살을 제대로 느껴요. 햇살은 화살처럼 따갑게 쏘는 빛줄기예요. 그래서 “눈이 부시다”고, ‘눈부신’ 햇살이라고 합니다. “햇살이 따갑다”고도 해요. 짙은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길게 뻗으면 이때에는 ‘햇발’이지요. 하늘이 탁 트인 곳에서 지내면서 하늘바라기를 할 수 있어야 이런 낱말을 머리 아닌 몸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새겨요. 높다란 집이 가로막지 않는 곳에서 새벽을 맞이하면, 어스름이 사라지며 환한 아침에 동이 트는 모습을 보며 ‘햇귀’를 느껴요. 집에서만 지내거나 자동차나 지하철에 오래도록 머무른다면 겨울에 포근한 ‘햇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해하고 얽힌 여러 낱말 ‘햇살·햇발·햇귀·햇볕’이란 예부터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이한 사람들이 알맞게 가다듬은 이름이라 할 수 있어요. 날씨를 읽는 뭇이름 가운데 하나이지요.


물폭탄·게릴라성 호우 → 함박비·벼락비


한때 ‘게릴라성 호우’란 말이 퍼졌으나 이제 거의 안 씁니다. 모르는 분이 많을 텐데, ‘게릴라성 호우’는 일본에서 건너온 이름입니다. 시나브로 ‘물폭탄’이란 이름으로 바꾸어서 쓰는데요,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요? 재미있다고 여기는 마음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봐요. 폭탄은 싸움말입니다. 싸워서 서로 죽이고 죽는 자리에서 쓰는 말이지요. 폭탄이 떨어져 몸이 갈가리 찢어지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재미있을까요? 이런 폭탄에 ‘물’을 더해서 ‘물폭탄’이란 낱말로 날씨를 가리키며 섣불리 써도 좋을까요? 우리는 예부터 ‘소나기·소낙비’라 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쓰면 되어요. 새말을 따로 지어야겠다 싶으면 벼락처럼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벼락비’라 할 만합니다. 겨울에 쏟아지는 함박눈처럼 ‘함박비’란 이름을 지어도 어울려요.


쓰나미·해일 → 너울벼락·벼락너울


한동안 ‘해일’이라 하다가 ‘쓰나미’라는 말로 바뀌는 흐름이 있습니다.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인데, 한자말 ‘파도’는 ‘물결’을 뜻합니다. 물결이 매우 크거나 사나우면 ‘너울’이라 해요. ‘해일·쓰나미’가 아니어도 ‘너울’로 다 나타낼 만합니다. 따로 새말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면 ‘너울벼락’이나 ‘벼락너울’처럼 느낌을 확 살려 볼 수 있어요.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리고,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길을 걷는다. 《이오덕 마음 읽기》, 《우리말 글쓰기 사전》,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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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66


 창구


  시골길이나 서울길은 멀기 마련입니다. 시골에서 서울을 가든, 서울에서 시골을 가든 꽤 오래 달려야 하지요. 먼길을 달리는 버스를 타면 으레 앞자리 머리받이에 적힌 “안전띠 착용”이란 글씨가 보입니다. ‘안전벨트’에서 영어 ‘벨트’는 ‘띠’로 고쳐썼네 싶으나 한자말 ‘착용’은 좀처럼 ‘매기·매다’로 고쳐쓰지 못합니다. “안전띠 매기”라 하는 분도 많지만, 적잖은 어른들은 아직 ‘착용’이란 자리에 머무릅니다. 더 헤아리면 자동차에서 몸에 띠를 매니까 ‘몸띠’라 할 수 있어요. 어깨에 매면 ‘어깨띠’가 되겠지요. 허리에 매는 ‘허리띠’를 생각해 보면 말을 어떻게 지으면 한결 나을까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은행으로 볼일을 보러 가니 ‘창구’란 글씨가 곳곳에 적힙니다. 저는 어른이라 이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다가도 ‘손님맞이·맞이칸·맞이터’처럼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고도 생각하고, 수수하게 ‘자리’라고만 해도 좋겠구나 싶어요.


  마침 아이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저기 ‘창구’라고 적힌 데는 뭐야?” “사람마다 은행에 와서 볼일이 달라. 그래서 어떤 볼일이 있는가에 맞추어서 다르게 가서 묻고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가리켜.”


  은행을 두리번두리번하는 아이들이 또 묻습니다. “저기 ‘VIP룸’이라고 적힌 데는 뭐야?” “저곳은 큰돈을 만지는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라고 해. 이를테면 ‘큰손님칸’이라고 할 수 있겠네.” 


  은행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 생각합니다. 은행뿐 아니라 여느 가게에도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만한 글씨가 넘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매한가지요, 책은 더더구나 아이들 눈높이를 안 헤아리는 말씨가 철철 흘러요. 버스나 기차에서도 이와 같고, 여느 학교나 관공서도 엇비슷합니다. 모두 ‘좀 배운 어른 눈높이’에 따라서 글을 써붙여요. ‘누구나 알아보기 좋’게 한다든지 어린이가 쉽게 바로 알아차릴 만하게 글을 써붙이지 못합니다.


  어떤 말을 쓸 적에 아름다울까요? 어떤 말을 쓸 적에 어깨동무를 하는 사랑스러운 나라를 이룰까요? 우리는 아무 글이나 쓰는 길에 흠뻑 젖어버리지 않았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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