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생각합시다 60


 눈먼벗


  사전에서 ‘맹인(盲人)’이란 낱말을 찾아보면 “‘시각 장애인’을 달리 이르는 말 ≒ 고인(?人)·고자(?者)·맹안(盲眼)·맹자(盲者)·몽고(??)·실명자”처럼 다룹니다. 갖은 한자말을 비슷한말로 붙입니다. 이들 갖은 한자말은 굳이 있어야 할까요?


  ‘장님’을 사전에서 보면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풀이해요. 한국말은 낮잡는 말로 깎아내립니다. 그런데 사전풀이뿐 아니라 참말로 사람들은 한국말 ‘장님’은 낮잡는 말로 여기면서 한자말로 붙이는 ‘시각 장애인’이라고 해야 점잖거나 알맞다고 여깁니다.


  이때에 한 가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한국말은 낮게 여기면서 한자말은 높게 여길까요? ‘장님’이라는 낱말을 낮춤말로 느껴서 새 낱말을 지어야 한다면, 한국말로 새롭게 낱말을 짓는 길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멀다’라는 낱말을 바탕으로 삼아서 ‘눈 + 멀다 + 이’ 얼거리로 ‘눈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낱말인 ‘눈먼이’는 아주 수수합니다. 눈이 멀기에 ‘눈먼이’라면, 귀가 멀 적에는 ‘귀먼이’가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말은 말끝을 살짝 바꾸면서 결을 새롭게 꾸밀 수 있어요. ‘눈먼 + 이’가 아닌 ‘눈먼 + 벗’이라든지 ‘눈먼 + 님’처럼 ‘눈먼벗·눈먼님’이라 할 만합니다. 눈으로 보는 힘을 잃은 이웃을 조금 더 헤아리려는 마음으로 새말을 한결 상냥히 쓸 수 있는데, ‘눈-’을 떼어 ‘먼벗·먼님’처럼 짧게 끊어 보아도 어울립니다.


  ‘장애자’라 하면 ‘-자’라는 말끝이 한자로 ‘놈 者’라서 낮춤말 같이 들리기에 ‘장애인’으로 고쳐서 쓰곤 합니다. ‘-人’이라는 한자를 ‘-友’라는 한자로 바꾸어 ‘장애우’처럼 쓰기도 하고요. 이런 얼거리도 살펴본다면, 한국말 ‘-벗’이나 ‘-님’을 붙여서 이웃을 한결 고이 여기는 마음을 담을 만해요.


  이러면서 사전풀이도 ‘장님’을 “눈이 먼 사람”이라고만 다루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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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59


 바늘 훔치기​


  옛말은 옛삶입니다. 옛삶은 옛살림이면서 옛사랑입니다. 그리고 옛사람이자 옛슬기예요. 섣불리 ‘속담’이라는 한자말은 쓰지 않기를 바라요. 옛날에 살던 사람이 들려준 말인 ‘옛말’이란 낱말을 써요. 그리고 ‘옛이야기’라는 낱말을 함께 쓰기로 해요.


  이런 말을 써야 하는 까닭을 헤아리면 좋겠어요. ‘옛말·옛삶·옛살림·옛사랑·옛사람·옛슬기’처럼 ‘옛-’으로 새롭게 생각을 잇습니다. 이와 달리 ‘속담’ 같은 낱말은 새롭게 생각을 못 이어요. 뚝 끊어지지요. 우리가 널리 쓸 말은 생각을 살찌우거나 살리는 말일 때에 즐겁거나 아름답습니다. 지식을 받아들이거나 정보를 익히는 말로는 생각을 살찌우거나 살리지 못해요.


  옛말 가운데 “세 살 버른 여든 간다”라든지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된다”가 있어요. 이 옛말을 되새기면서 옛삶을 그려 볼게요. 어릴 적부터 으레 듣던 말은 어른이 되어서 으레 하는 말로 거듭나요. 어릴 적부터 으레 하던 몸짓은 어른이 되어서 으레 하는 일로 피어나지요. 어릴 적에 무엇을 보거나 들으며 배우는 하루인가는 무척 대수롭습니다. 슬기롭게 배우기에 슬기롭게 말해요. 안 슬기롭게 말하는 어른이 가득해서, 이른바 거친 말을 마구 하는 어른이 곁에 가득하다면, 아이가 쓰는 말은 거칠겠지요.


  오늘날 참 많은 어린이·푸름이가 거친 말을 마구 쓴다면, 어른들이 이런 말을 생각 없이 마구 쓰기 때문입니다. 어린이·푸름이가 사랑스레 말하기를 바란다면, 어른부터 스스로 사랑스레 말할 노릇입니다. 이러면 돼요. 웃물이 흐리니 아랫물이 안 맑아요. 아랫물이 맑도록 하려면 더러운 웃물이 안 오도록 막아야 할 테지요.


  옛말은 말이면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살짝 길어요. 이 옛말을 오늘날에 새롭게 되새길 ‘오늘말’로 즐겁게 갈무리해 볼 수 있어요. 이를테면 ‘세살버릇(세 살 버릇)’이나 ‘바늘 훔치기(바늘 도둑)’나 ‘흐린웃물(흐린 웃물)’ 같은 낱말을 지어도 재미있지요. 단출히 밝히는 토막말로 생각을 새로 북돋웁니다. 2018.6.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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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58


 곁돈


  어릴 적에 어머니가 처음으로 ‘용돈’을 주실 적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런 돈을 왜 주시나 하고 여겼어요. 어머니는 저 스스로 돈살림을 꾸려 보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여덟 살이었다고 떠올리는데, 혼자 학교로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니, 저한테 ‘용돈’을 주셔서, 이 돈으로 버스표를 끊어 혼자 씩씩하게 버스 일꾼한테 내밀도록 이끌었습니다. 어린이는 자라서 푸름이로 크고, 어느덧 어른이 되는데 어느 날 문득 ‘용돈’이란 낱말을 돌아봅니다. ‘용’이 뭔지 궁금했지요. 열 살 즈음이었을까, 어머니한테 여쭈니 “용돈? 쓸 돈이지, 쓰는 돈.”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用 + 돈’이요, 어머니 말씀처럼 ‘쓰다(쓸) + 돈’이더군요.


  이때에 매우 궁금했습니다. 쓰는 돈이라면 ‘쓰는돈’이라 하면 되고, 쓸 돈이라면 ‘쓸돈’이라 하면 되어요. 그런데 왜 한자 ‘用’을 넣어서 ‘쓰는돈·쓸돈’을 ‘용돈’으로 적어야 했을까요?


  한국말에 ‘도차지’가 있습니다. ‘도차지하다’라 말하면 거의 모든 이웃님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독차지하다’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독차지’는 ‘獨 + 차지’입니다. ‘도차지’를 어느 사전은 ‘都차지’로 적기도 합니다만, 이는 알맞지 않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한국말 ‘도맡다’에서 ‘도-’는 한자가 아니거든요. ‘도사리·도거리’처럼 ‘도-’를 넣은 낱말이나 ‘도드라지다’를 가만히 헤아리면 ‘도-’를 넣어서 ‘도맡다·도차지하다’를 비롯하여 ‘도살피다·도주다·도받다’ 같은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알맞게 쓸 만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결을 살피지 못하면 ‘獨 + 차지’나 ‘用 + 돈’ 같은 말을 좀 엉성히 쓰고 마는구나 싶어요. 더 헤아린다면 우리는 “용돈을 주다”라 하기보다는 “돈을 주다”라고만 하면 됩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쓸 돈”을 줄 적에 그냥 ‘돈’을 준다고 하면 되어요. 그리고 ‘살림돈’이나 ‘곁돈’처럼 살을 붙여 뜻을 더할 만합니다. 살림을 꾸리는 돈, 곁으로 쓰는 돈이란 뜻을 담지요. ‘곁-’을 붙인 ‘곁돈’처럼 ‘곁일·곁책·곁집·곁길’을 넉넉히 쓸 만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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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57


 남말


  ‘남말’은 사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남 말 할 일이 아니다”라든지 “남 말하고 앉았네”처럼 띄어서 써야 맞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남말’을 새말로 삼어서 “남하고 얽힌 말”을 뜻하는 자리에 쓸 만합니다. ‘남말하다’를 써도 좋지요.


  ‘남’이라는 낱말을 놓고 ‘남남’하고 ‘남부럽다’이 사전에 있는데, 이밖에 얼마든지 새롭게 말줄기를 뻗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남하다’입니다. 허물없이 아주 가까운 사이에는 ‘너나들이(너 + 나 + 들이)’라 하는데, 가까이 있어도 등을 돌리며 지낸다면 “둘은 남남하는 사이입니다”라 할 만하고, 줄여서 ‘남남사이’라고도 할 만하지요.


  남을 부럽게 여기는 마음이 ‘남부럽다’라면 남을 좋게 하는 일은 ‘남좋다’입니다. “남좋은 일을 하다”처럼 쓸 만해요. 이와 맞물려 ‘나좋다’를 “나좋은 일을 할 생각이에요”처럼 써도 어울립니다.


  내 일이 아니면 “남 일”일 텐데, ‘남일’을 “남일은 쳐다보지 말자”처럼 쓸 수 있어요. 이 얼거리로 ‘이웃일’을 “이웃일에 마음을 쓰다”처럼 쓰고요. 그리고 다른 나라를 ‘남나라’라든지, 다른 집을 ‘남집’이라든지, 다른 마을을 ‘남마을’이라 해 보면 어떠할까요. 내 돈이 아니기에 ‘남돈’, 내 길이 아니기에 ‘남길’, 내 뜻이 아니기에 ‘남뜻’입니다. 이런 말하고 맞물려 ‘제일·제나라·제집·제돈·제길·제뜻’이라 하면 재미있게 맞습니다. 이 가운데 ‘제집’은 사전에 오른 낱말이기도 합니다.


  말이란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지어서 씁니다. 스스로 쓸모를 찾으면서 알맞게 짓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말보다 제말에 마음을 기울일 줄 안다면, 언제나 새로우며 즐겁고 알맞게 사랑스러운 말을 빚을 만해요. 남눈치를 안 보고 제넋을 읽는다면, 남눈에 매이지 말고 제눈으로 본다면, 남말 아닌 제말을 야물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2018.5.9.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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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56


 막말


  사전에 ‘막말’이 나옵니다. ‘언어폭력’도 나옵니다. 오늘날 삶터에서는 으레 ‘언어폭력’ 같은 한자말을 쓰는데, 이런 한자말을 쓰더라도 말뜻을 찬찬히 짚는 분은 좀 드물지 싶습니다. “말로 주먹질을 한다”가 어떤 결인가를 헤아리는 분도 퍽 적지 싶어요.


  ‘막말’이란 마구 하는 말입니다. 마구 하는 말이란 앞뒤를 가리거나 재거나 살피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막말’이란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생각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지요.


  생각 없이 말하거나 생각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말하면 어떤 말이 흐를까요? 바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하는 말’이거나 ‘슬기롭게 바라보지 못하는 말’이기 일쑤입니다. ‘막말’이란 모르면서 하는 말이요, 어리석게 하는 말인 셈입니다.


  참말로 그렇습니다. 말을 막 하는 사람은 하나도 모르기 일쑤요, 잘 모르기 마련이며, 잘못 알거나 엉뚱하게 짚곤 합니다. 제대로 속을 들여다보면서 헤아린다면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찬찬히 참모습을 읽으면서 바탕을 짚는다면 섣불리 말하지 않습니다. 슬기롭게 삶을 읽고 삶을 지으려는 마음이라면 아무 말이나 줄줄이 늘어놓지 않아요.


  우리는 말 한 마디를 할 적에 늘 생각해야 합니다. 더 많이 말해야 하지 않습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넓게 헤아려서 말해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더 많은 낱말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우리는 더 많은 낱말을 익히거나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고작 쉰이나 오백 낱말만 엮어서 말을 하더라도 깊고 넓고 차분하고 슬기롭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슬기롭게 ‘슬기말’을 하고, 사랑스럽게 ‘사랑말’을 합니다. 살림을 가꾸는 ‘살림말’이나 삶을 짓는 든든한 ‘삶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자말이나 영어나 토박이말 같은 겉모습 아닌, 속넋을 환히 밝히는 참말을 하는 길을 가야지 싶습니다. 2018.4.29.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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