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9.8.

수다꽃, 내멋대로 24 응큼한 마흔돌이



  오늘날 ‘마흔돌이(40대 남성)’는 어릴 적에 또래(다른 성별)하고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랑길을 배운 적이 없다고 느낀다. 내 또래도, 언니동생도, 지난날 어린배움터(국민학교)하고 푸른배움터(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이란 이름조차 없었고, 더 예전에는 더더욱 없었다. 쉰돌이(50대 남성)나 예순돌이(60대 남성)나 일흔돌이(70대 남성)라면, ‘순이(여성)는 집에서 집일만 하고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굴레에 갇힌 채 어린날과 젊은날을 보냈으리라. 둘레(사회)를 보면, 일흔돌이라 하더라도 일찌감치 이 굴레를 깨고서 ‘열린돌이(평등·평화로 가는 남성)’로 나아간 분이 제법 있다. 예순돌이에서도 꽤 볼 수 있다. 그러나 쉰돌이나 마흔돌이에서는 뜻밖에 적다. 집에서 설거지쯤은 하더라도, 집일이 뭔지 모르는 마흔돌이·쉰돌이가 넘치고, 아이를 돌보는 살림이라면 더더욱 바보에 멍청이인 마흔돌이·쉰돌이가 그득하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오나오냐로 자랐을 뿐 아니라, 스스로 나이가 든 뒤에 새길을 배우면서 어깨동무(평등·평화)로 나아가려는 몸짓보다는, 돈·힘·이름을 붙잡으려 했다. 이제 내 또래도 여느 배움터에서 으뜸어른(교장)이나 버금어른(교감)이 되고, 웬만한 일터에서는 우두머리(사장·대표)를 하는데, 슬기롭거나 참한 또래가 더러 있으나 아직 한참 멀다고 느낀다. 그러면 마흔돌이·쉰돌이는 왜 허물벗기하고 멀까? 마흔돌이·쉰돌이는 아이를 낳을 무렵 거의 모두 일터에 틀어박혔다. 아이를 돌볼 줄 아는 마흔돌이·쉰돌이는 드물다. 예순돌이·일흔돌이는 어떻게 허물벗기를 했을까? 예순돌이·일흔돌이도 아이를 돌볼 줄 모르기는 매한가지이되, 이들은 할아버지란 자리에 서면서 ‘처음으로 아기·아이·어린이’를 마주하였고, ‘아기·아이·어린이’ 곁에서 ‘동시·동화·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스스로 낳은 아기가 아닌, 딸이나 며느리가 낳은 아기를 비로소 무릎에 앉혀 달래는 동안 ‘할머니랑 며느리한테서 아기를 돌보는 길’을 꾸지람을 들으면서 차근차근 배웠고, 이러면서 부엌일이나 집안일을 천천히 거들었고, 아이랑 집안일하고 사귀면서 스스로 허물벗기라는 길을 시나브로 나아간다. 이와 달리 마흔돌이·쉰돌이는 거의 모두 돈·힘·이름을 붙잡는 데에 온마음을 바친다. 한 살이라도 젊을 적에 더 벌거나 거머쥐려 한다. 그리고 마흔돌이·쉰돌이는 아직도 ‘동시·동화·그림책’을 거의 안 읽는다. ‘동시·동화·그림책’을 안 읽는 스물돌이·서른돌이도 갇히거나 막히거나 갑갑하거나 답답한 틀에 스스로 옭아매면서 바보나 멍청이로 보내는 이들이 많더라. 아기를 낳았거나 어린길잡이(초등교사)란 일을 하기에 ‘동시·동화·그림책’을 읽어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서는 ‘참돌이(진정한 남성)’로 서면서 ‘참사랑(진정한 사랑)’을 짓고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면, 아기를 안 낳은 사내라 하더라도 ‘동시·동화·그림책’을 읽을 뿐 아니라, 손수 써 볼 노릇이다. “그림책 읽는 어머니”는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를 크게 뒤흔들면서 푸르게 바꾸어 놓는 밑힘이었다. “그림책 읽는 아버지”가 이제라도 태어나거나 깨어나야, 우리나라를 확 까뒤집으면서 ‘전쟁무기·군대·우두머리’ 없이 어깨동무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열아홉 살인 1994년에도 ‘대학생이지만 인문책 곁에 꼭 어린이책을 놓았’고, 큰아이를 2008년에 낳았지만 이무렵에는 ‘동시·동화·그림책’을 읽은 지 열 몇 해가 되었기에, 집안일을 기쁘게 맡고, 하루 내내 아이랑 어우러지면서 살림을 돌보았다. 언제나 아이들이 어버이를 일깨우고 가르친다. 어린이책을 안 읽고 인문책에만 빠진 마흔돌이·쉰돌이는 대가리가 터진다. 이러니 ‘응큼질(성추행)’을 한다. 이들한테 ‘늦깎이 성교육’을 시키기보다는 어린이책을 읽히면 된다. “그림책 읽는 아버지”로 거듭나면, 바보짓을 훨훨 털어내어 참돌이로 나아가리라 본다.


ㅅㄴㄹ


멍청한 마흔돌이 이야기를

기사로 아무리 내보낸들

이 나라는 안 바뀐다.

그림책 읽는 아저씨 이야기를

기사로 담아낼 적에

비로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문·방송과 정부는 이 나라를

아름답게 바꿀 마음이 아직도

없다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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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8.31.

수다꽃, 내멋대로 23 서점순례 책꽃마실



  읽을 책을 사러 다닌 지는 오래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나 아버지 심부름으로 달책(잡지)이며, 언니가 바라는 만화책을 사다가 날랐는데, 스스로 살림돈을 푼푼이 모은 때부터는 내가 읽을 만화책을 사려고 여러 마을 여러 책집을 드나들었다. 예전에는 어린배움터(국민학교) 곁에 ‘글붓 책집(문방구 책방)’이 꼭 여럿 있었다. 한 곳이 책시렁을 넉넉하게 두지 않기에, 만화책이건 달책이건 이곳저곳 누벼야 비로소 손에 쥘 만했다. 인천에 있는 커다란 〈대한서림〉이나 〈동인서관〉 같은 데는 만화책을 잘 안 두었다. 어린이로서 만화책을 사러 책집마실을 멀리 자주 다녀야 했다. 1992년 8월 28일 늦은낮에 인천 배다리 책골목에 있는 〈아벨서점〉에서 ‘독일말 배움책(독일어 참고서)’을 두 자락 찾아내면서 “새책집이나 책숲(도서관)에는 없어도 헌책집에는 있는 책”을 처음으로 느꼈고, “새책집은 많이 파는 책을 놓(베스트셀러 장사)”고 “책숲은 소설책 빌림터(대여점)이거나 고린내 나는 책만 묵힌”다고 느꼈다. 1992년 9월부터 이레마다 사나흘씩 인천 배다리 책골목으로 ‘책읽기’를 하러 다녔다. 어느 책집이든 발을 들이면 그 집이 닫는 때까지 눌러앉아서 책을 읽다가 두어 자락을 사들고 나왔다. 푸른배움터를 다닐 적에는 ‘책집 나들이 이야기’를 몇 꼭지 안 썼다. 이때에는 배움수렁(입시지옥)에 허덕이면서 글을 여밀 틈을 못 냈다. 1994년 봄에 ‘나우누리·하이텔’에서 박상준 님이 쓴 ‘헌책방 순례’라는 글을 읽고서 “나도 내가 다닌 책집 이야기를 이렇게 쓰면 책집을 누구나 널리 알아보면서 다닐 만하겠구나” 하고 여겼다. 이해 1994년부터 “헌책방 나들이”라는 이름을 걸고서 책집 이야기를 썼다. 때로는 “헌책방 마실·책방마실” 같은 이름을 썼다. 그런데 내가 쓰는 글에 책집 단골 어르신들은 “자네가 쓰는 글이 좋기는 한데, 글이름을 ‘나들이·마실’이라 붙이니, 고상하지 않아. ‘서점순례’라 해야 하지 않나?” 하고 핀잔하거나 타박하셨다. 새뜸(신문·방송)에서 일한다는 분들은 ‘서점투어’란 이름을 자꾸 썼다. 이러다가 어느 분이 〈헌책방 나들이〉란 이름으로 헌책집을 열었다고 하더라. 한참 힘들었다. 나는 ‘헌책방 나들이’란 이름으로 ‘책집에 나들이를 가자’는 뜻을 알렸을 뿐, 스스로 책집을 안 차렸으니까. 2004년에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책을 썼더니, 나중에 또 어느 분이 〈모든 책은 헌책이다〉란 이름으로 책집을 열더라. 이때에도 애먼 손가락질을 받았다. 나는 책집마실을 다닌 이야기를 글하고 빛꽃(사진)으로 여미어 누구나 읽고서 스스로 책집으로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었을 뿐인걸. ‘헌책방 나들이’도 ‘모든 책은 헌책이다’도 더는 쓰고 싶지 않아 ‘책방마실’이란 이름을 새롭게 지어서 썼는데, 2016년이었나 전남 광주에서 광주 마을책집을 알리는 꾸러미를 내면서 ‘책방마실’이란 이름을 슬쩍 가져다가 쓰더라. 헛웃음이 났다. 나더러 내가 지은 이름을 특허로 올리라고 귀띔하는 분이 많지만, 이름을 특허로 낼 마음은 없다. 다시 이름을 헤아려 ‘책숲마실’이란 이름을 걸었더니 전남 순천 도서관협회에서 그곳 달책(잡지) 이름으로 ‘책숲마실’을 쓰고 싶다고 물어왔다. 이름을 써도 되겠느냐 물어온 사람은 처음이라 그분더러 쓰라고 했는데, 막상 순천 도서관협회는 달책 《책숲마실》을 두 자락만 내고 더 안 내더라. 이러구러 2013년에 ‘책빛마실’이란 이름을 지어 《책빛마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이란 책을 내놓고, 2014년에 ‘책빛숲’이란 이름을 지어 《책빛숲, 아벨서점과 배다리 헌책방거리》란 책을 내놓은 적 있다. 2020년에는 ‘책숲마실’을 도로 내가 쓰기로 하면서 《책숲마실》이란 이름으로 책을 내놓았다. 우리네 마을책집 이야기를 꾸준히 쓰기에, 이 이야기를 새로 여미어 내놓을 적에는 《책꽃마실, 마을책집 이야기》란 이름을 쓰려고 생각한다. 이름짓기란 어려울 일이 없고, 남이 지은 이름을 노리거나 가로챌 까닭이 없다. 삶을 짓고 생각을 짓듯 이름을 지으면 누구나 스스로 빛난다.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을 이름에 얹으면 이 나라 책마을이 찬찬히 피어나면서 다같이 즐거우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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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수다꽃, 내멋대로 22 부채



  싱싱칸(냉장고)를 쓴 지 얼마 안 된다. 작은아이가 두돌맞이 즈음일 무렵 비로소 들였다. 싱싱칸 없이 어찌 사느냐고 묻는 분이 많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싱싱칸을 쓴 지는 기껏해야 쉰 해가 채 안 된다(2022년으로 보면). 다들 싱싱칸 없이 밥을 잘 해먹었고, 밥찌꺼기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싱싱칸이 집집마다 퍼지면서 외려 밥을 제대로 못 해먹는다고 느낀다. 싱싱칸을 안 쓰는 집이 없다시피 하면서 밥찌꺼기에 밥쓰레기가 흘러넘친다고 느낀다. 보라. 큼지막한 싱싱칸을 하나조차 아닌 둘이나 셋까지 들여놓은 집이 수두룩한데, 그 집에서 아무런 밥찌꺼기나 밥쓰레기가 안 나오는가? 알뜰히 밥살림을 하는가? 싱싱칸을 두었으니 비닐을 안 쓰나? 외려 싱싱칸을 쓰면 쓸수록 비닐쓰레기조차 더 늘지 않는가? 싱싱칸을 집에 들이기는 했으나 바람이(선풍기) 없이 살았다. 가시어머니가 우리 시골집으로 놀러오시면서 “선풍기도 없이 어떻게 살아? 난 더워.” 하면서 장만하셨다. 가시어머니가 우리 시골집으로 나들이하시면 헛간에서 바람이를 꺼냈고, 우리 스스로 바람이를 쓸 일은 없다시피 했다. 나한테는 부채가 있으니까. 우리 집에는 부채가 많다. 두 아이를 돌보며 두 손으로 부채를 하나씩 쥐고서 한나절을 거뜬히 부쳐 주었다. 한여름밤에는 두 아이 사이에 서서 두 손으로 가벼이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면서 자장노래를 불렀다. 한 시간도 두 시간도 아닌 너덧 시간을 부채질을 하자면 안 힘드느냐고 묻는 분이 많은데, “아이를 돌보면서 어떻게 힘들다고 생각해요? 아이한테 힘들다는 몸짓이나 마음을 물려주거나 가르치고 싶으셔요?” 하고 되물었다. 아이들한테 부채질을 해주면서 노래를 부르고 웃고 춤추었다. 왜? 즐거운 살림꽃이니까. 어머니라면 아기한테 젖을 물릴 테고, 아버지라면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 곁에서 가볍게 부채질을 할 노릇이다. 부채질을 하는 아버지는 ‘아기 어머니’가 배고플 즈음 맞추어 밥을 지어서 차려놓는다. 부채질을 하는 아버지는 아기가 똥오줌을 누면 기저귀를 갈고서 기저귀빨래를 한다. 아기가 똥을 눈 때에는 물을 끓여서 알맞게 추스른 다음 씻긴다. 여름철에는 날마다 대여섯 벌씩 씻기고 빨래를 했다. 아니, 여름철에는 한 시간마다 빨래를 했으니, 날마다 스물넉 벌씩 빨래를 했다. 이렇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이웃은 “밤에 왜 안 자고 빨래를 해요?” 하고 묻는다. “아기가 밤이라 해서 똥오줌을 안 누나요? 자면서 똥오줌을 누는 아기는 잠이 안 깨도록 살살 다독이면서 기저귀를 갈고 씻겨 주지요.”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노래하고 부채질하고, 이러면서 저잣마실을 하고, 낱말책(사전)을 쓰는 일을 하고, 이래저래 갖은 일을 즐거이 맡았다. 큰아이가 기저귀를 뗄 즈음 작은아이가 태어났기에, 작은아이가 기저귀를 떼는 날까지 하루에 30분 넘게 느긋이 잠자리에 든 일이 없다. 늘 15∼20분 사이로 눈만 붙이는 쪽잠살림이었는데, 낮에는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골짜기나 바다나 숲으로 마실을 다녔다. 부채질을 하는 어버이는 언제나 온몸으로 아이들을 품고 사랑하며 걷고 자전거를 달렸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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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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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8.19.

수다꽃 21 할아버지한테



우리 아이들 일산 할아버지가 다시 돌봄터(병원)로 실려갔다. 어쩌면 이제 아이들 일산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몸을 내려놓고서 넋으로 돌아가시리라 느낀다. 아이들 일산 할머니한테 전화를 건다. 요새는 돌봄터에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아픈이(환자) 곁에서 보살피는 사람은 돌봄칸(병실)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아픈이가 말끔히 나아서 같이 나오거나, 아픈이가 죽어서 나와야 비로소 나올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참 대단한 나라로구나 하고 느꼈다. 가시아버지(장모)한테 여쭐 말씀은 몇 가지 있다. “첫째, 여태까지 가시아버지가 잘못한 일도 잘 하신 일도 없답니다. 그저 모두 이 몸을 입은 이곳에서 새롭게 배우려고 겪은 일뿐입니다. 둘째, 아프거나 안 아픈 일은 모두 마음과 생각 탓입니다. 아픔하고 안 아픔 사이에는 아무것이 없어요. 가난하고 가멸(부자) 사이에도 아무것이 없답니다. 가시아버지가 말도 못 하시고 죽음을 코앞에 둔 이 자리에서 두 손에 1조 원이라는 돈을 누가 쥐어 준들, 가시아버지는 가면 살림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텅 빈 사람이 가난합니다. 마음을 사랑으로 그린 사람은 늘 가멸찬 하루입니다. 셋째, 아쉬운 일도 아쉬워할 일도 없어요. 가시아버지가 이루고 싶던 꿈을 펼치지 못해 안타깝다고 땅을 칠 일도 없어요. 몸을 내려놓는 일이란 죽음이 아닌 새길입니다. 우리는 몸뚱이로 살지 않아요. 우리는 몸뚱이로 이 삶을 겪으면서 배울 뿐입니다. 우리는 넋으로만 살아갑니다. 우리 넋은 몸하고 마음으로 두 갈래 길을 걸어가려고 이곳에 태어나는데, 몸으로 맞아들인 삶을 새록새록 새겨서 마음에 담는답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라고 가르지 마셔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 가시아버지가 살아온 모든 나날은 오롯이 ‘삶’이었고 ‘살림’이었기에 가시아버지 나름대로 깨달을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걸어온 길입니다. 아파서 너무 괴로우셨으면, 이 몸을 내려놓고서 새롭게 입을 몸뚱이인 삶에서는, 그러니까 다음삶(내생)에서는 아프지 않을 튼튼한 몸을 그리셔요. 가난한 집안에서 맏이로 태어나서 동생을 먹여살리고 가르치느라 뼈빠지게 힘드셨다면, 가멸찬 집안에서 느긋이 태어나서 가시아버지가 이루고 싶은 꿈을 넉넉히 이루는 새살림을 꿈으로 그리셔요. 이제는 새빛으로 나아갈 새몸을 그리실 때입니다.” 먹어야 배부르지 않다. 안 먹기에 배고프지 않다. 나는 아무리 짊어져도 짐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는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면 “아, 땀이 이렇구나.” 하고 느낀다. 두 아이 똥오줌기저귀를 날마다 숱하게 손빨래하면서 “우리 어머니도,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도, 먼먼 옛날부터 이렇게 손빛이 눈부신 살림꽃이셨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는 돌봄터(병원)에 들어갈 수 없기에 마음으로 가시아버지한테 마지막말을 띄운다. “오늘까지 걸어오신 몸은 포근히 내려놓으시기를 바라요. 활짝 웃으며 춤출 수 있는 꽃빛으로 피어날 씨앗 한 톨로 새롭게 나아가 보셔요. 오늘하고 어제하고 모레는 늘 하나입니다. 언제나 하나이기에 하늘빛이고 함께예요. 사랑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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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7.29.

아무튼, 내멋대로 20 손수건


내가 손수건을 처음 챙긴 때라면 여덟 살이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들어갈 적에 왼가슴에 손수건을 옷핀으로 집어 놓아야 했다. 우리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 왼가슴에 손수건을 집어 주던 일이 떠오른다. 한 해 내내 이렇게 하고서 다녔으며, 두걸음(2학년)으로 들어선 뒤에는 비로소 떼었다. 배움터에서 ‘언니’가 되었으니, ‘첫걸음(1학년) 동생’들이 왼가슴에 옷핀을 잘 집지 못하면 도와주고, 이 손수건으로 콧물도 닦아 주었다. 이러고서 너덧걸음(4∼5학년)에 이르도록 손수건은 챙기기도 하고 잊기도 했는데, 열한두 살 무렵이던 어느 날, 동무가 책을 읽는 매무새가 낯설고 재미있어 한참 들여다보았다. 땀을 많이 흘리고 살짝 토실한 동무인데, 처음 책꽂이에서 오른손으로 빼내고는 왼손에 미리 챙긴 손수건에 책을 받쳐서 살살 넘기더라. “우와, 책을 저렇게 읽는 사람이 다 있네!” 하고 속으로 생각했고, 더 지켜보았다. 자리에 앉으려고 움직일 적에는 ‘손수건으로 책을 받쳐서 쥔 채 가슴에 붙여서 천천히 걷’더라. 자리에 앉은 뒤에는 왼쪽에 손수건을 놓고는 틈틈이 손을 닦는, 그러니까 손땀을 닦는 듯싶었고, 오른손 두어 손가락으로 책등 위쪽을 살며시 건드려서 가만히 밑으로 훑듯 가볍게 넘긴다. 이 아이가 책을 넘길 적에는 소리가 안난다. 더구나 책을 눌러서 펼쳐놓지 않는다. 책 가운데가 좁 씹히듯 좁아도 그대로 둔 채 읽는다. 한참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동무가 문득 고개를 들고는 “어? 왜? 너도 이 책 읽고 싶어? 재미있어. 그런데 나는 아직 다 읽으려면 좀 멀었는데 어떡하지?” 하고 말한다. “아니야. 난 그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아니고, 네가 손수건을 챙겨서 땀을 닦아 주고 읽는 모습이라든지, 책종이를 소리도 안 나게 살살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그랬어. 넌 늘 손수건을 챙겨서 읽니?” “내가 땀이 많이 나잖아. 게다가 손에도 땀이 많이 나니, 늘 손수건을 챙겨. 안 그러면 책에 내 땀하고 손때가 묻잖아.” “너보다 땀이 많이 나는 아이들도 그냥 읽던걸. 유난하게 구는 셈 아냐?” “유난하다고? 그렇지만 나 혼자 읽는 책이 아니잖아. 내가 산 내 책이더라도 집에서도 이렇게 읽어. 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오래오래 깨끗하게 읽고 싶거든.” “어, 그렇구나. 그런데 책을 안 펼쳐서 그렇게 모아서 읽으면 읽기에 안 좋지 않아?” “응? 책을 눌러서 펴면 책이 다치고 구겨지잖아. 게다가 튿어질 수 있어. 책을 오래오래 읽으려면 가운데가 좀 좁더라도 고개를 움직이면서 읽으면 돼. 고개는 움직이면 그만이지만, 책을 눌러서 펼치면 책은 그날로 망가져.” “대단하다. 넌 어디에서 이런 길을 배웠어? 누가 가르쳐 줬어?” “어, 집에서 어른들이 안 가르쳐 주나? 우리 집에서는 다 그러는데?” “엥, 누가 집에서 가르쳐 주니? 책을 던지는 어른들도 많고, 냄비 받침으로도 잘만 쓰잖아?” “책을 어떻게 냄비 받침으로 쓰니? 냄비 받침은 신문종이로 써야지.” “아무튼 고마워. 너한테서 책을 쥐는 길을 배웠네. 나도 앞으로는 손수건을 챙겨서 읽어야겠다.” “그래, 너도 그렇게 해봐.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안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책을 아껴서 돌보면, 책은 오래오래 가고, 무엇보다도 책이 우리들을 좋아해 주는 줄 느낄 수 있어.” “에? 설마?” “네가 책을 아끼고 돌봐주면 책이 기뻐하면서 반짝반짝 빛난다니까.” “음, 거짓말 같은데.” “나중에 너도 느낄 날이 있을 테지.” “그럴까?” “그럼.” 내가 어린배움터를 다니던 1982∼1987년에는 배움책숲(학교도서관)이 없었고, 낡은 칸에 ‘학급문고’ 비슷하게 있었고, 다 낡아빠진 책투성이였는데, 이런 데에서도 동무는 하나하나 아끼고 돌봐주었다. 이날 뒤로 ‘책쥠새’를 곰곰이 생각했고, 낮거나 높은 데에 꽂힌 책을 비롯해 빽빽하게 꽂히거나 느슨하게 놓은 책시렁마다 책을 안 다치도록 살피는 길을 스스로 하나하나 챙기는 매무새를 익혀 나갔다. 책숲(도서관)하고 책집(새책집·헌책집) 어디에서나 늘 한손에는 손수건을 쥔 차림새로 책을 만지고 살핀다. 나 혼자 읽거나 보는 책이 아니니.


ㅅㄴㄹ


‘책숲마실을 할 적마다 늘 챙기는 손수건’ 이야기를 글로 갈무리해야겠다고 여겨서 썼는데, 이럭저럭 쓰고 보니, 이 글을 나중에 동화로 바꾸어야겠구나 싶다. 책과 책집과 책숲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삼으면 어울리겠구나.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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