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6.24.

아무튼, 내멋대로 13 영화평을 쓰려면



  곁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기 앞서까지는 영화는 아예 안 보다시피 하면서 살았다. 어느 날 곁님이 그러더라. “여보, 그대가 책을 좋아하는 줄은 알겠지만, 아이들한테 책만 보라고 할 생각이에요? 이 세상에 아름다운 노래하고 영화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책을 안 보고 아름다운 노래하고 영화만 찾아서 듣고 본다고 해도 다 듣거나 볼 수 없어요.” 뒷통수를 호되게 맞았다. 주먹이 아닌 말로 맞았다. 큰아이를 낳아 날마다 똥오줌기저귀를 빨고, 아이랑 곁님을 먹이고, 집안을 쓸고닦고 하느라 해롱거리던 어느 날 또 핀잔을 들었다. “여보, 난 아이들한테 책도 영화도 다 안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이들한테는 숲을 그대로 보여주고,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어버이로서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곁님 꾸지람을 듣고서 몇 달 동안 밤새 재미난(?) 꿈을 꾸었다. 글도 책도 영화도 없던 아스라이 머나먼 옛날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그림이 꿈자리마다 영화처럼 흐르더라. 책도 영화도 학교도 관광지도 없는 까마득히 먼 옛날 옛적에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살림을 지으면서 늘 넉넉하게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하면서 숲 한복판에서 모든 숨붙이(생명)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잘 살더라. 책을 삶에서 떼지 못하고 살면서 영화를 아이들하고 함께 보내는 나날을 누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집에서 보는 이 영화’를 다른 이웃은 어떻게 느끼거나 보려나 궁금했다. 평론가란 이들이 남긴 영화평을 찾아보다가, 그냥그냥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긴 영화평을 죽 훑다가, “어쩜, 이 사람들은 영화를 되게 미워하나 봐!”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왔다. 영화를 딱 한 판만 보고서 이 영화를 ‘보았다’거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사회 한 판을 보고서 영화평을 써도 될까? 나는 책이야기(서평)를 쓸 적에 적어도 그 책을 일고여덟 판을 되읽고 나서야 쓴다. 한 판만 슥 훑고서 쓸 수 있는 책이야기란 없다. 말이 안 되잖은가? 고작 한 판을 슥 첫 줄부터 끝 줄까지 훑고서 어떻게 그 책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 영화평을 쓰려면 영화 한 자락을 몇 판쯤은 차분히 보아야 할까? 아이들하고 함께 영화를 보고서 이따금 영화평을 남겨 보곤 했는데, 내가 글로 옮긴 영화평은 “적어도 쉰 판을 본 영화”이다. 그러나 “적어도 백 판을 본 영화”여야 그 영화를 어느 만큼 짚어낼 만하다고 느낀다. 아이들하고 어느 영화를 깊고 넓으면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한다면, “이럭저럭 500판은 보아야” 영화평을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고작 한두 판을 겨우 보고서 끄적이는 글은 ‘영화평’이 아니라고 느낀다. 우리나라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끔찍하게 미워하거나 싫어한다고 느낀다. 그들이 영화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면, 영화평을 쓰려고 어느 영화 하나를 적어도 쉰 판이나 백 판, 때로는 삼백 판이나 오백 판쯤은 보고 나서야 써야 옳지 않을까? 이웃나라 일본에서 그림꽃(만화)을 그린 테즈카 오사무 님은 영화를 볼 적에 ‘새벽 첫 상영’부터 ‘밤 마지막 상영’까지, 내내 한자리에 앉아서 대여섯이나 예닐곱 판을 내리 보았다고 했다. 마감에 쫓겨 바쁘지만, 드디어 하루쯤 말미가 나면 새벽부터 밤까지 극장에 눌러앉아 ‘똑같은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 만큼 다시 보면서 즐겼다’지. 영화평이란 글을 쓰는 분 가운데 ‘적어도 열 판쯤 다시보기’를 하고서 쓴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나라 영화평론가는 모조리 쓰레기글조차 안 되는 엉터리라고 본다. 제발, 영화를 사랑해 주기를 빈다. 100판이나 500판을 다시보기를 하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면 1판조차 안 보아야 맞다고 생각한다. 두고두고 건사하면서 끝없이 되읽을 책이 아니라면, 구태여 돈을 들여서 살 책이 아니라고 느낀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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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6.23.

아무튼, 내멋대로 14 그림책



  어린이로 살던 무렵(1975∼1987)에는 ‘그림책’이 있는 줄조차 몰랐고, ‘그림책’이란 낱말조차 못 들었다. 푸름이로 지내던 무렵(1988∼1993)에는 ‘동화책’은 “애들이나 읽는 책이니 기웃거리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 싸움터(군대)에 끌려가서 짓밟히던 무렵(1995.11.6.∼1997.12.31.)에는 종이책을 하나도 못 읽었고, 새뜸(신문)조차 읽을 수 없었다. 이태 남짓 그냥 바보로 뒹굴며 총을 쏘고 등짐(군장)을 짊어지며 멧골을 끝없이 걸어서 넘으며 보냈다. 삶터(사회)로 돌아오고서 1998년 1월 4일에 《몽실 언니》를 읽는데 눈물을 가없이 흘렸다. “나는 왜 어린이로 살던 무렵에는 이런 아름책을 알려주는 어른도 없고, 배움터(학교)에서는 이런 책을 읽으라는 길잡이(교사)도 없는 채 반공독후감에 반공웅변에 허덕여야 했나?” 하고 울고 또 울었다. 1998년 1월 5일부터 어린이책(그림책+동화책+동시집)을 샅샅이 읽어내기로 다짐했다. 어린이란 몸으로 못 읽었어도 스물세 살 젊은 사내가 앞으로 ‘사람답고 사내답고 아저씨답고 할배답게’ 살자면, 책벌레로서는 ‘어린이책 사랑돌이’로 나아가야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막상 책집에 가서 어린이책을 살피고 쥐고 펴고 읽으면, ‘엄마 손을 잡고 그림책을 보려던 아이들’이 “엄마, 저기 아저씨 있어! 어떡해?” 하더라. 얘야, 아저씨가 스물세 살이긴 해도 아직 아저씨 소리는 좀 낯간지럽지 않니? 그러나 네가 보기엔 그냥 아저씨일 테지. ‘아이 손을 잡은 엄마(아줌마)들’은 “저기요, 남자가 여기서 책을 보니 아이들이 못 보잖아요? 저리 비켜 주세요!” 하신다. 어린이책 있는 칸에서 책을 볼 적에는 아이나 아줌마가 있는지부터 살폈다. 이분들이 없을 적에만 부랴부랴 들여다보고, 아이나 아줌마가 이쪽으로 올라치면 먼저 달아났다. 지난 2020년에 서울시장 박원순 씨는 응큼질(성추행)을 뉘우치고서 값(처벌)을 달게 받는 길이 아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갔다. 그해에 서울시장·부산시장은 응큼질 탓에 새로 뽑아야 했다. 2022년 6월에 ‘포항 포스코 본사 무더기 응큼질(집단 성폭행)’이 불거진다. 이쪽 놈이건 저쪽 놈이건, 응큼짓을 일삼는 이는 수두룩하다. 겉만 번드르르한 응큼사내가 많으니 “모든 남자를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여기는 주의주장”이 불거질 만하다. 그런데 “모든 남자를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여기는 주의주장”을 펴면서 순이돌이 사이를 쫙 갈라치기를 하기보다는, 철없는 사내랑 어린 사내랑 젊은 사내 손에 어린이책(그림책·동화책)을 쥐어 줄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책을 읽혀서 ‘철없는 사내들이 마음부터 맑게 씻고 다스리도록 일깨우지’ 않고서야, 이 나라 ‘바보사내짓(남성 가부장권력 횡포)’이 사라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기 똥기저귀를 맨손으로 갈 줄 모른다면, 아기를 부드러이 씻길 줄 모른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함께 읽지 않는다면, 먼저 나서서 동화책을 살펴 읽다가 눈물에 젖고 웃음꽃을 터뜨리지 않는다면, 사내들은 메마른 바보넋으로 뒹굴지 않을까? 사내들 손에 있는 인문책을 덮으라 하자. 젊은이도 할아버지도 인문책은 그만 읽어도 좋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함께 읽자. 착하면서 참한 마음빛부터 가꾸어야 사내답고 사람다워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살림을 지으리라 생각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젠더 전쟁’이 아닌 ‘어깨동무’로 나아가도록

함께 어린이책을 읽고

함께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함께 그림책을 읽고 노래하면

우리 삶터는 조금씩

아름다이 거듭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싸우지 마요.

서로 사랑하는 어린이책으로

마음을 가꾸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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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6.21.

아무튼, 내멋대로 12 오리궁둥이



  어린이로 살던 무렵, 힘든 여럿 가운데 하나는 바지였다. 나는 돌이(남자)란 몸으로 태어났는데 ‘돌이바지’를 입기 힘들었다. 둘레 어른들은 “오리궁둥이네. 톡 튀어나온 궁둥이가 귀엽네.” 하고 말했고,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 들어가니 ‘오리궁둥이’를 놀리는 순이(여자)가 참 많았다. 오리궁둥이인 터라 여느 돌이바지를 꿰자면 ‘엉덩이가 안 끼는 치수인 바지’라면 허리가 너무 헐렁해서 흘러내리고, 허리가 맞는 바지라면 엉덩이가 꽉 끼어 쉽게 튿어졌다. 엉덩이가 꽉 끼어 튿어지면 얼마나 창피한지. 튿어진 바지 엉덩이를 툭하면 기우던 어머니는 늘 한숨을 쉬며 “또 튿어지니? 어떡하니? 그렇다고 엉덩이에 맞는 바지는 허리가 너무 헐렁하고.” 하셨는데, 어느 날 엉덩이가 잘 맞고 허리가 안 흘러내릴 만한 바지를 내미셨다. 진작 이런 바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신나서 걱정없이 뛰놀았다. 그런데 이날 배움터(학교)에 가니 순이들이 깔깔대며 놀린다. “어머! 뭐야! 너 왜 여자바지를 입었어! 깔깔깔!” 어머니는 한참 골머리를 앓으시다가 마을 이웃집에서 ‘다 큰 순이가 못 입는 작은바지’를 얻어오셨더라. 비록 놀림을 받으며 얼굴이 벌개지기 일쑤였어도 ‘돌이바지’는 이제 더 안 입겠다고 다짐했다. 놀림질이란 그냥 한동안 손가락질을 하고 깔깔대다가 끝이지만, 엉덩이가 꽉 끼는 돌이바지로 뛰거나 달리자면 자칫 또 튿어질까 봐 걱정해야 하니, ‘놀림받으며 순이바지를 입기’로 했다. 돌이 몸으로 태어나도 오리궁둥이인 사람이 이따금 있다. 오리궁둥이인 돌이는 모두 바지 탓에 호된 어린날을 보냈겠지. 2022년 6월 20일 낮, 서울 어느 옷집에서 깡동바지(반바지)를 고르는데 옷집 일꾼 네 사람이 갈마들면서 “여긴 여자바지예요! 남자바지는 저쪽이에요!” 하고 큰소리를 낸다. “전 오리궁둥이입니다. 남자바지 못 입습니다.” 하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곁짝한테 사줄 바지’를 고를 수도 있고, ‘딸아이한테 사줄 바지’를 살필 수도 있잖은가? 왜 멀쩡한 사람을 마치 ‘미친놈’이나 ‘치한’으로 여기면서 ‘순이바지’를 만지작거리지 말라며 뱀눈을 치켜뜰까? 순이(여자)도 돌이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순이가 치마를 훌훌 벗어던지고서 바지를 꿸 수 있는 삶(권리)을 누린 지 얼마나 되었는가? ‘바지순이(바지를 입은 여성)’를 그렇게 괴롭히고 손가락질하던 ‘미친 사내나라(가부장국가)’를 호되게 겪지 않았는가? 순이옷하고 돌이옷을 가를 까닭이 있을까? 저마다 몸에 맞는 옷을 살필 뿐이요, 저마다 즐길 옷을 누리면 아름다울 뿐이다. 순이가 바지를 마음껏 입는 삶을 누리듯, 돌이도 치마를 신나게 입는 삶을 누릴 때에, 비로소 이 나라는 아름빛으로 가득하면서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조그마한 길에 살짝 발을 내딛는 셈이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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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6.20.

아무튼, 내멋대로 10 긴머리



  1975년에 태어나 1982년에 아직 ‘국민학교’란 이름인 어린배움터에 들어간 또래는 늘 얻어맞고 막말을 듣고 짐더미(숙제)에 억눌린 채 집에서는 숱한 심부름에 허덕이면서 살았다. 우리 언니도 그러했고, 언니네 언니도 매한가지였다. 1975년 또래는 1993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이해에는 ‘수능(수학능력시험)’을 9월하고 11월에 두 판 치렀다. 새로 바꾼 셈겨룸(시험)이 해볼 만한가를 따지려고 두 판을 치렀으니, 이 또래는 쥐(실험쥐)인 셈이다. 숲노래 씨가 다닌 푸른배움터(고등학교)는 3학년이 500 남짓이었는데, 이 가운데 둘만 ‘수능 2 + 본고사 + 면접’을 치렀다. 둘을 빼고는 11월에 치른 두 판째 셈겨룸으로 배움수렁(입시지옥)이 끝이었다. 그런데 배움터 길잡이는 두 판째 셈겨룸을 마친 이튿날 갑작스레 ‘머리치기(두발검사)’를 하더라. 배움칸(교실) 앞뒤를 잠그고서 자를 들이밀어 1mm만 넘으면 머리통에 구멍을 내시더군. 사랑도 살림도 삶도 가르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던 지난날 우리 민낯이다. 위에서 힘으로 누르거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라는 굴레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나는 2mm가 더 길다면서 머리에 구멍이 났다. 다른 동무는 이날 곧장 머리집(이발소)에 가서 구멍난 티가 안 나도록 하려고 머리를 거의 박박 밀더라. 난 구멍난 머리인 채 배움옷(교복)차림으로 끝까지 버티었다. 보다 못한 배움터 길잡이가 “야, 넌 머리 깎을 돈이 없냐? 보기 흉하다. 내가 돈을 줄 테니 머리 좀 깎아라.” 하기에 “보기 흉하게 머리에 구멍낸 분이 누구시죠? 보기 흉한 줄 알면, 이런 보기 흉한 짓을 처음부터 말아야지요.” 하고 나즈막하게 읊으며 노려보았다. 머리에 구멍까지 낸 분들이 “요놈 말하는 싸가지 봐라!” 하고 손찌검을 하려고 들면 곧장 걸상을 집어들어 먼저 후려칠 생각까지 했는데, 숲노래 씨가 대든 말에 몽둥이를 들거나 손찌검을 한 분은 고맙게도 없었다. 1994년 2월 즈음에 이르자 구멍난 데가 조금은 찼고, 이제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카락을 손질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문득 “아, 사내로서 머리카락을 언제 길러 보나? 어쩌면 딱 이때만 머리카락을 기른 채 보낼 수 있는지 몰라.” 싶어서 머리손질을 안 했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그냥 두었다. 이러던 어느 날 인천 시내버스를 타다가 “뭐여? 남자가 불량스럽게 왜 머리가 길어? 우리 버스엔 불량학생 안 태워!” 하면서 앞문을 쾅 닫아 그만 쫓겨났다. 이른바 ‘승차거부’이다. 떠밀려 쫓겨나서 길바닥에 주춤주춤 섰다. 한동안 멍했다. “아니, 내가 무슨 마틴 루터 킹 목사야? 아니아니, 1994년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웬 버스 승차거부? 무슨 일이지?” 더 생각해 보았다. “여학생은 다 긴머리인데, 그럼 여자는 몽땅 불량학생이란 뜻이야? 구멍난 자리를 덮을 만큼 기르느라 어깨에 살짝 닿을 만한 머리카락인데, 이 머리카락이 길다고? 무엇보다 겉모습만으로 누가 불량하고 우량하고를 어떻게 갈라? 말이 돼?” 이날부터 버스를 안 타기로 했다. 그냥 걸었다. 여느때에도 한 시간 길은 으레 걸었으니, 두 시간 길도 기꺼이 걷기로 했다. 가만 보니 “긴머리 사내”를 보는 둘레 눈길이 따가웠다. “넌 왜 불량하게 머리를 길러?”라든지 “네가 락가수라도 돼?”라든지 “70년대 장발족도 아니고, 뭐 하니?” 같은 말을 날마다 뻔질나게 들었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마을 어린이를 가르쳐서(과외) 곁돈(용돈)을 벌어 책값으로 쓰곤 했는데, ‘긴머리’가 되고 보니 모든 가르침(과외) 자리를 잘렸다. 찻집도 술집도 긴머리인 사내는 곁일꾼으로 안 받겠더란다. 골프공을 줍는 곳에서조차 안 받더라. 1994년 한 해는 곁일자리가 하나도 없는 채 빠듯하게 열린배움터(대학교)를 다녔다. 이듬해 1995년은 열린배움터가 너무 엉터리라고 느껴 그만두기(자퇴)로 마음을 먹었고, 마지막이라 여기며 신문사지국에 갔더니 “엥? 넌 왜 머리가 길어? 이런 불량한 젊은이가 새벽마다 신문을 돌릴 수 있겠어? 뭐, 새벽에 신문을 돌리면 볼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괜찮다만, 하루라도 빠지면 안 돼!” 하면서 받아주었다.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 자리를 얻은 뒤에 대학도서관 곁일자리를 얻었고, 대학구내서점 곁일자리까지 얻었다. ‘신문배달부로 일하는 젊은이라면 긴머리여도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 숲노래 씨는 긴머리로 살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지만, 마침종이(졸업장) 없이 일하려 생각했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는 눈길을 고분고분 따를 마음이 없었기에, 1993년 11월 그날, 머리치기롤 겪으며 구멍난 날부터 머리카락이 마음껏 자라도록 둔다. 우리는 긴머리 대머리 짧은머리가 아닌 속마음 속사랑 속꿈을 바라보고 나눌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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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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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2.6.14.

아무튼, 내멋대로 9 끼니



  ‘하루세끼’는 많을까, 적을까? ‘하루두끼’라면 배고플까? ‘하루한끼’라면 굶다가 죽을까? ‘이틀한끼’나 ‘사흘한끼’나 ‘이레한끼’는 사람을 들볶으려는 짓일까? 1996년 2월 어느 무렵 여드레 즈음 굶다가 한끼를 누린 적 있다. 그때는 싸움판(군대)에 끌려가서 밑바닥(이등병)을 기었는데, 내가 깃든 곳(강원 양구 동면 원당리 백두산부대 소총중대)은 한 달 뒤에 비움터(비무장지대)로 들어가서 여섯 달 동안 꼼짝을 안 한다고 했다. 그때 윗내기(고참)는 서둘러 말미(휴가)를 얻으면서 자리를 비웠고, 아직 뭐가 뭔지 모르던 밑바닥으로서 여드레에 걸쳐 혼자 밤샘(보초·야간근무)에 낮샘(보초·주간근무)을 잇달아 맡아야 했다. 요새야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없을는지 모르나 예전에는 이런 일이 흔했다. 여드레를 밥도 잠도 쉼도 없이 보내며 “아, 이대로 죽는가? 참 재미난 개죽음이로구나. 굶는데다가 잠도 못 자고 죽는다니!”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용케 안 죽을 뿐 아니라, 여드레를 암것도 안 먹는데 그리 안 힘들 뿐 아니라, 잠을 못 자는데 썩 졸립지 않더라. 수수께끼였다. 안 먹고 안 자는데 왜 안 힘들지? 1997년 12월 31일에 드디어 싸움판에서 벗어나고 나서, 1998년 1월 4일부터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했는데, ‘하루한끼 + 토막끼’로 살았다. 새뜸을 다 돌린 아침에 일터 사람이 다같이 모여 누리는 밥차림이 ‘하루한끼’요, 저녁 즈음 뭔가 얻어먹을 수 있으면 토막끼로 여겼다. 일삯으로 32만 원을 받고, 그때 외대학보사나 몇 군데에 글을 실으면서 한 달에 20만 원 즈음 글삯을 벌었으나 16만 원을 고스란히 우체국에 넣고(적금), 다른 돈은 죄다 책값으로 썼다. 버스도 전철도 안 타고 자전거로 다니거나 걸었다. 라면 두 자루 사먹는 값이면 책 한 자락을 살 수 있다고 어림하면서 ‘하루한끼’로 보내었다. 1999년 8월에 보리출판사에 들어가서 일삯 62만 원을 받을 적에는 우체국에 30만 원을 넣었고, 일삯을 토막낸 30만 원을 책값으로 삼았다. 2만 원은 보리술값. 곁일로 얻는 글삯도 모조리 책값이었다. 펴냄터에서 일하다가 저녁에 ‘작가 선생님 접대’를 맡으면 밥값을 굳힌다. ‘하루세끼’를 싫어한다기보다 ‘하루세끼’를 누리면 자꾸 졸음이 쏟아졌고, ‘하루세끼’를 할 만한 살림돈이 없었다. 앞날을 헤아린 목돈으로 토막을 내어 넣어서 잠갔고, 책값으로 몽땅 썼으니까. 2020년 즈음까지 ‘하루한끼 또는 하루두끼’라는 살림살이를 듣는 이웃은 “건강을 생각하나요?”라든지 “그렇게 가난하나요?” 하고 묻다가 “하루 한두끼로는 몸이 망가지지 않나요?” 하고 묻는다. 그러나 하루두끼보다 하루한끼일 적에 몸이 한결 튼튼하다고 느껴 왔다. 하루한끼보다 이틀한끼나 사흘한끼일 적에 넋이 밝게 깨어난다고 느껴 왔고, 나흘한끼나 닷새한끼쯤이라면 우리 모두 착하고 아름답게 살림길을 지을 만하고 느낀다. 요즈막 들어서 ‘간헐적 단식’이라든지 뭔가 어려운 말로 ‘일부러 굶기’를 하는 분이 부쩍 늘어난 듯하다. 그런데 그저 굶기만 하면 참말로 몸이 망가진다. 숲 한복판에 깃들어 고요히 꿈을 그린다든지, 풀꽃나무를 벗삼아 도란도란 이야기한다든지, 바다에 풍덩 안겨 가만히 바닷빛을 머금는다든지, 아이를 낳고 돌보면서 사랑꽃을 지핀다든지, 아름책을 곁에 두어 마음을 살찌우면서 하루한끼나 이틀한끼나 사흘한끼를 해야 비로소 마음이며 몸이 빛나면서 찌끄레기가 빠져나간다고 느낀다. 다만, 하루세끼를 챙기기에 나쁠 일이란 없다. 하루세끼 아닌 하루네끼나 하루닷끼를 즐길 적에도 매한가지이다. 몇 끼니를 누리든, 스스로 활짝 웃고 노래하면서 수다꽃을 피우면 걱정거리가 없다. 그저 때맞추어 자꾸 몸에 밥을 욱여넣으면 몸이 썩고 마음이 망가질 뿐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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