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한 권 알아보는 눈길

 

 

  모든 책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 돈을 들인대서 모든 책을 사들일 수 없다. 새로 나온 책이라면 새책방에 주문을 넣으면 집에서 택배로 얼마든지 받는다. 그러나 판이 끊겨 사라진 책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판이 끊겨 사라진 책을 사고 싶다면, 이 책을 건사한 누군가 헌책방에 즐겁게 내놓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헌책방에 책을 내놓지 않으면, 판이 끊어진 책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책방지기는 책손한테 책을 판다. 새책방에서는 새책을 파고 헌책방에서는 헌책을 판다. 어느 책방에서는 책을 판다. 새책방에서는 늘 똑같은 책을 팔고, 헌책방에서는 늘 다른 책을 판다. 왜냐하면, 새책방에 놓는 갓 나온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이다. 아직 누구 손길도 타지 않은 새책은 모두 똑같다. 책손 손길을 탈 적에 비로소 다른 책이 되고, 다 다른 책손이 다 다른 넋으로 읽고 삭히는 동안, 다 똑같던 책에 다 다른 숨결이 깃들면서 다 다른 이야기로 피어난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다루는 헌책은 똑같은 책이 한 가지조차 없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즐거움을 누리며 읽은 책이니까.

 

  책을 한 권 알아본다. 책을 한 권 알아본 사람은 책을 한 권 장만한다. 책을 장만한 날 곧바로 끝쪽까지 다 읽을 수 있다. 바쁜 일이 있어 이레쯤 묵힌 뒤 읽을 수 있다. 사 놓고 깜빡 잊은 나머지 한 해가 지나서 읽을 수 있다. 장만하고서 곧바로 읽으려고 손에 쥐었다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구나 싶어 덮은 뒤, 열 해나 스무 해 지나서야 펼치니 비로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수 있다.

 

  책은 읽힐 적에 새책이다. 책은 누군가한테 읽히면서 비로소 새책이 된다. 열 해를 묵든 백 해를 묵든, 알아보는 눈길이 없으면 모든 책은 그저 묵은 책일 뿐이다. 먼지가 쌓이고 더께가 앉으면서 헌책이 되면, 책은 책으로서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러다가 누군가 이 책 한 권을 알아보고는 살며시 집어서 가만히 넘기면, 모든 헌책은 새책이 된다. 새롭게 빛나고 새삼스레 눈부시다.

 

  모든 책은 태어나면서 헌책이 되지만, 모든 책은 읽히면서 새책이 된다. 모든 책은 책꽂이에 꽂으면 헌책이 되나, 모든 책은 손에 쥐어 읽으면 새책이 된다. 4347.4.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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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때

 


  책을 읽으면 손때가 탄다. 새책도 헌책도 모두 손때가 탄다. 손때가 타지 않도록 책을 읽으려면 장갑을 끼면 된다. 장갑을 끼고 책을 읽으면 손때가 타지 않는다. 다만, 장갑을 낀 채 책을 읽으면, 책장이 하나씩 넘어가면서 책이 살짝 부푼다. 아무도 넘기지 않은 책은 부풀지 않고 납작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갓 만든 책마다 가볍게 붙은 책장을 톡톡 떼는 셈이다.


  새책방에 놓인 새책도 사람들이 살짝살짝 들추거나 살피려고 건드리면 손때가 탄다. 스스로 장만할 생각이 아니라면 새책방에 놓인 새책을 섣불리 건드리지 말 노릇이다. 왜냐하면, 내가 건드려서 손때를 남긴 책을 다른 책손이 장만하고픈 마음이 안 들 수 있으니까.


  헌책방에는 손때가 탄 책이 들어온다. 손때가 들어온 책을 읽거나 살필 적에는 여러모로 홀가분하다. 새책방처럼 내 손때가 더 탈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외려 헌책방에서는 손때가 탄 책이 읽기에 좋다. 한 차례나 두 차례 손때가 탄 책은 종이가 잘 넘어간다. 손때가 탄 책은 손끝을 베지 않는다. 손때가 안 탄 책은 잘못 넘기다가 손끝이 베어 핏물이 책에 뚝뚝 떨어지기도 하지만, 손때가 잘 탄 책은 잘못 넘기더라도 바스락 소리가 날 뿐 손끝을 베지 않고 종이도 구겨지지 않는다. 4347.3.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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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나 깃드는 헌책방

 


  헌책방이 나이를 먹는다. 헌책방을 다니는 나도 나이를 먹는다. 헌책방지기도 나이를 먹어, 처음에는 젊은이였던 분이 아저씨 되고, 처음에 아저씨로 만난 헌책방지기가 할아버지가 된다. 처음에 푸름이로 헌책방을 찾아가던 사람은 스무 살 앳된 젊은이였다가 마흔 살 넘어서는 아저씨가 된다. 헌책방마실 스무 해가 넘고 나이 마흔을 넘긴 이라면, 이제 이녁 아이 손을 잡고 헌책방마실을 한다. 앞으로 열 해가 지나고 스무 해가 더 지나면, 이녁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새로운 아이와 함께 헌책방마실을 할 수 있겠지.


  빛 한 줄기 흐른다. 마흔 살 먹은 책에 빛 한 줄기 흐른다. 내가 태어나던 무렵에 함께 태어난 책이 여러 사람 손길을 거치고 돌다가 헌책방 책꽂이에 살풋 놓인다. 긴긴 나들이 끝에 이곳에서 쉬는 셈일까? 이 작은 책은 내 품에 안길 수 있고, 다른 책손 품에 안길 수 있다. 이 책을 품에 안은 누군가는 한동안 즐겁게 책빛을 누리리라. 그러고는 다시 이 책을 넌지시 헌책방에 내놓아, 앞으로 스무 해 뒤쯤 누군가 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겠지.


  새로 나오는 아름다운 빛이 새책방마다 감돈다. 새로 나와 읽힌 책이 스무 해를 흘러 헌책방 책꽂이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스무 해가 더 흘러 다른 헌책방 책꽂이로 깃든다. 그리고 또 스무 해가 흐르면, 헌책방지기는 조용히 눈을 감을는지 모르고, 처음 이 책을 만지작거리며 아끼던 이도 늙은 헌책방지기와 함께 조용히 눈을 감을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이 책을 아끼면서 삶을 지었을까. 어떤 사람들이 그동안 이 책을 만나면서 웃고 울며 노래하고 춤추었을까. 이제 앞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새롭게 만나면서 마음밭에 씨앗 한 톨 심을까. 4347.3.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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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4-03-20 11:15   좋아요 0 | URL
맞네요 헌책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닌 거네요^^

숲노래 2014-03-21 09:00   좋아요 0 | URL
그럼요.
모두들 나이를 예쁘게 먹으면서
아름답습니다~
 

대학도서관이랑 헌책방이랑

 


  나는 1994년 봄에 대학교에 처음 들어갔습니다. 대학교 첫 학기에 도서관에 가서 아주 놀랐습니다. 대학도서관은 인천에 있는 도서관과 달리 ‘읽을 책’이 많으리라 생각했으나, ‘읽을 책’이 얼마 없습니다. 대학도서관은 대여점과 비슷하게 대중소설을 아무렇게나 빌려읽는 곳이거나 토익시험 공부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생각을 빛내거나 밝히는 책을 두루 누리는 곳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대학도서관이었습니다.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두었습니다. 대학도서관에 처음 발을 디딘 뒤 너무 서운하고 슬펐는데, 대학교 둘레에 헌책방이 있어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대학교 둘레 조그마한 헌책방은 그야말로 조그맣지만, 외려 대학도서관보다 책이 알찼습니다. 책이 알찰 뿐 아니라 아름답습니다. 대학도서관은 책을 살뜰히 건사하지 못해 많이 다치거나 찢어지기 일쑤요, 바라는 책을 찾아보기조차 어려웠고, 헌책방은 책을 알뜰히 다루면서 한결 깨끗하거나 정갈했어요. 내가 바라는 책을 헌책방에서 늘 찾아볼 수 있었어요. 네덜란드말 사전도 헌책방에서 세 가지를 찾아냈고, 네덜란드 동화책도 여러 권 찾았어요.


  대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책읽기를 바라지 않기에 대학도서관은 허술하거나 썰렁할는지 모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책빛과 책삶을 밝히거나 가꾸는 길을 걷고 싶지 않으니 대학도서관은 후줄근하거나 어설플는지 모릅니다. 토익시험과 학점따기에 얽매이는 대학생이 모이는 곳에서 도서관이 제몫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입시를 지난 뒤 취업으로 내다는 대학생이 그득한 곳에서 도서관이 도서관답거나 책터 노릇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는 내가 손수 가꿉니다. 우리 마을은 우리가 스스로 돌봅니다. 대학도서관은 대학생이 가꾸고, 동네책방은 동네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꾸밉니다. 4347.3.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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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을 밝히는 등불

 


  어두움이 내리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등불 하나 밝다. 다른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불을 껐지만, 헌책방 한 곳 등불이 홀로 밝다. 어두운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는 살짝 밝다가 이내 어둡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외려 더 어두워진다. 그렇지만 조그마한 헌책방에서 바깥에 매단 조그마한 등불은 조그마니 밝으면서 곱다. 이 등불을 바라보고 책빛마실을 하는 이들은, 조그마한 책방에 꽂힌 조그마한 책 하나를 만나면서 마음 가득 책빛을 담겠지.


  책은 밝은 낮을 더욱 환하면서 따사롭게 북돋운다. 책은 어두운 밤에 한 줄기 빛이 되어 길동무가 된다. 책은 밝은 낮에 기쁘게 웃는 노래잔치를 베푼다. 책은 어두운 밤에 싱그러운 풀벌레노래마냥 마음을 밝혀 고운 사랑씨앗 된다. 4347.3.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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