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밟기

 


  양말 안 신은 맨발 고무신차림으로 걷습니다. 누군가는 고무신 꿰고 멧길 오르내리면 미끄럽지 않느냐 묻는데, 미끄럽자면 무얼 신어도 미끄럽고 맨발이어도 미끄럽습니다. 누군가는 발바닥 안 아프느냐 묻는데, 발바닥 아프자면 맨발이건 고무신이건 두툼하거나 폭신한 신이건 다 아픕니다.


  맨발에 고무신으로 흙을 밟으면 발가락마다 흙 밟는 느낌을 물씬 받아들입니다. 풀을 밟으면 풀을 밟았구나 느끼고, 꽃송이 밟으면 꽃송이 밟는구나 느낍니다. 손가락으로 풀잎이나 나무줄기 쓰다듬을 때에 손가락이 풀잎이나 나무줄기를 느끼듯, 맨발에 고무신은 흙을 살가이 느끼고픈 마음입니다.


  길바닥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니라면 얼마나 즐거울까 꿈꿉니다. 길바닥이 흙바닥이라면 어른도 아이도 모조리 맨발로 다닐 텐데 싶습니다. 흙바닥인 길바닥이라면 누구라도 섣불리 병조각이나 못조각 떨어뜨리지 않을 테지요. 내가 다니는 길은 네가 다니는 길이요, 네가 다니는 길은 내가 다니는 길이니, 흙바닥을 맨 발바닥으로 다닐 수 있도록 서로 아끼고 보듬고 지키고 살피겠지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의 맨발로 흙일을 합니다.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며 흙을 돌볼 적에는 으레 맨손이요 맨발입니다. 어버이인 내가 아이를 씻기고 쓰다듬을 적에는 으레 맨손이요 맨발입니다. 내 손길이 아이들 살결에 닿습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 손길이 흙알갱이에 닿습니다.


  자꾸만 도시가 커지면서 자꾸만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바닥이 늘어납니다. 자꾸만 구두며 차린옷이며 늘어납니다. 자꾸만 자가용 늘고 승강기나 손전화 기계 늘어납니다. 흙을 밀어내고 지은 도시에는 시멘트만 어울린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흙과 어깨동무하는 도시일 때에 한결 아름답고 싱그럽구나 싶습니다. 숲을 짓이긴 채 세운 도시에는 아스팔트만 걸맞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흙과 사랑 나누는 도시일 때에 비로소 곱고 맑구나 싶습니다. (4345.10.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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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죽는 삶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이야기한다. 참말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도 누구나 아주 오래 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스스로 ‘백 살을 채 못 산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러한 생각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백 살 언저리에서 마감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니까,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여기기에, 나무도 스스로 이처럼 생각하고, 나무는 이러한 삶 그대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셈이라고 느낀다. 다른 목숨들도 이와 같겠지. 사람들 스스로 밝은 생각 아닌 어리석은 생각을 품으면서 지구별 목숨들 삶과 죽음이 엇갈렸으리라 느낀다.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 때문에 숱한 목숨이 아예 똑 끊어지듯 지구별에서 사라진다. 하나하나 따지면, 사람들 때문에 어느 목숨은 갑작스레 끔찍하게 늘어난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걷기만 할 뿐,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위를 걷지 못할까. 사람은 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꿈이 있는 한편, 사랑과 믿음이 있을까.


  요 며칠 나무를 깊디깊이 헤아려 본다. 호젓한 시골마을에서만 지내다가 퍽 먼길을 달려 도시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찾아가다가, 나무 한 그루 싱그럽게 자라기 힘든 그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니, 내 몸과 마음이 그리 홀가분하지 못해 자꾸 나무를 헤아려 본다. 이동안 ‘이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 삶을 떠올린다. 때로는 천오백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고, 어느 때에는 삼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지.


  나무들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들은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할까. 나무들 스스로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녁이 그동안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란 어린나무가 힘차게 솟아오를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유럽 나라는 모르겠지만, 중남미와 북미와 아시아와 호주와 아프리카에는, 또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까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먹고는 어느 날 문득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으리라 느낀다. 그렇지만, 남녘이나 북녘에는 천 살을 먹은 나무조차 마주하기 힘들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남녘이나 북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살아오며 스스로 북돋우고 살찌운 슬기를 둘레에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삶을 마감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나무를 만날 수 없다는 소리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슬기를 빛내는 나무를 꾸준히 마주하면서 사람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지만, 남녘과 북녘은 스스로 슬기를 키우지 못하고, 스스로 슬기를 밝히지 못하며, 스스로 슬기를 누리지 못하는 나날이라고 느낀다.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밝히지 못하곤 한다. 고작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월급봉투를 은행계좌로 받아서 ‘소비 쳇바퀴’를 돌 뿐이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한테도 똑같은 ‘대학입시 쳇바퀴’를 물려줄 뿐, 저마다 삶을 밝히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남북녘 두멧자락까지 폭탄과 미사일을 뿌려대며 잿더미로 만들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이 나라 골골샅샅 민둥산이 되도록 모든 숲과 마을을 깡그리 망가뜨렸을까.


  사람들은 ‘수목원’에 가면 마음이 탁 트이고 머리가 환히 열리다가는 생각이 곱게 빛난다고까지 말한다. 과학자 아닌 누구나 이처럼 말한다. 그러면, 수목원이란 무엇인가. ‘숲’이 수목원이다. 숲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다. 농약을 치는 숲이 아닌, 숲결 그대로 흐르는 숲이다. 벌레가 살고 새가 노래하며 짐승들 보금자리가 있는 숲이 바로 ‘수목원’이다.


  나무가 나무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사람들한테 마음과 머리와 생각을 열어 준다면, 가끔 자가용 몰고 찾아가는 수목원 아닌 집 둘레에서 언제나 누리는 숲이 있어야 마땅하다. 고속도로를 내거나 고속철도를 낸다며 멧자락에 구멍을 내거나 아스팔트길을 함부로 늘려서는 안 된다. 고속도로는 더 없어도 된다. 새로운 찻길은 더 없어도 된다. 숲이 있어야 하고, 나무와 풀이 자라야 한다. 발전소를 더 지어서 전기를 늘려야 한다지만, 발전소는 더 없어도 된다. 나무가 설 땅이 있어야 한다. 전자파 일으키는 송전탑이 멧줄기 따라 길게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송전탑이 들판 한복판에 우뚝 서서는 안 된다. 송전탑을 세우지 말고, 천 살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자라도록 해야 한다. 자가용을 몰지 말고 두 다리로 숲길을 걸어야 한다. 버스도 전철도 타지 말고 자전거를 몰며 숲 사이를 달려야 한다.


  미군기지가 떠난 넓은 터에 무슨무슨 시멘트건물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저 풀과 나무가 스스럼없이 자랄 숲을 일구어야 한다. 우리 삶터 곳곳에 빈터를 마련하고, 빈터가 바야흐로 숲이 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마을 어디나 ‘수목원’처럼 ‘숲’이 되어야 한다. 집집마다 나무를 보살펴야 한다. 어느 집이나 나무그늘을 누려야 한다. 학교도 관공서도 회사도, 무슨무슨 예술쟁이 작품을 건물 앞에 세울 일이 아니라, 씨앗 한 알에서 비롯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 한다는 소나무를 나무젓가락처럼 박지 말고, 나무다운 나무로 조그맣게 숲을 일구어야 한다.


  사람은 숲사람이다. 새는 숲새이고, 벌레는 숲벌레이다. 짐승은 숲짐승이다. 모든 목숨은 숲에서 비롯하기에 숲목숨이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려는 이들은 도끼로 나무를 찍기 앞서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지을 재료’ 아닌 ‘맑은 넋 깃든 숨결’을 얻기 때문에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을 지으려고 삼백 살이나 오백 살 먹은 나무를 벨 적에 누구라도 절을 했다면, 천 살이나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쓰러질 적에는 어떤 기운과 넋과 사랑과 숨결이 흘러나와서 우리한테 드리울까. 오늘 내가 씨앗 한 알 심으면 이천 해 뒤를 살아갈 내 뒷사람은 이 나무가 드리울 사랑과 꿈을 누릴 수 있을까.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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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세미꽃 책읽기

 


  나는 인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막상 사진찍기를 익힌 뒤에도 퍽 오랫동안 인천 골목동네를 굳이 사진으로 안 찍었다. 사진길을 걸은 지 열 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았다.


  인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찍기 앞서,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 골목동네를 ‘태어난 삶터이니 잘 안다’고 짐짓 여겼다. 그렇지만, 막상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메고, 큰아이를 한쪽 팔로 안으며 골목동네 구비구비 사진을 찍고 보니, 나로서는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에 새로운 삶이 한가득이었다. 태어나 살며 으레 스치거나 부대꼈다 하지만, 언제나 스치거나 부대끼기만 했을 뿐, 찬찬히 들여다보며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했다고 깨달았다.


  이무렵 새삼스레 골목꽃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골목동네에는 꽃이 곳곳에 많다고 느끼기는 했으나, 이 꽃들이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피어나며 어떻게 환한가를 깨우치지는 못했다. 무슨 꽃이 피고 지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호박꽃과 오이꽃과 수세미꽃이 피고 지는 줄 알아챈 때는 골목 사진을 찍은 지 한 해가 다 될 즈음이었다. 참 모르는 사람은 호박꽃이랑 오이꽃이랑 수세미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에 참외꽃이나 수박꽃을 더하면 더 알쏭달쏭하다 할 테지. 게다가 꽃 말고 푸른 잎사귀를 바라보며 알아채라 한다면, 덩굴줄기를 바라보며 알아채라 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도시내기는 두 손 두 발을 번쩍 들리라.


  이제 한 해를 꼬박 살아낸 고흥 시골집 텃밭 한 귀퉁이에서 수세미가 죽죽 덩굴을 뻗다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암꽃은 꽃가루받이를 하자마자 시들며 차근차근 열매를 키우고, 수꽃은 하염없이 노란 꽃송이를 벌린다. 암꽃은 시들기 무섭게 기나긴 나날에 걸쳐 수세미 열매를 커다랗게 키운다. 사람을 바라보든 꽃을 바라보든 어머니는 더없이 어머니답다. 어머니는 씨앗을 받아 열매를 키우면서 새로운 씨앗을 담을 뿐 아니라, 열매가 싱그럽고 구수하며 알차도록 온 기운을 쏟는다. 수세미 열매가 수세미 암꽃에서 비롯한 줄은 꼭지에 무늬만 남은 꽃차례 모양으로 알아볼 뿐이다.


  수세미 수꽃은 찬이슬이 듣든 찬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수세미 수꽃은 찬이슬도 찬바람도 견딘다 해야 하리라. 수세미 수꽃은 햇살은 햇살대로 먹고 바람과 이슬은 바람과 이슬대로 먹으면서 꽃가루를 알뜰히 건사한다고 할 만하리라. 튼튼하게 살아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면서 ‘열매 될 씨앗 밑거름’을 옹골차게 보듬는 나날을 누리겠지.


  내 어머니, 곧 우리 아이들 할머니는 ‘노란 꽃’이 예뻐서 좋다고 말씀한다. 큰아이는 노란 꽃을 볼 때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네.” 하고 말한다. 시골사람한테는 노란 꽃이 가없이 예쁘며 좋다고 여길 만하다고 비로소 느낀다. (4345.10.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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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빛 책읽기

 


  아직 세 식구였을 적 제주섬을 한 차례 찾아간 뒤 좀처럼 제주마실을 못 한다. 네 식구 되면 제주마실 하기 벅차리라 여겨 세 식구일 적 마실을 하기는 했지만, 참말 네 식구 되니,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가는 마실이 아니고서는 다 함께 움직이기는 만만하지 않구나 싶다.


  셋이 제주마실을 하던 그러께였을 텐데, 제주섬 어디를 보아도 억새가 참으로 많았다. 참말 사람들이 제주로 억새 구경하러 올 만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에도 억새가 퍽 많다. 곳곳이 억새밭이다. 빈논에도 억새밭이 이루어지고, 빽빽이 이어진 논과 논 사이에도 틈틈이 억새밭이 이루어진다. 바다를 메운 언저리라든지 마을을 못으로 바꾼 둘레에는 무척 넓게 억새밭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갈대밭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이웃 시골을 곧잘 찾아다니며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는데, 이 나라 어디를 가도 억새밭이 매우 많다. 그러니까, 제주섬에만 억새가 많이 자라지 않는다. 어느 시골에나 억새가 많이 자란다. 어느 시골에서도 억새 구경을 할 만할 뿐 아니라, 관광객으로 우글거리는 제주섬에서 벗어나 한갓진 여느 시골을 군내버스 타고 달리다가 알맞춤한 곳에 내려 천천히 거닐어 보면, 조용하고 산뜻하며 시원하고 푸른 들과 파란 하늘을 누리면서 억새밭을 즐길 수 있다.


  두 다리로 걷다가, 자전거로 달리다가, 군내버스로 지나가다가, 문득문득 생각한다. 억새밭 예쁘다 여기는 누군가 있어, 이 나라 시골마을 두루 돌며 다 다른 시골자락 다 다른 억새밭 어여쁜 빛과 그림을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로 엮어 선보일 수 있으면 참 멋지겠지. 이른바 ‘대한민국 억새마실’이랄까. (4345.10.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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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꽃 책읽기

 


  아이들 얼굴 크기만 한 꽃을 본다. 요즈막 어느 시골에나 흔하게 피는 코스모스 언저리에 코스모스하고 똑 닮았으나 잎사귀가 무척 큰 옅은분홍빛 꽃을 본다. 먼 데에 있어도 꽃내음이 물씬 풍긴다. 큰꽃이 맑은 내음 풍기는 들판에서 자라는 벼는 이 꽃내음도 담뿍 담으며 무르익겠지. 꽃내음 맡는 아이는 꽃내음도 함께 먹으며 자란다. 꽃잎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꽃바람도 함께 누리며 자란다. 큰아이가 큰꽃 한 송이를 꺾어 논둑길을 달린다. 머리에 핀을 꽂고 핀 사이에 꽃대를 물리며 꽃순이가 된다. (4345.10.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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