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듯 수수알 책읽기

 


  예전 사람들은 수수를 얼마나 심어서 먹었을까. 논자락이나 밭뙈기 끄트머리에 한 줄로 심은 수수가 나락과 함께 알이 터질듯 익는 모습을 보다가 생각해 본다. 다섯 살 큰아이는 수숫대를 바라보며 “옥수수야?” 하고 묻는다. 옥수숫대가 제 키보다 웃자라는 모습을 으레 보았고, 얼핏 본다면 옥수숫대를 닮았다 싶으니까 이렇게 묻는다. 거꾸로,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수숫대를 보고 수수빗자루를 만지며 살았으면 “야, 저기 수수네?” 하고 물었으리라 느낀다.


  수수가 들어간 밥그릇을 받아먹으며 자랐을 뿐, 내가 손으로 수수알을 심은 일은 없다. 수숫대 한들거리는 모습을 시골에서 살아가며 바라보지만, 이 수숫대를 낫으로 베어 수수알을 훑고 수숫대로 빗자루를 엮는 일은 해 보지 않았다.


  시골마을 할머니는 수수빗자루를 엮어 읍내 장마당에 한 자루씩 들고 나와서 팔곤 한다. 흙을 만지는 손으로 수수알을 심고, 수수알 베는 손으로 수수빗자루 엮으며, 수수빗자루 엮는 손으로 가을 열매를 갈무리해서 이듬해 봄에 다시 흙에 한 알 두 알 심는다.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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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꽃 책읽기

 


  부산으로 아이들과 마실을 온다. 멧꼭대기에 깃든 오래된 아파트에 잠자리를 얻어 여러 날 지낸다. 아이들과 가파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린다. 길바닥은 모두 아스팔트 아니면 시멘트이다. 흙으로 된 땅을 아직 못 본다. 아이들은 부산으로 마실을 오고 나서 여러 날 흙을 구경하지 못한다. 흙을 못 만지고 흙을 못 보며 흙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하고 동무하지 못한다. 흙이 없으니 흙에서 보금자리를 틀며 먹이를 찾는 들새나 멧새 또한 구경하지 못할 뿐더러, 들새와 멧새 노랫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어디에서나 온통 자동차 소리뿐이다. 가게마다 울려퍼지는 대중노래 소리뿐이다. 텔레비전 소리에다가 수많은 사람들 수다 떠는 소리에다가, 손전화 터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큰아이가 문득 “저기 꽃 있어!” 하고 외친다. 나도 보았다. 아버지인 나는 작은아이를 가슴으로 안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서 골목꽃을 보았다. 아이도 저 꽃을 보았구나. 몹시 반갑다. 그런데 아이는 참 뜻밖인 말을 한다. “이 꽃은 안 꺾을래요.”


  시골에서는 어디에서나 꽃을 본다. 어디에서나 꽃이 가득가득 무리지어 핀다. 아이는 언제나 꽃을 꺾는다. 꽃을 꺾으면 꽃들도 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 꽃들이 꺾이더라도 흙으로 돌아가 다시 고운 꽃으로 피어나는 줄 마음으로 알까.


  그저 시멘트뿐인 골목동네 계단 가파른 한켠 아주 좁다란 틈바구니에 꽃그릇 몇 놓인다. 이 꽃그릇에서 발그스름한 꽃이 눈부시게 빛난다. 꽃 앞으로 다가선 큰아이는 얼굴을 들이밀고 꽃송이에 코를 박는다. “아버지, 냄새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꽃이에요.”


  나도 네가 좋아. 나도 골목꽃이 좋아. 나도 꽃이 좋아. 나도 흙이랑 하늘이랑 바람이랑 햇살이랑 너희랑 모두 좋아. (4345.10.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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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락빛 책읽기

 


  봄빛과 여름볕을 물씬 머금은 가을열매인 나락을 벤다. 논에 모를 낸 차례에 따라 천천히 벼베기를 한다.벤 벼는 시골길 한켠에 죽 펼쳐서 해바라기를 한다. 올가을에는 빗방울 없고 구름만 살짝 흐르며 햇살이 곱게 내리쬐니 알알이 잘 여문다.


  아이들과 시골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다가 새 나락, 곧 햅쌀을 들여다본다. 길바닥에 구르는 나락알을 주워 보기도 한다. 큰아이는 “껍질을 까서 먹는 거야?” 하고 물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락알을 까먹는다. “아니야. 껍질째 먹어야지.” 하고 들려준다.


  해바라기를 하는 나락 곁을 지나가면 나락내음이 확 풍긴다. 봄빛을 먹고 여름볕을 마신 나락들은 가을 내음을 나누어 준다. 사람들은 밥을 지어 먹을 때에 봄을 먹고 여름을 마시고 가을을 누리는 셈이리라. (4345.10.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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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나무 가을 새잎 책읽기

 


  가을이 무르익는데 벚나무 가지에 새잎이 돋는다. 하나둘 떨어지며 앙상한 나무가 되던 벚나무에 싯푸른 새잎이 돋을 뿐 아니라, 하얀 꽃송이까지 맺힌다. 감나무에도 새잎이 돋는다. 감꽃까지 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넓적하며 싯푸른 감나무 새잎이 발그스름 익는 감알 곁에서 가을노래를 부른다.


  철이른 동백꽃이 한겨울에 봉오리를 터뜨리다가 그만 눈을 옴팡 맞기도 한다. 남쪽 나라이니까 이런 일이 있겠거니 싶으면서, 따사로운 햇살이 풀과 나무와 꽃한테 얼마나 고운 숨결이요 빛인가를 새삼스레 느낀다.


  어떤 목숨이든 햇볕을 쬐면서 살아간다. 어떤 목숨이든 물을 마시고 바람을 들이킨다. 어떤 목숨이든 흙에 뿌리를 내린다. 어떤 목숨이든 서로 사랑을 나누고 꿈을 피운다. 사람이란 무엇을 하는 목숨일까. 사람은 햇볕을 어떻게 쬐는가. 사람은 물과 바람과 흙을 어떻게 맞아들이는가. 사람은 사랑과 꿈을 어떻게 나누면서 삶을 짓는가. (4345.10.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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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04 13:53   좋아요 0 | URL
운치 있는 감나무를 보니 가을이 느껴집니다.
성묘하고 오는 길에 보게 되는 풍경 속에 감나무가 있곤 하지요.^^

숲노래 2012-10-05 07:54   좋아요 0 | URL
시골 감나무는
더 따스하게
서로를 헤아리도록 돕는구나 싶어요
 


 가을 들판 책읽기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에 다녀온다. 두 아이 모두 재채기를 하기에 천천히 달린다. 천천히 달리다가도 곧잘 선다. 곧잘 서서 누런 벼가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논둑길에서 자전거를 멈춘 다음 두 아이를 내린다. 두 아이더러 걷거나 달려서 가자고 말한다. 아이들은 가을 들판 논둑길을 마음 놓고 달린다. 작은아이 콧물이 많이 흘러 얼마 못 달리고 다시 태우고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살짝이나마 가을 들판을 함께 거닐며 달리는 동안 온몸에 가을내음이 스민다.


  벼내음을 맡고 풀노래를 듣는다. 볕내음을 쬐고 하늘노래를 듣는다. 봄이나 여름처럼 들새와 멧새가 숱하게 날아다니지는 않으나, 가을은 가을대로 환하고 따스한 빛살이 곳곳에 찬찬히 스민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 없어도 덥지 않은 날이다. 하늘에 살몃살몃 퍼지는 구름조각은 들판 빛깔을 머금으며 조금 노랗다.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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