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8) 발상

 

자신들과 아기를 위해서 평화롭고 정상적인 출산을 원하는 부부라면 마치 공장의 조립 라인과도 같은 데서 아기를 낳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메리 몽간/정환욱,심정섭 옮김-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샨티,2012) 60쪽

 

  “자신(自身)들과 아기를 위(爲)해서”는 “어버이와 아기를 생각해서”나 “엄마 아빠와 아기를 헤아려서”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평화(平和)롭고 정상적(正常的)인 출산(出産)을 원(願)하는 부부(夫婦)라면”은 “근심없이 옳게 아기를 낳고 싶은 부부라면”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아기를 낳고픈 두 사람이라면”으로 손볼 수 있고, “공장의 조립(組立) 라인(line)과도 같은 데서”는 “공장처럼 끼워맞추듯 하는 데서”로 손볼 수 있어요. “않을 것이다”는 “않는다”로 손질합니다.


  보기글을 잘 살피면 앞쪽에서는 ‘출산’이라 적고, 뒤쪽에서는 ‘아기를 낳겠다’라 적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출산’은 알맞지 않은 낱말이라 ‘해산(解産)’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한겨레는 예부터 아이낳기를 한자말로 가리킬 때에 ‘해산’이라 했지, ‘출산’이라 하지 않았어요. 참말 언제부터 ‘출산’이라는 한자말이 들어와서 오늘날처럼 널리 퍼졌을까요. 그나저나, ‘출산’이든 ‘해산’이든 이런 한자말이나 저런 한자말 사이에서 헤매기보다는 쉽고 알맞게 ‘아이낳기’나 ‘아기낳기’처럼 쓸 때에 한결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기를 낳으니 말 그대로 ‘아기낳기’예요.


  ‘발상(發想)’이라는 한자말은 “어떤 생각을 해냄”을 뜻한다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든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든지 “그런 케케묵은 발상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처럼 쓴다고 해요. 이 한자말 또한 쓸 만하니까 쓴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말뜻을 찬찬히 살피면 “생각을 해냄”입니다. 곧 ‘생각하기’를 한자말로 옮기면 ‘발상’이 되는 셈입니다.

 

 아기를 낳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 아기를 낳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 아기를 낳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아기를 낳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

 

  생각을 바꾸면 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발상의 전환”이 아닌 “생각 바꾸기”나 “생각 돌리기”나 “생각 고치기”나 “생각 거듭나기”가 됩니다. 생각을 새롭게 북돋우면 새로운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닌 “시대를 거스르는 생각”이나 “흐름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새날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거꾸로 가는 생각”이나 “엉뚱한 생각”이나 “엉터리 같은 생각”이 됩니다. 오래되었다고 낡지 않습니다. 새로 나왔어도 낡을 수 있고, 오래되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케케묵은 발상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아닌 “그런 케케묵은 생각은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나 “그런 케케묵은 생각주머니는 이제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돼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스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과 동무랑 사랑스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빛내며 말을 빛냅니다. 생각을 가꾸며 말을 가꿉니다. 생각을 빛내기에 삶을 빛냅니다. 생각을 가꾸기에 삶을 가꾸어요.


  저마다 슬기롭게 생각하고 슬기롭게 살아가며 슬기롭게 사랑합니다. 누구나 참다이 생각하고 참다이 살아가며 참다이 사랑합니다. 생각이 삶이 되고, 삶이 말이 됩니다. 말은 삶으로 다시 이어지고, 삶은 다시 생각으로 이어져요. 내 말 한 마디에 사랑을 싣기에 내 삶 한 자락 사랑으로 꽃을 피웁니다. 내 글 한 줄에 꿈을 싣기에 내 삶 한 가락 사랑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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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와 아기를 생각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아기를 낳고픈 두 사람이라면, 마치 공장처럼 끼워맞추듯 하는 데서 아기를 낳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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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652) 식물적 1 : 식물적으로 그립다

 

나도 오늘은 아주 식물적으로 독방이 그립다
《문태준-가재미》(문학과지성사,2006) 25쪽

 

  ‘독방(獨房)’이란 혼자서 쓰는 방을 가리킵니다. 흔히 쓰는 낱말이니 굳이 다듬을 까닭이 없다 할 만하지만, 한자를 엮어 ‘獨(혼자) + 房(방)’을 이루듯, 한국말을 곱게 엮어 새말을 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글흐름에 맞추어 “혼자 쓰는 방”이나 “혼자 있는 방”처럼 풀어서 적을 수 있어요. “혼자 지낼 곳”이나 “혼자 머물 자리”처럼 적어도 잘 어울려요.


  ‘식물적(植物的)’이라는 낱말을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식물적’이 안 실립니다. 이와 맞선다 할 ‘동물적(動物的)’이라는 낱말은 실립니다. ‘동물적’을 국어사전에 싣는다면 ‘식물적’도 국어사전에 실을 만할 텐데, 뜻밖에 ‘식물적’은 국어사전에 안 실려요.


  그런데, ‘식물’은 무엇이고 ‘동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이 두 가지 낱말을 왜 써야 했을까요. 우리한테 이러한 낱말이 없으면 우리가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을까요.

 

 식물적으로
→ 식물처럼
→ 식물과 같이
→ 식물이 되어
→ 식물답게
 …

 

  ‘식물’이든 ‘동물’이든 써야 할 자리에는 알맞게 쓸 일입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구태여 안 써도 될 만한 자리에는 안 쓰면 될 노릇입니다. 두 낱말 뒤에 붙이는 ‘-的’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꼭 붙이고 싶다면 붙일 일이지만, 굳이 안 붙여도 된다면 안 붙이면 될 노릇이에요.


  “식물적으로 그립다”는 말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어떻게 그립기에 “식물적으로” 그립다고 말할 만한가요.


  사람이 사람 아닌 “식물이 되어” 어떤 삶이 그립다 하기에 “식물적으로”라 적었을 테지요. 사람이면서 사람 아닌 “식물처럼” 생각하며 무언가를 그립다 하기에 “식물적으로”라 적었겠지요.

 

 풀처럼
 푸나무와 같이
 들풀이 되어
 풀꽃답게

 

  보기글은 싯말입니다만, 싯말 아닌 여느 말이라 삼으며 가만히 헤아립니다. 어느 시인이 쓴 글이 아닌 내가 누군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이라 여기며 곰곰이 짚습니다. 시인 아무개가 쓴 글을 다듬는다기보다, 내가 내 좋은 동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에 어떤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고 찬찬히 가다듬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글다듬기란 없습니다. 아무개 글을 이렇게 고치는 글다듬기란 없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내 생각을 나타내겠다는 글쓰기입니다.


  곰곰이 짚으면, 바른 말도 고운 말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바로쓰기요 저렇게 해야 살려쓰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을 빛낼 때에 바로쓰기이고, 스스로 사랑을 나눌 때에 살려쓰기입니다.


  찬찬히 가다듬으면, 문학이란 아무것 아닙니다. 시라서 더 돋보이는 문학이 아니요, 이름난 시인이라서 더 훌륭한 문학이 아니에요. 신문이나 잡지에 안 실려도 즐겁게 누릴 글입니다. 책으로 안 나오더라도 예쁘게 읽을 글입니다.


  나는 스스로 풀이 되어 생각합니다. 나는 조용히 나무가 되어 헤아립니다. 나는 바야흐로 꽃이 되어 되짚습니다.


  싱그러이 살아서 숨쉰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상큼하게 빛나며 어여쁘다는 글을 헤아립니다. 해맑게 춤추며 노래한다는 이야기를 되짚습니다.


  무언가 꾸미려 하면 꾸미기만 할 뿐, 속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아끼거나 누릴 한국말은 몇몇 학자나 전문가가 빚거나 만들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갈 때에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시골 할머니가 되든 골목동네 어린이가 되든,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새말을 빚습니다. (4345.8.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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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오늘은 아주 들풀처럼 혼자 지낼 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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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8) 있다 11 :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미디어는 매체라는 본디 뜻과 대중매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손석춘-10대와 통하는 미디어》(철수와영희,2012) 34쪽

 

  “본(本)디 뜻”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처음 뜻”이나 “제 뜻”이나 “밑뜻”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이해(理解)하면 정확(正確)합니다”는 “생각하면 됩니다”나 “헤아리면 알맞습니다”로 손질해 줍니다.


  “-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말이라고”는 “모두 가리키는 말이라고”나 “모두 나타내는 말이라고”나 “모두 일컫는 말이라고”로 손질하면 됩니다. 뜻은 ‘가리키다’나 ‘나타내다’라고 말해야 알맞습니다. 또는 “어떠한 뜻이 있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뜻을 가지다”나 “뜻을 지나다”처럼 적는 일은 알맞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아요. 그러나 이 같은 말투는 나날이 퍼집니다. 영어에서 쓸 법한 말투를 어설픈 번역 말투로 함부로 쓰곤 해요.

 

 -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말
→ -라는 뜻을 모두 가리키는 말
→ -라는 뜻을 모두 나타내는 말
→ -라는 뜻을 모두 담는 말
 …

 

  뜻이 있고 생각이 있는 어른부터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슬기롭게 쓸 때에 아이들은 뜻이 있는 말을 배우고 생각이 있는 말을 익힐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뜻이 있는 말을 배우고 생각이 있는 말을 익힐 때에 스스로 삶을 슬기롭게 다스립니다. 말 한 마디에 뜻을 담지 못하거나 생각을 싣지 못하면, 이렇게 말하는 어른부터 슬기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더 좋은 뜻이나 더 나은 생각까지 바라지는 않아요. 흐름을 알맞게 살피고, 결을 올바르게 느끼며, 줄거리를 곱게 보듬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8.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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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매체를 뜻하는데, 요사이에는 대중매체도 함께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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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2) 일루의 1 : 일루의 희망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아직도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헬무트 뉴튼/이종인 옮김-헬무트 뉴튼,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을유문화사,2004) 85쪽

 

  “이런 상황(狀況)이었는데도”는 “이러했는데도”나 “이런 모습이었는데도”나 “이런 흐름이었는데도”로 손볼 수 있어요. “못하고 있었다”는 “못했다”로 손봅니다. ‘희망(希望)’은 그대로 써도 되고 ‘꿈’이나 ‘바람’으로 다듬을 수 있어요.


  흔히 ‘꿈’과 ‘희망’은 다른 낱말로 여겨 버릇합니다만, 둘은 아주 다른 낱말은 아닙니다. ‘꿈’은 한국말이고 ‘희망’은 한자말이에요. ‘희망’ 말뜻은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입니다. ‘꿈’ 말뜻은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꿈 (2) = 희망’이에요. 한국말 ‘꿈’은 한결 깊으면서 넓은 낱말이라 할 수 있어요. 보기글에서는 ‘꿈’으로 적을 만할 뿐 아니라, 이 대목에서는 ‘꿈 (3)’으로 보아야 한결 알맞으리라 느껴요.


  “일루의 희망”을 살펴봅니다. ‘일루(一縷)’ 뜻풀이를 찾아보면 “한 오리의 실이라는 뜻으로, 몹시 미약하거나 불확실하게 유지되는 상태를 이르는 말. ‘한 올’로 순화”라 나옵니다. ‘한 올’로 고쳐써야 할 낱말이라는 소리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한국사람이 쓸 만하지 않은 낱말이라는 뜻이고, ‘한 올’ 아닌 ‘일루’처럼 적바림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 한 가닥 꿈을 버리지 못하고
→ 가느다란 꿈을 버리지 못하고
→ 가느다란 줄을 버리지 못하고
 …

 

  국어사전을 살피면 “일루의 광명”이나 “일루의 잔명”이나 “현재로서 우리에게는 일루의 희망도 없다” 같은 보기글이 실립니다. 한국말로 알맞게 가다듬으면, “한 줄기 빛”과 “얼마 안 남은 목숨”이나 “이제 우리한테는 꿈이 조금도 없다”처럼 쓸 수 있어요.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이기는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두 번 거듭 헤아리면서 뜻과 느낌을 살릴 때에 슬기롭게 쓸 수 있습니다. 꿈이나 희망이 한 올조차 없다 하는 만큼, “한 줄기”조차 없거나 “한 가닥”조차 없습니다. 한 줄기나 한 가닥조차 없으니 “거의” 없거나 “제대로” 없거나 “조금도” 없는 셈입니다.

 

 보이지 않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잡을 수 없는 꿈을 잡으려 하고
 사라지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사라진 꿈을 붙잡으려 하고

 

  내 삶에 드리울 빛줄기를 생각합니다. 고운 삶줄기는 스스로 생각하며 빚습니다. 내 말에 비칠 빛줄기를 헤아립니다. 고운 말줄기는 스스로 헤아리며 이룹니다.


  덧없는 꿈이 아닌 맑은 꿈을 꿉니다. 부질없는 꿈이 아닌 사랑스러운 꿈을 꿉니다. 덧없는 말이 아닌 맑은 말을 바랍니다. 부질없는 말이 아닌 사랑스러운 말을 기다립니다. (4346.8.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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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아직도 한 줄기 꿈을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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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1) 야생의 2 : 야생의 땅

 

25명쯤 되는 우리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어느 강가에 있는 야생의 땅에 모였다
《아르네 네스와 네 사람/이한중 옮김-산처럼 생각하라》(소동,2012) 171쪽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어느 강가에 있는”은 “뉴사우스웨일스 주 어느 강가에 있는”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보기글에서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어느 강가의”처럼 적었을는지 모릅니다. 곧, 앞과 뒤 모두 토씨 ‘-의’를 적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뒤에는 토씨 ‘-의’를 안 넣었어요. 이 흐름을 잘 살피면, 보기글 앞쪽에도 토씨 ‘-의’ 없이 말끔하게 적을 수 있어요.


  차근차근 생각하면 ‘강가’나 ‘냇가’나 ‘물가’나 ‘바닷가’처럼 적을 수 있어요. 차근차근 생각하지 않으면 ‘강변(江邊)’이나 ‘천변(川邊)’이나 ‘해변(海邊)’처럼 적을 테고요.

 

 야생의 땅에 모였다
→ 들판에 모였다
→ 들녘에 모였다
→ 들에 모였다
 …

 

  글쓴이는 “야생지(-地)”나 “야생의 지(地)”라고 써서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기에 “야생의 땅”이라 적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야생의 소년”이나 “야생의 사상”처럼 으레 ‘-의’를 붙인 ‘야생 + 의’ 꼴을 쓰는구나 싶어요. ‘야생’이 “들에서 자라는”을 뜻하기에 ‘들’을 가리키는 앞가지 구실을 하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생의 땅”을 한국말로 적자면 ‘들땅’이 되는데, 들을 가리켜 ‘들땅’이라 하거나, 산을 가리켜 ‘산땅’이라 하지는 않아요. 그냥 ‘들’이라 하고 ‘산’이라 해요. 곧, 이 보기글에서는 “들에 모였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느낌과 뜻을 살피면서 ‘들판’이라 적을 수 있고, ‘들녘’이라 적어도 됩니다. ‘숲’이나 ‘풀숲’이라 적을 수 있겠지요. 어떤 들인가를 생각해 보면, “너른 들”이나 “조용한 들”이나 “예쁜 들”이라 적어도 잘 어울려요.


  생각을 할 때에 비로소 말이 말답습니다. (4345.8.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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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사람쯤 되는 우리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어느 냇가에 있는 들에 모였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869) 야생의 1 : 야생의 말

 

진정한 용사만이 야생의 말을 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용기가 없다면 모두 돌아가도 좋아
《류은-바람드리의 라무》(바람의아이들,2009) 107쪽

 

  ‘진정(眞正)한’은 ‘참된’으로 다듬습니다. “탈 수 있다는 건”은 “탈 수 있는 줄은”으로 손봅니다. “용기(勇氣)가 없다면”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씩씩하지 않다면”으로 손질해 보아도 됩니다. “알고 있겠지”는 “알겠지”로 손질합니다.


  ‘야생(野生)’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람”을 뜻한다고 해요. 국어사전에는 “야생 약초”나 “그는 야생의 짐승처럼 성질이 거칠었다” 같은 보기글이 실립니다. 그러니까, “야생 약초”는 “들약풀”이나 “들풀”이라는 소리이고, “야생의 짐승”은 “들짐승”이라는 소리예요.

 

 야생의 말을
→ 야생마를
→ 들말을
→ 들판에서 뛰노는 말을
→ 들에서 자라는 말을
 …

 

  여러 해 앞서 《야생초 편지》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무척 사랑받으며 앞으로도 널리 사랑받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름이 알맞지 않게 붙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야생에서 자라는 초”라 하여 ‘야생초’라 했을 텐데, 스스로 여느 사회 바깥에서 조용히 지내고자 하는 매무새라 한다면 ‘들풀’이라고 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야생에서 자라는 초”가 아니라 “들에서 자라는 풀”일 테니까요.


  이와 비슷하게 ‘야생화’이니 ‘야생의 꽃’이니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올바르지 않은 말마디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꽃은 ‘들꽃’입니다. 우리가 일본사람처럼 “野生の花”라고 이야기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야생’이나 ‘야생의’를 붙이는 말투는 나날이 늘기만 할 뿐, 줄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알맞고 올바르게 가다듬으려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이 엉터리가 되든 뒤죽박죽이 되든 마음을 쏟으려 하지 않습니다.

 

 야생 약초 → 들에서 캔 약풀
 야생의 짐승 → 들짐승

 

  보기글에 나오는 “야생의 말” 같은 말마디는 더없이 얄궂고 안쓰럽습니다. 차라리 ‘야생마’라고 해 주기라도 하지, ‘馬’가 아닌 ‘말’을 써 준다면서 “야생의 말”이라고 하니 그지없이 안 어울립니다. 아니면 ‘야생말’이라 하든지요.


  곰곰이 살폈다면 ‘야생말’이라 하지 않고 ‘들말’이나 ‘들에서 사는 말’이라 했으리라 봅니다. 사람들이 도시처럼 얽매인 곳에서 살지 않고 들판이나 산골처럼 홀가분하게 노닐거나 일하는 곳에서 산다 할 때에는 ‘들사람’이라 하면 되고요.

 

 들꽃 / 들장미 / 들국화 / 들풀 / 들나물 / 들고양이 / 들개 / 들사람

 

  우리 말 앞가지 ‘들-’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삶을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나타내며 나눌 말과 글을 예쁘게 헤아려 봅니다. 내 모습을 내 깜냥껏 내 이야기로 풀어낼 빛나는 길을 곱씹어 봅니다. 내가 누리고 아이들이 누릴 기쁜 삶자락을 어떤 손으로 어떻게 일구어 사랑스러운 삶터로 북돋우면 즐거울까 하고 찬찬히 짚어 봅니다.


  집오리가 있고 들오리가 있습니다. 집거위가 있고 들거위가 있습니다. 집고양이와 함께 들고양이가 있으며, 집짐승과 맞물려 들짐승이 있습니다. (4342.11.11.물./4345.8.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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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힘을 쓰는 사람만이 들말을 탈 수 있는 줄 알겠지? 참힘이 없다면 모두 돌아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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