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 한자말 173 : 외피(外皮)

 


이 모든 것은 다 공포의 표피에 불과하며,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외피(外皮)이고, 그 진짜는 도저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루이제 린저/윤시원 옮김-낮은 목소리》(덕성문화사,1992) 33쪽

 

  “공포(恐怖)의 표피(表皮)에 불과(不過)하며”라는 글월을 곱씹습니다. 낱말을 하나하나 따지면, ‘공포’는 한국말 ‘두려움’을 가리키고, ‘표피’는 한국말 ‘겉껍질’을 가리키며, ‘불과하며’는 ‘지나지 않다’ 그러니까 ‘-일 뿐’을 가리킵니다. 말뜻 그대로 한국말로 옮기자면 “두려움의 겉껍질일 뿐이며”인 셈이고, 한국 말투로 가다듬어 “겉으로 드러나는 두려움일 뿐이며”나 “껍데기일 뿐인 두려움이며”으로 새로 쓸 수 있어요. ‘도저(到底)히’는 ‘도무지’로 다듬고, ‘파악(把握)하기’는 ‘알기’나 ‘헤아리기’나 ‘종잡기’로 다듬어 줍니다.


  한자말 ‘외피(外皮)’는 “(1) = 겉껍질 (2) = 겉가죽”을 뜻한다 해요. 곧, ‘외피’는 한국사람이 쓸 말이 아닌 바깥말입니다. 한국말 ‘겉껍질’과 ‘겉가죽’을 밀어내며 함부로 쓰이는 바깥말이에요.

 

 외피(外皮)이고
→ 겉껍질이고
→ 겉가죽이고
→ 껍데기이고
→ 겉모습이고
 …

 

  껍데기 같은 바깥말에 휘둘리지 않기를 빕니다. 알찬 속살 같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기를 빕니다. 겉치레 아닌 속치레를 하고, 겉발림 아닌 속가꿈으로 말과 넋과 삶을 아름다이 빛낼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0.1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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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는 다 겉으로 드러나는 두려움일 뿐이며,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껍데기이고, 그 참모습은 도무지 알기 어렵습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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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결에 물든 미국말
 (669) 굿바이(good bye)

 

굿바이, 길었던 나의 봄이여
《타니카와 후미코/이지혜 옮김-편지》(대원씨아이,2012) 109쪽

 

  “길었던 나의 봄이여”는 “길었던 내 봄이여”나 “길었던 봄이여”처럼 적어야 알맞습니다. ‘나 + 의’ 꼴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투가 아주 널리 퍼져요. 어른도 어린이도 이와 같이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책에도 영화에도 ‘나의’가 나타납니다. 이제 이러한 말투를 한국 말투로 삼아서 써야 할까요. 이곳저곳에 수두룩하게 쓴다 하더라도 한국 말투가 아닌 만큼 올바로 가다듬어야 할까요.


  한글로 적은 ‘굿바이’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국어사전에서 이 낱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어사전에서 ‘good bye’를 뒤적여야 “안녕히 가세요, 작별 인사.”와 같은 말풀이를 찾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굿바이’라는 영어도 ‘나의’와 똑같이 널리 쓰여요. 사람들은 그냥저냥 한국말처럼 삼습니다.

 

 굿바이
→ 잘 있어
→ 잘 있으렴
→ 잘 지내렴
→ 어서 가렴
 …

 

  ‘굿바이’도 ‘good bye’도 영어입니다. 한국말이 아닙니다. ‘안녕’도 ‘安寧’도 중국말 또는 일본말 또는 한자말입니다.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은 “잘 가.”나 “잘 있어.”입니다. “잘 가셔요.”나 “잘 계셔요.”입니다. (4345.10.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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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라, 길었던 봄이여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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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61) 존재 161 : 분명히 존재

 

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타니카와 후미코/이지혜 옮김-편지》(대원씨아이,2012) 109쪽

 

  ‘그러하지만’을 잘못 간추려 적는 ‘하지만’은 ‘그렇지만’으로 바로잡습니다. “근본적(根本的)인 부분(部分)에서”는 “밑바탕에서”나 “처음부터”나 “깊은 뿌리에서”나 “저 깊은 곳에서”로 손볼 수 있어요. ‘분명(分明)히’는 ‘틀림없이’나 ‘어김없이’로 손봅니다.

 

 분명히 존재했다
→ 틀림없이 있었다
→ 어김없이 도사렸다
→ 꼭 감돌았다
→ 반드시 흘렀다
 …

 

  있기에 ‘있다’고 말하는데, 흐름이나 기운이나 느낌이 있다고 할 때에는 ‘도사리다’나 ‘감돌다’나 ‘흐르다’나 ‘맴돌다’ 같은 낱말을 넣어서 나타낼 수 있어요. ‘쌓이다’나 ‘고이다’나 ‘넘치다’ 같은 낱말을 넣어도 어울립니다.


  보기글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보였다”나 “어쩔 수 없는 것이 드러났다”처럼 적어도 돼요. ‘불거지다’나 ‘나타나다’나 ‘튀어나오다’같은 낱말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4345.10.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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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저 깊은 곳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 꼭 불거졌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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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9) 추수

 

현실을 추수하자는 뜻은 전혀 아니다
《손석춘-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수와영희,2012) 25쪽

 

  ‘현실(現實)’이라는 낱말은 따로 다듬을 까닭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흐름을 살피며 ‘오늘’이라 적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라든지 ‘어떤 틀’로 적을 수 있어요. ‘이 모습’이나 ‘오늘날 모습’이나 ‘오늘날 흐름’으로 적어도 돼요. ‘이 같은 삶’이라 적을 수도 있어요. ‘전(全)혀’는 ‘조금도’나 ‘하나도’로 손질합니다.


  보기글에 나타난 ‘추수’는 ‘追隨’를 가리키고, “뒤쫓아 따르다”를 뜻합니다. ‘가을걷이’를 가리키는 한자말 ‘秋收’도, ‘가을물’을 가리키는 한자말 ‘秋水’도 아니에요. 앞날 일을 미리 헤아려서 안다는 ‘推數’라든지, 더럽거나 보기 안 좋은 손을 가리키는 한자말 ‘醜手’도 아닙니다.


  한자말 ‘追隨’ 뜻풀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봅니다. “(1) 뒤쫓아 따름 (2) = 추축”이라 나옵니다. ‘추축(追逐)’을 다시 찾아보면, “(1) 쫓아 버림 (2) 친구끼리 서로 오가며 사귐 (3) 남의 뒤를 쫓아 따름”을 가리킨다고 해요. 그런데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추축’이라는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참말 있을까요. 이 한자말을 누군가 쓴다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현실을 추수하자는
→ 오늘을 그대로 좇자는
→ 어떤 틀을 따르자는
→ 다른 사람을 따라가자는
→ 흐르는 대로 두자는
 …

 

  “현실을 추수하자는”처럼 적는 글이나 읊는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옳고 바르게 알아들을 만할까요. 이처럼 말해야 할 까닭이 따로 있을는지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고서는 글쓴이 넋을 나타낼 수 없을는지요.


  한자말을 쓰는 일도 자유이고, 영어를 쓰는 일도 자유입니다. 다만, 글쓴이 혼자로서는 자유이지만, 이처럼 자유에 따라 펼치는 말글을 이웃이나 동무하고 널리 나눌 수 없거나 두루 나누기 힘들다면, 곰곰이 생각해야지 싶어요. 우리는 말을 왜 하나요. 우리는 글을 왜 쓰나요. 내 동무하고는 어떤 말을 주고받을 때에 즐거울까요. 내 이웃이랑 어떤 글을 나눌 때에 웃음꽃을 터뜨릴 만할까요. (4345.10.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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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삶을 그대로 따르자는 뜻은 조금도 아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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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7) -의 : 부모의 뒤늦은 게임공부

 

게임의 맛을 볼 대로 본 아이들과 부모의 뒤늦은 게임공부가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보는가
《편해문-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67쪽

 

  “게임의 맛”은 “게임 맛”이나 “게임을 하는 맛”으로 다듬습니다. ‘부모(父母)’는 ‘어버이’로 손볼 수 있어요. “게임공부(-工夫)”에서 ‘게임(game)’도 손질하면 한결 나을 테지만, 이 보기글을 쓴 분은 ‘놀이’와 ‘게임’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게임’은 그대로 두면서 ‘공부’만 손질해서 “게임 배우기”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뒤늦은 게임공부가
→ 뒤늦게 게임공부 하는 부모가
→ 뒤늦게 게임을 배우는 어버이가
 …

 

  이 글월을 살피면 토씨 ‘-의’가 두 군데 나옵니다. 앞쪽은 ‘-의’를 털면 쉽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뒤쪽은 글흐름이 살짝 어긋났어요. “(무엇무엇 하는) 아이들”하고 “부모의 (무엇무엇 하는 것)”으로 엮은 글인데, 뒤쪽을 앞쪽과 다른 짜임새로 적으면서 어긋나요. 뒤쪽도 앞쪽처럼 “(무엇무엇 하는) 부모”처럼 적으면 토씨 ‘-의’는 가볍게 떨어집니다. (4345.10.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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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맛을 볼 대로 본 아이들과 뒤늦게 게임을 배우는 어버이가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보는가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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