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9) -의 비행 1 : 브라질까지의 비행

 

하기야 브라질까지의 비행이 4시간으로 단축됐으니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거다
《조혜련-조혜련의 미래일기》(위즈덤하우스,2009) 184쪽

 

  ‘단축(短縮)됐으니’는 ‘줄었으니’나 ‘줄어들었으니’나 ‘짧아졌으니’로 손보고, ‘정(正)말’은 ‘참말’로 손봅니다. “살기 좋은 세상(世上)이 된 거다”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나 “살기 좋은 누리가 되었다”나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나 “살기 좋아졌다”로 손볼 수 있어요.


  한자말 ‘비행(飛行)’은 “공중으로 날아가거나 날아다님”을 뜻한다 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한국말로는 ‘날아가다’나 ‘날아다니다’요, 이를 한자말로 옮겨적어 ‘飛行’이 되는 셈입니다.

 

 브라질까지의 비행이 4시간으로 단축됐으니
→ 브라질까지 날아가는 데 4시간으로 줄었으니
→ 브라질까지 날아갈 때에 4시간이면 되니
→ 브라질까지 4시간이면 날아갈 수 있으니
→ 브라질까지 날아가자면 4시간이면 넉넉하니
 …

 

  예나 이제나 아이들은 ‘날다’라 말합니다. 새가 날고 벌레가 납니다. 나비가 날고 잠자리가 날아요. 아이들은 새나 벌레나 나비나 잠자리가 ‘비행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날기에 ‘난다’고 말합니다. 날아가는 모습을 가리켜 굳이 ‘비행한다’고 적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글재주를 부리건 글솜씨를 뽐내건 괜히 ‘비행한다’고 써야 하지 않아요.


  날아가는 탈거리를 한자로 적어 ‘비행기’가 됩니다. 굴러가는 탈거리를 한자로 적어 ‘자동차’가 됩니다. 이러한 한자말은 여러모로 쓸 만하니 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기울인다면 ‘비행기’와 ‘자동차’도 얼마든지 한결 쉽고 뜻이 또렷하다 싶은 새말을 짓겠지요. 그러니까, 사람들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기에 “브라질까지의 비행”처럼 토씨 ‘-의’까지 곁들여 ‘비행’을 말하는구나 싶어요.

 

 야간 비행 → 밤에 날기 / 밤 날기
 저공 비행 → 낮게 날기
 태평양 상공을 비행하는 동안 → 태평양 하늘을 나는 동안
 그 새는 공중을 향해 수직 비행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 그 새는 하늘로 곧장 꺾어 날아오른다
 그는 일 만 시간의 무사고 비행 기록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일 만 시간 동안 사고 없이 난 기록이 있다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하늘을 납니다. 하늘에서 날아다닙니다. 훨훨 날고 한들한들 납니다. 가볍게 날갯짓을 하고 홀가분히 날개춤을 춥니다. 나는 모습을 가만히 그리면서 내 말맛을 산뜻하게 돌볼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1.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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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브라질까지 날아가는 데 4시간으로 줄었으니 참 살기 좋아졌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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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0) 발견

 

세월이 한참 흘러 이제 그것이 나의 흥미를 끌고 있다. 바로 내가 흙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부터다
《카렐 차페크/홍유선 옮김-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 167쪽

 

  “세월(歲月)이 한참 흘러”는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란 무엇일까요. “흐르는 나날”을 가리키는 한자말인데, 이 낱말을 꼭 써야 할까 한 번쯤 짚을 수 있기를 빌어요. 흐르는 날이 한참 흐른다고 말하면 어딘가 얄궂거든요. 그래서 “한참 여러 날이 흘러”라든지 “한참 지나고 나서”라든지 “기나긴 나날이 흘러”처럼 새롭게 쓰면 한결 나으리라 느껴요.


  “나의 흥미(興味)를 끌고 있다”는 “나한테 재미있다”나 “내게 재미를 불러일으킨다”나 “내 재미를 끈다”로 손봅니다. “밟고 있다”는 “밟는다”로 바로잡고, ‘사실(事實)’은 ‘줄’이나 ‘대목’으로 다듬으며, ‘후(後)’는 ‘뒤’나 ‘다음’으로 다듬습니다.

  ‘발견(發見)’은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사물이나 현상, 사실 따위를 찾아냄”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말 ‘찾아냄’을 한자로 옮겨적으면 ‘發見’이 되는 셈입니다.

 

 흙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부터다
→ 흙을 밟는 줄 알아채고 나서부터다
→ 흙을 밟구나 하고 느낀 뒤부터다
→ 흙을 밟는다고 깨달은 뒤부터다
→ 흙을 밟으며 사는 줄 안 다음부터다

 

  사람들이 여러모로 쓰기에 한자말 ‘발견’이 이래저래 쓰인다고 할 만합니다. 사람들이 낱말뜻을 옳게 깨닫거나 살핀다면, 한자말 ‘발견’은 어느 곳에서 쓸 일이 없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발견’은 ‘찾아냄’을 가리킬 뿐, 딱히 다른 뜻이나 깊은 뜻이 없어요.


  이를테면, 국어사전에 “유적이 고고학자들에게 많이 발견되고 있다” 같은 보기글이 실리는데, 이 보기글은 글짜임부터 엉성합니다. 한국 말투라 할 수 없는 보기글입니다. “유적이 많이 나온다”라고는 적을 수 있지만, “유적이 고고학자들에게 많이 나온다”라고는 적을 수 없어요. 이 보기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나온다”를 가리키거든요. 그래서 글짜임을 통째로 바꾸어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많이 찾아낸다”나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많이 캐낸다”처럼 고쳐써야 알맞아요.

 

 수많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 수많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 수많은 새로운 이야기가 알려진다
→ 수많은 새로운 모습이 밝혀진다

 

  이 보기글도 국어사전에 실리는데, 여러모로 엉성합니다. ‘수많은 새로운’처럼 적으니 알맞지 않아요. “새로운 이야기가 수없이 알려진다”라든지 “새로운 모습이 수없이 밝혀진다”처럼 더 손질해야겠지요.


  낱말은 낱말대로 알맞고 바르게 적어야 아름답습니다. 말투는 말투대로 가다듬고 추슬러야 어여쁩니다. 어떤 토박이말을 찾거나 사랑하자는 소리가 아니에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바라보고 느끼며 깨닫자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새로 발견한 법칙” 같은 보기글은 “새로 알아낸 법칙”이나 “새로 찾은 법칙”이나 “새로 찾아낸 법칙”이나 “새로 깨달은 법칙”이나 “새로 캐낸 법칙”이나 “새로 밝힌 법칙”처럼 손볼 만해요. 아니, 이렇게 손볼 때에 비로소 빛이 납니다. 말빛이 환하게 퍼져요.


  생각해 보셔요. 처음부터 ‘찾아내다-알아내다-깨닫다-찾다-알다-밝히다-캐내다-캐다’ 같은 낱말로 나타낼 때에 환하게 빛날 말투인데, 한자말 ‘발견’이 엉뚱하게 끼어든 셈 아닐까 싶어요.

 

 자아를 발견하다
→ 나를 찾다
→ 나를 보다
→ 참나를 깨닫다
→ 참된 나를 알다

 

  ‘자아(自我)’라 하는 한자말도 헤아려 봅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꼭 쓰려고 한다면 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자말이든 저러한 한자말이든 굳이 안 쓰려고 한다면 안 쓸 수 있어요. 아니, 쓸 일이 없어요. ‘자아’라는 한자말로 어떤 모습 어떤 이야기 어떤 생각을 나타내고 싶은가를 살필 일이에요. 스스로 무엇을 보고 싶은가 살펴야 해요. 스스로 무엇을 알려 하는지 깨달아야 해요. 스스로 무엇을 느끼고 싶은지 둘러보아야 해요.


  참다운 나를 찾으며 참다운 말을 찾아요. 참다운 나를 생각하며 참다운 삶을 생각해요. 참답게 사랑할 길을 걸으며, 말도 넋도 삶도 아름다이 사랑할 수 있어요. (4345.1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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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나날이 흘러 이제 나도 그것이 재미있다. 바로 내가 흙을 밟으며 사는 줄 깨달은 뒤부터이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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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40) 속 38 : 우리의 직관적인 앎 속으로

 

그런 연습들 덕분에 우리는 긴장을 풀고 우리 몸속으로, 우리의 직관적인 앎 속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르네 네스와 네 사람/이한중 옮김-산처럼 생각하라》(소동,2012) 172∼173쪽

 

  “그런 연습(練習)들 덕분(德分)에”는 “그런 연습들 때문에”나 “그렇게 연습했기 때문에”나 “그렇게 해 봤기 때문에”나 “그렇게 해 봐서”로 다듬고, “긴장(緊張)을 풀고”는 “마음을 가볍게 하고”나 “마음을 조이지 않고”나 “홀가분하게”로 다듬습니다. 이제 “우리의 직관적(直觀的)인 앎”을 고쳐써야겠는데, ‘직관적’이 무엇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국어사전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먼저, ‘직관적’은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을 뜻한다 합니다. 그런데 ‘판단(判斷)’이란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이라 하고, ‘인식(認識)’이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이라 하며, ‘판정(判定)’이란 “판별하여 결정함”이라 하고, ‘분별(分別)’이란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름”이라 하고, ‘판별(判別)’이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구별함”이라 하고, ‘구별(區別)’이란 “또는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갈라놓음”이라 합니다. 또, ‘추리(推理)’는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서 생각함”이라 하고, ‘사유(思惟)’는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라 하고, ‘파악(把握)’은 “어떤 대상의 내용이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하여 앎”이라 하고, ‘이해(理解)’는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2) 깨달아 앎”이라고 해요.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여러모로 돌림풀이로 나타나는데, 가만히 간추리면 ‘생각하다’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생각을 나누고, 생각을 가르며, 어림해 보다가는, 깨닫는 길로 간다, 하고 이야기하는구나 싶어요. ‘판단’이니 ‘판별’이니 ‘구별’이니 ‘판별’이니 ‘파악’이니 ‘추리’이니 하고, 다 다르다 싶은 한자말을 쓰지만, 어느 한자말이든 ‘생각’과 ‘바라보기’를 가리켜요. 곧, ‘직관적’이나 ‘직관’이란 “(곧)바로 바라보며 생각하거나 깨닫는” 무엇을 가리킬 때에 쓰는 한자말이요, 굳이 이러한 한자말을 쓰기보다는 가장 쉽고 또렷하게 적을 때에 한결 나아요. 이 흐름을 살피면서 “우리의 직관적인 앎 속으로”는 “우리가 바로보며 알아차리고”로 고쳐쓸 수 있어요. “서로에 대(對)한 신뢰(信賴) 속으로”는 “서로를 믿을”로 고쳐쓰면 될 테고요. 다만, 이렇게 고쳐쓸 수 있되 글흐름을 다시금 살피며 새롭게 적어야지 싶습니다.

 

 우리의 직관적인 앎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우리들이 아는 것을 바로볼 수 있었다
→ 우리들이 무엇을 아는지 바로볼 수 있었다
→ 우리를 바로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서로를 믿을 수 있었다
→ 서로를 믿고 하나될 수 있었다
→ 서로를 믿으며 어우러질 수 있었다

 


  보기글을 적은 분은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해 봤기’에 ‘마음을 가볍게 추스르’면서 ‘우리 몸을 스스로 올바로 바라보고 살피’면서 ‘우리가 아는 것을 올바로 깨닫고 살필’ 수 있는 한편, ‘서로가 서로를 믿고 즐거이 어우러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느낍니다.


  마음을 꾸밈없이 나타내기를 빌어요. 참으로 내 마음이 어떠한가를 하나하나 환하게 그리면서 글을 쓰기를 빌어요. (4345.10.2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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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 봤기에 우리는 홀가분하게 우리 몸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바로볼 수 있고, 서로를 믿을 수 있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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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43) 쉽게 쓸 수 있는데 87 : 진지하게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아이들은 진지하게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말을 획득한다. 그리고 말을 획득함으로서 더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하이타니 겐지로/햇살과나무꾼 옮김-유치원 일기》(양철북,2010) 192쪽

 

  한자말 ‘진지(眞摯)하다’는 “마음 쓰는 태도나 행동 따위가 참되고 착실하다”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면 “진지하게 삶을 영위(營爲)  하는 가운데”는 무엇을 뜻할까요. “알뜰히 삶을 누리면서”가 될까요. “삶을 알차게 누리면서”가 될까요. ‘-하는 가운데’처럼 적는 말투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일본 말투 ‘-하는 中’을 잘못 옮긴 말투이기도 하고, 영어 현재진행형을 어설피 적바림한 말투이기도 합니다. “말을 획득(獲得)한다”는 “말을 얻는다”나 “말을 배운다”나 “말을 찾는다”로 손질합니다. “말을 획득함으로서”는 “말을 얻으면서”나 “말을 배우면서”나 “말을 찾으면서”로 손보고, “훌륭한 인간(人間)으로 성장(成長)한다”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란다”나 “훌륭하게 큰다”로 손봅니다.

 

 진지하게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 참다이 삶을 누리면서
→ 삶을 알뜰히 누리면서
→ 삶을 알차게 즐기면서
→ 삶을 알뜰살뜰 빛내면서
 …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쓰기에, 일본말이나 미국말(또는 영국말)로 된 책이 있으면 한국말로 옮깁니다.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 적부터 영어를 가르치도록 내몰지만, 초등학교 어린이나 고등학교 푸름이더러 ‘영어로 된 책’을 읽으라고 하지는 않아요. 한국사람이 읽는 책은 으레 한국말로 된 책입니다.


  그런데, 외국말로 된 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분들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익히거나 알차게 가다듬지는 못하기 일쑤입니다. 외국말은 알차게 배우거나 알뜰히 익힌다 하더라도, 막상 한국말은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말아, 애써 한국말로 옮겨서 적는 글이 엉뚱하거나 어설프곤 합니다.


  영어를 배우건 일본말을 배우건 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말을 못 하면서 영어만 잘 한다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한국말은 엉터리라 하거나 바보스럽다 하면서 일본말은 훌륭하다면 어떤 보람이 있을까요.


  영어사전을 엮는 영어학자도 한국말을 훌륭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학자가 한국말을 훌륭하게 하지 못하면, 영한사전(영어사전)을 어설피 엮을밖에 없어요. 영어 낱말과 글월을 한국 낱말과 글월로 어떻게 옮겨야 올바르고 알맞으며 아름다운가를 깨닫지 못하면, 영한사전은 죄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익히지 못하면, 대학입시 잘 시킨다는 영어 강사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지는 못하고 말아요.


  아이들이 ‘진지’하게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어떠할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러한 글을 썼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은 이러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썼을까요. 아이들한테 ‘너희는 이런 모습으로 보인단다’ 하고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적에도 이렇게 말하면 될까요. 생각을 빛낼 때에 가장 알맞고 가장 쉬우며 가장 아름다운 말을 빚습니다. (4345.10.2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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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삶을 알뜰히 누리면서 제 말을 찾는다. 그리고 말을 찾으면서 더 훌륭하게 자란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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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654) 미국적 1 : 미국적 신조

 

삐라의 내용을 들으면 미국적 신조는 결국 ‘미국인’에게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임하-적을 삐라로 묻어라》(철수와영희,2012) 421쪽

 

  “삐라의 내용(內容)을 들으면”은 어딘가 어설픕니다. 삐라는 종이쪽이기에 삐라한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없거든요. “삐라를 보면”이나 “삐라를 들여다보면”처럼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줄거리’를 뜻하는 한자말 ‘내용’을 살리고 싶으면 “삐라에 담긴 줄거리를 읽으면”이나 “삐라에 담긴 줄거리를 살피면”으로 손질할 수 있어요.


  ‘신조(信條)’는 ‘믿음’이나 ‘다짐’이나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결국(結局)’은 글흐름을 살펴 ‘곧’이나 ‘그러니까’나 ‘바로’나 ‘그예’나 ‘한낱’으로 다듬고, “미국인(-人)에게만 적용(適用)됨을”은 “미국사람에게만 어울리는 말인 줄”이나 “미국사람한테만 하는 말인 줄”이나 “미국사람만 살필 뿐인 줄”이나 “미국사람만 생각할 뿐인 줄”로 다듬습니다.

 

 미국적 신조는
→ 미국이 밝히는 다짐은
→ 미국을 이루는 생각은
→ 미국이 내세우는 믿음은
 …

 

  “한국적 사고방식”이라든지 “미국적 사고방식”처럼 말하는 사람이 차츰 늡니다. 이렇게 말할 만하기에 이렇게 말한달 수 있지만,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못하기에 “한국 넋”이나 “미국사람 생각”과 같이 말하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미국적 가치”라기보다는 “미국다운 값어치”요 “미국에서 손꼽는 값어치”라고 느껴요. 한국말은 ‘-다운’이나 ‘- 같은’입니다. 한국사람은 뜻과 느낌을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예전 한겨레도 ‘-的’이라는 한자를 쓴 일이 있다고 밝히기도 한다지만, ‘-的’이라는 한자는 한문을 쓰던 옛사람 가운데 아주 드물게 썼을 뿐입니다. 중국사람이 한문을 쓰니 중국사람과 생각을 주고받으려고 이런 한자 저런 한자를 썼을 뿐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끼리 생각을 주고받는 자리에서는 이런 한자도 저런 한자도 안 썼어요.


  한자를 써 버릇하는 이들이 ‘雜草’라는 한자말을 지어서 씁니다. 한자와 동떨어진 사람들, 이른바 여느 사람들은 ‘풀’이라는 한국말을 보드랍게 씁니다. 사람들은 그저 “풀을 뽑는다”고 했지 “雜草 除去”라 말하지 않았어요. 먹는 풀이 아닌 못 먹는 풀을 뽑을 때에는 따로 “김매기”라 했고, 시골에 따라 “지심매기”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한국말은 ‘김’이요 한자말이자 중국말이나 일본말은 ‘雜草’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답게 말합니다. 미국사람은 미국사람다이 생각합니다. 스스로 말을 빚고, 스스로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알맞게 빛낼 넋을 돌아봅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꾸자꾸 ‘-的’ 말투에 길들면서 얽매입니다. 스스로 새말을 못 빚고 스스로 새삶을 못 일구면, 앞으로는 온갖 곳에 ‘-的’이 들러붙으면서 그예 떨어뜨리기 몹시 힘들리라 느낍니다. (4345.10.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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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를 보면 미국이 밝히는 이야기는 그저 ‘미국사람’만 헤아릴 뿐인 줄 알 수 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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