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7) 최근

 

최근 몇 년간 영국에서 사진을 못 찍었다. 무척 기대가 된다
《앤 셀린 제이거/박태희 옮김-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 69쪽

 

  “몇 년간(年間)”은 “몇 해”나 “몇 해 동안”으로 손볼 수 있고, “기대(期待)가 된다”는 “설렌다”나 “기다려진다”나 “손꼽아 기다린다”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근(最近)’은 “(1) 얼마 되지 않은 지나간 날부터 현재 또는 바로 직전까지의 기간 (2) 거리 따위가 가장 가까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최근 경제 동향 / 최근 유행곡 / 최근에 우리 사회에는 / 최근 거리” 같은 보기글이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뜻과 쓰임새를 헤아리면, 이러한 보기글은 “요즈음 경제 흐름 / 요사이 유행노래 / 요즈막 우리 사회에는 / 가장 가까운 거리”로 손질할 수 있어요. 아니, 이처럼 손질한다기보다, 한겨레는 먼먼 옛날부터 이와 같이 말하며 살았어요. 한겨레 낱말은 ‘요즈음-요즘-요사이-요즈막’입니다.

 

 최근 몇 년간
→ 요 몇 해
→ 지난 몇 해 동안
 …

 

  한겨레는 스스로 제 말을 잊습니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제 글을 잃습니다. 요 몇 해 일이 아니요, 요즈음 일이 아닙니다. 요사이에 불거지는 일이 아니라, 먼먼 옛날부터 차츰차츰 쌓이거나 깊어지는 일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지식을 거머쥐던 이들은 이들대로 한겨레 말글을 갈고닦지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은 생각을 맑게 빛내지 못하고 마음을 환하게 돌보지 못합니다.


  재주로 부리는 말이 아니고, 솜씨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말재주나 글솜씨는 부질없습니다. 사랑으로 빚는 말이고, 꿈으로 엮는 글입니다. 사랑할 때에 아름답게 쓰는 말이고, 꿈꿀 때에 곱게 쓰는 글이에요. (4345.7.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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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해 영국에서 사진을 못 찍었다. 무척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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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5) 수심

 

그러는 동안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그의 눈에는 슬픔과 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홍재웅 옮김-그리운 순난앵》(열린어린이,2010) 108쪽

 

  “그의 얼굴은”과 “그의 눈에는”처럼 ‘그 + -의’ 꼴 말투가 잇달아 나옵니다. 어린이책 번역에 이 같은 말투가 나옵니다. 이 어린이책을 읽을 아이들은 저절로 ‘-의’를 손쉽게 쓰는 말투에 젖어들겠지요. ‘그의’뿐 아니라 ‘그녀의’ 같은 말투를 익숙하게 쓰겠지요.


  이 대목을 손질하자면 “그이 얼굴은”이나 “그 사람 눈에는”처럼 적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생각한다면, 한국 말투 빛깔을 살려 “그러는 동안 얼굴은”이나 “눈에는 슬픔과”처럼 적을 수 있어요. 굳이 이름씨를 드러내지 않는 한국 말투 빛깔이니까요. 한국 말투 빛깔을 생각하지 않고 ‘그’와 같은 이름씨(또는 대이름씨)를 자꾸 넣어 ‘문장 구조를 이루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의’ 같은 말씨가 들러붙는 얄궂은 모양새가 되고 말아요.


  ‘창백(蒼白)해졌고’는 ‘해쓱해졌고’나 ‘파리해졌고’나 ‘하얘졌고’나 ‘핏기가 가셨고’로 손질합니다.

 

手心 : 손의 한가운데
水心
 (1) 수면(水面)의 중심
 (2) 강이나 호수 따위의 한가운데
水深 : 강이나 바다, 호수 따위의 물의 깊이
水? = 물가
守心
 (1) 절조(節操)를 지키는 마음
 (2) 미리 막아서 지키려는 마음
垂心 : [수학] 삼각형의 각 꼭짓점에서 대변에 내린 3개의 수선이 서로 만나는 점
修心 : 마음을 닦음
殊甚 : 매우 심하다
愁心 : 매우 근심함
樹心 : 나무줄기의 가운데 단단한 부분

 

  국어사전에서 ‘수심’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한자말 열 가지가 나옵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이 으레 쓴다 싶은 한자말은 “물의 깊이”를 가리킨다는 ‘水深’ 한 가지이리라 느껴요. 그나마 이 한자말도 ‘물깊이’처럼 한국말로 예쁘게 빚으면 한결 나아요.


  다른 한자말 가운데 이럭저럭 쓰이는 낱말이 있다 할 만하지만, 그렇게까지 쓰이지는 않는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마음을 닦음”이나 “마음닦기”라 하면 넉넉하니까 ‘修心’라 할 까닭이 없어요. 이 한자말이든 저 한자말이든 사람들이 생각과 뜻을 서로 쉽고 알맞게 나타내거나 나눌 만한 낱말이 되지 못해요. 모두 겉치레 한자말이고, 몽땅 껍데기 한자말이에요.

 

 슬픔과 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

 

  한자말이니까 안 써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쓸 만하지 않으니까 안 쓸 뿐이에요. 물가이면 물가예요. 손 한가운데라면 손 한가운데예요. 꾸밈없이 말하고 스스럼없이 글을 쓰면 넉넉해요. 생각을 빛내면서 말을 하면 되고, 마음을 기울여 글을 쓰면 돼요.


  내 넋을 아름답게 북돋우면서 내 말마디를 아름답게 보살펴요. 내 얼을 슬기롭게 갈고닦으면서 내 글줄을 슬기롭게 갈고닦아요. (4345.7.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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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얼굴은 해쓱해졌고 눈에는 슬픔과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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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7) 있다 10 : 싸움을 하고 있는 중

 

가서 보니 순길이 부모님이 며칠째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수연-산동네 공부방》(책으로여는세상,2009) 101쪽

 

  한국말에는 없는 ‘과거분사’가 나날이 쓰임새를 넓힙니다. 한국말에 없는 ‘현재진행형’은 자꾸자꾸 깊이 파고듭니다. 오늘날 거의 모두라 할 만한 한국사람은 과거분사나 현재진행형 아닌 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줄 모릅니다. 스스로 한국말 빛깔이나 무늬나 결을 옳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옳게 가르치는 책이나 교과서나 어른이나 스승이 없다고 하지만, 누가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옳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때에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 길은 하나도 안 열립니다. 생각할 때에 천천히 말문을 틉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 말문은 하나도 안 트입니다.

 

 며칠째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x)
 며칠째 싸움을 하고 있었다 (x)
 며칠째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x)
 며칠째 싸우고 계신다 (x)
 며칠째 싸움을 하신다 (o)
 며칠째 싸우신다 (o)

 

  “하고 있는 中이었다”처럼 적는 현재진행형 꼴로도 얼마든지 내 뜻과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투를 펼쳐도 으레 알아듣습니다. 다만, 한국말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말이 아니요 한국말 무늬나 결이나 빛깔하고는 동떨어지지만, 사람들은 이 같은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이를테면, “그 선생님은 잘 가리켜요.” 하고 잘못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잘 가르친다’고 말하는 줄 알아듣습니다. “못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라든지 “그럴 것 같아요.”처럼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어도 사람들은 잘 알아들어요. “얼굴이 붉게 상기됐어요.”라든지 “혼자 독차지한다.”라든지 “아침조회”처럼 엉터리 겹말 또한 사람들은 잘 알아들어요.


  다만, 사람들은 이런 말 저런 말투를 들으면서 어디가 어떻게 왜 잘못되거나 어긋났는지 못 깨닫거나 모르곤 합니다. 못 깨닫거나 모르면서 그냥 쓰기도 하고, 잘 깨닫거나 알면서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고 있는 中이었다”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로 한자만 한글로 바꾼다 한들 올바르지 않습니다. ‘중’을 덜어 “하고 있었다”로 적든 “하는 중이었다”로 적든 올바르지 않아요. 올바르게 적자면 “한다”입니다. 보기글에서는 “싸움을 한다”나 “싸움을 하신다”로 적을 때에 올바릅니다. 더 단출하게 추슬러 “며칠째 싸우신다”로 적을 수 있어요. 뜻을 살려 “며칠째 싸움이 이어진다”라 적을 만하고, “며칠째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라 적어도 돼요.


  어떤 말을 하려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떤 뜻을 나타내려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투와 말마디가 얼마나 알맞거나 슬기롭거나 좋은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4345.7.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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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보니 순길이 부모님이 며칠째 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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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873) -의 승리 1 : 독일군의 승리를

 

마르크스는 독일군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 이유로 당시 그는 “독일군의 패배는 독일 사회주의운동을 20년 지연시키는 데 그치겠지만…” ..  《스즈키 주시치/김욱 옮김-엘리노어 마르크스》(프로메테우스출판사,20060 45쪽

 

  ‘승리(勝利)’나 ‘패배(敗北)’는 제법 흔히 쓰는 낱말입니다.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대로 둘 때에 한결 낫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보기글에서는 토씨 ‘-의’를 찰싹 붙인 채 쓰이니 찬찬히 살펴 알맞게 다듬어 줍니다.


  ‘기원(祈願)했다’는 ‘바랐다’로 손보고, “그 이유(理由)로”는 “그 까닭으로”나 “그러한 까닭으로”나 “왜냐하면”으로 손보며, ‘당시(當時)’는 ‘그때’로 손봅니다. ‘지연(遲延)시키는’은 ‘늦추는’이나 ‘미루는’으로 손질하고, ‘20년(二十年)’은 ‘스무 해’로 손질해 줍니다.

 

 독일군의 승리를 기원했다
→ 독일군이 이기기를 바랐다
→ 독일군이 이겼으면 했다
 독일군의 패배는
→ 독일군이 지면
→ 독일군이 진다면
→ 독일군이 졌을 때는
 …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 ‘이기다’와 ‘지다’뿐 아니라, 한자말 ‘승리’나 ‘패배’를 안다고 할 만합니다. 어른들은 두 갈래 말을 나란히 씁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투를 곁에서 들으면서 두 갈래 말투에 익숙해집니다. 이기니까 ‘이기다’라 할 뿐인데, 어른들은 이처럼 말하기보다 ‘승리’라는 한자말을 끌여들이기를 좋아합니다. 지니까 ‘지다’라 할 뿐이나, 어른들은 이 같이 말하기보다 ‘패배’라는 한자말을 애써 받아들이기를 즐깁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는 어른일 때에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푸름이로 살아가는 빛나는 넋한테 우리 어른들은 어떤 글을 써서 읽힐 때에 어여쁠까 헤아려 봅니다.


  ‘이기다’와 ‘지다’라는 한국말로는 어른들 넋이나 얼이나 뜻을 나타내기 힘들기에 ‘승리’와 ‘패배’라는 한자말을 끌여들여야 하나요. 한자말로도 모자라, 이제는 ‘윈(win)’과 ‘루즈(lose)’라는 영어까지 받아들여야 하나요.


  토씨 ‘-의’를 아무 곳에나 함부로 붙이는 일도 잘못이요, 알맞고 바르며 손쉽고 살가이 쓸 때에 넉넉하고 아름다울 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일도 잘못입니다. 삶을 살피며 말을 살핍니다. 삶을 가꾸며 말을 가꿉니다. 삶을 사랑하며 말을 사랑합니다. 삶을 이야기하며 말을 이야기합니다. (4340.1.2.불./4345.7.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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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독일군이 이기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독일군이 지면 독일 사회주의운동을 스무 해 늦추는 데에서 그치겠지만…”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0) -의 승리 2 : 노동자의 승리

 

공장주나 미술관의 이사보다 ‘내가 더 어엿한 남자다’, ‘남자답다’라고 사진을 보면서 말하는 거죠. 그래서 남자답다고 느낀다면, 노동자의 승리인 거죠
《아라키 노부요시/백창흠 옮김-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포토넷,2012) 134쪽

 

  “공장의 주”처럼 토씨 ‘-의’를 넣는 일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 살필 수 있으면 됩니다. “미술관의 이사”는 “미술관 이사”로 다듬을 수 있어요. “말하는 거죠”는 “말하는 셈이죠”나 “말하지요”로 손질하고, “승리인 거죠”는 “승리인 셈이죠”나 “승리이죠”로 손질합니다. ‘남자(男子)’는 그대로 두어도 되나, ‘사내’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낱말을 하나하나 살피고 나서 “노동자의 승리”에 드러나는 토씨 ‘-의’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한자말 ‘승리’를 넣으니 토씨 ‘-의’하고 잘 어울리고 마는데, 한자말 아닌 한국말 ‘이기다’를 넣을 때에도 토씨 ‘-의’하고 잘 어울릴까 하고 가누어 봅니다.

 

 노동자의 승리인 거죠
→ 노동자가 이긴 셈이죠
→ 노동자가 이겼다 할 테죠
→ 노동자가 이겼다 하겠지요
 …

 

  어떤 이는 “노동자의 이김인 거죠”처럼 글을 쓰리라 봅니다. “노동자의 짐인 거죠”처럼 글을 쓸 이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면 알아보기 몹시 힘들며, 말투도 썩 알맞지 않아요. 애써 한국말을 썼다지만, 말투를 나란히 가다듬지 못하면 영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한 사람이 쓰는 말을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쓰는 말은 낱말과 낱말을 묶어 이루어집니다. 낱말과 낱말은 말투로 엮습니다. 말투는 말결로 드러나고, 말결은 말무늬로 빛납니다.


  하나하나 아리땁게 추스릅니다. 빈틈이 없도록 가다듬는 낱말이나 말투나 말결이나 말무늬가 아니라, 내 넋과 얼을 곱게 밝히는 낱말이나 말투나 말결이나 말무늬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맞춤법 때문에 말을 가다듬을 일이 없습니다. 띄어쓰기 때문에 글을 추스를 일이 없습니다. 우리 말글을 바로쓰거나 옳게 쓰는 일이란, 남 앞에서 자랑한다거나 겨레얼을 빛내는 일이 아닙니다. 내 가장 좋은 사랑을 빛내면서 내 가장 맑은 꿈을 나누는 삶이 바로 ‘내 말글을 바로쓰거나 옳게 쓰는’ 일이에요. (4345.7.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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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주나 미술관 이사보다 ‘내가 더 어엿한 사내다’, ‘사내답다’라고 사진을 보면서 말하지요. 그래서 사내답다고 느낀다면, 노동자가 이긴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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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가운 상말
 608 : 백문불여일견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장씨는 마침내 깨달은 듯하다
《박기성·심병우-울릉도》(대원사,1995) 81쪽

 

  ‘백문(百聞)’은 “여러 번 들음”을 뜻하고, ‘불여일견(不如一見)’은 “제 눈으로 직접 한 번 보는 것만 못함을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합니다. 흔히 두 한자말을 나란히 붙여서 쓰곤 하는데, 한국말로 쉽게 적자면 “여러 번 듣기보다, 스스로 한 번 볼 때에 더 낫다”가 됩니다.


  굳이 한자말을 빌어 말해야 하지 않을 텐데, 애써 이런 한자말을 빌어서 이녁 뜻이나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기 일쑤입니다. 쉽게 말할 때에는 내 뜻이나 생각을 못 나타낸다고 여길까요. 쉽게 주고받는 말마디로는 깊거나 너른 마음을 못 담는다고 여길까요. 어떤 허울을 입혀야 그럴듯한 말이 된다고 여길까요.


  곰곰이 생각하면, 예전에는 이렇게 한자말로 허울을 입혔고, 요즈음에는 영어로 허울을 입힙니다. 쉬운 한국말이 아닌 쉬운 한자말로 껍데기를 들씌우다가, 쉬운 영어로 겉치레를 합니다. 맑거나 밝은 생각하고는 자꾸 동떨어집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 여러 번 듣기보다 한 번 본다고
→ 귀보다 눈으로 안다고
→ 귀 아닌 눈으로 깨닫는다고
→ 스스로 보아야 한다고
→ 스스로 겪어야 안다고
 …

 

  보기글을 생각합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비로소 한 번 보고서야, 장씨는 마침내 깨달은 듯하다”라든지 “한 번 보고 난 뒤에, 장씨는 마침내 깨달은 듯하다”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한 번 본 장씨는 마침내 깨달은 듯하다”라든지 “몸소 지켜본 장씨는 마침내 깨달은 듯하다”처럼 적어도 잘 어울려요.


  사람들마다 다 달리 풀어서 적을 만합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넋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마다 다 다른 예쁜 말씨로 적을 만합니다. ‘스스로 본다’와 ‘한 번 본다’와 ‘눈으로 보다’와 ‘몸소 겪다’ 같은 말마디를 꾸밈없이 넣을 수 있고, 이러한 말뜻으로 여러모로 알맞게 적을 수 있어요.


  생각을 하면서 말을 살찌웁니다. 생각을 할 때에 말이 살아납니다. 마음을 기울이면서 글이 빛납니다. 마음을 기울일 때에 글이 제 결을 찾습니다. (4345.7.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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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소 지켜본 장씨는 마침내 깨달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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