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과 글쓰기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나절에 글을 씁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새벽녘 고요하며 썰렁한 기운을 느끼면서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쓸 때에 즐겁습니다. 아니, 즐겁다기보다 기쁩니다. 기쁘다기보다, 뭐라 할까요, 내가 살아숨쉬는 한 사람임을 느낍니다.

 집살림을 도맡는 사람으로서 새벽녘과 아침나절이 아니고는 글을 쓸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다른 때에는 집식구하고 아이를 보듬는 데에 온힘을 쏟을밖에 없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랑 놀면서 하루해를 넘깁니다. 밥하기만으로도 하루해는 짧고 빨래하기만으로도 힘은 쏘옥 빠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에도 저녁나절 까무룩 곯아떨어졌다가도 이듬날 말짱하게 다시 일어납니다. 사람이라는 몸은 참 용하다고 느껴요. 이제 아무 일도 못하겠다 싶어 드러눕지만, 이듬날이 되면 새삼스레 다시 일어나서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거든요.

 어제는 느즈막히 곯아떨어진 아이가 오늘 따라 새벽에 일어납니다. 아빠는 새벽부터 글쓰기를 하려 했으나, 아이가 옆에 찰싹 달라붙으니 아무런 글쓰기조차 하지 못합니다. 하는 수 없이 셈틀을 끄고 쌀을 씻어 불리다가는 밥을 안칩니다. 날밤을 세 알 까서 밥물에 함께 넣습니다. 아이한테 능금 한 알 깎아 줍니다. 다시 셈틀을 켜고 깨작거리니 아이는 아빠 무릎에도 안기고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기도 합니다. 요 몇 분 동안은 아빠 뒤에서 아빠 사진기를 만지작거립니다. 아빠가 글쓰기를 몇 분이나마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는 셈입니다.

 이제 슬슬 날이 훤히 밝는 아침입니다. 아침을 차려야지요. 아이가 배고플 테니까요. 둘째를 배어 몸이 무겁고 힘든 엄마가 먹을 뜨거운 국도 끓여 놓고, 다 마른 빨래를 개며, 새로 쌓인 빨래를 해야지요. 우체국에 가서 책을 부쳐야 하는데, 우체국에는 언제쯤 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4343.12.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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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과 글쓰기


 헌책방에서 책을 살핍니다. 손님이 거의 없는 헌책방 골마루를 바지런히 오가면서 책을 돌아봅니다. 이 책도 반갑고 저 책도 고맙습니다. 눈이 맑게 트이고 넋이 밝게 열립니다. 왜 이 나라 많은 사람들은 이 애틋한 헌책방 헌책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 따위는 할 겨를이 없습니다. 내 눈앞에 놓인 이 살가운 헌책을 하나하나 쓰다듬지 못하니 서운하고 아쉬우며 안타깝습니다. 누리려 하지 못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누리라 할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나부터 즐거이 누리면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대로 책방마실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대로 책방으로 나들이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그때그때 제 삶에 걸맞는 책을 바라거나 찾습니다. 어릴 적부터 익히 가까이하던 책을 나이든 뒤에도 익히 가까이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읽기를 즐기며 컸으면 어른이 되어도 도서관을 사랑합니다. 여느 새책방에서 책읽기를 맛보며 자랐으면 어른이 된 뒤에도 여느 새책방을 찾아다닙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새삼스레 마주하며 살았으면 어린이일 때뿐 아니라 어른일 때에도 헌책방 헌책을 알아보거나 꿰뚫 수 있습니다.

 태어나기를 도시에서 태어날 뿐더러, 자라기를 도시에서 자라는 데다가, 어른이 되어 큰학교나 회사를 다닐 때에도 도시에서 잠자고 먹고 마시며 다니니까, 도시 삶에 익숙합니다. 웬만한 도시사람들은 시골살이를 모를 뿐더러 잘못 알거나 엉터리로 알거나 엉뚱하게 여기곤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헌책방 헌책을 제대로 톺아보지 못하는 대목을 섣불리 나무라거나 괜히 안쓰러이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헌책방마실을 했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고른 헌책들을 가방에 꾸리거나 끈으로 묶어 시골집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택배로 맡겨야 합니다. 큼직한 상자 하나에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나옵니다. 책값을 치르고 택배값을 냅니다. 괜시리 뿌듯합니다. 어쩐지 홀가분합니다. 배부르고 든든합니다.

 누군가는 값싸게 사들여서 좋다고 합니다. 아마 값싸게 사들여 좋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값싸게 사들여 좋다면 고물상이나 폐지상에서 짐차로 잔뜩 들여놓을 노릇입니다. 값싸게 사들여 좋은 책이라면, 언제나 잔뜩 사들일 텐데, 언제나 잔뜩 사들인 책을 집에 어떻게 건사하려나요. 책은 값싸게 사들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추억을 먹는다고 합니다. 아마 추억, 그러니까 옛생각을 떠올릴 만합니다. 그렇지만 옛생각이란 무엇이려나요. 지난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책을 읽었는가요.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오늘 읽을 책을 살 뿐입니다. 나는 오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오늘 손에 쥘 책을 장만할 뿐입니다. 판이 끊어진 책이건 거의 안 팔리거나 사랑받지 못한 책이건 무슨 대수랍니까. 내 가슴을 후벼파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책이면 다 좋습니다.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사랑스러운 넋을 실은 책이면 모두 반갑습니다. 내 가슴을 건드리지 못하는 책일 때에는 베스트셀러이건 스테디셀러이건 부질없습니다. 신문기자들이 신문 한 쪽에 대문짝만하게 소개글을 적어 주었다 해서 이런 책을 굳이 나까지 읽을 까닭이 없어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북돋우고자 책을 읽습니다. 나는 내 삶을 즐기고 돌보며 살찌우고자 책을 가까이합니다. 나는 내 삶을 믿고 살피며 좋아하니까 책을 마주합니다.

 헌책방은 사랑이고 헌책은 삶이며 헌책방 일꾼은 사람입니다. 사랑과 삶과 사람을 한 자리에서 곱게 맞아들이는 마실이 헌책방마실입니다. 고마우면서 반가운 책을 언제나 만나니까 나부터 고마우면서 반가운 넋을 담아 글 한 줄 끄적입니다.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운 책을 늘 얻으니까 나 스스로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운 얼을 실어 글조각 매만진답시고 바둥거립니다.

 돈 천 원으로 아주 눅은 책 하나 헌책방에서 장만하여 선물합니다. 때로는 몇 만 원에 이르는 책 하나 헌책방에서 사들여 선물합니다. 선물받은 분들은 천 원짜리 헌책이건 십만 원짜리 헌책이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돈값이 아닌 책을 받기 때문입니다. 낡거나 헐거나 반지르르하거나 번쩍이거나 하는 물건이 아닌 책에 깃든 이야기를 받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어릴 적부터 헌책방을 함께 다닐 수 있어 기쁩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어린 날부터 헌책방을 함께 다니며 헌책방 일꾼한테서 사랑을 받고 헌책방 다른 책손한테서 귀여움을 받으니 참으로 즐겁습니다.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헌책방마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대목 하나 고맙습니다. 김치를 담글 줄 몰라 김치 잘 먹는 아이한테 김치를 제대로 못 먹이는 바람에 할머니 두 분한테서 김치를 얻어 겨우 먹이지만, 자동차 굴릴 돈도 없고 자동차 굴릴 면허증조차 없으니 노상 아이가 두 다리 아프도록 걸리면서 마실을 하지만, 은행계좌는 텅텅 비어 얼음과자이든 까까이든 무어든 마땅히 사 주지 못할 뿐더러 시골집 썰렁한 방을 조금이나마 따숩게 덥히지 못하며 옷을 여러 벌 껴입히며 보내지만, 이렇게 엉터리 어버이이지만, 다문 한 가지 헌책방마실 하나는 살짝이나마 맛보도록 해 줄 수 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한테도 고맙고 땅과 바다에 계신 아버지한테도 고맙습니다. 누구보다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 주는 옆지기한테 고맙습니다. (4343.12.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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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빛과 글쓰기


 여러 날 바깥마실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니 물이 얼었다. 물꼭지를 더 틀었어야 하나 보다. 언 물은 좀처럼 녹아 주려 하지 않는다. 보일러는 돈다. 어디에서 얼었을까. 무거운 몸으로 집과 보일러방을 오가며 수선을 피우지만 끝내 두 손을 들고 자리에 눕는다. 이동안 날은 풀릴 낌새가 없이 새눈이 보슬보슬 내린다. 눈은 소리없이 내린다. 아니, 새눈은 아주 고즈넉히 내린다. 빨랫줄과 마당과 멧기슭과 나무와 텃밭과 계단논과 지붕에 아주 조용조용 내린다. 집하고 보일러방을 오가던 내 머리와 어깨와 발등에까지 사뿐사뿐 내린다. 어느새 되쌓이고 어느덧 뽀독뽀독 소리가 난다. 요사이는 시골에서도 사람 다니는 길이 아닌 자동차 다니는 길로 바뀐 나머지, 사람이 걸어다니면서 뽀독뽀독 소리를 즐기며 겨울눈을 맞아들이기 어렵다. 서울 같은 도시 찻길은 얼른 ‘화학방정식 소금’을 뿌리니까 눈밭이 없고, 인천 같은 도시 골목길은 바삐 연탄을 깨부수니까 눈밭이 없으며, 시골길에는 흙을 뿌리니까 눈밭이 없다.

 화학방정식 소금물이 흐르는 큰도시 찻길과 거님길은 질퍽질퍽하다. 이런 데에서 자칫 미끄러지면 옷을 모조리 버린다. 눈 내린 길을 거닐며 냄새도 좋지 않다. 연탄재로 얼룩덜룩한 길은 살짝 미끌미끌하지만, 이 길에서 미끄러져도 옷이 그닥 버리지는 않는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 눈 내음을 살짝 맡는다. 흙 깔린 시골길에서 넘어지면 툭툭 털면 그만이다. 곱다시 쌓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빛 하얀 솜이불 누리에서 내 눈빛이 맑을 수 있도록 다독이고 싶구나. (4343.12.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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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옷과 글쓰기


 엄마랑 아빠랑 마실을 나온 지 사흘째, 바깥사람을 잔뜩 만나며 아침부터 쉴새없이 놀던 아이가 저녁을 먹을 무렵 금세 곯아떨어진다. 아침잠이 거의 없고 낮잠은 아예 없다시피 하는 아이는 배가 꽤 고플 텐데 이렇게 밥자리에 앞서 곯아떨어지곤 한다. 아빠는 아이를 안고 밥집으로 들어선다. 스물아홉 달째 살아가며 키가 제법 큰 아이는 걸상 둘을 옆에 붙인 다음 머리를 아빠 허벅지에 올려야 비로소 눕힐 만하다. 한 시간 남짓 이렇게 눕혀 놓는데 허벅지 눌리는 무게가 퍽 나간다. 아이는 하루하루 새롭고 새삼스레 자랄 테니까. 허벅지 눌리는 무게를 가늠하면서 우리 아이가 어느 만큼 더 자랐는가를 곱씹고,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내가 이 아이 나이만 하던 어린 나날 내 어버이는 나를 돌보느라 얼마나 속을 썩이거나 애를 먹였을까 하며 돌아본다. 아이가 꽤 짓궂다 싶도록 말썽을 부린다든지 말을 안 듣는 모습이란 아이가 나쁜 넋이라서가 아니라, 아이 나름대로 힘들거나 고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추스른다. 아빠가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한결 살갑거나 따스히 해 주지 못하는 일이 많으니까.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한다면서 아이랑 더 놀지 못하는 한편, 아이 손을 잡고 멧길 따라 숲마실 하기도 제대로 못하니까.

 허벅지에 아무 느낌이 없을 무렵 아이 머리를 걸상에 내려놓는다. 고이 잠든 아이는 깨지 않는다. 함께 밥자리에 있던 분이 겉옷을 벗어 아이한테 씌워 주었다. 밥집에 들어왔기에 겉옷을 벗을 만하기도 했는데, 애 아빠는 따로 겉옷을 입지 않았다. 더위도 잘 타고 추위는 잘 안 타며 가방 짐이 무겁다면서 겉옷을 잘 안 입는다. 이러다 보니, 이렇게 겨울날 밖에서 아이가 잠들었어도 아이를 감싸 줄 너른 품 옷이 없다.

 아이도 알겠지. 제 아빠가 겉옷 없이 살며 제 몸을 한껏 따스히 보듬지 못하는 줄을. 아이는 아이 스스로 더 튼튼해지거나 씩씩해지거나 다부지게 살아야 한다고 시나브로 알아채겠지. 제 두 다리로 일찍부터 우뚝 서면서 제 길을 걸어야 하는 줄을. (4343.12.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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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와 글쓰기


 흔히들 ‘아끼거나 어루만지며 살아가기에도 짧은 삶’이라 하지만, ‘아끼거나 어루만지며 살아가기에 알맞춤한 삶’이 아닌가 싶다. 오래 산다고 더 즐겁지 않으나, 짧게 산다고 덜 즐겁지 않으니까. 예쁘고 착하게 살아가면 즐거운 나날이니까.

 내 삶을 들여다보며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는 가운데 맑게 웃으면 고맙다. 책이란 무엇이고 삶은 또 무엇이며 글쓰기는 참말 무엇이겠는가. 어머니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꾸리는 삶과 보듬는 사랑과 빚는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어머니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어머니들한테 하루란 어떠한 나날인가.

 얼마 앞서 아이랑 둘이 사흘 동안 서울마실을 하면서 자주 퍽 오래 안고 걸었다. 아이가 힘들어 하니까 안지 않을 수 없다. 아빠는 앞과 뒤로 멘 가방이 제법 무겁다. 어깨가 눌리는 무게를 느끼지만, 이렇다 해서 고단하여 걷기 힘들다는 아이보고 “힘들지만 더 걸어 보렴.” 하고 말할 수 없다. 삼십 분쯤 ‘아이가 앞을 보도록 안으’면서 걷다가는, 십 분쯤 아이보고 아빠하고 손 잡고 걷자고 말한다. 둘레 사람들은 날이 추우니 옷을 꽁꽁 싸매듯 입으며 걸어다니지만, 애 아빠는 겉옷을 훌러덩 벗고 싶다. 땀줄기가 등판으로 줄줄 흐른다.

 함께 마실을 오느라 애쓴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에서 가까스로 잠든다. 시외버스 기사가 버스를 너무 거칠게 모느라 아이 속이 메스꺼울까 걱정스럽다. 아이를 아빠 무릎에 눕힌다. 사십 분 남짓 이렇게 있다가 내릴 즈음 아이를 옆자리에 눕히고는 가방을 챙긴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안 깬 아이였는데, 막상 버스에서 내리니 잠에서 깬다. 아빠는 속으로 생각한다. ‘녀석아, 이렇게 깨려면 좀 일찍 깨지. 네가 잠이 깰까 살몃살몃 안으며 내렸는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잠이 제대로 들자면 넉넉히 드러누워서 따숩게 있어야 하는데, 흔들거리는 버스가 잠을 잘 만했겠는가. 그나마 좀 잘까 싶던 버스에서 내리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으니 아이가 깰밖에 없지 않은가.

 아이한테 얼음과자를 하나 사 준다. 아이는 아주 좋아라 하면서 야금야금 깨어 문다. 시골버스역에서 시골버스를 기다리는 시골할매는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누.” 하지만, 아이는 춥건 말건 얼음과자 노래만 부른다. 생각해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추운 겨울이건 더운 여름이건 얼음과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집에서까지 냉장고 얼음칸에다가 설탕물을 얼려 먹지 않았던가.

 아이하고 살아가며 젊은 살결은 금세 쭈글쭈글해지고, 보드랍던 살갗은 어느덧 투박하며 거칠어진다. 잠자리에 들던 엊저녁, 내 손바닥 딱딱한 꾸덕살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아이도 아빠 손바닥 꾸덕살을 살살 만져 본다. 아이는 나중에 제 아빠 나이만큼 자랐을 때에 제 아빠 손바닥 꾸덕살 느낌을 떠올릴 수 있을까. 나는 내 아이만 한 나이는 아니고, 열 살 무렵 즈음 어머니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던 느낌을 곱다시 떠올린다. 아이하고 살아가며, 아니 옆지기랑 함께 살아가던 나날부터 내 어머니 젊은 날 손바닥 느낌을 늘 떠올린다. 글 한 줄 쓸 틈이 없는 어머니들 삶은 손바닥에 아로새겨진다. 책 한 권 읽을 겨를이 없는 어머니들 이야기는 손바닥에 차곡차곡 적바림된다. (4343.12.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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