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조님과 나 1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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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06



내 곁에서 노래하는 새 한 마리

― 문조님과 나 1

 이마 이치코 글·그림

 이은주 옮김

 시공사 펴냄, 2003.6.20.



  우리 집은 새가 깃드는 집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제법 크게 자란 후박나무가 있고, 뒤꼍에도 제법 크게 자란 감나무가 있습니다. 우리 집 나무는 매화나무와 모과나무도 하늘 높이 가지를 뻗습니다. 무화과나무와 초피나무도 해마다 키를 높입니다.


  이리하여 온갖 새가 아침저녁으로 깃들고, 아예 처마 밑에 둥지를 틀기도 합니다. 먼저, 제비가 처마 밑에 둥지를 짓습니다. 처마 밑 제비집은 모두 석 채입니다. 이 제비집에는 봄부터 늦여름까지 제비가 머뭅니다. 가을이 되어 제비가 따순 나라로 돌아가면, 어느새 딱새랑 참새가 제비집에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마루와 마당 사이를 오가다가 제비집에서 파르르 날아오르는 딱새랑 참새를 볼 때면, 어느 모로는 귀엽고 어느 모로는 웃음이 나옵니다. 제비가 멋지게 지은 집이기에 다른 작은 새도 깃들 만하지만, 웬만하면 딱새나 참새가 스스로 둥지를 지으면 한결 나을 텐데 싶습니다.





- ‘손이 동그랗게 모여 있으면, 마음대로 들어와 잠을 잔다. 솔직히 말해서 방해되지만 저항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하던 일을 중단하고 문조 님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함께 잠들고 만다.’ (10쪽)

- ‘일하는 중에 펜을 든 오른손에 자리를 잡으면 무척 방해가 된다. 무슨 이유에선지 오른손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같다.’ (20쪽)



  이마 이치코 님이 빚은 만화책 《문조님과 나》(시공사,2003) 첫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마 이치코 님은 이녁 집에 ‘문조’라 하는 조그마한 새를 기른다고 합니다. 만화를 그리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라고 하니, 집 바깥으로 나다닐 겨를은 무척 적겠지요. 온 하루를 집에서 보내야 한다면, 《문조님과 나》를 그린 분처럼 집에서 작은 새나 짐승을 기를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이름을 보면 “문조와 나”가 아닙니다. “문조‘님’과 나”입니다. 귀염둥이로 기르는 새가 아니라 ‘님’을 모시면서 사는 셈이라고 할 만합니다.




- ‘생물을 키운다는 것은 정말 멋지다. 이런 커다란 기쁨을 주다니. 하나칭, 고마워. 후쿠피의 알을 낳아 줘서 정말로 고마워.’ (39쪽)

- ‘30개째에 마침내 부화한 이 새끼는 결국 수컷이었기 때문에, 보이는 그대로 나이조(내장)라 이름지었다. 현재까지 통산 100개 이상을 산란했지만, 살아남은 건 나이조 한 마리뿐.’ (47쪽)



  만화책 《문조님과 나》에 나오는 작은 새는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삽니다. 작은 새를 돌보는 만화가는 작은 새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마치 아기를 돌보며 지내는 듯한 삶입니다. 아기가 물을 쏟든 책을 찢든 언제나 놀이로 누리듯이, 작은 새도 언제나 놀이를 하듯이 만화가 둘레에서 얼쩡거립니다. 만화를 그리는 손아귀로 파고들어서 잠을 자려 하고, 놀아 달라 하고, 먹이를 달라 합니다.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작은 새와 함께 살면서 만화가는 새로운 만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바로 ‘작은 새와 지내는 나날’을 만화로 그릴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만화를 그린다면 ‘아기를 돌보는 나날’을 만화로 그릴 수 있어요.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어버이라면, 아기와 보내는 나날을 글로 쓰거나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 ‘아직 삼킬 힘이 없으므로, 이쑤시개에 약간의 물을 묻혀 물과 함께 목 안쪽으로 밀어넣어 준다. 아무튼 작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작업이다. 이런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약 2시간마다 먹이를 준다.’ (60쪽)

- ‘5일째 저녁, 약하긴 하지만 겨우 조금 소리를 내게 되었다. 작은 생물은 좋아지는 것도 나빠지는 것도 순식간. 거꾸로 보면, 작으면 작을수록 원시적인 생명력은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67쪽)



  작은 새는 그야말로 작습니다. 어른이 한손으로 쥐어도 작지만, 아이가 한손으로 쥐어도 몹시 작습니다. 작은 어미 새가 새끼를 낳으면 더할 나위 없이 작습니다. 먹이를 주거나 물을 먹일 적에도 몹시 마음을 기울여서 해야 합니다.


  《문조님과 나》를 그린 분은 새끼 새를 돌보면서 두 시간마다 먹이를 주었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는 으레 삼십 분마다 젖을 먹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똑같습니다. 아기는 낮이나 밤을 따지지 않아요. 아기는 밤이라서 자고 낮이라서 깨지 않습니다. 자고 싶을 적에 자고, 깨어서 놀고 싶을 적에 놉니다. 그러니,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제껏 겪은 적이 없는 새 삶’을 온몸으로 겪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로 지내는 내’가 ‘예전에 아이로 지낼 적’에 우리 어버이도 나를 이렇게 돌보았구나 하고 온마음으로 느끼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 ‘심야에 혼자서 일에 몰두하는 나. 혼자 알에 집중하고 있는 하나칭. 순진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는 하나칭.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새. 지금 깨어 있는 것은 우리 둘뿐. 둘 사이에 따뜻한 공감과도 같은 것이 흐르고, 그리고 뜨겁고 커다란 똥을 손에 쥐어 주었다.’ (99∼100쪽)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거나 글로 쓰거나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새를 돌보는 일은 힘들지 않습니다. 힘과 마음을 오롯이 쏟아야 할 뿐입니다. 아기를 보살피고 아이와 함께 지내는 나날도 힘들지 않습니다. 힘과 마음을 몽땅 쏟아야 할 뿐입니다.


  《문조님과 나》를 그린 분이 새똥을 손에 쥐듯이, 나도 두 아이를 돌보면서 날마다 똥을 손에 쥐며 살았습니다. 똥기저귀와 똥바지와 오줌기저귀와 오줌바지를 날마다 수없이 빨고 말리고 개고 다리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새는 만화가한테 날마다 기쁨을 베풉니다. 작은 아이들은 어버이한테 날마다 사랑을 베풉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언제나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새입니다. 나는 어미 새이면서 아기 새입니다. 우리 아이는 아기 새이면서 어미 새입니다.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도 어미 새이면서 아기 새입니다. 함께 노래하면서 삶을 즐기는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4348.6.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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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교실 10
마츠이 유세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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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20



‘암살 수업’을 빗대어 ‘사회 비판’을?

― 암살교실 10

 마츠이 유세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10.25.



  마츠이 유세이 님 만화책 《암살교실》(학산문화사,2014) 열째 권을 읽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만화를 더 읽지 않기로 합니다. 나로서는 이 만화에서 재미나 즐거움이나 보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열째 권에서 멈춥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더 잘 죽일’ 수 있는가를 놓고 권수가 늘어나는 만화책은 아이한테도 보여줄 만하지 않고, 어른으로서도 재미나게 볼 만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아무리 ‘사람 죽이는 이야기’를 그리는 만화라고 하더라도, 이 만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내 몸을 갈고닦아서 멋진 암살범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할 어린이나 젊은이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나올 수도 있겠지요.



- “대단하네, 카야노. 달걀파동 뉴스를 보고 1주일 만에 이걸 다 고안하고 수배한 거야?” “응, 사실은 전부터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 (17쪽)

- “안 돼! 애정을 담아서 만든 푸딩을 폭파할 수는 없어!” “아니, 진정해, 카야노!” “야, 푸딩 만들다가 정들었냐, 카야노? 어차피 날려 버리려고 만든 거잖아!” “싫어!” (24쪽)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 《암살교실》은 사회를 에둘러 나무라는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92쪽에 나오는 ‘비겁한 방법만 쓰는 게 어른’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사회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에서 ‘암살 수업’을 한다는 일이 사회 비판이기도 할 테고, 지구별에 떨어진 무시무시한 외계전투족을 고등학교 아이들더러 ‘죽이라’고 시키면서 ‘돈은 있는 대로 다 대어 주겠노라’ 떠넘기는 어른을 보여주는 모습이 사회 비판이라고 할 테지요.


  뜻이 없는 책은 없습니다. 뜻이 없이 그리는 만화는 없습니다. 살곶이만 보여주는 만화를 그리든, 치고 박으며 다투는 모습만 보여주는 만화를 그리든,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만 가득 채우는 만화를 그리든, 모두 ‘만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화를 즐기는 사람은 이들대로 즐겁게 이 만화를 보면 됩니다. 이러한 만화를 안 즐기는 사람은 이들대로 안 보면 될 테지요.



- “이걸 할 수 있으면, 어떤 장소도 암살이 가능한 필드로 만들 수 있다.” (31쪽)

- “언제나 비겁한 방법만 써서.” “그런 게 어른이거든.” (92쪽)

- “이토나 군, 선생님도 학습을 한답니다. 선생님이 하루하루 성장하지 않고,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98쪽)



  교사도 학생도 배우는 사람입니다. 안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우지 않는 교사는 학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와 맞물리는 이야기가 될 텐데, 교사를 가르치지 못하는 학생은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암살교실》은 그저 ‘암살’을 이야깃감으로 삼아서, 무언가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요? 암살 솜씨를 배우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요? 군인이 될까요? 군인이 되면 ‘평화를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는가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은 배운 적이 없이 ‘서로 죽이고 때리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짓’만 배운 아이들이 ‘어른이 된 뒤에 참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평화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 “한두 번 졌다고 뭘 비뜰어지고 난리냐? 언젠가 이기면 되는 거잖아! 문어잡이도 그렇지. 꼭 지금 죽여야 맛이냐? 100번 실패하면 어때. 3월까지 딱 한 번만 죽이면,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건데.” (161∼162쪽)



  가시내 옷을 벗겨서 알몸 사진을 찍고는 이를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는 사내가 꽤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시내와 사내한테 살곶이를 시키고는 이를 사진으로도 찍어서 책을 어마어마하게 찍습니다. 이런 책은 무척 잘 팔린다고 합니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전쟁을 참으로 자주 다루고, 이런 영화나 만화는 참으로 잘 팔리거나 읽힙니다. 아무래도 사람이라고 하는 목숨붙이는 싸움이나 바보짓을 일삼을 때에 ‘사는 보람’을 느끼는 듯합니다.


  그러면, ‘암살’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무엇이 남을까요? 암살 아닌 시험공부를 가르쳐서 대학교에 잘 붙도록 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암살교실’인 학교도 바보스럽지만, ‘입시지옥’인 학교도 바보스럽습니다. 요즈음 교육부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쓴다고 하면서 돈을 엄청나게 쓰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도 참으로 바보짓입니다.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쟁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어리석습니다. 어리석은 길을 가면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숙합니다. 어리숙한 채 하루하루 보내다가 죽는다면 그야말로 바보스럽습니다.


  ‘암살교실’ 아이들은 어떻게 ‘외계전투족’을 무찌르거나 죽일 수 있을까요? 길은 아주 쉽습니다. 마음으로 ‘너 죽어라’ 하고 외치면 됩니다. 온마음을 기울여서 ‘너 죽어라’ 하고 외치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어떤 무기나 솜씨를 쓰든 아무도 못 죽입니다. 죽이는 시늉만 할 뿐입니다. 총칼로 독재권력을 으르렁거린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짓밟힌 사람들은 끝끝내 일어서서 모든 독재권력을 몰아내고야 맙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슬기와 고운 사랑을 가르치면 모든 ‘암살’과 ‘전쟁’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이를 가르치지 못하면, 늘 죽이고 죽는 쳇바퀴에 갇혀서 맴돌이만 하겠지요. 지구별에 암살이든 전쟁이든 독재이든 그치지 않는 까닭은, 집에서나 마을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착한 마음’도 ‘참다운 슬기’도 ‘고운 사랑’도 안 가르치기 때문이요, 이를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을 모조리 억누르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4348.6.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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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44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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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13



네 눈은 어떤 마음을 보는가

― 유리가면 44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1.15.



  눈을 뜨면 눈으로 봅니다. 눈을 감으면 눈으로 못 봅니다. 눈을 뜨면서 마음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마음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눈을 감아도 둘레를 환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보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차분히 있으면, 내 마음이 네 마음을 읽습니다. 눈을 살며시 감고 서로 마주하면, 우리는 눈이 아닌 마음에 기대면서 서로 한결 따스하고 넉넉하게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을 감고 서로 마주할 때에 참다운 삶과 사랑을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얼굴 생김새나 몸매가 대수롭지 않아요.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으리으리해 보이는 건축양식은 대단하지 않아요.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오로지 마음과 생각과 삶과 사랑만 대수롭습니다.




- ‘전장을 걷는다. 성스러운 존재로서 걷는다! 난 바람! 스쳐 가는 바람! 성스러운, 홍천녀의 마음.’ (6∼7쪽)

- ‘츠기카게 선생님! 전 아직 여신이 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그 홍천녀의 고향에서 본 아름다운 산과 숲과 계곡. 비, 안개, 무지개 속에, 인간이 만든 건 무엇 하나 없었다는 것! 그 세계에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 대자연이 키워 준 몸에 마음이 깃든다. 내 마음! 우리는 이 몸에 깃든 존재! 마음이 있어 움직임도 있다. 예전에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츠기카게 선생님! 제 마음이 있어 제 육체가 움직이듯이, 여신의 마음이 있어, 세상이 움직입니다!’ (14∼16쪽)



  미우치 스즈에 님이 빚은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0) 마흔넷째 권을 읽으면, 연극 연습을 하다가 그만 눈을 다친 아유미가 나옵니다. 아유미는 눈을 다치기 앞서 츠기카게 선생님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아주 멋있게 홍천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유미는 멋있게 연기를 할 뿐, 다른 마음을 연기에 담지는 못합니다. 이런 모습은 눈썰미가 깊은 다른 사람도 알아차립니다.


  여느 사람들은 아유미가 예쁘고 멋있다고 여깁니다. 여느 눈길로는 아유미야말로 홍천녀를 연기할 만한 배우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홍천녀를 몸소 연기한 츠기카게 선생님을 비롯한 눈밝은 사람들은 아유미한테 없으나 마야한테 있는 숨결을 느낍니다. 마야한테는 늘 넘치지만 아유미한테서는 늘 찾아볼 수 없는 숨결을 느껴요.




- “그 애 마음이 너무 강해서 다른 배우들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도 흠이었지. 하지만 한 가지, 그 아인 그 연기 속에서 아코야로 살고 있었어. 솔직히 놀랐네. 그 아이가 목표로 한 게 홍천녀의 리얼리티였을 줄이야!” (31쪽)

- “왜 그러세요, 선생님?” “겐조. 그가 변한 것 같아.” “예?” “하야미 마스미 말야. 눈 속의 차가운 불이 꺼졌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56쪽)



  《유리가면》 마흔넷째 권에서 아유미는 ‘눈을 잃다’시피 하면서 모든 삶이 흔들립니다. 이제껏 두 눈에 기대어 살아온 나날을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봅니다. 지난날에 헬렌 켈러를 연기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막상 ‘눈이 없는 삶’이 무엇인지 알면서 연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유미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눈앞이 흐려졌으니 연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눈앞이 흐려진 삶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홍천녀를 마음으로 맞아들여 연기하는 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아유미는 아직 스스로 잘 모르지만, 마야는 ‘눈을 잃다’시피 한 나날을 늘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채 자랐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일꾼이었으며, 마야도 늘 온갖 심부름과 일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마야는 연극표 한 장을 얻으려고 한겨울에 바다에 뛰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삶을 아유미는 하나도 모르지요. 아유미로서는 ‘보거나 듣기’는 했어도 ‘몸으로 겪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 “키타지마 마야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아가씨와 같은 배역을 놓고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요. 홍천녀는 아름다운 여신의 역이니, 그만 한 미모가 받쳐줘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 할멈. 그 애는 연기를 하면서 점점 빛이 나는 애야. 무대에선 아주 다른 사람인걸. 외모의 아름다움은 그 빛 앞에선 아무 쓸모도 없어 … 그 애한텐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늪 같은 면이 있어. 뭐가 감춰져 있는지 모르는 신비한 늪. 가끔 그 늪의 바닥에서 반짝이는 빛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63쪽)



  아픈 적이 없는 사람은 아픔을 모릅니다.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모릅니다. 길을 걸은 적이 없는 사람은 ‘걷는 여행’이 어떠한가를 모릅니다. 자가용을 몰은 적이 없는 사람은 ‘자가용 달리는 맛’을 모릅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아이키우기를 모릅니다.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아이를 안 낳고 지내는 삶’을 모릅니다. 사내로 사는 사람은 가시내를 모르고, 가시내로 사는 사람은 사내를 모릅니다. 서로 모릅니다. 그런데, 서로 모르는 줄 제대로 바라보지 않거나, 슬기롭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서로 모르면서 다른 삶인 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배울 수 있습니다. 서로 모르면서 다른 삶인 줄 제대로 안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배우지 못하면서 쳇바퀴를 돌고 맙니다.




- “난 ‘인형’의 사진은 찍지 않아! 마음이 없는 건 안 찍지. 홍천녀의 ‘탈’에는 관심 없어!” (73쪽)

- “키 작고 아무 장점도 없지만, 무대 위에선 여신도 될 수 있으니까요! 헬렌 켈러랑 해적이랑! 로봇도 됐었는데요 뭐!” “고럼 고럼, 늑대소녀도 했었지.” “아하하하. 전 연극이 좋아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생을 살아 보고 싶어요!” (169쪽)



  마야나 아유미는 학교에서 연기를 배우지 않습니다. 두 아이는 학교나 학원 같은 데에서 ‘연기를 하는 솜씨’라든지 ‘연기에서 바탕이 될 몸짓’을 배울 뿐입니다. 학교나 학원 같은 데에서는 ‘연기를 하는 마음’을 배울 수 없고, ‘삶을 짓는 마음’도 배울 수 없습니다.


  아유미한테 없는 모습이란 ‘스스로 삶을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마야한테 있는 모습이란 ‘스스로 삶을 사랑하면서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이리하여, 마야는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홍천녀를 연기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언제나 ‘그 마음’이 되면서, ‘내 몸을 다스리는 숨결’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읽기 때문입니다. 4348.5.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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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귀족 3 세미콜론 코믹스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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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17



백성이자 귀족인 시골사람

― 백성귀족 3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4.6.23.



  하얀 종이를 바른 나무문 가득 하얀 빛이 스며들면 새벽입니다. 동이 트는 빛입니다. 유월을 앞둔 시골은 다섯 시 즈음이면 어느새 바깥이 밝습니다. 그리고, 다섯 시 언저리는 들마다 ‘일하는 목소리와 몸짓’이 가득합니다. 바야흐로 일철이요, 일철에는 시골에서 누구나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엽니다.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열어 아침 여덟 시에 일손을 쉽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손을 잡고는 열두 시까지 일손을 놀립니다. 낮밥을 먹고 한숨을 돌리면 햇볕이 뜨거워, 이제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일거리가 많은 곳만 한낮에도 일합니다.


  햇볕이 누그러지는 네 시 즈음 다시 들판이 북적입니다. 저물녘에 하루 일을 마무리짓고 일찌감치 저녁을 들면, 어느새 마을은 고요합니다. 해가 지기 무섭게 집집마다 잠이 듭니다. 그야말로 일찍 깨어서 그야말로 일찍 잠드는 하루입니다.



- “왜 쪼그려앉는 동작들만 그렇게 안정감 만점인 거죠?” “왕년에 농사를 좀 지었거든요! 1년 365일 늘 쪼그려앉아 지냈기 때문에!” (3∼4쪽)

- “우리 집안 너희 할머니가 좀 엄한 분이셨어야지. 며느리한테 집안일부터 바깥일까지 다 시키시더라니까.” “옛날엔 그게 일반적이었나 봐요?” “뭐, 확실히 뭐든지 다 하는 분이셨지. 전쟁이 끝난 뒤 우리 집에 자전거를 들이니까 당장 연습해서 타고 다니시지 않나. 트랙터를 들이니까 운전을 배워서 타고 다니시지 않나! 환갑이 다 된 노인네가 글쎄!” (5∼6쪽)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빚은 만화책 《백성귀족》(세미콜론,2014) 셋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시골사람으로 태어나서 언제나 시골일을 하면서 자란 삶을 만화로 담은 《백성귀족》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니 수수한 삶(백성)이라 할 만한데, 도시로 나와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 보니까 시골에서 늘 누린 하루는 무척 놀랍도록 엄청나기도 했구나(귀족) 하고 여기면서 그리는 만화입니다.


  이를테면, 시골에서는 ‘돈’이 나올 길은 없어도 ‘먹을거리’는 늘 넉넉합니다. 우리 집에 넉넉한 것을 이웃집에 주면, 이웃집에서는 이웃집에 넉넉한 것을 우리 집에 줍니다. 끝없이 주고받습니다. 도시에서는 매우 값지거나 비싼 먹을거리로 여기지만, 시골에서는 그저 흔하거나 너른 먹을거리입니다. 시골에서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내면서 ‘밥값’을 생각한 적이 없고, 도시로 나가서 혼자 살기 앞서까지 ‘감자나 고구마나 배추를 사다 먹는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기에, 남새 값이 얼마나 하는지 몰랐다는 아라카와 히로무 님입니다. ‘먹는 데’에 돈을 쓴 적이 없다 보니, 도시에서 ‘먹는 데에 돈을 많이 써야 하는 살림’을 겪으면서, 시골살이는 백성이면서 귀족이었네 하고 깨닫습니다.



- “무한의 물물교환! 갓 딴 백합 뿌리로 쑨 백합 단팥죽도 꿀맛이죠!” “꿀맛 정도가 아니라 백합 뿌리면 엄청 고급 재료잖아요? 백성의 탈을 쓴 귀족 같으니.” “어머나, 그랬나? 백합 뿌리 같은 건 우리 집에서는 그냥 냄비째 식탁에 올라오는데. 멜론 같은 건 너무 먹어서 물리네. 오호호.” (26쪽)

- “가족 경영으로 이 정도 선에서 대충 수지를 맞추고 있지요. 아니 뭐, 젖소에게 무리가 안 가는 정도로만 젖을 짜는 만큼 생산성이 낮은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요. 흉작이거나 큰 기계가 망가진 해에는 재정난이. 고로 우린 이런 귀족! 앞은 호화찬란, 뒤는 빈털터리. 특정 식품 관련해서만 특권 계급이라니까요!” (70쪽)




  도시에서는 어느 고장 마늘이 맛나다거나 어느 고장 고추가 좋다거나 하고 따집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는 ‘우리 집’에서 거둔 마늘이나 고추가 가장 맛납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이나 친환경을 따지기 앞서 ‘우리 집’ 감자나 고구마가 가장 맛납니다.


  수수께끼라고 할 만하면서도, 이 수수께끼는 아주 쉬워요. 내가 손수 흙을 갈고 살찌우고 보듬고 북돋우면서 돌본 먹을거리는 언제나 내 입맛에 찰싹 달라붙으면서 맛있습니다. 내 품과 땀을 들여서 가꾼 먹을거리는 참말로 언제나 내 몸을 일으키면서 사랑스레 어루만집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얼마 앞서까지 한국사람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나라에서 거의 모든 살림집이 ‘홀로서기(자급자족)’를 했어요. 지구별 모든 나라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수 집을 짓고 옷을 기우며 밥을 지었습니다. 아주 마땅히 ‘내 보금자리’에서 밥과 옷과 집이 척척 나왔어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 한 그릇을 나누었고,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삶을 누렸어요.



- “아라카와 선생님은 고향 집에 계실 때부터 만화를 그리셨죠? 그런 스케줄로 어떻게 만화를 그리는 게 가능했어요?” “아, 만화를 그릴 짬을 어떻게 내냔 말씀이죠? 간단해요. 아주. 안 자면 되지롱!” (57∼58쪽)

- “꽃을 보고 있으면 와 예쁘네 하고 행복한 기분은 들지만, 왠지 기막힐 정도로 품종 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왜 그럴까요?” “진지하게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본 결과, 먹을 수 없는 거니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79쪽)




  만화책 《백성귀족》은 시골살이를 재미나게 들려줍니다. 시골살이가 더 낫다고 말하지 않고, 시골살이가 괴롭다고 따지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쉬는 날’이 없습니다. 집짐승이 하루를 굶는다거나 밭에 심은 남새를 하루라도 안 돌보아도 될 날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되어 눈이 소복히 덮여야 비로소 일손을 쉬지만, 이때에도 집짐승을 건사해야 합니다. 겨우내 연장을 손질하고 아이들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백성귀족》을 그린 분은 어릴 적부터 하루 내내 일하던 삶에 익숙했기에 도시에서 부업 자리를 찾을 적에 아주 쉬웠다고 합니다. 참말 그럴 만합니다. 공장이나 회사에서는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이나 여섯 시간 노동을 말하지만, 시골에서는 하루 열네 시간 노동도 아무렇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철에는 거의 잠을 못 이루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란 아예 없습니다.


  이리하여, 시골사람은 일하고 또 일하는 백성입니다. 오로지 일만 하고 다시 일만 하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고 나서 샛밥을 먹거나 주전부리를 누릴 적에는 늘 멋진 밥잔치가 됩니다. 밥상만 놓고 본다면 어엿한 귀족입니다.



-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가 되면 젊은이들을 강제로 농촌에 보내 한 2년쯤 농업에 종사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이웃나라의 징병제 같은 건가요 … 농업에 아무 관심 없는 쥐뿔도 모르는 젊은 애들이 매년 매 시즌마다 농촌에 우르르 몰려오고, 그런 걸 매번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이제 겨우 농사일 좀 시킬 만하겠다 싶을 대쯤 되면 다시 도회지로 돌아가 버리고, 또 다른 젊은 애들이 몰려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반복해야 하고, 소젖 같은 건 초보자가 짰다간 눈 깜짝할 새 유방 트러블이 생겨 생산량이 떨어지기 십상이고 …….” (81. 83쪽)




  문득 우리 집을 돌아봅니다. 우리 집에서 노는 아이들은 여러 이웃이 물려준 장난감을 갖고 놀기도 하지만, 마당에서 대나무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나비를 좇거나 꽃을 따기도 합니다. 위층이나 아래층이 따로 없이 마당이 있는 시골집이기에, 집에서도 마당에서도 고샅에서도 거리낌없이 쿵쿵 콩콩 뛰고 달립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릅니다.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어도 즐겁고, 마을 어귀 빨래터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깁니다. 자전거를 달리거나 군내버스를 타고 가볍게 바닷마실을 합니다.


  시골에는 학원도 없고(읍내에 가면 있습니다만), 극장도 없으며,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이나 상가나 이런저런 문화시설도 편의시설도 없습니다. 그러니, 시골사람은 언제나 백성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문화와 동떨어진’ 삶입니다. 그렇지만, 시골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껏 노래하거나 춤출 수 있습니다. 뜀뛰기도 달리기도 홀가분하지만, 꽃하고 풀하고 나무를 넉넉히 누립니다. 눈 닿는 곳은 숲이요 멧골이요 들이요 바다입니다. 밤마다 별빛이 쏟아지고, 낮에는 하늘이 새파랗습니다. 온갖 멧새와 들새가 하루 내내 노래합니다. 한밤에는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베풀어 주어 포근하게 잠듭니다. 여름이 다가오면 개구리 노랫소리 사이에 풀벌레 노랫소리가 섞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시골은 ‘숲에 둘러싸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도시는 ‘숲하고 동떨어거나 바다와 동떨어지거나 별빛이나 무지개와 동떨어진’ 삶입니다.




- 호박의 생명력을 본 어머니가 한마디. “살겠다고 기를 쓰는 얘네 생명력을 보고 있으면, 일부 채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동물과 달리 식물은 자기 의사가 없으니까 먹어도 된다.’라는 얘기가 꼭 궤변 같지 않니.” (99쪽)



  밭에서 부추 한 줌을 고맙게 뜯어서 먹습니다. 민들레잎이랑 고들빼기잎을 고맙게 한 줌씩 뜯어서 먹습니다. 돌나물을 꽃 달린 아이까지 고맙게 훑어서 먹습니다. 굵고 짙푸르게 익는 매화알을 건사하고, 들딸기를 누리며, 감꽃을 줍습니다. 모두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숨결을 내 몸에 맞아들이니, 나는 언제나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시골바람을 쐬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바람을 쐬면서 아름답습니다. 바람은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싱그럽게 붑니다. 햇볕은 시골하고 도시를 골고루 비춥니다. 비는 시골에도 도시에도 똑같이 내립니다.


  웃고 노래하면서 일하는 백성은, 웃고 노래하면서 밥잔치를 누리는 귀족입니다. 춤추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백성은, 춤과 이야기꽃으로 하루를 새롭게 짓는 귀족입니다. 만화책 《백성귀족》을 읽으면서 ‘백성이자 귀족인 시골사람’을 떠올리고, ‘귀족이자 백성인 도시사람’을 그립니다. 4348.5.2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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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jhm 2015-05-2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ㅎ

숲노래 2015-05-27 14:09   좋아요 0 | URL
강철 연금술사를 그린 분이 빚은
아주 재미난 만화랍니다.
아이들도 함께 볼 수 있어요.
 
유리가면 7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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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12



마음을 끄는 사랑스러운 몸짓

― 유리가면 7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해외단행본팀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4.30.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니 무엇이든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 없으니 무엇이든 안 됩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고, 찬찬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 “괜찮니? 정말 알 수 없는 애야. 무대 뒤로 들어온 순간 덜덜 떨기 시작이니. 무대 위에선 떨어진 목에 묻은 먼지도 털어낼 정도로 여유 있더니.” (20쪽)

- ‘엄마, 나 연극을 하고 싶어요. 나에겐 이것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난 아무런 장점도 없고, 아무것도 잘하는 것 없는 별 볼일 없는 애지만, 이것만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걸요. 무대 위에 서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태어나서 참 좋구나 하고 느껴지는 걸요. 있잖아요, 엄마. 누가 말려도, 반대해도, 설령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될지라도, 나, 이 가슴의 불꽃은 꺼지게 할 수 없어요.’ (41쪽)





  미우치 스즈에 님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0) 일곱째 권을 읽으면, 마야라는 아이가 연극을 하려고 무대에 서면 그만 모든 사람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마야는 이 대목을 아직 못 깨닫습니다. 아니, 마야는 나중에도 이 대목을 제대로 못 깨닫습니다. 마야는 그저 연극에 온마음이 이끌릴 뿐이고, 연극을 하면서 온몸이 활활 불타오를 뿐입니다.


  아유미라는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재주를 뽐내면서 스스로 즐겁게 연극을 하지만, 마야는 어버이한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마음이면서도 어쩐지 연극을 하면 온몸이 불타오른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처음에 사람들은 아유미 연극을 보면서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디 또 있을까 하고 놀라워 하다가, 이윽고 마야 연극을 보면서 저렇게 수수한 아가씨가 무엇을 보여주겠느냐고 핀잔을 하던 마음이 싹 사라지면서 그만 넋을 잃은 채 마야 무대에 빠져듭니다.



- “그 애는 말이에요, 하라다 씨. 같은 연극을 하는 사람들에겐 위협적인 존재예요. 젊었을 땐 그 재능 때문에 여기저기의 무대에서 따돌림받게 되겠지. 하지만 하라다 씨, 결국 세상이 그 애를 인정해 주게 될 거예요. 대중이 그 아이를 원하게 될 거예요.” (66∼67쪽)

- ‘마야, 잘못이 있다면 그건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네 연기의 매력이야. 그 재능이라구. 그들은 네가 두렵고 질투가 나서, 그래서 너를 내쫓은 거야.’ “마야, 지금부터도 잊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거야. 인생은 길어.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끙끙거리면 인생도 엉망이 된다구.” (81쪽)





  마야 연극은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휘저을 수 있을까요? 마야는 어떻게 ‘무대광풍’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마야는 연극을 하면서 온마음을 하나로 모을 줄 압니다. 마야는 연극을 할 적에 ‘어떤 배역’이 되든 ‘그 배역과 하나’가 되어 삶을 새로 지을 줄 압니다. 마야는 ‘오늘 이곳에 있는 가난하고 가엾고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재주도 없는 몸’을 내려놓고는, ‘배역에 맞는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날 줄 압니다.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될 줄 아는 마야이기 때문에, 마야 연극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숨결’에 사로잡혀서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마야 몸짓에서 읽으려고 합니다.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에겐 연극이 있어. 네가 버리지 않는 한 연극도 널 버리지 않아. 그렇지, 마야?” (82쪽)

- “영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180쪽)



  마야가 보여주는 연극은 ‘넋(영혼)’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마야는 딱히 재주도 솜씨도 없습니다. 마야도 재주와 솜씨를 키우려고 꾸준히 애쓰지만, 아직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마야는 어떤 배역을 따내어 제 이름값을 알린다거나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하는 뜻이 없습니다. 마야는 그저 무대에 서서 ‘새로운 배역’을 맡고 싶습니다. 마야는 그저 무대에서 ‘말 한 마디 없이 선 나무’로 있더라도 연극을 하면서 새로운 숨결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유리가면》에 나오는 마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온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길로 힘차게 나아가려고 하는 몸짓이 된다면, 새로운 숨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내가 될 수 있고, 사랑이 가득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꿈을 꾸면서 삶을 짓는 내가 될 수 있으며, 고운 노래를 들려주는 푸른 바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어설프게 캐서린으로서의 예비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백지 상태가 차라리 나은 것 아닐까? 서툰 선입관 같은 건 없는 쪽이 나을지도 몰라.” (105쪽)

-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 자라난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캐서린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109쪽)



  마음을 끄는 사랑스러운 몸짓은 손재주가 아닙니다. 마음을 끄는 사랑스러운 몸짓은 이쁘장한 얼굴이나 몸매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참다이 사랑하면서 맑게 웃을 줄 아는 몸짓일 때에 비로소 마음을 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착하게 바라보면서 밝게 노래할 줄 아는 몸짓일 때에 바야흐로 마음을 끌기 마련입니다.


  “어설프게 예비지식을” 생각할 적에는 그저 어설플 뿐입니다. 지식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어설프게 들이대려고 하면 언제나 어설프기만 합니다. 삶은 논리도 이론도 아닙니다. 삶은 그예 삶입니다.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알아야 삶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함께 배워서 사랑스레 나눌 줄 알아야 삶입니다.


  어떤 것이든 곱게 받아들이는 몸짓이기에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울 수 있는 까닭은 ‘아무 예비지식이나 선입관’이 없이 어버이를 사랑스레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기보다 ‘사랑한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웁니다.


  연극도 삶도 교육도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사랑스러운 몸짓이 될 때에 모든 것을 이룹니다. 4348.5.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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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1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5-05-31 06:49   좋아요 0 | URL
<유리가면>이 처음 연재된 지 어느덧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권이 몇 해 앞서부터 나온다고 하면서도 아직 나오지 못했는데, 다른 만화도 이와 같지만 어떤 만화이든 `삶`을 이야기합니다.

<유리가면>은 `유리`라는 것과 `탈(가면)`이라는 것을 만화 이름으로 붙이면서, 우리 삶이 어떠한가를 넌지시 비추어 보이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내 삶`을 제대로 찾고 바라보고 즐기고 누리는 나날이 아니라, 마치 `탈`을 쓰고 연극을 하듯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이끌리거나 휘둘리기 일쑤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조차, 매체나 문학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이성 사이 짝짓기를 좋아하는 몸짓`이 사랑이라도 되는 줄 잘못 알기 일쑤이고, 그윽하면서 넉넉하고 따사로운 숨결인 `참사랑`은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삶이 아닌` `그저 연극뿐인`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얼마나 `연극 아닌 삶`을 누리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찾고, 삶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찾지 못합니다.

저도 만화영화를 보았는데, 만화영화에서는 `결말`을 맺지 않아서 그냥 그렇더라구요 ^^;;; 아무래도 <유리가면>은 결말이 안 난 작품이면서 워낙 인기를 많이 받은 작품이라서, 만화영화로 그린 감독이 상상력을 쓸 틈이 없었구나 싶어요.

언제나 스스로 삶을 찾으면서 나다운 사랑으로 하루하루 아름답게 누리시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