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만화읽기'라는 꼬리말을 붙이면서 쓴 글이

이제 400꼭지가 된다. 396째 글을 아직 안 썼지만,

401째 글을 먼저 썼기에, 꼭 400째 글이 된다.


만화책 이야기를 꾸준히 쓰는 이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도 하지만,

만화책을 깊이 읽거나 이야기하려는 이웃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도 하다.


앞으로도 꾸준히 만화읽기 이야기를 띄울 텐데,

'별점 등록'을 하는 누리집에 올린 글로 살피자면,

'별 다섯'을 붙이는 작품이 아니라면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별 다섯을 붙였어도 굳이 다시 읽지 말자고 느끼는 작품이 있다.

만화읽기 느낌글로 올린 글에서

'별 셋'이나 '별 둘'이나 '별 하나'를 붙인 책은

추천하고 싶지 않고 소개하고도 싶지 않은 작품이다.


'별 다섯'을 붙인 책만

둘레에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할까.


오늘도, 시골집에서

밤별을 잔뜩 누리면서

만화책 이야기를 하나 썼다.

밤에 별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사니까,

나 스스로 별이 되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앤드 & 1
오카자키 마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95



스스로 길을 찾아야지

― 앤드(&) 1

 오카자키 마리 글·그림

 대원씨아이 펴냄, 2012.9.15.



  밤에 곁님이 슬쩍 한 마디 합니다. 오늘 밤 별이 무척 밝다고. 그렇구나 하면서 마당에 나와 밤별을 올려다봅니다. 곁님 말대로 별이 무척 맑습니다. 별빛은 언제 보아도 곱습니다. 그젯밤에 아이들과 올려다본 별을 떠올립니다. 그젯밤에도 별빛이 아주 밝았어요. 그젯밤에는 미리내를 보았습니다.


  한동안 마당에서 서성이면서 별을 올려다봅니다. 마을 곳곳에 있는 등불은 손으로 가리면서 별을 올려다봅니다. 나는 바로 이 별을 보고 싶어서 시골에서 사는구나 싶어요. 별빛을 가슴에 품고, 별내음을 온몸으로 맡으며, 별노래를 마음으로 들으려고 시골에서 사는구나 싶습니다.



- ‘정말 원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13쪽)

- “성추행인가요?” “재판을 걸어도 상관없어. 소송에는 익숙하니까.” “이기면 전 뭘 얻을 수 있죠?” “글쎄. 하긴 닳는 것도 아니니까.” “닳아요.” (162쪽)




  별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합니다. 별을 바라보는 동안 몸이 느긋합니다. 나무를 바라보거나 풀밭을 바라볼 때에도 마음이 차분합니다. 숲에서 걷거나, 숲에 우거진 나무를 쓰다듬을 때에도 마음이 차분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들이를 가면서 마음이 차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차분해지자고 생각하면서 달래면 차분할 수 있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를 따라 흔들리면 몸도 마음도 어지럽습니다. 도시에서 시외버스를 내려 걷거나 지하철을 탈 적에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몹시 어지러우면서 힘들어요.


  아마 도시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을 텐데, 별을 볼 수 없고 나무도 풀밭도 숲도 만날 수 없으니, 좀처럼 차분하기 어렵고 따스하기 힘들며 너그럽지 못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마음을 달래거나 쉴 만한 곳이 없으니까요.


  도시에서는 누구나 내 마음부터 고단하거나 힘드니, 이웃이나 동무를 살피거나 헤아리기도 어렵지 싶습니다. 내가 힘드니까 이웃도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힘든 탓에 다른 사람은 살피지 않고 골을 내거나 짜증이 피어나기 쉽구나 싶어요.



- “그때 일부러 그런 거지?” “뭘?” “지난번 버그 고칠 때, 승산이 있으니까 일부러 그녀 앞에서 한 거잖아.” (88∼89쪽)

- ‘아아. 어떡하지. 직접 간판을 내걸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뜻.’ (94쪽)





  오카자키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앤드(&)》(대원씨아이,2012) 첫재 권을 읽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도시 한복판’에 있는 병원이 아닌 ‘섬이나 외딴 시골’에 있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할 적에도, 이 만화와 같은 줄거리가 흐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마음을 차분히 달래면서 쉴 수 있는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과, 언제나 빠듯하면서 고단하게 하루를 보내야 하는 사람은, 저마다 얼마나 다를까요.



- “다들 처음에는 기뻐하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윽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네. ‘이 사람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일까?’” (117쪽)

- “위로하는 거니?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니? 사실이면 무슨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152쪽)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열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을 가꾸어야 합니다. 남이 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내 삶은 내가 일구지, 남이 일구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에는 내가 밥을 먹어야지, 옆에서 밥을 먹어 준들 내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너그럽거나 포근한 시골에서 살든, 메마르거나 바쁜 도시에서 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나 스스로 즐거운 넋이어야 즐겁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나 스스로 아프거나 고단한 넋이라면 늘 아프거나 고단합니다.




- ‘이윽고 하늘이 하얗게 밝아오고 거리가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찰 때까지,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춥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조금 당황하면서, 발밑의 감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마비되어 새햐얘질 때까지.’ (181쪽)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고단한 나머지 밤새 술을 마시면서 새벽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는 밤새 술을 마시다가 새벽을 맞이하는 일이 드물어요. 왜냐하면, 시골에서는 새벽부터 할 일이 있거든요. 아무리 술을 마시더라도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 도시하고는 사뭇 달라요. 시골일은 회사일과 달라 ‘일요일이나 주말이 없’습니다. 다만, 시골일은 날마다 살피고 마주하되, 날마다 새롭고 싱그럽습니다. 더 살펴본다면, 시골에서 맞이하는 새벽과 아침은 무척 고즈넉하면서 차분합니다. 도시처럼 북적거리지 않고, 도시처럼 바빠맞지 않습니다. 이슬을 머금으면서 풀과 나무와 꽃이 깨어나는 시골입니다. 별이 하나둘 지면서 꽃이 하나둘 돋는 시골입니다.


  시골 저녁은 어떠할까요? 시골 아침은 별이 지면서 꽃이 돋는다면, 시골 저녁은 꽃이 지면서 별이 돋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사람(99%)이 도시에서 살아요. 그래서 도시 언저리만 살필 텐데, 도시에서도 꽃을 찾을 수 있고, 별을 그릴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시골처럼 온갖 들꽃이 흐드러지지 않을 테지만, 눈을 밝히고 찾아보면 골목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시골처럼 미리내를 보기 어렵지만, 고개를 들어 살피면 달빛이라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밝은 숨결이 되어 고운 웃음꽃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씩씩하게 디디면서 이웃들과 환하게 어깨동무를 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언제나 스스로 길을 찾아서 엽니다. 4347.10.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빛 숟가락 6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382



사랑 어린 손길로

― 은빛 숟가락 6

 오자와 마리 글·그림

 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4.8.25.



  사랑 어린 손길로 바느질을 하면, 바느질을 마친 옷을 입는 사람 누구나 즐겁습니다. 사랑 어린 기운이 한 땀 두 땀 깃들었으니, 이 기운을 받아 즐겁게 노래하면서 일하거나 놀 수 있어요.


  사랑 어린 손길로 밥을 지으면, 이 밥을 함께 먹는 사람 누구나 기쁩니다. 사랑 어린 기운으로 한 알 두 알 모인 밥그릇이니, 이 기운을 먹으면서 기쁘게 힘을 얻어 새롭게 일하거나 놀 수 있어요.


  어떤 일을 하든 사랑스럽게 할 노릇입니다. 무엇을 만들든 사랑스럽게 만들 노릇입니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이웃을 생각할 노릇입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살붙이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한집과 이웃과 동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언제나 사랑이 감돌아요.





- “고모한테는 혼났지만 분명 리츠는 여러 가지로 참았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잘 된 거 아니냐고 하셨어요.” “계기도 타이밍도 남이 정할 일이 아냐. 아무리 친척이라도 중요한 일을 가족 이외의 사람한테서 듣게 하다니, 말도 안 되잖아?” (12쪽)

- “지금은?” “알고 싶어. 나한테 있어서 엄마는 키워 준 엄마밖에 없지만, 엄마가 이걸 건네주셨을 때부터,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됐어. 날 낳아 준 사람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18쪽)

- ‘나는 나폴리탄 스파게티와 아이스커피. 그것은 엄마가 만들어 준 맛과 달랐지만, 어딘가 그리운 맛이 났다.’ (26쪽)



  우리 집 일곱 살 어린이가 또박또박 눌러서 쓴 쪽글을 책상맡에 둡니다. 이 아이가 신나게 그려서 내민 쪽그림을 책상맡에 나란히 둡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와 함께 그린 그림 하나를 책상맡에 함께 둡니다.


  아이가 아버지한테 준 선물(쪽글과 쪽그림)을 바라보고, 내가 아이하고 함께 그림놀이를 하면서 얻은 그림을 바라봅니다. 이 글이나 그림은 잘 쓴 글이나 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즐겁게 쓴 글이고, 기쁘게 그린 그림입니다. 사랑을 담아서 쓴 글이요, 사랑을 실어서 그린 그림입니다.


  잘 쓴 글이라면, 이 글을 볼 적에 ‘잘 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담아 쓴 글이라면, 이 글을 볼 적에 ‘사랑스럽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그래서, 사진전시나 그림전시를 하는 곳에 가서 사진이나 그림을 볼 적에 이 두 가지를 떠올려요. ‘아, 이 그림은 잘 그렸네’ 하고, 또는 ‘아, 이 그림은 사랑스럽네’ 하고.





- ‘취향이 있으니까 사지 않아도 된다는데 아직껏 내 옷을 사는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어버이날에 선물한 스카프를 아직까지도 소중히 여기며, 멋 내실 때 필수 아이템으로 걸치신다.’ (31∼32쪽)

- “당신의 친부모님은 의무교육 중에 당신을 가졌기 때문에 키울 수가 없어서 당신을 넘겼지만 당신의 행복을 계속해서 바라는 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성장한 당신이 본인 의지로 만나러 와 준 걸 안다면 분명 당신을 낳아 준 부모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45∼46쪽)

- ‘엄마가 사 온 새 티셔츠를 입고(4장에 2000엔), 다 함께 거실에서 수박을 먹으며 개그프로를 봤다. 내가 행복하기를, 그 사람들도 행복하기를, 같은 이 하늘 아래에서, 부디 행복하기를.’ (60∼62쪽)



  잘 그린 그림이 나쁠 일은 없습니다. 잘 그린 그림은 잘 그렸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사랑스레 그린 그림이 더 좋을 일은 없습니다. 사랑스레 그린 그림은 그저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림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사랑스러운 그림은, 이 그림을 빚은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떠올릴 수 있고,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속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솟습니다.


  잘 차린 밥이라고 해서 더 맛있지 않아요. 잘 차린 옷이라고 해서 더 멋있지 않아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속에 담은 넋과 숨결이 대수롭습니다.


  아이들이 꼬물꼬물 그린 그림이 왜 우리한테 힘이 될까요? 바로 사랑을 실어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 어린이는 아직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모릅니다. 아직 글씨를 잘 여미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곱 살 어린이는 제 모든 기운을 쏟아 즐겁게 글을 씁니다. 그러고는 이 글을 “아버지, 여기 편지 받으셔요.” 하면서 내밉니다. 빙그레 짓는 웃음이 ‘투박한 편지’에 서립니다. 활짝 웃으며 노래하는 숨결이 ‘수수한 그림’마다 흐릅니다.


  우리가 이 지구별에 태어나 살아가는 보람이라면 바로 이러한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지구별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이라면 바로 이처럼 사랑을 나누면서 웃음꽃을 피우는 일이지 싶습니다.





- ‘그런 놈들과 어울려 다닌다면 더욱더 불러들여야 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해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83쪽)

-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단하는 건 본인이고, 그래서 후회하는지 만족하는지도 본인 하기 나름이다. 미래는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부 활동을 그만둔 선택이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인생의 열쇠는 언제나 자신이 쥐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생각해 줬던 사람이 사 준 라면 맛은, 분명 언제까지나 특별할 거라고 난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씁쓸하든 달콤하든.’ (92쪽)



  오자와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4) 여섯째 권을 읽습니다. 여섯째 권에서는 새로운 실마리 하나가 흐릅니다. 이 만화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아이는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쳐서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낳은 어머니’가 따로 있는 줄 알아챕니다. 이무렵 ‘기른 어머니’가 몸이 많이 아파 드러눕는 바람에 병원에까지 갑니다.


  만화책을 그린 분은 주인공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깊은 자리까지 건드리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껏 일부러 안 건드렸다고 해야 할 테지요. 언제나 차분해 보이는 얼굴로 그립니다. 그러나, 짐짓 차분해 보여도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어요. 이 응어리를 여섯째 책에서 비로소 천천히 풉니다. ‘두 어머니’ 사이에서 스무 살 젊은이가 어떤 길을 가야 할는지 망설이면서 헤매는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 ‘동생일지 모르는 이 어린 남자아이가,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150∼151쪽)

- ‘도어체인 사이로 겨우 들여다본 실내는 정리돼 있어 청결해 보였다. 하지만 루카의 머리는 멋대로 자라 있었고, 옷은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그래도, 딱 하나뿐인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려 한 동생을, 난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54쪽)



  한참 망설인 주인공 아이는 ‘피가 다른 살붙이 누나’한테서 도움말을 받습니다. 차마 ‘기른 어머니’한테 ‘낳은 어머니’ 이야기를 더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이 어린 동생’한테도 이런 이야기를 물을 수 없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무한테도 아직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어느 날 굳게 마음을 먹습니다. 아주 홀가분하게 마음을 먹습니다. 언제나처럼 도시락을 쌌습니다. 손수 싼 도시락을 스스로 먹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차분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어 도시락을 쌌어요. 이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섭니다. 주인공 아이가 나서는 길은 저절로 ‘낳은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이어집니다.





- ‘근데 오빠. 대학생이나 돼서 도시락 반찬이 문어 소시지라니 너무 귀엽잖아, 라고 충고해 주는 편이 좋았을까?’ (163쪽)

- “자, 이건 루카 거야.” “응? 내 도시락?” “오늘도 널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왔어.” (173쪽)

- “자, 그럼 이걸로 손. 밥 먹기 전에는 손을 꼭 깨끗이 하고, ‘잘 먹겠습니다’라고 해야 해. 이 주먹밥의 밥풀 한 톨에도 여러 사람의 수고가 들어가 있어.” (175쪽)



  도시락이 맛있는 까닭을 사람들은 제대로 알까요? 도시락이 우리 몸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사람들은 똑바로 알까요? 도시락이 어떤 밥인지 사람들은 얼마나 알까요?


  요즈음은 초·중·고등학교 어디나 급식실이 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도시락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아이들 가방이 한결 가볍다고 할 만합니다. 급식실을 지키는 영양사는 더 나은 품질로 더 나은 밥을 지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나는 급식실 밥이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학교급식을 늘리는 움직임이 커졌을 적에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이는 교육도 복지도 문화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학교 어느 급식실에서도 ‘다 다른 아이’한테 ‘다 다르게 맞춘 밥’을 차려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급식실은 ‘다 다른 아이’한테 ‘모두 같은 밥’을 먹입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밥판’을 들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모두 똑같은 수저’를 들어야 합니다.


  어버이가 손수 싸는 도시락은 ‘도시락 뚜껑’부터 수저까지 다 다릅니다. 도시락을 싸는 보자기도 다 다릅니다. 도시락에 담는 밥과 반찬도 다 다릅니다. 비록 ‘식은 밥’을 먹더라도, ‘식은 밥’에 깃든 따스한 손길을 먹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도시락 하나 싸기도 힘들거나 바쁘다면?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참말 무슨 일을 얼마나 해야 하기에 아이들 도시락 하나를 쌀 겨를을 낼 수 없는가요? 어른들이 다니는 회사는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아이들 도시락 하나를 쌀 겨를을 내주지 않는가요?


  ‘무상 급식’은 안 해도 됩니다. ‘무상 급식’을 할 돈으로, 이 나라 어버이한테 ‘밥값 몫으로 돈’을 주거나 ‘도시락을 쌀 겨를’을 마련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왜 한 끼니나 두 끼니를 먹어야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얼마나 오랫동안 붙들려야 하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더 헤아린다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손수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낮은학년이라면 담임 교사가 아이들을 이끌어 밥을 지으면 됩니다. 초등학교 높은학년부터는 아이들이 스스로 밥을 지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영양사가 차리는 ‘단체급식’이 아니라, 아이들이 손수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마련해서 삶을 사랑스레 누릴 수 있는 길로 가야 합니다.





-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마미야 마야’가 내 생모라면, 아마미야 루카는 틀림없이 내 동생이다. 루카의 기억에 있는 아빠가 나를 닮았고 루카한테도 친아빠라면 아빠도 같을지 모른다. 엄마는 중학생 때 나를, 20대 후반에 루카를 낳은 셈이 되지만, NPO법인에 내 앞으로 보낸 메시지가 엄마 이름뿐이었던 건, 그 뒤에 결혼했다 다시 이혼한 걸까, 아니면 혼인관계는 맺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엄마에게선 아이스크림 하나밖에 얻지 못한 이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그것뿐이다.’ (184∼186쪽)



  만화책 《은빛 숟가락》을 그린 오자와 마리 님은 주인공 아이한테 ‘한 가지 일’을 맡깁니다. 주인공 아이가 스스로 풀어야 하는 ‘한 가지 일’을 맡깁니다. 스무 살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는지 모르나, 이 아이가 스스로 풀고 맺기를 바라면서 ‘한 가지 일’을 맡깁니다.


  자, 너한테 동생이 있단다, 네가 그동안 모르고 지내던 동생이란다, 이 동생을 이제 너는 알았단다, 그러면 너는 앞으로 이 동생하고 어떻게 살아가겠니, 하고 ‘한 가지 일’을 맡깁니다.


  만화책 주인공 아이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까요? ‘낳은 어머니’가 낳은 동생이지만, 나와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가니, 얼굴보기를 끝으로 등을 돌리면 될까요? ‘낳은 어머니’가 돌볼 책임이 있다지만, ‘내 동생’인 만큼, 내 동생한테 도시락을 싸서 꾸준히 찾아가자고 생각할까요? 뒷이야기는 일곱째 권을 보면 사르르 풀릴 테지요. 4347.10.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백의 소리 7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402



비바람 몰아치는 가을소리

― 순백의 소리 7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9.25.



  가을비가 내린 뒤, 전남 고흥은 무척 포근하다 못해 덥기까지 합니다. 아이들한테 긴소매옷을 입힐까 생각하던 요즈음인데, 외려 아이들한테 민소매옷을 다시 입힙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땀을 내면서 놉니다.


  서울이나 경기나 강원 쪽은 몹시 춥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가을비 내린 뒤 날씨가 춥다’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전남 바닷가 마을은 ‘같은 한국’이 아닌가 하고. 서울 경기 강원에서 추우면 한국이 다 추운가 하고.


  그러나, 신문이나 방송은 언제나 ‘서울만 한복판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신문기자와 방송피디는 거의 다 서울에서 삽니다. 신문기자도 방송피디도 거의 언제나 서울 이야기만 취재를 해서 서울을 한복판으로 삼아서 기사를 내보냅니다.




- “너는? 아무도 신경쓰이지 않아?” “신경 안 쓴다. 와 신경써야 하는데?” (7∼8쪽)

- ‘어쩐지, 오히려 차분해졌어. 마음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니까.’ (34쪽)

- ‘알고 있어. 승부는 이미 끝났다는 거. 하지만 무대에 선 이상은. 마지막까지 해내지 않으면 안 돼!’ (37∼38쪽)



  비바람 몰아치는 가을소리를 듣습니다. 어젯밤에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에는 아주 시원하면서 거세게 비가 쏟아집니다. 가을에 웬 벼락비람 하고 생각하면서도, 요 며칠 무척 더운 날씨였기 때문에, 더위를 식히려고 벼락비가 내리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락을 잘 말린 시골집은 느긋하게 가을비를 맞이하겠지요. 아직 가을걷이를 마치지 않은 시골집은 이 벼락비에 나락이 많이 떨어지겠네 싶어 근심을 하겠지요.


  적잖은 나락이나 열매가 벼락비에 떨어지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나락이나 열매가 흙바닥에 떨어지면, 이 아이들은 다시 흙이 되어요. 흙을 살리는 거름이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나락과 열매는 줄어들 테지만, 이듬해 맞이할 나락과 열매는 한결 알이 굵거나 기름질 수 있습니다.





- ‘방어적인 연주. 이 사람답다. 두 현으로도 좋은 소리를 낸다.’ (41∼42쪽)

- ‘모두들 여러 가지 소리를 가지고 있다.’ (57쪽)



  바람이 불면서 바람내음을 풍깁니다. 바람내음에는 바람이 그동안 거친 들과 숲과 바다에서 묻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귀를 열어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처마를 거쳐 주르륵 떨어지는 빗물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는 노랫소리입니다. 빗물소리는 노랫소리입니다. 처마를 적시는 빗방울도 노래알처럼 또르르르 구릅니다. 이 소리를 골고루 들으면서 달게 자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온갖 노래를 맞아들입니다.




- ‘어데서 축축한 냄새를 달고 돌아왔노. 와, 누가 언짢게 하드나. 그래, 울어라. 실컷 울어. 별 문디 같은 자슥이 있나 하고 화내그라. 할배가 니한테 샤미센 한 가락 켜 주꾸마. 그거 듣고 나면, 웃어라.’ (75쪽)

- ‘아무것도 안 들려. 아무것도 들리진 않지만, 기억. 그 마음은 살아 있다.’ (91∼93쪽)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4) 일곱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일곱째 책에서 드디어 ‘이 만화 주인공’이 ‘경연 대회’에서 홀로 악기를 켭니다. 뭇사람이 설레면서 기다리던 노래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그러고 나서, ‘이 만화 주인공’하고 불꽃이 튀기도록 겨루는 다른 아이가 홀로 악기를 켭니다.


  두 아이가 켜는 악기에서 흐르는 노랫소리는 사뭇 다릅니다. 만화 주인공인 아이가 켜는 악기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노래’가 흐릅니다. 다른 아이가 켜는 악기에서는 ‘악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가 흐릅니다.


  그러니까, 한 아이는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한 아이는 ‘소리’에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둘은 저마다 제 길을 걷습니다. 옳거나 그르지 않거나, 좋거나 나쁘지 않으며, 낫거나 덜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아이는 아직 ‘노랫소리’까지 나아가지는 못해요.





- ‘니 소리로 싸워라!’ ‘알았다, 할배. 잠깐 소리의 고향을 찾아갔을 뿐이니까!’ (98∼99쪽)

- ‘지금 필요한 것은, 세 현의, 공명! 내가, 지금 켜고 싶은 것은. 들려주고 싶은 것은. 심층의 소리.’ (116∼119쪽)



  노래를 듣는 사람은 가슴이 사랑으로 벅차오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가슴이 크게 뜁니다. 앞으로 노래와 소리가 만나서, ‘노랫소리’를 이룰 수 있다면, 이때에는, ‘노랫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가슴에 어떤 이야기가 피어날 수 있을까요?


  경연 대회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경연 대회에서 1등이 되건 2등이 되건 아무렇지 않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노래는 등수나 순위를 가리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노랫소리라 한다면, 언제나 삶을 사랑하면서 따사롭게 흐릅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엊저녁부터 드세게 몰아치던 가을날 벼락비 소리가 멎을 수 있을까요. 4347.10.2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일이 4 - 노동자의 길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401



톱니바퀴, 빨갱이, 노동자, 그러나

― 태일이 4

 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 2009.2.23.



  박태옥 님이 글을 쓰고 최호철 님이 그림을 그린 《태일이》(돌베개,2009) 넷째 권을 읽습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된 《태일이》 가운데 넷째 권은 전태일 님이 서울 청계천에서 재단사로 일하는 동안 겪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좁다란 공장에서 톱니바퀴가 되어 굴러가는 이녁을 되새기고, 좁다란 공장에서 쥐꼬리보다 작은 일삯을 벌려고 몸과 마음이 모두 다치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고단한 삶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아버지를 지켜봅니다. 시키는 대로 굴러가는 쳇바퀴가 아니라, 스스로 모임을 열고 동무를 사귀면서 ‘우리가 할 말을 하자’는 아주 조그마한 이야기조차 꽉 막히고 마는 어둡고 까마득한 곳에서 힘들면서 슬픈 나날을 잇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60년대 남녘에서 ‘노동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을까요.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왜 노동자는 제 목소리를 내면 안 되었을까요. 식민지 노예도 아닌데 왜 노동자는 아주 낮은 일삯을 받으면서 온갖 거친 말을 들어야 했을까요. 군대를 앞세워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왜 총칼을 휘두르며 윽박질렀을까요.



- “재단사, 나 좀 봐요. 월급이 이게 뭐야, 너무 적잖아! 이번에 일이 많기도 했지만 모양이 어려웠던 것도 재단사가 잘 알잖아. 원래 재단사가 한 벌당 얼마씩 받아야 한다고 사장님한테 얘기해야 하잖아. 그런데 왜 일한 만큼 돈이 안 나오는 거야? 열심히 일한 시다나 보조들한테 할 말이 있어야지.” “저, 누나. 이번만.” “그리고 먼저 재단사가 일을 망쳐서 본 손해를 왜 우리가 져야 하냐고? 그건 사장님이 책임져야지. 우린 죽어라 고생하고 사장님은 하나도 손해 안 보는 게 말이 돼? 그리고 그때 재단사는 엉망으로 일했어도 우리가 열심히 해서 물량 맞춰 준 걸로 아는데 무슨 손해가 났다는 거야? 혹시 재단사만 따로 더 받은 거 아냐?” (32∼33쪽)





  서른 해 즈음 앞서, 어머니는 우산 꿰매는 일을 하셨습니다. 일을 맡기는 집에 가서 일감을 받아 집에서 바느질로 한 땀 두 땀 꿰매는데, 나는 옆에서 우산살 꼭대기에 동글천을 끼운 다음, 우산 겉천을 꼬챙이 쪽에 끼우고는, 꼭지 마개를 살짝 조여서 어머니한테 건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잰 손놀림으로 살과 천을 꿰맵니다. 이에 앞서 살과 천을 잇는 작은 꼭지마개도 하나하나 꿰매요.


  어머니가 꿰맴질을 마치면, 나는 우산을 차곡차곡 예쁘게 접습니다. 어느 한 군데 눌리거나 어긋나면 다시 접어야 합니다. 반듯하게 펴서 ‘새 것’이 되도록 접습니다. 아무렴, 새 우산으로 팔 물건이니 ‘새 것’이 되도록 곱게 접어야지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접은 뒤 우산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일을 맡기는 집’에 가져갑니다. 우산 하나는 무겁지 않지만, 열이나 스물이 되면 제법 묵직합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비닐천은 석유 냄새가 물큰합니다. 우산을 꿰매고 접는 동안 손과 몸에 석유 냄새가 배고, 접기까지 마친 우산을 들고 나르면 옷에도 석유 냄새가 뱁니다.


  이 일을 하신 어머니가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만 아주 적은 돈인 줄 압니다. 그래도 이 일거리를 아쉬워 했고, 이 일거리는 아버지가 모르게 했습니다. 이무렵 아버지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오늘날 아닌 예전에는 교사 한 달 일삯이 무척 적었어요.



- ‘내가 하는 일 외에는 무아지경. 내가 없다. 일의 순서대로 순간마다 해야 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나는 내 일의 방관자, 내 육신은 일을 하지만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공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면 긋고 펴고, 또 재단 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할 땐 역시 내가 잘랐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왜 이렇게 의욕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생각히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된 10시 무렵이다.’ (60∼61쪽)





  만화책 《태일이》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일을 하지만 일을 한 대가를 거의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작은 사람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틀림없이 누군가는 돈을 벌 텐데 누가 돈을 버는지 알 길이 없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고작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공장에서 시달리거나 들볶이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2000년대로 접어든 남녘에서 《태일이》에 나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녘에서 사라진 비좁고 캄캄한 공장은 다른 나라로 옮겼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태일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인도에서 이 같은 이야기는 똑같이 불거집니다.


  중국에도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이는 어떻게 하루하루 살아갈까요. 베트남에도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겠지요. 있다면, 그이는 어떻게 꿈을 키우면서 힘을 낼까요. 인도에도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으려나요. 있다면, 그이는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제 삶과 이웃 삶을 지키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 “특히 태일 씨는 할 얘기가 많은가 봐요.” “그런데 어쩌죠? 벌써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네. 뭐 점심시간이 워낙 짧으니.” “같이 가요. 저 태일 씨 공장 있는 같은 층에서 일하는 거 모르셨죠?” “그래요? 잘됐네요. 자주 볼 수 있겠네요.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85쪽)





  스무 해쯤 앞서, 나는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았습니다. 새벽 두 시부터 일을 하는데, 가끔 ‘신문 한 부 사겠다’면서, 신문배달 자전거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의 다 ‘신문값을 100원이든 200원이든 더 에누리를 해서 사려는 마음’입니다. 참말 신문 한 부 바라서 부르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만. 왜 사람들이 신문배달부를 부르는가 하면, 신문배달부는 신문을 집집마다 돌리러 다니지, 주머니에 잔돈을 챙겨서 다니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신문을 돌리든, 자전거를 몰아 신문을 돌리든, 쇠돈 몇 푼이건 지갑이건 주머니에 넣지 않아요. 신문을 돌린 적 있는 사람은 알 테지만, 쇠돈 몇 개조차 무겁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지만, 50부를 돌리고 100부를 돌릴 무렵이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요. 200부쯤 돌릴 무렵에는 입에서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일꾼더러 ‘신문 한 부 사겠다’고 하면서 만 원짜리나 천 원짜리 종이돈을 깊은 새벽나절에 내미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신문값이 잔돈으로 내밀면서 사려고 하던 사람을 거의 못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신문을 몰래 훔칩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연립주택에 넣으려고 들어가면 슬그머니 자전거 바구니에서 한 부 빼냅니다. 새벽운동을 한다면서 신문을 훔치는 이가 있고, 동네를 순찰한다면서 신문을 훔치는 경찰이 있습니다. 한 부라도 사라지면 신문을 돌리다가 애먹기 때문에, 훔친 이를 보면 끝까지 쫓아가서 도로 찾아야 합니다.



- “걱정 마세요. 전 빨갱이도 아니고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니까요. 전 그저 우리가 좀더 잘 사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전 태일 씨를 믿어요. 빨갱이라니요” “그래, 우린 빨갱이가 아냐. 빨갱이가 무서워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도 못 하면 안 되잖아. 평화시장을 움직이는 재단사일 뿐이야.” “우리끼리 이렇게 친하게 지내자는데 누가 뭐라겠어?” (119쪽)




  사회를 억누르고 정치를 짓밟으며 문화를 옥죄는 이들은 으레 ‘빨갱이’라는 한 마디를 툭 던집니다. 민주와 평화와 평등이 없는 나라이기에, ‘빨갱이’라는 한 마디는 꽤 오랫동안 힘을 내며 목을 조입니다.


  어느새 ‘이웃’이라는 이름은 사라집니다. ‘빨갱이’라는 이름이 떠돕니다. 어느새 ‘동무’라는 이름은 스러집니다. ‘적’이나 ‘경쟁자’라는 이름이 흐릅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정치권력자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동무라면 돈 때문에 악다구니를 벌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으로 지낸다면 도시를 자꾸 키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어깨동무를 한다면 언제나 즐겁게 삶을 지으면서 두레를 합니다.


  저 사람은 노동자나 사장이 아닙니다. 내 이웃입니다. 저 사람은 빨갱이나 대통령이 아닙니다. 내 동무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살며 함께 웃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벼슬아치는 ‘법’을 만들었으나 법을 살피지도 않고 법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나라를 이룬 사람들은 ‘법’을 모르면서도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았으나, 바로 이 ‘법’ 때문에 등허리가 휘면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근로기준법이든 노동법이든, 법이 있으면서 왜 법을 따지지 않고 지키지 않으며 살피지 않을까요. 노동3권이 있다지만, 노동3권을 짓밟거나 흔드는 일은 왜 예나 이제나 똑같이 일어날까요.


  전태일기념관이 서고, ‘전태일 동상’과 ‘전태일 다리’가 서울 청계천에 생깁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아직 노동자도 여느 사람들도 그예 짓밟히는 일이 똑같이 생깁니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된 분은 전태일 동상에 꽃을 바치기도 했다지만, 꽃을 바치기는 하더라도 법을 지키는 일은 없구나 싶습니다. 4347.10.2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