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스기 가의 도시락 9
야나하라 노조미 지음, 채다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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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22



이제 망설이지 말고 나아가자

― 다카스기 家의 도시락 9

 야나하라 노조미 글·그림

 채다인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2015.5.25.



  어떤 일이 잘 되거나 안 되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라면을 잘 끓이거나 못 끓이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집살이를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가만히 읽으면서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오늘 안 되면 모레에 다시 하고, 모레에 또 안 되면 글피에 거듭 하면 됩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일어서면 되며, 자꾸자꾸 일을 그르친다면 일을 안 그르칠 때까지 기운차게 새롭게 하면 됩니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새롭게 한 발 두 발 떼듯이, 어린이도 어른도 저마다 활짝 웃으면서 한 가지씩 즐겁게 하면 됩니다.



“그렇구나, 야생의 후박나무는 크구나. 크고 모양이 좋은걸. 오! 이게 후박나무 향기구나. 어전지 코비 교수님이 후박나무잎을 이야기한 이유를 알 것 같은데.” (38쪽)

“후박나무잎을 접시로 쓰니 굉장히 멋지네요.” “싱싱한 잎사귀의 향이 좋아.” “치라시 초밥을 얹으면 후박나무잎 초밥이 되겠군.” (41쪽)




  야나하라 노조미 님이 빚은 만화책 《다카스기 家의 도시락》(AK커뮤니케이션즈,2015) 아홉째 권을 읽으면, 망설이는 사람과 더는 망설이지 않으려고 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망설이느라 정작 스스로 하고픈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더는 망설이지 않으면서 이제부터 스스로 하고픈 일을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망설이는 사람은 언제나 망설이고 또 망설입니다. 더는 망설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제나 저제나 망설일 까닭이 없습니다. 앞을 기쁘게 바라보면서 내 발걸음을 즐겁게 누립니다.



‘말해도 괜찮아. 분명 쿠루리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낼 거야. 나는 거기에 답해 주면 되고.’ (44∼45쪽)

“솔직해지라고. 자신을 볼 수 없는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으니까.” (59쪽)

‘지나간 기억과 지나간 상상밖에 없었던 내가 너와 함께 있기 위해서 움직였어. 그건 자신의 이론을 간접체험하는 것.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67쪽)




  어떤 일을 잘 해내야 훌륭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못 해내기에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즐겁거나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할 때에 훌륭합니다. 즐거움도 기쁨도 없이 마지못해 일손을 붙잡는다면 바보스럽습니다.


  어떤 일을 즐겁고 기쁘게 해낼 때에 가없이 훌륭합니다. 아무런 즐거움이나 기쁨이 없이 어떤 일을 해낼 때에는 그저 그렇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삶을 가꾸면서 힘썼으나 어떤 일을 끝내 해내지 못하면, 아무래도 살짝 아쉬울 테지만, 즐거움이나 기쁨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조차 없이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그야말로 괴로우면서 쓸쓸합니다.



‘자립이란 금전만이 아니라고 어떻게 전해 줘야 할까. 분명히 이건 보호자로서 내게 남겨진 얼마 안 되는 일 중 하나.’ (79쪽)

“이게 지리일세. 통상의 학문은 먼저 답을 정해 놓지만, 우리는 먼저 뛰어드는 거지. 보고, 가 보고, 해 보고, 테이터를 뽑고, 검증하고, 비교하고, 생각한다.” (88∼89쪽)



  길이 있으니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길이 없으니 새롭게 길을 내면서 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이 맞으니 이 길대로 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이 맞아도 저 길로 일부러 에돌아서 새로운 숨결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삶만 있지 않고, 한 가지 사랑만 있지 않으며, 한 가지 길만 있지 않습니다. 열 가지 삶이랑 백 가지 삶이랑 천 가지 삶이 있습니다. 끝없이 너른 삶이 있고, 언제나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함께 가꾸는 삶이 있고, 시나브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씩씩하게 혼자서 일구는 삶이 있습니다.




“내가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래. 언제나 보고만 있고, 귀찮아 하고, 도망치기만 하고, 사람의 마음을 모르고, 움직이지 않고, 나는 얼마나 남에게 용서받아 온 걸까.” (118쪽)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몸 주변에 있는 것 전부 어디에서 와서 왜 여기에 있는가 그들은 알고 있어. 그 지식이 자신감이겠지. 불안정한 자연환경에서 몸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는 건.” (159쪽)



  만화책 《다카스기 家의 도시락》은 열째 권으로 마무리를 짓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열째 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요? 아무래도 ‘두 사람’이 저마다 스스로 씩씩하게 서는 이야기를 보여줄 테지요. 스스로 가슴에 품은 꿈대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줄 테고, 스스로 마음을 아끼는 숨결을 보여주겠지요.


  여름에 벚나무에 버찌가 달리니, 나무를 타고 올라서 열매를 따먹습니다. 여름날 후박나무는 잎사귀가 도톰하면서 짙푸르기에 ‘잎접시’로 쓰면 무척 향긋합니다. 망설일 까닭이 없습니다. 버찌를 먹고, 후박잎을 누리면 됩니다. 들딸기를 훑고, 찔레싹을 꺾으면 됩니다. 오디를 줍고, 밤꽃내음을 맡으면 됩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이고, 언제나 기쁜 이야기가 샘솟는 삶입니다. 4348.6.1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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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후루 23
스에츠구 유키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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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23



내 마음에 네 숨소리를 담는다

― 치하야후루 23

 스에츠구 유키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4.25.



  스에츠구 유키 님이 빚은 만화책 《치하야후루》(학산문화사,2014) 스물셋째 권을 가만히 읽습니다. 카루타라는 카드를 사이에 놓고 벌이는 싸움과 다툼과 만남과 이야기를 가만히 읽습니다. 두 사람은 카루타 카드를 앞에 놓고서 기쁨을 나눌 수 있고, 슬픔을 북돋울 수 있으나, 차분한 마음이 되기도 하며, 차가운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때에는 싸움이나 다툼으로 불꽃이 튀지만, 어느 때에는 사랑과 꿈이 곱게 피어납니다. 어느 때에는 차디차거나 매몰찬 바람이 불지만, 어느 때에는 포근하고 보드라운 노래와 같은 바람이 붑니다.



“아, 아까웠어. 굉장한 시합이었는데! 하라다 선생님과 아라타의, 두 사람의 카루타가 참 달라서 재미있었어.” (20∼21쪽)

“나, 니 좋아한다, 치하야. 타이치가 벌써 말했는지는 몰라도, 난 대학은 인자 이쪽에서 다니기로 했다. 혹시, 니도 마음이 있다면, 같이 카루타 하제이.” (26∼28쪽)



  카루타 카드를 놓고 누가 더 겨루기를 잘 하는가 하고 대회를 엽니다. 대회에서 으뜸 자리를 거머쥐는 사람이 있습니다. 으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고, 으뜸 자리에 올라선 뒤 좀처럼 내려오지 않을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카루타 카드가 아니더라도 둘이 두는 바둑이나 장기도 이기는 사람하고 지는 사람이 나옵니다. 잘 두어서 이기는 사람은 급수가 높습니다. 잘 두지 못해 으레 지는 사람은 급수가 낮습니다. 그런데, 장기이든 바둑이든 카루타이든, 왜 급수를 두어야 할까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잘 두면 얼마나 대단하고, 못 두면 얼마나 대수로울까요. 으뜸을 가리는 일도 재미있을 수 있는데, 가장 높다고 하는 자리를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저마다 가슴이 허전하거나 텅 비지는 않을까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누구한테나 즐겁거나 재미있는 놀이였을 텐데, 급수와 점수와 등수를 따지면서 어느새 즐거움과 재미하고는 동떨어지면서 ‘더 놀라운 솜씨나 손재주’로 기울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노력도 재능도 니가 빠지는 건 없다 본다만도. ‘없는’ 것은 만났나?” “심술과 경험, 정열, 애정, 애정. 애정.” (36∼37쪽)



  우리 삶을 든든히 받치는 기둥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삶이 빛납니다. 사랑이 있기에 아이와 어버이 사이에 기쁜 웃음이 흐릅니다. 사랑이 있으니 두 어른은 서로 짝꿍이 되어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사랑을 고이 아끼고 보듬으면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스오 씨의 움직임에 휘둘리지는 않아. 눈을 감지 않아도 그 정도의 기분으로 집중하라는 뜻. 소리를 잘 듣고, 한 점을 노린다.’ (117쪽)

‘엄마하고는 왠지, 가족이란 느낌이 안 드니까. 카루타 카드가 더 가족 같아. 카루타 카드.’ (162쪽)



  내 마음속에 네 숨소리를 담습니다. 네 마음속에 내 숨소리가 담깁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서로서로 숨소리를 주고받습니다. 미움이나 시샘 같은 마음이 아닌,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마음이 되도록 고운 숨소리를 주고받습니다. 만화책 《치하야후루》에 나오는 아이들도, 만화책이 아닌 우리 삶터에 있는 모든 아이들도, 저마다 마음자리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6.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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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슬란 전기 3 - 만화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다나카 요시키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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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23



노예를 부리는 권력자는 무엇을 보는가

― 아르슬란 전기 3

 다나카 요시키 글

 아라카와 히로무 그림

 김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3.25.



  밥상에 어떤 밥을 올리든 즐겁게 노래하면서 웃고 사랑을 속삭이면 언제나 맛있고 아름다운 밥이 됩니다. 상다리가 휘도록 밥상이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즐겁게 노래하지 않거나 웃지 않거나 사랑을 속삭이지 않으면, 수저를 든 손이 홀가분하지 않을 뿐더러, 밥맛을 알기도 어렵습니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누구이든 기쁘게 노래하면서 웃고 사랑을 나누면서 길을 걸으면 언제나 신나면서 재미나게 나들이를 누립니다. 고운 옷을 입거나 예쁜 신을 신어야 나들이가 신나지 않습니다. 이름난 곳으로 찾아가야 나들이가 멋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쁘게 노래하지 않거나 웃지 않거나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면, 나들이는 고단하거나 따분하기 마련입니다.



“언제쯤 돼야 우리를 아자트(자유민)로 만들어 줄 거야?” “성문을 열어서 도와줬잖아!” “협조하면 굴람(노예)에서 해방시켜 준다며!” “너희를 믿고 우린 주인을 죽였던 말야! 근데 아직 아무것도 안 해 주잖아!” “얼른 땅을 줘! 돈을 줘!” “이대론 굶어 죽겠다고!” (18쪽)

“냉큼 오두막으로 돌아가! 굴람이 큰길로 다니지 말라고!” “그럴 수가. 루시타니아 군이 입성하도록 도와주면 굴람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했잖아!” “멍청한 놈들! 천한 이교도인, 그것도 노예인 너희가 영광스러운 이알다바오트 신의 사도인 우리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 줄 알아? 기어오르고 앉았어! 야! 어서 돼지우리로 돌아가!” “약속이 다르잖소!” “너희는 소나 돼지하고도 약속을 하나?” (111∼112쪽)



  다나카 요시키 님이 쓴 이야기에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그림을 입힌 《아르슬란 전기》(학산문화사,2015) 셋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아르슬란 전기》는 ‘파르스 왕국’과 ‘루시타니아’가 벌이는 싸움을 그립니다. 루시타니아는 파르스 왕국을 뒤집어엎었고, 파르스 왕국 왕태자는 엎어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면서 노예를 거느리고 나라를 지킨 파르스 왕국이었지만, 루시타니아는 꼼꼼하게 계획을 짜서 무너뜨렸습니다. 파르스 왕국에서 푸대접을 받던 노예를 부추겨서 파르스 왕국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꾀했습니다.


  루시타니아는 노예를 부추길 적에, 파르스 왕국이 무너지면 노예를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파르스 왕국이 무너진 뒤 루시타니아는 노예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이웃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속셈일 뿐이었고, 이웃나라를 무너뜨리면서 문화도 삶도 사회도 모두 박살을 내려는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칼란이고 최대한 빨리 전하를 잡아야만 한다면, 우선 어딘가 적당한 마을을 습격해 불을 지를 겁니다.” “마을에 불을?” “그 다음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지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고, 그걸 포고해 전하를 협박하는 것이 우선 한 가지 방법. 전하께서 출두하지 않는 한, 잇달아 마을을 습격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겁니다.” (21쪽)

“칼란과 부하들의 죽음을 조문하는 노래를 바쳐 주지 않겠나? 엑바타나에 가족이 있는 자도 있을걸세. 그런데도 배신에 가담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걸세.” (101쪽)



  파르스 왕국 왕태자인 아르슬란은 이제 어린 사람으로만 지낼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온누리를 깊이 살펴야 하고, 널리 헤아려야 합니다. 아버지한테서 나라살림을 물려받아서 지켜야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일어서서 생각(정책)을 펴야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끊이지 않는 전쟁을 마주하면서 철이 들어야 합니다. 죽이고 죽는 싸움터에서 살아남으며 슬기를 키워야 합니다.


  왕태자 아르슬란은 노예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노예는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왕태자도 여느 마을사람도 이웃나라 사람도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인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전쟁을 끝내는 길을 생각해야 하고, 전쟁을 끝낸 뒤에 어떠한 길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 할 일은 뚜렷합니다. 나라를 잘 이끌어야 합니다. 나라를 멋지게 이끌거나 재미나게 이끌려 하지 말고 잘 이끌어야 합니다. 한 나라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어우러질 길을 살펴서 정책을 꾀해야 합니다. 한 나라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서로 아끼면서 어깨동무할 길을 헤아려서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아무리 이교도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귀중한 서적을 연구도 하지 않고 불속에 던져도 되겠습니까? 불태운다 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가치를 판단한 다음에 태우는 것이.” “신성모독자 같으니! 이 세상에 책이란 이알다바오트 성전 하나면 충분하다. 악마가 쓰게 한 책은 멸해야만 한다.” “하오나, 의학서까지도 태운다는 건.” (121쪽)

“자네는 다이람의 영주였으면서도 굴람을 해방하고 영지까지 반납했잖나.” “나야 괴짜니까. 게다가 굴람을 해방한다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닐세. 그 다음에 더 힘들거든. 탁상공론만 가지고는 안 돼.” (133쪽)



  나라이든 사회이든 겨레이든 계급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한테는 높거나 낮은 계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분도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지위도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계급이나 신분이나 지위는 어떠한 꿈이나 사랑을 이루어 주지 않습니다. 계급이나 신분이나 지위로는 평등이나 자유나 평화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웃으려면 계급이 없어야 합니다. 기쁘게 춤추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면 신분이 없어야 합니다. 아름답게 어우러지면서 사랑을 속삭이려면 지위가 없어야 합니다.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에 나오는 아르슬란 왕태자는 이를 어느 만큼 알아차리거나 깨달을까요. 어린 왕태자는 이를 언제쯤 알아차리거나 깨달을까요. 이를 알아차리거나 깨달은 뒤에는 어떤 길을 어떻게 갈 만할까요.



“아군을 늘리려면 전하께서 장래에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을 파르스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십시오. 왕위의 정통성은 혈통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가 보장해 주는 것이니까요.” ‘굉장히 에둘러 말하는걸. 나는 좀더 직접적인 책략을.’ “외람되오나 왕이란 무릇 책략이나 무용을 뽐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신하 된 자의 역할이지요.” (180∼181쪽)

“정복이 끝나면 루시타니아인은 파르스 문화를 근절하려 들 겁니다. 파르스어 사용을 금지하고 파르스 이름도 루시타니아 풍으로 바꾸고, 파르스 신화의 신들을 모시는 전당을 파괴해 이알다바오트 신의 전당을 곳곳에 세우겠지요.” “그게 사실인가?” “야만인이란 그런 법입니다. 타인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182쪽)



  노예를 부리는 권력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노예를 억누르거나 짓밟으면서 부리는 권력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아끼지 않습니다. 참다운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어깨를 겯는 길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지구별에는 노예 제도를 두는 사회는 없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노예라는 계급이나 신분이나 지위인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도 비정규직도 푸대접을 받습니다. 돈이 없거나 이름값이 낮다거나 힘이 여린 사람도 으레 푸대접을 받습니다. 졸업장이라고 하는 학력에 따라 일삯이 달라지기도 하고, 어떤 졸업장이냐에 따라서 계급이나 신분이나 지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노예’라고 하는 이름은 안 쓸 뿐, 마치 노예와 같다고 할 만한 사회 얼거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아름다운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사랑스러운 동무로 사귈 수 있을까요? 너와 내가 즐겁게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삶과 살림을 알뜰살뜰 가꿀 수 있을까요? 한국 사회에서 가난이 사라지고 기쁜 나눔이 드넓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 넷째 권을 기다립니다. 4348.6.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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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님과 나 1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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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06



내 곁에서 노래하는 새 한 마리

― 문조님과 나 1

 이마 이치코 글·그림

 이은주 옮김

 시공사 펴냄, 2003.6.20.



  우리 집은 새가 깃드는 집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제법 크게 자란 후박나무가 있고, 뒤꼍에도 제법 크게 자란 감나무가 있습니다. 우리 집 나무는 매화나무와 모과나무도 하늘 높이 가지를 뻗습니다. 무화과나무와 초피나무도 해마다 키를 높입니다.


  이리하여 온갖 새가 아침저녁으로 깃들고, 아예 처마 밑에 둥지를 틀기도 합니다. 먼저, 제비가 처마 밑에 둥지를 짓습니다. 처마 밑 제비집은 모두 석 채입니다. 이 제비집에는 봄부터 늦여름까지 제비가 머뭅니다. 가을이 되어 제비가 따순 나라로 돌아가면, 어느새 딱새랑 참새가 제비집에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마루와 마당 사이를 오가다가 제비집에서 파르르 날아오르는 딱새랑 참새를 볼 때면, 어느 모로는 귀엽고 어느 모로는 웃음이 나옵니다. 제비가 멋지게 지은 집이기에 다른 작은 새도 깃들 만하지만, 웬만하면 딱새나 참새가 스스로 둥지를 지으면 한결 나을 텐데 싶습니다.





- ‘손이 동그랗게 모여 있으면, 마음대로 들어와 잠을 잔다. 솔직히 말해서 방해되지만 저항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하던 일을 중단하고 문조 님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함께 잠들고 만다.’ (10쪽)

- ‘일하는 중에 펜을 든 오른손에 자리를 잡으면 무척 방해가 된다. 무슨 이유에선지 오른손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같다.’ (20쪽)



  이마 이치코 님이 빚은 만화책 《문조님과 나》(시공사,2003) 첫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마 이치코 님은 이녁 집에 ‘문조’라 하는 조그마한 새를 기른다고 합니다. 만화를 그리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라고 하니, 집 바깥으로 나다닐 겨를은 무척 적겠지요. 온 하루를 집에서 보내야 한다면, 《문조님과 나》를 그린 분처럼 집에서 작은 새나 짐승을 기를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이름을 보면 “문조와 나”가 아닙니다. “문조‘님’과 나”입니다. 귀염둥이로 기르는 새가 아니라 ‘님’을 모시면서 사는 셈이라고 할 만합니다.




- ‘생물을 키운다는 것은 정말 멋지다. 이런 커다란 기쁨을 주다니. 하나칭, 고마워. 후쿠피의 알을 낳아 줘서 정말로 고마워.’ (39쪽)

- ‘30개째에 마침내 부화한 이 새끼는 결국 수컷이었기 때문에, 보이는 그대로 나이조(내장)라 이름지었다. 현재까지 통산 100개 이상을 산란했지만, 살아남은 건 나이조 한 마리뿐.’ (47쪽)



  만화책 《문조님과 나》에 나오는 작은 새는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삽니다. 작은 새를 돌보는 만화가는 작은 새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마치 아기를 돌보며 지내는 듯한 삶입니다. 아기가 물을 쏟든 책을 찢든 언제나 놀이로 누리듯이, 작은 새도 언제나 놀이를 하듯이 만화가 둘레에서 얼쩡거립니다. 만화를 그리는 손아귀로 파고들어서 잠을 자려 하고, 놀아 달라 하고, 먹이를 달라 합니다.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작은 새와 함께 살면서 만화가는 새로운 만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바로 ‘작은 새와 지내는 나날’을 만화로 그릴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만화를 그린다면 ‘아기를 돌보는 나날’을 만화로 그릴 수 있어요.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어버이라면, 아기와 보내는 나날을 글로 쓰거나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 ‘아직 삼킬 힘이 없으므로, 이쑤시개에 약간의 물을 묻혀 물과 함께 목 안쪽으로 밀어넣어 준다. 아무튼 작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작업이다. 이런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약 2시간마다 먹이를 준다.’ (60쪽)

- ‘5일째 저녁, 약하긴 하지만 겨우 조금 소리를 내게 되었다. 작은 생물은 좋아지는 것도 나빠지는 것도 순식간. 거꾸로 보면, 작으면 작을수록 원시적인 생명력은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67쪽)



  작은 새는 그야말로 작습니다. 어른이 한손으로 쥐어도 작지만, 아이가 한손으로 쥐어도 몹시 작습니다. 작은 어미 새가 새끼를 낳으면 더할 나위 없이 작습니다. 먹이를 주거나 물을 먹일 적에도 몹시 마음을 기울여서 해야 합니다.


  《문조님과 나》를 그린 분은 새끼 새를 돌보면서 두 시간마다 먹이를 주었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는 으레 삼십 분마다 젖을 먹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똑같습니다. 아기는 낮이나 밤을 따지지 않아요. 아기는 밤이라서 자고 낮이라서 깨지 않습니다. 자고 싶을 적에 자고, 깨어서 놀고 싶을 적에 놉니다. 그러니,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제껏 겪은 적이 없는 새 삶’을 온몸으로 겪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로 지내는 내’가 ‘예전에 아이로 지낼 적’에 우리 어버이도 나를 이렇게 돌보았구나 하고 온마음으로 느끼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 ‘심야에 혼자서 일에 몰두하는 나. 혼자 알에 집중하고 있는 하나칭. 순진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는 하나칭.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새. 지금 깨어 있는 것은 우리 둘뿐. 둘 사이에 따뜻한 공감과도 같은 것이 흐르고, 그리고 뜨겁고 커다란 똥을 손에 쥐어 주었다.’ (99∼100쪽)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거나 글로 쓰거나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새를 돌보는 일은 힘들지 않습니다. 힘과 마음을 오롯이 쏟아야 할 뿐입니다. 아기를 보살피고 아이와 함께 지내는 나날도 힘들지 않습니다. 힘과 마음을 몽땅 쏟아야 할 뿐입니다.


  《문조님과 나》를 그린 분이 새똥을 손에 쥐듯이, 나도 두 아이를 돌보면서 날마다 똥을 손에 쥐며 살았습니다. 똥기저귀와 똥바지와 오줌기저귀와 오줌바지를 날마다 수없이 빨고 말리고 개고 다리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새는 만화가한테 날마다 기쁨을 베풉니다. 작은 아이들은 어버이한테 날마다 사랑을 베풉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언제나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새입니다. 나는 어미 새이면서 아기 새입니다. 우리 아이는 아기 새이면서 어미 새입니다.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도 어미 새이면서 아기 새입니다. 함께 노래하면서 삶을 즐기는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4348.6.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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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교실 10
마츠이 유세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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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20



‘암살 수업’을 빗대어 ‘사회 비판’을?

― 암살교실 10

 마츠이 유세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10.25.



  마츠이 유세이 님 만화책 《암살교실》(학산문화사,2014) 열째 권을 읽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만화를 더 읽지 않기로 합니다. 나로서는 이 만화에서 재미나 즐거움이나 보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열째 권에서 멈춥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더 잘 죽일’ 수 있는가를 놓고 권수가 늘어나는 만화책은 아이한테도 보여줄 만하지 않고, 어른으로서도 재미나게 볼 만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아무리 ‘사람 죽이는 이야기’를 그리는 만화라고 하더라도, 이 만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내 몸을 갈고닦아서 멋진 암살범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할 어린이나 젊은이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나올 수도 있겠지요.



- “대단하네, 카야노. 달걀파동 뉴스를 보고 1주일 만에 이걸 다 고안하고 수배한 거야?” “응, 사실은 전부터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 (17쪽)

- “안 돼! 애정을 담아서 만든 푸딩을 폭파할 수는 없어!” “아니, 진정해, 카야노!” “야, 푸딩 만들다가 정들었냐, 카야노? 어차피 날려 버리려고 만든 거잖아!” “싫어!” (24쪽)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 《암살교실》은 사회를 에둘러 나무라는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92쪽에 나오는 ‘비겁한 방법만 쓰는 게 어른’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사회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에서 ‘암살 수업’을 한다는 일이 사회 비판이기도 할 테고, 지구별에 떨어진 무시무시한 외계전투족을 고등학교 아이들더러 ‘죽이라’고 시키면서 ‘돈은 있는 대로 다 대어 주겠노라’ 떠넘기는 어른을 보여주는 모습이 사회 비판이라고 할 테지요.


  뜻이 없는 책은 없습니다. 뜻이 없이 그리는 만화는 없습니다. 살곶이만 보여주는 만화를 그리든, 치고 박으며 다투는 모습만 보여주는 만화를 그리든,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만 가득 채우는 만화를 그리든, 모두 ‘만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화를 즐기는 사람은 이들대로 즐겁게 이 만화를 보면 됩니다. 이러한 만화를 안 즐기는 사람은 이들대로 안 보면 될 테지요.



- “이걸 할 수 있으면, 어떤 장소도 암살이 가능한 필드로 만들 수 있다.” (31쪽)

- “언제나 비겁한 방법만 써서.” “그런 게 어른이거든.” (92쪽)

- “이토나 군, 선생님도 학습을 한답니다. 선생님이 하루하루 성장하지 않고,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98쪽)



  교사도 학생도 배우는 사람입니다. 안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우지 않는 교사는 학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와 맞물리는 이야기가 될 텐데, 교사를 가르치지 못하는 학생은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암살교실》은 그저 ‘암살’을 이야깃감으로 삼아서, 무언가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요? 암살 솜씨를 배우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요? 군인이 될까요? 군인이 되면 ‘평화를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는가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은 배운 적이 없이 ‘서로 죽이고 때리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짓’만 배운 아이들이 ‘어른이 된 뒤에 참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평화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 “한두 번 졌다고 뭘 비뜰어지고 난리냐? 언젠가 이기면 되는 거잖아! 문어잡이도 그렇지. 꼭 지금 죽여야 맛이냐? 100번 실패하면 어때. 3월까지 딱 한 번만 죽이면,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건데.” (161∼162쪽)



  가시내 옷을 벗겨서 알몸 사진을 찍고는 이를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는 사내가 꽤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시내와 사내한테 살곶이를 시키고는 이를 사진으로도 찍어서 책을 어마어마하게 찍습니다. 이런 책은 무척 잘 팔린다고 합니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전쟁을 참으로 자주 다루고, 이런 영화나 만화는 참으로 잘 팔리거나 읽힙니다. 아무래도 사람이라고 하는 목숨붙이는 싸움이나 바보짓을 일삼을 때에 ‘사는 보람’을 느끼는 듯합니다.


  그러면, ‘암살’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무엇이 남을까요? 암살 아닌 시험공부를 가르쳐서 대학교에 잘 붙도록 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암살교실’인 학교도 바보스럽지만, ‘입시지옥’인 학교도 바보스럽습니다. 요즈음 교육부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쓴다고 하면서 돈을 엄청나게 쓰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도 참으로 바보짓입니다.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쟁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어리석습니다. 어리석은 길을 가면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숙합니다. 어리숙한 채 하루하루 보내다가 죽는다면 그야말로 바보스럽습니다.


  ‘암살교실’ 아이들은 어떻게 ‘외계전투족’을 무찌르거나 죽일 수 있을까요? 길은 아주 쉽습니다. 마음으로 ‘너 죽어라’ 하고 외치면 됩니다. 온마음을 기울여서 ‘너 죽어라’ 하고 외치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어떤 무기나 솜씨를 쓰든 아무도 못 죽입니다. 죽이는 시늉만 할 뿐입니다. 총칼로 독재권력을 으르렁거린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짓밟힌 사람들은 끝끝내 일어서서 모든 독재권력을 몰아내고야 맙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슬기와 고운 사랑을 가르치면 모든 ‘암살’과 ‘전쟁’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이를 가르치지 못하면, 늘 죽이고 죽는 쳇바퀴에 갇혀서 맴돌이만 하겠지요. 지구별에 암살이든 전쟁이든 독재이든 그치지 않는 까닭은, 집에서나 마을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착한 마음’도 ‘참다운 슬기’도 ‘고운 사랑’도 안 가르치기 때문이요, 이를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을 모조리 억누르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4348.6.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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