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손



  아침에 세 시간 즈음 풀을 뽑았습니다. 이 풀로 풀물을 짤 수도 있지만 밭에 도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되기를 바라면서 신나게 뽑았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마당에서 무화과나무를 오른쪽에 끼고 뒷밭으로 올라서 모과나무를 왼쪽으로 끼면서 고개를 숙여 돌다가 오른쪽에서 석류나무를 만나서 방긋 웃음을 짓고는 새삼스레 왼쪽으로 가서 뽕나무 줄기를 어루만지고는 커다란 감나무 앞에 이르러 얌전히 절을 한 뒤에 마음껏 나무타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낫이나 호미를 안 쓰고 맨손으로 풀을 뽑으면 등허리가 살짝 결릴 만하지만, 맨손으로 풀포기를 잡아당겨서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납니다. 풀포기 사이에 숨은 거미를 보고, 내 앞에서 날아오르는 무당벌레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꽃가루를 먹다가 깜짝 놀란 나머지 내 허벅지를 톡 쏘는 벌을 마주하거든요. 직박구리하고 딱새가 저 아저씨 뭐 하나 하고 기웃거립니다. 해가 머리 위로 오르기 앞서 일을 마칩니다. 이 일을 마치고서 아이들을 불러 함께 뒷밭을 거닐어 봅니다. 내 두 손은 풀물이 짙게 배어 시커멓게 되고, 손바닥이랑 손가락은 환삼덩굴하고 사광이아재비 가시에 긁혀서 군데군데 찢어졌습니다. 손톱에 낀 흙은 씻어도 빠지지 않습니다. 2016.7.9.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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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바 모르는 다리



  네 시간 반째 달리는 자전거는 바닷가에 멈춥니다.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바닷놀이를 즐기고, 자전거를 이끌던 사람은 자전거 걸상에 몸을 맡긴 채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합니다. 그야말로 어찌할 바 모르는 다리입니다. 파란 바람이 되고, 파란 하늘이 되며, 파란 별이 되자고 마음속으로 노래합니다. 앞으로 사십 분쯤, 어쩌면 오십 분쯤 더 달려야 집에 닿을 테니, 어찌할 바 모르는 다리는 여기에서 끝내고 새롭게 기운을 내자고 다짐합니다. 아이들은 그저 신나게 뛰놀고, 이 싱그러운 웃음을 집까지 고이 모셔 가자고 생각합니다. 2016.7.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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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마실 뒤 한 시간 두 시간



  읍내 우체국에 들른 뒤 저자마실을 봅니다. 비가 제법 그치지 않아 여러 날 집이랑 마당이랑 도서관에서만 놀던 아이들은 모처럼 읍내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타고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리가 없어서 군내버스에서 서서 옵니다. 장날이면서 비가 살짝 멎은 장마철이니 읍내를 오가는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비가 그친 날씨라서 아이들은 마을 어귀 빨래터에서 놀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렴. 실컷 놀고 들어오렴. 나는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쌀부터 씻어서 불리고, 이모저모 부엌일을 합니다. 아이들이 들어오면 따순물을 틀어서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기려 합니다. 아이들 목소리를 들으며 밥냄비에 불을 올립니다. 젖은 옷을 마당에서 다 벗고 들어온 아이들은 씻는방으로 달립니다. 머리를 감고 몸을 복복 비빕니다. 땟물이 꽤 나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이동안 밥이 다 됩니다. 히유.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집으로 들입니다. 모처럼 비가 멎으며 해도 살짝 비추기도 했으니 옷이 잘 말라 줄까요. 이튿날에도 비가 없이 해가 나기를 빌어 봅니다. 저자마실을 마친 뒤에는 등허리를 쉬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배고픈 아이들을 먹이니 이 아이들은 두 눈에 졸음이 가득합니다. 이를 닦이고 조금 놀리고서 누이면 어느새 곯아떨어지며 하루가 저물 테지요. 2016.7.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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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를 기우다가



  기울 바지가 많습니다. 워낙 오래 입어서 엉덩이 쪽이 해진 바지가 제법 많습니다. 이 바지를 틈이 날 적마다 기우는데 ‘틈이 날 적’을 헤아리며 기우자니 ‘틈이 안 나서’ 으레 미루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틈을 내어’ 기우자고 생각하다 보니 비로소 바지를 붙잡고 방바닥에 앉아서 바늘을 놀릴 만합니다. 이러다가 손님을 맞이하면서 바느질을 멈춥니다. 이튿날 다시 바늘을 손에 쥐고 바지를 기워야지요. 이 바지를 손수 기우면 지난 열 몇 해 동안 입은 바지를 다시 열 몇 해를 입을는지 모릅니다. 이 바지를 손수 기우면 그동안 이 바지를 즐겁게 입으며 누린 살림을 앞으로 새로운 기쁨으로 마디마디 아로새길 만하리라 느낍니다. 바느질을 잘 하든 못 하든 대수롭지 않아요. 그저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되지 싶어요. 내가 늘 입는 옷을 내가 늘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살림을 짓는구나 싶습니다. 2016.7.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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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



  읍내 신집에 노란 긴신만 있어서 노란 긴신을 장만했습니다. 작은아이는 파란 긴신을 바랐으나 아이 발에 맞는 신이 없더군요. 그런데 하늘빛 실로 뜨면서 무화과잎을 붙인 손뜨개 웃옷에 파란 바지에 노란 긴신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모두 파랑이기보다는 살짝 다르면서 살가운 빛으로 어우러지면서 재미난 모습이 되지 싶습니다. 즐겁게 고맙게 반갑게 하나씩 바라보면서 받아들입니다. 거리끼거나 멀리할 일은 없습니다. 2016.7.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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