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말은 딱히 안 했지만



  시골에서 살며 방송은 하나도 보거나 듣지 않기 때문에 어제 국악방송에서 인터뷰 방송이 나왔어도 듣지 못합니다. 일부러 안 듣는다기보다 저녁 아홉 시에 흐르는 방송은 도무지 들을 수 없어요. 아이들을 시골집에서 재우는 때는 저녁 여덟 시 안팎이에요. 나도 아이들을 재우면서 몹시 고단하기에 으레 같이 잠들지요. 도시에서는 저녁 여덟 시나 아홉 시는 팔팔한 때라고 할 테지만, 시골에서는 그야말로 깊은 밤으로 접어드는 어귀랍니다.


  오늘 낮에는 인터넷 기사가 하나 나왔어요. 지난주에 전화로 나눈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나온 기사인데, 방송국에서 요모조모 편집해서 나왔어요.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지요. 하나는 ‘내가 안 쓰는 말투로 왜 이렇게 내 말을 바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하나는 ‘내 말투를 온통 얄궂게 바꾸었지만 줄거리는 알맞게 잘 간추렸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녁에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부엌일도 마무리지은 뒤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집밖일도 도맡지만 집안일도 도맡는 아버지입니다. 집안하고 집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혼자서 도맡아요. ‘그럴 만하니’까 이처럼 집 안팎 살림을 꾸리는데, 아무튼 이 같은 대목을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하기는 아직도 어렵지만 열 해 앞서를 헤아리니 그야말로 대단히 많이 나아졌구나 싶어요.


  나는 내 일을 오직 ‘전문가’로 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어떤 일이든 누구나 전문가로 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즐겁게 해야 한다고 느껴요. 내가 한국에서 몇 사람 없는 ‘사전 편집자’로 일하지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몇 천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없더라도 내가 이 일만 붙잡느라 ‘집안일을 하나도 안 해도 된다’고 느끼지 않아요. 오히려 나는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한국말사전 엮는 일’을 더 재미나고 알차게 할 수 있다고 느끼곤 해요.


  그래서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나한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말을 여쭐 적에 늘 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막상 이런 이야기가 제대로 매체를 타는 일은 아직 없더군요. ‘집안일 다 하면서 국어사전 엮는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림을 손수 가꾸면서 말을 살찌우는 길을 새롭게 배우는 어버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아직 기자나 피디나 방송작가 분들은 이 대목을 눈여겨보시지 못하는 듯해요. 그리고 나는 늘 한 가지를 덧붙이지요. 아버지가 집안일하고 집밖일을 몽땅 도맡는데 아이들이 참 잘 놀거든요.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고마운지 몰라요. 늘 새로우면서 재미나게 놀이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국어사전을 엮는 가장 큰 바탕’이 된다는 대목을 말하기는 하는데, 참말로 늘 말하지요, 그런데 이제껏 라디오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 대목이 제대로 나온 적은 없어요. 우리 집 아이들이 나중에 더 커서 저희 아버지하고 얽힌 기사를 찾아보다가 부디 저희 아버지가 저희(아이들)를 함부로 빼놓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 대목을 잘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참말 그렇거든요. 나는 늘 ‘인터뷰에서’ 이 대목을 힘주어 말해요. “우리 아이들이 언제나 재미나고 신나게 놀며 노래하고 웃기에 이 살림이 바탕이 되어 제가 하는 일도 씩씩하고 즐겁게 할 수 있어요.” 하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은 아직 기사로 나온 적이 없답니다. 2016.7.3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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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사십 분



  아침에 뒷밭을 살피다가 오늘은 옥수수를 따면 재미있겠다고 느껴 작은아이를 부릅니다. 작은아이는 모기 때문에 못 따겠다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모기가 물건 말건 한 손으로 슥슥 훑으며 다른 한 손으로 옥수수를 땁니다. 옥수수가 몇 자루인지 센 뒤에 마당에서 더 따기로 합니다. 두 아이를 불러서 마당 옥수수를 따도록 합니다. 알맞게 작으면서 알이 야무지게 달린 넉 자루는 씨옥수수로 건사하기로 합니다. 씨옥수수는 겉을 싼 껍질을 뒤로 돌려서 가볍게 묶어 처마 밑에 두 자루씩 걸어 놓습니다. 옥수수를 손질해서 찜기에 넣는데, 감자도 넉 알을 함께 넣습니다. 어제 선물로 받은 아이들 옷꾸러미를 이엠하고 목초액을 탄 물에 담가 놓습니다. 어제 아이들을 씻기며 나온 옷하고 천도 담가 놓습니다. 여기까지 끝내고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습니다. 부산스레 움직여 아침 사십 분을 씁니다. 앞으로 삼십 분쯤 뒤면 옥수수하고 감자가 잘 익어서 두 아이가 활짝 웃을 테지요. 2016.7.3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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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질과 선풍기



  엊저녁 올들어 처음으로 선풍기를 꺼냅니다. 그동안 아이들한테 부채질만 해 주었으나, 자꾸 ‘슈팽기(선풍기)’를 노래하기에 드디어 꺼냅니다. 선풍기 바람을 쐬는 두 아이는 재미있어 합니다. 그렇지만 꼭 40분만 틀고는 더 틀지 않습니다. 선풍기가 멈춘 뒤에는 부채를 들고 천천히 살랑살랑 살랑 부쳐 줍니다. 그런데 잠자리에서 선풍기 바람이 아이들 머리로 바로 가지 않도록 벽에 튀기도록 하기는 했어도, 가만히 부채질을 할 적에 땀을 한결 잘 식히네 하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하고 살아온 지난 아홉 해 동안 여름 내내 늘 부채질로 살았기에 밤새 부채를 부치면서 힘들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외려 알맞고 부드럽게 부채를 부쳐서 밤잠을 고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손길을 잘 익혔다고 할 수 있네요. 2016.7.29.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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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생각한다



  어제는 새벽 세 시부터 짐을 꾸렸습니다. 미역국을 끓이고 길을 나서려 했는데, 곁님이랑 두 아이 모두 미역국을 좋아하기에 넉넉하게 끓이자고 여겼는데, 미역국을 다 끓이고서 길을 나서며 생각하니 날도 더운데 너무 많이 끓이지는 않았나 싶었어요. 그래도 괜찮겠지 하고 여기면서 아침 일곱 시에 부지런히 집을 나섭니다. 마을 어귀에 가방을 내려놓고 군내버스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때에 어디에선가 큰아이 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어디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니, 큰아이가 잠옷차림으로 고샅에 나와서 손을 흔드네요. 그렇구나 너희들 안 깨우려고 아주 살금살금 집을 나섰는데 너는 어느새 알아차리고 이렇게 나왔네. 멋지구나. 조용히 나서려던 마실길은 큰아이가 베푸는 즐거운 손짓으로 더욱 홀가분하면서 시원합니다. 나는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자고 생각하지만, 나는 언제나 아이한테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는 어버이로구나 하고 새롭게 깨닫습니다. 2016.7.2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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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는 기운



  밥을 짓는 기운은 어디에서 올까요. 밥을 차리는 기운은 어떻게 끌어낼까요. 밥상을 치우는 기운은 또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밥을 먹이고 치우고 저녁에 먹을 밥을 헤아리면서 쌀을 씻어서 불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앞두고 부엌을 치우고 이모저모 하고서 숨을 살짝 돌리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지난날에 어떤 마음으로 밥을 지으셨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밥을 지을 만할까를 생각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어른이자 어버이로서 밥을 짓는 마음이 되는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2016.7.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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