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101] 풀개구리

 

  마을 곳곳에 널따랗게 펼쳐진 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올챙이 뽀르르 헤엄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곁에 선 아이는 좀처럼 올챙이 헤엄짓을 찾아내지 못하지만, 헤엄을 치다 살짝 멈춘 올챙이가 보일 적에 손가락으로 논물을 살짝 튕기면 올챙이는 화들짝 놀라 다시 헤엄을 칩니다. 이때에는 아이도, 아 저기 있다, 하고 알아봅니다. 논물에서 태어나 자라는 올챙이는 논개구리가 됩니다. 때로는 멧개구리도 되고, 때로는 풀개구리도 됩니다. 때로는 도룡뇽이 돼요. 모두들 논 한쪽에 알을 낳아 저희 새끼를 낳습니다. 300평 500평 1000평 3000평 논은 그리 안 크다 여길 수 있지만, 올챙이한테는 드넓은 바다와 같아, 올챙이로 살아가는 동안 논배미 구석구석 못 다닐 수 있어요. 논 한쪽에는 논거미가 거미줄을 칩니다. 소금쟁이가 함께 살고 물벼룩이 있으며 미꾸라지도 논흙 사이에서 살아가겠지요. 모두 함께 살아가는 목숨이면서 저마다 빛나는 한삶입니다. 문득문득 조그마한 풀개구리 한 마리 우리 집으로 폴짝폴짝 뛰어오곤 합니다. 대문을 열면 바로 논이거든요. 풀개구리는 대문을 열 줄 모르나, 대문 밑으로 난 틈은 풀개구리한테 퍽 널따랗습니다. 요기로 볼볼 기어 들어온 뒤 풀개구리한테 드넓다 싶은 마당에서 다시금 폴짝폴짝 뛰며 놉니다. 어른 손톱만 하다 싶도록 작은 개구리는 온통 풀빛입니다. 나는 이 작은 개구리를 바라보며 “너는 어쩜 이리 싱그러운 풀빛일 수 있니?” 하고 외칩니다. 새로 돋은 풀빛입니다. 여름비로 몸을 씻은 맑은 풀빛입니다. 여름햇살 듬뿍 누리는 싱싱한 풀빛입니다. 나와 아이는 풀개구리하고 동무하며 지냅니다.
 4345.6.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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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00] 하나 둘 셋

 

  이웃에 놀러온 여섯 살 아이가 우리 집 다섯 살 아이와 함께 놉니다. 둘은 달리기 놀이를 합니다. 여섯 살 아이가 우리 집 다섯 살 아이한테 “준비, 땅!”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우리 집 아이는 언니가 하는 대로 “준비, 땅!” 하고 똑같이 말합니다. 곰곰이 돌이킵니다. 내 어릴 적에도 “준비, 땅!” 하는 말을 썼고, “요이, 땅!”이라는 말도 썼어요. 중학생이 될 무렵 ‘요이’는 일본말이니 안 써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내 오랜 동무들은 ‘요이’가 일본말인 줄 잘 모르기도 하고, 일본말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더라도 여태 이 일본말을 씁니다. 그런데, “요이, 땅!”을 안 쓰고 “준비, 땅!”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 말투라 하기 어렵습니다. 껍데기만 살짝 입힌 어설픈 말투예요. 일본사람은 ‘자리에 가만히 서’며 ‘요이’라 하는데, 이 대목을 ‘준비’라는 한자로 바꾼다 한들 한국 말투가 되지 않고, 일본사람이 총 소리를 흉내내어 적은 ‘땅’을 그대로 쓰니, 더더욱 얄궂어요. 한국사람은 총 소리를 ‘탕’으로 적거든요. 한국사람은 한숨 소리를 ‘후유’로 적고, 일본사람은 한숨 소리를 ‘휴’로 적어요. 신나게 놀고 들어온 아이를 바라봅니다. 아이는 아버지하고도 더 놀고 싶습니다. 아이는 아버지한테 “준비, 땅!”이라 말합니다. 아버지는 “싫어, 난 ‘준비 땅’ 안 할래. 난 ‘하나 둘 셋’ 할래.” 하고는 “하나, 둘, 셋!” 하고 말하며 달립니다. 살짝 헷갈려 하던 아이는 이윽고 아버지 말투를 따라 “하나, 둘, 셋!” 하면서 달립니다. 나중에 다른 동무가 마을에 찾아와 놀 적에도 우리 집 아이는 “하나, 둘, 셋!” 하고 외치며 달립니다. (4345.6.2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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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99] 땡볕

 

  아이들 누구나 ‘땡볕’ 말밑이 어떻게 이루어진 줄 모르더라도 땡볕이 어떤 날씨인지 압니다. 어른들 누구나 ‘뙤약볕’ 말밑을 깊이 헤아리지 않더라도 뙤약볕이 어떤 날씨인 줄 알아요. ‘무더위’나 ‘강추위’가 왜 무더위요 강추위인가를 살피지 않지만, 이런 날씨 저런 날씨 환하게 살갗으로 느낍니다. 이와 달리, ‘폭염(暴炎)’이나 ‘폭서(暴暑)’는 아이도 어른도 쉬 알아채지 못해요. 한자를 밝혀 알려주어도 쉬 깨닫지 못해요. 한국말로 ‘불볕더위’라 말해야 비로소 누구나 환하게 알아들어요. 그런데, 알아차리기까지 퍽 여러 날이 걸리고 이래저래 따로 더 배워야 한다지만, 어른들이 날마다 ‘폭염’이니 ‘폭서’이니 하고 말하면, 둘레에 있는 아이들은 이 낱말이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차츰차츰 익숙해져요. 곧, 아이들은 ‘안녕(安寧)’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면서 이 말을 써요. ‘바이바이(byebye)’가 영어인 줄 알아차리려면 따로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을 둘러싼 어른들이 으레 ‘안녕’과 ‘바이바이’를 읊기 때문에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이 말을 받아들여서 마음껏 써요. 서로 인사할 때에 쓰는 말이로구나 하고 여겨요. 아이들한테 말을 온몸으로 물려주는 어른들이 말삶을 깊이 돌아본다면, 아이들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지 못해요. 아이들은 ‘어느 자리에 어떻게 언제 쓰는가’를 느끼기만 하거든요. 어른들부터 스스로 맑게 생각하며 말을 해야 즐거워요. 맑게 생각하며 말하는 어른 곁에는 맑게 생각하며 말하는 아이들이 자라요. 생각없는 어른 곁에서는 생각없는 아이들이 자라요. 오뉴월 땡볕 한복판에서 삶을 생각합니다. (4345.6.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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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98] 밀분

 

  네 식구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고추장을 찍어 먹다가, 문득, 고추장 담긴 통에 적힌 글월을 읽어 봅니다. 고추장 담긴 통에는 옛 손길을 되살리며 빚었다고 적힙니다. 이 고추장은 ‘고추분’으로 빚었다고 나란히 적혀요. 밥을 먹다가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고추분’이 뭔가? 이윽고,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과자 봉지를 보면 으레 ‘밀가루’라 안 하고 ‘소맥분(小麥粉)’이라 적더니, 이 고추장 빚은 이들은 ‘고춧가루’라 안 하고 ‘고추분’이라 적은 꼴이로군요. 밀가루를 밀가루라 하지 못하고 ‘소맥분’으로 적는 사람도 우습지만, ‘밀분’으로 적는다면 더욱 우습습니다. 미숫가루를 ‘미수분’이라 적으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누가 이런 말을 알아볼까요. 콩가루, 떡가루, 눈가루, 쌀가루, 꽃가루 들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꽃봉오리 들여다보며 꽃가루를 만져 보기도 하지만, 꽃을 살피는 학자나 전문가와 교사는 으레 ‘화분(花粉)’이라 읊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가 커서 스스로 이런 말을 듣고 저런 글을 읽을 때에 머릿속이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어지러운 사람들 어지러운 말과 글 사이에서 아이가 씩씩하며 사랑스레 말빛과 글사랑 보살피기를 빌며, 다시 밥술을 뜹니다. (4345.6.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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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97] 혼인 기리기

 

  나는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무렵 학교에서는 ‘우리 고장 문화재’라든지 ‘우리 고장 천연기념물’이라든지 ‘우리 고장 기릴 만한 훌륭한 분’이라든지 알아보는 숙제를 내주곤 했습니다. 이런 숙제를 받을 때면 언제나 골머리를 앓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은 으레 ‘서울로 가려다 못 가고 남은 뜨내기’가 모이는 곳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서울과 가깝다 보니, 서울에서 쓰는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 동네마다 많았어요. 문화재라든지 천연기념물이 있을 턱이 없으리라 느꼈어요. 동무들은 이래저래 골치를 썩이다가, 갈매기라든지 비둘기라든지 적곤 합니다. 갈매기나 비둘기가 천연기념물일 턱이 없지만, 쓸거리 또한 없거든요. 기릴 만한 훌륭한 분을 찾는 숙제도 힘들었습니다. 조선이든 고려이든 고구려이든 백제이든 옛조선이든, 인천에서 나고 자란 훌륭한 분이 누가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젓기만 했어요. 오늘날 들어 비로소 ‘한글 점글 만든’ 박두성 님이라든지  ‘진보 정치를 꿈꾸었다’는 조봉암 님이라든지 들곤 하지만, 어릴 적에는 이런 이름을 듣도 보도 알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가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적 ‘내 고장 기릴 사람’ 이름을 역사책에서 훑다가 하품만 흘렸는데, 내가 숙제에 적을 훌륭한 분이라면 마땅히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고,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어요. 역사책에도 교과서에도 이름을 안 올리지만, 꿈과 사랑을 심은 아름다운 분이기에 넉넉히 ‘기릴’ 만하고 마음으로 되새길 만해요. 해마다 6월 7일을 맞이하면, 나와 옆지기는 서로 함께 살기로 다짐한 뜻, 곧 혼인날을 기립니다. (4345.6.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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