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23


《리-더-스 다이제스트》

 이춘우·김동진 엮음

 다이제스트사

 1953.7.



  헌책집에서 만난 《리-더-스 다이제스트》 1953년치 7월호를 보면 앞뒤로 ‘시골잔치’ 사진이 나옵니다. 1953년에 ‘4권 7호’였으면 1950년에 처음 한글판이 나왔구나 싶습니다. 책을 펴니, 영어를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으라고 곳곳에 알림글이 나옵니다. 하기는, 1980년대 끝자락에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도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이 작고 값싼 잡지를 읽으면서 온누리 흐름도 읽고 영어나 시사교양을 익힐 만하다고들 하더군요. 마땅한 노릇인데, 말을 익히려면 사전만 달달 외워서는 안 돼요. 말이 흐르는 삶을 헤아리고, 말에 얹은 살림을 바라보며, 말로 나누는 사랑을 맞아들여서 하나하나 익힐 노릇입니다. 삶을 모르면서 말을 알 턱이 없어요. 살림을 안 가꾸는데 말을 어떻게 배우나요. 사랑이 없는 채 벙긋거리는 말로는 이야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1953년이 한글판 잡지 이름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입니다. 사이에 ‘-’를 넣는데요, 이는 일본 말씨입니다. 일본은 바깥말을 일본글로 담을 적에 긴소리를 ‘-’를 넣어 나타내거든요. 우리말은 굳이 ‘-’를 안 넣어요. 이처럼 ‘-’를 넣는 일본 말씨 흉내는 무척 오랫동안 퍼지고 뿌리내렸어요. 요새는 좀 줄었지만 아직 다 사그라들진 않았습니다.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22


《週刊朝鮮》 819호

 최병렬 엮음

 조선일보사

 1984.11.11.



  겉그림에 ‘상해서 은퇴선언한 박찬숙 선수’를 담은 《週刊朝鮮》 819호를 넘기는데, ‘신간 안내’를 보니 《分斷을 넘어서》(리영희, 한길사, 1984)를 다룹니다. 조선일보에서 어떻게 리영희 님 책을 다루는지 알쏭합니다. 리영희 님이 그동안 낸 여러 책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나쁜책(불온도서)’으로 못을 박았거든요. 설마 나쁜책을 다루는 잡지이니 《주간조선》도 ‘나쁜잡지’인 셈은 아닐 테지요. 터전이 튼튼하면 마을도 집도 사람들도 튼튼할 테지요. 터전이 안 튼튼하면 마을도 집도 사람들도 흔들릴 만합니다. 그러나 터전이야 이러하거나 저러하거나 사람들 스스로 튼튼할 뿐 아니라 아름답고 사랑스레 하루를 지을 수 있어요. 스스로 눈을 뜨면 튼튼하면서 아름답지요. 스스로 눈을 감으면 안 튼튼하면서 안 사랑스러워요. 지난날 숱한 붓자락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예전에 온갖 붓자락은 어디에서 춤추면서 무엇에 눈감고 어느 대목을 부추겼을까요? ㅈㅈㄷ이라서 나쁠 까닭은 없습니다. ㅈㅈㄷ이 아니면서도 이 나라 어둠에 눈감는 붓이 있어요. ㅈㅈㄷ을 나무라면서 외려 이 나라 수렁·쳇바퀴·뒷질·막짓에 눈감는 붓도 있습니다. 착하면서 참다이 눈을 뜨고서 흙을 매만지는 손길로 붓을 쥘 노릇이라고 봅니다.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21


《삶과 믿음의 敎室》

 이오덕 글

 한길사

 1978.12.20.



  헌책집을 다니면서 이오덕 어른 글씨가 남은 책을 곧잘 만났습니다. 둘레에서는 “어떻게 그런 글씨가 남은 책을 자주 만나요?” 하고 묻는데 “하루에 두서너 곳씩 날마다 여러 헌책집을 두루 다니다 보면 으레 만나요.” 하고 들려주었습니다. 어쩌다 찾아간 곳에서 뜻밖에 만나는 날도 있겠지만, 나라 곳곳 헌책집을 꾸준하게 찾아들면서 낯익은 책이든 낯선 책이든 안 가리고 모두 새겨읽으려고 집어들어 펼쳐서 읽다 보면 ‘지은이 손글씨’는 살몃살몃 고개를 내밉니다. 《삶과 믿음의 敎室》에 남은 이오덕 어른 글씨는 1998년 겨울에 처음 만났습니다. 함께 헌책집마실을 다닌 분이 고려대학교 곁 조그맣고 오랜 집에서 동생하고 지내며 교사를 꿈꾸었는데, 마침 그날 찾아간 〈새한서점〉 책꽂이 한켠에 있는 이 책에 글씨가 있더군요. 책마실벗은 “난 읽은 책이라서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했고, “전 읽은 책이어도 아직 이 책을 모를 분한테 건네주고 싶어 새삼스레 집어서 살피곤 해요. 자, 앞으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아이들을 사랑해 주셔요.” 하면서 내밀었습니다. 2020년 가을에 서울 은평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삶과 믿음의 교실》 이오덕 어른 손글씨를 새로 만납니다. 이제 이 글빛은 제가 품을게요. 고맙습니다.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20


《西洋文化の支那への影響》

 張星朗 글

 實藤惠秀 옮김

 日本靑年外交協會出版部

 1941.4.20.



  헌책집 책시렁에서 처음 《西洋文化の支那への影響》을 마주할 적에는 일본사람은 참으로 재미나구나 싶고, 두루 배우려 하는구나 싶으며, 일본 말씨 ‘-의·-에의’가 이렇게 일본책이며 일본글을 거쳐 들어왔구나 싶었습니다. 서양물결이 중국에 얼마나 들어오고 퍼졌는가를 다룬 책이 1941년에 진작에 나왔다면, 우리는 이러한 물결을 얼마나 헤아렸을까요? 책을 덮을 즈음 뒷자락에서 “釜山 博文堂書店 735·2442”라 새긴 쪽종이를 봅니다. 이 책을 판 책집에서 붙인 쪽종이인데요, 일본에서는 으레 손톱만 한 쪽종이를 붙여서 책집을 알립니다. 부산에 있던 〈박문당서점〉에서 이 책을 팔았다는 뜻일 텐데, 가만가만 생각하니 조선총독부 교과서를 으레 이곳 〈박문당서점〉에서 맡아 돌렸다고 떠오릅니다. 그나저나 ‘전화번호 735·2442’는 무엇일까요? 설마 일제강점기에 ‘국번’이 있을 턱이 없는걸요. 수수께끼는 부산박물관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박문당서점〉은 1906년에 처음 열어 마흔 해 동안 부산을 비롯한 이 나라에 책살림을 두루 펴고 이바지했다더군요. 전화가 둘 있었대요. 아하, ‘735’ 전화하고 ‘2442’ 전화였군요. 그러나 “A B C”로 갈라 적은 수수께끼는 아직 못 풉니다. 이 석 칸은 무엇을 가리키려나요?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19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글

현장문학사

1989.9.1.



2003년 가을 서울 교남동에 〈어제의 책〉이란 헌책집이 엽니다. 연세대학교 앞에 오래도록 인문사회과확책집으로 이름을 떨친 〈오늘의 책〉을 새롭게 잇고픈 마음으로 움튼 마을책집입니다. 2003년까지만 해도 ‘참고서·교과서·자기계발서·대학교’를 하나도 안 두고서 인문사회과학책만으로 책집을 차린다고 하면 ‘저놈 굶어죽으려고 미친짓을 하는군’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렇지만 〈어제의 책〉 지기님은 씩씩하게 열었고 즐겁게 살림을 이었습니다. 〈어제의 책〉 곁일꾼 ㅊ님은 어느 날 저한테서 《사람사는 세상》이란 책을 빌립니다. 2003년 5월 14일에 어느 누리새뜸에 이 책을 놓고 쓴 글이 있는데, 그 글을 뒤늦게 읽으시고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처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면서, “다 읽고 꼭 돌려줄게요.” 하고 말했지요. 책집에서 곁일을 하는 분이니 이내 돌려주리라 믿었는데, 그분은 저한테서 책을 빌린 지 얼마 안 되어 곁일을 그만둡니다. 이윽고 자취를 감추고는 열 몇 해가 지나도록 책을 안 돌려줍니다. ‘못 배우거나 안 배운’ 사람이 아닌 ‘배우거나 배우고픈’ 사람이 책을 빌릴 텐데, 빌린 책을 안 돌려준다면 이녁 스스로 무엇을 익혀 삶을 어떻게 빛낼까요? ㅅㄴㄹ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