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827


《제빵사 곰》

 피브 워딩턴·셀비 워딩턴 글·그림

 김세희 옮김

 비룡소

 2002.1.28.



  ‘일’이라는 낱말은 ‘(물결이) 일다’에서 비롯합니다. ‘일어나다·일으키다’는 ‘일’이 밑말입니다. ‘잇다·이루다·이다·있다’ 같은 낱말도 ‘일’이 밑말이에요. 모든 일은 만나서 이루고 이어갑니다. 혼자 짓고 여미고 꾸리더라도, 우리가 지은 일은 이웃한테 잇습니다. 둘레에 이야기를 일으키고, 일 하나를 이루면서 살림이 새로 일어납니다. 《제빵사 곰》은 1979년 그림책입니다. 모두 손으로 짓고, 손으로 나누고, 손으로 추스르고, 손으로 마주하던 무렵, ‘빵굽기’라는 일을 하면서 이웃을 만나는 일꾼을 곰(테디 베어)에 빗대어 보여줍니다.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이웃한테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밭에서 지은 열매도 이웃한테 이바지합니다. 뚝딱뚝딱 일군 살림도 뭇사람 손을 거쳐 온나라에 고루 나아갑니다. 얼굴과 이름을 아는 이웃이 일합니다. 낯도 이름도 모르는 숱한 사람들이 일합니다. 말을 섞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여러 사람을 길에서 집에서 만나고, 종이로 붓으로 만납니다. 수줍거나 쭈뼛한다면 살그마니 숨을 만합니다. 말없이 건네어도 되고, 쪽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동무가 말을 더듬으면 기다리고, 내 수다가 길지 않은지 되새깁니다. 밤에 별빛이 지켜봅니다. 낮에 해바람과 풀꽃나무가 둘러봅니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바라봅니다. 같이 마루에 앉아 빗소리를 조용히 듣습니다.


#TeddybearBaker #PhoebeWorthington #SelbyWorthington 1979


《석탄집 곰 Teddy bear Coalman》(1948)

《빵굽는 곰 Teddy bear Baker》(1979)

《우체부 곰 Teddy Bear Postman》(1981)

《훍살림 곰 Teddy Bear Farmer》 (1985)

《밭지기 곰 Teddy Bear Gardener》(1986)

《나루꾼 곰 Teddy Bear Boatman》 (1990)

《불끄는 곰 Teddy Bear Fireman》(1992)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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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826


《취중진담 1》

 송채성 글·그림

 서울문화사

 2001.3.5.



  열아홉 살이던 1994년에 인천하고 서울을 날마다 오가며 ‘사람밭’을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서울로 가까울수록 ‘내리는 사람은 적고 타는 사람만 많’아, 먼저 타도 나중 타도 납작납작 짓눌리는 눈물바다였어요. 그무렵은 바람날개(선풍기)조차 없기 일쑤였습니다. “서울사람은 불수레(지옥철)를 모르겠지?” 즈믄(1000)이 넘는 사람을 작은 칸에 욱여넣는 죽음길에 넋을 잃기 싫어 머리 위로 책을 들고서 읽었습니다. 1998년에 서울 기스락 신문사지국에 짐을 풀어 나름이(신문배달부)로 먹고살며 불수레하고 헤어집니다. “나는 불수레에서 나왔지만, 동무와 이웃은 오늘도 불수레에서 뭉개지겠구나!” 《취중진담 1∼3》은 2001∼02년에 낱책으로 나옵니다. 송채성(1974∼2004) 님은 이 그림꽃으로 둘레에 이름을 알렸으나 《쉘 위 댄스》하고 《미스터 레인보우》까지 그리고서 이슬이 되었습니다. 숨조차 못 쉴 수레에 갇힌 사람은 서로 ‘짐짝’이었습니다. 밟히고 구르니 악에 받히기도 하지만, 외려 이웃을 더 헤아리는 마음이 싹트기도 합니다. 맨마음과 맨몸으로 어울리는 곳에서도, 지치거나 슬픈 빛이 만나는 곳에서도, 들꽃이 핍니다. 불수레 미닫이(창문)로 이따금 나비가 들어왔어요. 작은이는 작기에 밑바닥을 구르지만, 이 밑바닥에는 바닥꽃이 피고, 나비가 날면서 햇볕을 나눕니다. 작은 틈새에 씨앗이 깃들어 푸른빛이 퍼지듯, 사람 사이가 좀더 넉넉하고 아늑하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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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죽지 마라 - 우리가 백기완이다!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엮음 / 돌베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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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인문책 / 숲노래 책읽기 2023.6.10.

헌책읽기 13 그들이 대통령 되면 누가 백성 노릇을 할까



  둘레를 보면 ‘정권퇴진 운동’에 목소리를 내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한테 이따금 묻습니다. “그놈들만 끌어내리면 이 나라가 깨끗한가요?” 그저께쯤 고흥읍내 한켠을 걷다가 ‘100억짜리 사방공사’를 보았습니다. 멀쩡한 멧자락 한켠을 깎아내고 시멘트를 조금 들이붓고서 ‘100억 예산집행’이라고 떳떳이 밝히더군요. 예전 어느 우두머리가 ‘4대강 삽질 22조’를 썼다는데, 다른 분은 ‘들숲바다에 햇볕판(태양광패널)에 바람개비(풍력발전기)을 200조 넘는 돈을 쏟아부어 때려박았’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누리호’를 쏜다지만,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바닷가에서 꽝꽝 쏘면 27킬로미터가 떨어진 우리 집도 흔들리고 큰소리가 울립니다. 자, 그럼 ‘나로기지’가 있는 바다와 갯벌 살림은 ‘떨림(진동·소음)’으로 몽땅 죽겠지요? 오늘 우리가 아이들 앞에서 어른스럽게 할 일이라면 “모든 썩은짓(부정부패) 씻기”여야지 싶습니다. 저놈들만 썩지 않았어요. 이쪽에 있다는 ‘분들’도 나란히 썩었습니다. 그대는 걸어다니거나 버스를 타는가요? 시골버스나 시내버스에서 푸름이(청소년)들이 얼마나 ‘썩은 입내’를 풍기면서 막말(욕설)을 일삼는지 듣거나 보는지요? 골목 한켠에서 얼마나 많은 푸름이(청소년)들이 담배를 태우면서 침을 찍찍 뱉고 떠드는지 보는지요? 이 아이들은 ‘누구한테서 막말을 배우고 누구한테서 막짓을 물려받았’을까요? 집과 배움터(학교)에서, 또 글(문학)과 영화·웹툰에 흔하게 퍼진 ‘폭력·욕설·살인·강간’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보고서 따라하는 줄 느끼지 않는다면, 엉터리 우두머리를 끌어내리고 또 끌어내려도 쳇바퀴일 뿐입니다. 그놈 하나뿐 아니라, ‘모든 썩은놈’을 끌어내릴 때라야, 비로소 이 나라가 똑바로 설 수 있습니다. 어린이한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꼴은 저 우두머리 한 놈뿐일까요? 제발 눈을 뜰 노릇입니다. 우리가 ‘나이만 먹은 꼰대’가 아닌 ‘철든 어른’이라면 이제부터 ‘착하고 참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대통령 되면 누가 백성 노릇을 할까?》(백기완, 백산서당, 1992.1010.첫/1992.12.30.6벌)


ㅅㄴㄹ


지금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가. 돈 있는 사람들이 돈만 내면 광고 등으로 얼마든지 나오게 되어 있다. 전파 방송을 돈 있는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지금 농민들은 피눈물이 나건만 호소할 데가 없다. 지금 노동자들은 할 소리가 그렇게 많아도 그 소리를 ‘보는틀’을 통해 한 마디도 못해 보고 있다. 양심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그 대신 사기꾼 정상배들은 감기만 들어도 ‘보는틀’에 나오고, 제아무리 악덕재벌이라 하더라도 돈만 내면 얼마든지 상품광고를 할 수 있는 저 방송매체, 그것이 바로 있는 자들의 폭력기구이지 어떻게 공영방송, 공정한 방송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오늘도 단추만 누르면 “이놈들아 내 물건부터 팔아주지 않고 무엇을 꾸물대느냐”고 공갈만 하는 저 간악한 장사치들의 지겨운 광고방송을 보라. (144쪽)


여기서 이들 두 김씨(김대중·김영삼)가 우리에게 안겨준 30년 동안의 정신적 피해를 반드시 점검하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는 국민들의 무력감이다. 둘째는 그들이 정치판의 전면으로 나서던 60년대 말경만 하더라도 임금노동자는 불과 백만 명, 그러나 90년대인 지금은 그 열다섯 배인 1500만 명이다. 이와 같이 계급분화가 일어나 일하는 일꾼이 생산판에서 또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분명한 역사의 알기(주체)로 등장했는데도, 밤낮 두 김씨가 역사를 주도하는 것처럼 꾸며대는 현실에서 오는 자기상실증이요, 셋째로는 두 김씨에 대한 기대망상이 아니라 기대파국에서 오는 냉소주의다. 백 번 설쳐 보아라.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하는 식의 냉소주의가 끝내는 허무주의로 된 현실이다. 이 점은 지금 여당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계와 학꼐, 심지어는 민중운동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만연된 심각한 문제다. (212쪽)


한마디로 보수야당 갖고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늘의 독재체제 부패구조의 일부입니다. 먼저 그 뿌리부터 말씀드릴까요? 오늘의 야당의 뿌리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집단입니다. 왜놈들이 우리의 처녀들을 수십만 명씩이나 잡아다가 성의 노리개로 몰살시킨 이른바 정신대 이야기는 치가 떨리지요. 그 악귀 잡신이 왜놈들뿐인 줄 아세요? 오늘날 야당의 뿌리의 하나인 박순천 여사가 바로 일제 때 우리네 처녀들에게 정신대로 나가라고 강권하고 혹은 연설을 하고 다니던 대표적인 친일파, 여성의 적이며 인류의 양심을 저버렸던 정신대 범죄의 장본인입니다. 조병옥 박사는 또 어떤 인물일까요. 해방 직후 통일을 염원하는 세력을 대량 학살한 장본인의 하나입니다 … 장준하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신익희 씨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사기 협잡꾼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맥의 뿌리를 오늘에 이어받은 야당이야말로 오늘의 분단독재체제의 일부라는 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으며 따라서 보수야당은 부패청산의 해결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59쪽)


그러면 무엇이 희망일까요. 사람이 돈을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돈에 의한 지배착취, 돈에 의한 불균등을 청산하고 사람이 돈을 다스리고 사람이 역사창조의 알기가 되는 세상, 그것을 만들기 위한 실천과 이상의 통일이 곧 우리의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274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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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숲노래 인문책 / 숲노래 책읽기 2023.6.10.

헌책읽기 12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



  저는 전라남도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작은시골에 깃들어 열 몇 해란 나날을 보내기 앞서까지 ‘전라도가 이다지 썩은 줄’ 조금도 몰랐습니다. 인천에서 나고자라는 동안 ‘인천이 허벌나게 썩었다’고 늘 느꼈고, 서울로 옮겨 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서 출판사에 들어가 일할 즈음 ‘서울이 더럽게 썩었다’고 으레 느꼈으며, 충청북도로 옮겨 이오덕 어른 글자락을 갈무리하며 다섯 해쯤 사는 동안 ‘충청도를 비롯해 글판·배움판(교육계)이 썩어문드러진 꼴’을 언제나 새삼스레 보았습니다. 이따금 부산마실을 하면서 부산 곳곳에 ‘부산시가 헛돈을 쏟아부은 얼나간 관광시설’을 지켜보면서, 그야말로 이 나라 구석구석 안 썩은 데가 있나 고개를 갸웃합니다. 우리나라에 ‘진보·보수’가 있을까요? ‘다 썩은 무리’하고 ‘확 썩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유미리 님이 쓰는 글이 한동안 한글판으로 잇달아 나왔지만 이제는 거의(또는 아예) 안 나옵니다.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을 읽고 보면, ‘속속들이 썩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도무지 뭘 할 수 있겠는가 싶어 속으로 앓다가 조용히 눈물을 거두고서 차분하게 ‘오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눈빛’을 느낄 만합니다. 한글이되 우리말이라 하기 어려운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은 뭘까요? 이렇게 옮기고서 ‘번역’을 했다고 여기는 쓸쓸한 민낯입니다. “世界のひびわれと魂の空白を”인데 ‘を’는 어디에 팔아먹었나요? ‘ひびわれ’하고 ‘魂の空白’은 ‘틈’과 ‘빈얼’로 옮겨야지 싶습니다. ‘世界’는 “이 땅”으로 옮겨야 할 테지요. 왜 그럴까요? 유미리 님은 “푸른별(지구)이라는 이 땅에 아무런 ‘틈(틈새)’이 없어 싹틀 수도 움틀 수도 없는 사랑이 슬픈 나머지, 사람들이 잊다가 잃어 ‘텅 빈 얼’을 스스로 아파한 나머지, ‘이 꼴을’ 어떡해야 아이한테 안 물려줄까?” 하고 속삭입니다. ‘물려주고 싶은 땅과 틈과 얼을’ 생각하는 글자락입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얼차릴’ 일입니다.



《세상의 균열과 혼魂의 공백》(유미리/한성례 옮김, 문학동네, 2002.5.25.)


#이땅에서틈과빈얼을

#世界のひびわれと魂の空白を #柳美里


ㅅㄴㄹ


내 이름은 미리(美理)다. 구청에서 알아보았더니, ‘밀양(密陽)’의 어원은 ‘수룡(水龍/미리리)’이라고 한다. 밀양, 미리리, 미리. 그리고 두 살 때 죽은 외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은 ‘수룡(水龍)’이라는 이름이었다. (51쪽)


그들의 무례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간 약속이나 일을 진행하는 게 분명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사과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우선 행동부터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살면서 몸에 밴 법칙과 습관으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났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내 안에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9쪽)


전후 일본인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한 것일까? ‘나라를 위해’를 ‘회사를 위해’로 바꾸고 기업 전사가 되어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거품경제가 터진 지금, 사람들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평화? 전후 민주주의? (72쪽)


며칠 전에 있었던 일본 교직원 노동조합 대회와 사회당 임시 당대회를 보도로 알았는데, 두 대회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매우 놀랐다 … 무엇이 닮았는가 하면, 논의 끝에 방침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사전에 다수파에 의해 방침이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간파나 반대파가 뒤엉켜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게 위해 물밑에서 혹은 공공연히 흥정으로 일관한다. (81쪽)


선거권도 없는 재일한국인에게 왜 납세 의무가 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듬해부터 나는 아주 간단하게 납세자가 되었다. (111쪽)


대동아 공영권의 망령은 고도성장기에도 출현했다. 회사를 위해 다른 건 개의치 않고 멸사봉공으로 일했다. 공해로 사람이 죽어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 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수은중독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127쪽)


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오가던 그 당시조차 대리인이라는 무사시 대학의 여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랐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재일한국인들 중에서 너 같은 사람은 흔하다. 그런데 그걸 장사밑천 삼아 텔레비전이나 잡지 인터뷰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대고 있다니, 바보 아니냐! 자살 미수 경험도 있다고 하던데 자실을 팔아먹겠다면 지금 당장 죽는 게 어때?” 이렇게 작품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일로 매도하고 협박하더니 덧붙였다. “두고봐라. 너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릴 테니. 우리는 너 같은 사람 간단하게 매장시킬 수 있는 인맥과 힘이 있어.”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화해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177)


류세이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아이 초상화를 다른 가족의 찬성을 얻을 때까지 고쳐 그려야 한다고 요구하면 어떤 화가라도 경악할 것이다. 이런 얘기는 누가 들어도 황당무계한 얘긴데, 회화에서는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 어떻게 소설에서는 가능한지, 꼭 오에 씨에게 묻고 싶다. (190쪽)


그러자 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문예지에 실린 형편없는 소설 따위를 뭐 하러 읽나? 차라리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는 게 백 번 낫지. 그러고 보니 얼굴이 제법 반반하군. 누드 사진집 내면 팔릴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내 손은 가만히 있었다. 내 손이 날아간 것은 바로 그 다음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었다. (227∼228쪽)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무식한 작가가 확고부동한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을 향해 언론전을 벌였다는 사실도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들은 내 의견을 일축할 수도 없었다. (245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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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3.5.14.

숨은책 824


《悅話堂美術文庫 15 韓國의 民畵》

 김호연 글

 열화당

 1976.6.5.



  1996년 여름에 가시울(철책)에서 나왔고, 밀린 말미(휴가)를 보름 받습니다. 싸울아비(군인)는 날마다 헌책집에 가서 책만 팝니다. 이러고서 싸움터(군대)로 돌아간 뒤, 1997년 12월에 마침내 그곳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 말미를 안 쓰고 틀어박혔습니다. 젊은돌이는 싸울아비로 끌려가면 ‘잊히’는구나 싶어 멧자락에서 멍하니 하늘바라기·별바라기를 하고 눈쓸이를 했어요. 그때 드나들던 헌책집지기는 “군인한테 책값을 받으면 안 되지. 그냥 가져가시게.” 하면서 실랑이를 했습니다. “군인으로 휴가를 나오면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셔야 하지 않아? 왜 맨날 책만 보러 와?”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는 웃기만 했습니다. 《悅話堂美術文庫 15 韓國의 民畵》를 읽으면서 ‘조자용’ 님 말고도 겨레그림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구나 싶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김호연 님은 ‘겨레그림’이란 이름을 짓기는 했어도 글은 순 한자투성이예요. 한자는 겨레글이 아니고, 중국말·일본말은 겨레말이 아닐 텐데요. 가만 보면, 우리말·우리글을 살핀다는 분들도 ‘國語·國文學’처럼 한자쓰기를 즐겨요. 스스로 작은이로 발을 디디면 말빛부터 바꿀 텐데요. 그나저나 열화당은 1982년에 껍데기만 바꾸면서 마치 처음 펴낸 듯 눈가림을 했습니다.


- 1996.8.8. 용산 뿌리서점. 내가 하는 일을 믿음과 사랑으로 늘 땀흘려 하길 빌며.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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