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이시카와 이쓰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삼천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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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7



전쟁은 오직 ‘폭력·학살·강간’

―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이시카와 이쓰코 글

 손지연 옮김

 삼천리 펴냄, 2014.9.19.



  기다립니다. 반가운 벗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기로 한 뒤, 어느 날 어느 곳에 가서 조용히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먼산바라기를 하고, 책을 뒤적이다가, 공책을 꺼내 글을 살짝 씁니다.


  반가운 벗이 오랫동안 안 온다면, 혼자 하늘바라기를 더 할 수 있습니다. 반가운 벗이 때를 맞추어서 온다면, 하늘바라기는 그칩니다. 이제부터 서로 바라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기다리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으로 어느 한 가지를 바라면서 가만히 지켜보는 일일까요?


  기다립니다. 곰곰이 지켜보면서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찬찬히 바라보면서 기다립니다. 봄에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겨울에 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저기 바다 건너 일본에서 전쟁을 일으킨 이들이 제대로 뉘우치고 참답게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 “어째서 일본 정부는 그토록 전쟁을 좋아하는 걸까요? 이번에도 와 보니 해외에 군대를 파견한다고 하더군요. 난 군인을 보는 것만으로 온몸이 떨려요(김학순).” … “야자나무와 암페라가 쌓여 있고, 강물이 흐르는 곳에 위안소가 자리잡고 있었어요. 정말 비참했죠. 그곳 부대원들은 말이 해병이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굶주려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병사들은 여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들었어요. 그런 해골이 덮친다고 생각해 보세요(시로타).” …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사람을 죽이도록 훈련시키는 겁니다. 눈을 감고 푹 찌릅니다. 빠지지 않으면 힘껏 잡아 뺍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 짓을 반복하는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부대에 새로 신병이 들어오면 이들이 선임이 되어 두들겨 패고 마귀로 변모시키는 노력을 하게 되죠(데쓰무라 고).” ..  (21, 31∼32, 82∼83쪽)



  전쟁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먼저, 전쟁은 ‘폭력’입니다. 전쟁무기는 ‘폭력무기’입니다.


  사람들은 잘못 알기 일쑤인데, 전쟁무기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는 오직 전쟁에 씁니다. 평화를 지키는 자리에서는 전쟁무기가 덧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어요. 내가 너한테 총을 내밀어 보셔요. 총을 내밀기에 너와 나 사이가 평화로운가요? 내가 네 앞에서 날카로운 칼을 흔들어 볼까요. 칼을 휘휘 휘두르면 너는 평화롭다고 여길까요?


  오늘날 한국에서는 남녘과 북녘이 전쟁무기를 놓고 다툽니다. 전쟁무기가 있어야 평화를 지킨다고 떠벌입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떠벌입니다. 전쟁무기가 없으면 남녘이 북녘으로 쳐들어온다고 저쪽에서 떠벌이고, 전쟁무기가 없으면 북녘이 남녘으로 쳐들어온다고 이쪽에서 떠벌입니다. 서로서로 떠벌입니다.


  그러면, 전쟁무기가 그득그득 많은 오늘날, 누가 누구를 괴롭힐까요?


  어느 누구도 누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남녘과 북녘 모두 정치권력자가 ‘여느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괴롭힙니다. 전쟁무기는 평화를 지키는 연모가 아닙니다. 전쟁무기는 정치권력자가 사람들을 짓밟거나 괴롭히는 연모입니다. 전쟁무기를 앞세워 온갖 엉터리 정책을 일삼습니다. 전쟁무기를 앞세워 사람들 목소리를 짓눌러요. 전쟁무기가 없어도 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을까요. 전쟁무기가 없어도 군국주의나 제국주의나 식민지가 생겼을까요. 지구별 모든 나라는 전쟁무기를 하루 빨리 없애야 합니다. 총과 칼을 녹여야 합니다. 총알과 미사일을 뜯어야 합니다. 전쟁무기 만드는 과학자를 쫓아내고,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을 닫아야 합니다.



.. 이 비디오를 보고 문득 우리 반 남자애들에게 불신감이 들었어. 이 애들도 어른이 되면 돈으로 성을 사고 강간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 점차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이른바 ‘3광 작전’이라는 방화, 살인, 약탈이 포함된 작전을 명령했다. 여기에 무자비한 인체 실험과 세균전까지 계획했던 일본은 ‘동아시아의 재앙’ 그 자체였다 … “일본군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인의와 자애의 마음을 저버린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무자비한 행동은 머지않아 일본 국내 각 개인의 성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암묵적으로 강도를 좋은 것이라 가르치는 것과 같다나가이 가후).” ..  (38, 96, 97쪽)



  전쟁은 ‘학살’입니다. 학살은 한국에서 수없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1980년에도 전라도 광주에서 학살이 있었고, 요 몇 해 앞서는 서울 용산에서 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골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경상도 밀양에서도 ‘학살’이라고 할 만합니다. 경상도 밀양에 있던 전경과 경찰은 총을 쏘지 않았으나, ‘입으로 학살을 일삼’았습니다. 주먹질과 발길질로 학살을 일삼았습니다.


  시골사람은 손에 무엇을 쥐었을까요? 송전탑을 시골에 박지 말라면서 외친 할매와 할배는 두 손에 흙을 쥐고 나락을 쥐었습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오직 사랑과 평화를 두 손에 쥔 채 전경하고 경찰한테 맞섰습니다. 전경과 경찰은 두 손에 무엇을 쥐었을까요? 전쟁과 권력입니다. 여기에 학살입니다. 전쟁과 권력이 만나니 학살이 태어납니다.


  전쟁무기가 윽박지르니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사람들은 죽고 싶지 않아 징용으로 끌려가고 징병으로 끌려갑니다. 게다가,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이 나라 가시내를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서 ‘성노예’로 괴롭혔습니다. 전쟁은 폭력이면서 학살입니다.



.. 다다미 두 장, 그곳은 방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매서운 추위에, 듣도 보도 못한 이국땅에서 365일 그곳에 갇혀 밤마다 수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소녀들.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강제한 것은 다름아닌 천황의 군대였다 … 황금주 씨의 경우, 일본군에게 강간죄, 상해죄, 감금죄, 인신매매죄 등을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1910년 파리에서 체결된 〈매춘업을 위한 부녀매음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은 본인이 원하더라도 미성년자에게 매춘 행위를 시키는 것을 금하며, 매춘을 위한 목적으로 강제로 성인 여성을 유괴한 자는 처벌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 어째서 병사들은 이토록 성욕에 굶주려 있으며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걸까 … 대일본제국은 종이 한 장으로 일본인 남성들을 사지로 내몰았으며 혐오스러운 ‘동양의 마귀’가 되기를 독려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성을 관리하기 위하여 ‘위안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  (67, 78∼79, 81쪽)



  전쟁은 ‘강간’입니다. 전쟁무기를 손에 쥔 이들은 거의 모두 사내입니다.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전쟁을 일으키는 이도 거의 모두 사내입니다. 사내는 전쟁무기를 앞세워 가시내를 짓밟습니다. 사랑도 평화도 모르는 사내들은 가장 바보스러우면서 어리석은 길로 갑니다. 왜냐하면, 손에 총과 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총칼을 들이밀면서 옷을 벗깁니다. 아니, 손찌검과 발길질로 옷을 찢습니다.


  이런 자리에는 아무런 사랑이 없습니다. 사내와 가시내가 만나 살을 섞을 때에는 오직 사랑과 평화가 감돌아 아름다운 씨앗을 빚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만나서 사랑을 낳아야 아기가 태어납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학살 어린 핏빛으로 짓밟는 자리에는 오직 ‘강간’만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끔찍한 폭력과 학살과 강간을 일삼다가 원자폭탄 두 방을 맞습니다. 아무리 저지레와 잘못을 일삼았어도 이들이 원자폭탄을 맞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았다는 ‘피해자 의식’을 내세웁니다. ‘피해자 의식’을 내세워 일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내세우면서 저지른 모든 저지레와 잘못을 슬그머니 덮거나 감추려 합니다. 일본사람 나스 마사모토·니시무라 시게오 두 사람이 빚은 《히로시마,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사계절 번역,2004) 같은 그림책이 바로 이 같은 얼거리로 태어났습니다. 이 그림책은 ‘피해자 의식’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주 짙고 넓게 나타납니다.


  그래요. 일본도 원자폭탄을 맞아서 아픕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일본으로 끌려가 징용살이를 해야 했던’ 식민지 조선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아서 죽은 식민지 조선사람’한테 한 푼조차 배상을 하지 않았으며 ‘원자폭탄 피해 조선사람’을 치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 ‘천황의 적자’인 일본의 아이들은 ‘총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 기간이 지나면 부모를 떠나 소개해야 했다. 이와 달리 조선의 어린 소년 소녀들은 공습이 격렬한 일본의 군수공장 노동자로 가차 없이 차출되어 갔다 … 집이 무너진 탓에 근처 텐트 안에 모포만 깔아 놓은 ‘임시 위안소’가 마련되었다. 그곳도 군인들로 붐볐다. 그들에게 한 사람의 소녀는 인간이 아니라 하반신만 존재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 도대체 세상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파는 것이 좋아서 자신의 몸을 판단 말인가 … 아이누, 아이즈, 타이완 등지에서 자행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강간 행위는 정복한 땅의 여성들에게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일본군의 야만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98, 111, 125, 132쪽)



  이시카와 이쓰코 님이 쓴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삼천리,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1933년에 태어난 이시카와 이쓰코 님은 일본에서 똑똑히 두 눈을 뜨고 슬기롭게 삶을 읽으면서 사랑스럽게 일을 하는 아름다운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녁은 일본 정부가 이렇게 괴롭히거나 저렇게 들볶아도 씩씩합니다.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일본 정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어김없이 꾸짖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밝히는 일에 앞장서고, 전쟁에 눈이 먼 일본 정부와 지식인을 따사로이 어루만지면서 일깨우는 길에 힘을 보탭니다.


  이 책에도 잘 나타나지만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야 했던 사람은 모두 ‘소녀’입니다. ‘어린 가시내’입니다. 꿈을 키우고 사랑을 노래하고 싶던 어린 가시내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모질게 짓밟았습니다.


  여기에서 잘 헤아려야 하는데, 일본 군인과 정부만 ‘위안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에 부역한 이들도 이러한 일을 똑같이 저질렀습니다. 이를테면, 김활란과 모윤숙 같은 슬프고 딱한 이들이 이러한 일에 앞장섰어요.


  이들은 왜 아픈 이웃을 바라보지 못했을까요? 이들은 왜 아픈 동무를 지키지 못했을까요? 이들은 왜 ‘독립을 기다리지’ 못했을까요? 이들은 왜 ‘독립을 기다리면서 씩씩하게 싸우는 길에 손을 보태지’ 못했을까요?



..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안소’라는 곳. 그곳은 병사들이 공공연하게 여성을 윤간하던 곳이다 … 우선 지적할 것은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매우 폭력적인 국가였다는 점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이면서 이웃 나라들을 오직 병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온갖 음모와 궤변으로 해외파병을 정당화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정복할 땅과 자원, 훈장과 명예, 그리고 여자의 몸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을 쟁취하기 위해 사기와 폭력, 살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저질렀는데, 여기에 국가권력이 개입하면 이 모든 행위는 ‘성전’으로 둔갑해 버렸다 … “일본군에 의해 얼마나 많은 마을이 불에 타고 파괴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했는지. 나는 살해당한 중국인들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만행을 여러분께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지요(완아이화).” ..  (117, 141, 192쪽)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한테, 그러니까 ‘성노예 피해 할머니’한테, ‘강간 피해 할머니’한테 제대로 뉘우치고 보상을 해야 마땅합니다. 이에 앞서, 한국 정부가 먼저 이 할머니를 따사로이 보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정부가 먼저 이 할머니를 품은 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한테 뉘우치고 보상을 하도록 이끌어야지요.


  한편,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왜 ‘위안부’라고 하는 끔찍한 ‘제도’를 일본 군대가 만들었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잘 살펴보셔요. 한국에 있던 ‘주한미군 기지’마다 둘레에 ‘창녀촌’이 있습니다. 주한미군 기지뿐 아니라 ‘한국 군대’ 둘레에도 ‘창녀집’이 있습니다. 서울역과 청량리역과 용산역 같은 기차역이라든지, 상봉이나 강변 같은 버스역 둘레에는 ‘군인옷 입은 젊은 사내한테 달라붙어서 돈을 주고 여자를 사서 놀다 가라’고 하는 아주머니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아마 이런 아주머니는 아직 제법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군대가 있는 곳마다 ‘창녀촌’이 생깁니다. 군대가 있는 곳마다 성폭력과 성추행이 잇달아 생깁니다. ‘평화로운 한국’ 군대에서도 ‘높은 계급 사내’가 ‘낮은 계급 가시내(직업군인)’를 폭력과 계급을 내세워서 괴롭힙니다. ‘평화로운 한국’ 군대에서도 ‘높은 계급 사내’가 ‘낮은 계급 사내’를 폭력과 계급을 앞세워서 두들겨 패거나 괴롭히거나 성추행을 저지릅니다.



.. 강간을 저지른 쪽은 전쟁 때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뒷날 보통 시민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데, 피해 여성들은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말이야.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아 … 이 세상에 폭력과 지배는 필요치 않아. 폭력이나 지배는 용기와 반대 개념인 것 같아. 그리고 누가 됐든지, 사람을 도구로 삼을 권리 따윈 없어 ..  (212, 215쪽)



  군대가 있기 때문에 폭력과 학살과 강간이 끊이지 않습니다. 군대가 있기 때문에 평화가 찾아오지 못합니다. 군대가 있기 때문에, 정작 자유와 민주와 평등조차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참다운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평등을 기다립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사랑과 꿈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생각합니다. 기다리면서 지켜봅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고, 푸르게 우거진 숲을 지켜봅니다. 우리 아이들과 살아갈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새롭게 거듭날 하루를 생각하고, 내가 두 발을 디디는 이곳에 사랑씨앗을 한 톨 심습니다. 4347.10.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201208031738061&pt=nv


이 책을 쓴 분을 <레이디경향>이라는 곳에서 만난 기사가 있다.

아주 반가우면서 뜻있는 기사로구나 싶다.

이 글도 읽어 주시기를 바라고,

내 이웃과 동무가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삶과 마음을 사랑스럽게 북돋우는 슬기를 얻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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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데이 2014.10
월간 해피투데이 편집부 엮음 / 혜인식품(월간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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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73



깜짝 놀란 재미난 잡지

― 해피투데이 2014.10. (50호)

 혜인식품 펴냄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읽고서 서울에서 고흥으로 찾아온 손님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사진책도서관을 둘러보며 그 책을 쓴 바탕을 헤아리고 싶다고 합니다.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손님은 반갑습니다. 왜냐하면, 멀다고 해 본들 그리 멀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멀다고 느낀다면 마음이 멀기 때문에 멀 뿐입니다. 마음이 가까울 적에는 언제 어디에 있어도 언제나 한마음입니다. 몇 해 만에 얼굴을 보아도 언제나처럼 반가운 사람이 있고, 자주 부대끼거나 날마다 스치더라도 안 반가운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행작가로 일하는 박상준 님이 기차와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서 고흥으로 찾아옵니다. 고흥에서 살며 돌아보면, 다른 고장에서 고흥으로 오기란 참 힘든 노릇입니다. 거꾸로 보면, 고흥에서 다른 고장으로 가는 길도 참 힘듭니다. 섬이 아닌 뭍 가운데 이렇게 오가기 힘든 곳은 고흥이 으뜸이리라 느낍니다. 기찻길도 고속도로도 없는 꼭 하나뿐인 고장이니까요.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으나, 어릴 적부터 시골살이를 마음에 담으며 자랐습니다. 언젠가 시골로 갈 줄 알았습니다. 언제 갈는지 몰라도 도시에서 내 삶을 더 이을 수는 없다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내 몸이 그리 단단하지 않아 도시에서 버틸 재주가 없었어요. 곁님도 곁님이지만 ‘군면제를 받을 만큼 안 좋은 코(그러나 줄을 잘못 서서 군면제는 못 받은)’로는 도시에서 숨을 쉬기도 아주 힘들었어요.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이라는 책은 열 살 어린이가 스스로 읽어서 스스로 말을 깨닫도록 도우려고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어른(어버이나 교사)한테는 아주 쉬울 수 있고, 한국말을 깊이 살피지 않는 어른이라면 너무 어렵거나 뜬금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면서 썼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동안 ‘모든 말과 삶은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대목을 깨달았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이웃과 나누고 아이들한테 들려주려고 이런 책을 썼어요.


  〈해피투데이〉라는 잡지에 ‘시골에서 사는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를 쓴다는 박상준 님이 이 책을 알아보았다고 하니 여러모로 반갑습니다. 아무래도 ‘시골 이야기’를 찾는 마음이기에 내 책을 만날 수 있었구나 싶고, 무엇보다 잡지에 ‘시골사람 이야기’를 쓰려는 마음이 예쁩니다.


  그런데, 〈해피투데이〉라는 잡지를 펴낸 곳 이름은 ‘혜인식품’입니다. 무슨 식품회사에서 잡지를 내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살피니, 곳곳에 ‘네네치킨’ 광고가 나옵니다. 튀김닭집에서 잡지를 크게 밀어주려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간기를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이 잡지는 튀김닭집을 하는 식품회사에서 돈을 대어 내는 얼거리입니다.


  튀김닭을 팔아서 버는 돈으로 잡지를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어여쁜 모습입니다. 즐겁게 벌어서 즐겁게 쓸 줄 아는 마음이 있구나 싶습니다.


  다달이 내놓는 잡지 하나 만드는 돈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손꼽히는 연예인을 불러서 광고 한 번 찍은 뒤 방송에 내보내는 돈보다 훨씬 적게 듭니다. 아니, 방송광고를 한 번만 안 해도 한 해 동안 이러한 잡지를 펴낼 수 있습니다.


  〈해피투데이〉 2014년 10월치에 실린 황안나 님 이야기를 읽습니다. 황안나 님이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다닌 이야기를 ‘샨티’라는 출판사에서 2005년에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이름을 붙여 선보인 적 있습니다. 어느덧 열 해가 흐릅니다. 잡지에 실린 황안나 님 얼굴에 주름이 더 많이 보이는데, 낯빛이나 몸빛은 외려 열 해 앞서보다 단출하고 정갈해 보입니다. 그동안 참 많이 걷고 조용히 생각하며 삶을 돌아보셨겠구나 싶습니다.


  110쪽 안팎 되는 조그마한 잡지에 실은 글과 사진은 튀거나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수수합니다. 서울 누하동에 있던 헌책방 〈대오서점〉 사진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이제 〈대오서점〉은 헌책방이 아닌 ‘헌책방 자국을 살린 북카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잘되었습니다. 〈대오서점〉은 그야말로 소리도 소문도 없이 사라지겠다 싶은 헌책방이었습니다. 참말 아무도 이 작은 헌책방을 들여다보지 않던 때, 아마 2002년인가 2001년이지 싶은데, 그무렵에 서울 시내 골목에 조용히 깃든 헌책방을 찾으려고 날마다 서너 시간, 때로는 예닐곱 시간을 걸어다니며 지냈습니다. 이러면서 〈대오서점〉을 보았고, 이 이야기를 어느 누리신문에 썼는데, 이때부터 다른 매체에서 이곳을 꾸준하게 취재했어요. 조용히 지내던 헌책방 할머님을 아주 귀찮게 하고 만 셈인데, 할머니는 늘 서글서글 여러 취재 손님을 맞아 주신 듯합니다. 예전에는 이곳을 아끼거나 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이제는 이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많으니, 앞으로도 긋곳에 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재료에 따라 변화무쌍해지는 맛! 김밥은 완벽한 동그라미다.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는다면 뭘 먹을 거야’라는 어려운 질문에 망설임없이 감밥을 떠올린 것은 아마 가장 가까이서 큰 위로를 주는 음식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83쪽/최진영)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언제나 가장 맛있으리라 느낍니다. 나한테도 저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니까 ‘한 가지만 먹어야 한다면 무엇을 먹겠어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빙그레 웃으며 한 마디 할 생각입니다.


  “나는 바람을 먹겠어요.” 또는 “나는 햇볕을 먹겠어요.” 지구별에서 산다면 바람을 먹고, 우주에서 산다면 햇볕을 먹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작은 잡지를 살그마니 덮습니다. 재미있습니다. 4347.9.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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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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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5



오늘 밤도 별을 보면서

― 글쓰기를 말하다

 폴 오스터 이야기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인간사랑 펴냄, 2014.8.30.



  몸이 고단하면 자야 합니다. 고단한 몸은 느긋하게 쉬면서 차근차근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몸이 고단해도 좀처럼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아마 나도 어릴 적에 이렇게 놀았지 싶은데, 아이들은 누구나 곯아떨어질 때까지 놀이를 즐깁니다. 잠자리에서도 깔깔 하하 웃고 떠들면서 한 가지 놀이라도 더 누립니다.


  두 아이를 가까스로 재운 뒤, 나도 아이들 사이에서 곯아떨어집니다. 이러다가 깊은 밤에 문득 잠을 깹니다. 아차 하는 생각으로 눈을 떠서 손을 더듬어 아이들을 만져 봅니다. 한가을로 접어든 시골 밤이기에, 처음 잠자리에 들 적에는 아직 더위가 있더라도 밤에는 썰렁합니다. 아이들은 자면서 이불을 으레 걷어차니, 틈틈이 이불을 여미어야 합니다. 아이들마냥 나도 똑같이 곯아떨어지면 안 되지요. 작은아이 큰아이 모두 이불을 뻥뻥 차고는 이리저리 뒹굴었습니다. 반듯하게 누인 뒤 얇은 이불을 먼저 덮고, 두꺼운 이불을 더 덮습니다.


  이 아이들이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밤오줌이나 밤똥을 치우느라 바빴습니다. 밤에 자다가 기저귀에 쉬를 하면 얼른 갈아야지요. 축축할 테니까요. 개구지게 논 아이는 그만 밤똥을 누기도 해요. 이때에도 얼른 갈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불을 걷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커서 기저귀를 뗀 뒤에는 밤오줌을 가리느라 부산합니다. 아직 스스로 밤에 일어나서 쉬를 누지 못할 무렵에는 아이가 잠든 지 서너 시간 지난 뒤 살며시 아이를 안아 오줌통에 앉혀요. 이렇게 쉬를 누이기를 석 달 넉 달 꾸준히 하면, 어느 날부터 아이 스스로 자다가 “쉬.”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그러면, 나즈막한 아이 말을 알아듣고는 부시시 일어나서 쉬를 누입니다.



.. 번역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게 시를 좀더 잘 이해시키려는 방편이었을 뿐, 그 당시에는 번역 작업의 결과물을 출판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 번역은 글쓰기의 기본을 익히게 해 줍니다. 단어들과 친숙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죠 … 커피 잔, 시가 박스, 전화기 등과 같이 자신 앞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  (31, 32, 85쪽)



  큰아이가 일곱 살쯤 되니 이 아이는 밤에 혼자 일어나서 쉬를 누고는 다시 자리에 눕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일곱 살 언저리이기에 쉬가 마려워 일어나기는 했지만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기도 합니다.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는 선 채 바지에 쉬를 누고 말아요.


  그러면, 아이는 왜 선 채 가만히 있을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없이 신나게 뛰놀아서 기운을 모두 쏟았기 때문입니다. 워낙 개구지게 논 터라, 밤에 오줌을 누러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어버이는 이때에 아이를 이끌거나 안고서 오줌통까지 데려가서 누이고는 다시 잠자리에 눕혀야 합니다.


  두 아이와 하루를 누리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내가 이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적에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우리 어머니도 밤잠을 거의 못 이루면서 살았으리라 느낍니다. 우리 어머니가 밤잠을 홀가분하게 누릴 수 있기까지 나와 형은 꽤 어머니 기운을 쏙쏙 빼먹으면서 자랐으리라 느낍니다.



.. 글쓰기는 내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라고나 할까요 …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 그러니까 내가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소재는 내 자신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그집어낸 것들이란 사실입니다 … 나는 할당이 주어진 서평이나, 미리 정해진 주제에 따라 글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만 썼어요 … 내 평생 처음으로 집세 걱정 없이 장기적인 글쓰기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거죠. 어찌 보면 내가 쓴 소설들은 모두 아버지가 남겨 준 그 돈에서 나온 것입니다 … 작가는 독자가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37, 51, 57, 60, 176쪽)



  시골에서 지내면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골집 가운데 뒷간을 집안에 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집은 뒷간이 바깥에 있습니다. 뒷간으로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밤에 볼일을 보아야 하면 마당을 가로질러 뒷간으로 가야 하는데, 밤마다 쉬를 누려고 마당으로 내려서면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빛을 실컷 누립니다.


  비록 요즈음 시골은 곳곳에 등불이 있어서 더 호젓하게 별빛을 누리기는 어렵지만, 등불 있는 데는 손으로 가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우리 집 마당 한켠 우람한 후박나무 옆에 서서 이웃마을 등불을 가린 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자리를 살피다가, 내 나름대로 새 별자리를 그립니다. 저 먼 별을 바라보면서, 저 먼 별에서도 지구를 아름다운 별빛으로 마주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요즈음은 풀벌레 노랫소리가 잔잔합니다. 아이들이 잠들기 앞서 마을 한 바퀴를 빙 돌기도 하는데, 마을 어느 곳을 걷든, 또는 들길까지 두루 걷든, 풀벌레 노랫소리는 우리 집에서 가장 크게 듣습니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농약을 참 많이 쓰니, 웬만한 풀벌레는 살아남지 못해요. 가을 들길을 거닐어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시골에서는 할매도 할배도 풀벌레 노랫소리를 그다지 귀여겨듣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텔레비전을 켜서 연속극이나 뉴스를 보십니다. 시골집에서조차 텔레비전 소리에 풀벌레 노랫소리가 잠기고 맙니다.



.. 나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의 동물을 연구하듯 내 자신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 자신의 작품이 논의의 대상이 될 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허다하게 나오더라도 귀담아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나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인 구비문학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 동화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얼마 되지 않는 분량에 몇 마디 안 되는 내용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를 전달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화의 실제 지은이는 읽는 이, 혹은 듣는 이라는 것입니다 …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바탕을 둔 이미지를 창조하는 거죠 … 과거 200년 동안의 소설은 전형적으로 세부 사항에 치중하고, 서술적인 문장과 표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해 왔습니다. 그 자체로 보면 멋지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야기의 핵심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실제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66, 70, 71, 72쪽)



  도시에서도 풀숲이 어딘가 있다면, 아주 작은 풀숲에도 풀벌레가 있기 마련입니다. 조그마한 풀숲에 무슨 먹이가 있다고 풀벌레가 있으랴 싶지만, 참말 풀벌레가 있습니다. 작은 풀숲과 작은 풀벌레는 메마르거나 거친 도시 한복판에 푸른 바람을 가만히 나누어 줍니다. 쉬잖고 달리는 자동차에, 쉬잖고 손전화로 떠드는 사람들 물결이 넘치지만, 어느 한때 자동차가 안 지나가고 사람들도 없으면, 작은 풀숲에서 가늘게 비이비이 새애새애 풀벌레 노랫소리가 흐르곤 합니다.


  노래란 무엇일까요. 가수가 방송에 나와서 불러야 노래일까요. 라디오에서 흐르거나 전자기기로 들어야 노래일까요.


  스스로 입으로 흥얼거리는 노래는 어디 있을까요. 방송에서 흐르는 노래 말고,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노래는 어디 있을까요.


  노는 아이들은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은 늘 서로서로 어우러져 노래를 불렀습니다. 놀이는 곧 노래입니다. 놀이를 하니 늘 노래가 흘렀습니다.


  일하는 어른들도 언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을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언제나 서로서로 노래 한 가락으로 고단한 일을 잊었습니다. 일은 곧 노래입니다. 일을 하니 언제나 노래가 싱그러이 흘렀습니다.



.. 우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 나는 이야기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없으면 못 삽니다 …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게 문제죠.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 자신이 써야 할 것을 쓰되, 그 결과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 책의 마지막 원고를 타이핑하는 데에도 특정한 속도가 있어요. 그 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손가락에 느껴집니다 ..  (98, 107, 166, 168, 175쪽)



  폴 오스터 님이 ‘글’이 아닌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쓰기를 말하다》(인간사랑,201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폴 오스터 님이 ‘글’로 보여주는 소설은,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누리는 삶을 보여주는 노래이리라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즐기는 삶을 드러내는 노래로구나 싶습니다.


  폴 오스터 님이 말하는 글쓰기는 바로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누리는 삶입니다. 이녁 삶을 쓰기에 글입니다. 이녁 삶을 말하기에 이야기입니다.


  글감이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글감으로 이야기를 풀거나 맺든, 언제나 폴 오스터 님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 소설 하나로 태어납니다.



..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 걸까요? 내 안에 있는 삶의 이야기겠죠 … 내가 미국인들의 언어에서 주목한 것은 사람들의 언어가 매우 투박하면서도 생생하고 독창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 우리 모두 진실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무엇, 우리를 바르고 견고하게 설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 말입니다 … 책을 읽는 시간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낯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 자기 자신도 놀랄 만한 것을 써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전에 하던 일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 보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전에 썼던 작품을 모두 불사르고 없애야 합니다 … 세상사에 대해서 쓸 때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도 될 정도로 이 세상이 넓고 흥미로운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  (208, 220, 236, 295쪽)



  삶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삶을 곰곰이 지켜봅니다. 바라보고 지켜보기에 천천히 느낍니다. 천천히 느끼기에 시나브로 알아챕니다. 시나브로 알아채기에 즐겁게 맞아들여 기쁘게 노래하면서 글로 엮습니다.


  폴 오스터 님은 이녁이 발을 디딘 미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녁 아버지를 바라보고, 이녁을 둘러싼 삶자락을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디딘 한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과 지내는 시골마을을 바라봅니다. 시골마을에서 한국 사회를 읽고, 시골마을 보금자리에서 숲과 들과 하늘과 바다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삶입니다. 네가 쓰는 글은 네 삶입니다. 폴 오스터 님이 쓰는 글은 폴 오스터 님 삶입니다.


  삶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쓰는 글이 다 다릅니다. 더 나은 글이나 덜떨어지는 글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 다른 글입니다. 모두 다르기에 모두 사랑스러운 글이고, 모두 다르면서 모두 재미난 글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 삶대로 재미있고, 네 삶은 네 삶대로 재미있어요. 내 삶은 내 삶대로 나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하루요, 네 삶은 네 삶대로 네가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하루입니다.



.. 당신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한계를 넓혀 나갈 수 있습니다 … 소설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앞으로도 100년은 읽힐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사소한 것에 독자들이 발목 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 일을 하고 있을 때 환경은 작가가 들어가 있는 방이 아니기 때문이죠. 앞에 자리잡고 있는 책의 페이지가 환경입니다. 그곳이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 《모비딕》은 그 어떤 것도 잉태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를 끊임없이 사로잡는 흥미진진한 책으로 유아독존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홍글씨》는 아이들을 낳았죠 ..  (296, 297, 308, 329, 338쪽)



  《글쓰기를 말하다》를 한참 읽다가 《모비딕》과 《주홍글씨》를 말하는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에 젖습니다. 참말 《모비딕》은 아무 아이를 못 낳았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모비딕》은 새로운 숨결을 우리한테 못 불어넣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모비딕》이 낳은 아이도 대단히 많다고 느낍니다. 《모비딕》이 낳은 아이는 꼭 ‘소설’로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과학책이나 그림책으로도 나타납니다. 동화책이나 시집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종이책이 아닌 삶책으로도 나타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새로운 소설을 낳는 아름다운 숨결이어야 아름다운 소설은 아니라고 느껴요. 새로운 숨결은 우리 삶자락 곳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이 낳는 아이는 우리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면서 ‘나 스스로 내 삶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누리는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글을 찍을 때에만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책을 펴내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삶이라면, 이러한 이야기꽃이 바로 책입니다. 삶책입니다. 일하면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면, 이러한 일노래가 바로 책입니다. 삶책이지요.


  아름다운 소설 《모비딕》은 커피집 ‘스타벅스’를 낳았습니다. 스타벅스란 커피집이 어떤 곳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만, 이 커피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온갖 이야기가 끝없이 자랍니다.



.. 희망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아침에 눈을 뜰 수 있겠어요 … 책을 읽으려면 책에게 뭔가 돌려주어야 합니다 ..  (345, 385쪽)



  대통령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한국전력이란 회사와 경찰과 공권력과 언론매체가 밀양이란 곳에서 하는 짓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프랑스 문학을 프랑스말이 아닌 영어로 옮긴 책을 살펴서 다시 한국말로 옮기는 책이 나오는 한국 책마을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국산’을 외치는 한국사람이면서 한국 시골을 와장창 무너뜨리려는 자유무역협정 따위를 함부로 맺는 정치라든지, 이런 정치를 꾸짖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아직도 사라질 줄 모르는 국가보안법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그렇지요. 우악스럽거나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거나 어처구니없거나 터무니없는 모습이나 몸짓을 보면 희망이 싹틀 수 없습니다.


  밤하늘에 돋은 별을 보면 꿈이 싹틉니다.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면 꿈이 자랍니다. 가을 느즈막할 때에도 새롭게 피는 민들레를 보면, 봄하고는 사뭇 다른 꽃빛과 함께 꿈이 피어납니다. 새근새근 잘 자는 아이들이 아침에 번쩍 눈을 뜨면서 까르르 하하 웃고 뛰노는 모습을 보면 꿈이 몽실몽실 큽니다.


  오늘 밤도 별을 보면서 글을 한 줄 씁니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과 시골집에서 복닥복닥 지낸 모습을 되새기면서 글을 한 줄 씁니다. 나는 내 삶에서 맑게 흐르는 즐거운 노래를 글로 씁니다. 나는 내 하루에서 밝게 춤추는 신나는 웃음을 글로 씁니다. 새로운 하루도 즐겁게 맞이하고 싶으니 글을 씁니다. 지나가는 하루를 기쁘게 돌아보고 싶으니 글을 씁니다. 글을 써서 삶 한 자락을 이야기로 남길 때에, 어쩐지 내가 스스로 꿈을 씨앗으로 심어서 돌보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4347.9.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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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의 대화 - 돈만 외치는 망가진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나’로 사는 법
톰 새디악, 추미란 / 샨티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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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3



삶을 보아야 삶을 읽는다

― 두려움과의 대화

 톰 새디악 글

 추미란 옮김

 샨티 펴냄, 2014.3.20.



  삶을 보는 사람만 삶을 읽습니다. 삶을 보지 않는다면 삶을 읽지 못합니다. 숲을 보는 사람이 숲을 읽습니다. 숲을 보지 않으면서 숲을 읽지 못합니다. 야구를 보거나 축구를 보아야 야구나 축구를 읽습니다. 영화나 연극을 보아야 영화나 연극을 읽어요.


  사랑을 읽고 싶다면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사랑을 나누거나 누려야 하며, 사랑을 참다이 읽고 싶으면 사랑을 일구거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읽을 수 없습니다. 바라보지 않거나 들여다보지 않거나 살펴보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읽을 수 없어요.


  보는 일이란 눈으로 헤아리는 일이 아닙니다. 보는 일이란 몸으로 겪는 일입니다. 내가 바로 그곳에 있으면서 스스로 삶을 누릴 때에 비로소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흘깃 헤아리는 일이란 ‘구경’입니다. 냇물 너머로 불 구경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불 구경을 하듯 ‘흘깃 헤아리’기만 해서는 알 수 없고 읽을 수 없어요.



.. 집단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세상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보기 시작했고,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깨달아 가던 중이었다 … 나는 그런 물질 과잉 문화 속에서 자랐고 그것의 공허한 매력에 현혹되어 제멋대로 행동했었다 … 사실 진짜 문제는 전쟁, 기아, 집단 학살, 환경 문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들은, 밝혀지고 조명을 받으면 ‘해결될 수 있는’, 더 깊고 고질적인 문제의 ‘징후들’일 뿐이라고 ..  (10, 11, 12쪽)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고 싶다면, 삶을 보아야 합니다. 삶을 보지 않고서야 삶이 이루어지는 얼거리를 알 수 없어요.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고 싶으면, 사랑을 보아야 할 텐데, 온몸과 온마음으로 사랑을 따사롭게 껴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을 보아서는 삶도 사랑도 알 수 없습니다. 학교를 다녀서는 삶도 사랑도 알 길이 없습니다. 말만 들어서도 삶이나 사랑을 알 턱이 없어요.


  길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제대로 보면 됩니다. 제대로 바라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삶으로 오롯이 들어오도록 가누면 돼요.



.. 현재의 문명을 뒷받침하는 인류의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문명과 함께 인류는 사라지고 말 거야 … 대통령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건 아니야. 사랑과 감사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도 힘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 세상은 완벽하게 정당해. 사람들이 지금 걱정하는 것을 계속 걱정한다면, 경쟁과 다툼 속에서 서로 대항한다면, 세상은 그런 행동의 완벽한 반영이 될 거야. 세상은 사람들이 창조해 낸 그대로야 ..  (24, 25, 35쪽)



  톰 새디악 님이 쓴 《두려움과의 대화》(샨티,2014)를 읽습니다.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톰 새디악은 스스로 이녁 삶을 새롭게 읽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이녁 마음에 깃든 빛이 ‘두려움’이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앞으로는 이녁 마음에 ‘새로움’이라는 숨결이 깃들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톰 새디악 님 스스로 마음속에 있는 두 가지 넋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한 가지 넋은 ‘두려움’이고 다른 한 가지 넋은 ‘진리’라고 합니다.



..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단지 잠자고 있었던 거지 …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걸 … 사회는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집단적 에너지일 뿐이야. 개인들이 각자의 목소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 … 천국이 우리 안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심란해 해 … 아들딸을 대상으로, 특히 그 아이들이 아플 때 돌봐 주고 그걸로 이익을 낸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거야, 그렇지? 그럼 친척들은 어떨까? 삼촌이나 사촌 같은? ..  (50, 51, 58, 59, 74쪽)



  한몸에 깃든 두 가지 넋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이라면, 다른 하나는 ‘새로움’이 되리라 느낍니다. 한몸에 깃든 두 가지 넋 가운데 하나가 ‘진리(참)’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 되리라 느껴요. 그렇겠지요. 마음속에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함께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두움이 있는 사람은 빛도 함께 있습니다. 빛이 있기에 어두움을 알 수 있고, 어두움이 있기에 빛을 알 수 있어요. 거짓이 있기에 참을 알고, 참이 있기에 거짓을 압니다.


  이쪽과 저쪽이라고 할까요. 서로 비추면서 한몸을 이루는 거울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거짓을 보고 또 보면 참을 읽을 수 있기도 합니다. 참을 보고 다시 보면 거짓을 읽을 수 있기도 해요. 둘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은 종이 앞뒷장처럼 한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 두려움이 나쁜 것도, 진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두려움은 단순히 존재할 뿐이고 … ‘나는 누구이고, 내가 소중하게 지키는 가치들은 무엇인가?’ 같은 진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 시스템에 복종하는 것은 그 시스템이 지지하는 부당함에 복종하는 거야 … 열심히 하는 게 해답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학교 교육이 실패하고 있지? … 생각지도 않게 학교를 쉬게 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  (15, 135, 148, 179, 180쪽)



  우리는 어떤 길로 나아갈 때에 즐거울까 생각해 봅니다. 두려움이 아닌 새로움으로 나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두려움을 잊고 참다움으로 나아가야 즐거울까요?


  그러나, 새로움이나 참다움은 즐거움이 아닙니다. 새로움을 찾으려 하면 새로움으로 갑니다. 참다움으로 가면 참다움으로 가지요. 즐거운 삶이 되고 싶다면 즐거움으로 가야 합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일 뿐, 새로움이나 참다움이 아닙니다. 참다움 또한 참다움일 뿐, 새로움이나 즐거움이 아니에요.


  이야기책 《두려움과의 대화》는 스스로 두려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두려움’과 ‘진리’가 맞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얼거리이지만,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밝혀서 두려움이 아닌 길로 가려고 하는 톰 새디악 님 삶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톰 새디악 님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일을 ‘진리’라고 느낄 뿐이에요.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삶도 사랑도 안 가르치는 학교는 두려움만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하고 동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을 가르치고 사랑을 보여줄 때에 비로소 학교가 학교답다고 할 만해요. 이러한 모습이 참다움이라고 할 만합니다. 경제나 군대로 치면 지구별에서 1위라고 하는 미국이라는데, 이런 미국이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닙니다. 살기 좋을 수 없는 나라인 미국입니다. 왜냐하면, 살기 좋은 터전은 경제나 군대로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숲은 경제나 군대로 만들지 못해요. 따사로운 사랑은 철학이나 과학으로 만들지 못해요. 즐거운 어깨동무나 두레는 이론이나 지식으로 만들지 못해요. 아기를 낳아 돌보는 삶은 문학이나 정치로 만들지 못해요.


  살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군대가 없어야 할 테지요. 아니, 군대가 있을 까닭이 없어야겠지요. 즐거운 나라가 되려면 경제개발이 없어야 할 테지요. 아니, 경제개발을 해야 할 까닭이 없어야겠지요. 살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누구나 마음껏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를 돈을 내고 다녀야 한다면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졸업장 때문에 하고픈 일을 못한다면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기를 바란다거나 돈만 많이 벌기를 바라는 나라는 즐겁지 못한 나라예요.



.. 미국은 경제적·군사적 규모가 세계 1위이지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 아이들이 창밖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떡갈나무가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쌓여 있는 나뭇잎들이 어서 와서 놀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 아무도 그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질문, ‘무엇이 너를 살아 있게 하니?’라고 묻지 않는다. 현재 우리의 학교는 유치원 때부터 한 가지 결과만 추구하며 직업 교육만 시킨다 …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 … 사랑으로 한 발 자국씩 걸을 때마다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다 … 사랑이 당신이고 당신이 사랑이다. 그것은 늘 그래 왔다. 사랑이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  (185, 197, 198, 253, 264쪽)



  삶을 보아야 삶을 읽습니다. 사랑을 보아야 사랑을 읽습니다. 삶을 생각해야 삶을 가꿉니다. 사랑을 생각해야 사랑을 가꾸어요.


  두려움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태어납니다. 두려움을 품으면서 걱정을 하니까 두려움이 크게 부풀면서 걱정이 커집니다.


  꽃을 보아야 꽃이 떠오르면서 꽃내음이 온몸으로 퍼집니다. 숲을 보면서 숲에 들어서야 숲을 알고 느끼면서 숲내음이 온몸을 감쌉니다. 살아가고 싶은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싶은 삶을 마음속에 그려야 합니다. 즐겁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둘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서 환하게 웃고 노래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7.9.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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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살다 -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6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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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2



바보는 굶겨야 얼을 차린다

― 밀양을 살다

 밀양구술프로젝트 엮음

 오월의봄 펴냄, 2014.4.21.



  전남 고흥군과 해남군은 군청과 군수가 앞장서서 핵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했다가 주민들이 거세게 손사래쳐서 이를 막은 적이 있습니다(1989, 2010∼2011). 그러나 고흥군과 해남군은 군청과 군수가 다시 앞장서서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했어요(2011∼2012). ‘핵’이 아닌 ‘화력(석탄)’이니 괜찮다고 하는 허울을 뒤집어씌웠지요. 그러나 시골사람도 바보가 아닌 터라, 이런 터무니없는 공사계획을 긴 싸움 끝에 물리쳤습니다. 아주 마땅한 일이지만, 커다란 발전소를 시골마을 끝자락 바닷가에 짓는다고 한다면, 우람한 송전탑을 도시까지 수없이 박아야 합니다. 발전소가 들어서는 바닷마을만 무너지지 않아요. 발전소 언저리 바다만 망가지지 않습니다. 송전탑을 박아야 하는 들과 숲이 모조리 망가지거나 무너집니다.


  지난 2012년에 고흥에서 외롭게 ‘화력발전소 반대 싸움’을 할 적에 밀양에서 여러 이웃이 고흥에 찾아와 주었습니다. 중앙언론은 해남과 고흥과 같은 시골마을 이야기는 취재를 하지도 않고 기사로 쓰지도 않습니다. 밀양 송전탑 이야기는 워낙 크게 불거져서 ‘희망버스’가 달려가기도 하지만, 참말 외지고 동떨어진 시골에서 아무리 그악한 일이 터져도, 기자나 작가나 운동가나 활동가나 시민단체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보다도 밀양에서 찾아온 이웃이 크게 힘이 되었습니다. 숫자로 치면 ‘두어 사람’이지만, 밀양에서 송전탑 때문에 아픈 이웃 두어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발전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대목에서 적잖은 시골사람들 눈을 틔워 주었습니다.



.. “자식 보내 놓고 밤에 잠도 못 자고. 그땐 백마부대, 매화부대 마이 죽었어. 월남 가 갖고. 그리 보내 놓고 울기도 마이 울고. 밥도 마이 굶고. 그래서 일을 마이 했다 카이. 잠이 안 와 갖고 베를 짰다 카이. 명주, 삼베 잣는다고 그거 짤라ㅏ카믄 밤새도록 짜야 된다. 울어 가며 노래 부르고.” … “참, 나는 이곳이 너무 좋고 아무리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내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잎이 돋아나고 그 예쁘게 단풍 물드는 산이 철탑으로 장식이 되잖아예. 그 철탑이 보고 싶어서 산을 쳐다보겠습니까?” ..  (25, 250쪽)



  발전소를 시골에 지으려고 하는 까닭을 사람들이 잘 알아야 합니다. 왜 발전소를 시골에 지으려고 할까요? 게다가 시골에서도 아주 외진 시골에 지으려고 할까요?


  오직 한 가지 때문입니다. 발전소는 아주 위험하고 무서운 시설이기 때문입니다. 발전소가 터지는 일이 생겨도 시골에서 ‘최소 인명 피해’가 나도록 할 뜻이기 때문입니다. 고흥 바깥나로섬에 ‘우주선 발사 기지’를 지은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핵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이 ‘안전’하다면 도시에 지을 노릇입니다. 도시 한복판에 지어야지요. 그래야 송전탑을 안 놓습니다. 도시에서 쓸 전기 때문에 시골에 발전소를 지어서 송전탑을 끝없이 온갖 시골마을마다 수없이 때려박는 짓은 돈도 자원도 모두 헤프게 쓰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이 나라를 아주 망가뜨리는 바보짓입니다.


  여기에서 더 헤아릴 대목은, 깨끗하고 조용한 시골에 발전소 같은 위해시설을 지으면, 시골에서 거두는 곡식과 열매와 남새는 ‘아주 마땅히 망가집’니다. 도시사람은 밥을 어떻게 먹겠습니까? 모두 시골에서 나는 먹을거리로 밥을 지어서 먹지요. 그러면, 시골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깨끗해야겠지요? 안 깨끗한 시골에서 안 깨끗하게 거둔 곡식과 열매와 남새를 맛있게 먹을 수 있겠어요? 아니, 먹을 수조차 없겠지요.


  시골은 언제나 깨끗하게 지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시골에는 아무런 위해시설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발전소뿐 아니라 공장도 시골에 지으면 안 됩니다.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나 호텔도 시골에 지으면 안 됩니다. 시골은 깨끗한 삶터가 되도록 지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골과 도시가 함께 즐겁게 잘 살 수 있습니다.



.. “언제 누가 살아도 여긴 물 좋고 공기 좋고, 손주들 와서 살고 누가 와도 다 잘살 낀데. 자꾸 밑으로 내려오믄 이제 못 산다. 송전탑 저거 보통 것도 아니고 76만 5000볼트 디게 센 게 와가, 저 청도 가서 갈라진다 카이. 밑에 산소도 파내라고 지랄병 하는데 우야겠노.” … “도시 가면 오히려 재밌는 게 없어. 여기 오면 무진장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나를 기쁘게 하고 좋게 해. 자연 사랑해 봐.” … “이 사람들이 10월 달부터 돈을 가지고 꼬시는 기라. 11월 말까지 안 받으면 안 된다, 12월 말까지 안 받으면 마을 공동기금으로 들어간다 카민서. 이런 식으로 보상금 받기 싫다는데도 집집이 다니면서 전화를, 홍보팀에서 계속 전화를 해 가지고 보상금 받아라, 안 받으면 마을 공동기금으로 들어가면 영영 못 받는다 ……” ..  (35, 106, 264쪽)



  밀양 이웃은 고흥에 와서 ‘발전소를 바깥나로섬 끝에 지은 뒤 송전탑을 어디로 어떻게 잇겠느냐?’ 하는 생각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고흥에 있는 시민모임은 ‘송전탑 예상 배치 그림’을 큼직하게 그려서 고흥 읍내에 걸었습니다. 커다란 걸개그림을 본 고흥 여러 면과 읍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고흥 ‘귀퉁이’에 발전소를 짓는 일은 ‘귀퉁이로 끝’이 날 일이 아니었지요. 외통수 반도 모양으로 생긴 고흥에서는 모든 읍과 면이 송전탑으로 피해를 보아야 하는 일이었지요.


  밀양 이웃은 고흥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는 일에 크게 이바지를 했습니다. 고흥사람도 밀양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고흥 이웃이 밀양에 얼마나 이바지를 했는지 잘 모릅니다. 이바지가 될 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고흥에서는 ‘밀양 송전탑’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 참 무시무시한 일이로구나!’ 하고 느끼거나 깨달았는데, 밀양에서는 ‘고흥·해남 핵발전소·화력발전소 계획’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라고 느끼거나 깨닫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 시골마을 분들은 잘 느끼시더라도 밀양 시내에서는 얼마나 느낄는지, 살갗으로 느끼거나 ‘우리 모두한테 닥친 일’이라고 뼈저리게 느낄는지 궁금합니다.


  밀양뿐 아니지요. 청도에서도 똑같습니다. 밀양과 청도뿐일까요. 커다란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부터 송전탑을 줄줄이 놓는데, 왜 자꾸 커다란 발전소를 새로 지으면서 우람한 송전탑을 줄줄이 박아야 할까요? 왜 작은 발전소로 바꾸지 않으며, 왜 집과 마을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서 쓰는 틀로는 안 바꾸려고 할까요?



.. “경찰 가시나들, 저 더러분 놈의 가시나들 때문에 사람이 몇이 다쳤는 줄 아나. 제방 젙에 앉았다고 나이 많은 사람들 밀어내고 안고 나와서 아무 데나 놔버리니까 허리 다친 사람 있제.” … “소 한 마리 30만 원씩 주면 해롭기 때문에 그렇게 주는 거 아이겠습니꺼. 가처분신청 받아 가지고 법원에 갔는데 마지막에 할 말 있으면 하라 카대. 그래 내가 ‘여게 한전 놈들도 있지마는 생각해 보시소. 소 한 마리 30만 원 주면 사람 한 마리는 얼마 주는교?’ 물으니 대답도 안 합디다.” … “경찰들은 웃긴 게 우리가 경찰 코만 건드려도 그게 폭행죄더만요. 조깨만 차 옆에 얼쩡거려도 공무집행방해고. 그러니 우리가 무슨 수로 경찰을 이기겠습니까. 석 달째 경찰들은 오미가미 탱자탱자 놀면서 월급 다 받아 처먹고.” ..  (37, 147, 291쪽)



  밀양구술프로젝트에서 엮은 《밀양을 살다》(오월의봄,2014)를 읽었습니다. 시골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나려고 한다면 ‘구술프로젝트’ 같은, 아무래도 시골하고 너무 동떨어진 이름이 아닌, 시골스러우면서 살가운 이름을 지어서 쓰면 좋을 텐데, 도시에서 시골을 찾는 이들 마음자리가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밀양을 살다》를 읽으면, 밀양에서 나고 자랐거나 밀양으로 시집·장가를 들거나 밀양이 좋아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논 한 마지기를 어떻게 일구었고, 밭 한 뙈기를 어떻게 가꾸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집 한 채는 그냥 집 한 채가 아닙니다. 집 한 채는 깊은 사랑이요 너른 꿈입니다. 집 한 채는 강제수용이나 보상금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집 한 채는 수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깃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입니다.



..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 참말로 정답게 잘 지내는 동넵니더, 여가.” … “내가 엄청 큰 공부를 했더라구. 농촌 사람들한테 … 내가 왜 청와대에 들락거리는 사람들만이 신사라고 했을까? 그게 아니었네. 그 사람들하고 이 사람들(시골사람)하고 바뀌어야 하네.” … “옛날에도 내가 정치는 쇼인 건 알았거든예. 근데 이걸 하면서 완전히 쇼인 걸 제대로 알았어예. 그니깐 정부에서도 너거는 뒤지 봐라, 뭐 이런 거 같아예.”..  (85, 99, 300쪽)



  나라에서 올바른 일을 한다면 강제수용을 할 턱이 없습니다. 나라에서 아름다운 일을 한다면 경찰과 군대와 전경 따위를 끌어들일 까닭이 없습니다. 강제수용을 하고 강제집행을 하며 강제공사를 벌인다면, 나라에서 하는 일은 하나도 안 올바를 뿐 아니라,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올바르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밀어붙이기 일쑤입니다. 언제나 말하지요. ‘국익’을 생각한다고.


  핵발전소가 국익일까요? 전쟁과 군대가 국익일까요? 새마을운동과 경제발전이 국익일까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국익일까요? 고속도로와 골프장이 국익일까요? 농약과 비료가 국익일까요? 입시지옥과 학력차별이 국익일까요? 시골에는 늙은이만 남도록 모든 어린이와 젊은이를 도시로 보내도록 하는 사회 얼거리가 국익일까요?



.. “경찰들이 할머니들한테 너무 심하게 하는 거예요, 여경들이. 저그 엄마 즈그 아빠도 그렇게 못하는데 완전 손을 꼬집는 게 멍이 시퍼럴 정도로 팔을 비틀거나 온몸을 다 비트는 거예요. 완전 꼼짝달싹도 못하게. 그거 보고 나서 내가 막 여경한테 얘길 했거든요. ‘너희 할머니들한테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냐. 너희도 그렇게 한번 당해 보면, 안 겪어 봐서 모르지, 이때까지 여기서 농사짓고 산 할머니들인데 저희 집 앞에 탑이 들어오면 좋겠냐. 그렇게 싫다는 송전탑 왜 세우냐, 너희 머리 꼭대기에 세워라.’ 듣는 척도 안 하고 입 꼭 다물고 있는 거예요, 여경들은. ‘한번 봐라, 니가 했는 짓 한번 봐라. 할머니 손 이런 식으로 멍 시퍼렇게 하면 되겠느냐.’ 도로가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다 막고 있는 거예요. 도로에 전부 다 할머니들이 벼농사 해 갖고 나락을 다 널어놨거든요. 경찰들이 밝을라고 하는 거예요. ‘느그 밟지 마라. 이때까지 할머니들이 고생해 가지고 농사지어 놓은 것을 너희가 왜 망칠라 하느냐. 밟지 마라, 다리 안 치우냐!’” ..  (314쪽)



  가을입니다. 가을걷이를 아직 하지도 않았으나 한가위가 지나갑니다. 이제 곧 가을걷이를 합니다. 나는 조그맣게 꿈을 꿉니다. 가을걷이를 앞둔 올가을에 꿈을 꿉니다. 밀양 이웃을 헤아려서, 이 나라 시골사람이 서로 이웃이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이 나라 모든 시골마을에서 올가을에는 ‘가을걷이만 마치’되, 나락을 농협에 팔지 않기를 꿈꿉니다. 이 나라 모든 시골에서 모든 농사꾼이 ‘농협 수매 거부’를 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도 엉터리이니, 이런 엉터리 협정 때문에라도 ‘농협 수매 거부’를 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우리 이웃 밀양 할매와 할배와 아지매와 아재가 활짝 웃을 수 있도록 ‘우악스러운 송전탑 공사 그만둬!’ 하고 함께 외칠 수 있게끔, 모든 시골에서 나락 한 톨조차 ‘농협 수매 거부’를 해서, 청와대와 국회뿐 아니라 서울과 부산과 대구를 비롯한 모든 도시에서 ‘한국 쌀’은 못 먹게 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경제발전과 무역이 그렇게 대단하니,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이건 공무원이건 누구이건, 다 ‘미국 쌀’이나 ‘중국 쌀’이나 ‘베트남 쌀’이나 ‘캐나다 쌀’을 먹으라고 하지요. 경찰과 전경도 모두 ‘한국 쌀’은 입에 대지 말고 수입 쌀만 먹으라고 하지요. 평화로운 시골마을을 군홧발로 짓밟고 온갖 주먹다짐과 거친 말을 일삼는 경찰과 전경한테는 배추 한 쪼가리조차 중국에서 사다가 먹으라고 하지요. 나락뿐 아니라, 배추도 무도 양파도 마늘도 파도 모두 ‘농협 수매 거부’를 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딸기도 수박도 참외도 능금도 배도 포도도 몽땅 ‘농협 수매 거부’를 할 수 있기를 꿈꾸어요.


  몽땅 나라밖에서 사다 먹으라고 해요. 그렇게 이웃을 짓밟고 깔보려고 한다면, 이 나라 시골에서 나는 곡식과 열매와 남새는 아예 손도 못 대게 할 수 있기를 꿈꾸어요. 바보들은 며칠 굶겨야, 아니 석 달쯤 굶겨야 비로소 번쩍 얼을 차리리라 생각합니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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