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
이희인 지음 / 호미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책읽기 삶읽기 188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나들이

―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

 이희인 글·사진

 호미 펴냄, 2013.3.9.



  아이들을 이끌고 마실을 다니다 보면, 아이들이 반기는 곳은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고 달리면서 소리치며 놀 수 있는 데라면 어디이든 반깁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뛸 수 없고 달릴 수 없으며 소리칠 수도 없는데다가 놀 수 없는 데라면 무척 힘들어 합니다.


  노래하면서 놀고 싶은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간다’고 하면서 ‘노래할 수 없는 곳’에 간다면, 놀러 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춤추고 뛰면서 놀고 싶은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가자’고 하면서 ‘춤도 뜀뛰도 할 수 없는 데’에 간다면, 놀러 간다고 할 수 없어요.


  어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느긋하게 쉬기를 바라는 사람은 느긋하게 쉴 만한 곳에 가야 합니다. 눈부시거나 멋진 모습을 구경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눈부시거나 멋진 것이 가득한 곳에 가야 합니다. 고즈넉하면서 푸른 숲을 바라는 사람은 고즈넉하면서 푸른 숲이 펼쳐진 곳에 가야 합니다.





.. 갑자기 눈앞에 발리우드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장을 가득 메웁니다. 푸성귀 냄새, 과일 냄새로 가득한 걸로 봐서는 야채시장인 것 같습니다 … 양쪽 문을 열어 둔 채로 기차가 달립니다. 사람들은 열린 문가에 서 있거나 주저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합니다. 기차는 광야나 광활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비좁은 마을 골목을 끼고 달립니다 … 식료품 외에도 시장 안쪽에는 옷이나 구두, 가방, 액세서리 등을 파는 가게들도 보입니다. 낯선 마을의 시장 구경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구경보다 못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  (19, 34, 121쪽)



  이희인 님이 쓴 여행책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호미,2013)를 읽으면서 인도양과 맞닿은 여러 나라를 가만히 그립니다. 내가 사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인도양을 고요히 헤아립니다.


  우리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칠 킬로미터를 달리면 바닷가에 닿습니다. 고흥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파란 빛입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남해’라고 하는 바다로, 지구별이라는 테두리에서 바라보면 ‘태평양’입니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바닷물입니다.


  짭조름한 기운이 가득 서린 바닷바람은 제법 셉니다.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퍽 모진 바람이 되는데, 바닷가마다 후박나무가 서서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습니다. 무척 오랫동안 이 나라 바닷마을하고 섬마을에서 자란 나무입니다. 네 철 내내 푸른 잎사귀를 다는 후박나무는 여러모로 바닷마을이나 섬마을하고 잘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바닷바람은 한 해 내내 그치지 않으니, 후박나무처럼 한 해 내내 도톰하고 펑퍼짐한 잎을 매단 나무가 있으면 바람을 긋기에 좋습니다.




.. 설득의 힘. 무기와 폭력, 전쟁이 아닌 차분한 설득과 포용의 정신이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을 불교의 품 안으로 끌어들인 이유이자 매력일 것입니다 … 기차에서 만난 스리랑카 꼬마들이 낯선 여행자에게 슬쩍 장난을 걸어 옵니다. 문득 한 소년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손에 든 과자 하나를 제게 건네줍니다 … 여행의 참맛은 이렇게 우연히 맞닥뜨린 소소한 풍경 속에 있는 게 아니랴 싶습니다..  (80, 112, 114쪽)



  시골에서 시골버스를 타면, 이 시골버스에서 젊은 이웃을 만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웬만한 젊은 이웃은 거의 다 자가용을 탑니다. 시골버스를 타는 사람은 초등학교 어린이나 중·고등학교 푸름이하고 늙은 할매와 할배입니다. 먼 이웃나라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이들도 시골버스를 탑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는 시골버스에서 손전화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늙은 할매와 할배는 창밖을 바라봅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에 아이들이 북적거리고, 마을마다 젊은이가 넘실거리며, 마을잔치와 마을놀이와 두레와 품앗이가 있던 때까지는 시골버스도 무척 왁자지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라고 하는 책을 쓴 이희인 님이 스리랑카나 인도에서 탄 기차나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모습을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른 숲을 품에 안으면서 너른 숲과 같은 낯빛과 목소리로 삶을 짓는 사람입니다. 드넓은 바다를 가슴에 안으면서 드넓은 바다와 같은 얼굴빛과 웃음으로 삶을 가꾸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는 어떤 낯빛이나 얼굴빛으로 지낼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와 웃음을 서로 주고받는 하루를 열까요?





.. 차밭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밀족 아낙의 얼굴 그 어디에도 반목과 증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도 더 많은 찻잎을 따고 더 좋은 값에 찻잎을 팔아 하루하루 생활고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걱정과 고단함이 그 얼굴들에 더 많이 읽힙니다 … 한참을 서서 지켜보는데, 좀처럼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낚시를 보러 온 여행자들이 모여듭니다. 강퍅한 어부들 어깨 너머로 뉘엿뉘엿 인도양의 해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  (139∼140, 160쪽)



  스리랑카 차밭에서 일하는 아지매한테서 먹고사는 걱정과 고단한 마음이 물씬 묻어난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느껴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하루하루 고된 일을 하면서 살림을 바짝 조이는 이웃이 많습니다. 한쪽에는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는 여행은 꿈조차 못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여행을 안 다닐 적’에는 하루하루 고단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지내기 일쑤입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느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 고단함도 풀고 걱정도 털면서 홀가분한 마음이 될까요. 언제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괴로움도 근심도 없이 가벼운 몸으로 하루를 열 만할까요.




..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여행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갈 곳을 정하고, 그 지역 정보를 모으고, 그곳에 대한 환상을 스스로 키우며 다니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다시 강을 건너와 비루파크샤 사원을 둘러본 뒤, 버스가 왔던 길을 따라 함피의 이웃 마을인 카마라푸람 쪽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시골길입니다 ..  (203, 274쪽)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을 걸을 수 있으면, 이곳이 마을 고샅이든 뒷길이든 오솔길이든, 모두 기쁜 ‘마실길(여행길)’이 됩니다. 아름답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길을 꾸역꾸역 걷는다면, 이곳이 프랑스이든 미국이든 뉴질랜드이든 덴마크이든 그저 고달프면서 지겹거나 따분한 하루가 됩니다.


  그러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은 누가 가꿀까요? 바로 우리가 스스로 가꿉니다. 하루 만에 가꾸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와 모레 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차근차근 가꿀 때에 우리 보금자리에 아름다운 길이 하나 놓입니다. 올 한 해와 이듬해를 웃음꽃 피어나는 노래로 맞아들이면서 찬찬히 북돋울 때에 우리 마을에 사랑스러운 길이 하나 태어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자랍니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기까지 제법 여러 해가 듭니다. 나무를 처음 심을 적에는 그늘도 꽃도 열매도 구경하기 어렵지만, 다섯 해가 흐르고 열 해가 흐르면서, 나무는 씩씩하게 하늘을 바라봅니다. 스무 해가 흐르고 쉰 해가 흐르면서, 바야흐로 우리들이 아이를 낳고 이 아이들이 새로운 어른으로 자랄 무렵, 다 같이 누릴 아름다운 보금자리와 마을이 새로 깨어납니다.


  내가 웃는 곳에 네가 마실을 옵니다. 네가 노래하는 곳에 내가 나들이를 갑니다. 내가 기쁘게 삶을 짓는 곳에 네가 마실을 옵니다. 네가 즐겁게 삶을 가꾸는 곳에 내가 나들이를 갑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스리랑카나 인도로 마실을 가서 아름다운 인도양을 누릴 수 있다면, 스리랑카나 인도에서는 한국으로 나들이를 와서 사랑스러운 태평양도 들도 숲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서로서로 저마다 제 삶자리를 아름답고 사랑스레 돌볼 수 있기를 빌어요. 4348.5.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5-05-2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끌리네요^^..

숲노래 2015-05-26 23:58   좋아요 0 | URL
예쁜 책입니다
 
밥의 인문학 - 한국인의 역사, 문화, 정서와 함께해온 밥 이야기
정혜경 지음 / 따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187



아침저녁으로 손수 지은 밥을 먹다

― 밥의 인문학

 정혜경 글

 따비 펴냄, 2015.5.10.



  우리 집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습니다. 아침에 한 끼니를 먹고, 저녁에 새로 한 끼니를 먹습니다. 낮에 살살 배가 고프다 싶으면 샛밥을 먹습니다. 때로는 주전부리를 마련합니다.


  나들이를 갈 적에는 도시락을 마련합니다. 면소재지 놀이터에서 놀다가 도시락을 먹든, 읍내 느티나무 밑에서 도시락을 꺼내든, 알맞춤한 통에 밥이랑 반찬을 함께 담습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는 날이라면, ‘바깥밥’을 먹습니다. 바깥에서 먹으니 바깥밥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먹는 밥이라면 ‘집밥’입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는 날이라면, 마실이나 나들이를 다니다가 먹는 밥입니다. 이때에는 바깥밥이면서 ‘마실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하고 집 바깥에서 밥을 먹는 날에는 “우리 오늘 즐겁게 ‘마실밥’ 먹자” 하고 말합니다.



.. 한국인은 밥을 먹기 위해 김치나 간장 같은 발효음식을 반찬으로 먹는 것이지, 반찬을 먹으려고 밥을 먹는 게 아니다 … 아침밥을 먹으면 살이 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반대다. 밥은 천천히 소화되기 때문에 혈당치가 장시간 안정 상태로 유지된다 ..  (18, 288쪽)



  정혜경 님이 쓴 《밥의 인문학》(따비,2015)을 읽습니다. 정혜경 님은 한겨레한테 ‘밥’이 무엇인가를 놓고 도톰한 책 한 권을 내놓습니다. 옛책에 남은 글과 옛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서 한겨레하고 밥이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살피고, 밥삶이 어떤 발자취로 이어졌는가를 살피며, 문학에서 다루는 밥을 살피다가는, 과학으로 밥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끝으로는, 오늘날 한국사람이 널리 먹는 여러 가지 밥을 놓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김치볶음밥이라든지 비빔밥이라든지 쌈밥이라든지 김밥이란 무엇인가 하고 차근차근 밝힙니다.


  그런데 좀 아쉽다고 해야 할 만한 대목을 곳곳에서 봅니다. 이를테면 148쪽에 나오는 “남새는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지만, 채소의 순우리말이고 푸새, 푸성귀도 순우리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음식명의 원형도 북한 요리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대목입니다. 글을 쓴 정혜경 님은 대학교에서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일하신다고 합니다. 《밥의 인문학》이라는 책은 한겨레한테 ‘밥’이 가장 소담스럽거나 대수롭다고 하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러면, ‘밥’과 얽힌 ‘한겨레 말’에 깊고 넓게 눈을 뜨면서 이야기꽃을 함께 펼칠 때에 한결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한겨레는 ‘밥을 먹은 삶’을 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음식(飮食)을 섭취(攝取)한 역사(歷史)’가 아니요 ‘조석(朝夕)을 식사(食事)하는 문화(文化)’도 아닙니다. 글쓴이 정혜경 님은 곳곳에서 ‘밥심(밥힘)’을 말합니다. ‘밥심’처럼 한겨레한테는 ‘밥삶’이요 ‘밥살이’입니다. ‘밥짓기’와 ‘밥차림’입니다.


  요즈음은 시골 할매와 할배도 ‘남새·나물·푸성귀’를 제대로 갈라서 쓰지 않지만,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기 앞서까지 거의 모든 시골사람은 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살펴서 옳게 쓰면서 살았습니다. 마늘처럼 손수 심어서 얻은 풀은 남새요, 쑥처럼 스스로 잘 자라는 풀은 나물이며, 남새와 나물을 아울러 푸성귀입니다. 단군 옛이야기에 나오는 ‘쑥과 마늘’은 ‘나물과 남새’ 가운데 하나씩 손꼽아서 ‘사람이 먹는 밥’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었어요.



.. 쌀밥을 먹는 귀족층이 생겨난 것은 삼국시대 무렵이므로,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공동 식사의 풍습이 일반적이었으리라 본다 … 왕족이나 귀족은 쌀을 주식으로 즐길 수 있었지만 쌀 생산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은 쌀을 충분히 먹기 어려웠다 … 하층계급에서 조나 보리를 먹는 사람은 그래도 풍족한 편이고, 더 어려운 경우에는 나무껍질을 먹었다고 한다 ..  (33, 39쪽)



  밥상맡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수저를 듭니다. 밥을 먹으면서 ‘밥노래’를 부릅니다. 밥 한 술이 즐거우니 노래가 흘러나오고, 밥 두 술이 기쁘니 노래가 저절로 샘솟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도 노래하지만, 밥을 짓는 사람도 노래합니다. 가만히 따지면, 밥을 짓는 사람부터 노래를 해야 밥을 먹는 사람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밥을 지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읊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야, 밥상맡이 아늑하면서 넉넉합니다.


  밥을 짓는 사람이 노래하려면, 밥을 짓도록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사람이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흙을 짓고 건사하면서 보살피는 사람이 기쁘게 노래할 수 있는 삶일 때에, 남새도 나물도 싱그러우면서 알찹니다. 흙을 사랑하는 삶이기에 밥을 사랑할 수 있고, 밥을 사랑하는 삶이기에 서로 아끼면서 돌보는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고려에 강남미가 들어온 것은 당시 세자 신분이자 원 세조의 외손이었던 충선왕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는 외국으로부터 쌀을 들여온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강남미는 그 당시 굶주리던 고려인들을 구휼하기보다는 일본 원정 비용이나 기근 발생 시의 이동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당시 쌀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품목은 주로 농산물이었다 ..  (46, 62쪽)



  정혜경 님은 ‘밥’을 노래한 수많은 문학과 옛책을 빌어 ‘밥’이란 참으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밥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문득 깨닫습니다. 한국에서 시나 소설을 쓴 분들이 참말 밥 이야기를 자주 썼군요.


  그래서, 나도 내 나름대로 내가 읽은 ‘밥을 노래한 책’을 떠올려 봅니다. 《밥의 인문학》에서는 다루지 않은 책 가운데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나는 만화책 《나츠코의 술》 열두 권을 떠올립니다. 《나츠코의 술》이라는 만화책은 ‘일본 전통술’을 양조장에서 손수 담그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얼핏 보자면 술을 이야기하는 만화책이지만, 열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보면 4/5에 이르는 이야기는 ‘술’이 아니라 ‘시골 흙일’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츠코의 술》이라는 만화책은 ‘술을 맛있게 빚는 사람’이 가장 크게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사랑해야 할 대목은 바로 ‘쌀을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길’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만화책 《나츠코의 술》에 나오는 ‘나츠코’는 손수 쟁기를 쥐어 논을 갑니다. 기계를 빌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서 새벽부터 밤까지 쟁기질을 해서 논을 갈아요. 왜 그러한가 하면, 손품이 깃든 논에 손으로 모를 찧고 손으로 피를 뽑으며 손으로 나락을 벤 뒤, 손으로 하나하나 널어서 말린 뒤, 다시 손으로 벼알을 훑어야, 이러한 쌀을 술로 빚을 때에 더없이 깊고 너른 맛이 나온다는 대목을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츠코라는 사람은 농약도 비료도 안 쓰고 손수 똥거름을 논에 뿌립니다. 나중에 맛난 술을 빚을 쌀이니, 이 쌀에 농약과 비료를 함부로 쓸 수 없다고 여깁니다. 농약으로 지은 쌀로 술을 빚으면 그 술에서 농약 냄새가 흐른다고 느끼거든요.


  가장 맛난 밥은 어떤 밥일까요? 바로 내가 손수 흙을 일구어서 얻은 나락으로 지은 밥입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거둔 쌀을 내 고장에서 흐르는 싱그러운 냇물을 길어서 내가 숲에서 베어 온 나무를 찍어서 불을 지핀 뒤 짓는 밥이 가장 맛납니다.



.. 밥짓기는 가족들이 번갈아 가면서 할 수 있을 때 행복한 노동이 될 수 있다. 요리는 매우 창조적인 행위다 …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말에서) ‘두루거리상’은 여러 사람이 격을 차리지 않고 둘러앉아서 한데 먹게 차린 음식상으로 두리기상이라고도 한다. ‘사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이는 농사꾼들이 힘든 일을 할 적에 끼니 밖에 참참이 먹는 음식을 말한다 … 충무김밥은 김과 밥 사이에 아무런 재료가 없어도 김밥이라는 요리가 가능함을, 그냥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맛있게 가능함을 보여준 창조의 원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  (199, 244, 340쪽)



  정혜경 님은 “우리 옛글에는 어떤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자성어들이 있고 우리 조상들은 이를 활용하여 우리 언어를 윤택하게 하고 어려운 삶을 유머르 받아들인 것 같다(178쪽).” 같은 이야기를 적기도 하지만, 우리 옛사람은 ‘글(한문)’을 모르며 살았습니다. 옛날 옛적에 글을 남긴 사람은 양반과 지식인뿐입니다. 양반과 지식인은 손수 흙을 일구지 않았습니다.


  ‘밥’이나 ‘쌀’이나 ‘나락(볍씨)’ 같은 낱말은 ‘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라 ‘흙을 일구던 시골사람’이 입으로 지어서 입으로 물려준 말입니다. ‘사자성어’는 ‘한문’이라고 하는 글을 기름지게 할 뿐입니다. 한겨레가 오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말’을 기름지게 하는 ‘새로운 말’은 손수 짓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말입니다.


  ‘꼬두밥’이나 ‘진밥’이나 ‘누룽지’를 한자말로 일컫는 사람은 없습니다. ‘찰밥’이나 ‘수수밥’이나 ‘감자밥’을 한자말로 가리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빔밥’이나 ‘남새밥’이나 ‘나물밥’을 한자말로 가리키지 못합니다. ‘김밥’이나 ‘쌈밥’이나 ‘덮밥’이나 ‘볶음밥’은 오롯이 이러한 한국말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겨레 말을 기름지게 하는 말이 비롯한 곳은 바로 흙이요, 숲이며, 들입니다. 흙말이요 숲말이며 들밥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먹는 밥은 흙밥이고 숲밥이며 들밥입니다.


  정혜경 님은 “물을 좋아하는 이팝나무 습성으로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쳤던 모양이다(183쪽).”와 같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옛사람은 달력이나 시계에 기대지 않고 살았습니다. 옛사람은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흐름을 낱낱이 살펴서 흙일과 숲일과 들일을 했습니다. 제비가 돌아오는 철을 살피고, 바람결과 바람맛을 읽으며, 해가 흐르고 달과 별이 돋는 기운을 헤아렸습니다. 이 모두를 살펴서 씨앗을 심고 흙을 가꾸었어요.



.. 한국의 전통문화의 특징은 자연과 가까이 있고, 자연을 받아들여 바탕에 깔아놓은 데 있다 … 우리에게 보약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을 담은 밥을 먹으면 보약이 된다 ..  (120쪽)



  우리는 누구나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늘 밥을 먹지만, 막상 밥을 제대로 못 살피기 일쑤입니다. 너무 바쁜 하루요, 쳇바퀴처럼 고되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이웃은 흙을 못 밟으면서 살기 일쑤입니다. 도시에서 회사일이나 공장일을 하는 숱한 이웃은 바람 한 줄기를 제대로 못 쐬기 마련이고, 햇볕 한 줌조차 제대로 못 쬐기 마련입니다. 이러다 보니, 밥 한 그릇을 받으면서도 밥이 나온 바탕을 미처 못 살피곤 합니다.


  해가 있고, 바람이 있으며, 흙이랑 풀이랑 나무에다가, 빗물이 있기에, 비로소 밥이 있습니다. 다만, 해와 바람과 흙과 비만 있대서 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모두를 고루 아끼는 사람이 사랑스레 흘리는 땀방울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밥이 나옵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풀밥이든 감자밥이든 고기밥이든 다 맛있습니다. 어느 밥이든 다 좋습니다.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숨결로 지어서 나누는 밥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몸과 마음을 살찌웁니다. 쌀을 먹든 밀을 먹든 기쁜 마음일 때에 삶이 살아납니다. 쌀밥을 먹든 빵을 먹든 기쁨이 없이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만 가슴에 담으면 영양소도 살아나지 못하고 맛도 없을 뿐더러 보람조차 없겠지요.


  자연을 담은 밥, 그러니까 햇볕과 바람과 비와 흙이 어우러진 숨결에 내 따사로운 손길을 섞는 밥을 먹으면서 새롭게 기운을 차립니다. 그러니, 밥을 슬기롭고 사랑스레 잘 먹는 사람은 늘 튼튼한 몸이 되면서 웃는 마음이 됩니다. 4348.5.2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실 이야기 - 귄터 그라스 자전 소설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186



어떤 삶을 글로 남기고 싶은가

― 암실 이야기

 귄터 그라스

 장희창 옮김

 민음사 펴냄, 2015.5.1.



  귄터 그라스 님은 2015년 4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2006년에 이녁 자서전인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내놓을 적에 ‘히틀러 나치 친위대’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대목을 처음으로 밝혔다고 합니다. 《암실 이야기》는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선보인 뒤에 내놓은 ‘자전 소설’로, 귄터 그라스 님이 아이들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라라, 너는 말이야, 정말이지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싶어 했지. 그리고 자기가 제발 막내딸이었으면 하고 바랐어 … 아버지가 《양철북》으로 단단히 한몫 잡은 덕분에 우리와 많은 손님들을 위해 심지어 양의 허벅지 살을 사 줄 수도 있었지 … 어쨌든 우리는 몰랐어. 왜 그렇게 다들 갑자기 우왕좌왕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 어머니가 트렁크를 재빨리 꾸려, 라라, 너와 함께 그래 어머니의 고향인 스위스로 달아나려 했는지 ..  (11, 39, 51쪽)



  그나저나 ‘나치 친위대’란 무엇일까요? 인터넷 백과사전을 살펴보니, ‘나치 친위대’는 ‘일반SS’와 ‘무장SS’가 있다고 합니다. “일반SS는 경찰과 인종 업무를 맡았”고, 무장SS는 “전투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나치스 단체 가운데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 높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SS 대원들은 다른 인종을 증오하고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교육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 독일이 패배한 후 1946년 뉘른베르크 연합국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했다”고 합니다. (인터넷 두산백과에서 살펴봄)


  귄터 그라스 님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폴란드에서 태어난 귄터 그라스 님은 바로 ‘폴란드 지도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은 ‘나치 친위대’로 지내면서 1940년대를 가로지른 셈입니다.


  2006년에 귄터 그라스 님이 이녁 발자국을 밝힐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이 대목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귄터 그라스 님이 숨을 거둔 뒤에 이 대목이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아무도 귄터 그라스 님더러 이녁 발자국을 밝히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굳이 예순 해 남짓 지난 예전 일을 왜 털어놓으려고 했을까요? 죽음을 앞두고 도무지 이녁 발자국을 꽁꽁 감춘 채 떠날 수 없다고 느꼈을까요?



.. 나중에는 프리데나우의 주말 시장에서 생선도 찍었지. 그리고 반으로 가른 양배추의 알속도. 하지만 이미 카를스바트 시절부터 마리헨은 아빠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뭐든지 찍었어 … 마리헨은 제대로 정리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아이들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찍었던 거야 … 열일곱 살 먹은 너희들이 병사처럼, 장화를 신고 머리에 철모를 쓰고 어쩌면 기관총까지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겠지. 전쟁 기간에 그 자신이 그런 모습을 해야 했던 적이 있으니까 ..  (20, 58, 72∼73쪽)



  《암실 이야기》라는 책에는 귄터 그라스 님이 낳은 여덟 아이 이야기가 찬찬히 흐릅니다. 여덟 아이와 함께 여러 ‘아이 어머니’ 이야기가 흐르고, 귄터 그라스 님 둘레에서 ‘온갖 사진을 찍어 주면서 함께 지낸 여성’ 이야기가 어우러집니다. 그리고, 책이름처럼 ‘암실’과 얽힌,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릅니다.



.. 난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들어. 아마도 우리 엄마는 성격상 싸움을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고. 반면에 아빠는 어떤 싸움도 견디지 못했어 … 꼬마 나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감쪽같이 몰랐어. 우리 아빠가 더 이상 비밀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 레나에게 이렇게 말할 때까지는 말이야. “그런데 너한테 여동생이 있단다. 정말 귀엽지.” 아니면 비슷한 말이었겠지. 아빠가 속을 털어놓을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던 거야 … 쌍둥이 형이 질문을 던진다. 형제자매 중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  (120, 171, 223쪽)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은 무엇을 적바림할까요? 사진을 찍으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을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 한 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눈길과 마음일까요?


  그러면, 글이란 또 무엇일까요? 글은 무엇을 적바림할까요? 글을 쓰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글을 쓰는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글을 읽는 사람은 글 한 줄이나 책 한 권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글을 쓰는 사람과 글에 깃드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눈길과 마음일까요?


  귄터 그라스 님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길을 걷습니다. 무엇이 귄터 그라스 님을 사로잡아서 ‘글 쓰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암실 이야기》에도 언뜻선뜻 드러나는데, 귄터 그라스 님은 ‘글을 쓰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아이를 여덟을 낳기는 했지만 정작 아이하고 스스럼없이 뛰놀거나 호젓하게 하루를 누리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소설책 《암실 이야기》는 실마리를 알려주거나 실타래를 풀지 않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만 보여줍니다. 바람처럼 찾아와서 사진을 찍은 ‘마리헨’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에도 바람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고 하면서, 모든 삶과 꿈과 사랑이 바람과 같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 마리헨은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거든. “제방에서, 바람을 좀 찍어 보고 싶어. 바깥엔 폭풍우가 멋지게 불고 있잖아. 같이 갈래, 파울헨?” … 이제 아이들은 서로를 본래 이름으로 부른다. 아버지는 어느새 오그라들면서 슬쩍 사라지려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의심이 쏟아진다. 그가, 오직 그만이 마리헨의 유산을 물려받았어. 그리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박스도 자기가 숨겨 놓았어 ..  (239, 244쪽)



  바람이 불어 싱그럽고 시원한 여름입니다. 바람이 흘러서 누구나 숨을 쉬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햇볕과 함께 빗물과 바람이 있으니 풀과 나무가 푸르게 자랍니다. 바람이 부는 하늘은 파랗고, 하늘을 닮아 바다가 파랗게 빛납니다.


  귄터 그라스 님은 이녁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으로 살면서 아이를 낳았고 글을 썼습니다. 귄터 그라스 님이 낳은 아이들은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으면서 새롭게 삶을 지어 새삼스레 아이를 낳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껍질이 속에 있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다 보면 그만 속이 모두 사라집니다. 오늘날 디지털사진기는 사진을 찍은 뒤에 암실에 갈 일이 없으나, 지난날 필름사진기는 사진을 찍었으면 반드시 암실에 가야 했습니다. 단추를 눌러 찰칵 소리가 나면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새까만 어둠을 오래도록 받아들이면 종이 한 장에 그림이 살며시 드러납니다.


  숱한 일을 치르기만 해서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숱한 일을 치르고 나서 조용히 삭이는 나날을 보내기에 비로소 글을 씁니다. 그러니까, 귄터 그라스 님으로서는 이녁 어린 날을 밝히는 글을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쓸 수 있던 셈이고, 여덟 아이를 낳고 여러 ‘아이 어머니’를 둔 살림살이는 2008년에 이르러 바야흐로 털어낼 수 있던 셈입니다.


  귄터 그라스 님네 아이들은 서로 “형제자매 중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누가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까요? 아마 바로 ‘아버지’인 귄터 그라스 님이겠지요.


  슬픔도 생채기도 아픔도 모두 글로 씁니다. 꿈도 사랑도 삶도 모두 글로 씁니다. 귄터 그라스 님,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느긋하게 삶을 짓고 사랑을 꽃피우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이든 너무 오랫동안 혼자 가슴에만 묻어두지 마셔요. 다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미워할 수 없고, 어버이도 아이들을 미워할 수 없어요.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문학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도 굿 빛깔있는책들 - 민속 8
황루시 지음 / 대원사 / 198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9



함께 웃고 노는 마을잔치가 되려면

― 팔도 굿

 황루시 글

 김수남 사진

 대원사 펴냄, 1989.5.15.



  어릴 적부터 ‘굿잔치’라는 말을 곧잘 들었으나, 막상 굿도 굿잔치도 잔치굿도 본 일은 없다고 떠오릅니다. 우리 겨레가 무척 먼 옛날부터 굿을 했다고 하지만, 정작 굿을 구경하거나 볼 수 있는 자리도 때도 없었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제국주의 군홧발을 앞세워서 한겨레 삶(문화)을 와장창 깨부수거나 짓밟았다고 합니다. 한겨레가 한겨레답게 살지 못하도록 짓누르면서, 일본사람 삶(문화)을 받아들이도록 억지로 내몰았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사람은 한국말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한글이 아닌 한자와 가나(일본 글)를 써야 했습니다. 한겨레 옷을 버려야 했고, 한겨레 집도 버려야 했으며, 한겨레 밥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서 한겨레는 한겨레다운 옷과 집과 밥을 되찾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짓밟으며 깨부순 삶자리에 미국사람 삶을 끌어들였습니다.





.. 생각해 보면 이상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산기도, 물기도, 바위 기도같이 심상치 않은 자연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소원을 빌고 정성을 들여 온 것이 우리네 토속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무속이 미신으로 규정되고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일제 시대의 일이다. 일본은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민족 정신까지 없애려는 조선혼 말살 정책을 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식민 통치 초기부터 조신 문화 특히 민속 문화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치밀하게 했다 ..  (75, 83쪽)



  황루시 님이 글을 쓰고, 김수남 님이 사진을 찍은 《팔도 굿》(대원사,1989)을 읽습니다. 이제 한국 어디에서나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굿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만납니다. 두 눈으로 지켜보기 어려운 굿이요, 굿잔치 소리나 노래도 듣기 어렵지만, 아쉬우나마 책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굿잔치에서 어떤 바람이 흐르는지 알려면 굿잔치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글과 사진만으로는 더없이 아쉬운 노릇이지만, 이렇게 굿잔치를 놓고 글을 쓴 분이 있고 사진을 찍은 분이 있기에, 비록 ‘박제’처럼 남았다고 하더라도, 한겨레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 탈춤을 추는 동향 사람이 찾아와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김금화는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굿하는 무당이라고 해서 억울하게 이혼 당하고 지금껏 수모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이것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 김금화는 많은 아픔을 딛고 무당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여 이 시대의 큰무당이 된 것이다 … 인간이 신에게 보여준 정성은 결국 신을 감동시키게 된다 …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면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굿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고 놀게 된다 ..  (90. 91, 109쪽)



  황루시 님과 김수남 님은 ‘팔도 굿’을 이야기합니다. ‘팔도’란 ‘조선 팔도’를 가리킵니다. 남녘이나 북녘을 똑 뗀 굿이 아니라, 남북녘을 하나로 바라보는 굿입니다. 정치에 따라 갈린 남북녘이 아닌, 삶으로는 언제나 하나였고 한 줄기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굿입니다.


  북녘에서는 굿잔치를 벌일까요? 북녘에서는 굿잔치를 벌일 수 있을까요? 아마 북녘에서도 남녘과 똑같이 굿도 굿잔치도 못 벌이거나 자취를 감추었으리라 느낍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제 삶길을 잊으면서 굿이랑 굿잔치를 잊는다면, 북녘은 북녘대로 제 삶자리를 잃으면서 굿이랑 굿잔치를 잃겠지요.


  곰곰이 돌아보면, 굿도 굿잔치도 ‘마을’에서 이루어집니다. 굿이나 굿잔치는 임금님이 벌이거나 꾀하지 않습니다. 양반이라든지 벼슬아치가 즐기는 굿이나 굿잔치가 아닙니다. 먼 옛날부터 굿이랑 굿잔치는 시골마을에서 흙을 일구거나 바다를 가로지르던 수수한 시골사람이 즐겼습니다. 들에서는 들굿을 하고, 바다에서는 바다굿을 합니다. 들굿을 하는 들사람은 들노래를 부릅니다. 바다굿을 하는 바다사람은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그러고 보니, 궁중에서는 ‘궁중 음악’을 하지요. 궁중 음악은 오늘날에도 ‘중요 무형문화재’ 대접을 받습니다. 굿노래를 부를 줄 아는 분 가운데에도 ‘인간문화재’ 대접을 받은 분이 있지만, 아주 뒤늦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라에서 바라보는 ‘문화’라는 테두리에서도, 여느 시골마을 수수한 사람들 삶노래는 ‘문화’가 아니었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무당은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서민으로서 세속의 풍파를 몸소 겪어내는 사제자이다. 이들은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상적인 삶의 희노애락을 절절히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평소에 사람들은 무당을 경원한다. 그러나 삶에 문제가 생겨서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제자라고도 할 수 있다 … 굿의 구조는 인간이 결코 신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 신은 인간의 요청이 있어야만 사람을 만나러 올 수 있다 ..  (100, 109, 110, 112쪽)



  더 헤아려 보면, 나라에서 꾀하는 커다란 잔치마당이라고 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자리에서 ‘궁중 음악’을 선보이는 일은 있어도 ‘굿잔치 한마당’을 선보이는 일은 아직 없습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도 다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수수한 ‘놀이마당’을 ‘우리 문화’로 여기는 흐름은 아직 없습니다. 사물놀이를 국립극장 같은 곳에 올리기는 하지만, 정작 시골에서 들놀이를 하지 못합니다. ‘농악’은 ‘시골노래’를 한자로 옮긴 낱말입니다. ‘시골(農) + 노래(樂)’가 ‘농악’입니다. 그러나 시골에는 허리 구부정한 할매와 할배만 남아서 힘들게 농약과 비료를 뿌리면서 겨우 농사를 짓습니다. 북을 치거나 꽹과리를 두들기거나 징을 울릴 만한 젊은 일꾼이 시골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풍물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풍물패가 왜 북이나 꽹과리나 징을 거느리면서 춤과 노래를 부르는가 하는 대목을 알거나 느끼지 못해요. 모를 찧고 논을 갈며 나락을 베고 피를 뽑는 들일을 하는 사이에 서로 기운을 새롭게 내어 막걸리 한 사발과 김치 한 조각을 나누어 춤과 노래로 고단함을 푸는 놀이마당과 잔치마당과 춤마당과 이야기마당을 펼치지 못합니다.


  악기는 있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있지만, 악기에 깃든 넋은 자라나지 못합니다. 들과 바다에서 일을 하면서 웃음꽃을 피우던 얼은 이어지지 못합니다. 밥 한 그릇을 함께 나누는 두레와 품앗이를 밝히던 숨결은 더 뻗지 못합니다.




.. 이 많은 무속의 신 가운데 추상적인 신은 하나도 없다. 곧 행복의 신이라든가 아름다움의 여신이라든가 음악의 신과 같은 것은 없다. 오직 구체적인 삶을 보호해 주는 신만이 있을 따름이다 … 굿에는 수많은 신이 등장하는데 그들 사이에 계급의 등차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무속 종교의 특징이다 … 신의 세계에서 위아래가 없는데 아무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위아래가 있겠느냐 하는 사고를 낳는 것이다 ..  (114, 115, 116쪽)



  《팔도 굿》을 쓴 황루시 님은 한겨레가 ‘님(신,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풀이합니다. 한겨레가 굿이나 굿잔치를 벌이면서 섬긴 ‘님’은 위도 아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님은 하나요 한울타리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한테도 위와 아래가 없을 테며, 님과 사람 사이에도 위와 아래가 없을 테지요. 모두 같은 님이면서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먼먼 옛날부터 한겨레 삶을 이었을 테지요.


  나와 네가 하나이면서 한넋입니다. 이웃하고 동무도 하나이면서 한얼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말마디를 쓰는 까닭도, 너와 나 사이를 가르면서 누가 높거니 낮거니 하고 따지지 않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집단주의나 공동체를 밝히려고 쓰는 ‘우리’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보듬으면서 사랑할 사이인 사람이라는 대목을 밝히려고 쓰는 ‘우리’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 도시의 이웃들은 공간적으로 가까이 산다 해도 각기 직업이 다르고 삶의 체험이나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 공유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연이 개재되지 않는 한 그들의 생활은 서로 얽히지 않는다 ..  (126쪽)



  굿과 굿잔치가 생겨서 널리 나누었던 까닭은 들이나 바다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던 사람이 ‘모두 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서는 굿도 굿잔치도 없으며, 굿이나 굿잔치가 다시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 아주 많은 사람이 몰려서 살지만, 모두 다른 일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다른 때에 움직입니다. 한자리에 모일 겨를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누구나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낮에 햇볕이 뜨거울 적에는 누구나 한숨을 돌리면서 가볍게 눈을 붙이거나 쉽니다. 오늘날에는 가게에서 사다가 쓴다지만, 지난날에는 모든 사람이 손수 밥과 옷과 집을 지어서 건사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을에서 삶을 손수 지은 사람이 서로 어울리면서 굿과 굿잔치를 벌였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뜻으로 마을잔치를 이루고, 웃음과 노래와 춤을 같이 누리려는 뜻으로 마을놀이를 이룹니다.


  함께 웃고 노는 마을잔치가 되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일을 찾아서 하되 ‘모든 사람이 기쁘게 삶을 지을 수 있다’면 마을잔치를 아름답게 이룰 만하리라 느낍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살림이 넉넉해야 이루는 마을잔치가 아니라, 손수 삶을 짓고 사랑을 가꿀 때에 스스럼없이 마을잔치가 태어나리라 느낍니다.


  《팔도 굿》에 나오는 이야기가 책에만 아로새겨진 발자국이 아닌, 남북녘 어디에서나 신나게 울려퍼지는 노랫가락이 될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봅니다. 4348.5.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 서울을 생각한다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책읽기 삶읽기 185



‘걸을 만한 마을’이 아름다운 삶터

―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서울을 생각한다

 정수복 글

 문학동네 펴냄, 2015.4.28.



  사회학자 정수복 님이 쓴 산문책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서울을 생각한다》(문학동네,2015)를 읽습니다. 정수복 님은 사회학자로서 도시와 서울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정수복 님이 퍽 오래 지내기도 했다는 파리하고 서울을 나란히 놓고서, 서울이라는 터전은 사람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삶자리인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정수복 님은 사회학자이니, 사회학자다운 눈길로 도시와 서울을 바라보리라 느낍니다. 물리학자가 서울을 거닐었으면 이녁은 물리학자다운 눈길로 서울을 바라보았을 테고, 시인이 서울을 거닐었으면 이녁은 시인다운 눈길로 서울을 바라보았을 테지요. 어린이가 서울을 거닌다면 이녁은 어린이다운 눈길로 서울을 바라볼 테고, 아이 어머니가 서울을 거닌다면 이녁은 아이 어머니다운 눈길로 서울을 바라보겠지요.


 어느 눈길로 서울을 보아야 더 서울을 잘 보았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르게 서울을 봅니다. 저마다 다른 빠르기와 몸짓으로 서울을 걷고,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슴에 품으면서 골목과 큰길을 천천히 걷습니다.



.. 논문이라는 형식은 글쓴이의 사사로운 주장이 아니라 학문적 연구의 결과이므로, 읽는 이는 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반론을 펼 수 없는 이상 이 글의 결론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담고 있다. 논문이라는 학문적 글쓰기 형식은 논문의 알맹이를 보호하는 갑옷의 역할을 한다. 이런 글쓰기는 사회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 겁을 주면서 글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차단한다 … 이방의 언어는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영원히 외국어로 남아 있다. 똑같은 어휘를 사용해도 언어에 담긴 미세한 뉘앙스와 정서적 함축을 토박이들처럼 느끼지 못하고 ..  (21, 33쪽)



  나는 내가 걷는 길을 돌아봅니다. 나는 한국말사전을 엮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는 길을 거닐면서 이곳저곳에서 눈에 뜨이는 ‘말’을 으레 읽습니다. 뜬금없이 쓴 말을 읽고, 엉뚱하게 쓰거나 엉터리로 쓴 말을 읽습니다. 나는 두 아이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나는 길을 거닐면서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뛰놀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길을 바라보고, 아이들이 자동차한테 치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길을 헤아립니다. 나는 시골에서 사는 아저씨입니다. 그러니, 나는 시골사람다운 눈길로 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저씨다운 눈길로 길을 마주합니다.


  여러 달에 한 차례쯤 아이들을 이끌고 도시나 서울로 마실을 다닐 때에, 나는 ‘한국말사전 편집자’인 눈길과 ‘두 아이 아버지’인 눈길과 ‘시골 아저씨’인 눈길이 됩니다. 때로는 ‘사진 찍는 사람’으로 둘레를 살피고, 어느 때에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 둘레를 헤아립니다. 어느 때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으로 마을을 둘러보며, 어느 곳에서는 ‘자가용 없이 사는 사람’으로 나라를 돌아봅니다.


  이 같은 여러 눈길로 서울을 바라보면 어떤 모습이 보일까요? 먼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큰길을 걷자면 눈이 아픕니다. 아이들은 다리쉼을 할 곳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거나 달리거나 소리치거나 노래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둘레를 살펴야 하고, 아버지 손을 꽉 잡은 채 어른 걸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서울에서는 나무 그늘을 찾기가 어려우니 땡볕이나 찬바람에 그대로 드러난 채 걸어야 합니다.



.. 파리에서는 길을 걷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있거나 지하철을 탔을 때 문득문득 다가오는 시적 영감과 정신의 고양이 있었다. 그에 비해 서울 생활은 편안하고 편리하지만 특별한 감흥이나 정취가 없다 … 길거리뿐만 아니라 아파트 실내에도 스피커를 통해 관리사무소에서 알리는 소리가 많다 … 서울에 와서 자주 마주치는 말 가운데 ‘관리’라는 단어가 있다. 성적 관리, 피부 관리, 시간 관리, 재산 관리 … 어느 날 저녁 산길을 걷는데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커다란 흰색 현수막이 걸렸다. 고요한 산길의 분위기를 깨는 그 플래카드는 어느 결혼중매회사의 광고였다 ..  (45, 58, 63, 92쪽)



  서울사람이 시골로 나들이를 온다면, 서울사람은 시골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봄마다 시골에서는 벚꽃잔치나 유채꽃잔치를 으레 벌이는데, 이런 봄꽃잔치에 시골로 한 번쯤 나들이를 오는 서울사람은 어떤 숨결이나 바람을 시골에서 맞이할 만할까요?


  봄꽃은 벚꽃이나 유채꽃만 있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아보자면, 한국에서 봄철에 즐기던 꽃은 벚꽃이나 유채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새봄에 할미꽃과 진달래꽃부터 즐겼습니다. 매화꽃과 동백꽃을 즐겼고, 딸기꽃과 냉이꽃과 꽃다지꽃과 꽃마리꽃과 제비꽃 같은 조그마하면서 어여쁜 꽃을 즐겼습니다.


  시골에서 늘 지내는 사람이라면 철마다 새롭게 피는 꽃뿐 아니라 다달이 새롭게 피는 꽃을 바라봅니다. 모든 꽃은 한철이라, 제철을 놓치면 이듬해까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딸기꽃을 보려면 삼월 끝자락부터 사월 끝자락 사이요, 앵두꽃도 이무렵이며, 오월로 넘어설 무렵에는 꽃마리꽃이 앙증맞게 벌어지는데, 꽃마리꽃이 필 무렵에는 제비꽃이 모두 지고 사라집니다. 꽃마리꽃과 함께 붓꽃과 창포꽃이 올라오고, 이 꽃하고 나란히 찔레꽃이 흐드러집니다. 찔레꽃이 피기 앞서 등꽃(등나무꽃)이 피고, 등꽃이 져서 사라질 즈음 뽕꽃(뽕나무꽃)이 풀빛으로 피는데, 이에 앞서 느티꽃(느티나무꽃)이 어마어마하게 드날리면서 춤을 춥니다.



.. 모든 자동차들이 길가에 정지해 있고 보행객들은 다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방송은 북한의 가상 폭격기가 서울 하늘 상공을 날아가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 파리에는 세월이 거꾸로 흐르는지 사라졌던 전차가 다시 설치되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간다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파리 시 교통정책의 일환이다 … 이방인은 붙박이와 달리 체면과 의례를 가볍게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98, 116, 135쪽)



  정수복 님은 사회학자로서 서울 골목과 큰길과 삶터를 바라봅니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라는 책 끝자락에서는 제주섬을 살리는 길을 놓고 쓴 짧은 논문을 싣기도 합니다. 제주에서 행정과 문화로 ‘돌담’과 ‘나무’를 부디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로 들려줍니다.


  그러고 보면, 돌담과 나무는 제주뿐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도 지킬 삶자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돌담은 시멘트담이 아닙니다. 돌담은 드센 바람을 가리는 담이요, 무너지면 다시 쌓을 수 있는 담입니다. 나무는 그늘을 드리우는 고마운 삶벗인데, 꽃내음도 베풀고, 잎바람 노랫소리도 베풀며, 가을에는 멋진 열매까지 베풀어요.


  나무가 자라는 곳이라야 바람이 싱그럽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곳이어야 흙이 싱그럽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눈을 쉽니다. 사람은 나무가 있어야 집을 짓고 여러 가지 살림살이를 얻습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나무가 우거져야 하고, 따로 공원이 아니어도 집집마다 마당을 두어 ‘우리 집 나무’를 누릴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나무가 잘 자란 골목을 거닐 적하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아스팔트 길바닥인 골목을 거닐 적에는 느낌이 사뭇 달라요. 나무가 잘 자란 큰길을 걸을 적하고, 나무 한 그루 없이 자동차만 빽빽한 큰길을 걸을 적도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 사회학자라면 일단 통계 수치나 책상 위의 지도를 뒤로 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두 발로 걸으면서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 돌담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자연적 요소는 제주 특유의 나무들이다. 현대 군데군데 남아 있는 오래된 녹나무, 팽나무 등을 지정하여 보존해야 한다. 오래된 돌담과 나무들은 이곳에 축적된 세월의 켜를 그 안에 지니고 있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부여한다 …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도시 재생의 방향은 걸을 수 있고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길이다 ..  (172, 195, 203쪽)



  사회학자뿐 아니라 국회의원과 대통령도 골목과 큰길을 찬찬히 걸을 수 있기를 빕니다. 책상맡에서 서류만 들여다볼 적하고, 몸소 한두 시간 남짓, 때로는 서너 시간 남짓 골목이나 큰길을 걸을 때에는 느낌과 생각이 크게 달라지겠지요. 과학자와 법관이나 의사도 골목과 큰길을 가만가만 걸을 수 있기를 빕니다. 회사를 이끄는 대표도 공장 일꾼도, 운동선수와 연예인도, 그러니까 누구나 골목과 큰길을 즐겁게 걸을 수 있기를 빌어요.


  스스로 걸으면서 스스로 생각을 짓습니다. 스스로 걸음을 옮기면서 스스로 너른 마음이 됩니다. ‘우리 마을’이 걸을 만한 곳일 때에 ‘우리 마을’은 사랑스러운 터전이 되고 아름다운 삶자리가 됩니다. 우리 마을도 이웃 마을도 누구나 즐겁게 걸어서 오가면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멋진 이야기숲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5.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