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 디자인 평론가 최범이 읽어주는 고전 10선
최범 지음 / 안그라픽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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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0



사람을 사랑하는 ‘그 책’을 바로 오늘 읽자

―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최범 글

 안그라픽스 펴냄, 2015.6.1.



  하싼 화티라는 분이 쓴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열화당,1988)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1994년에 처음 알아본 뒤 매우 크게 놀랐습니다. 집짓기(건축)를 바라보는 눈길이 이러할 수 있구나 싶어서 몹시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던 무렵 나는 외국말(네덜란드말)을 배우는 사람이었는데, 둘레에서 내가 손에 쥔 책을 보더니 ‘네가 왜 그런 책을 읽니?’ 하고 핀잔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질없으니까.’ 하고 짧게 대꾸했습니다.


  브루노 무나리라는 분이 쓴 《예술로서의 디자인》(일지사,1976)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1999년 언저리에 처음 보았습니다. 예술이나 디자인하고 얽힌 일을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눈길이 끌렸습니다. 이 책은 예술하고 삶은 동떨어지 않았음을 밝히고, 디자인은 언제나 삶을 가꾸는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보기 좋도록 꾸미는 일이 예술이나 디자인이 아님을,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손길이 예술이나 디자인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웠습니다.



한국 디자인을 지배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이러한 구호이다. 한국의 현대 디자인은 출발부터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이라는 위로부터의 목표에 강력하게 종속되었다. 그리하여 디자인은 우리 삶의 환경을 쾌적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선한 도구’가 되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동원된 도구’가 되어 버렸다 … 주료 디자인은 무엇인가. 현대 디자인의 주류는 당연히 소비주의 디자인이다. 소비주의 디자인은 현대 소비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서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며 소비적 가치를 추구한다. (11, 157쪽)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공예문화》(신구문화사,1976)를 읽을 적에는 그릇 한 점을 빚어서 쓰는 마음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릇뿐 아니라 수저 한 벌도, 옷 한 벌도, 신 한 켤레도, 싸리비랑 대바구니도 새삼스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고이 쓰던 살림뿐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누구나 흔히 쓰는 살림을 찬찬히 아끼면서 건사하는 손길로 일으키는 아름다운 삶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빅터 파파넥 님이 쓴 《인간을 위한 디자인》(미진사,1986)을 읽을 무렵, 둘레에서 저더러 ‘디자인을 하는 대학교에 갈 생각이느냐?’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때에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내 살림을 아직 정갈히 건사하지 못하지만, 내 살림부터 정갈하면서 알차게 건사하는 길을 배우려고 이 책을 읽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도 《예술로서의 디자인》도 《공예문화》도 《인간을 위한 디자인》도 모두 ‘건축이나 디자인을 다루는 책’이 아닌 ‘삶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책’이라고 느껴서 곁에 두고 읽었습니다.



우리는 로스를 가리켜 ‘망치를 든 건축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는 서구 건축사에서 누구보다도 더 낡은 건축을 부수는 데 열정을 바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 이성과 과학의 근대 서양 문명은 결코 동양 문명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 유리와 전기의 문명은 종이와 등불의 문명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 지금은 비록 너희 서양 문명에게 압도당하고 있지만 우리 전통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근대 아시아의 맹주로서 일본이 발명한 동양의 모습이기도 하다. (23, 81쪽)



  최범 님이 빚은 이야기책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안그라픽스,2015)을 읽습니다. 디자인평론을 하는 최범 님은 디자인하고 얽힌 ‘오래된 책’ 가운데 열 권을 골라서 이녁 마음을 움직이거나 건드린 대목을 되짚습니다. 오래된 책에서 오늘날 삶을 밝히는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오래된 책이 앞으로 오래도록 이 지구별에서 아름다운 숨결을 북돋우도록 사람들 생각을 건드리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야나기가 찬탄한 조선 공예품은 그저 작위적인 느낌이 나지 않는, 솜씨를 드러내거나 다투고자 하지 않은, 마치 저절로 빚어진 것 같은 하찮은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감동을 주는 이러한 작품을 설명할, 서구 미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학이 필요함을 야나기는 절감했다. 그렇게 조선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 노력의 결실이 바로 민예론이다 … 그는 천재의 미술 대신 일상의 공예를, 귀족공예 대신 민중공예를 찬양했다. (94∼95, 96쪽)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을까요? 아마 조금 더 슬기롭게 바꿀 만하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오늘 그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꿀 만할까요? 이제까지 좀 어수룩하거나 어설프게 살림을 꾸렸다고 하더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부터 새로운 마음이 되어서 즐겁고 아름답게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때 꼭 그 책을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가슴속에 아름다운 꿈을 품지는 않아요. 오늘 그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바로 오늘부터 마음속에 사랑스러운 꿈을 담지는 않습니다.


  고전명작을 반드시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고전명작을 젊은 날에 일찌감치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고전명작은 누구한테나 ‘때가 되면’ 찾아옵니다. 아니, 누구나 ‘스스로 때를 알아채어’ 고전명작에 손을 뻗습니다. 삶을 손수 가꾸거나 꾸리거나 일구거나 짓고자 하는 뜻이 설 적에 비로소 고전명작을 읽을 만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삶이 아닌,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살려는 뜻으로 새길을 열려고 할 적에 바야흐로 고전명작이 눈에 뜨이기 마련입니다.



파파넥이 말하는 ‘현실 세계’란 무엇인가. 이미 이야기했듯 그는 오늘날 디자인이 소비주의를 위해 봉사하며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디자인은 비윤리적이며 또 반환경적이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환경 문제와도 커다란 관련이 있다 … 파파넥은 소비사회의 현실을 현실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가짜 현실이다. (158, 159쪽)



  디자인하고 얽힌 ‘오래된 책(고전명작)’은 열 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은 딱 열 권으로 추린 고전명작을 가만히 보여주면서, 다른 수많은 아름다운 책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손길이랑 눈길이랑 마음길을 뻗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 한 권을 읽든 책 만 권을 읽든, ‘고이는’ 지식이 아니라 ‘흐르는’ 슬기가 되어 아름다운 넋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끝에는 야나기 무네요시 님과 픽터 파파넥 님을 둘러싼 ‘사회의식’ 이야기를 붙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열린 마음이 되어 두 사람을 바라볼 때에, 우리가 이 나라에서 새로운 디자인과 생각과 슬기와 삶과 살림을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야나기가 우리를 사랑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민중사랑, 민예사랑, 주체성이 왜 우리 근대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가. 왜 식민지 조선과 이후 한국은 반민족적·반민중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는가. (224쪽)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내 삶을 스스로 엽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때에 우리 삶을 손수 짓습니다. 꼭 민중사랑이나 민예사랑이나 주체성 같은 이름을 안 붙여도 됩니다. ‘삶사랑’이어도 되고 ‘삶’이나 ‘사랑’이어도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흙을 파서 질그릇을 빚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풀줄기에서 실을 얻어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은 뒤 바느질을 해서 옷을 깁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나무를 베고 손질하고 말려서 기둥과 서까래와 들보로 얹고는 집을 짓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먼 옛날부터 모든 사람은 시골사람이었고 흙사람이었으며 숲사람이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누구나 손수 집이랑 옷이랑 밥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따로 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니지 않았어도, 먼 옛날부터 어떤 사람이든 집·옷·밥을 손수 지어서 누렸습니다. 건축학을 알아야 짓는 집이 아니라, 사람들 누구나 손수 짓는 집이었어요. 디자인을 알아야 빚는 질그릇이 아니고, 호미나 괭이나 낫이 아닙니다. 삶과 살림을 알고 사랑하기에 누구나 손수 질그릇을 빚고 호미나 괭이나 낫을 갈았어요.


  그때 그 책은 바로 오늘 읽으면 됩니다. 고전명작이라는 책도 읽고, 삶이라는 책하고 사랑이라는 책도 읽습니다. 바람이라는 책하고 비와 눈과 풀과 나무라는 책도 읽습니다. 4348.6.1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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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민중봉기 - 필리핀, 버마, 티베트, 중국, 타이완, 방글라데시, 네팔, 타이, 인도네시아의 민중권력 1947~2009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민중봉기 2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원영수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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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2



민중봉기는 ‘군사독재 권력’만 무너뜨렸다

― 아시아의 민중봉기

 조지 카치아피카스 글

 원영수 옮김

 오월의봄 펴냄, 2015.5.11.



  《한국의 민중봉기》하고 나란히 나온 《아시아의 민중봉기》를 읽습니다. 미국에서 정치사회학을 연구하며 가르치는 조지 카치아피카스 님은 두 가지 책을 함께 내놓은 올해 5월에 ‘광주 명예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1980년 광주 이야기를 널리 알린 보람으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고 하는데, 2010년에는 ‘오월어머니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민중봉기》는 1894년부터 2008년 사이에 한국에서 어떤 민중봉기가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책이고, 《아시아의 민중봉기》는 아시아에서 어떤 나라가 어떤 독재자를 어떻게 몰아내려고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책입니다.



1980년대까지 동아시아 독재 정권들은 수십 년간 집권해 오며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저항의 물결이 곧 그 지역을 바꾸었다 … 평화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이 운동들은 풀뿌리에서 발생했다 … 사람들이 (미국처럼) 인종적·경제적 평등이 없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소련처럼) 자유가 없는 평등은 평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서 기업·공산주의 괴수에 대한 환멸이 자라났다 … 의회민주주의는 경제 엘리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기업과 소비자 시장을 넓히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와 협력하고, 은행들에 안전하고 믿을 만한 금융 인프라를 제공하는 데 적합한 도구이지, 민주주의의 중심 요소가 아니다. (22, 40, 45, 59쪽)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책에서 나오듯이 ‘평등이 없는 자유’와 ‘자유가 없는 평등’은 우리 삶을 옥죕니다. 평등하지 않을 때에는 자유가 될 수 없고, 자유롭지 않을 때에는 평등이 될 수 없습니다. 평등하고 자유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누릴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자유롭게 살라고 하면 자유가 아닙니다. 손발을 꽁꽁 묶어 놓고 평등하게 지내라고 하면 평등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대학입시만 바라보도록 내몰면서 이 울타리에서 자유롭게 배우라고 한다면 조금도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한테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같은 머리카락 길이를 맞추며 똑같은 교과서를 배우게 한대서 하나도 평등이 아닙니다.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고를 수 있기에 자유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시험지를 풀도록 하니까 평등이 되지 않습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찾아서 살림을 가꿀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누구나 똑같은 시험문제를 풀면 대학교에 갈 수 있다는 평등이 아니라, 졸업장하고 자격증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는 평등을 누려야 합니다.



1987년 1월 22일, 땅 없는 사람들이 평화적 시위를 벌이며 아키노 정부에 토지 관련 공약을 지키라고 경건하게 요구하고 있을 때, 경찰이 멘디올라 다리에서 발포해 최소 21명이 사살되고 100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 부패한 대통령을 몰아내는 두 번의 봉기가 성공했는데도, 필리핀 민중은 사회체제를 제대로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113, 134쪽)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8분, 랑군의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이는 나라 전체를 정지시키고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를 가져올 총파업의 신호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국적 운동은 야만적인 군대와 부딪혔고, 군부는 수천 명의 민중을 죽이고 이후 수십 년간 철권통치를 하게 된다 … 군인들은 응급실에 쳐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날 버마 전역에서 360명이 살해됐다 … 버마 군부는 석유·목재·어로·채굴권 판매를 이용하여 군대의 규모를 확대하고 무기를 개선했다. (148, 150, 165쪽)



  군대에는 자유도 평등도 없습니다. 모든 사내가 들어가도록 한대서 평등이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히거나 똑같은 총을 쥐어 준다고 해서 평등이 되지 않습니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자유시간’을 준다고 해서 참말 ‘자유’롭게 지내지 못합니다.


  군대에 자유와 평등이 없는 까닭은, 군대라는 곳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사람한테 길들여서 시키기 때문입니다. 군대가 하는 일은 언제나 ‘사람 죽이기’이기 때문에, 군대에는 자유도 평등도 싹틀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아시아에서 독재권력을 부리는 여러 나라는 군대를 거느립니다. 독재권력은 군대를 거느릴 뿐 아니라, 군대를 더 크게 키우려 하고, 군 간부를 늘려 떡고물을 잔뜩 안겨 줍니다. 군인이 되면 먹고사는 걱정이 없도록 하는 독재권력입니다. 군인한테 먹고사는 걱정을 없애 주니, 군인은 독재권력이 시키는 짓을 모조리 따르도록 길듭니다.


  그런데, 군인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먹고사는 걱정’을 하던 여느 사람입니다. 독재권력을 무너뜨리려고 똘똘 뭉치는 여느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이 군인이 됩니다. 독재권력을 무너뜨리려는 사람은 참다운 자유와 평등을 바라보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독재권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 주는 군인과 경찰은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을 뿐더러, 자유와 평등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유와 평등을 ‘먹고사는 걱정’을 없애는 일에 팔아치웠기 때문입니다.



1903년 중국 장군 ‘도살자’ 팽과 그의 군대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을 도륙하면서 티베트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왔다 … 반세기 이상 이어진 중국의 점령 정책 동안에 반란·투옥·기아 때문에 죽은 티베트인은, 겨우 500만 명 정도인 전체 인구 가운데 100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 구타당하고 진압당해도 티베트인들은 가만히 있기를 거부했다 … 중국계 상인들은 국영 상점에서 사원의 귀중품을 판매한다. (179, 180, 194, 200쪽)


부는 고루 분배되기보다 새 호텔 건설에 사용됐고, 자본 투자 계획은 물가를 상승시켰다 … 엘리트와 노동자 간의 격차는 확대됐다. 엘리트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시절이 없었다. 당 간부들은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으로 구입한 상품을 재판매해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 엘리트 담론에 길든 학생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투쟁했고, 운동 내에서 같은 담론을 재생산했다. (221, 222. 246쪽)



  군인이 되어 이웃이나 동무를 죽이거나 괴롭히는 짓을 한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독재권력을 거머쥔 우두머리는 그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할 뿐입니다. 독재권력 우두머리는 손수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독재권력 우두머리는 군 간부를 거느리면서 이들한테 말 한 마디만 합니다. 군 간부는 수많은 졸개(일반 사병)를 이끌고는 바로 그들한테 이웃이자 동무인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며 마을을 불태웁니다. 더군다나 독재권력 우두머리는 그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뿐인데, 어마어마한 돈과 재산을 긁어모읍니다. 독재권력 우두머리 둘레에 빌붙는 이들은 모든 심부름을 도맡으면서 돈과 재산을 야금야금 얻어먹습니다.


  아시아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은 독재권력 우두머리 한 사람만 끌어내리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두머리 한 사람을 끌어내려도 새로운 우두머리가 들어서면서 ‘앞선 독재권력자’하고 똑같은 짓을 일삼습니다. 그러니, 우두머리와 허수아비 몇 사람을 끌어내려는 민중봉기가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짓고 새로운 삶을 이루고 싶어서 일으키는 민중봉기입니다.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책을 읽으면, ‘엘리트’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엘리트’란 누구인가 하면 야당 정치인이나 대학생 지도자입니다. 야당 정치인이나 대학생 지도자는 민중봉기를 등에 업으면서 이름값을 날려 ‘독재자한테서 정치권력을 나누어 받아 그 자리를 지키는 일’에 더 마음을 쏟는다고 합니다.



국민당의 학살극이 진정될 때까지 수만 명이 살해됐다. 아무도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 수많은 국민당 형법은 나치 독일에서 나온 것이며, 21세기에도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 학교에서 타이완어를 말하는 어린이들은 매를 맞았고 … 타이완과 한국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제조업인 군수산업의 중요한 소비국이 됐다. (290, 292, 293, 326쪽)


민중이 들고일어날 때,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노래·춤·시·산문·연극으로 신화화됐다 … 정부가 평화적 시위자들을 구타하기 위해 만달레스(정부 폭력배 집단)를 풀자, 새로운 계층의 주민들이 운동에 참여했다 … 4월 6일 경찰이 발포하여 수십 명을 살해하자, 군중이 왕궁을 습격할 것이라는 생각에 당혹한 것은 국왕만이 아니었다. 합법화되어 권력의 한 조각을 얻기를 간절히 원했던 정당들도 더욱 불안해졌다 … 하층 카스트 민중, 소수민족과 여성은 의회에서 제대로 대표되지 않았다. (332, 354, 361, 376쪽)



  《아시아의 민중봉기》를 읽는 내내, 이 나라와 저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총알에 맞아 죽거나 칼에 찔려 죽거나 군홧발에 짓밟혀 죽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독재권력은 ‘군인과 경찰’한테 사내는 그냥 때려죽이고 가시내는 강간하고 죽이도록 ‘작은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필리핀도 버마도 네팔도 중국도 티베트도 타이완도 방글라데시도 인도네시아도 모두 똑같습니다. 죽은 사람 숫자만 다를 뿐입니다. 죽는 모습은 엇비슷하고, 강간이나 학살이나 독재와 부정축재도 엇비슷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모든 독재권력은 미국하고 줄이 맞닿습니다.


  미국은 군수산업으로 나라를 버틴다고 합니다. 아니, 미국은 군수산업을 일으키고 어마어마한 군대를 거느리면서 지구별 수많은 나라를 짓누른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는 타이완과 한국이 미국에서 전쟁무기를 아주 많이 사들이는 ‘큰 손님’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군사독재가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려야 돈을 잘 법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군사독재정권이 군대를 자꾸 늘리면서 사람들을 윽박질러야 미국 군수산업은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끝없이 새로운 무기를 만듭니다. 아시아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이 내다 파는 새로운 무기를 끝없이 사들입니다. 헌 무기는 전쟁을 치르면서 다 써 버리고, 전쟁이 지나가면 새로운 무기를 사고팝니다. 새로운 무기가 이윽고 헌 무기가 될 무렵 다시 전쟁을 치러서 이 무기를 다 써 버리고, 또 새로운 무기를 잔뜩 만듭니다.



방글라데시를 낳은 9개월간의 전쟁 동안 전부 3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해되고 수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 …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새 공화국의 모든 정부는 민중의 권리를 제한했는데 … 에르샤드는 군대를 증강하고 퇴역한 최고사령관들을 부와 권력이 있는 지위에 앉히고 장교들의 급여를 2배로 인상하고 사병의 수를 늘리는 동시에, 미국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쌓아 갔다 … 정치인과 재계 지도자가 군부의 비호 아래 치부하는 동안 수백만 명의 보통 시민은 반기아 상태로 내몰렸다. (411, 412, 418, 435쪽)


타이인들도 민주주의를 위한 성공적 봉기에서 두 차례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영웅적 희생이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허비되고 독재자들에 휩쓸려 사라지고 글로벌 기업의 이윤이 되는 경험을 했다 … 개인적 자유와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억만장자들은 수세대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막대한 사회적 부를 자신의 사적 소유로 전유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치인들은 군사화된 민족국가를 보통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영역으로 만들고, 때로는 수천 명의 인명을 살상한다. (444, 542∼543쪽)



  《아시아의 민중봉기》가 다루는 아시아 사람들 발자국은 그예 핏자국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은 민중봉기는 없습니다. 민중봉기가 일어나기 앞서까지 수없이 피를 흘리며 노예처럼 짓밟힌 채 살았고, 민중봉기를 일으켰어도 ‘엘리트’ 야당 정치인과 대학생 지도자는 독재정권이 나누어 준 콩고물을 받아먹는 일에 사로잡히는 얼거리가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됩니다. 사회 틀거리는 ‘군사독재’에서 ‘민주선거’로 바뀌지만, 군대와 경찰은 예전하고 똑같이 무시무시합니다.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군대와 경찰을 줄이거나 없애지 못합니다. 민주주의 선거로 대통령이 되거나 정치권력을 얻은 이들은 예전 독재권력이 거느린 군대와 경찰을 고스란히 물려받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 군대와 경찰을 부려서 ‘새로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두들겨패거나 짓누르’는 짓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조지 카치아피카스 님은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책을 왜 쓰려고 했을까요? 《아시아의 민중봉기》는 무엇을 밝히거나 다루거나 말하려는 책일까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군사독재정권이 오랫동안 으르렁거리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혔다는 이야기를 왜 들려주려고 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미국 군수산업’ 이야기와 ‘나라마다 군대와 경찰이 저지른 학살과 강간’ 이야기를 왜 자료와 통계를 빌어서 자꾸 알려주려고 할까요?



소비주의가 욕망의 대륙을 에워싸고 대량살상무기가 아름다움의 토대를 파괴하는 시기에는 예술 자체의 자율적 논리가 구원이 될 수 있다 … 아방가르드 집단의 문제의식은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를 유지하고 상상력을 촉발하는 것이다. (611, 622쪽)


군부독재의 어리석음은 오직 그들의 야만성에 어울리며, 어떤 필요한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이해타산인 ‘합리적’ 엘리트 행위자의 이익에만 어울린다 … 누가 백악관에 있든, 군사주의는 오랫동안 미국 외교정책과 경제발전의 중심이었고 확실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669, 701쪽)



  군대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던 적이란 없습니다. 먼 옛날에도 오늘날에도, 군대가 있는 곳에는 오직 전쟁과 학살과 침략과 파괴가 있을 뿐입니다. 군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독재권력이 있고, 독재권력을 무너뜨렸어도 ‘엘리트 선거권력’이 있습니다.


  군대를 거느리는 독재권력은 사람들 앞에 환하게 드러나는 ‘야만’입니다. 독재권력을 뒤에서 이끄는 경제권력은 사람들 앞에 제대로 안 드러나는 ‘야만’입니다. 《아시아의 민중봉기》를 보면 맺음말 언저리에서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기업권력’을 찬찬히 이야기합니다. 해마다 이윤을 더 늘리려고 하는 기업권력은 정치 틀거리나 사회 틀거리가 바뀌어도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군사독재가 정치와 사회를 억누르는 곳에서 이윤을 늘린 기업권력이라면, 1980년대부터는 ‘엘리트 선거권력’이 정치권력을 거머쥐어 광고와 언론과 교육으로 소비주의를 퍼뜨리면서 이윤을 늘리는 기업권력이라고 할 만합니다.


  가만히 따지면, 민중봉기는 독재권력은 무너뜨렸어도 기업권력은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독재권력은 눈앞에 훤히 보이니, 이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은 곧 알아챕니다. 기업권력은 눈앞에 제대로 보이지 않기에, 이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을 알아채기는 퍽 어렵습니다.



인류의 귀중한 자원은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의 불필요한 터널, 덴마크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 프린스에드워드섬과 캐나다 본토를 잇는 고속도로, 보스턴의 도심 터널인 빅딕, 남아도는 월드컵경기장 등에 낭비되며, 끝없는 전쟁과 소모적 군비 지출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프로젝트들의 공통점은 한 줌의 거대 기업들에 대규모 이윤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 기업들은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윤이 해마다 증가해야 한다는 한 가지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711쪽)



  민중봉기는 틀림없이 ‘군사독재 권력’을 무너뜨렸습니다. 민중봉기가 일어났기에 바보스러운 군사독재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널리 알렸습니다. 군대와 경찰을 앞세우면 언제나 우리 모두를 괴롭히거나 짓누르는 모진 짓이 되는 줄 깨닫도록 했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는 군대와 경찰이 아니라, 사랑과 꿈을 키우려는 수수한 사람들(민중)이 사이좋게 작은 마을을 이루어서 살아야 한다는 슬기를 가르칩니다.


  다만, 민중봉기는 군사독재 권력을 무너뜨렸되, ‘기업권력’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군사독재가 사라진 나라마다 ‘경제 불평등’과 ‘경제 부자유’가 널리 퍼집니다. 사람들을 윽박지르거나 다그치거나 짓밟는 총칼이 눈앞에서 조금 걷히기는 했으되, 가난한 굴레라든지 비정규직 수렁은 나날이 커지기만 합니다.


  소비사회는 바로 기업권력이 바라던 모습이라고 느낍니다. 민중봉기는 앞으로 ‘소비사회 기업권력’을 무너뜨리는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라는 틀거리를 모두 허물 수 있는 민중봉기로, 작은 사람들이 작은 마을에서 작은 보금자리를 작은 사랑으로 가꿀 수 있는 민중봉기로, 광고와 언론과 인터넷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삶을 짓는 민중봉기로, 이제부터 새롭게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민중봉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4348.6.1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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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 평전
신한균.박영봉 지음 / 아우라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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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9



아이들은 ‘꽃그릇에 담긴 꽃밥’을 반긴다

― 로산진 평전

 신한균·박영봉 글

 아우라 펴냄, 2015.5.15.



  빗살무늬그릇과 민무늬그릇이 있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인 1988년부터 학교에서 이러한 낱말을 썼습니다. 우리 형이 중학교에 들어가던 때에는 ‘즐문토기(櫛文土器)’나 ‘무문토기(無文土器)’ 같은 낱말을 썼어요. 나는 학교에서 ‘고인돌’이라는 낱말로 배웠으나, 우리 형은 ‘지석묘(支石墓)’라는 낱말로 배웠습니다. 똑같은 하나를 놓고 두 가지 말이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는 ‘한국말’을 오롯이 쓰지 못하고, 두세 가지 말을 섞어서 쓰기 일쑤입니다.


  형이 쓰던 교과서를 물려받아서 쓰던 지난날, 두 가지 말을 한 자리에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왜 한국이라는 나라는 한국말을 제대로 못 쓰고 이렇게 스스로 둘이나 셋으로 갈린 채 여러 나라 말을 섞어서 쓰는지 아리송했습니다. 이러다가 ‘빗살무늬’와 ‘민무늬’라는 낱말에 눈길이 갔고, 얼추 1만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흙으로 빚은 그릇’에 ‘무늬를 새겨서 썼다’는 대목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무늬가 없이 ‘그릇 모습’이면 되었지만, 나중에는 ‘아무 무늬가 없던 그릇’에 저마다 새로운 무늬를 아로새겨서 썼어요. 살림살이에 재미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로산진은 이 시기(1910년대)에 조선의 가구가 지닌 아름다움과 김치의 맛에 빠져들었는데, 김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즐긴 음식이기도 했다. 또한 한반도에 널려 있던 옛 가마터 답사를 통해 조선 도자기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 지난날 서도의 대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로산진은 정해진 과정을 충실히 밟으라는 말은 절대로 듣지 않았다 ..  (42, 56쪽)



  “그들은 왜 정해진 틀만을 고집할가? 한마디로 말해 그들에게는 예술이 없기 때문이다(로산진/35쪽).” 같은 이야기가 흐르는 《로산진 평전》(아우라,2015)을 읽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서 아이들하고 함께 먹는 내 삶을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배만 채우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배불리 먹기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아무 그릇에나 밥을 담아서 줄 수 없습니다. 참말, 아무 그릇에나 밥을 담아서 준다면, ‘개밥’을 주는 셈입니다.


  아이들도 꽃그릇을 반깁니다. 스텐그릇에 멋없이 퍼 담아서 주면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저 고맙게’ 받아먹지 않습니다. ‘스텐 밥판(식판)’도 그렇지요. 군대에서는 으레 ‘식판’에다가 똑같은 밥을 퍼 담아서 먹입니다. 다 다른 젊은이한테 다 다른 숨결을 느끼도록 하지 않고, 모두 똑같은 틀에 맞추어 똑같이 움직이도록 길들이려고 식판을 쓰고, 제복을 입히며,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곰곰이 살피면, “도자기도 글도 생활이 녹아 있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없다(로산진/58쪽).”는 말처럼, 군대 제식훈련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똑같은 몸짓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놀라워’ 보일는지 모르나,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전쟁무기를 짊어지고 큰길을 걷는 모습도 사람들한테 ‘놀라워’ 보이는 모습은 될 터이나, 아름다움일 수 없습니다.



.. 그는 버려지는 재료에 대해서도 철저히 연구했다. 버리는 걸 아깝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보려고 했다 … 그의 손에서 탄생한 비젠은 이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도자기로 바뀌었다. 생기 있고 전혀 메마르지 않았다. 로산진의 비젠은 지금까지의 관념이나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도자기였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비젠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멋지게 탄생한 것이다 ..  (96, 162쪽)



  어떤 그릇에 밥을 담느냐에 따라서 즐거움이 달라집니다. 어떤 그릇에 밥을 담든 ‘먹는다’는 몸짓은 같아요. 배는 똑같이 찰 테지요. 그러나, 마음이 달라집니다. 꽃그릇에 정갈하게 담아서 차린 밥을 마주할 적에는, 마치 내 몸도 꽃과 같은 숨결로 달라지면서 한결 깔끔하면서 반가이 수저를 듭니다. 바쁘다고 해서 아무 그릇에나 아무렇게나 담아서 밥상에 올리면, 아이들도 거칠게 먹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거친 말을 쓰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은 거친 말을 씁니다. 골을 자주 부리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도 골을 자주 부려요. 방긋방긋 웃고 보드랍게 말하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도 방긋방긋 잘 웃고 보드랍게 말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 외국 요리에 빠져 있는 일본인들은 수프는 알아도 된장국은 모른다. 빵맛은 구별하지만 밥의 깊은 맛은 모르고 있다 … 일본의 자연은 천혜의 재료를 빚어낸다. 산과 바다에 식재료가 가득하고, 눈도 코도 입도 즐겁다(로산진/171쪽).” 같은 말처럼, 우리는 우리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하고 밥상을 마주하는 아이들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고, 내가 손에 쥐어 다루는 여러 먹을거리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시골마을 들녘과 하늘과 숲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을 때에 제대로 알 수 있고, 내 보금자리를 내가 스스로 제대로 알 때에 이곳을 사랑하고 보듬는 손길로 삶을 아름답게 지을 수 있습니다.



.. 로산진의 예술은 실용적이고 창의적이었지만, 그들(다른 예술인)의 시각에서 보는 기준은 정통 기술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 로산진이 말한 요리의 진수는 어디까지나 가정 요리였다 … 로산진의 요리철학은 이렇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친절하고 진실한 마음이 담긴 요리,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요리가 그런 것이다 … 가정에서 필요한 것은 결국 진실한 마음이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  (192, 208, 209쪽)



  즐거운 마음이 되어 밥을 먹을 때에 즐겁습니다. 반찬 가짓수가 한두 가지만 있더라도 하하하 웃고 이야기하면서 먹으면 즐겁습니다. 안 즐거운 마음이 되어 밥을 먹을 때에는 거북하거나 더부룩하기 일쑤입니다. 반찬 가짓수가 스물이나 서른 가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웃음 하나 없이 차갑거나 썰렁한 자리에서 수저를 들어야 하면 밥 한 술을 떠서 삼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멋지거나 대단한 밥을 차리지 않더라도, 온마음을 사랑스레 담아서 밥을 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양소도 잘 살필 줄 알아야 할 테지만, 영양소를 챙기는 ‘마음’부터 즐거움과 웃음과 노래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로산진 평전》에 나오는 “요리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를 선택하는 마음의 눈이다(로산진/212쪽).”와 같은 말처럼, ‘마음으로 보는 눈’이 대수롭습니다. ‘마음으로 먹는 밥’이며, ‘마음으로 누리는 밥’입니다. ‘마음으로 지어서 나누는 밥’이요, ‘마음으로 사랑을 북돋우는 밥’입니다.



.. 로산진의 요리에서 차림멋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게 아니라, 손길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풍경을 말한다 … 로산진은 요리사들이 밥을 등한시하며, 밥하는 것을 체면 구기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에서는 요리사를 이타마에라 하기도 하는데 나무판, 즉 도마 앞이라는 의미다. 그 말처럼 요리사들이 그저 도마 앞에서 회나 요리하면 되는 줄 안다고 로산진은 비판했다 ..  (215, 241쪽)



  나는 날마다 꽃밥을 차립니다. 나 스스로 내 밥차림에 ‘꽃밥’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꽃송이를 얹지 않더라도 꽃밥입니다. 꽃접시나 꽃그릇을 쓰니까 꽃밥이 아닙니다. 꽃송이가 피어나듯이 온마음을 사랑스레 가다듬어서 차리려는 밥이기에 ‘꽃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아침저녁을 지어 아이들하고 나눕니다. 언제나 꽃마음이 되고 꽃사랑 같은 숨결로 살림을 가꾸고 싶어서 곁님하고 함께 꽃밥을 즐깁니다.


  앞으로 우리 집 아이들도 스스로 꽃밥을 지어서 꽃동무하고 꽃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엌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밥 한 그릇을 차려서 올립니다. 4348.5.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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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
이희인 지음 / 호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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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8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나들이

―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

 이희인 글·사진

 호미 펴냄, 2013.3.9.



  아이들을 이끌고 마실을 다니다 보면, 아이들이 반기는 곳은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고 달리면서 소리치며 놀 수 있는 데라면 어디이든 반깁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뛸 수 없고 달릴 수 없으며 소리칠 수도 없는데다가 놀 수 없는 데라면 무척 힘들어 합니다.


  노래하면서 놀고 싶은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간다’고 하면서 ‘노래할 수 없는 곳’에 간다면, 놀러 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춤추고 뛰면서 놀고 싶은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가자’고 하면서 ‘춤도 뜀뛰도 할 수 없는 데’에 간다면, 놀러 간다고 할 수 없어요.


  어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느긋하게 쉬기를 바라는 사람은 느긋하게 쉴 만한 곳에 가야 합니다. 눈부시거나 멋진 모습을 구경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눈부시거나 멋진 것이 가득한 곳에 가야 합니다. 고즈넉하면서 푸른 숲을 바라는 사람은 고즈넉하면서 푸른 숲이 펼쳐진 곳에 가야 합니다.





.. 갑자기 눈앞에 발리우드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장을 가득 메웁니다. 푸성귀 냄새, 과일 냄새로 가득한 걸로 봐서는 야채시장인 것 같습니다 … 양쪽 문을 열어 둔 채로 기차가 달립니다. 사람들은 열린 문가에 서 있거나 주저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합니다. 기차는 광야나 광활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비좁은 마을 골목을 끼고 달립니다 … 식료품 외에도 시장 안쪽에는 옷이나 구두, 가방, 액세서리 등을 파는 가게들도 보입니다. 낯선 마을의 시장 구경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구경보다 못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  (19, 34, 121쪽)



  이희인 님이 쓴 여행책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호미,2013)를 읽으면서 인도양과 맞닿은 여러 나라를 가만히 그립니다. 내가 사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인도양을 고요히 헤아립니다.


  우리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칠 킬로미터를 달리면 바닷가에 닿습니다. 고흥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파란 빛입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남해’라고 하는 바다로, 지구별이라는 테두리에서 바라보면 ‘태평양’입니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바닷물입니다.


  짭조름한 기운이 가득 서린 바닷바람은 제법 셉니다.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퍽 모진 바람이 되는데, 바닷가마다 후박나무가 서서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습니다. 무척 오랫동안 이 나라 바닷마을하고 섬마을에서 자란 나무입니다. 네 철 내내 푸른 잎사귀를 다는 후박나무는 여러모로 바닷마을이나 섬마을하고 잘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바닷바람은 한 해 내내 그치지 않으니, 후박나무처럼 한 해 내내 도톰하고 펑퍼짐한 잎을 매단 나무가 있으면 바람을 긋기에 좋습니다.




.. 설득의 힘. 무기와 폭력, 전쟁이 아닌 차분한 설득과 포용의 정신이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을 불교의 품 안으로 끌어들인 이유이자 매력일 것입니다 … 기차에서 만난 스리랑카 꼬마들이 낯선 여행자에게 슬쩍 장난을 걸어 옵니다. 문득 한 소년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손에 든 과자 하나를 제게 건네줍니다 … 여행의 참맛은 이렇게 우연히 맞닥뜨린 소소한 풍경 속에 있는 게 아니랴 싶습니다..  (80, 112, 114쪽)



  시골에서 시골버스를 타면, 이 시골버스에서 젊은 이웃을 만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웬만한 젊은 이웃은 거의 다 자가용을 탑니다. 시골버스를 타는 사람은 초등학교 어린이나 중·고등학교 푸름이하고 늙은 할매와 할배입니다. 먼 이웃나라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이들도 시골버스를 탑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는 시골버스에서 손전화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늙은 할매와 할배는 창밖을 바라봅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에 아이들이 북적거리고, 마을마다 젊은이가 넘실거리며, 마을잔치와 마을놀이와 두레와 품앗이가 있던 때까지는 시골버스도 무척 왁자지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라고 하는 책을 쓴 이희인 님이 스리랑카나 인도에서 탄 기차나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모습을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른 숲을 품에 안으면서 너른 숲과 같은 낯빛과 목소리로 삶을 짓는 사람입니다. 드넓은 바다를 가슴에 안으면서 드넓은 바다와 같은 얼굴빛과 웃음으로 삶을 가꾸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는 어떤 낯빛이나 얼굴빛으로 지낼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와 웃음을 서로 주고받는 하루를 열까요?





.. 차밭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밀족 아낙의 얼굴 그 어디에도 반목과 증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도 더 많은 찻잎을 따고 더 좋은 값에 찻잎을 팔아 하루하루 생활고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걱정과 고단함이 그 얼굴들에 더 많이 읽힙니다 … 한참을 서서 지켜보는데, 좀처럼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낚시를 보러 온 여행자들이 모여듭니다. 강퍅한 어부들 어깨 너머로 뉘엿뉘엿 인도양의 해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  (139∼140, 160쪽)



  스리랑카 차밭에서 일하는 아지매한테서 먹고사는 걱정과 고단한 마음이 물씬 묻어난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느껴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하루하루 고된 일을 하면서 살림을 바짝 조이는 이웃이 많습니다. 한쪽에는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는 여행은 꿈조차 못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여행을 안 다닐 적’에는 하루하루 고단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지내기 일쑤입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느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 고단함도 풀고 걱정도 털면서 홀가분한 마음이 될까요. 언제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괴로움도 근심도 없이 가벼운 몸으로 하루를 열 만할까요.




..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여행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갈 곳을 정하고, 그 지역 정보를 모으고, 그곳에 대한 환상을 스스로 키우며 다니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다시 강을 건너와 비루파크샤 사원을 둘러본 뒤, 버스가 왔던 길을 따라 함피의 이웃 마을인 카마라푸람 쪽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시골길입니다 ..  (203, 274쪽)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을 걸을 수 있으면, 이곳이 마을 고샅이든 뒷길이든 오솔길이든, 모두 기쁜 ‘마실길(여행길)’이 됩니다. 아름답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길을 꾸역꾸역 걷는다면, 이곳이 프랑스이든 미국이든 뉴질랜드이든 덴마크이든 그저 고달프면서 지겹거나 따분한 하루가 됩니다.


  그러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은 누가 가꿀까요? 바로 우리가 스스로 가꿉니다. 하루 만에 가꾸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와 모레 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차근차근 가꿀 때에 우리 보금자리에 아름다운 길이 하나 놓입니다. 올 한 해와 이듬해를 웃음꽃 피어나는 노래로 맞아들이면서 찬찬히 북돋울 때에 우리 마을에 사랑스러운 길이 하나 태어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자랍니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기까지 제법 여러 해가 듭니다. 나무를 처음 심을 적에는 그늘도 꽃도 열매도 구경하기 어렵지만, 다섯 해가 흐르고 열 해가 흐르면서, 나무는 씩씩하게 하늘을 바라봅니다. 스무 해가 흐르고 쉰 해가 흐르면서, 바야흐로 우리들이 아이를 낳고 이 아이들이 새로운 어른으로 자랄 무렵, 다 같이 누릴 아름다운 보금자리와 마을이 새로 깨어납니다.


  내가 웃는 곳에 네가 마실을 옵니다. 네가 노래하는 곳에 내가 나들이를 갑니다. 내가 기쁘게 삶을 짓는 곳에 네가 마실을 옵니다. 네가 즐겁게 삶을 가꾸는 곳에 내가 나들이를 갑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스리랑카나 인도로 마실을 가서 아름다운 인도양을 누릴 수 있다면, 스리랑카나 인도에서는 한국으로 나들이를 와서 사랑스러운 태평양도 들도 숲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서로서로 저마다 제 삶자리를 아름답고 사랑스레 돌볼 수 있기를 빌어요. 4348.5.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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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2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끌리네요^^..

숲노래 2015-05-26 23:58   좋아요 0 | URL
예쁜 책입니다
 
밥의 인문학 - 한국인의 역사, 문화, 정서와 함께해온 밥 이야기
정혜경 지음 / 따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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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7



아침저녁으로 손수 지은 밥을 먹다

― 밥의 인문학

 정혜경 글

 따비 펴냄, 2015.5.10.



  우리 집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습니다. 아침에 한 끼니를 먹고, 저녁에 새로 한 끼니를 먹습니다. 낮에 살살 배가 고프다 싶으면 샛밥을 먹습니다. 때로는 주전부리를 마련합니다.


  나들이를 갈 적에는 도시락을 마련합니다. 면소재지 놀이터에서 놀다가 도시락을 먹든, 읍내 느티나무 밑에서 도시락을 꺼내든, 알맞춤한 통에 밥이랑 반찬을 함께 담습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는 날이라면, ‘바깥밥’을 먹습니다. 바깥에서 먹으니 바깥밥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먹는 밥이라면 ‘집밥’입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는 날이라면, 마실이나 나들이를 다니다가 먹는 밥입니다. 이때에는 바깥밥이면서 ‘마실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하고 집 바깥에서 밥을 먹는 날에는 “우리 오늘 즐겁게 ‘마실밥’ 먹자” 하고 말합니다.



.. 한국인은 밥을 먹기 위해 김치나 간장 같은 발효음식을 반찬으로 먹는 것이지, 반찬을 먹으려고 밥을 먹는 게 아니다 … 아침밥을 먹으면 살이 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반대다. 밥은 천천히 소화되기 때문에 혈당치가 장시간 안정 상태로 유지된다 ..  (18, 288쪽)



  정혜경 님이 쓴 《밥의 인문학》(따비,2015)을 읽습니다. 정혜경 님은 한겨레한테 ‘밥’이 무엇인가를 놓고 도톰한 책 한 권을 내놓습니다. 옛책에 남은 글과 옛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서 한겨레하고 밥이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살피고, 밥삶이 어떤 발자취로 이어졌는가를 살피며, 문학에서 다루는 밥을 살피다가는, 과학으로 밥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끝으로는, 오늘날 한국사람이 널리 먹는 여러 가지 밥을 놓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김치볶음밥이라든지 비빔밥이라든지 쌈밥이라든지 김밥이란 무엇인가 하고 차근차근 밝힙니다.


  그런데 좀 아쉽다고 해야 할 만한 대목을 곳곳에서 봅니다. 이를테면 148쪽에 나오는 “남새는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지만, 채소의 순우리말이고 푸새, 푸성귀도 순우리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음식명의 원형도 북한 요리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대목입니다. 글을 쓴 정혜경 님은 대학교에서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일하신다고 합니다. 《밥의 인문학》이라는 책은 한겨레한테 ‘밥’이 가장 소담스럽거나 대수롭다고 하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러면, ‘밥’과 얽힌 ‘한겨레 말’에 깊고 넓게 눈을 뜨면서 이야기꽃을 함께 펼칠 때에 한결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한겨레는 ‘밥을 먹은 삶’을 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음식(飮食)을 섭취(攝取)한 역사(歷史)’가 아니요 ‘조석(朝夕)을 식사(食事)하는 문화(文化)’도 아닙니다. 글쓴이 정혜경 님은 곳곳에서 ‘밥심(밥힘)’을 말합니다. ‘밥심’처럼 한겨레한테는 ‘밥삶’이요 ‘밥살이’입니다. ‘밥짓기’와 ‘밥차림’입니다.


  요즈음은 시골 할매와 할배도 ‘남새·나물·푸성귀’를 제대로 갈라서 쓰지 않지만,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기 앞서까지 거의 모든 시골사람은 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살펴서 옳게 쓰면서 살았습니다. 마늘처럼 손수 심어서 얻은 풀은 남새요, 쑥처럼 스스로 잘 자라는 풀은 나물이며, 남새와 나물을 아울러 푸성귀입니다. 단군 옛이야기에 나오는 ‘쑥과 마늘’은 ‘나물과 남새’ 가운데 하나씩 손꼽아서 ‘사람이 먹는 밥’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었어요.



.. 쌀밥을 먹는 귀족층이 생겨난 것은 삼국시대 무렵이므로,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공동 식사의 풍습이 일반적이었으리라 본다 … 왕족이나 귀족은 쌀을 주식으로 즐길 수 있었지만 쌀 생산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은 쌀을 충분히 먹기 어려웠다 … 하층계급에서 조나 보리를 먹는 사람은 그래도 풍족한 편이고, 더 어려운 경우에는 나무껍질을 먹었다고 한다 ..  (33, 39쪽)



  밥상맡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수저를 듭니다. 밥을 먹으면서 ‘밥노래’를 부릅니다. 밥 한 술이 즐거우니 노래가 흘러나오고, 밥 두 술이 기쁘니 노래가 저절로 샘솟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도 노래하지만, 밥을 짓는 사람도 노래합니다. 가만히 따지면, 밥을 짓는 사람부터 노래를 해야 밥을 먹는 사람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밥을 지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읊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야, 밥상맡이 아늑하면서 넉넉합니다.


  밥을 짓는 사람이 노래하려면, 밥을 짓도록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사람이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흙을 짓고 건사하면서 보살피는 사람이 기쁘게 노래할 수 있는 삶일 때에, 남새도 나물도 싱그러우면서 알찹니다. 흙을 사랑하는 삶이기에 밥을 사랑할 수 있고, 밥을 사랑하는 삶이기에 서로 아끼면서 돌보는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고려에 강남미가 들어온 것은 당시 세자 신분이자 원 세조의 외손이었던 충선왕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는 외국으로부터 쌀을 들여온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강남미는 그 당시 굶주리던 고려인들을 구휼하기보다는 일본 원정 비용이나 기근 발생 시의 이동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당시 쌀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품목은 주로 농산물이었다 ..  (46, 62쪽)



  정혜경 님은 ‘밥’을 노래한 수많은 문학과 옛책을 빌어 ‘밥’이란 참으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밥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문득 깨닫습니다. 한국에서 시나 소설을 쓴 분들이 참말 밥 이야기를 자주 썼군요.


  그래서, 나도 내 나름대로 내가 읽은 ‘밥을 노래한 책’을 떠올려 봅니다. 《밥의 인문학》에서는 다루지 않은 책 가운데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나는 만화책 《나츠코의 술》 열두 권을 떠올립니다. 《나츠코의 술》이라는 만화책은 ‘일본 전통술’을 양조장에서 손수 담그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얼핏 보자면 술을 이야기하는 만화책이지만, 열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보면 4/5에 이르는 이야기는 ‘술’이 아니라 ‘시골 흙일’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츠코의 술》이라는 만화책은 ‘술을 맛있게 빚는 사람’이 가장 크게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사랑해야 할 대목은 바로 ‘쌀을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길’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만화책 《나츠코의 술》에 나오는 ‘나츠코’는 손수 쟁기를 쥐어 논을 갑니다. 기계를 빌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서 새벽부터 밤까지 쟁기질을 해서 논을 갈아요. 왜 그러한가 하면, 손품이 깃든 논에 손으로 모를 찧고 손으로 피를 뽑으며 손으로 나락을 벤 뒤, 손으로 하나하나 널어서 말린 뒤, 다시 손으로 벼알을 훑어야, 이러한 쌀을 술로 빚을 때에 더없이 깊고 너른 맛이 나온다는 대목을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츠코라는 사람은 농약도 비료도 안 쓰고 손수 똥거름을 논에 뿌립니다. 나중에 맛난 술을 빚을 쌀이니, 이 쌀에 농약과 비료를 함부로 쓸 수 없다고 여깁니다. 농약으로 지은 쌀로 술을 빚으면 그 술에서 농약 냄새가 흐른다고 느끼거든요.


  가장 맛난 밥은 어떤 밥일까요? 바로 내가 손수 흙을 일구어서 얻은 나락으로 지은 밥입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거둔 쌀을 내 고장에서 흐르는 싱그러운 냇물을 길어서 내가 숲에서 베어 온 나무를 찍어서 불을 지핀 뒤 짓는 밥이 가장 맛납니다.



.. 밥짓기는 가족들이 번갈아 가면서 할 수 있을 때 행복한 노동이 될 수 있다. 요리는 매우 창조적인 행위다 …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말에서) ‘두루거리상’은 여러 사람이 격을 차리지 않고 둘러앉아서 한데 먹게 차린 음식상으로 두리기상이라고도 한다. ‘사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이는 농사꾼들이 힘든 일을 할 적에 끼니 밖에 참참이 먹는 음식을 말한다 … 충무김밥은 김과 밥 사이에 아무런 재료가 없어도 김밥이라는 요리가 가능함을, 그냥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맛있게 가능함을 보여준 창조의 원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  (199, 244, 340쪽)



  정혜경 님은 “우리 옛글에는 어떤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자성어들이 있고 우리 조상들은 이를 활용하여 우리 언어를 윤택하게 하고 어려운 삶을 유머르 받아들인 것 같다(178쪽).” 같은 이야기를 적기도 하지만, 우리 옛사람은 ‘글(한문)’을 모르며 살았습니다. 옛날 옛적에 글을 남긴 사람은 양반과 지식인뿐입니다. 양반과 지식인은 손수 흙을 일구지 않았습니다.


  ‘밥’이나 ‘쌀’이나 ‘나락(볍씨)’ 같은 낱말은 ‘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라 ‘흙을 일구던 시골사람’이 입으로 지어서 입으로 물려준 말입니다. ‘사자성어’는 ‘한문’이라고 하는 글을 기름지게 할 뿐입니다. 한겨레가 오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말’을 기름지게 하는 ‘새로운 말’은 손수 짓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말입니다.


  ‘꼬두밥’이나 ‘진밥’이나 ‘누룽지’를 한자말로 일컫는 사람은 없습니다. ‘찰밥’이나 ‘수수밥’이나 ‘감자밥’을 한자말로 가리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빔밥’이나 ‘남새밥’이나 ‘나물밥’을 한자말로 가리키지 못합니다. ‘김밥’이나 ‘쌈밥’이나 ‘덮밥’이나 ‘볶음밥’은 오롯이 이러한 한국말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겨레 말을 기름지게 하는 말이 비롯한 곳은 바로 흙이요, 숲이며, 들입니다. 흙말이요 숲말이며 들밥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먹는 밥은 흙밥이고 숲밥이며 들밥입니다.


  정혜경 님은 “물을 좋아하는 이팝나무 습성으로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쳤던 모양이다(183쪽).”와 같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옛사람은 달력이나 시계에 기대지 않고 살았습니다. 옛사람은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흐름을 낱낱이 살펴서 흙일과 숲일과 들일을 했습니다. 제비가 돌아오는 철을 살피고, 바람결과 바람맛을 읽으며, 해가 흐르고 달과 별이 돋는 기운을 헤아렸습니다. 이 모두를 살펴서 씨앗을 심고 흙을 가꾸었어요.



.. 한국의 전통문화의 특징은 자연과 가까이 있고, 자연을 받아들여 바탕에 깔아놓은 데 있다 … 우리에게 보약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을 담은 밥을 먹으면 보약이 된다 ..  (120쪽)



  우리는 누구나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늘 밥을 먹지만, 막상 밥을 제대로 못 살피기 일쑤입니다. 너무 바쁜 하루요, 쳇바퀴처럼 고되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이웃은 흙을 못 밟으면서 살기 일쑤입니다. 도시에서 회사일이나 공장일을 하는 숱한 이웃은 바람 한 줄기를 제대로 못 쐬기 마련이고, 햇볕 한 줌조차 제대로 못 쬐기 마련입니다. 이러다 보니, 밥 한 그릇을 받으면서도 밥이 나온 바탕을 미처 못 살피곤 합니다.


  해가 있고, 바람이 있으며, 흙이랑 풀이랑 나무에다가, 빗물이 있기에, 비로소 밥이 있습니다. 다만, 해와 바람과 흙과 비만 있대서 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모두를 고루 아끼는 사람이 사랑스레 흘리는 땀방울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밥이 나옵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풀밥이든 감자밥이든 고기밥이든 다 맛있습니다. 어느 밥이든 다 좋습니다.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숨결로 지어서 나누는 밥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몸과 마음을 살찌웁니다. 쌀을 먹든 밀을 먹든 기쁜 마음일 때에 삶이 살아납니다. 쌀밥을 먹든 빵을 먹든 기쁨이 없이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만 가슴에 담으면 영양소도 살아나지 못하고 맛도 없을 뿐더러 보람조차 없겠지요.


  자연을 담은 밥, 그러니까 햇볕과 바람과 비와 흙이 어우러진 숨결에 내 따사로운 손길을 섞는 밥을 먹으면서 새롭게 기운을 차립니다. 그러니, 밥을 슬기롭고 사랑스레 잘 먹는 사람은 늘 튼튼한 몸이 되면서 웃는 마음이 됩니다. 4348.5.2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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