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로 - 송관호 6.25전쟁 수기
송관호 지음, 김종운 정리 / 눈빛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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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5



국가권력에 포로가 된 젊은이

― 전쟁포로, 송관호 6·25전쟁 수기

 송관호 글

 김종운 정리

 눈빛 펴냄, 2015.6.25. 13000원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한겨레는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채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국은 그저 한국일 뿐이지만,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하는 커다란 나라를 등에 업고서 반으로 쪼개지는 길을 가고야 말았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남·북녘으로 쪼개지기를 바라지 않던 독립운동가는 해방 뒤에 하나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어야 했고, 남녘과 북녘에서 저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이녁 힘을 더욱 키우려고 끝없이 숙청을 일삼았습니다. 이리하여 남녘하고 북녘은 ‘사회 얼거리’하고 ‘정치 틀’이 사뭇 다르다고 하는 두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한 나라’가 ‘두 나라’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이룬 ‘여느 사람(일반 시민)’은 정치 틀이나 사회 얼거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1940∼50년대만 하더라도 남녘과 북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일구었습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한테는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말이 살갗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저 한겨레이고, 이웃입니다. 남녘에서 군대로 끌려가거나 북녘에서 군대로 끌려간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남녘 군인이니 북녘에 있는 한겨레하고 이웃을 ‘죽여도 될 만한 놈’으로 여겼을까요? 북녘 군인이니 남녘에 있는 한겨레하고 이웃을 ‘하루아침에 나쁜 놈’으로 바라보았을까요?



행군 도중 우리 일행 다섯은 하도 배가 고파서 길가 무밭에서 무를 뽑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적기가 나타나 기총사격을 해 왔다. 우리 모두는 재빨리 밭두렁에 엎드려 꼼짝도 않고 죽은 체하였다. (55쪽)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인민군 전사들이 차에 치어 신음하는 부상병을 치료하기는커녕 바로 그 자리에서 총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군을 재촉하여 원산 방향으로 전투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모습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이유를 들어 본즉 사랑하는 전우이지만 중상을 당한 그들을 후방으로 후송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면 적군에게 포로가 될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죽인 것이라고 했다. (57쪽)



  송관호 님이 남긴 글을 갈무리해서 책으로 묶은 《전쟁포로》(눈빛,2015)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북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송관호 님은 북녘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몸이 튼튼하지 않아서 싸움터로 나가지는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끝내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북진하는 남녘 군인’한테 붙잡혀서 포로가 됩니다.


  포로가 된 송관호 님은 실컷 두들겨맞은 뒤 부산으로 갔고, 부산에서 거제도로 옮겨서 ‘포로 스스로’ 포로수용소를 짓는 일을 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나는 날을 맞이하고 난 뒤에는 북녘 고향으로 가지 않고 남녘에 남습니다. 북녘에서 다른 인민군이 동료 인민군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모습을 보고는, 또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포로 스스로 좌익하고 우익으로 갈려서 서로 괴롭히거나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북녘 고향집으로 갈 엄두를 못 냅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녘에서 어쨌든 살아남자고 생각합니다.



하루는 피난민 하나가 산으로 오르다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래서는 치안대가 애국자를 죽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질 행동을 저지르고 있어요. 지금 위대한 애국투사들이, 혁명가들이 죽어 가고 있어요. 나도 죽을 걸 피해 간신히 도망쳐 있어요.” 그는 치를 떨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인민군이었던 나도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87쪽)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곳에서 한국군과 헌병을 보았는데 여기저기서 개머리판이 마구 날아와 사정없이 온몸을 후려쳤다. 개머리판에 이어 총구로도 찔렀다. 얼마나 아픈지 처음에는 입이 딱 벌어져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 귀순하면 국군이 환대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죽어라 매타작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91, 92쪽)



  전쟁수기인 《전쟁포로》에 나오는 이야기는 역사책에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역사책은 송관호 님 같은 사람이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책은 여러 지식인이 여러 자료와 책을 바탕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전쟁수기 《전쟁포로》에 나오는 이야기는 ‘정치권력하고는 한 번도 줄이 닿은 적 없는 여느 사람’인 송관호 님이 한국전쟁 싸움터에서 기적처럼 살아남고, 또 인민군과 국군으로 지내야 하면서도 놀랍게 살아남은 뒤, 이녁 스스로 이 이야기를 남겨야겠구나 하고 느껴서 혼자서 남긴 글입니다. 책으로 나올는지 안 나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남긴 글입니다. 그래서 《전쟁포로》를 읽다 보면, 남녘이나 북녘이 서로 똑같이 ‘이념에 휩쓸려서 사람다운 삶을 잃거나 놓친 대목’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서로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으니 죽이려고 합니다. 서로 ‘적’으로 바라보니까 온갖 욕지꺼리를 늘어놓으면서 두들겨패려고 합니다.


  북녘 군인은 북녘 군인대로 남녘 군인을 죽이려 합니다. 남녘 군인은 남녘 군인대로 북녘 군인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서로 군인옷을 벗고 마주하면 ‘똑같은 한겨레’입니다. 이름을 트고 고향을 묻다 보면, 서로 알 만한 사이입니다. 군인옷을 입은 채 서로 적으로 마주해야 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인’을 저질러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 슬픈 벼랑으로 굴러떨어져야 합니다.



북으로 간 친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이 그리워서 북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남에 남기로 한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북으로 송환되더라도 “포로가 되어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하고 위로하며 우릴 가족의 품으로 절대 돌려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167쪽)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이 무력이 강하고 사상이 강해 모든 면에서 국군보다 우월하여 초기에 남진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무슨 말이냐고 반문을 했다. 강대국은 약소국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나라를 예속시키기 위해 동족 간에 사상 싸움을 일으키어 전쟁이 나게 한 후 쌍방을 강대국에게 예숙시켜 민족주의 애국자를 제거하고 자기 앞잡이들을 내세워 정권을 잡게 한 후 그를 지원하면서 동족을 죽이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숙청하여 분단을 영원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180쪽)



  한국이라는 나라가 둘로 갈라져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만 둘로 갈라졌습니다. 둘로 갈라지는 동안, 남·북녘(이 아닌 그냥 한국)에서 저마다 씩씩하고 훌륭히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해방공간에서 참다운 평화를 바라던 이들은 하나씩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독재정치가 이루어집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군사주의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군대만 얄궂게 커집니다.


  《전쟁포로》를 쓴 송관호 님은 ‘국가권력에 포로가 된 젊은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저 ‘한국사람’일 뿐이고, ‘한겨레’일 뿐이지만, ‘전쟁포로’라고 하는 뜬금없는 이름을 얻어야 하던 슬픈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이 나라에는 ‘전쟁영웅’이라고 하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사람이 함께 생겨야 합니다. 적군을 많이 죽인 이를 가리켜 전쟁영웅이라고 하는데, 남·북녘이 서로 맞붙어서 죽이고 죽인 ‘적군’이란 누구였을까요? 바로 우리 이웃이요 한겨레입니다. 국가권력이나 정치권력은 남녘이나 북녘으로 갈라져서 저마다 다른 정치나 사회인 듯이 내세웠지만, 막상 남녘하고 북녘에서 살던 여느 사람들은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닙니다. 정치 틀이 이렇다고 해서 사람까지 그렇게 달라질 수 없습니다. 사회 얼거리가 저렇다고 해서 사람까지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나는 거기(전남 해남 시골마을)서 추석을 맞이했다. 주민들이 모처럼 좋은 음식을 차려 단정한 옷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불과 삼사 년 전에 좌익 또는 우익으로 몰려 무더기로 죽은 사람들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유족들이 서로 천추의 한을 품고 원수 대하듯 할 만도 한데, 서로 반목하지 않고 다정히 정을 나누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아, 저렇게 순진하고 착한 농민들을 어째서 전쟁 따위로 서로 죽게 하였단 말인가?’ 하고 시절을 원망했다. (209쪽)


우리 중대는 “대통령에게 이 박사를 찍어 줘라”라는 지시로 대부분 이승만에게 투표를 했다. 후에 다른 중대가 투표하러 내려왔다가 다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해서 투표도 못하고 그냥 올라갔다. 알고 보니 표를 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것으로 찍어 놓고 올라가라고 한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후보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90쪽)



  《전쟁포로》 끝자락을 보면, 1950년대 부정선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1990년대 부정선거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어떤 부정선거인가 하면, 나는 1997년 12월 31일에 군대에서 전역을 했는데, 바로 이무렵 1997년에 대통령선거를 했습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적에 군인은 ‘군 부재자 선거’를 했습니다. 그런데, 군 부재자 선거를 어떻게 했느냐 하면, 비무장지대에 있던 부대마다 ‘휴지상자’를 ‘투표함’으로 만들어서 했습니다. 소초마다 빈 휴지상자를 하얀 종이로 감싸서 구멍을 냈고, 철책에 있던 군인들은 ‘투표용지’를 이 휴지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휴지상자를 중대본부에서 거두었고, 행정보급관이 모아서 이녁 자가용에 싣고 대대로 가져갔지요. 대대에서는 또 이렇게 ‘부대마다 휴지상자로 만들어서 투표용지를 모은 투표함’을 모아서 연대로 가져가고요.


  ‘휴지상자 투표함’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대로 건넸을까요? ‘휴지상자 투표함’에 담긴 투표용지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투표용지’였을까요?


  평화를 바라지 않은 국가권력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민주를 생각하지 않는 정치권력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평화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도, 영웅으로 훈장을 얻은 사람도, 희생이 된 사람도, 모두 우리 이웃입니다. 한겨레는 서로 아낄 이웃이지, 서로 적이 되어 싸워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한국 사회부터 평화와 민주가 자라서, 지구별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삶을 일굴 수 있기를 빕니다. 4348.7.2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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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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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7



나는 왜 골짜기에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글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15.7.3. 13000원



  나카마사 마사키 님이 쓴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2015)를 읽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숲바람을 쐬면서 이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골짜기로 마실을 간 뒤, 아이들하고 한동안 물놀이를 하고 나서, 조용히 물가로 나와서 손을 말린 다음에 천천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책을 읽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저희끼리 신나게 놉니다. 몸을 담그면 이가 딱딱거릴 만큼 차가운 골짝물하고 하나가 된 아이들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 골짜기에서 노래하면서 웃습니다.


  골짜기에서 책을 읽는 내 팔뚝에 잠자리에 내려앉습니다. 나는 내 팔뚝에 앉은 잠자리를 보느라 책을 못 봅니다. 잠자리가 날아간 뒤에는 멧제비나비가 팔랑거리면서 눈앞을 맴돕니다. 이제 나는 제비춤을 보느라 책을 못 봅니다. 제비나비가 저만치 떠난 뒤에는 흰나비하고 노랑나비가 날아듭니다. 아무리 봐도 배추흰나비 같은데 이 깊은 골짜기까지 어인 일일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참말 나비를 쳐다보느라 책은 옆으로 밀어놓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로 짚어 보자면, 이해관계 때문에 ‘선’의 탐구를 내버리면 안 되고, 특정한 ‘선’의 관념에 지나치게 갇혀도 안 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23쪽)


대중사회 안에서 지식인은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일반인’의 상담을 해 주면서, 다시 말해 세계적인 서사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 이상으로 알기 쉬운 서사에 민감하고, ‘시류에 편승하고 싶다’는 욕구에 말려들기 쉽다. (71쪽)



  2009년에 일본에서 처음 나온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는, 일본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아렌트를 다시 읽어야 한다”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이야말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라고 한대요.


  골짜기에서 책읽기를 하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몰아서 가파른 멧길을 넘습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우리가 늘 노는 깊은 골짜기’에 닿으면, 자전거는 풀밭에 눕힙니다. 귀가 멍할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땀을 씻고 웃옷을 빨래합니다. 볕이 잘 드는 넓적한 바위에 옷을 올려놓으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옷이 다 마릅니다.


  참말 나는 이 시골자락에서 한나 아렌트를 왜 다시 읽으려 하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씨앗 심기하고 나무 가꾸기하고 화덕 짓기 같은 책을 더 깊이 읽어야 할 노릇 아닌가 하고 되새깁니다. 그래도 씩씩하게 책을 넘깁니다. 글쓴이(일본 가나자와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한나 아렌트한테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엿봅니다. 글쓴이가 한나 아렌트를 일본에서 2009년에 ‘다시 읽자’고 말한 까닭은 바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 때문입니다. 이 책을 옮긴 분이나, 이 책을 한국에서 펴낸 출판사도, 2015년 오늘날 한국에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다 함께 키우자는 마음이리라 느낍니다.



‘전체주의’는 전근대적 야만의 발현이 아니라, 도리어 서구사회의 근대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41쪽)


19세기의 제국은 종주국인 국민국가의 번영을 위한 식민지 지배 시스템이다. ‘제국’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같은 ‘국민’이며, 그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간단히 자기 편이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 주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폐쇄적인 제국이다. 더구나 이렇게 닫혀 있는 ‘제국’은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본국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사회적으로 손해를 끼쳐 잉여인력으로 취급받는 사람을 동원한다. 이리하여 실업 문제 같은 국민의 사회적 불안을 해소함과 동시에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해외에 진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 (56쪽)



  지식인뿐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삶을 짓는 모든 사람들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세상 흐름에 휘둘리면서’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사상식’을 알거나 외우거나 익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골든벨’ 같은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지식이나 시사나 상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괭이질을 할 줄 모르고, 호미질하고 낫질을 할 줄 모른다면, 씨앗을 심을 줄 모르고, 풀을 뽑을 줄 모르며, 나물을 무쳐서 먹을 줄 모르는데다가, 열매를 갈무리할 줄 모른다면, 수많은 시사상식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나무를 다룰 줄 모르고, 불을 피울 줄 모르며, 전기가 없을 적에 어떻게 살림을 꾸려야 하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온갖 지식은 어디에 쓸 수 있을까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분은 사람들이 ‘고인 지식’에 갇히지 않기를 바랐다고 느낍니다. 한나 아렌트를 우리가 다시 읽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글쓴이(일본사람)하고 옮긴이(한국사람)는 지구별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이 되어, 생각을 깊이 가꾸고 눈썰미를 너르게 살찌우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꿈꾼다고 느낍니다.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60쪽)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상품처럼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담담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말은, 물건을 다루는 자신도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버려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73쪽)



  골짜기에 가면 더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은 한 겹일 수 있고 여러 겹일 수 있습니다. 고작 나무 몇 그루가 한 겹으로 그늘을 드리워도 더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건물이 만드는 그림자는 그늘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이 있어서 햇볕을 가려 준들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흙이 없고 풀이 없기 때문이에요. 숲에서는 흙이 볕을 빨아들입니다. 숲에서는 나무가 볕을 먹고 짙푸르게 자랍니다. 바람은 풀하고 나무 사이를 흐르면서 싱그러운 기운을 베풉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골짜기를 누릴 수 있다면, 도시에서 한밤에 불볕더위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잠 못 이루는 불볕더위가 생기는 까닭은, ‘흙이 있고 풀하고 나무가 우거진 숲’과 같은 싱그러운 터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햇볕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나 나무가 없으니 복사열이 고스란히 도시 한복판에 갇혀서, 에어컨이나 선풍기로는 도무지 더위를 잠재우지 못합니다.


  발전소를 지어서 전기를 많이 쓸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도시를 에어컨으로 식힐 수 있어야 여름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발전소를 지을 돈으로 도시 한복판에 있는 ‘금싸라기 땅’을 사들여서 너른 숲으로 가꿀 수 있을 때에 도시에서도 즐겁고 시원한 여름을 누립니다.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나 아렌트는 자유 공간을 파괴하고 ‘복수성’을 쇠퇴시키는 사상에 강하게 저항한다 … 일견 ‘자유주의적’으로 보이는 사상에 대해서도 ‘행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공화주의적 정신을 정체시키는 측면은 가차 없이 비판한다. (143쪽)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3쪽)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골짜기를 오가면서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한 대조차 안 다니는 논둑길하고 숲길을 자전거로 다니자면 싱싱 내달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운 어버이가 자전거를 싱싱 달릴 까닭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느긋하게 달릴 만한 자리가 넉넉하다면, 굳이 자가용을 몰아야 하지 않습니다. 버스나 전철도 나쁘지 않지만, 바람을 가르면서 한들한들 달리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할 수 있는 자전거마실은 아이와 어버이 모두한테 기쁘리라 느껴요.


  어쩌면 꿈 같을는지 모르나, 버스전용차선이 아닌 ‘자전거만 달릴 수 있는 찻길’이 도시 한복판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는 그만큼 훨씬 줄어야겠지요? 골목길에는 자동차를 세울(주차) 수 없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골목에서도 마음껏 놀 수 있고, 어른들은 골목에 평상을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삶을 누릴 만하겠지요.



한나 아렌트는 ‘관객 = 관찰자’가 지금 ‘행위’하는 사람들보다 사태를 ‘공평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연극의 메타포를 통해 설명한다. 연극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과 일체화되어 있는 배우는 이야기의 흐름을 자기 역할의 입장에서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지 않고 연극 전체를 바깥쪽에서 보기 때문에 이야기의 맥락 전체를 조망하면서 극 속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을 비역할적으로, 즉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다. (237쪽)


‘현장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풍조가 강해진다면 (그 문제에 관련하여 무척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하여) 방관자는 발언할 자격도 없다는 말이 된다. 이래서야 ‘정치’의 ‘복수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240쪽)



  문화나 복지는 꼭 돈을 들여야 이룰 수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삶으로 가는 길은 돈이 많아야만 즐긴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를 왜 다시 읽어야 할까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지식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를 다시 읽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너와 내가 서로 아끼고 보듬을 줄 아는 ‘사랑’을 가꾸는 길에 이바지할 수 있는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정치철학’이라고 하는 틀거리로 마련해서 책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골짜기에 언제 가요?” 하고 묻습니다. 낮 한 시 반에 자전거 타고 가기로 했는데, 그만 두 시가 넘습니다. 아이들한테 미안합니다. 얼른 가자고 하면서, 아이들더러 갈아입을 옷을 스스로 챙기도록 합니다.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마저 읽고 덮습니다. 오늘은 골짝마실을 가면서 다른 책 한 권을 챙기려 합니다. 이 깊고 고즈넉한 시골자락에서 살면서 나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꿈을 키우는 보금자리에서 길동무가 될 어여쁜 책 하나를 가방에 꾸리려 합니다. 골짜기에 닿으면 먼저 삼십 분 동안 아이들하고 물놀이를 즐긴 뒤, 삼십 분 동안 조용히 책을 읽고, 다시 삼십 분 동안 물놀이를 즐기고는 집으로 돌아와야지요. 4348.7.1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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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방명록 - 니체, 헤세, 바그너, 그리고...
노시내 지음 / 마티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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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4



스위스에서 꿈을 꽃피우는 사람들

― 스위스 방명록

 노시내 글·사진

 마티 펴냄, 2015.7.1. 16500원



  유자나무에는 유자꽃이 하얗게 핍니다. 작고 하얀 유자꽃이 지면 굵고 누르스름한 유자알이 천천히 맺힙니다. 모과나무에는 모과꽃이 발그스름하게 핍니다. 작고 발그스름한 모과꽃이 지면 굵고 단단하며 푸르스름한 모과알이 천천히 맺습니다.


 먼저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꽃이 먼저 곱게 피어 맑은 내음을 두루 나누어 주고 나서야 열매를 맺습니다. 꽃이 없는 열매는 없습니다.


  포도나무에는 포도꽃이 피고, 귤나무에는 귤꽃이 핍니다.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배나무에는 배꽃이 핍니다. 앵두알처럼 작은 열매는 꽃이 진 뒤 한 달쯤 뒤면 무르익고, 모과나 감처럼 굵은 열매는 꽃이 진 뒤 서너 달이 흘러야 비로소 무르익습니다.


  집집마다 나무를 손수 심어서 기르고 돌보던 지난날에는 꽃하고 열매를 누구나 알았을 텐데, 나무를 심을 만한 마당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오늘날에는 꽃하고 열매를 함께 헤아리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 험한 자연을 뚫고 철도를 놓겠다는 비전은 얼마나 대담한가. 그리고 위정자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 노동자들, 특히 19세기 말 스위스의 부족한 건설 노동력을 메우며 각 터널과 철도 공사장에서 맹활약한 이탈리아 이주노동자들의 고생이란 얼마나 극심했으며,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까. (23쪽)


최악의 경우 나치독일이 스위스를 강점하고 미그로의 재산을 몰수하게 되면, 자기 한 사람이 소유한 재산보다는 수십만 조합원이 조금씩 나눠 가진 재산을 빼앗기가 훨씬 더 어려우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바꿔 말해 미그로의 조합 전환은 나치독일의 스위스 위협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창립자가 고안해낸 업체 생존전략이었다. (64쪽)



  노시내 님이 쓴 《스위스 방명록》(마티,2015)을 읽습니다. ‘방명록’은 어느 곳을 찾아가거나 어떤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이름을 남기는 꾸러미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스위스 방명록”이라고 한다면, 스위스라고 하는 나라에서 눈부시게 꽃을 피웠다고 할 만한 사람들을 다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라는 나라에서 삶을 눈부시게 꽃피운 사람들이 남긴 열매를 오늘날에 이르러 두루 누리는 이야기를 함께 헤아리는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베른 주민들이 내는 지방세가 파울 클레 센터를 지탱하고 있었던 거다. 관광객 유치도 중요하지만, 지역민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시설을 애용하는 것이 재정 문제 해결의 열쇠인데 많은 이들이 파울 클레 센터를 ‘클레’라는 한 가지 테마만 취급하는 곳, 따라서 한 번 가 봤으면 그만인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97쪽)


긴 세월 내내 헤세는 문제의 1914년 호소문에서 스스로 역설한 것처럼 어느 한 이념이나 사상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판단을 흐리는 일을 경계했으며, 그래서 때때로 양편의 비판을 한꺼번에 받는 일을 초래하면서도 지식인의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126쪽)




  노시내 님이 《스위스 방명록》이라는 책에서 다루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사람은 ‘스위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있고,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스위스를 삶터나 일터나 사랑터나 꿈터로 삼은 사람들 이야기를 담습니다.


  ‘고향’은 대수로울 수 있으나 안 대수로울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기에 서울을 잘 알거나 사랑하지 않고, 서울에서 안 태어났기에 서울을 잘 모르거나 안 사랑하지 않습니다. 스위스에서 나고 자랐어도 다른 나라로 가서 삶을 꽃피울 수 있고, 러시아나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랐어도 스위스로 가서 삶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삶을 꽃피우든 다 아름답습니다. 삶을 꽃피우려고 온힘을 쏟아서 하루하루 기쁘게 땀흘리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니체, 두트바일러, 슈타이너, 클레, 헤세, 뷔히너, 레닌, 에밀리, 슈피리, 바그너 같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눈길과 눈빛으로 스위스를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이녁 꿈을 펼칩니다. 눈부신 멧자락과 들을 보면서 꿈을 펼치기도 하고, 갑갑하거나 답답한 굴레를 깨려고 용쓰면서 꿈을 짓기도 합니다.



피곤함은커녕 머리가 맑고 기운이 났다. 목에 걸고 다닐 증명서 따위는 필요없었다. 산을 걷는 동안 망막에 박혀 그날 밤 꿈에서 또렷이 재현된 웅장한 경치, 그리고 옅은 대기가 자극하던 강렬한 오감의 기억은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나와 함께 땅에 묻힐” 터다. (184쪽)


뷔히너가 이장될 당시 무렵 바로 뒤에 보리수가 한 그루 있었다. 150살을 훌쩍 넘긴 탐스러운 이 나무는 안타깝게도 2012년 폭풍에 꺾여 넘어졌다. 취리히 시는 2013년 뷔히너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일 아침 같은 자리에 어린 보리수를 심었다. (223∼224쪽)




  감 한 알을 얻기까지 숱한 풋감이 떨어집니다. 풋감으로 굵기 앞서 숱한 감꽃이 떨어집니다. 매화나무도 매화알(매실)을 맺기까지 숱한 매화꽃을 떨구고, 조그마한 풋알을 수없이 떨굽니다. 때로는 가지가 꺾이거나 부러집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 가지가 꺾이고, 거위벌레가 잎을 갉아먹다가 가지가 잘려서 툭 떨어집니다. 나비나 나방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다가 가지가 끊어지기도 합니다. 하늘소가 나무 속을 파고들면서 나무가 힘을 잃기도 하고, 외려 더 힘을 내기도 합니다.


  가게에서 열매만 사다가 먹을 적에는 열매 맛만 알 수 있습니다. 열매 한 알을 얻기까지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알뜰히 열매 한 알을 나뭇가지에 붙잡고서 돌보았는가 하는 대목을 알기 어렵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 적에도 열매를 떨구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무입니다. 햇볕이 내리쬘 적에 햇볕을 듬뿍 먹고, 멧새가 찾아와서 노래할 적에 멧새 노랫소리를 고요히 듣는 나무입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듣고, 어른들이 농약을 치는 냄새를 맡는 나무입니다.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짙푸른 들을 아우르는 나무입니다.


  열매 한 알에는 나무 한 그루가 살아온 숨결이 깃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위스라는 나라에서 저마다 꽃피우면서 아름답게 열매를 맺은 사람들 발자국마다 넓고 깊은 숨결이 깃듭니다. 이런 책이 있고 저런 노래가 있기 앞서, 이런 웃음과 저런 눈물이 있습니다. 이런 기념관과 저런 추모사업으로 기리기 앞서, 이런 땀방울과 저런 주름살이 있습니다.



레닌은 스위스의 꼼꼼하고 정확한 문화를 좋아했다. 특히 어딜 가나 글을 읽고 쓰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레닌에게 스위스의 도서관이 제공하는 공간과 도서대여 시스템은 편리한 자원이었다. (291쪽)


1971년 2월 7일,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 더욱 흥미롭고 역설적인 사실은 스위스가 유럽 다른 곳에 비해 여성에게 일찌감치 대학 교육의 문을 연 진취적인 곳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305, 307쪽)




  스위스는 어떤 나라일까요? 스위스는 스위스입니다. 페터 빅셀 님이 “스위스인의 스위스”라는 글을 쓰기도 했듯이, 스위스는 스위스입니다. 스위스는 러시아가 아니고, 스위스는 이탈리아가 아니며, 스위스는 프랑스가 아닙니다. 러시아도 스위스가 아닌 러시아이며, 이탈리아도 스위스가 아닌 이탈리아요, 프랑스도 스위스가 아닌 프랑스입니다.


  그러나 모든 스위스사람이 똑같지 않습니다. 모든 스위스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똑같지요. 모두 밥을 먹고, 누구나 똥을 눕니다. 모두 숨을 쉬고, 누구나 잠을 잡니다. 그러니 시골에서 흙을 부치는 사람이 어느 나라에나 똑같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 일꾼이 많다고 해서 ‘전원국가’나 ‘농업국가’이지 않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이런저런 것이 발돋움했다고 해서 시골일을 안 해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골이 없이는 삶을 버틸 수 없습니다.


  《스위스 방명록》이라는 책에서 첫머리부터 다루는 ‘철도 노동자’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깎아지를 듯이 가파른 멧자락 사이에 다리를 놓고 기나긴 구멍을 뚫어서 철길을 놓은 노동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같은 스위스는 없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71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참정권을 받아들인 스위스라는데, 스위스에서도 집일이나 밥짓기는 여성이 으레 도맡았을 테지요. 역사책이나 문학책에 이름 한 줄 안 실릴 터이나, 집에서 빵을 굽고 옷을 빨며 아이를 돌보던 수많은 어머니(여성)가 없이는 어떤 문화도 정치도 경제도 예술도 꽃피울 수 없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스위스는 유럽에서도 상대적으로 아직 가난한 편에 속했고 산업화와 근대화에 집중하던 스위스 엘리트들은 전근대적이고 촌스러운 ‘전원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던 중이었으니 기존의 인상을 강화하는 작품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390쪽)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명록’이 있는 줄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면서 우쭐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명록’은 거들떠보지 않고 제 한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갖 사람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고장을 이루며, 나라를 이룹니다. 수많은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림을 북돋우고, 사랑을 살찌우며, 꿈을 펼칩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스위스에서 꿈을 꽃피웠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모레도 스위스에서 꿈을 꽃피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작은 나라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꽃피울 만할까요. 이 작은 나라는 꿈을 꽃피울 만큼 아름다운 나라일까요, 아니면 이 작은 나라는 꿈을 꽃피우기에 너무 작거나 갑갑한 터전일까요. 아름다운 나라이든 갑갑한 터전이든, 가슴속에 꿈씨를 한 톨 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7.13.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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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한국어 품사 교양서 시리즈 1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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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6



말맛, 삶맛, 사랑맛, 이야기맛

― 동사의 맛

 김정선 글

 유유 펴냄, 2015.4.4.



  지구별에 있는 모든 다른 나라와 겨레는 다른 말맛을 누립니다. 한국말에는 한국말다운 맛이 있고, 영어에는 영어다운 맛이 있으며, 중국말에는 중국말다운 맛이 있습니다. 더 나은 말맛이 없고, 덜떨어지는 말맛이 없습니다. 다 다르면서 저마다 새로운 말맛입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을 놓고 볼 적에도, 전라말이 경상말보다 낫지 않고, 강원말이 평안말보다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서울말이든 경기말이든 저마다 다르면서 사랑스러운 말맛을 풍깁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190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말맛이 크게 뒤흔들렸습니다. 아스라한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던 사람이 스스로 숲에서 길어올린 말이 잊혀지면서, 이웃 여러 나라에서 총칼을 거머쥐고 밀려드는 말에 짓눌리거나 짓밟혔어요. 다른 문명하고 문화를 만난 지난 백 해 사이에 한국말은 쉴새없이 흔들리고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고 다치면서 달라집니다.



바늘과 실이 있다. 실을 바늘귀에 꿰고 옷감을 꿰맨다. 굵고 큰 바늘에 굵은 실을 꿰고 두꺼운 헝겊을 맞댄 뒤 이불 홑청을 호듯 듬성듬성 꿰매기도 하고, 가늘고 작은 바늘에 가는 실을 꿰고 바짓단을 접은 뒤 바늘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꿰매기도 한다. (감치다/깁다, 36쪽)


남자는 거미줄을 걷고 여자는 치마를 걷어지른 채 낡고 삭은 발을 걷어들겠지. (거두다/걷다, 42쪽)



  김정선 님이 쓴 《동사의 맛》(유유,2015)을 읽습니다.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자면 ‘동사 맛’일 텐데, 이 책을 쓴 분은 ‘-의’를 사이에 넣습니다. 일본 영화를 ‘녹차의 맛’으로 옮기듯, ‘-의’를 넣어야 말맛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로구나 싶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바나나 맛 우유’나 ‘딸기 맛 우유’처럼, 한국사람은 어떤 맛을 가리킬 적에 ‘-의’ 없이 말합니다. ‘말맛’도 그냥 말맛입니다. ‘밥맛’도 그저 밥맛입니다. 술맛은 술맛이요 차맛은 차맛입니다. 바람맛은 바람맛이며 물맛은 물맛입니다.


  다만, “동사 맛”으로만 적어야 한국말 맛을 살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한국말에 영어를 섞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말에 중국 한자말을 섞고, 어떤 사람은 한국말에 일본 한자말을 섞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자를 드러내어 글을 쓰고 싶고, 어떤 사람은 알파벳을 훤히 드러내며 글을 쓰려 합니다. 저마다 스스로 “내 말맛”을 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루 종일 사전을 뒤적이다 집에 돌아오면 머릿속에 이런저런 낱말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지기 일쑤다. 눈도 아프고 몸도 무거울 때면 정말이지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다. 잠을 청하기 위해 소주를 홀짝이다가 소주병이며 안주 나부랭이가 널브러진 방 안에 너부러진 채로 잠이 들 때도 있으니까. (너부러지다/널브러지다, 85쪽)


사전을 보면 모든 낱말이 분명한 제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낱말에 기대고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이도 저도 아니다. 낱말들이 서로를 눌러보고 눌러들어 주지 않는다면 어떤 낱말도 제 뜻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눌러듣다/눌러보다, 97쪽)



  옛날 사람이라면 “과학을 가리키다”처럼 말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오늘날 사람이라면 “과학을 가리키다”처럼 말해도 “과학을 ‘가르치다’”인 줄 압니다.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가운데 ‘가르치다’하고 ‘가리키다’를 옳게 가누지 못하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아이들은 ‘잘 배웁’니다.


  어느 모로 보면 ‘틀린’ 말이라 할 테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다면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다고도 할 만합니다. 나이 먹은 어른이 이녁 어머니를 ‘엄마’라 하든, 어른들이 서로 “‘까까’ 먹자.”라 말하든, 저마다 제 삶에 걸맞게 제 말맛을 찾으려고 낱말을 고른다고 할 만합니다. “‘너무’ 예뻐”가 말이 안 된다는 얘기는 말법으로만 하는 얘기가 되는 오늘날입니다. 1970년대나 1980년대까지 “너무 예뻐” 같은 말을 거의 안 쓰거나 아예 안 썼다고 하더라도, 2010년대인 오늘날 “너무 예뻐”라는 말이 두루 퍼졌으면, 이러한 말투가 오늘날 말투가 되면서, 새로운 말맛이 될 만합니다.


  달라지는 사회에서는 달라지는 말이고, 흐르는 사회에서는 흐르는 말입니다. 옳거나 그른 얘기가 아니고, 맞거나 틀린 얘기가 아닙니다. 달라지는 말맛이요, 흐르는 말맛입니다.



낱말의 뜻을 살피면 그다지 헷갈릴 일도 없다. ‘뒤쳐지다’는 ‘뒤치다’에서 왔고, ‘뒤처지다’는 ‘처지다’에서 왔다. 그러니 물건이 뒤집혀서 젖혀질 때는 ‘뒤쳐지다’라고 쓰고, 자꾸 뒤로 처질 때는 ‘뒤처지다’라고 써야 한다. (107쪽)


‘불리다’가 당하는 말이니 ‘불려지다’라거나 ‘불리우다’라고 쓰는 건 어법에 맞지 않다. 심지어 ‘불리워지다’라고 쓰기도 하는데, 기본형인 ‘부르다’ 어디에도 ㅂ받침이나 ‘ㅜ’가 없으니 ‘워’를 집어넣을 이유가 없다. (131쪽)



  《동사의 맛》이라는 책은 한국말에서 ‘동사’ 한 가지를 놓고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동사 이야기는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모두 스스로 깨달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 다루는 동사 이야기를 스스로 한국말사전을 뒤지면서 스스로 배우려고 하는 한국사람이 몹시 적어요. 수많은 책을 읽고, 날마다 신문을 읽으며, 온갖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살피더라도, 막상 ‘내가 여느 자리에서 흔히 쓰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낱낱이 살피거나 가리거나 헤아리는 사람은 대단히 드뭅니다.


  이를테면 ‘먹다·하다·있다·쓰다·보다’ 같은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즐겁다·기쁘다·흐뭇하다·좋다·넉넉하다’ 같은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달리다·뛰다’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예쁘다·곱다·아름답다·아리땁다’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서, 저마다 어떻게 달리 쓰는 낱말인가를 스스로 배우려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한국말사전을 뒤적인다고 해서 한국말을 잘 배울 수 있는지는 좀 아리송합니다. ‘불쌍하다·가엾다·애처롭다’ 같은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살피면, 돌림풀이로 오락가락할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한국말사전은 거의 ‘한자말 풀이 사전’ 구실을 한다고 할 만합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이 즐겁고 아름답게 잘 살려서 쓰도록 북돋우는 구실보다는, 한국사람이 안 쓰는 낯선 온갖 한자말을 집어넣어서 한자백과사전처럼 보이는 구실을 한달 수 있습니다.



새벽녘에 혼자 깨 보니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란다. 친구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나가 보니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고. 도시에서 비를 만날 때하고는 달라 여자는 잠깐 멍했단다. 뭐랄까, 좀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편안하기도 했달까. (166∼167쪽)


이런 예는 ‘깨치다’와 ‘깨우치다’에서도 볼 수 있다. ‘깨치다’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고, ‘깨우치다’는 누군가를 깨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223쪽)



  《동사의 맛》은 이야기책입니다. 한국말 몇 가지를 바탕으로 삼아서 아기자기하게 지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한국말 가운데 동사 몇 가지를 알맞게 엮어서, 이 낱말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는 책입니다.


  ‘동사’는 ‘움직씨’입니다. 움직씨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낱말입니다. 움직임이란 흐름이요 몸짓입니다. 몸으로 짓는 삶을 움직씨라는 낱말을 빌어서 나타냅니다. 사람이 스스로 몸으로 짓는 삶이 움직씨에 담기고, 사람을 둘러싼 숲에서 흐르는 온갖 움직임과 흐름이 움직씨에 깃듭니다.


  바람이 붑니다. 햇볕이 내리쪼입니다. 물이 흐릅니다. 아이가 웃습니다. 어버이가 노래합니다. 네가 찾아옵니다. 내가 찾아갑니다. 서로 만납니다. 기쁘게 어깨를 겯습니다. 팔짱을 끼고 걷다가, 땀이 나도록 달립니다. 고갯마루에 오르면서 땀을 훔칩니다. 느긋하게 쉬면서 구름을 바라봅니다. 어느덧 해가 떨어지면 숲에서 별빛을 헤아리며 고요히 잠듭니다.


  움직임하고 흐름을 담는 ‘움직씨(동사)’라고 하는 말마디는, 우리가 몸을 써서 짓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건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꽃이랑 풀이랑 나무랑 벌레랑 새랑 물고기랑 다 같이 어우러지는 숲에서, 이 지구별에서, 서로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어떤 사랑을 빚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말맛을 알기에 삶맛을 느끼고, 삶맛을 느끼면서 사랑맛을 깨달으며, 사랑맛을 깨닫는 사이 시나브로 이야기맛을 누리는 어여쁜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4348.7.4.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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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 신비롭고 위험한 Nature & Culture 5
피터 애디 지음, 임지원 옮김 / 반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192



바람맛 싱그러운 숲이 있어야 할 도시

― 공기, 신비롭고 위험한

 피터 에디 글

 임지원 옮김

 반니 펴냄, 2015.5.26.



  아침에 풀을 뜯습니다.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 사이에 풀이 제법 우거졌기에, 처음에는 낫을 써서 베다가, 이내 손을 써서 뽑습니다. 호미로 땅을 톡톡 쪼면서 풀을 뽑을 수도 있는데, 손만 써서 풀을 뽑으면 손가락이랑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새삼스럽습니다. 풀내음이 두 손 가득 깃들고, 흙내음도 온몸으로 스밉니다.


  실장갑을 끼고 흙일을 해도 두 손은 흙투성이가 됩니다. 맨손으로 흙일을 해도 흙투성이가 되기는 똑같습니다. 실장갑을 끼고 낫질을 하면, 손에 힘이 빠질 무렵 그만 낫을 잘못 놀려 손가락을 쿡 찍을 적에 덜 다칩니다. 그러나 맨손에 닿는 풀하고 흙이 반갑기에 으레 맨손으로 풀베기를 합니다.


  한참 풀을 베고 나서 아침을 짓습니다. 손이랑 발을 씻고 나서 밥을 짓는데, 손바닥에서 풀물이 안 빠집니다. 밥을 짓다가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풀을 베거나 뽑은 날이면 며칠 동안 손바닥이 까무잡잡합니다. 손등은 햇볕에 타서 까무잡잡하고, 손바닥은 풀물이랑 흙물이 들어서 까무잡잡합니다. 국이 끓을 때까지 손바닥을 한동안 바라보면서 혼자 빙그레 웃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공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실로 공기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다 … 대부분의 고대 사상에서 공기는 인체에 대한 질문을 우주의 작용, 그리고 신의 존재로 확장시킨다. (11, 21쪽)

마레는 이러한 근육의 움직임에 또 다른 힘이 작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공기의 저항이었다. (72쪽)

두바이의 기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 환경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 주도록 공기를 관리하는 기술 덕분이었다. 그러나 두바이 경제에서 석유가 다 떨어지고 나면 이곳은 다시 모래사막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착취당하던 이주노동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방문객 수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223쪽)



  피터 에디 님이 쓴 《공기, 신비롭고 위험한》(반니,2015)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사는 이 지구별에 있는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서양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문학과 철학과 지식에서 바람을 어떻게 바라보거나 다루었는가 하는 대목을 짚습니다. 이러면서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더러워진 바람’이 무엇을 뜻하고, ‘에어컨으로 다스리는 바람’은 무엇을 보여주는가를 이야기해요.


  이 책에서는 ‘공기(空氣)’라는 낱말을 씁니다. ‘공기’는 “지구를 둘러싼 대기의 하층부를 구성하는 무색, 무취의 투명한 기체”를 뜻한다고 합니다. ‘대기(大氣)’는 ‘공기’를 가리키는 다른 한자말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에서는 으레 ‘공기’나 ‘대기’를 쓰지요.


  그러면, 이러한 한자말을 쓰기 앞서 한겨레는 어떤 말을 썼을까요? 이런 말이 이 나라에 들어오기 앞서도 한겨레는 ‘공기’랑 ‘대기’를 늘 느끼거나 마주하며 살았을 테니까요.




뉴욕 시의 대기 변화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난방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증기난방이 축복이었지만, 한편으로 시민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맨해튼의 지하세계는 종종 보수공사로 파헤쳐져 그 모습을 드러냈다. (93쪽)

18세기 파리에서는 숨 쉴 수 없을 지경으로 완전히 오염된 공기가 시민의 생물학적 미래를 위협했고 나라의 존립 자체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 위험할 정도로 해로운 공기가 도시의 거리, 공장, 집들로 모여들었다. 시골이라면 쉽게 환기를 시킬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나쁜 공기가 도시 전체에 갇혀 있어서 사람들 역시 그 공기 안에 갇혀 있는 셈이었다. (104, 111쪽)



  한국말사전에서 ‘바람’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기압의 변화 또는 사람이나 기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이라고 풀이합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라고 풀이해요.


  흔히 “바람이 분다”고 말하지만, 바람은 가만히 있는 일이 없습니다. ‘공기’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물처럼 바람도 언제나 흐릅니다.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천천히 흐르기도 하며, 마치 죽은듯이 고요하게 흐르기도 합니다.


  늘 지내던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거나 먼 고장으로 가면, 사람은 누구나 ‘바람맛’이 달라지는 줄 느낍니다. 물맛이랑 바람맛을 맨 먼저 느껴요. 바람맛이란 무엇일까요? 마을이나 고장이나 나라마다 다 다르게 흐르는 바람이 나누어 주는 맛이요, 이 맛은 ‘공기맛’입니다.


  ‘대기’라고 일컫는 자리는 ‘하늘’입니다. 땅바닥 위쪽은 모두 하늘입니다. 저 먼 곳만 하늘이 아닙니다. 아이 머리 위쪽도 하늘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개미한테는 ‘아이 머리 위쪽’도 높다란 하늘이에요. 제비꽃이나 민들레한테는 ‘지붕 위쪽’도 높디높은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은 곧 하늘이고, 하늘은 곧 바람입니다. 사람이 마시는 숨이란 바람이면서 하늘입니다. 늘 숨을 쉬는 사람은, 늘 바람을 마시고 하늘을 마시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늘숨’을 쉰다고도 말합니다. 지구별을 넓게 느끼지 못할 때에는 ‘숨만 쉰다’고 할 테지만, 지구별을 넓게 느끼는 자리에서는 온 하늘을 헤아리면서 온 바람을 가득 껴안아요.




요한나 슈피리가 쓴 이 유명한 동화 《하이디》는 1880년 처음 출간될 때부터 남부 유럽의 산악지대 풍경과 기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이 동화에 나오는 공기는 논란의 여지없이 ‘좋은’ 것이고 건강과 영혼을 회복시켜 준다 … 회복 치료는 공기와 빛과 고도를 하나로 결합시켰다. 이 세 요소는 빛의 스펙트럼 끝에서 한데 만났다. 여기에서 빛의 스펙트럼이란 다름아닌 파장을 말한다. (132, 135쪽)

2008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운반된 연료의 대략 85퍼센트가 에어컨을 가동시키는 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224쪽)

에어컨은 땀을 흘려 열기를 식히는 우리 몸의 자연적인 온도 조절 기능이나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를 빼앗아버렸다. (240쪽)



  《공기》라는 책에서 《하이디》라는 동화책을 도드라지게 다룹니다. 《하이디》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입니다. 높고 깊은 멧골에서 할아버지하고 둘이 사는 하이디입니다. 도시로 끌려가서 지내야 할 적에 늘 숲을 그리면서 울었고, 숲을 그리면서 울다가 몸져누웠으며,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에 씻은듯이 털고 일어납니다. 하이디하고 동무가 되었던 클라라도 도시를 떠나 하이디가 있는 높고 깊은 멧골로 찾아가니, 이곳에서 아픈 다리가 낫고 튼튼하며 씩씩한 몸이 됩니다.


  《공기》라는 책에서도 말하지만, 숲이 우거진 멧골집은 사람 몸에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니까, 숲이 없는 도시는 사람 몸에 대단히 나쁩니다. 도시는 ‘돈이 넘치거나 많을’는지 모르나, ‘삶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이 없기 마련이에요. 왜 그러한가 하면, 숲이 없는 도시에서는 누구나 골골거리거나 아프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병원을 들락거리거나 약에 기대야 한다면 ‘아픈 몸 생각’에 옭매이면서 삶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도시를 짓더라도 건물만 있는 도시가 아니라 숲이 있는 도시로 지을 노릇입니다. 도시 곳곳이 나무가 우거진 거님길로 이루어지고, 너른 숲이 펼쳐지면서, 건물이나 학교나 아파트 둘레를 아름드리 숲으로 가꾸면, 도시에서 아프거나 힘든 일도 차츰 사라지리라 봅니다. 전기로 수돗물을 끌어들여서 깨끗해 보이는 척하는 냇물이 흐르는 도시가 아니라, 풀과 흙이 어우러진 들과 숲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흐르는 도시여야 합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이 대목은 잘 알 만하리라 생각해요. 중앙정부에서 밀어붙인 4대강사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온 나라 냇물마다 흙바닥을 들어내고 시멘트를 들이부으니 냇물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들과 숲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아니라, 시멘트 둑에 갇혀서 고이는 냇물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요?





프리츠 하버는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사람의 몸에 개입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공기를 치명적인 무기로 바꾸어 놓았다. 공기는 녹색 구름으로 변해 적군을 죽음이나 불구로 몰아넣었다. 이 새로운 무기의 원리는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없애는 것이었다. (175쪽)

전쟁의 역사에서 에어컨으로 냉각된 공기는 고문기술의 일부로 사용되어 전쟁 포로나 반란군, 억류된 죄수에게 자백을 받거나 중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냉방감옥’은 널리 알려진 CIA의 고문기술 중 하나로. (236쪽)



  바람은 한 사람한테만 싱그럽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켜서 화학무기를 쓸 적에는 적군만 화학무기로 죽지 않습니다. 아군도 화학무기를 쐬다가 죽습니다. 하늘에 화학무기를 풀어놓으면, 이 화학무기는 지구별을 두루 돌면서 모든 사람한테 스며들어요.


  핵발전소가 터졌을 적에 핵발전소가 있는 나라만 방사능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련에서 터진 핵발전소는 온 유럽을 뒤덮었습니다. 일본에서 터진 핵발전소는 태평양하고 한국 하늘까지 덮었습니다.


  한국에 잔뜩 있는 공장은 매연을 한국 하늘뿐 아니라 일본 하늘하고 태평양 하늘에 퍼뜨립니다. 중국에 어마어마하게 있는 공장은 매연을 중국 하늘뿐 아니라 한국 하늘하고 일본 하늘에까지 퍼뜨려요.


  바람이 흘러서 지구별을 돕니다. 한국에서 마시는 바람은 ‘한국 것’이 아닙니다. ‘지구별 모든 사람 것’입니다. 브라질 깊은 숲에서 태어난 바람이 한국으로 오고, 서울 한복판에 가득한 배기가스가 흘러서 아르헨티나로 갑니다. 슬픈 바람이 이 나라와 저 나라를 스칩니다. 기쁜 바람이 이 고을과 저 고을을 어루만집니다.


  《공기》라고 하는 책은 ‘지구별 한집살이’에서 밑바탕이 되는 ‘바람’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면서 깨닫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람을 마셔야 살고, 바람을 마시지 못하면 죽습니다. 하늘이 맑은 곳에서 삶을 짓고, 하늘이 흐리거나 매캐한 곳에서는 삶을 지을 기운을 잃습니다. 4348.6.30.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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