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스커넥트 -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터넷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로버트 맥체스니 지음, 전규찬 옮김 / 삼천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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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4



정치권력은 민주와 평화를 안 바란다

― 디지털 디스커넥트

 로버트 W.맥체스니 글

 전규찬 옮김

 삼천리 펴냄, 2014.12.12.



  홀가분하게 앞을 바라보다가 문득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두 발을 하늘로 뻗으면 가볍게 물구나무서기가 됩니다. 이때에는 벽에 두 발이 닿지 않아도 몸이 가만히 선 채 무척 느긋하게 두 팔로 땅을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바닥을 살피다가 영차 하고 힘을 주면 물구나무서기가 안 되거나 두 발이 벽에 쿵 소리를 내면서 닿아요.


  물구나무서기를 할 적마다 느끼는데, 힘으로 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힘으로 하려 하면 힘이 들어요. 힘을 굳이 주지도 빼지도 않으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아늑하고 느긋하면서 재미있습니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놀이입니다.


  셈틀을 켜서 인터넷을 열 적에도 늘 같아요. 홀가분하게 인터넷을 누비면 내 마음 그대로 즐겁게 여러 가지를 누립니다.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셈틀을 켜서 이것저것 하려고 들면 여러모로 골이 아프기도 하고, 막상 하려던 일도 엉키거나 힘이 들기 일쑤입니다.



.. 학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조사하고 탐색할 때,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국가에서조차 상층부를 차지한 채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특권에 도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 사항이다. 구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이런 상황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 미국에서 진짜 권력은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한 자들에게 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경제학은 기업이 비용보다 더 큰 수익을 창출하는 한도 안에서만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기업들은 경쟁 업체와 차별화된 것으로 인식될 브랜드를 창조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광고는 상표에 일종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 상표에 내재하는 제품의 차별성은 거의 피상적인 수준에 그칠 뿐이며, 효용성과는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 ..  (48, 69, 88, 89쪽)



  시골에는 사람이 적습니다. 시골에는 젊은이가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참으로 적습니다. 사람도 적고, 젊은이도 적으며, 어린이와 푸름이도 참으로 적은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는 사람이 대단히 드뭅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은 있으나, 셈틀을 놓아 인터넷을 살피는 사람도 퍽 드뭅니다. 시골마을 할매나 할배는 텔레비전에 기대어 ‘새로운 정보’를 얻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보가 아니라면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면, 군청이나 면사무소 공무원이 알려주는 정보를 듣습니다. 이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시에는 젊은이도 매우 많습니다. 도시에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참으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신문 읽는 사람도 많으며, 아침마다 거저로 나눠 주는 신문도 많고, 텔레비전뿐 아니라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살피는 사람도 몹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정보를 얻는 길이 참으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온갖 정보가 넘치고 또 넘치며 자꾸 넘칩니다. 도시에는 극장도 많고 문화시설도 많습니다. 도시에는 찻집이나 옷집이나 온갖 가게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도시에서는 ‘알아야 할 것’투성이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며 둘레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을 일이 없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볼 일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이웃집에 들러서 텔레비전을 함께 들여다보노라면, 참말 볼거리가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이바지할 만한 이야기는 어느 한 가지조차 없다고 할 만한 텔레비전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이웃은 무엇을 그리 많이 알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사건과 사고를 왜 그리 많이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와 예술과 과학을 왜 그리 많이 헤아리면서 갖가지 ‘새 정보’를 날마다 머릿속에 넣으면서 ‘어제 정보’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하루가 지나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 정보라면, 처음부터 쓰레기통에 넣을 정보이지 싶습니다. 몇 시간쯤 지나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소식이나 기사나 이야기라면, 이런 소식이나 기사나 이야기는 처음부터 만들지도 퍼뜨리지도 읽지도 않아야 홀가분한 노릇이지 싶습니다.



.. 기업체들이 경쟁사로부터 자사의 제품을 차별화하기 위해 더 많은 광고를 하면 할수록 미디어와 문화에는 더 많은 상업적 ‘정보 혼란’ 상태가 야기된다 … 정치경제의 기본 내용들에 관해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은 사실상 뜻을 같이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공적인 토론이나 논쟁의 테이블 위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다. 맥퍼슨의 견해에 따르면, 양당 시스템은 특히 경제 스펙트럼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민의 무관심과 탈정치화를 조장하고 엘리트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아주 이상적이다 … 지금도 소수의 대형 업체들이 영화 제작과 네트워크 텔레비전, 케이블 텔레비전 시스템과 채널, 출판, 음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 생산자 주권이 소비자 주권을 대신하게 된다. 미디어 기업들은 이제 자신들이 무엇을 제작하고 무엇을 제작하지 않을지에 관해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된다 ..  (90, 117, 137쪽)



  로버트 W.맥체스니 님이 쓴 《디지털 디스커넥트》(삼천리,2014)를 읽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좀먹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인터넷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어떻게 갉아먹거나 무너뜨리려 하는가를 알려주려는 책입니다.


  마음 착한 사람이 인터넷을 다루면, 인터넷으로 사랑과 평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마음 궂은 사람이 인터넷을 다루면, 인터넷으로 전쟁과 차별과 독점을 이룬다고 합니다.


  깊이 헤아리지 않아도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돈만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을 거머쥔다면, 오직 돈굴리기에 매달릴 테지요. 권력만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오로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더 세게 움켜쥐려고 할 테지요.


  《디지털 디스커넥트》는 ‘미국’ 이야기를 다루는데, 미국에 있는 회사 이름을 한국에 있는 회사 이름으로 바꾸면,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는 ‘한국’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아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있는듯이 보이는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 실제에서는 결국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게 그들이 이후에 원하게 되는 바를 중요하게 결정한다 … 오늘날 미국의 초등교육은 사실상 상업주의 가치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 대다수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던 상표를 주로 이용하며, 어린이들 또한 부모들의 구매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 이익에 굶주린 몇몇 발행인들은 황색 저널리즘이라 이름 붙여질 선정주의가 돈 되는 길이라는 점을 곧 깨닫는다 … 오늘날 미국에는 민주적 지배 구조에 관한 이해할 만한 수준의 냉소주의가 팽배하다. 권력을 가진 상업적 이해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희망을 포기해 버린 탓이다 … 독점 방송 면허권과 저작권 연장, 세금 보조 같은 특혜가 항상 베풀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140, 141, 155, 165쪽)



  한국이라는 나라에 민주가 있을까요?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한테 있을까요? 투표하는 민주 제도는 있으나, 이 다음으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지켜보는 민주 제도는 있을까요? 평화로 나아가도록 북돋우는 민주 제도가 한국에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군대와 경찰이 맡는 몫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요? 전쟁무기와 군대와 경찰이 ‘지키는’ 자리는 정치권력자와 경제권력자 울타리일 뿐 아닌지요? 우리는 우리 주머니를 털어서 권력자 울타리를 지키는 허수아비나 꼭둑각시 노릇만 하지 않나요?


  사회에서도 민주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이요, 학교에서도 민주를 찾아내기 어려운 한국입니다. 초등학교이든 중·고등학교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는 입시교육만 있습니다. 입시교육에 따라 아이들을 줄세우고, 똑같은 제복(죄수 옷차림)을 비싼 값을 치러서 입도록 내몰면서 ‘다 다른 모든 아이’들을 ‘다 같은 종(노예)’이 되도록 길들입니다.


  아이들은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집에서는 어버이가 집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버느라 바빠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어른들이 입시지도만 하느라 아이들한테 삶을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저 시험공부만 합니다. 아이들은 동네나 마을에서도 아무런 삶을 보거나 배우거나 익히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저 물질문명과 소비사회만 바라보고 이런 흐름에 젖어듭니다.



.. 정부 규제의 핵심은 한마디로 기업이 기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 주는 게 되어 버렸다. 이게 바로 새로운 공익 개념이다 … 규제가 더욱 줄어든 상태에서, 더 적은 수의 거대기업들만 살아남게 된다 … 미디어 기업들이 지난 15년 동안 사실상 인터넷의 개방성과 평등성을 제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시스템을 최대한 폐쇄하고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이나 국가가 인터넷 이용자들을 은밀하게 모니터링하도록 하며 … 1970년대 베트남전쟁 직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이 군산복합 시스템은 그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았다. 군사와 안보 예산 지출이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경제의 상당하고 지속적인 일부로서 자리잡아 왔다 ..  (192, 197, 219, 278쪽)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신문도 방송도 볼 일이 없습니다. 더 헤아린다면, 시골에서는 인터넷도 할 일이 없습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시골에서는 전화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그저 시골살이만 하면 넉넉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시골에서는 왜 신문도 방송도 학교도 인터넷도, 여기에 전화도 책도 부질없을까요? 시골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삶’을 이루는 얼거리가 어떠한 줄 몸과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를 깨닫자면 겉치레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리려면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남들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 ‘모난 돌’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을 털어야 합니다.


  나는 너하고 다릅니다. 나는 너하고 다르기에 나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너는 너입니다. 내가 너와 똑같은 차림새로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네가 나와 똑같은 몸짓이나 얼굴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도 너와 내가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호미질도 낫질도 삽질도 괭이질도 저마다 다르게 제 보금자리 밭을 일구는 몸짓으로 하면 됩니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 밥을 빨리 먹어치워야 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니를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이에 맞추어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시집장가를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죽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지으며 살 사람입니다.



.. 미국식 선거라는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생각해 보자. 대통령 선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거에서 지역 선거는 뉴스로 잘 보도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무의미한 것들, 종종 TV 광고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선거 뉴스가 된다. 홍보 전략에 대한 평가나 후보자의 말실수, 여론조사 따위가 선거 뉴스를 이룬다 …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뉴스에 파묻혀 산다. 그러나 이런 뉴스의 상당수는 기업과 정부가 은밀히 생성하여 기자에 의해 전혀 걸러지지 않은 홍보성 기사들이다 … 미국은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나라가 아니라 점점 발전도상국을 빼닮아 가고 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거의 모두 사유화하거나 아웃소싱시켜 버리는 그런 나라이다 ..  (316∼317, 318, 389쪽)



  《디지털 디스커넥트》는 “지금대로 내버려진 채 자본의 필요에 따라 계속 달리게 한다면, 인터넷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놀랍도록 위배한 채 좋은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400쪽).”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책을 맺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스스로 삶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려 합니다. 자본주의 노예가 되어 내 삶을 잊으려 하겠는지, 내 삶을 손수 짓는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거듭나려 하겠는지, 어느 길로 가든 내 몫이니,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우리 삶은 자유로울 때에 자유입니다. 우리 삶은 평화로울 때에 평화입니다. 우리 삶은 민주로 이루어질 때에 민주입니다. 자유도 평화도 민주도 남이 우리한테 선물로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일구고 보듬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고 손질할 때에 비로소 모든 자유와 평화와 민주를 기쁘게 누립니다.


  손수 짓는 삶일 때에 자유와 민주와 평화입니다. 정치권력이 우리한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학교교육이 우리한테 민주를 주지 않습니다. 전쟁무기가 우리한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어깨동무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삶을 가꿀 때에, 비로소 자유와 민주와 평화가 내 보금자리에서 깨어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신문을 읽든 텔레비전을 켜든 인터넷을 열든, 나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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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 - 미술 치료사 정은혜의 공감 노트
정은혜 지음 / 샨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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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0



즐거움과 두려움은 늘 함께

―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

 정은혜 글

 샨티 펴냄, 2015.1.30.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내 팔과 다리가 거꾸로 섭니다. 그런데, 물구나무를 서서 가만히 있다 보면, 거꾸로 서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하고 다시금 돌아보곤 합니다. 거꾸로란 무엇일까요. 어떤 모습이 거꾸로일까요. 두 다리로 땅을 디디면 ‘바로’이고, 두 팔로 땅을 디디면 ‘거꾸로’일까요. 동그란 모습인 지구별에서 북녘과 남녘은 서로 어떤 자리가 되고, 어느 쪽이 ‘바로’이고 어느 곳이 ‘거꾸로’일까요. 지구별 바깥쪽과 안쪽은 서로 어떤 터전일까요.


  몸이 무거울 적에는 물구나무를 서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무겁다면, 몇 킬로그램쯤 되어야 무거운 셈일까 궁금합니다. 무겁다와 가볍다를 가를 만한 잣대나 틀이 있을까요. 키가 몇 센티미터에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면 무겁거나 가벼울까요.


  힘이 있으면 물구나무서기를 잘 할는지 궁금합니다. 힘이 없으면 물구나무서기를 못 할는지 궁금합니다. 힘이 있거나 없다는 잣대는 어떤 크기로 따질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느 만큼 힘이 있으면 힘이 ‘있’거나 ‘없’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못 할’까요.



.. 이러한 일들을 계속 겪으니 짜증이 났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이것이 왜 그 사람들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없고 가족 없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정신병이 있어서 사회의 언저리에서 멍하게 삶을 보내는 그들이 그렇게나마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미국의 쓰레기 같은 낮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홍콩 무술 영화 비디오를 보고 또 보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아닌가 …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이 말을 열심히 텔레파시로 보내니 그것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그녀의 입술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내가 따라서 살짝 웃으니 그녀도 살짝 웃는다 ..  (31, 50쪽)



  밥을 잘 짓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잘 지으면 됩니다. 밥을 못 짓는 길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못 지으면 됩니다. 잘 지으려고 하면 잘 지을 수 있지만, 못 지으려고 하면 못 지을 수 있습니다. 불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밥을 못 짓고, 물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밥을 못 짓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국을 끓일 적에도 이와 같아요. 간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국맛이 떨어지고, 간을 살짝 잘 맞추어도 국맛이 나아져요.


  그러니까, 언제나 내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너그럽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너그럽습니다. 내 마음이 괴롭거나 고단하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괴롭거나 고단합니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해요. 내 마음이 미움이나 시샘으로 넘친다면, 내 입에서 흐르는 말은 으레 미움이나 시샘이기 마련입니다.



.. 정상인이든 정신병자이든 “당신은 미쳤소. 그러니 당신 이야기도 다 미친 거요.”라고 하면 대화할 여지가 없어진다 … 그들의 작품을 보면 우리가 그들을 정신병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정신병과 동일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 실제로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어렸을 때부터 엄하고 호된 행동 요법을 치료라는 이름으로 받아 온, 그래서 마치 사육당하다시피 살았다며 그러한 치료를 거부하는 자폐운동가의 말이 생각난다 ..  (67, 83, 130쪽)



  정은혜 님이 쓴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샨티,2015)를 읽습니다. 정은혜 님은 ‘미술 치료사’로 일한 이녁 삶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이 책은 ‘미술 치료’란 무엇이고, ‘미술 치료’를 어떻게 했는가를 밝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미술 치료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미술 치료이면 어떻게 마술 치료이면 어떠하겠습니까. 글쓰기 치료도 사진찍기 치료면 또 어떠하겠어요. ‘무엇’으로 ‘치료’를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롭게 돌아볼 대목은, ‘무엇’을 다루어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 되어 어떤 삶을 짓느냐에 있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삶을 일구면 삶이 즐겁습니다. 스스로 고단하게 삶을 돌보면 삶이 고단합니다. 스스로 웃음으로 삶을 엮으면 삶에 웃음이 가득하고, 스스로 눈물로 삶을 쥐어짜면 삶에 눈물만 흘러요.



.. 중심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손에 꼽힐 정도의 몇 가지 주제의 변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 제일 어려웠던 일은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꼬맹이 남자애들에게 바느질은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 멋있는 남자도 하는 것이라고 꾀는 일이었다 … 내게 선물로 주어진 간결한 음식을 앞에 놓고, 그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이 나무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 이 음식을 키운 땅이 어떻게 왔는지 등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77, 199, 232쪽)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습니다. 귀가 있으니 소리를 듣지요. 눈을 크게 뜨고 온갖 모습을 봅니다. 눈이 있으니 온갖 모습을 보아요. 그러면, 우리는 또 무엇을 할까요? 살갗이 있어서 서로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얼싸안습니다. 머리가 있어서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있으니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곰곰이 보면, 우리는 우리한테 있는 모든 것을 골고루 써서 삶을 아름답게 누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다루어 삶을 누릴 테지요? 그런데, 돈은 있되 사랑이 없다면? 이때에는 돈은 넘쳐도 사랑이 메말라서 삶이 썩 아름답지 않습니다. 거꾸로, 사랑은 가득하되 돈이 없으면?


  사랑은 가득하면서 돈이 없을 적에도 삶이 메마를까 궁금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때에도 삶이 메마르리라 여길 수 있으나, 정작 ‘사랑 가득 돈 없는’ 사람들을 보면, 삶이 메마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은 돈이 있어야 먹지 않거든요. 손수 흙을 일구어도 밥을 먹어요. 손수 집을 지어서 살림을 하지요.



.. 밖에 나가는 시간이 아주 적고, 나가도 단체로 우르르 가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렇게 남몰래 꽃 한 송이를 옮겨 심고 돌보고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 다른 날은 비가 내렸는데, 숲에 누워서 빗방울 하나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비가 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마냥 신비로웠고, 그 신비로운 경험에 눈물이 났다 … 대다수의 미술 치료사들도 자신을 위한 치유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 사람들은 치료사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친구가 없어서 불행하다 ..  (247, 255, 278, 314쪽)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때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에 삶이 고단합니다.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우리가 먼저 갖추면서 다스릴 대목은 무엇인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길에서 무엇을 즐겁게 먼저 해야 할까 하고 헤아릴 노릇입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은 늘 함께 있습니다. 두 가지 느낌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데에 있는 두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때에는 즐겁고 어느 때에는 두렵습니다. 이 대목을 슬기롭게 읽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을 마주하고도 어느 때에는 왜 즐겁고 어느 때에는 왜 두려운지 또렷하게 헤아려서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며,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는, 우리 삶은 늘 즐거움과 두려움이 엇갈리고 맙니다.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즐거움이기에 더 좋고 두려움이기에 더 나쁘지 않은 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으면, 내 삶을 슬기롭게 헤아리면서 온통 사랑으로 넘실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웃는 하루를 엽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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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언론학의 논리 - 정보혁명 시대 네티즌의 무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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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2



말길을 아름답게 트는 한누리

― 민중언론학의 논리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3.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딘 때를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내 어버이한테 보여주었을 때, 두 분은 비싼 배움삯을 대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며 빚을 지셨습니다. 내가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둘 무렵, 내가 대학교라는 데에 발을 걸치는 동안 들여야 한 빚(배움삯)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딜 적부터 ‘꿈’이 아닌 까마득한 ‘수렁’을 느꼈습니다. 이곳 대학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려는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끔찍한 싸움터요, 온통 바보들이 득시글거리는(나 또한 바보였습니다) 중학교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더니, 더욱 끔찍한 싸움터이면서 더욱 바보스러운 이들이 넘치는(나 또한 더 바보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라니, 나는 나를 얼마나 괴롭혀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어요.


  중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이런 느낌이 똑같았어요.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는, 교사라는 어른들이 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를 개처럼 두들겨팰 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갈기고 온갖 거친 말에다가 갖가지 얼차려로 괴롭히거나 들볶았어도, 동무들끼리 모여서 하하 웃고 뛰놀면 모든 앙금을 풀 만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는 교사도 바보요 동무도 바보입니다. 나도 바보이지요. 그저 죽자 죽자 하고 뒹굴 뿐이었습니다.



.. 민중이 주체적 결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있을 때, ‘지식인’들은 민중이 게으르고 공짜만 좋아한다고 ‘훈계’하다가 친일의 길로 걸어갔다 … 식민사관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도 양적 확대재생산의 문제도 아니다. 식민사관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체화한 한국 언론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거나 내일을 열어 가는 데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독자의 신뢰를 받아야 할 신문기업의 성격상 자신들의 친일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강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친일의 과거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가적 차원의 진상 규명조차 ‘종북’으로 ‘마녀사냥’ 해 왔다 ..  (36, 38, 44쪽)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동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둘째, 따분하고 지겨운 수업을 받는 동안 나 혼자 생각에 잠겨 홀가분하게 누리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셋째, 미술 시간에 하는 그림그리기는 재미없지만, 수업을 받는 동안 공책에 몰래 그리는 그림은 아주 재미있었어요.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혼자 집과 학교 사이를 걸어서 오가는 동안 하늘을 마시고 바람을 쐬는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배웠습니다. 넷째, 함께 어우러져서 뛰논 동무는 몇 해가 흐르건 언제까지나 동무로 지낼 수 있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몇 가지를 배웠어요. 중학교에서는 아무것도 안 가르치는구나 하는 대목을 가장 크게 배웠어요. 중학교는 ‘더 큰 감옥’에 갇힐 수 있도록 길들이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어요. 중학교라는 데는 우리한테 있던 놀이를 모두 빼앗아 바보로 길들이려 하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지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놀이를 빼앗긴 몸이 되니, 동무란 없어도 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니, 동무를 짓밟고 올라서서 ‘시험성적 높이기’만 해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고, 동무를 짓밟아야 하며, 시험성적을 높였으니, 이제는 더 높은 대학교에 올라가서 내 밥그릇을 잘 챙기면 되는구나 하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나라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도덕과 교육과 예술과 학문과 종교에 걸맞다 싶은 ‘종(노예)’이나 ‘기계 부속’이 되는 길을 고등학교에서 아주 또렷하게 배웠습니다.



..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를 묻는 문항에 대해 절반에 가까운 45%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 수치는 신뢰도 1, 2, 3위로 나타난 한겨레(15%), KBS(12.3%), MBC(5%)를 모두 합친 숫자보다 많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신문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조선일보(4%), 중앙일보(3.7%), 동아일보(2%)의 신뢰도를 합친 수치보다 한겨레의 신뢰도가 높다는 점이다 … 한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미국 언론에 비해 수용자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자신에게도 더 불신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것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존재원칙을 명확히 정립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한 과제다 ..  (49, 83쪽)



  모든 학교를 내려놓고, 모든 졸업장을 내려놓습니다. 모든 책을 내려놓고, 모든 지식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무엇이 남을까요? 학교와 졸업장과 책과 지식을 내려놓은 나한테는 무엇이 남을까요? 네, 바로 ‘내’가 남습니다. 나한테는 오직 ‘나’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허물을 내려놓은 뒤에 비로소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고, 졸업장을 찢으며, 상장이나 표창장은 재활용품 사이에 끼워넣으니,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으니,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1998년 가을에 대자보를 석 장 썼습니다. 전지와 매직을 ‘근로장학생 알바를 하던’ 대학구내 서점에서 장만한 뒤, 세 시간에 걸쳐서 또박또박 대자보를 쓰고는, 대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 게시판에 씩씩하게 붙였습니다. 어떤 대자보를 썼느냐 하면, “나는 오늘 이 대학교를 그만둔다(자퇴한다)”는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서 왜 대학교를 그만두려 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으려 하느냐 하는 이야기에다가, 나와 함께 이 길(대학 자퇴)을 걸으면서 삶을 스스로 새롭게 지을 동무를 기다린다는 뜻을 또렷하게 밝혔습니다.


  이때 붙인 대자보는 한 시간쯤 뒤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수위나 교수나 학교 관계자가 뜯거나 찢지 않았습니다. 나와 함께 이 대학교를 다니던 젊은이가 뜯어서 찢었습니다. 나는 대자보도 썼고, 학과방에는 편지를 남겼는데, 편지도 갈기갈기 찢겨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더군요. 갈기갈기 찢긴 대자보와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종잇조각을 나도 밟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종잇조각에 아쉬움을 남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 정치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을 선택해 미디어법의 통과를 각각 성명과 호소문 형태로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연 사실은 그만큼 입법 의지가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자본이 힘을 모았을 때 여론 형성력을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영향력이 큰 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어 낸 한목소리에 언론까지 적극 가세했다 … 실제로 국회가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자리 2만 6000개가 늘어난다는 논리는 사실과 어긋남에도 계속 부각되었고 널리 퍼져 갔다. 명백히 사실과 다른 주장을 부각해 보도했으면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진실이 밝혀졌는데 정정하거나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사실 확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  (92, 97쪽)



  손석춘 님이 쓴 《민중언론학의 논리》(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교재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나 피디나 작가가 되려고 하는 이들한테는 여러모로 길동무가 될 만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손석춘 님은 ‘민중’이라는 낱말이 ‘죽은 말’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낡거나 한물 간 이름’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틀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민중’이라는 낱말은 ‘민중이 스스로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지식인이 지었어요.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민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어떤 이름으로 가리킬까요? 시민? 서민? 대중? 군중? 국민? 백성? 노동자? 인민? …… 이도 저도 모두 아닙니다.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아무런 이름으로도 따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알쏭달쏭하지요. 아리송하지요. 그러나,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따로 다른 이름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민중인 사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멋진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거든요. ‘민중인 사람’은 이 나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착하면서 참답고 살가운 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썼어요.



.. 후쿠자와는 “조선인민을 위하여 조선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글까지 발표해 조선 침략론을 전개했다. 따라서 박영효에게 신문 발간을 권했던 1882년, 후쿠자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신문과 관련해서 ‘국민’을 계몽이나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박영효·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는 아래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공론장과 중세사회의 변혁 열망을 적대시하게 된다 …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국제표준에 대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개념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비판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인권과 노동을 아예 생각도 못 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이론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  (165, 174, 206쪽)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온 이들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습니다. ‘민중언론학’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려고 하는 ‘언론학 길잡이책’입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니까, 친일부역을 했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버렸으니까, 군사독재를 일으켰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등지니, 4대강사업이라든지 자유무역협정이라든지 밀양송전탑이라든지 온갖 핵발전소를 마구 밀어붙여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움을 잊으니까, 전쟁무기와 군대로 자꾸 바보짓을 일삼아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인 줄 모르니까, 폭력이나 강간이나 차별이나 따돌림 따위를 자꾸 부추기지요.


  우리는 그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살폈습니다. 두 갈래인 사람입니다. 하나는 ‘아이’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른’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한 가지로 갈립니다. 나이로? 아니에요. 아이와 어른은 나이로 가르지 않아요.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하나 ‘철’로 가릅니다.


  철이 들면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철든 사람은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철이 안 들면 철부지입니다. 철이 든 척하는 아이는 ‘애늙은이’입니다. 철부지는 떼쟁이요 바보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철 안 든 어른 모습인 사람’이 아주 많아요. 나이만 많대서 어른이 아니기에, 나이만 많으면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일삼습니다.



.. 적어도 대학이 정부 및 기업과 논리를 공유하며 기업이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다 … 진실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하더라도 고투의 발자국을 또렷하게 남긴 리영희는 한국현대사 전공인 역사학자 서중석과의 인터뷰에서 끝없이 공부해 나가는 자세를 밝혔다 … 경제적 이익 추구 차원이 아닌 경제적 고통을 풀어가는 ‘윤리적 차원의 사유’가 필요하다 … 이 땅의 학문적 사대주의는 조선왕조 내내 중국의 주자학을 맹신해 온 지배적 학문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습관’처럼 언제나 무시하는 일본만 하더라도 오래전부터 학문의 자주성을 일궈 가고 있지만, 한국 학계는 미국식 연구방법이나 이론적 논의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얕잡아보거나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고 폄훼하기 일쑤다 ..  (231, 266, 286, 323쪽)



  한국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정치집권자가 ‘사대주의’를 즐겼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치집권자는 스스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정치집권자는 손수 삶을 짓지 않았어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은 정치집권자나 학자나 지식인은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늘 입으로만 떠들어요. 그래서 중국을 사대주의로 모시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사대주의로 받들다가, 해방 뒤에는 미국을 사대주의로 높이지요.


  한국에서 정치집권자뿐 아니라 모든 학자와 지식인은 온갖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과 이론을 폅니다. 안타깝지만, 《민중언론학의 논리》를 쓴 손석춘 님도 ‘한국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쓰는 말’로는 이 책을 펼치지 못해요. 손석춘 님도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을 펼칩니다. 다만, 손석춘 님은 ‘제 말’을 아직 못 찾았지만, ‘제 넋’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넋을 살려서 ‘사람다운 언론’이 나아갈 길을 밝히려고 합니다.


  사대주의란 정치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니고, 언론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말과 넋과 삶 모두 사대주의입니다. 광고도 대학교도 교육도 문학도 문화도 모두 사대주의로 흐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이끌려고 하는 《민중언론학의 논리》입니다. 이 책을 읽을 젊은이라면, 또 대학생이라면, 앞으로는 ‘내 사람된 참모습’뿐 아니라 ‘내 사람된 참말’도 슬기롭게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 책을 읽을 ‘나이든 어른’이라면, 이제껏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삶을 가만히 되새기면서, 이제부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길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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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 - 재일조선인 1세가 겪은 20세기
백종원 지음 / 삼천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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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1



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삶을 짓는가

― 조선 사람, 재일조선인 1세가 겪은 20세기

 백종원 글

 삼천리 펴냄, 2012.9.14.



  한겨울에 시골집에서 반바지차림으로 지냅니다. 서울쯤 되는 도시에서라면 이렇게 지내지 못할는지 모르나, 고흥에 있는 시골집에서는 바깥에서도 반바지차림으로 지냅니다. 다만, 읍내나 면소재지로 마실을 갈 적에는 긴바지를 입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길 때문에 긴바지를 입는다기보다 ‘그냥 옷’이니까 긴바지를 입고 나갑니다. 집에서는 ‘그저 반바지’차림으로 있습니다.


  한겨울 고흥에서 바깥은 영 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우리 집은 바람이 잘 드나들어 방 온도가 15∼16도쯤 되고, 조금 포근한 날에는 17∼18도쯤 됩니다. 바깥 날씨가 영 도 밑이라면 긴바지를 입을 만하지만, 영 도 밑이 아니라면 반바지를 입어도 춥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두툼한 바지를 입어도 이 겨울에 추워요. 왜냐하면, 사람마다 몸이 다르거든요. 이를테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사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지낸다면 두툼한 솜옷을 입어도 추울 만합니다. 그리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에서 사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지낸다면 어떠할까요? 이들도 한국에서 두툼한 솜옷이나 가죽옷을 입으려 할까요?



.. 조선 인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79명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공작, 후작, 백작 같은 귀족 작위와 7백만 엔이 넘는 ‘은사금’과 ‘표창’을 받았다 … 조선에서 일본에 필요한 식량과 원료를 확보하고, 총독부 재정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토지세를 유지하며, 통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일본은 토지를 직접 소유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에는 무엇보다 토지의 가격이 싼 반면에 지주가 거둬들이는 소작료는 몹시 높았기에 투자할 절호의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  (51, 55쪽)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삶을 짓습니다. 전라남도 바닷마을과 서울 한복판 아파트에서 짓는 삶은 다릅니다. 강릉과 목포에서 짓는 삶은 서로 다릅니다. 남녘과 북녘이 짓는 삶은 다르고, 중국과 일본에서 짓는 삶은 다릅니다. 그러니, 나라와 겨레마다 다를 뿐 아니라, 삶터마다 다 다릅니다. 내가 이렇게 한대서 너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다. 네가 이 밥을 먹으니 내가 이 밥을 먹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네 차림새대로 옷을 입어야 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 차림새대로 옷을 입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게 네 머리카락 모습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 머리카락 모습처럼 길게 기르거나 짧게 쳐야 하지 않습니다. 다 다른 우리는 다 다른 우리 삶을 저마다 즐겁게 지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말’을 쓰면서 ‘다 다른 사랑’을 가꾸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노래할 때에, 비로소 평화입니다.



.. 일본의 젊은 세대들한테서, “조선 사람이 왜 일본에 살고 있는가” 하는 말을 들을 때가 많다. 60만 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은 주로 토지를 수탈당했거나 징용, 징병으로 일본에 끌려오거나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과 그 후손이다 … 조선인 사회에는 연장자 앞에서는 담배나 술 따위를 멀리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풍습이 있다. 그런데 젊은 일본인 경관이나 관리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뻘 되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이, 이봐” 하고 반말을 일삼았다 ..  (59, 94쪽)



  백종원 님이 쓴 《조선 사람, 재일조선인 1세가 겪은 20세기》(삼천리,2012)를 읽습니다. ‘재일조선인 1세’로서 겪은 20세기 이야기가 이 책에서 흐릅니다.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서 살아온 나날 이야기가 이 책에서 흐릅니다.


  백종원 님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나는 조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곳에서 태어나든 ‘조선 사람’이고, 어느 곳에서 살든 ‘조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조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보다 훌륭하거나 뛰어날까요? 아닙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보다 덜떨어지거나 어리숙할까요? 아닙니다.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보다 낫지 않고, 일본 사람이 중국 사람보다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아름다운 사람이고, 저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 만철은 유능한 조사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기관은 소련이나 중국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산업과 교통에서 기후, 풍토, 수질, 질병, 민족, 종교, 풍속, 관습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를 상세하게 연구했는데, 연간 예산이 옛 도쿄제국대학에 필적할 정도로 방대했다고 한다 … 우리 중학교에서는 3학년이 되면 관동군 병영에 실제로 입소하여 군사교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만철 연선의 궁주령 병영에서 훈련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올 때, 나는 학우 몇 명을 모아 배속 장교에 대한 욕을 잔뜩 적은 항의 글 나무패를 병영 한 귀퉁이에 세워 두었다. 그런데 우리 조와 교대한 조의 선생한테 발각되어 교무회의에서 문제가 되었다 ..  (103, 106쪽)



  일본은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이웃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일본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을 괴롭히기도 했는데, 일본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짓은 나와 너 모두를 괴롭혀요. 오늘날에도 일본 정치조직은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수많은 이웃사람을 괴롭히지요. 그리고, 이러한 바보짓은 고스란히 저 스스로를 겨냥해요. 이웃을 괴롭히는 사람은 바로 ‘내가 나 스스로 괴롭히는’ 꼴이거든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내가 나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아끼는 사람은 바로 내가 나 스스로 아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은 이녁 스스로 아끼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일삼는 사람은 이녁 스스로 이녁 삶을 아름답게 짓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홧발에 짓눌려야 했던 여러 나라 여러 겨레도 괴로운 일이었으나, 군홧발로 이웃을 짓누르는 사람은 바로 제 스스로 짓누르는 셈입니다. 스스로 괴로운 짓을 하면서 스스로 괴로운 줄 모르거나 잊는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치와 사회를 보면, 그네들 스스로 어떤 짓을 했는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 제대로 알지 못하며,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제대로 살지 못해요.



.. 나는 조선인 소학교의 학생이었으나 이런 동화정책에 아이 나름으로 저항했다. 당시 일본 교장이 〈교육칙어〉를 암송하라고 강요했는데, 우리들은 그 첫 부분 “짐이 생각하기에”를 우리 말 발음으로 그럴싸하게 바꾸어 “친할머니가 콩을 달달 볶길래 한입 먹었더니 배탈이 나서”로 개사했다. 일본인 교장이 근엄한 얼굴로 칙어를 읽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고쳐 만든 ‘칙어’를 작은 목소리로 읊었는데, 그러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 우리 조선인 학생들은 한가로이 찻집에나 처박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사지로 내몰리지 않으면 안 될 조선의 학생들에게 한마디 위로라든가 의미 있는 말은커녕, 일본의 지배자들과 한목소리로 ‘성전승리’를 위한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야말로 ‘조선인으로 영광’이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최남선은 뒷날 괴뢰 ‘만주국’의 고급 관리를 양성하는 건국대학의 교수가 되고, 이광수는 ‘황도문화’를 선전하는 문인보국회에 들어갈 정도로 타락하게 된다 ..  (134, 181쪽)



  네가 나를 때렸으니 ‘네가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맞은 사람은 두 발 뻗고 잠들어도, 때린 사람은 두 발을 못 뻗으며 잠도 못 자기 마련입니다. 남을 괴롭히거나 해코지하는 사람은 스스로 굴레에 갇힙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으며, 남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 언제나 웃으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무기로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아요. 전쟁무기로는 전쟁만 끌어들입니다. 전쟁무기로 이웃을 괴롭힌 사람은 전쟁무기를 죄다 버리면서 스스로 삶을 뉘우치면서 돌아보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일본 정치와 사회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그네들 스스로 전쟁무기를 못 버리기도 하면서, 그네들 스스로 삶을 뉘우치거나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도 비슷해요. 한국도 일본 못지않게 전쟁무기를 엄청나게 끌어안습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도 군대와 전쟁무기를 줄일 생각이 없습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부터 평화와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한국 정치와 사회부터 참다운 길을 걷지 못합니다.



.. 일본 제국주의의 패배라는 근본적인 변혁기에 즈음하여 이은 씨 부부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상담하기 위해 만수사에 온 듯했다. 그런데 스님은 “당신은 열한 살에 인질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끌려갔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은 없소. 하지만 우리 민족이 수난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당신은 왕족 대우를 받아 육군 대장도 되고 참담한 민족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의 비호를 받으면서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지요. 이 점을 당신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스님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민족 앞에 사죄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조선으로 돌아가 똥거름도 지고 백성으로서 농사를 짓고, 방자 씨는 보육원이나 유치원의 보모가 되어 열심히 조선의 아이들을 돌본다면 민족은 당신들을 용서할 것이오.” ..  (233∼234쪽)



  정치나 사회가 발돋움하는 길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끌어들여서 경제성장을 해도 이럭저럭 발돋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는 겉치레일 뿐입니다. 정치나 사회가 참답게 발돋움을 하자면, 스스로 삶을 지어야 합니다. 대통령도 텃밭을 일구어야 하고, 국회의원이나 의사나 신문기자도 텃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텃밭이 집집마다 있어야 하고, 모든 집에는 마당이 있어서 나무를 심어서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집집마다 있는 텃밭과 마당에서 흙을 만지고 풀을 뜯으며 나무를 보살피면서 하루를 열고 낮을 보내며 저녁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 비로소 정치나 사회가 발돋움합니다. 이럴 때에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삽니다.


  임금님이니까 똥거름을 안 져도 되지 않습니다. 시인이나 소설가이니까 농사를 안 지어도 되지 않습니다. 교사나 교수이니까 나물을 안 뜯어도 되지 않습니다. 과학자나 기술자이니까 나무를 안 심어도 되지 않습니다.


  정치나 사회가 뒷걸음을 치는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을 거머쥐는 이들은 모두 흙과 등을 집니다. 권력과 돈과 이름을 거느리는 이들은 모두 시골과 등을 돌립니다. 글을 깨작거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풀도 꽃도 나무도 모르기 일쑤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은 하늘을 올려다볼 겨를이 없는데다가, 별도 해도 바람도 구름도 안 쳐다봅니다.



.. 조선에 대한 멸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지만, 이는 에도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메이지유신 후 ‘정한론’ 속에서 퍼지며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점점 더 커지게 된 사회적 풍조라고 생각된다 ..  (258쪽)



  이야기책 《조선 사람》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고향으로 삼는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제 뿌리를 사랑하면서, 이웃과 동무가 태어난 뿌리를 함께 사랑하려는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가슴에 ‘평화’라는 이야기를 새겨서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기를 바라는 숨결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할 일이란 참말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삶짓기입니다.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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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의 평화 공감 르포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 삼천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8



너와 내가 이웃이 되려면

―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

 이애숙 옮김

 삼천리 펴냄, 2012.8.17.



  우리 집에서는 살림돈을 조금 모으면 으레 ‘오키나와 까만설탕(흑당)’을 장만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자라는 사탕수수를 그대로 졸여서 만든 ‘까만 덩어리’는 더없이 맛나고 여러모로 쓰기에 좋습니다. 배고플 적에 먹어도 되고, 기운이 빠졌을 적에 먹어도 되며, 떡볶이를 할 적에 넣어도 됩니다. 사탕처럼 먹어도 맛나지요.


  그런데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진 뒤로 ‘오키나와 까만설탕’을 손사래치는 사람이 꽤 늘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일본하고 오키나와(류큐)는 서로 다른 나라인데, 후쿠시마 핵발전소하고 ‘오키나와 까만설탕’이 어떻게 이어진다고 그럴까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일본이고 류큐(오키나와)는 류큐이기 때문입니다.


  정 모르겠다면, 세계지도를 펼치면 됩니다. 세계지도를 펼쳐서 ‘류큐’가 어디에 있고, 류큐섬에 있는 ‘나하’라는 도시가 일본 도쿄나 후쿠시마하고 어느 만큼 떨어졌는지 자로 재 볼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자로 다시 류큐와 한국이 어느 만큼 떨어졌는지 재 볼 노릇이에요. 류큐섬하고 어느 나라가 더 가깝고 어느 나라가 더 멀까요? 후쿠시마하고 훨씬 가까운 나라는 어디일까요?



.. ‘나는 왜 오키나와에 가는가?’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너는 왜 오키나와에 오는가?’라고 거절하는 오키나와의 목소리와 겹치며 언제나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 본토 일본인은 오키나와 화생방 부대의 위협이 없는 땅에서 원자력잠수함의 자유로운 출입에 대한 방호책을 대충은 갖추고 살고 있다 … ‘과연 원폭 체험은 일본인에게 참 경험이 되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 어쩌면 원폭의 참 경험이라는 인간적 샘물은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갈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  (18, 51, 109쪽)



  일본은 류큐섬을 식민지로 삼다가 미군기지로 내주었다가 일본땅 가운데 하나로 끌어들였습니다. 일본이 류큐섬을 식민지로 삼기 앞서까지 류큐섬은 홀로 아름답게 삶을 이루던 터전입니다. ‘일본에 있는 오키나와’가 아니라 ‘태평양에 있는 류큐’입니다.


  그런데 이 류큐섬 옆에 ‘게라마 줄섬(열도)’이 있고, 게라마섬에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황을 섬긴다고 하면서 아시아에 전쟁바람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 군대가 류큐섬 사람들을 모질게 괴롭히고 짓밟다가 죽였어요. 이 같은 이야기는 ‘마루키 도시’ 님과 ‘마루키 이리’ 님이 함께 빚은 그림책 《오키나와의 목소리》(꿈교출판사,2013)에도 아주 잘 나옵니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오키나와의 목소리》를 읽으면, 평화로우며 사랑스럽던 작은 ‘섬나라 류큐’에 어떤 군대가 끔찍하게 몰려들어 온통 잿더미와 주검더미로 만들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류큐사람은 조선사람처럼 ‘일본에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야’ 했고, 류큐사람도 조선사람처럼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에 맞아서 죽거나 피폭후유증으로 오랜 나날 괴롭게 앓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이라 할 텐데, 일본은 일본이라고 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그악스럽게 괴롭힙니다. 더 들여다보면, 일본은 일본이라는 테두리 안쪽에서도 저희끼리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와 다르지 않아요. 한국도 한국이라고 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한국으로 오는 ‘제3세계 이주노동자’가 어떤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는지 들여다보면 잘 알 만합니다. 게다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쪽에서도 학벌에 따라 따돌리고, 지역차별이 크며, 성차별과 신분차별도 끔찍합니다.



.. 오키나와에는 일하러 가서 피폭되어 귀향하거나 원폭 관련 질병에 대한 전문적 치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수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생존해 있다. 하지만 원폭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방법이 없어서 피폭자들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다 … 나하 군항에서 일하는 잠수부들이 몸에 이상을 호소했다. 코발트-60에 오염된 진흙을 계속 채취하여 체내에 오염을 축적시킨 물고기 틸라피아와 섭조개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미군은 잠수부들의 이상이 방사능과 관련 없다고 단언하고서 그들을 본토 원폭병원으로 보내려던 전군노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  (29, 48쪽)



  평화를 바라려면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바라려면 손수 흙을 지어야 합니다. 총이나 칼을 든 평화란 없습니다.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채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돈주머니를 홀로 꿰찬 채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가른 채 평화를 읊는 일이란 덧없습니다.


  전쟁무기가 있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은 안 가르치면서 시험성적으로 등급과 계급을 만드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 제국주의 일본도 평화롭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국 사회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돌보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이웃을 아끼거나 섬기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느니 경제개발이라느니 하고 내세우면서 온 나라를 뒤집어엎는 짓을 잇달아 벌입니다. 한국에서 왜 새마을운동 같은 끔찍한 짓이 생겼고, 이런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펄럭일까요? 한국은 조금도 안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새마을운동 바람이 분 뒤로, 시골을 고향이나 보금자리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고, 아직도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시골이 시골답게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는 우익이 쳐들어왔다고 쓰고 싶지는 않다. 우익이 방해 연설을 했다는 말도 사용하지 않겠다.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쳐들어온 자들이나 더러운 말을 내뱉는 남자와 내 피가 직접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 오키나와가 미국 군부뿐 아니라 본토 일본인이 새삼 인지한 핵기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한테 물었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그저 씁쓸히 침묵하는 내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 복귀는 ‘평화의 거점으로서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  (142, 154쪽)



  오에 겐자부로 님이 쓴 《오키나와 노트》(삼천리,2012)를 읽습니다. 1960년대 끝무렵부터 1970년대 첫무렵 사이에 쓴 글을 엮은 책입니다. 어느덧 마흔 해나 묵은 글인데, 마흔 해를 묵은 글이라지만, 류큐(오키나와)와 일본을 묶는 슬픈 쇠사슬은 제대로 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사랑스러운 끈이 아닌 그악스러운 쇠사슬이 너무 단단합니다.


  한국사람은 왜 서울로 가려고 할까요? 한국사람은 왜 서울에서 살려고 할까요? 서울이 아니면 부산, 부산이 아니면 대구, 대구가 아니면 인천이나 대전, 또 이런저런 큰도시, 저런그런 큰도시, 오직 도시만 바라보는 얼거리인데, 왜 자꾸 이렇게 나아가려 할까요?


  한국사람은 왜 대학교를 가야 할까요? 대학교 졸업장은 왜 따야 할까요? 왜 꿈을 안 키우고 졸업장만 따려 할까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왜 교과서 시험공부만 하고, 삶과 사랑과 꿈을 키우는 공부는 안 하거나 못 할까요?



.. 1903년의 이른바 인류관 사건은 당연히 그런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권업박람회 기간에 학술 인류관이라는 부스에 오키나와 여성 두 사람이 ‘진열’되었다. 그녀들은 곰방대와 야자수잎 부채를 들고 오두막에 앉아 있었고, 채찍을 든 남자가 여인들을 ‘이놈’이라고 부르며 설명했다고 한다 … 볼도저의 굉음, 인류의 진보와 조화를 찬미하는 노랫소리는 그 의문의 목소리를 뭉개고 울려퍼지지만, 언제까지 굉음과 노랫소리를 지를 생각인 것일까 … 오키나와에 대한 무지의 단순화는 의식적인 회피와 냉혹한 일본인의 행태를 보여준다. 아시아에서 침략적으로 날뛰지 않을 때조차 일본인은 단순한 인식을 바탕으로 아시아인을 차별했다 ..  (165, 167, 171쪽)



  너와 내가 이웃이 되려면 서로 무엇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나한테 더 있는 돈을 나누려 하지 않으면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배가 고픈 이웃한테 밥 한 그릇 내주지 않으면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내 손에 있는 것을 서로 나누려 하지 않을 적에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려고 하지 않고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오에 겐자부로 님은 《오키나와 노트》라는 책을 쓰면서 ‘류코와 일본 사이에 맺힌 앙금’을 모두 풀지는 못합니다. 아마 풀 수 없다고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풀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서로 이웃이 되면 앙금이란 없어요. 서로 벗이 되고, 서로 한솥밥 먹는 사이가 되면 어떠한 앙금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왜 류큐에 미군기지를 그렇게 많이 두어야 했을까요? 도쿄 앞바다에 미군기지를 두어야지요. 왜 후쿠시마에 핵발전소를 세웠을까요? 도쿄 한복판에 핵발전소를 세워야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야구장이나 축구장을 짓겠다면, 서울이나 부산 말고 문경이나 장흥 같은 데에 지어요.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면, 서울이나 부산 한복판에 지어요. 대학교가 서울에 이처럼 많이 다닥다닥 모이도록 하지 말고, 서울에는 딱 한 군데만 남기고, 다른 모든 대학교는 군마다 한 군데씩 있도록 해야지요. 모든 길이 서울과 부산으로만 이어지도록 하지 말고, 군과 군 사이를 살가이 잇는 작은 길을 내야지요.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몽땅 없애고,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들이던 돈은 이제부터 마을과 삶을 가꾸는 데에 써야지요. 경제개발이나 경제발전은 살포시 내려놓고, 사랑과 꿈을 아이들이 품고 키우면서 일구도록 이끌어야지요. 대외무역에 기대지 말고, 이 나라에서 먼 옛날부터 모든 것을 손수 지어서 손수 누렸듯이, 모든 집·밥·옷을 누구나 손수 지어서 얻고 가꿔서 누리는 길로 나아가야지요.


  댐을 지어 수돗물을 쓰는 얼거리가 아니라, 시골과 도시 어디에서나 냇물을 마시도록 해야지요. 큰 발전소를 짓는 얼거리가 아니라, 집집마다 제몫으로 전기를 만들어서 쓰도록 해야지요.



.. 자신들이 방치하고서 적을 향할 무기를 거꾸로 겨누고 자행한 강간에 대해, 먼저 자신을 속이고는 기만하기 쉬운 타인부터 의심 많은 타인까지 ‘거짓말’로 계속 왜곡시켜 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눈에 강간이 아름다운 ‘한순간의 사랑’으로 바뀐 것을 발견한다. 둔감한 상상력으로 그는 오키나와 현장에서 오키나와 여성 피해자가 “아니야, 그건 강간이었어!” 하고 소리치며 규탄하는 손가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라마 집단자결의 책임자도 그런 자기기만과 타자에 대한 기만을 끊임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큰 죄 앞에서 그는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한다. 그는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과 왜곡되는 기억의 도움을 받아 죄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자기변호의 여지를 남기려고 과거 사실의 날조에 힘을 쏟는다 … 실제로 지금 재일조선인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의 윤리적 상상력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보라. 지극히 평범한 어리석은 고등학생이 실체도 모르는 것과 연결된 사명감, ‘어떤 고양감’에 휩싸여 조선 학생을 때리는 치졸하고 파렴치한 실상을 보라.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사건과 아버지들의 행동’과 똑같은 짓을 신세대 일본인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반복할 때 … 오키나와의 무한한 이의제기의 목소리를 묵살하려고 못 들은 척 하거나 들을 수 있는 귀를 키우지 않는 것은 국가 범죄로 가는 새로운 포석이 아닐까 ..  (184∼185, 189쪽)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이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함께 노래하고 웃으면서 춤을 춥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경쟁’이 불거지고 ‘순위’와 ‘등급’이 나타납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쓰레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먼 옛날부터 곱게 잇던 두레와 품앗이가 저절로 마을마다 되살아날 테니, 굳이 협동조합 같은 것은 없어도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스스로 노래를 안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짓지 않기에, 신문과 방송과 책에 휘둘린 나머지, 손수 짓는 삶과 자꾸 동떨어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지 않으면 벼랑까지 그대로 나아가다가 그만 굴러떨어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어야, 바로 이곳에서 아름답고 푸른 숲을 이룹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지 않으면 이 지구별은 그만 꽝 하고 터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어야, 바로 이 지구별이 온누리에 맑고 밝게 빛나는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거듭납니다.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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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5-01-1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나와의 아픈 과거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행프로그램에서도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위 만행이 언급되었습니다. 얼마전 선거때도 오키나와 주일미군이 이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5-01-14 10:49   좋아요 0 | URL
네, 오키나와 역사는 `일본 역사`라고 할 수 없기도 하고,
그곳, 류쿠는
외려 일본보다 한국하고 문화와 삶이
한결 가까이 이어지기도 해요.

가만히 보면, 지도로 볼 적에도
뱃길이 류큐와 한국은 한결 가깝지요.
여름과 겨울에 바뀌는 바람을 타면
그야말로 옛날에는
류큐와 한국은 서로 자주 오갔겠구나 싶어요.

그리고, 두 겨레가 일본한테 끔찍한 짓을 겪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