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54 : 김수정 ③ 아리아리 동동



 오르지 않는 물건값이 없습니다. 라면 한 봉지 값은 어느새 800원이 되고, 얼음과자 하나도 700원입니다. 시내버스를 타면 천 원이고, 전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자면 적어도 1500원은 찍힙니다. 웬만한 낱권책 하나가 만오천 원이 넘은 지는 벌써 오래된 일. 그나마 곡식과 푸성귀 값은 거의 제자리인데, 곡식값이 제자리인 만큼,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벌이는 훨씬 형편없어진다는 소리입니다.


 물건값 오르는 빠르기에 발맞추어 집값이 오릅니다. 집값이 오르니 세들어 사는 사람들 달삯도 오릅니다. 어느 하나 오르지 않는 값이 없기 때문에,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단합니다. 장사하는 분들은 자기가 파는 값도 올림직하나, 그러다가는 서로서로 고달플 뿐더러, 물건을 한꺼번에 어마어마하게 쌓아 놓고 깎아팔기를 하는 공룡기업 가게에 손님을 빼앗길까 걱정되어 끙끙 앓습니다.


 집은 끊임없이 지어지는데, 집없는 사람이 깃들어 살아갈 집으로 짓지 않고, 집있는 사람이 덤으로 여러 채 더 사들여서 달삯 받아 방구석에서 돈굴리기 할 수 있는 부동산으로 지어집니다. 사람 살 집이 아닌 돈굴리기 부동산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집(아파트)은 오랫동안 간수하지 않습니다. 열 해쯤 지나면 슬슬 재개발 입김을 부추기고, 스무 해쯤 지나면 으레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하는 듯 여깁니다. 또, 이렇게 허물고 다시 지어야 집값을 껑충 올릴 수 있어서 좋다고 법석입니다. 정작 자기가 깃들이며 살 집이거나 동네라 한다면, 함부로 재개발을 밀어붙이지 않을 텐데.


 따지고 보면, 집 한 채 자기 이름으로 올려놓고 살아가는 사람 숫자보다는, 다른 이가 돈굴리기하려고 장만한 집에 깃들어 사는 사람 숫자가 훨씬 많을 터이나, 힘겹거나 어려운 사람들 자리에서 정책이 꾸려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김수정 님이 1985년에 그렸던 만화 《아리아리 동동》(서울문화사,1990)을 펼칩니다. “추운데 왜 나와 있니?” “누나 기다렸어.” “점심밥은 잘 챙겨 먹었니?” “응.” “잘했다.” “오늘은 호떡 안 사 왔어?” “매번 사 올 수 있니? 돈 아껴 써야지.” “에이.” “누나가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서 밥해 줄게.” …… “커튼 닫을까?” “아니.” “바람이 찬데.” “엄마도 저 별을 보고 계실까?” “그럼.” “엄마 많이 나았어?” “그래, 희원이 보고 싶다시더라.” “나도 엄마 보고 싶어.” “백 밤만 자면 오실 거야.” “왜 병원에선 우리 같은 꼬마는 못 오게 해?” “병원 규칙 때문이지.” …… (2권 13∼27쪽).


 만화에 나오는 ‘동동’은 나어린 저승사자입니다. 저승에서 뒷간 똥을 똥바가지로 똥장군에 퍼담아 치우는 일을 하는 형이 심부름을 시켜서 ‘죽을 때가 다가온 사람을 데려오라는’ 일을 맡습니다. 그런데 동동은 어느 한 번도 시킨 대로 사람들을 데려오지 못합니다. 일찌감치 이승에 내려가서 ‘데려갈 사람’을 지켜보며 기다리지만, 막상 데려갈 사람은 안 데려가거나 다른 저승사자가 데려가는 사람을 빼돌리기도 합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이 땅을 떠나기 마련이라, 동동과 함께 저승에 가야 할 텐데, 동동 눈에 비친 서민들을 쉬 저승으로 불러들이기에는 가슴이 짠했는지 몰라요. 아직 이승에서 더 땀흘려 빛을 보고 열매 맺을 일이 많다고 느꼈는지 모르고요. (4341.6.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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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행진 - 야누시 코르차크 양철북 인물 이야기 1
강무홍 지음, 최혜영 그림 / 양철북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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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사랑한다면,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셔요
 [그림책이 좋다 49] 강무홍 + 최혜영, 《천사들의 행진》(야누슈 코르착)



- 책이름 : 천사들의 행진
- 글 : 강무홍
- 그림 : 최혜영
- 펴낸곳 : 양철북(2008.6.20.)
- 책값 : 10800원



 (1) 사람


 저는 올 5월 25일, 천주교 인천교구 송림동성당에서 ‘정하상 바오로’라는 덧이
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어느 한 가지 종교에 몸을 맡기지 말고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저로서는 세례를 받았지만, 몸이나 마음은 오롯이 천주교 하느님한테만 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입니다. 이 한 분 하느님은 우리 삶 어느 자리에나 함께 있습니다. 기쁜 자리, 슬픈 자리 어디에나 있습니다. 내가 이웃을 우러르는 자리뿐 아니라, 내가 마음속으로 이웃을 깎아내리는 자리에도 있습니다. 내가 몸바쳐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손길 나누는 자리에도 있으나, 내 힘이 닿지 않아 이웃과 식구한테 도움을 받는 자리에도 있습니다. 내가 촛불 하나 들고 길거리에 나간다면 이 자리에 함께 있는 한편, 집구석에서 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면,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 그(야누슈 코르착)는 몸을 수그리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이의 눈빛은 어두웠습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니? 여기가 내 집인데.” 한순간 아이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환히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몸을 기댔습니다 ..  (4쪽)


 더 나은 종교, 더 알맞는 종교, 더 열린 종교가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종교에 마음과 몸을 맡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종교힘이라면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세례를 받고도 성경에 적힌, 또는 성경에 적히지 않은 하느님 삶을 고이 따르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분은 우리 곁에 함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고 느낍니다. 세례를 받고 더 높은 공부와 마음닦이를 거쳤다고 하나, 하느님 삶과 함께 걸어가지 않는다면, 이분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거나 괴롭히는 못난이가 아니냐 생각합니다.

 저와 옆지기 두 사람은, 세상에서 돈이 된다고 하는 일에 그리 몸을 바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 살림살이를 조금이나마 넉넉하게 해 주는 돈을 얻으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돈이 우리 삶을 얼마나 채워 주고 있는가도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을 넉넉하게 돌보아 주고 있는 쪽이 아니라면, 아주 적은 돈밖에 얻지 못하더라도 이 길로 걸어가자고 다짐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찾으면서 먹고사는 돈까지 거둘 수 있으면 가장 나을 텐데, 이런 길은 아직 못 찾기도 했지만, 어쩌면 없을지 모릅니다.

 옆지기는 늘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은 산에서 살아야 한다고. 산이 아니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지금 우리 둘은 산에서 못 삽니다. 들어갈 산이 없는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오두막이 못 되고 굴이 못 되어도 비와 해를 가릴 곳을 얻어서 산나물과 감자로 먹고살아도 너끈하지만, 돈과 땅이 없는 형편으로는 산에 깃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할 텐데, 저마다 제 이웃을 자기 살갗으로 받아들이며 함께하기보다는 ‘자기한테 벌이가 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터전이 자꾸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웃에 집이 있지만 서로서로 얼마나 이웃으로 느끼고 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한목소리로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먹고살기를 채우기만 하면 우리 삶이 그길로 모두 끝인지, 먹고살기를 채우는 길이 우리가 갈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오백만 원을 사회에 내놓아야 아름다움일는지, 한 달에 오십만 원 벌어서 오천 원 겨우 사회에 내놓으면 아름다움이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병원이 끝나면, 그(야누슈 코르착)는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약도 쓰지 못하고 앓고 있는 아이들을 정성껏 치료하고 돌봐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한 의사도 ‘가난’을 치료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리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죽어 가는데도,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  (10쪽)


 지금 이 나라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가르치는 일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동무를 사귀고, 어버이를 모시는 모든 사람 사이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로 흐르는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들을 낳아서 기를 때,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는가요. 아이들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는가요. 우리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먹이고,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나누며, 누구와 이웃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이웃사랑을 물려줄 수 있습니까. 자연 삶터를 아끼지 않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자연사랑을 이어줄 수 있습니까. 돈사랑이 아닌 사람사랑과 마음사랑으로 살아가지 않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돈벌이 말고 무엇을 들려줄 수 있습니까. 두 다리로 걷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우리 사는 터전과 마을과 나라가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이야기할 수 없겠지요. 옷이며 이불이며 손으로 빨아서 고이 아껴서 입고 덮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어떤 땀방울을 건넬 수 있습니까.

 잠자리에 들기 앞서 성경 몇 대목을 읽으며, 기도글을 읊으며, 하느님을 따르며 살다가 떠난 훌륭한 넋들 발자취가 담긴 책을 헤아리면서, 슬픈 마음을 누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읽어서 ‘참 훌륭하다’고 느낀 그분들 걸음걸이며 발자국은, 우리가 지식으로 머리에 집어넣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껴안으면서 살아갈 다짐이자 몸가짐이 아니온지요. 그럴싸할 뿐 아니라,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자랑할 수 있는 시커멓고 큰 차가 아니라, 기름 적게 먹고 자원 덜 써서 만든 야무지고 값싼 자동차를 몰면서 ‘아낀 돈으로는, 우리 사회 얼거리에서 가난을 헤어나기 어려운 이웃’을 손수 알아보고 찾아내어 도와주는 손길을 내밀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골프장에서 휘두를 골프채 성능과 값을 알아보는 책자를 넘길 그 시간에, 골프장 하나 짓는 동안 무너지는 우리 자연 삶터와 시골사람 삶터를 돌아볼 뿐더러, 자기가 참말 운동을 하는지 지랄을 하는지를 곱씹어 볼 ‘홀로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 2차대전 때 폴란드의 한 교육학자는 그가 데리고 있던 기숙사의 아이들이 나치스의 집단학살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자, “아이들을 1분 간도 방치할 수 없다”면서 자기를 구조해 주려는 손길도 뿌리치고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함께 끌려가 학살당했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물론 그런 상황과는 다르다. 그러나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스스로의 영토를 잃고 쫓겨나 짓밟히고 비뚤어져 병든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사실은, 나날이 우리들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폴란드의 그 학자의 백 분의 일의 양심이라도 가지고서 이 글을 썼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죄스럽다 ..  《이오덕-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청년사,1977) 머리말


 1977년에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책을 낸 이오덕 님은 ‘폴란드사람 야누슈 코르착’ 이야기를 당신 책 머리말에 적습니다. 이 머리말에 나온 ‘폴란드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사람은 오래도록 없었습니다. 이 폴란드사람 책은 199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그러나 이 첫 책은 거의 알아보는 사람이 없이 사그라들었고,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똑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살아남은 책은 이번에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을 펴내 준 ‘양철북’에서 2002년에 내놓은 《아이들》 하나뿐입니다.). 1979년을 유네스코에서 ‘세계아동의 해’로 삼아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세계 아동의 해 기념 어린이그림 출품’을 했으면서도, 한국땅 어느 누구도 1979년이 왜 ‘세계 아동의 해’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1979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세계 아동의 해’ 기념우표까지 펴낸 한국이지만, 이 기념우표가 왜 나왔는지를 깨닫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이오덕 님은 ‘전쟁 문학’을 다룬 어느 책 하나를 읽다가 몇 쪽에 걸쳐서 나온 폴란드사람 이야기에 크게 뭉클해서 당신 책 머리말에도 그분 이야기를 적었지만, 1979년 그해에, 한국땅 미술학원에서는 ‘세계 어린이 그림대회에 입상시킬 작품을 보낼’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이름은 ‘미국과 일본’에는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밖 훌륭한 사람들 이야기나 책을 부지런히 번역해서 팔아먹고(?) 있는 한국 사회와 책마을 흐름을 돌이켜본다면, ‘미국과 일본에는 소개가 잘 안 되고 있는’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리 대단하고 놀랍다고 할 만하다는 이야기가 가득하고, 이리하여 1979년이 ‘야누슈 코르착이 태어난 100돌이라고 해서 이해를 기리는 온갖 일을 했음’에도, 미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까지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믿고 언제나 함께하면서 웃고 우는 교육자’ 이야기를 한국사람들이 알아보고 배우고 깨닫고 곰삭이기는 힘들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2) 책


 충청남도 홍성에 자리한 〈풀무학교〉에서 일하는 홍순명 선생님은 1987년에 《린하르트와 겔트루트》(광개토)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1962년에 《나라 건지는 교육》(정음사)이라는 책을 펴낸 최현배 님은 책 끝에 〈베스달로찌이의 교육 사상〉이라는 논문을 싣습니다. 《나라 건지는 교육》은 1975년에 정음문고로 다시 나오는데, 이 책 끝에 실린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때에 쓴 ‘페스탈로찌를 연구한’ 한국사람이 쓴 첫 글입니다. 그러나 페스탈로찌라는 분 삶과 생각이 담긴 책은 1960년에 이르러 왕학수 님이 낸 《세계교육명저총선 (1)》(세계교육명저발간위원회)에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옮겨졌고, 이때 〈숨은이의 저녁놀〉이나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쳤나〉가 소개됩니다. 뒷날 일본사람이 연구한 페스탈로찌 논문이 신구문화사 손바닥책으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페스탈로찌가 써낸 수많은 글 가운데 사람들이 널리 읽을 만한 책은 좀처럼 옮겨지지 못했고, 고려대학교 김정환 교수가 옮긴 《은자의 황혼》이 아직까지도 ‘딱 하나 판이 끊어지지 않고 겨우 읽히’고 있을 뿐입니다. 1949년에 박지영이라는 분이 《페스타롯찌》(대한교육연합회)라는 전기를 써냈는데, 일제강점기 때 최현배 님을 비롯해 뜻있는 분들이 페스탈로찌 연구를 하며 이분 교육얼을 한국땅에 이어심어 보고자 무던히 땀을 흘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고려대 김정환 교수가 애써서 《페스탈로찌의 생애와 사상》(박영사,1974)과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고려대학교 출판부,1975)을 쓰고, 《페스탈로찌의 교육철학》(고려대학교 출판부,1995)까지 써냈음에도,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배우는 이들이 교재로 스쳐 지나가듯 살필 뿐, 삶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데도, 김정환 교수는 《페스탈로치가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서원,1989)를 우리 말로 옮기고, 《페스탈로찌의 실천》(젊은날,1991)을 우리 말로 옮기면서, ‘허울뿐인 이름으로 남는 위인전 주인공’이 아닌,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돌아보며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이슬떨이’로 페스탈로찌가 훌륭한 사람임을 깨달아, 우리들한테 이분 뜻과 생각을 나누어 주고자 애썼습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페스탈로찌 님이 쓴 손꼽히는 훌륭한 책 가운데 하나인 《린하르트와 겔트루트》가 1987년에 옮겨졌으니 무척 축하하고 기릴 만한 일이었으나, 이 번역책을 눈여겨보거나 알아챈 교육학자나 교육학과 교수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몹시 드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 교육은 ‘아이 넋과 얼과 삶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교과서 진도를 학기에 따라서 제대로 끝마쳐서 시험점수 잘 맞도록 하고 더 높다는 대학교에 보내도록 하는’ 교육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페스탈로찌가 애쓴 끝에 생긴 초등학교’이면서도 초등교육이 이토록 끔찍하게 무너질 수야 없습니다. 더더구나 초등학교 문을 열게 한 어른이 무슨 마음으로 초등학교를 열었는가를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없어요.

 초등학교 아이들한테조차 착하고 따뜻한 마음씨가 아닌, 더 많은 영어 지식과 한자 지식을 쑤셔넣는 데다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영어교실 짓는 데에 바치는 모습을 살핀다면, 한국에서 교육은 ‘가르침’이 아니라 ‘고기짐승 살찌우기’와 다를 바 없다고 느낍니다.


.. 그(야누슈 코르착)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되물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의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에 처해 있다면, 당신은 그 아이를 버리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200명이나 되는 우리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담담하게 덧붙였습니다. “군인들에게 아이들을 밀지 말라고 해 주십시오. 줄을 서서 갈 테니까, 아이들이 놀라거나 겁에 질리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  (32쪽)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한다면서,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겨 읽는 어린이책을 살펴보지 못할 뿐더러, 어린이 그림책을 헤아리지 못하는 초등학교 교사요 교대 학생입니다.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한다면서,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즐겨 읽는 문학책과 만화책을 거들떠보지 못할 뿐더러, 이 푸름이들이 마음밭을 살찌울 책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못하는 중고등학교 교사요 사범대 학생입니다. 대학교 교수를 꿈꾼다고 하면서 대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이 우리 세상을 어떻게 읽어내도록 이끌까를 굽어살피면서 자기부터 마음자리 다스릴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시간강사요 조교수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사들을 탓하기 앞서, 아이들 어버이 된 우리들 여느 어른들부터도, ‘아이를 낳기는 하지’만 ‘아이가 어떤 책을 언제 어떻게 즐기는가’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아이들한테 걸맞는 책이 무엇인지, 아이 마음을 가꾸거나 북돋울 책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입니다. 책뿐 아니라 삶에서도, 어떤 놀이와 일로 아이들 몸을 튼튼하게 추슬러 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른들입니다.


.. 기차 안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한테 떠밀려 흩어지지 않도록 그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그의 품에 안긴 가장 어린 아이가 먼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나 농부가 될 거예요. 그래서 밀을 많이 기를 거예요. 밀이 자라면 언니들이랑 오빠들한테 줄 거예요. 할아버지한테도 줄 거예요, 아주 많이.” ..  (39쪽)


 누구나 입으로는, “나는 우리 아이를 사랑해요.” 하고 말합니다. 말하곤 합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또 몸으로 바라보는 어른들 삶과 매무새를 살피면, 오늘날 그 어떤 한국 어버이들이 “우리 아이를 사랑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도록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입으로 사랑한다고 읊는다고 하여 참말 사랑하고 있겠습니까. 입으로 나라사랑 안 하는 이가 누가 있으며, 글로 겨레사랑 안 한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친 소고기도 한국 경제를 사랑해서 들여온다고 하는 판입니다. 지난날 미국쌀을 사들일 때에도 한국 경제와 농촌을 사랑해서 들여온다고 했습니다. 미군범죄가 끊이지 않아도 범죄자 미군을 벌주지 않는 한국정부는 이 나라 사람들을 걱정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밀어넣는 어느 교사가 “우리는 학생을 사랑 안 해” 하고 말하든가요.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먹을거리를 만드는 식품회사 회장님들은 당신 아이들한테 당신 회사 먹을거리를 기꺼이 내놓을까요. 베스킨라빈스 창업주는 자기가 만든 얼음과자를 자기 식구들한테 안 먹인다고 하면서, 자기 식구 아닌 사람한테는 엄청나게 팔아치워 떼돈을 법니다. 아이들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가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버이들조차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으로 실어나르고자 자가용을 몰면서 이 땅을 더럽힙니다. 앞과 뒤가 맞는 일을 우리 어른 스스로 안 하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보고는 ‘공부 잘하라’는 말만 되뇌입니다. 아이들이 해야 할 공부가 무엇이기에, 아이들이 공부 잘하면 아이와 우리 모두한테 무엇이 도움이 되기에.




 (3) 코르착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과 함께 나라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야누슈 코르착(야누쉬 코르착/야누스 코르착)’ 님 책은 모두 일곱 가지입니다.


① 새책방에서
《노영희 옮김-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양철북,2002)
② 헌책방에서
《송순재,안미현 옮김-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내일을여는책,2002)
《김신애,송순재 옮김-홀로 하나님과 함께》(내일을여는책,2001)
《송순재,안미현 옮김-아이들을 변호하라》(내일을여는책,2000/1998)
《송순재,손성현 옮김-안톤 카이투스의 모험》(내일을여는책,2000)
《김선애 옮김-아이들이 심판하는 나라 (1)∼(2)》(시공사,1996)



 시공사에서는 ‘야누스 코르착’으로 적고, 내일을여는책에서는 ‘야누쉬 코르착’으로 적었으며, 양철북에서는 ‘야누슈 코르착’으로 적습니다.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과 《아이들이 심판하는 나라》는 이야기책이고, 《아이들을 변호하라》와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는 교사와 어버이한테 읽히고자 쓴 책이며, 《홀로 하나님과 함께》는 기도책입니다.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은 우리들 누구한테나 마음속에 천사가 깃들어 있으나, 천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깨우쳐 주는 작은 천사(어린이)한테 깨우침을 받고는 자기 스스로 작은 천사와 손 잡고 살아가고자 애썼던 늙은 천사가 자기 길을 어떻게 걸어갔는가를 퍽 어둡게 느껴지는 그림결로 보여줍니다.

 나라가 어두웠고 사회가 어두웠으며 아이들 앞날이 어두웠습니다. 허울뿐인 ‘보호’구역에서 ‘보호’가 아닌 ‘감시’와 ‘따돌림’에 들볶이면서 굶주려야 한 사람들 삶이었으니, 이와 같은 그림결이 그때 그 사람 그 모습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데에 어울리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어두웠으니 어두웠지요. 어둡다고 했으니 어두웠어요. 어두운 곳에서 몸둘 곳을 찾으려 했지만 빛줄기를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밖에는 없는 빛이었고, 밖에서 빛을 뿌려 주려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괜히 자그마한 빛이라도 조금 뿌렸다가는 덩달아 붙잡혀 괴로운 굴레에 붙잡힐 수 있었기에 더 몸을 사리기도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코르착은 아이들 가슴마다 빛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버려진 아이들’을 꾸준히 고아원에 받아들였고, 먹을거리가 모자랐어도 모자란 대로 서로 더 나누면서 살았습니다. 나치가 아이들을 붙잡아 가스실로 보내기 앞서, 틀림없이 코르착과 아이들은 어디론가 내뺄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코르착도 아이들도 ‘보호’ 아닌 보호구역에 머물렀습니다. 그러고는 다 함께 손 잡고 노래 부르면서 가스실로 갔습니다. 아이들과 코르착과 스테파니아 선생님 모두한테는 가슴에 고이 안고 있는 빛이 있었거든요. 이 빛으로 아이들과 코르착과 스테파니아 모두 웃고 노래하며 어깨동무를 하며 지냈어요. 그리고 이 빛은 코르착네 고아원 둘레에 빛을 선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코르착뿐 아니라 스테파니아 선생님과 이백이 넘는 아이들만 걱정없이 지낼 쉼터가 아닌, 이 모두가 함께 깃든 곳에 이 모두한테 이웃인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슴에 빛을 안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면서, 그곳 ‘보호구역’에 남았고, ‘가스실 가는 기차’를 탔고, 마지막 때까지도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건넸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죽음이 닥친 그때에, 자기들을 총칼로 윽박지르는 그 나치 군인들한테까지도 사랑을 나누어 주려고 한 코르착이요 스테파니아요 아이들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메마른 가슴에 환한 꽃을 피워 주기를 꿈꾸었고, 거친 마음에 살가운 열매를 맺워 주기를 바랐으며, 피눈물도 없이 된 그 몸뚱이에 뜨겁고 붉은 피가 다시 흘러 주기를 비손하면서 기꺼이 ‘나치 가스실’로 걸어간 이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은 이 ‘빛 이야기 한 자락’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대목을 짚어서 보여주기에는, 좀 이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짝 섣부르다고 느낍니다. 조금 더 깊이 다가서지 못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코르착이라고 하는 사람 삶, 그리고 코르착을 도와 고아원을 함께 지킨 스테파니아 선생님 삶, 여기에 코르착과 스테파니아 선생님하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면서 울고 웃던 아이들 삶을 한 번 더 곰삭여 내어 붓끝에 담아내지는 못했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움이 크고 싹을 틔우려고 하는 ‘코르착 알아가기’ 첫걸음인데, 이만한 그림책이라도 얼마나 고맙고 반가우랴 싶어요. 별 다섯 만점에서 별 넷을 서슴없이 붙입니다. 그러나 별 하나는 붙이지 못합니다. 기다립니다. 별 하나 더 붙일 그림책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코르착 스스로도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알아 가지’ 않았듯이, 코르착을 이야기하는 그림책도 아이들 걸음걸이와 삶에 맞추어 한 걸음 두 걸음 느긋하게 내디디면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1.7.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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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이에요~
    from 양철북, 영혼을 두드리는 북소리 2008-07-24 09:56 
    와우.
  2. 된장님의 서평!
    from 양철북, 영혼을 두드리는 북소리 2008-07-24 10:08 
    천사들의 행진 - 양철북 인물이야기 ① 야누슈 코르착 아이를 사랑한다면,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셔요[그림책이 좋다 49] 강무홍 + 최혜영, 《천사들의 행진》(야누슈 코르착)- 책이름 : 천사들의 행진- 글 : 강무홍- 그림 : 최혜영- 펴낸곳 : 양철북(2008.6.20.)- 책값 : 10800원(1) 사람저는 올 5월 25일, 천주교




 (5) 살갗 흰 사람


 ‘살갗 누런 사람’들은 ‘살갗 흰 사람’이 모여 사는 나라를 높이 우러러 마지 않을 뿐더러, 가장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살갗 흰 사람’ 나라에서 조그마한 일 하나가 터져도 법석일 뿐더러, 신문과 방송에서 큼직큼직하게, 또 여러 번 다룹니다.

 ‘살갗 누런 사람’들은 ‘살갗 까만 사람’이 모여 사는 나라를 업신여길 뿐더러, 가장 못났다고 여깁니다. ‘살갗 흰 사람’ 나라에서 커다란 일이 수없이 터져도 모르쇠일 뿐더러, 신문과 방송에 한 귀퉁이로나마 실리는 법이 없습니다.




.. (사루도들은 어디에나 다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무얼 하려는 걸까?) … 이시는 그들이 자기가 소중히 하는 것들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사루도는 투시가 만들다 만 바구니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저것이 사루도다. 여자의 집에까지 거침없이 들어가 멋대로 굴잖아. 저 악마들이 약탈한 뒤에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이다. 투시와 큰아버지는 재빨리 달아났고, 저들은 어머니에겐 손대지 않았다 …… 그러나 언제나 돌아갈 것인가?) ..  (182∼187쪽)


 여러 해 앞서 어느 술자리를 떠올립니다. 생각이 있으면서 좋다는 책을 펴낸다고 하는 사람하고 어울린 자리였습니다. 미국에 허리케인이 불고 토네이도가 어쩌고 땅이 갈라지고 눈보라가 치고 하는 이야기가 왜 한국땅 ‘아홉 시 새소식’으로 나오고 신문에서도 떠들썩하게 실어야 하느냐 하고 푸념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나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에다가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어이하여 한 마디 안 실리느냐고 덧붙였습니다. 그러고는, 미국 대통령 뽑는 소식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자 뽑는다는 이야기가 왜 날마다 특종처럼 다뤄져야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주앉은 나이 지긋한 분께서 ‘미국은 우리 나라한테 중요한 나라니까 그러지’ 하고 대꾸해 줍니다. ‘무엇이 중요한데요?’ 하고 여쭐까 하다가, ‘그깟 나라가 뭘 중요하다고’ 하는 혼잣말만 하고 술잔을 붙잡았습니다.




.. 바깥쪽 방은 마차를 따라온 사람들로 순식간에 꽉 찼다. 남자들은 창살에 기대어 신기한 듯이 이시를 지켜보았고, 이시가 알 수 없는 말로 뭔가를 자꾸만 물었다. “니제 바 야히(나는 야히 족이다).” 이시가 말하자 모두 한꺼번에 크게 웃어댔다. 보안관 조수가 커피와 수프와 빵을 담은 쟁반을 가져다 이시 앞에 놓았지만 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점점 더 많은 사루도가 바깥쪽 창에 와서 창살에 얼굴을 대고는 이시에게 말을 하게 하려고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들은 바보처럼 헤픈 웃음을 연방 웃었고 담뱃내나는 침을 아무 데고 퉤퉤 뱉었다 ..  (221∼222쪽)


 집에서 일하다가 너무 더워서 혼자서 보리술 한 잔 꼴깍꼴깍 하다가 잠깐 인터넷편지를 열어 보려고 인터넷포털에 들어가 보면, 날마다 ‘살갗 흰 사람’ 나라인 미국에서 일어난 소식이 끊임없이 굵직굵직 다루어집니다. 보려고 하지 않으나 보이게 되고,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광고창을 지우다가 잘못 눌러서 억지로 보게 되기도 합니다.

 문득문득, ‘내가 저 미국이라는 나라 소식까지 들을 까닭이 없으니 텔레비전도 보기 싫고 신문도 보기 싫은데, 인터넷을 하면서 이런 소식을 보지 않을 수 없다면 인터넷도 하지 말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만 지나도 쓰레기처럼 쌓이다가 버려지는 미국이라는 나라 소식들인데, 이런 쓰레기 소식이 아니라, 참으로 내 삶을 북돋우고 내가 알아가면서 깨달아야 하는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을 찢고 책을 펼치지 않았나’ 하고 돌이켜봅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외워야 했던 세계사와 세계지리 지식쪼가리로는 다뤄지지 않던 이웃 아시아 나라들 발자취와 삶을 알아보고 싶어서, 똑같은 ‘살갗 흰 나라’이지만, 덴마크며 폴란드며 에스파냐며 헝가리며 체코며 오스트리아며 핀란드며 아일랜드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새책방과 도서관을 쑤시다가 마땅한 책을 만나지 못해 헌책방을 뻔질나게 드나들게 되지 않았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어쩌면, 저로서는 그 ‘살갗 흰 사람’이 모여 있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제 삶하고는 아무런 이어짐이 없습니다. 이음고리가 없습니다. 잇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 삶과 생각과 터전하고, 우리 이웃 아시아 나라 사람들 삶이나 아프리카 나라 사람들 터전이나 남아메리카 나라 사람틀 생각은 조금도 안 이어져 있는지 모르겠어요. 굳이 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꾀죄죄하며 가난뱅이인 나라들하고는 남남이라고 여기지 싶어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우리가 우러러 마지 않는 그 ‘살갗 흰 사람’들마냥 ‘살갗 하얗게’ 되고프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살갗 희다’는 사람들 모인 나라에서 밑바닥에서 일한 사람들, 쟁기와 삽을 들고 논밭을 일구던 사람들은 죄다 우리 ‘살갗 누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빛이 흙빛이었지만.





.. 이튿날 아침, 이시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보안관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속옷, 셔츠, 웃저고리와 바지, 넥타이, 양말, 구두. 옷을 다 갈아입자 이시는 자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쳇, 참! 절반은 사루도고 절반은 야히 족이구나!” 몇 번인가 왔다갔다 하며 방 안을 서성거린 뒤 이시는 결국 구두와 양말을 벗어서 보안관에게 돌려주었다. 마침 그때 마쟈파가 들어왔다. 이시가 말했다. “이제야 알았어요. 사루도의 발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이상한 것은 당신네들이 구두라고 부르는 바로 이거예요. 발이 직접 땅에 닿지 않았는데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  (232쪽)


 제아무리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서 사무직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며칠 동안 시골 논밭에서 땅을 만지며 흙을 돌보고 풀과 나무를 보듬으면서 일을 하면 어느새 살갗이 구리빛이 됩니다. 조금 더 일하면 까무잡잡해집니다. 느긋하게 여러 달 일하면 조금씩 흙빛에 가까워집니다.

 한국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벨기에사람이든 캐나다사람이든 멕시코사람이든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몽골사람이라고, 일본사람이라고, 러시아사람이라고, 독일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흙을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 살갗은 흙빛입니다. 도시를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를 이루는 잿빛과 마찬가지로 잿빛입니다.

 다만, 도시는 ‘시멘트 잿빛’과 ‘아스팔트 죽은 빛’을 감추려고 합니다. 겉에 껍데기를 씌웁니다. 풀 한 포기도 없는 주제에 풀빛 페인트를 입힙니다. 이에 따라 도시사람들은 싱그러움을 스스로 내버린 잿빛을 가리고자, 또 죽음만 도사리는 아스팔트빛을 숨기고자, 화학약품으로 화학교배를 한 화장품과 약을 바르고 기계로 살을 뜯어고치며 돈을 들여서 요가와 헬스 따위를 합니다. 그러면서 꿈에도 그리운 ‘살갗 흰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비로소 ‘허여멀겋게 파리해진 얼굴빛’이 되어 버립니다.


.. “이 바구니는 우리 부족의 바구니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 박물관 와토구르와에 이 바구니가 있을까요?” … “이 두 개는 내 사촌동생이 만든 거예요. 워누포에서.” 이시는 곁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슴이 몹시 들먹이고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었다. (이것은 그 아이의, 투시의 바구니다. 그러나 이 친절한 사루도, 내 새 친구는 워누포에 왔던 놈들 가운데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고, 목소리도 똑똑이 기억하고 있다. 이 사람은 그들 가운데는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 바구니가 여기 있단 말인가?) ..  (246쪽)





 흙을 밟지 않는 사람은,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마을 이웃과 어울리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살갗 흰 사람’이 됩니다.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집에만 머무는 사람 ‘핼쑥한 빛’하고는 다릅니다.

 한국에 살든 일본에 살든 중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영국에 살든 프랑스에 살든 라오스에 살든, 흙을 안 밟고 땀을 안 흘리며 일다운 일을 내동댕이친 사람들 살갗은 한결같이 ‘허옇’습니다. 어디에 살더라도 흙을 밟거나 땀을 흘리거나 일다운 일을 제 손으로 찾아서 애써 살아가는 사람은 흙빛을 닮아서 누렇거나 까무잡잡한 살결이 됩니다.

 흙을 밟지 않으니 ‘흙 밟는 사람이 거둔 열매’를 낼름낼름 받아먹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으니 ‘땀흘리는 사람들이 이룬 보람’을 돈푼 치르며 집구석에서 얻어먹습니다. 일다운 일을 하지 않으니 ‘제 손으로 보람차게 일하는 사람들’ 등골이 빠지도록 괴롭히면서 자기 주머니에 돈이 철철 흘러넘쳐도 아직 적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이웃과 나눌 줄을 모릅니다.

 미국땅에 살지 않더라도 ‘살갗 희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들볶습니다. 미국땅에 살더라도 ‘살갗 안 희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6)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


 북아메리카 토박이로 살던 수많은 겨레 가운데 하나였던 ‘야히 겨레’는 이제 이 지구에 없습니다. 지구에서 사라진 수많은 목숨붙이마냥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지구에서 사라진 숱한 목숨붙이처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남고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야히 겨레’였던 ‘이시’는 틀림없이 자기 씨앗을 남겨서 자기가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지구에서 마지막 삶이 되었던 온갖 목숨붙이들도 어렵사리 자기 씨앗을 남겨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들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야히 겨레는 스스로 자연 품에 안기며 조용히 흙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더는 ‘들짐승’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깨달은 목숨붙이들도 ‘동물원 구경거리’나 ‘실험실 연구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이 지구를 떠나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우리를 찾아낼 때까지 끝까지 찾아다닐 거야. 야히 족의 마지막 마을 마지막 한 사람을 없애버릴 때까지 단념하지 않을 거다. 이제까지 다른 마을, 다른 야히 족에게 했듯이.” ..  (27쪽)


 한국이라는 나라에 미친 소고기를 팔려고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미친 소고기 하나로 끝내지 않습니다. 미친 소고기에 앞서 수많은 물건을 억척스럽게 한국에 팔아 왔습니다. 그동안 적잖은 한국사람들은 이에 맞서며 반대를 했지만, 여태껏 어떤 반대 움직임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에 뭘 팔아서 돈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이 생각이 죄 이루어집니다. 이런 장삿속이 한국사람과 한국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만, 이런 장삿속에 따라서 콩고물을 얻는 한국사람 또한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도권 교육이 입시지옥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한다고 하지만 조금도 고쳐지지 않는 까닭은, 아무리 입시가 지옥이라고 해도 대학교가 졸업장 따서 대기업 면접 볼 때 적는 훈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나와 이웃이 모두 살아남자면, 아니 모두 오붓하게 살자면 입시지옥을 한칼에 걷어치우고 제도권교육도 한달음에 치워버리면 될 터이나, ‘내 앞가림이 우리 앞가림’보다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콩 한 알 함께 나누어 먹기보다는 혼자 먹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콩 한 알을 심어서 백 알을 거두어 더 즐겁게 나누어 먹자는 생각을 안 하고, 이 콩 한 알을 혼자 냠냠짭짭해서 혼자서 끝내고 싶기 때문이구나 싶습니다.





.. 그들은 망설임 없이 떠났다. 미련을 두고 아쉬워하고 눈물 흘리며, 남겨 두고 가는 모든 것의 슬프고 즐거운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  (151쪽)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국이든 두국이든 세국이든, 사람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들 사람은 한 번 태어났으니 한 번 죽습니다. 태어나서 사는 동안 1분 동안 숨을 못 쉬어도 꼴까닥 하고 뒈집니다. 며칠 물 안 마시면 말라비틀어 돌아가십니다. 햇볕 안 쬐고 살면 오래지 않아 병들어 몸이 망가집니다. 우리는 돈이 중요한 곳에서 사는 한편, ‘똑같은 자연 목숨붙이’로 살아갑니다. 밥 안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물 안 마시고 살 수 있습니까. 말 안 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사람 도움 안 받고 혼자서 땅 파서 기름 뽑고 누에 키워서 실 뽑고 잣고 옷 해서 입을 수 있습니까, 뭐를 할 수 있습니까. 돈도 틀림없이 있어야 할 터이지만, 돈 아닌 다른 중요한 대목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돈만 아는 이 나라에서, 돈 아니면 딸아들한테 아무것도 못 가르치는 이 나라에서, 돈 없으면 개떡도 아닌 똥떡도 아닌 빙신떡으로 여기는 이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사람으로 얻은 고마운 목숨을 잘 간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스스로 사람임을 깨닫고, 내 이웃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임을 깨닫는 이들이, 얼마나 애틋하고 곱게 제 뜻과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사루도의 신들, 사루도의 영웅들은 야히 족으로선 잘 모르겠어요. 사루도의 신들이나 영웅은 주프카 신이나 카르츠나 신이나 야히 족의 영웅보다 똑똑해요. 훨씬 똑똑해요. 사루도의 신들은 사루도에게 수레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장을 만드는 튼튼한 무쇠와 강철을 주었어요. 숱은 좋은 것들을 주었어요. 그렇지만 사루도의 신들은 사루도가 지혜롭게 살도록 바라지는 않았던 듯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사루도가 따라야 할 분명한 ‘생활 방법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  (289쪽)





 ‘살갗 흰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살갗 누런 사람’인 야히 겨레를 죄다 죽였습니다. 아주 끔찍하게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그이 ‘살갗 누런 사람’들이 쓰던 물건도 빼앗아서 기념품으로 삼고 유물로 삼고 박물관도 짓습니다.

 살갗이 처음부터 하얗지 않던 그네들이, 어느 때부터 살갗이 희게 되면서 누리는 단맛을 알게 된 뒤부터, 혀가 굳어서 단맛 아니고는 못 느끼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한국땅에서 살아간다는 ‘살갗 누렇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살갗 흰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세상 모든 힘과 이름과 돈을 ‘살갗 하얗게 된 사람’이 거머쥡니다. 처음부터 살갗이 누러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흙과 같은 살빛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하얗게 안 되려는 놈들은 빨갱이로구만’ 하는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저는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살고 싶습니다. 내 땅을 내 맨발로 밟으면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물로 목을 축이는 가운데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땅에서 난 곡식과 열매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4341.7.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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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랑


 사람들이 골목길을 찾아와서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저도 골목길 사진을 찍지만, 저는 ‘골목에 깃든 집에 살면서 내 삶터를 찍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로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은 ‘골목길에 안 살면서 골목길을 사진 작품으로 담아내는 사람’이곤 합니다. 어릴 적에 골목집에서 살아 본 적이 있는 분이 있으나, 골목길이라는 데를 처음 거닐고 처음 찍어 보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이제는 헌책방에서 사진을 찍거나 헌책방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예전에 헌책방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헌책방 여러 곳을 꾸준히 찾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거의 처음으로 찾아와 본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아 본 사람’이기 일쑤였습니다.


.. “투시는 단부사(귀여운)한 좋은 아이예요. 귀엽고 얌전하고.” “저보다 키가 큰 오빠에게 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보시오, 뺨이 붉은순나무 열매처럼 빨개졌소.” 투시가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앉았을 때 어머니는 생각했다. (할머니께서 보기 좋게 앉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이 아이는 마치 갈색 꽃잎이 펴진 것처럼 치맛자락을 잘 여미고 앉는구나.) ..  (21쪽)


 지난날,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아낸 사람들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낯을 찌푸리기 일쑤였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습니다. 헌책방을 즐겨찾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진 찍는 사람도 제법 있는데, 이분들은 어인 일인지 그렇게 즐겨찾는 헌책방에서 사진 찍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궁금함은 오래지 않아 풀렸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헌책방에 가면 책 보느라 바쁘지, 사진 찍을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니, 언제 이렇게 사진을 다 찍었어요?’ 하는 책손님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헌책방 찍은 사진이나, 단골 아저씨 찍은 사진을 선물 삼아서 가끔 뽑아서 드리는데,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은 헌책방에서 책 보는 데에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어느 틈을 내어 이런 사진을 다 찍었을까?’ 하고 물으셨구나 싶더군요.


.. “(팔찌를) 끼면 좋을 텐데.” “아니야, 끼는 건 싫어!” “어째서 싫지? 너희 둘은 진흙으로 단단히 바른 집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살기로 되어 있었는데…….” 투시는 마치 이시보다 훨씬 나이 많은, 그의 어머니처럼, 아니 할머니처럼 철들고 지혜에 가득 찬 눈길로 사촌오빠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노인네들의 꿈이야. 내 꿈은 그것과는 다르고, 이 헛된 세계와도 아무 상관이 없어. 우리는 영웅도 아니거니와 신들도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세상이 시작되던 때와는 달라. 우리는 텅 빈 이 세상을 메꿔 줄 만한, 사루도를 해치울 만한 사람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슈와, 슈와(그야 그렇지). 흰 조가비 아가씨! 그런데 네 꿈은 어떤 꿈이지?” “여자의 꿈이지 뭐.” “남자에게 말하면 안 되나?” “안 되지는 않아. 얘기할께요. 오빠가 나에게 ‘흰 조가비 아까시’라는 이름을 주었고, 내 꿈도 ‘흰 꿈’이니까요.” 따뜻한 봄햇살이 쏟아지는 토끼풀 위에 앉아서 투시는 이야기했다 ..  (142쪽)


 사진찍기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자기가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다고. 자기가 그지없이 아끼는 대상이 아니라면 사진에 담을 수 없다고. 자기가 오래도록 몸담고 같이 살지 않고서는 속내를 읽어내는 사진을 얻을 수 없다고. ‘꾸준히’라는 말로만은 안 되고, ‘늘 같이 언제까지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진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작품이 저절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제가 사는 동네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 작품이 영 내키지 않던 까닭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갑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 이름을 내세울 작품’을 넘는 사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가 찍는 사람이나 대상을 더 깊이 사랑하는’ 사진으로 뻗어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가 발디딘 땅’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함께하는 사진이 아니라, ‘여태껏 겪거나 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 재미있거나 놀라워서’ 그냥 한 번 찍어 본 사진이었습니다.


.. “그렇지. 작은 흰 조가비 아가씨. 우리는 마지막 야히 족이야.” 외사촌 남매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벙긋 웃었다. (나이로 보면 투시는 이미 젊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여동생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사랑스럽다. 투시의 뺨은 지금도 붉은순나무 열매처럼 붉다. 머리카락은 길고 반지르르 윤이 흐른다. 전에 할머니가 둘둘 감아서 빗어올렸던 것처럼. 투시는 야히 족 여자답게 의젓하고 반듯한 자세로 가볍게 걷는다. 지금도 투시는 메추라기 소리처럼 정겹게 시가가 시가가 하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가 워누포에서 나갈 때면 투시도 언제나 나를 따라온다. 내가 사냥할 때 투시는 언덕 너머에서 여자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함께 도토리며 땔나무를 모은다.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날마다 함께 계획을 세운다. 투시는 날마다의 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채워 준다.) 투시는 투시대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 사촌오빠 와나시는 야히 족의 사냥꾼 관습에 따라서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머리 위에 감아올려 묶었던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겨우 뛸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이 오빠 뒤를 따라 어디든지 갔었지. 이 와나시가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내 나날은 이 와나시가 채워 준다. 요즈음에는 ‘흰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  (167∼168쪽)


 어제 서울 나들이를 자전거로 하면서, 용산역부터 종로거리와 서대문을 돌고 용산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시청 앞 너른터는 일찌감치 빽빽이 들어선 전경차들이 빙 두르고 있더군요. 한 겹으로 둘렀는데 이로도 모자라는지 더 두르려 하고, 길을 걷는 사람 모두를 막아섭니다. 시청 앞 너른터로 가는 사람이 아닌 데에도, 촛불모임을 하는 사람이 아닌 데에도 못 가게 막아섭니다. 전경들은 사람들한테 아무런 대꾸도 않습니다. 그저 모두한테 길을 막을 뿐입니다. ‘군인정신’일까요. ‘시키니까 따를 뿐’일까요. 군인한테 웃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대장이나 소대장이나 중대장일까요, 군인이라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일까요.


.. (슈(물론), 나는 투시를 위해 팔찌를 만들 수는 없지. 투시는 진짜 내 누이동생과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투시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의 친구. 내 단부사 아가씨지!) ..  (181쪽)


 종로3가에서 볼일을 마친 다음, 독립문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렀다가 용산으로 가는 동안,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달렸습니다. 숙대입구역부터 용산역 앞까지는 거의 꼼짝도 못하는 자동차들입니다. 저는 평균빠르기 20킬로미터 안팎으로 자전거를 내처 달립니다. 자전거가 훨씬 빠를밖에 없지만, 걷는 사람이 버스나 자가용 탄 사람보다도 훨씬 빠르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막히는 서울 시내에서 자가용을 버리지 않습니다. 좀 멀리 가는 분은 어쩔 수 없을 터이나, 버스도 버리고 두 다리로 걸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울 시내는 걷기에도 그다지 안 좋다고 하지만, 걷기에 안 좋다고 해도 자꾸 안 걸으려고 하니까 더 나빠진다고 느낍니다.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 나쁜 찻길이라고 해도 자꾸자꾸 자전거를 타고 움직여 주고, 또 ‘발바리’ 같은 자전거 행사를 꾸준히 하면서 우리 스스로 느껴야 비로소 ‘자전거로 다닐 터전’이 나아집니다.


.. (투시의 낮은 ‘풀숲의 속삭임’을 듣고 싶다.) 이시는 간절히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와르가 한순간, 언뜻 투시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시는 풀숲 속을 걸어가는 자기의 바로 뒤에서 소리도 없이 따라오는 투시의 기척을 애타게 느끼고 싶었다. 잠깐 뒤돌아보았을 때 투시의 웃는 얼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간절하게 생각했다 ..  (267쪽)


 촛불모임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뜻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촛불모임에 나와서 외치는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이렇게 애쓰고 스스로 삶을 바꾸고 생각을 고치며 매무새를 조금씩 야무지게 다스리는 동안 자기부터 거듭납니다. 자기부터 거듭날 때 자기 삶이 거듭나고, 자기 삶이 거듭나면 자기와 이웃한 사람들한테 좋게 영향을 끼쳐서 서로서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니까 몸에 좋은 밥을 찾아서 먹어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니까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애써서 찾아 읽어요.


 (4) 죽음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우리들 사랑은 ‘우리 자신’도 아니요, ‘우리 삶터’도 아니요, ‘우리 삶’도 아닌 쪽으로 흐른다고 느낍니다. 자꾸만 ‘돈 사랑’으로 흐른다고 느낍니다.


.. 할아버지는, 앓지는 않았지만 그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이미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마디마디가 아파도 그러한 아픔을 없애 줄 만한 쿠이(의사)는 없었다 …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워누포로 오는 여행은 내 마지막 여행이었다. 다시 여행을 하기에는 나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 여름의 심한 더위가 골짜기를 덮치기 전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그다지 울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가 버린 뒤로는 아침마다 더욱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공기가 하루하루 무거워지는구나. 나는 이제 공기를 입까지 들어올릴 기운도 없는 것 같다. 용한 쿠이가 있어 가벼운 공기를 불어넣어 주면 좋겠다.”  … 바구니에 차를 담아 들여온 어머니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보고 할머니는 옛날처럼 그 머리에 손을 놓고 말했다. “우리 ‘조상들’ 때문에 우는 걸 그만두어라, 내 딸아. 내가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사람은 이제 너도 아니고 투시도 아니지. 나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가 버린 할아범이야.” ..  (160∼161쪽)


 돈은 있어야 할 테지요. 돈은 벌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무엇을 하는 돈인가 생각해 보았습니까. 어디에 쓸 돈인가 헤아려 보았습니까.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쓸 돈인가 살펴보셨습니까.

 자동차를 몰아야 할 돈입니까. 집을 사야 하는 돈입니까. 새 손전화를 사야 하는 돈입니까.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떠나야 하는 돈입니까. 사랑이한테 선물을 사 주어야 하는 돈입니까. 땅투기를 해야 하는 돈입니까. 멋스럽게 보일 옷을 살 돈입니까.

 기름값이 끝없이 치솟는 데에도 자동차를 굳이 몰아야 한다면, 또 값이 수백만 원부터 수천만 수억까지 하는 자동차를 굳이 사야 한다면, 그러면서 보험값 내고 뭐 치르고 해야 한다면, 돈이 꽤 많이 들겠지요. 집을 사야 한다면, 그런데 이 집도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여야 한다면, 넓이도 좀 되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십 억으로도 모자랄 테지요. 전화 걸고 문자 보내고 하는 쓰임새가 아니라 이 기능 저 기능 달린 수십만 원짜리 새 기계를 쓰고 싶어도 돈은 참 많이 듭니다. 멀리멀리 오래오래 나들이를 하고프니 돈이 퍽 들겠네요. 선물을 손수 안 만들고 백화점 같은 데에서 돈으로 사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겠어요. 그리고 …….


..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우리가 워누포의 할머니 할아버지군요.” … 큰아버지는 그 지팡이를 쓰는 자신을 ‘늙다리 네발짐승’이니 ‘오소리’니 하고 불렀다. “할머니가 곧잘 그랬는데, 내게도 공기가 무거워졌구나.” ..  (173쪽)


 돈을 사랑하는 분들은, 언뜻 보기에 ‘사랑’ 같지만, 속을 보면 사랑이 아닌 ‘죽음’이라고 느껴집니다. 살려고 버는 돈이 아니라 죽으려고 버는 돈 같습니다. 즐겁게 살고자 찾는 일자리가 아니라, 자기 삶을 망가뜨리며 빨리빨리 늙어버리려는 일자리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삶을 아름답게 여미지 못할 뿐더러, 그 돈푼조각으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벌어도 벌어도 모자라고, 써도 써도 시원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쓸 만큼 벌면 되는데, ‘쓸 만큼’이 어느 만큼인지 헤아리고들 있는가요. 가질 만큼 벌면 되는데, ‘가질 만큼’이 어디까지인지 느끼고 있는가요.

 더 많은 책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새로 나오는 책을 자꾸자꾸 읽어야 하겠어요? 아니지요. 읽으니 좋아서 자꾸 읽는 책이지요. 자꾸자꾸 벌어야 하는 돈은 무슨 뜻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벌어야 하는지요? 살려고, 즐겁게 살려고, 다 함께 살려고, 아름답게 살려고 버는 돈이 맞습니까.


.. “오늘은 강 건너에 가지 않느냐? 이제 곧 어둡겠구나.” 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겠어요. 가 봐야 찾지 못할 텐데요.” 어머니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는 거겠지, 와나시. 그렇지 않다면 벌써 찾아냈을 테니까.” 이시가 옆으로 다가가자 어머니는 두 팔로 아들을 감싸안았다. 어머니와 아들은 얼싸안고 울었다. 여러 달 동안, 참고 참아 온 쓸쓸함과 슬픔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허물어져, 그들은 목놓아 울었다. 눈물 속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리하여 둘은 큰아버지에 대해, 투시에 대해, 또다시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다만 이름은 말하지 않고 ‘없어진 사람들’이라고만 했다 ..  (200쪽)


 누구나 한 번 태어났으니, 한 번 죽습니다. 삶과 매한가지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때, 자기한테 가장 좋으며 걸맞으며 마땅한 길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삶이 즐거워야 죽음이 즐겁고, 죽음을 넉넉히 받아들여야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까를 짚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이 일흔 여든 아흔이 되어도 ‘난 안 죽어’ 하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삶다울 수 없어요. 백 살에 죽을 수 있고 일흔 살에 죽을 수 있으며 쉰 살에 죽을 수 있는 한편, 서른이 못 되어 죽을 수 있습니다. 열다섯에도 죽고 일곱에도 죽습니다. 죽음이란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죽음이기 때문에, ‘나는 바로 오늘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 언제라도 ‘내 마지막 날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삶을 추스르기 마련입니다. 언제라도 떠날 생각으로 허튼 아쉬움이나 궂긴 욕심이 아닌, 지금 내 삶을 가장 알뜰하게 돌보며 북돋울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마련입니다.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기에 나 혼자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으면서, 나한테 한 조각 있는 콩마저도 반으로 갈라서 이웃하고 나눕니다.


..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는 않았지만 아궁이의 불이 눈둑에 반사되어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을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입술은 야히 족 여자답게 꼭 다물고 배시시 웃음짓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한 손을 뺨에 살짝 댄 채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그 손목에 어머니가 언제나 보물꾸러미 속에 소중하게 넣어 두는 낡아빠진 그 향모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잠이었다. 사랑하는 아들 테헤나 이시에게 아무도 모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어머니는 이시의 아버지에게로 길을 떠난 것이었다 ..  (202쪽)


 돈을 내쳐야 하는 삶이 아니라, 돈에 매이는 마음을 내쳐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끌어들이는 삶이 아니라, 돈이 고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다스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돈에 밴 손때와 피땀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으뜸으로 삼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들이 손가락질하던 독재자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내 삶을 잃고 내 이웃을 잃고 내 동무와 살붙이 모두를 잃고 외돌토리가 됩니다. 돈에 넋이 나가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건 전쟁무기 만드는 과학기술을 키우건 전쟁무기 손에 들고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으로 일하건, 모두 다 똑같은 학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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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을 이야기하면서,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글을 나누어 올립니다. 짤막하게 소개글만 띄울 수 있습니다만, 이 책 《마지막 인디언》은 깊이깊이 살피면서 제 삶으로 받아들인 뒤, 이렇게 조금 긴 이야기로 풀어내어서 들려줄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느낍니다. 한국땅 비평가나 평론가 눈에는 그리 대단한 작품으로 눈에 뜨인 적이 없는 작품이었구나 싶지만, 여태껏 나온 어느 문학보다도 손꼽히면서 훌륭하다고 생각하기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띄웁니다.)

①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못 배운 우리들
② 사랑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학살자’요 ‘독재자’
③ 평화로운 ‘야히 겨레’를 죽인 흰둥이


 이 책 하나 57 ― 평화로운 ‘야히 겨레’를 죽인 흰둥이
 : 디오도러 크로버, 《마지막 인디언》



- 책이름 : 마지막 인디언
- 글쓴이 : 디오도러 크로버(알프레드 루이 크로버)
- 옮긴이 : 김문해
- 펴낸곳 : 동서문화사(1982.9.1.)





 (1) 삶


 어제, 《수호의 하얀 말》(한림출판사,2001)이라는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처음 나왔을 때에도 보았으나, 그때에는 시큰둥해 하면서 지나쳤습니다. 그러고서 일곱 해가 지난 뒤 다시 이 그림책을 넘겨보게 되면서, 가슴이 짠했습니다. 일곱 해 사이에 내 마음에서 무엇인가 자라나서 이 책을 알아보게 된 셈인가? 아니면, 이제 내 마음도 무엇엔가 눈을 떴는가? 아니면, 내가 책을 보는 눈길이 달라졌는가?

 그림책 《수호의 하얀 말》은 일본사람 아카바 수에키치 님이 그렸습니다. 그린이는 1910년에 태어나 1932년에 만주로 건너갔다가 1947년에 일본으로 돌아왔고 1961년부터 그림책을 그렸으며, 《수호의 하얀 말》은 1967년에 그렸다고 합니다. 이 책이 2001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그마치 마흔한 해를 묵은 《수호의 하얀 말》이며, 이 그림책을 그린 분도 그때 쉰일곱이라는 나이였습니다.


.. “큰아버지, 어째서 우리에게는 사냥을 하기 위한 활밖에 없을까요? 어째서 적과 싸우기 위한 활, 적을 노리는 활이 없을까요?” … “주프카 신과 카르츠나 신은 의논하여 야히 족에게는 사냥하는 데 쓰는 무기만을 주기로 하고, 서로서로, 또는 이웃사람과도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로 했단다.” ..  (79∼81쪽)


 책 하나에 오롯이 삶을 담아내자면 이만한 세월이 걸릴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젊은 나이에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촛불처럼 금세 꺼져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오래오래 살아남으며 숱한 사람을 부대끼고 일을 겪으면서 속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곰삭인 다음, 단출한 붓질로 책 하나 여미어 내게 되는가 싶기도 합니다.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아니, 나이보다는 철이 없으니까 주절주절 길디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느냐 싶습니다.

 듣는 사람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읽는 사람이 하품을 하지 않도록, 듣는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서 눈을 반짝일 수 있도록, 읽는 사람이 앉음새를 고치고 눈에 힘을 줄 수 있도록 엮어나가는 이야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낼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이라는 시간보다도, 얼마나 땀을 바치고 마음을 쏟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 마침내 소리도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를 베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이 쓴 도구라면 돌과 흑요석 줄, 그리고 칼뿐이었다. 도끼로 찍어 넘어뜨리는 편이 손쉽고 재빠르며 훨씬 편했겠지만, 할아버지가 언제나 말했듯이 나무를 베는 소리가 나는 곳에는 언제나 반드시 사람이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야히 족뿐만 아니라 사루도(백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저장용 튼튼한 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 뿌리를 캤고, 밧줄이나 끈으로 만들기 위해 삼이나 덩굴풀을 끊었고, 어머니가 죽을 끓이는 바구니 그릇에 담은 물이 새지 않도록 바구니 틈에 바를 송진을 모았다. 바삐 움직여 다니는 새도 짐승도 재잘거리는 소년과 소녀에게 조금도 마음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그 풀숲 세계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  (28∼29, 31쪽)


 예전에는 그냥저냥 책을 읽었습니다. 좋다고 하는 책이니 읽고,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책이니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가 몇 살이었고 그동안 무엇을 겪었는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책을 엮은 사람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해 왔는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책을 읽기 앞서, 글쓴이나 그린이나 찍은이 나이를 살피고 발자취를 훑고 배우거나 한 일을 알아봅니다. 어느 땅 어느 일터에 몸을 담았으며, 어느 곳 어느 사람하고 어울리고 있었는가를 헤아립니다. 집안에 들여서 키우는 꽃인지, 들판에서 자라는 꽃인지, 도심지 골목길에서 시멘트를 뚫고 자란 꽃인지, 꽃집에서 돈으로 사고파는 꽃인지를 찬찬히 곱씹습니다. 자란 터전과 겪어 온 모두가 고루 섞이면서 책 하나로 담기기 때문임을 비로소 느끼고 있습니다.


.. “야히 족 사냥꾼이 손에 잡는 무기는 사람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큰아버지, 미치지 않은 참된 사루도는 어째서 미친 사람들의 잔인한 짓을 못하게 말리지 않나요?” “그건 나도 모른다, 이시. 아무래도 나는 사루도를 이해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구나.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어리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어린 채로 있지는 않겠지. 아마도 사루도들은 노인들로부터 좋은 ‘삶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사막을 넘는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노인들의 가르침을 잊고 말았거나.” ..  (73∼74쪽)


 요즈음, 김수정 님 만화책을 하나하나 다시 끄집어내어 읽고 있습니다. 한 해에 한 번쯤 꼭 처음부터 끝까지 스무 권 남짓 되는 김수정 님 만화전집을 통째로 다시 보곤 하는데, 해마다 다시 넘기면서 해마다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보는 저부터 지난해와 올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그러께하고 지난해도 다릅니다. 제가 끄적인 글을 뒤적여 보아도, 2006년에 쓴 글하고 2007년에 쓴 글은 눈높이가 다릅니다. 2007년에 쓴 글과 2008년에 쓴 글도 높낮이가 다릅니다. 2005년이나 2004년에 쓴 글은 누구한테도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2009년이 되면 2008년에 쓰는 이 글도 남우세스럽다고 여길 테지요.

 그러나 이런 느낌은 자연스러움이라고 봅니다. 자기 삶이 한 자리에 머문다면 모르되, 자기 삶이 발돋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모르되, 자기 삶을 가꾸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모르되, 날마다 부지런히 부대끼고 읽고 느끼고 곰삭이고 되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과 내일이 다를 뿐더러 아침과 저녁도 다릅니다. 지난해에 읽은 책에서 본 대목을 올해 다시 읽으며 느끼는 일이란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러께 읽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대목을, 이듬해에 새로 읽을 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일 또한 마땅한 노릇입니다.


.. 둘은 사슴의 염통과 내장을 파란 나뭇잎에 싸서 바구니에 넣었다. 살코기 조각과 뼈다귀는 벗긴 가죽에 싸서 밧줄로 묶었다. 작업이 완전히 끝나자 새로운 흙과 돌, 그리고 나뭇잎을 더러워진 땅에 흐트러뜨려 놓았다. 사슴을 죽여서 처치한 흔적은 이렇게 해서 깜쪽같이 감추어져 버렸다 ..  (94쪽)


 디오도러 크로버 님이 쓴 《마지막 인디언》을 올봄에 헌책방에서 만나며 집어들어 펼칠 때에도 이러한 ‘세월 냄새’를 느꼈습니다. 이분이 쓴 ‘인류학 보고서’인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창작과비평사,1981)라는 책은 진작부터 사서 가지고 있었으며, 처음 사서 읽던 1990년대에는 얼마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만. 또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처음 나올 때 퍽 눈길을 끌었고(예전 잡지 기사를 찾아 읽으며 알게 됨), 헌책방 나들이를 하노라면 이 책은 어김없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선뜻 손을 뻗어 사들이지는 않아 왔습니다. 미국 흰둥이들 저희가 북미 토박이를 깡그리 끔찍하게 죽여 놓고서는, 무슨 ‘마지막’ 어쩌고 지랄을 하고, ‘석기인’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함부로 갖다 붙이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일찍 이 책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동서문화사 에이브문고’를 한 권도 사 주지 않았기에 어릴 적에 이 책을 읽을 수도 없을 테지만, ‘동서문화사 에이브문고’는 헌책방에 꽤나 많이 들어오고 나가는 책이었기에, 마음만 먹었다면, 또 조금만 더 마음을 기울여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를 펼치고, 어설픈 번역을 꾹 참아 가면서 읽었다면, 적어도 열 해쯤 앞서는 이 책 《마지막 인디언》을 헌책방에서 캐내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읽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투시는 키가 이시의 어깨까지밖에 닿지 않았고 가냘팠으며 손발도 이시의 어머니처럼 아주 작았다. 그러나 투시 또한 어머니를 닮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있었고, 어떻게 하면 무거운 짐을 잘 질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할머니가 투시에게 옛날 얘기를 해 주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 그렇지만 투시는 어린 소나무하고 같아요. 큰나무 그늘에서 자랐지만 이제는 자기 둘레에 조금씩 넉넉한 땅을 만들어 버젓하게 혼자 서 있을 수 있어요.” ..  (149∼150쪽)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인류학 보고서’입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퍽 딱딱할 뿐더러 그다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다시 펼치면 또 다른 맛과 느낌이 있을 테고, 《마지막 인디언》을 세 번 읽어냈기에, 마음으로 그려 가면서 이야기를 짜맞추어 나가리라 봅니다.

 《마지막 인디언》은 ‘이야기책’입니다. 동서문화사에서는 어린이책으로 펴냈습니다만, 이 책은 어린이책이라기보다는 ‘실제 이야기에 바탕을 둔 문학’이라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알프레드 루이 크로버’ 박사가 ‘야히 겨레’가 쓰는 말을 하나씩 익히면서 ‘테헤나 이시’라는, 마지막으로 남은 야히 겨레와 살가운 동무로 지내면서 얻고 듣고 배운 야히 겨레 문화를, 옆에서 남편을 지켜보며 함께 자료를 갈무리하던 ‘디오도러 크로버’ 님이, 한 번은 보고서로 한 번은 이야기책으로 묶은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이시는 살붙이도 사랑스러운 님도 없는 외톨이로 쓸쓸하게 죽어야 했지만, 자기 마음을 살붙이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고 감싸 주는 ‘사루도(흰둥이)’를 만나서 기꺼이 야히 겨레 삶과 발자취를 이야기해 주는 한편 몸으로 보여주었고, 이 모든 이야기와 자료와 사진이 모여서 한국땅에는 두 권으로 번역이 된(미국에는 더 많은 책이 있을지 모릅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가 1981년에, 《마지막 인디언》은 1982년에 소개되면서, 야히 겨레는 사라졌어도 책으로 목숨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2) 자연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옆지기가 묻습니다. “오늘 계속 비가 올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4층 옥탑집에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우리 집에서 30미터쯤 앞에 있는 8층짜리 건물에 막혀서 하늘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옥상마당으로 나가야 비로소 하늘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날씨가 어떤 줄 알려면, 먼저 바람결을 느끼며 바람 무게와 냄새와 맛 들을 살갗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늘가를 멀리 내다보면서 구름 움직임과 빛깔과 크기 들을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비죽비죽 솟은 높은 아파트에 막혀서 하늘 한 번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고, 하늘가는 구경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나마 우리 살림집이 옥탑방 집이니 다른 집보다는 낫다고 할 테지만.


.. “너는 내 비밀을 알겠구나. 그렇지 동생아. 너도 ‘괴물(기차)’을 보았니?” 카르츠나(도마뱀)는 이시가 풀잎 끝으로 녹색 머리에서부터 비늘에 덮인 등을 살살 간지르자 기분이 좋아서 눈을 스르르 감고 가만히 있었다 ..  (16쪽)


 엊저녁 잠깐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방에 다녀왔습니다. 바람을 쐬려고. 헌책방에서 책을 보는 동안, 헌책방 한켠에 틀어져 있는 라디오에서는 ‘정부가 경기 부양을 한다면서 부동산 양도세를 완화하려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이야기로 대학교수 여러 분이 나와서 토론을 합니다. 부동산세를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분들은 한결같이 ‘거래가 활성화되어야 경제가 산다’는 말을 합니다. 어느 분은 ‘도시 미관상 보기 나쁜 집을 헐고, 또 요즘 사람들 높아진 생활수준에 맞게 최신 수준으로 다시 지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라디오 소리가 워낙 커서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이 목소리 높여 싸우듯 주고받는 이야기를 한귀로 흘리면서, ‘최신식으로 새로 지은 아파트’라고 해 보아야, 열 해만 지나도 ‘낡은 집’이 되어 버리지 않겠느냐고 묻고픈 마음이 굴뚝처럼 솟았습니다. 디지털사진기도, 컴퓨터도, 손전화도, 한 해가 아니라 몇 달 만에 훨씬 나은 기종이 나오는 판에, ‘최신 시설을 갖춘 아파트’에서 ‘최신’이란 얼마나 값어치가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즐겁고 오붓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은, 그 물질과 물건밖에는 없는지. 기름값이 끝간 데 없이 치솟는다고 하는 걱정어린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 영향도 못 끼치는지.


.. 둘이서 풀밭 끝 나무 뒤에 몸을 숨기자 이시는 마도로냐잎을 한 잎 따서 입술에 대고 아기토끼처럼 끼익끼익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한편 투시는 ‘시가가 시가가’ 하고 부르고 있었다. 이시의 목소리가 아기토끼 소리에서 엄마여우를 찾는 아기여우의 응석부리는 소리로 바뀌자 투시도 지지 않고 ‘까욱 까욱’ 까마귀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풀밭은 한참 동안 조용해졌다가 조금 뒤에 다시 아기토끼의 끼익끼익 소리, 아기여우의 울음소리, 메추라기와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 이시가 응석부리는 듯한 아기사슴의 울음소리를 되풀이하자 거기에 대답하는 것처럼 수사슴이 후후 후후 소리를 질렀다. 또 조금 지나자 사슴 세 마리와 토끼 네 마리가 나타나 아기토끼와 아기사슴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  (36∼37쪽)


 우리한테 집이란 뚝딱뚝딱 금세 짓고 금세 허무는 보금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집이며, 허물면 곧바로 흙으로 돌아가 썩어서 거름이 되는 집이었습니다. 집을 허물 때 나오는 부스러기 가운데 쓰레기란 없고, 모두 땅으로 돌아갔지요. 땅에서 와서 땅으로.

 오늘날 집은 조금도 땅에서 오지 않으며,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모두 쓰레기입니다. 박정희 씨가 ‘새마을운동’을 앞장세워서 ‘오랫동안 걱정없이 버티어 오던 집’을 ‘낡았다’는 까닭 하나만으로 죄 허물어뜨리고 시멘트로 올려세우고부터는 ‘집은 보금자리가 아닌 돈굴리기’가 되어 버렸지만. 더구나, 새마을운동 때부터 하나둘 늘어난 시멘트집들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며 살아갈 만한 터전이 못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할 집이었습니다. 아파트라는 집도 ‘죽는 날까지 살며 딸아들한테 물려주어 살게 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아닙니다. 몇 해 묵히면 부쩍 오른 집값을 챙기면서 ‘가만히 앉아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면서, 집이 없는 사람들 등골을 뽑아먹는 ‘집 있는 이들 투기판’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 이시는 토끼를 땅에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 내 가족들도 마찬가지겠지. 사냥꾼에게는 잡을 수 있는 한, 어떤 짐승이든 집으로 가져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짐승을 살려 주어야겠다. 이 녀석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나에게로 왔다. 나에게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77쪽)


 ‘살’ 집이 아닌 ‘돈벌’ 집이니까, 이러한 집에서 사는 사람 스스로 자기 집을 가꾸지 않습니다. 가꿀 까닭이 없습니다. 어느 만큼 살다가 ‘새로 짓는 다른 아파트’로 옮기면 그만입니다. 옮기는 데 드는 돈은 ‘그동안 올라간 집값’ 가운데 얼마쯤 떼어내면 되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이삿짐 집에서 날라다 주니 근심조차 없습니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 삶이며, 바람을 느끼지 않는 삶인 가운데, 물도 햇볕도 없는 삶입니다. 우리 몸에는 날씨를 느끼는 감각이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이 감각을 버리고는 텔레비전 날씨방송에 귀를 기울입니다. 두꺼비와 개미만 날씨 바뀜을 느끼지 않고 사람몸도 날씨 바뀜을 느끼건만, 우리한테는 ‘삶’이 아닌 ‘돈’이 맨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고부터는, 우리 스스로 ‘목숨붙이’임도 잊어버립니다.


.. 나무숲 깊숙한 곳에서 따온 버섯은 희고 야들야들했다. 하루 또 하루 따뜻해짐에 따라서 갖가지 풀 열매가 차례로 열리기 시작했다. 저마다 한창일 때 따다가 그대로 또는 말려서 먹는 것도 봄에 맛보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 골짜기가 아궁이처럼 확확 달고, 밤새껏 바람도 없이 찌는 듯 더워도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무서운 더위 또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이었다 ..  (96∼97쪽)


 낯선 가게에 들르거나,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이분들은 으레 제 신발을 먼저 봅니다. 벌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몸차림을 다 훑었는지, “왜 고무신을 신어요? 그것도 깜장고무신을?” 하고 묻습니다. “흰고무신이 낫지 않아요? 깨끗하고?” 하고도 묻습니다.

 저는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빙그레 웃습니다. 폭신한 운동신에 발이 길들고, 딱딱한 구두에 발이 맞추어진 사람한테, 얇디얇은 고무 한 겹 밑으로 땅바닥을 느끼게 되는 고무신을 신는 까닭을 들려줄 수 없습니다. 들려준들 마음에 새겨 주지 않습니다.

 새 고무신을 신으면 보름쯤 뒷꿈치와 발등이 까집니다. 더운 날 골목을 걸으면 발바닥이 뜨겁습니다. 산을 타거나 들을 거닐 때는 느낌이 좋지만. 그러나 가장 좋을 때는 맨발입니다. 맨발로 걸어야 비로소 땅기운이 몸으로 스미고, 땅내음이 몸에 퍼집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맨발로는 다닐 수 없어서 고무신이라도 신을 뿐입니다.


.. 그 잣나무 밑 빈터에는 메추라기가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오곤 했다. 솜톨이 보송보송한 새끼는 어머니의 다리 위를 겁도 없이 뛰어다녔다. 어머니가 뿌려 주는 도토리가루빵 부스러기를 쪼아먹으려고 검은방울새도 왔다. 어머니는 또 저장움막 지붕에서 1년 내내 둥우리를 짓고 있는 올빼미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  (172∼173쪽)


 오늘날 햇볕은 오존이 얇아지거나 없어지면서 바로 쐬면 나쁘다고 하지만, 형광등 불빛이나 셈틀 화면 불빛보다는 한결 좋지 않겠느냐고 느낍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부지런히 글을 쓰다가 잠깐 쉬면서 화면을 끄고 있으면 눈이며 몸이며 머리며 시원하다는 느낌이 드는 한편 차분해집니다. 어두워서 불을 켜고 있다가도 불을 끄면, 그때부터 몸이 아늑함을 찾습니다. 요 며칠 앞서 모처럼 해가 났기에 한낮에 두어 시간 골목마실을 했더니 살갗이 빨갛게 탔더군요. 내내 밖에서 일하는 분은 살갗이 타다가 익다가 까맣게 되겠구나 싶습니다.

 먼 옛날이 아닌 가까운 지난날까지, 한국사람은 누구나 까무잡잡한 얼굴이었습니다. 얼굴 허연 사람은 몹시 드물었습니다. 새벽부터 깊은밤까지 시멘트집에 갇혀서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던 사람만 빼고는. 그런데 지금 보면, 햇볕을 쬘 일도 거의 없어진 판인데, 이 허여멀겋다 못해 파리한 살결을 더 하얗게 한다면서 화장품을 바르고 뭐를 하고 그렇습니다. 자전거 타는 분들도 살이 안 타게 한다면서 뭐를 걸치고 뭐를 바르고 합니다.


.. (옛날에는 많은 야히 족과 사슴이 여기서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루도와 사루도의 가축만이 살찌고 있다. 사루도는 어디에나 있다 …… 너무 많다!) ..  (234쪽)


 우리 집 두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여러모로 생각과 말이 많았습니다. 지금 세상에 아이를 내놓는 일은 아이를 ‘넌 죽어라’ 하는 짓하고 다를 바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목숨이자 이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푼이라도 더 세금을 뽑아낼까 하고 생각하는 나라 정책입니다. 애틋하고 고마운 목숨이자 어린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제도권 지식을 더 많이 쑤셔넣어서 스스로 생각하며 슬기를 키워 나가는 사람이 못 되게 만들어 톱니바퀴나 기계로 부릴 수 있을까 하고 내모는 교육입니다. 반갑고 기쁜 목숨이자 이웃이 아니라, 돈돈돈 명예명예명예 권력권력권력에 따라서 이리 휘두르고 저리 몰아세우는 세상 흐름, 아니 이 나라 흐름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세상이니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 빛줄기가 되면서 살고, 우리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빛줄기가 되어서 살도록 힘써야 하지 않느냐 싶어서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 이시는 유칼리나무잎을 뜯어서 씹어 보고는, 쓰고 기름내 나는 이 잎은 사슴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시나 사루도는 이곳의 일을 잊고 있다. 네발짐승이나 새는 나무를 자기들과 똑같은 풀숲 속의 생물로 받아들여 달아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여기의 새나 짐승은 총소리를 들은 일이 없는 것이다. 여기는 좋은 곳이다. 나 말고는 사람이 들어온 일이 없었을 것이다.) ..  (268쪽)


 제아무리 사람들이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처발라 놓아도 고개를 내미는 풀입니다. 조그마한 땅뙈기요 흙도 한 줌밖에 없으나 뿌리를 뻗어 제법 큰 나무로 우거질 뿐더러 좋은 열매까지 내놓아 주는 나무들입니다. 골목길을 거닐며 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들을 만나는 동안, 사람이나 자연이나 앞으로 살아가는 데까지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곧이어 2부를 띄웁니다. 좀 쉬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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