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꽃

 


느티나무 까무스름 가지마다
옅푸른 새잎 보드랍게
촘촘촘 맺히면서,

 

새로 돋은 가늘고 여린
나뭇가지에는

 

발그스름하면서 푸른
빛 감돌고,

 

깨알만 한 작은
꽃망울 맺혀

 

더 옅푸른 느티꽃
소복소복 터뜨린다.

 

사월 십육일
봄날,
팔백 살 훌쩍 넘은
느티나무 밑에 서며
느티잎 쏴르르 흐르는
느티바람
느티내음
느티빛
먹으면서 논다.

 


4346.4.1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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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4) 주의

 

하지만 주의 깊게 들어 보면 어른한테 배운 말은 순 엉터리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됩니다
《하이타니 겐지로/햇살과나무꾼 옮김-선생님, 내 부하 해》(양철북,2009) 108쪽

 

  ‘하지만’은 ‘그렇지만’으로 바로잡습니다. “어른한테 배운 말”은 “어른한테서 배운 말”로 다듬고, “엉터리라는 것을”은 “엉터리인 줄”로 다듬으며, “알게 됩니다”는 “알 수 있습니다”나 “압니다”나 “깨닫습니다”로 다듬어 줍니다. ‘금시(今時)에’를 줄여서 쓰는 ‘금세’는 즐겁게 쓸 만하지만, ‘곧’이나 ‘이내’나 ‘바로’로 손보면 한결 나아요.


  한자말 ‘주의(注意)’ 말뜻을 살펴봅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1)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함 (2) 어떤 한 곳이나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기울임 (3) 경고나 훈계의 뜻으로 일깨움” 이렇게 세 가지 쓰임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값 같은 다른 한자말 ‘주의’로 ‘朱衣’는 “붉은 옷”을 뜻한다 하고, ‘周衣’는 “두루마기”를 뜻한다 하며, ‘酒蟻’는 “술구더기”를 뜻한다 하고, ‘紬衣’는 “명주옷”을 뜻한다 하는군요. 그런데, 이런 한자말 ‘주의’를 쓸 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런 한자말을 국어사전에 실을 까닭이 없겠지요. ‘籌議’라는 한자말은 “모여서 서로 상담함”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말 이런 한자말은 국어사전에서 마땅히 덜어야 하고, 사람들이 슬기롭고 아름답게 살려서 쓰는 한국말을 알뜰살뜰 실어야지 싶어요.

 

 주의 깊게 들어 보면
→ 찬찬히 들어 보면
→ 가만히 들어 보면
→ 곰곰이 들어 보면
→ 마음 기울여 들어 보면
 …

 

  국어사전을 살피면, ‘주의’ 첫째 뜻 보기글로 “주의 사항”이나 “맹견 주의”나 “칠 주의”나 “주의를 시켜야겠소”가 있습니다. 둘째 뜻 보기글로 “주의가 산만하다”나 “주의를 기울이다”나 “주의를 끌다”나 “주의를 집중하다”나 “주의를 환기하다”가 있어요. 셋째 뜻 보기글로는 “주의를 받다”나 “주의를 주다”가 있어요.


  한자말 ‘주의’를 쓰는 동안 이렇게 보기글이 늘어납니다. 한자말 ‘주의’를 안 쓰던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어떤 낱말과 말투로 우리 생각 나타냈을까 차근차근 되새깁니다.

 

 살필 대목 . 살피시오 ← 주의사항
 사나운 개 있음 . 개 있음 ← 맹견 주의
 칠했음 . 페인트 발랐음 ← 칠 주의
 다짐을 시켜야겠소 . 잘 살피라 해야겠소 ← 주의를 시켜야겠소

 

  “주의가 산만한” 모습이라면,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운” 모습입니다. “주의를 기울인”다고 할 적에는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이에요. “주의를 끌다” 같은 말을 쓰기 앞서 “눈길을 끌다”나 “마음을 끌다” 같은 말을 썼어요. “주의를 집중하다” 같은 말에 앞서 “마음을 모으다”나 “마음을 그러모으다” 같은 말을 썼고요.


  곰곰이 생각하면, “주의를 받다”나 “주의를 주다” 같은 말을 안 쓴 지난날에 “꾸지람을 받다”나 “꾸중을 듣다” 같은 말을 썼어요. 한자말 ‘주의’를 사람들이 차츰차츰 쓰면서 ‘꾸지람’이나 ‘꾸중’ 같은 낱말 쓰임새가 거의 사라져요. 더 생각하면, “말을 듣다”라고도 했는데, 이런 말 쓰는 어른은 요즈음 좀처럼 만날 길 없습니다.


  마음을 기울여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주 많이 줄었어요. 마음을 가다듬어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줄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마음을 그러모아 말을 북돋우는 사람이 차츰 태어나리라 믿어요. 어른들이 슬기롭게 말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이 슬기롭고 착하게 말길 트리라 믿어요. 아이들이 아름답고 참답게 말삶 가꾸리라 믿어요. 4346.5.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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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가만히 들어 보면 어른한테서 배운 말은 순 엉터리인 줄 곧 알 수 있습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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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5-08 01:33   좋아요 0 | URL
아, 배우고 갑니다
저도 걱정이네요

숲노래 2013-05-08 07:05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 품으면서 좋은 말 즐겁게 익혀 보셔요~
 

풀맛 책읽기

 


  도시로 오면 먹을 수 있는 풀이 거의 없다. 도시에서는 풀이 자랄 틈이 거의 없으니, 도시사람은 즐겁게 뜯어서 먹을 만한 풀을 만나기 어렵다. 시골에서 비닐집을 세우고는 철없이 아무 때나 잔뜩 심어 잔뜩 거두어들이는 푸성귀만 만날 수 있다. 서울 도봉구에서 ‘도봉구 맛 나는 풀’을 만날 수 없다. 서울 은평구에서 ‘은평구 맛 나는 풀’을 만날 수 없다. 서울 강남구에서 ‘강남구 맛 나는 풀’을 만날 수 있을까?


  풀맛을 볼 수 없는 도시에서는 물맛 또한 볼 수 없다. 신림동 물맛이란 없다. 교남동 물맛이란 없다. 종로 물맛이라든지 흑석동 물맛이란 없다. 두멧시골에 댐을 지어 길디긴 물관을 이어 수도물 마시는 도시에서는 모두 똑같은 화학처리를 한 물맛이 있을 뿐, 사람들 스스로 물맛을 헤아리거나 느끼거나 살피는 가슴까지 잃는다. 이리하여, 서울 물맛도 부산 물맛도 없다. 인천 물맛도 순천 물맛도 없다.


  풀도 물도 싱그럽게 자라지 못하는 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삶맛 누릴까.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맛 일구지 못하는 이 도시에서는 저마다 어떤 사랑을 품을 수 있을까. 4346.5.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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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의 교실

 


  도서관에서 흘러나오는 책이 헌책방으로 들어간다. 오래도록 대출실적 없던 책을 도서관에서 버린다. 새로 사들이는 책을 꽂을 자리가 모자란 한국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을 버릴 수밖에 없다. 한국 도서관은 ‘책이 없다’고 할 만한데, 건물 하나 맨 처음에 으리으리하게 짓기는 하지만, 정작 ‘꾸준히 사들이는 책을 정갈하게 갖출 자리’를 넉넉하게 두지 않는다. 새 건물 차곡차곡 늘리며 새로 사들이는 책을 새로 꽂는 일을 잇지 못한다.


  도서관은 꼭 커다란 건물이어야 하지 않다. 도서관은 골목동네 조그마한 집이어도 좋다. 골목동네 조그마한 집 한 채를 구청이나 시청에서 사들여 작은 골목집을 작은 골목도서관으로 꾸며 동네마다 여러 곳 두면 참 좋으리라. 이렇게 하면 굳이 책을 안 버려도 된다. 동네사람은 동네에서 가까이 언제라도 찾아갈 도서관을 누릴 수 있고, 여행을 다니는 길손은 골목도서관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책바다를 누릴 수 있다.


  서울 홍제동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이오덕 님 책 《삶과 믿음의 교실》을 본다. 나는 예전에 이 책을 읽었지만, 낯익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어 살살 펼친다. 그러다가 ‘서울 간호전문대학’ 도서관에 있던 자국을 본다. 그렇구나. 대학교 도서관에 있던 책이로구나.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뒤에 ‘빌림종이’ 붙인 채 버렸네.


  네 사람 빌려서 읽은 자국 본다. 네 사람 뒤로는 더 빌려서 읽지 않았나 보다. 빌려서 읽은 네 사람은 어떤 넋 얻었을까. 이 책을 빌려서 읽지 않은 다른 숱한 그무렵 대학생들은 어떤 넋으로 대학교에서 학문을 익혔을까. 간호전문대학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갖추었다가 버렸는데, 다른 대학교 도서관에는 이 책 있을까. 교육대학교 도서관에는 이오덕 님 《삶과 믿음의 교실》을 곱게 갖추며 오래오래 잘 건사할까. 교육과학기술부에도 도서관 있다면, 그곳 도서관에는 이 책이 오늘날에도 예쁘게 꽂힐까. 앞으로 누가 서울 홍제동 헌책방 〈대양서점〉에 들러 이 책을 알아보고 기쁘게 손에 쥐어 읽을까. 4346.5.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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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벌레와 노는 어린이

 


  일산집에 나들이를 온 아이들이 밭뙈기에서 거름 만지고 풀잎 따면서 논다. 사름벼리가 문득 무당벌레 한 마리를 잎사귀에 붙은 채 보여준다. “여기 무당벌레야.” 그래, 무당벌레네. 그런데, 무당벌레도 밥 먹으려고 잎사귀에 붙었을 테니, 조금만 같이 놀고 밥 먹으라고 해 주렴. 4346.5.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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