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1

돌이키면 나는 어릴 적부터 ‘예배당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개신교회에는 고등학교 다닐 무렵 이태쯤 다닌 적이 있고, 천주교회에는 곁님과 함께 인천에서 이태쯤 드나든 적이 있지만, 내 마음에서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예배당에서 하느님을 찾아본들 찾을 수 없다’는 대목을 알았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철학가나 작가가 밝히기 앞서, ‘내 마음에 하느님이 있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누가 나한테 “너는 종교가 무어니?” 하고 물으면 “나는 종교가 없어. 굳이 따진다면 나는 내가 종교야.” 하고 말했다. “나는 내가 종교야”와 같은 말은 내키지 않았으나, 이다음 말을 하자면 아무래도 누구도 못 알아듣겠다고 느껴서 뒷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늘 하고 싶던 뒷말은 “하느님은 바로 내 마음에 있는데, 왜 종교를 믿거나 예배당에 가니?”였다. 이 말을 풀어서 다시 읊자면, “나는 내가 하느님이고, 너는 네가 하느님이야. 우리는 모두 저마다 하느님이야. 하느님을 딴 데서 찾지 말자. 예부터 ‘업은 아기 세곳서 찾는다(동양)’ 같은 말을 왜 했는지, ‘파랑새는 우리 집 마당에 있다(서양)’ 같은 말을 왜 했는지 생각해야지.”가 된다고 할까. 국민학교를 다니며 처음 한국말사전을 보았을 적에 많이 답답했다. 낱말풀이를 읽고 또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한국말사전을 ㄱ부터 ㅎ까지 여러 벌 읽는 동안 새삼스레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한국말사전이 엉터리인데 이런 엉터리를 꼬집는 사람이 없는 탓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모를 뿐 아니라,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모르는 줄조차 알지 못하거나 느끼지 않기 때문이로구나 싶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다섯 학기를 다니다가 그만두면서 문득 ‘앞으로 내가 스스로 한국말사전을 지어야겠네’ 하고 생각했고, 이 생각대로 오늘 나는 한국말사전을 새로 짓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하면서 어렵거나 힘들다고 느낀 적이 없다. 게다가 낱말풀이를 못 달 일이란 없다고 느낀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모든 한국말사전에서 드러나는 ‘겹말풀이(중복표현)’라든지 어설프거나 어렵거나 엉뚱한 낱말풀이를 달 까닭조차 없다고 느낀다. 낯선 낱말이든 비슷한 꾸러미가 많은 낱말이든, 오래도록 이 낱말을 지켜보면서 생각을 기울이면 실마리를 풀 수 있다. 낱말 하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생각하면, 이 낱말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고, 이 낱말풀이를 어떻게 붙여서 열 살 어린이한테 알려줄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모두 깨우칠 수 있다. 하면 된다. 안 하면 안 된다. 하니까 되고, 안 하니까 안 될 뿐이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을 곰곰이 생각한다. 내 글쓰기는 실마리를 푸는 글쓰기라고 느낀다. 왜 이 글 저 글 신나게 많이 쓸까? 스스로 글길을, 곧 글을 쓰는 길을 가다듬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스스로 글을 쓰는 길을 가다듬으려 하는가? 이제껏 제대로 모르는 채 글쓰기만 신나게 했는데, 가만히 보니, 내가 어릴 적부터 스스로 바라던 ‘한국말사전 새로쓰기’를 하려면 그야말로 글을 엄청나게 쓰되, 같은 글감으로 날마다 숱하게 다른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이든, 책과 헌책집과 삶 이야기이든, 자전거 타는 이야기이든, 시골에서 사는 이야기이든, 참말 언제나 새로우면서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몸짓이 될 적에, 비로소 한국말사전을 새로쓰는 넋이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한국말사전에 담을 말풀이를 붙이거나 보기글을 달 적에는 ‘똑같은 풀이나 보기글’을 넣을 수 없다. 다만, 똑같은 풀이를 달더라도 여러 낱말이 어떻게 다르게 쓰는가를 밝혀야겠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느낀다. 곧, ‘할 수 있는 일만 있다’고 느낀다. 스스로 하느님인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이웃과 동무는 그들 스스로 하느님이기에 그들 스스로 어떤 삶을 지어서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은가 하는 대목을 생각한다면, 이웃과 동무도 그들 스스로 하루를 즐겁게 누릴 수 있다. 마음속에서 하느님을 찾아서 바라보고 아껴야지 싶다. 참다운 하느님을 찾는 실마리를 열어야지 싶다. 사랑스러우면서 즐거운 길을 걸어가도록 스스로 이야기꽃을 피워야지 싶다. 2014.10.15.


하느님 2

우리 집 작은아이 이름은 ‘산들보라’이다. 작은아이 산들보라 이름이 어떤 뜻인가를 알아차린 사람은 여태 한 사람뿐이다. 다른 이들은 ‘산들보라’라는 이름을 듣고서 “뭐,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겠네요.” 하고 말하지만 모조리 헛다리를 짚는다. 쉬워 보이는 이름이 외려 어려운 셈일까? 그렇지만 스스로 마음을 활짝 연 채 서로 어깨동무하는 이웃으로 여기는 기쁨으로 바라본다면, ‘산들보라’가 어떤 뜻을 담은 이름인가를 한눈에 알아차리면서 빙그레 웃음지을 만하다. ‘산들보라’는 ‘산들 + 보라’인데, ‘산들바람 같은 하느님이 네 마음에 있는 줄 보라’는 뜻이다. 2019.3.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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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가위를 쓸 일이 잦은데 정작 잘 드는 가위를 장만한 지 고작 한 해도 안 된다. 여태까지 잘 안 드는 가위를 그냥그냥 쓰며 살았다. 잘 드는 가위를 곁에 놓자니 무척 좋다. 진작에 가위를 제대로 장만할 노릇이었네 하고 느끼면서, 책상맡 네글벗뿐 아니라 모든 살림살이를 차근차근 살펴서 옳게 건사할 노릇이라고 깨닫는다. 날이 무딘 가위를 여럿 둔들 어느 것이든 쓸 만하지 않다. 부드러이 구르지 않는 연필을 여러 자루 둔들 어느 것이든 손에 붙지 않는다. 잘 드는 연장 하나가 있으면 된다. 잘 드는 연장 하나를 틈틈이 손질하면서 알뜰히 쓰면 된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쓸 셈인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이래저래 꿰맞추어 늘어놓으려는가, 아니면 알뜰살뜰 고운 이야기 한 자락을 제대로 갈무리해서 빛내려는가? 2019.3.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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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

“빨리 나아”나 “얼른 나으셔요” 같은 말이 그리 달갑지 않더라. 다치거나 아플 적에는 그만 한 뜻이나 까닭이 있을 테니, 왜 다치거나 아픈가를 찬찬히 헤아려서 삭이지 않고서 뚝딱 나으면 다음에 또다시 다치거나 아픈 일이 찾아들지 않을까? 다치거나 아플 적마다 몸을 고요히 돌아본다. 느긋이 쉴 수 있다면 느긋이 쉬면서 몸을 바라보고, 다치거나 아파도 바삐 움직여야 할 일이 있다면 이렇게 움직이면서 몸을 기운내어 들여다본다. 다쳤기에 다친 데가 아문다. 아프기에 아픈 데가 사라진다. 어떻게 아무는가를 지켜보고, 어떻게 낫는가를 헤아린다. 약을 쓴다면 더 빠르게 덜 아프면서 낫기도 할 테지만, 우리 몸은 스스로 아물거나 낫기 마련이다. 오래 걸리더라도 다치거나 아픈 곳을 틀림없이 몸 스스로 바꾸어 낸다. 구태여 더디 아물거나 나아야 하지는 않듯이, 굳이 빨리 아물거나 나아야 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눈부시게 튼튼할 수 있는 빠르기를 알아야겠구나 싶고, 기운차게 일어설 수 있는 결을 익혀야겠구나 싶다. 2019.3.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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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터 2
일본사람은 일본이라는 터전에 없는 말을 배우며 받아들일 적에 새로운 말을 숱하게 지었다. 오늘 우리가 흔히 쓴다는 ‘일본 한자말’이란 ‘새물결이 일어나서 퍼질 적에 일본사람 스스로 온슬기를 모아서 새로 지은 낱말’이다. ‘중국 한자말’이란 무엇인가? 중국사람 스스로 오랫동안 삶을 짓고 삶터를 가꾸면서 스스로 온사랑으로 빚은 낱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한자말’은? 한국 한자말이란, 한국에서 중국을 섬기고 일본에 빌붙으면서 쇠밥그릇을 단단히 지키려고 하던 한줌밖에 안 되는 끄나풀이 숱한 사람들을 짓밟거나 괴롭히면서 으르렁거리던 말이다. 일본은 슬기를 모아서 저희 말을 지었고, 중국은 살림을 가꾸어 저희 말을 지었는데, 한국은 오직 독재부역 권력자들 노닥거리 때문에 태어난 한자말이다. 나는 한자말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일본하고 중국은 두 나라가 저희 나름대로 땀을 바쳐서 알뜰히 지은 한자말을 쓰는데, 한국은 이도 저도 아닌 바보짓으로 그냥 끌어들여서 쓰는 한자말이니, 얼마나 멍청하거나 어리석은가. 일본사람이 온슬기롤 모아서 지었다는 ‘사회’라는 낱말을 여태까지 그냥 썼으나, 늘 한 가지를 생각했다. 일본사람이 온슬기를 모아 ‘사회’라는 낱말을 짓기까지 얼추 100해가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레에서는 ‘사회’ 같은 낱말을 어떻게 한국말로 담아낼 만한가를 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고 여기거나,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느냐고 혀를 찼다만, 나는 열아홉 살 적부터 새로운 말을 짓는 길을 생각했고, 이제 실마리를 살며시 얻어 ‘삶터’나 ‘터전’이나 ‘터’ 세 가지로 고쳐서 쓰기로 한다. 때로는 ‘삶터’가 어울리고, 때로는 ‘터전’이 어울리며, 때로는 ‘터’가 어울리더라. 때로는 ‘삶’이라고 할 수 있고. ‘삶터’ 같은 낱말은 내가 아니어도 쓰는 사람이 꽤 많지만, 이 낱말이 바로 ‘사회’를 가리키는 줄 제대로 느끼거나 헤아리는 분은 거의 없지 싶다. 우리는 우리한테 있는 엄청난 말조차 제대로 못 보고 못 가꾸고 못 쓰면서 그냥그냥 하루를 흘려보내기 일쑤이다. 2018.5.1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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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1
작은 신문사지국에 빨래틀이 없다. 놓을 자리도 없다. 이곳에서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손빨래를 한다. 청바지를 손빨래하자니 꽤 힘이 든다. 청바지가 이런 옷이로구나. 자전거를 돌리고 나서 땀으로 옴팡 젖은 몸을 씻으며 옷도 같이 빨래한다. 손빨래를 하며 살다 보니 가벼운 옷을 걸친다. ‘보기 좋은 옷’이 아닌 ‘빨래하기 좋은 옷’을 입는다. 1995.8.22.

빨래 2
“야, 손이 얼었어. 어떻게 빨래하지?” 옆에서 내무반 동기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콩콩 뛰면서 말한다. “난 신문배달하면서 늘 손빨래를 하고 살아서 그리 힘들지 않아. 그리고 손이 얼었대서 안 빨면 이 옷을 입을 수도 없어. 얼었으면 얼었구나 여기면서 이 얼음물을 못 느끼니 그냥 끝내면 되겠네 하고 생각해야지. 야, 바깥은 영하 십 도가 넘는 날씨인데, 물이 안 얼어서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하지 않니? 이 물이 얼어버리면 빨래를 하고 싶어도 못해. 고맙다고 절하면서 빨래해. 언손은 녹이면 돼. 오늘 빨래를 못하면 앞으로 한 달 동안 냄새나는 옷을 그대로 입고 살아야 해.” 1996.2.5. (덧말 :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원당리. 군대에서 이등병이던 때.)

빨래 3
둘레에서 “최종규 씨는 집에서 손빨래를 하지 않고 기계빨래를 하면 글을 쓸 겨를을 더 낼 수 있지 않겠어요?” 하고 묻는다. “집에서 밥해 주고 살림해 줄 사람이 있으면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지 않겠어요?” 하고도 묻는다. 이런 말에 빙긋 웃고서 대꾸한다. “아기 똥오줌기저귀를 손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손수 씻기고, 집살림을 기꺼이 짊어지면서 살아가다 보니, 외려 글쓸거리가 샘솟아요. 아니, 글쓸거리가 샘솟는다기보다는 말이지요, 저 스스로 앞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길을 어떻게 슬기롭게 가다듬으면서 이곳에서 씩씩하게 서야 하는가를 스스로 배울 만해요. 스스로 배우니 때때로 글을 써요. 스스로 배운 기쁨을 가끔 글로 옮겨요. 글만 쓰면서 어떻게 살아요? 아이들하고 복닥이고 숲을 노래하는 살림을 지으니, 더러 글손을 잡으면서 환하게 웃을 만하고, 책도 쓰고 읽고 돌보는 하루가 된다고 느껴요. 빨래를 하노라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대단히 좋아요. 손빨래를 해보셔요. 삶이 확 다르게 보인답니다.” 2011.10.1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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