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잎

 


  찔레꽃잎은 먹는다. 찔레나뭇잎은 먹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을 나고 새봄을 맞이해 처음으로 돋은 보들보들한 찔레나뭇잎도 먹을 수 있을 테지. 새봄에 막 돋은 느티나뭇잎도 먹을 수 있으니까.


  찔레꽃잎을 먹는다. 아이와 함께 천천히 씹어서 먹는다. 꽃잎 하나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으니 찔레꽃잎 내음이 입안으로 확 퍼진다. 자그마한 꽃잎은 꽃잎 맛이 난다. 배고플 때에 잔뜩 따서 먹을 수 있겠다고 느끼는데, 한 움큼이나 두 움큼 따서 먹는다고 얼마나 배고픔이 가실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몸으로 들어온 찔레꽃잎은 내가 살아가는 흙을 떠올리도록 이끌고, 내가 맞이하는 햇살을 되새기도록 이끌며, 내가 마시는 빗물을 헤아리도록 이끈다.


  저녁이 되어 들꽃 하나둘 잎을 오므리는데, 찔레꽃은 잎을 펼친 채 있다. 뉘엿뉘엿 기울어 어두워지는 들판에서 찔레꽃잎 하얀 빛깔은 더 하얗다. 봄을 부른다는 알록달록 어여쁜 꽃들 모두 지고 온 들판과 멧등성이에 푸른 빛깔 짙을 때에, 찔레꽃 작은 송이는 소담스레 저희끼리 옹크리면서 작은 무리를 이룬다. 푸른 들판에서 길을 잃지 말라며 하얗게 빛난다. (4345.5.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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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쓰고 싶은 글, 더 읽고 싶은 책

 


  두 아이 잠들었을 때, 글 한 줄이라도 더 쓰고 싶다. 두 아이 새근새근 꿈누리를 날아다닐 때,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싶다. 그러나, 색색 소리내며 깊이 잠든 아이들이 뒤척이며 아버지를 부른다. 예쁘게 잠든 아이들이 기저귀에 쉬를 하든, 자다가 쉬가 마렵다 하든, 또 곁에서 아버지 손을 잡거나 품에 안겨 자고 싶다 하든, 아버지를 부른다. 나는 모처럼 한갓지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네 하고 마음을 놓다가도, 못내 아쉬운걸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이 마음을 접는다. 아버지인 내가 쓰는 글은 너희들 손을 가만히 쥐며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는 삶인걸. 아버지인 내가 읽는 책은 너희들 작은 몸뚱이를 구석구석 주물러 뭉친 데 풀어 주면서 곱게 목소리 가다듬어 자장노래 부르는 삶인걸.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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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82 : 고향이 되는 책

 

 

  2006년에 처음 나온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푸름이 가운데 30만 남짓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하기에 그리 많이 읽는가 생각하다가는 그만 이 책을 잊은 채 여러 해 흐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나는 2006년 3월에 이 책이 나올 무렵 삶터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무렵부터 책짐을 싸서 이듬해 봄에 새 삶터로 옮겼지만, 혼자 책짐을 꾸리고 새 삶터를 알아보러 다니느라 이무렵 갓 나온 이 책은 끈으로 친친 묶인 채 한 해를 넘겼고, 새 삶터로 옮긴 뒤에도 끈에서 좀처럼 풀리지 못하다가 또 두 차례 더 삶터를 옮깁니다. 느긋하게 책을 펼칠 겨를 없이 하루하루 보냈어요. 이제 우리 식구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에 기쁘게 집을 얻어 지내기에 다시는 책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그마치 여섯 해만에 《열네 살의 철학》이라는 책을 ‘갓 나온 책’으로 삼아 읽습니다.


  “나와 인류 전체는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인류는 좋아지지 않는 거야(170쪽).”라든지 “부모님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 일하는지, 과연 어느 쪽일까(131쪽)?”라든지 “관념이 현실을 만들지, 현실이 관념을 만드는 건 결코 아니야(92쪽).”라든지, 천천히 밑줄을 그으며 찬찬히 되새깁니다. 사람들이 쓰는 말은 어떻게 해서 태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자(40쪽)는 대목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내가 오늘 적바림하는 글 한 줄에는 어떠한 사랑과 꿈이 깃드는가를 되새깁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더러 ‘책 그만 읽’고 ‘저희랑 같이 놀’자고 합니다. 책을 덮습니다. 아버지라고 책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너희랑 복닥이고 또 너희 밥을 먹이고 또 너희 옷을 빨고 또 너희 잠잘 집을 치우고 또 너희 누릴 온갖 것 건사한다며 땀흘리다가, 등허리 두들기며 살짝 허리 펴자면서 이렇게 몇 분쯤 책을 쥘 뿐인데, 요만큼이나마 봐주면 안 되겠니, 하는 말이 슬며시 새어나려다가 맙니다. 새삼스레 이런 말 한 마디 다시금 돌아봅니다.


  아이랑 손을 잡고 달립니다. 아이를 안고 간지럼 피웁니다. 같이 노래하고 같이 풀내음 맡습니다. 아이들 모두 가까스로 재우고 나서 살짝살짝 넘기던 《어머니전》(호미,2012)에 나오는 이 나라 섬마을 어머니들 삶이 떠오릅니다. 《어머니전》을 쓴 강제윤 님은 섬마을에서 만나는 할머니(어머니)들한테서 얘기를 찬찬히 듣고는 책 하나로 갈무리했는데, 어느 섬마을을 찾아가든 “이제는 할머니가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39쪽).”고 느낀다는 생각자락을 적바림합니다. 그래, 이런 말마따나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네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어머니네 어머니랑 아버지’를 뵈러 먼먼 마실을 다닙니다. 아이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보려고 먼먼 길을 기꺼이 찾아오십니다. 내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 ‘고향’입니다. 나와 옆지기는 우리 스스로 아이한테 ‘고향’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옆지기 아버지한테 우리 집 두 아이는 ‘또다른 고향’이 됩니다. 먼먼 길 고단히 달려오면서 싱긋 웃을 수 있습니다. 먼먼 길 바쁜 틈 쪼개어 찾아오면서 맑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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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바다 보러 나가자

 


  바다를 보러 마실을 나와서 바다를 본다. 그러나 막상 바닷물에 발을 담그지는 못한다. 포구에서는 바닷물은 실컷 구경하지만, 아이들과 찰랑이는 바닷물을 발바닥으로 느끼지 못한다. 이래서 따로 모래밭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구나. 바닷가 모래밭을 맨발로 밟으며 한참 거닐다가 잘 마른 모래밭에 드러누워 햇볕을 쬐면서 한낮을 보내면 어떤 느낌일까.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쐰다. 먼먼 바다는 온통 물빛이다. 이 물빛 안쪽 깊은 자리에는 숱한 목숨들이 서로 얼크러지며 살아가겠지. 뭍에서는 바람이 온갖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데, 물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어떻게 울려퍼질까. 물속 목숨들은 서로 어떤 삶을 어떤 소리로 주고받을까. (4345.5.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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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들

 


  봄을 지나 여름이 다가오는 오월 한복판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시멘트로 덮이지 않은 곳은 온통 풀밭이요, 이 풀밭을 갓난쟁이가 척척 깁니다. 겨우내, 또 봄내, 갓난쟁이가 시멘트 땅바닥만 기어야 하는 일이 몹시 안타깝다 싶었는데, 이제 둘째는 풀밭을 마음껏 기며 놀 수 있습니다.


  풀은 우리가 따로 심지 않아도 저희끼리 씨앗을 날리며 스스로 자랍니다. 아주 조그마한 풀씨는 아주 조그마한 터에 서로서로 한 뿌리를 내려 얽히고 설키며 자랍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겨루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철과 제때에 맞추어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우며 꽃을 피웁니다. 널리 드러나는 커다란 꽃송이는 거의 없습니다. 가까이에서 눈여겨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작은 꽃송이입니다. 이 지구별은 바로 이 작은 풀씨 작은 풀꽃 작은 풀포기가 푸른 기운을 마음껏 뿜으며 싱그러이 푸른 빛깔 나눌 수 있다고 느낍니다.


  작은 풀포기를 먹으며 작은 풀짐승이 살아갑니다. 작은 풀포기가 누는 똥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 무럭무럭 자랍니다. 작은 풀짐승을 잡아먹는 커다란 들짐승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풀과 나무와 짐승들 사이에서 저희 보금자리와 터전을 마련해 알뜰살뜰 살림을 꾸립니다.


  제비가 노래하고 들새가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노래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 노래합니다. 푸른들은 푸른빛이요, 푸른 멧자락은 푸른 사랑입니다. (4345.5.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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