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하게 쓸 글


 글 하나 써 주면 좋겠다는 편지가 그제 왔다. 오늘이나 이듬날 인천으로 마실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얼른 일을 끝내야겠다 생각하면서, 새벽녘 편지 하나를 띄운다. 나는 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글 하나 쓰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를 적는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한다. 바로 이 자리에서 써 볼까? 곧바로 글을 쓴다. 원고지 20∼25장 사이로 글을 쓰면 좋겠다 했고, 한 시간쯤에 걸쳐 원고지 22장짜리 글을 마무리짓는다. 다 쓴 글을 한 번 죽 읽으면서 잘못 적은 곳 하나를 손볼 뿐, 딱히 더 다듬지 않는다. 이 글을 받은 쪽에서 어찌저찌 고쳐 달라 한다면, 그때에는 새로 써야지. 나는 예전부터 글을 고쳐서 쓰지 못한다. 어느 대목 하나 고쳐 달라 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고치라 하거나, 나 스스로 아예 새글을 쓴다. 좀 모자라거나 아쉬울 글이든 퍽 괜찮거나 좋다 싶은 글이든 나로서는 다 내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쓴 글이든 저렇게 쓴 글이든 나중에 낱권책으로 묶으려고 생각할 때에는 통째로 고쳐쓰기 일쑤이다. 마음이 바뀌기 때문일까. 글쎄, 이는 아니라고 느낀다. 예전에 옆지기한테 제대로 말을 못했는데, 제대로 말을 못한 까닭은 나 스스로 아직 제대로 깨닫거나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잡지사나 신문사 같은 데에 보내는 글은 새로 하나 쓰되 글을 다듬거나 고치지 않으면서 낱권책 글만큼은 고쳐서 쓰는 까닭이란,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글은 ‘꼭 이때까지 느낀 대로 써서 꼭 이때에만 읽고 새기는 글’이다. 낱권책에 싣는 글은 ‘낱권책이 나오는 어느 한때로 그치는 글’이 아니라, 적어도 열 해나 스무 해를 웃도는 글이 된다. 그래서 낱권책을 낸다 할 때에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열 해나 스무 해 앞날까지 돌아보면서 더 가다듬거나 추스른다. 그런데, 낱권책에 실을 글을 이렇게 가다듬거나 추스른다면, 여느 때에 쓰는 글도 이렇게 해야 옳지 않을까. 여느 때에도 열 해나 스무 해 앞서를 헤아리며 조금 더 알뜰히 여미어야 하지 않을까. 찬찬히 생각해 본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느 때에는 여느 때대로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마음과 몸에 걸맞게만 이야기를 풀고 싶다. 오늘은 오늘 느낌과 삶 그대로만 쓴다. 오늘 하루가 모여 내 삶이 되고, 내 삶은 내 글로 태어난다. 낱권책은 내 삶이라기보다 내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이다. 선물과 삶은 다르다고 느낀다. 내가 꾸리는 삶으로 오늘 하루를 살거나 살림을 돌본다. 오늘 하루를 살거나 살림을 돌보며 틈틈이 아이 몫을 떼어서 남긴다. 글은 늘 홀가분하게 쓴다. 낱권책 또한 홀가분하게 내 글을 고친다. 아직 엉성한 텃밭이지만, 우리 텃밭에 들이는 땀은 그날그날 들일 뿐 더 들이지 못한다. 날마다 힘닿는 대로만 힘을 들인다. 이듬날 줄 거름을 오늘 줄 수 없다. 다음달 뽑을 풀을 오늘 어찌 뽑겠나. 오늘은 오늘 이야기만을 쓴다. 아직 아이는 깨지 않았으나, 곧 깰 듯하다. 오늘 글쓰기도 이제 곧 마쳐야 할 듯하다. (4344.4.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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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사진 이야기] 10. 부산 대영서점 2010.9.11.


 어느 헌책방에 찾아가서 책을 고르고 나서 사진을 찍든, 헌책방 일꾼더러 사진으로 곱게 찍혀 주십사 하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로 모델 사진을 찍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애써 헌책방 일꾼 얼굴이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어야 ‘헌책방 사진’이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헌책방 일꾼 아무개가 손질하거나 만진 책인 줄을 알아야 어느 책 하나를 더 알차게 읽을 수 있지 않습니다. 그저 고마운 책 하나라고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아주 드물게 헌책방 일꾼 모습을 두 눈으로 서로 마주보면서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 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들을 때면 이처럼 찍습니다. 여느 때 여느 모습을 여느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퍽 홀가분한데, 다소곳하게 앉아 다소곳한 모습을 다소곳한 매무새로 사진으로 찍자면 진땀이 흐릅니다. 이러면서도 헌책방 일꾼 두 눈과 얼굴을 사진기로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어 고맙기도 합니다. 언제나 책 앞에서 바르게 살아온 얼굴입니다. (4344.4.6.물.ㅎㄲㅅㄱ)


- 2010.9.11. 부산 보수동 대영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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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에


 아침 열한 시 오십 분에 읍내에서 나오는 시골버스는 열두 시 오 분 무렵 광벌 큰길가 느티나무 버스역으로 들어오고, 네 식구 장마당 마실을 하고 난 다음 낮 한 시 사십 분 시골버스를 타고 한 시 오십오 분에 광벌 큰길사 느티나무 버스역에 닿아, 꾸벅꾸벅 조는 아이를 안고 걷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잠이 조금씩 깬다.

 아이가 그대로 잠들어 아이를 안은 채 집으로 왔다면 아이는 낮잠을 조금 잤을 테고, 아버지도 낮잠을 조금 자고 나서 저녁을 먹었겠지. 그러나 아이가 졸립고 힘들면서 잠들지 않는 바람에 장마당에서 사온 딸기랑 아침에 남은 밥이랑 허둥지둥 주워먹고는 이내 곯아떨어진다. 오늘 몫 빨래는 이듬날로 미루기로 한다.

 저녁 열한 시가 가까워 잠에서 깬다. 아이도 잠에서 깬다. 아이한테 일어날래 하고 묻는데 그냥 눕는다. 쉬 마려우면 일어나라 하는데 그대로 눕더니 기저귀에 쉬를 하고서 일어난다. 그냥 일어나서 쉬를 하면 덧나니. 왜 기저귀에 쉬를 한 다음에 일어나니.

 곯아떨어지기 앞서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넷째 권을 다 읽었다. 만화책 《피아노의 숲》 열아홉째 권도 다 읽었다. 만화책 《요츠바랑!》 열째 권은 읽다가 말았다. 몸이 꽤 무거워 눈이 게슴츠레 감길 때에는 만화책이 그럭저럭 읽힌다.

 그러나 몸이 힘들 때라 해서 모든 만화책이 잘 읽힐 수 없다. 만화책이라 잘 읽힌다기보다 여느 책으로서 훌륭하거나 여느 이야기로서 돋보일 때에 몸이 힘들면서도 눈에 더 힘을 주면서 읽는다. 《씨앗의 희망》이든 《숨겨진 풍경》이든 《초원의 집》이든, 언제나 저녁 무렵 온몸이 욱씬욱씬 쑤시며 고단하게 드러눕는 잠자리에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잠을 미루며 읽었으니까.

 새벽에 맑은 넋으로 책을 읽는다. 저녁에 고단한 넋으로 책을 읽는다. 아침에 기쁜 넋으로 책을 읽는다. 낮에 어수선하고 바쁜 넋으로 책을 읽는다. (4344.4.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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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과 살림살이와 집식구


 문을 닫는 헌책방 한 곳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 헌책방이 조용히 문을 닫는 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테니까, 고단한 몸과 마음을 일으키면서 밤을 새워 글을 적바림한다.

 시골집에서 살림을 잘 꾸리지 못하는 내 삶을 돌이킨다. 나는 책하고만 살아갈 목숨인가. 나는 책하고 떨어진 채 살 수 없는 목숨인가.

 헌책방 한 곳 아픈 발자국을 돌아보는 데에 마음을 쓰는 만큼, 내 보금자리 살림살이 예쁘게 건사하는 데에 마음을 쓸 수 있는지, 아니 제대로 쓰기는 하는지, 옳게 쓰려 한 적이 몇 차례쯤 될는지 되씹는다.

 집일과 집살림은 틀림없이 다르다. 책을 사는 일과 책을 아끼는 일은 매우 다르다. 책방마실을 자주 하거나 책방 이야기를 글로 쓴대서 책사랑이나 책방사랑이 되지 않는다. 살림 이야기는 아주 다르다.

 나는 이제껏 집일만 했지, 집살림은 하지 않았다. 집살림을 하지 않은 까닭이라면 집살림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집일만 생각하고 집일을 할 뿐, 살림을 어떻게 해야 내 몸과 식구들 몸이 튼튼할 수 있는지 곱씹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가슴에 응어리가 크게 지는 나머지 쉬 잠들지 못한다. 문을 닫는 헌책방 이야기가 가슴에 쿡쿡 파고들어 아프고, 내 시골집 보금자리를 사랑스러운 옆지기하고 어여삐 돌보지 못하면서 제대로 못 느낀 채 여태껏 살아온 내 나날이 아프다. 나는 내 바깥일대로 헌책방 사람들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며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안일대로 보금자리 살림살이를 돌아보며 쓰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삶과 말은 하나이고 삶과 사진은 하나이며 삶과 책은 하나이든, 삶과 살림은 하나이다.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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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닫은 헌책방


 아침 일곱 시부터 나르는 책 일은 아침 열한 시 이십 분 무렵 끝납니다. 몇 평쯤 될까 싶은 참 작은 헌책방에서, 그러니까 너덧 평쯤 될까 싶은 조그마한 헌책방에서 1985년부터 2011년까지 차곡차곡 쌓이기도 하고 꾸준히 팔리며 새로 꽂히기도 한 책을 차근차근 빼냅니다. 자그마한 헌책방 한 곳에 깃든 책은 어제 하루 짐차로 한 대가 나갔고, 오늘은 짐차로 석 대 나갑니다. 이 자리에서는 1985년부터이지만, 건너편에서는 1978∼79년부터였습니다. 건너편 헌책방은 훨씬 작았다니까, 어쩌면 한두 평이나 두어 평이었을까요.

 네 시간 즈음 여러 사람이 바지런히 나르고 쌓으며 책을 빼냅니다. 몇 만 권이었을까요. 몇 만 권은 몇 해가 이룬 더께와 이야기와 굳은살이었을까요. 우리는 돈으로 이 책을 어떻게 셈할 수 있을까요.

 헌책방 한 곳에 깃들던 책은, 이 책방이 튼튼하고 씩씩하게 서던 때에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차츰 줄었고, 문을 닫는다고 할 때에도 알아보는 사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책들을 넘겨받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되살릴 때에 여느 책손은 어느 만큼 새롭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책 또한 물건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물건으로만 그치는 책이라면 굳이 헌책방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책 또한 지식으로 마주할 수 있으나, 지식으로만 맴도는 책이라면 애써 옛책을 되읽지 않습니다. 헌책방 일꾼은 당신이 건사하던 모든 책을 고이 내려놓고는 조용히 당신 일터를 마무리짓습니다. (4344.4.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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