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빛

곁말 30 헤엄이



  마흔 살이 넘도록 헤엄을 못 쳤습니다. 물하고 도무지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마흔너덧 무렵에 비로소 헤엄질이 무엇인가 하고 느꼈어요. 헤엄질이 된 까닭은 딱 하나예요. 남들처럼 물낯에서 물살을 가르지 못해도 된다고, 나는 물바닥 가까이로 가라앉아서 천천히 물살을 갈라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물속으로 몸을 가라앉혀서 숨을 모두 내뱉고서 가만히 움직여 보았는데, 뜻밖에 이 놀이는 매우 잘되더군요. 몸에 힘을 다 빼니 스르르 물바닥까지 몸이 닿고, 물바닥에 고요히 엎드려서 눈을 뜨고 물이웃을 보았어요. 물이웃이란 ‘헤엄이’입니다. ‘물고기’가 아닙니다. ‘먹이’로 본다면, 물에서 헤엄치는 숨결을 ‘물고기’로 삼겠지만, 저는 물살을 시원시원 가르며 저랑 눈을 마주하는 아이들을 ‘고기’란 이름으로 가리키고 싶지 않았어요. 어떤 이름으로 가리키면 어울리려나 하고 생각하는데, 물바닥을 살살 일렁이는 잔바람이 불더니 ‘헤엄이’라는 이름이 찾아왔어요. 나중에 살펴보니 《으뜸 헤엄이》란 이름인 그림책이 있어요. 물살을 잘 가르는 사람도, 물에서 살아가는 숨결도 나란히 ‘헤엄이’입니다. 물바닥에서 가만히 헤엄이를 보다가 슬슬 손발을 놀리면 용하게 앞으로도 옆으로도 가더군요. 물속헤엄도 즐겁습니다.


헤엄이 (헤엄치다 + 이) : 헤엄을 치는 숨결. 물살을 가르면서 나아가는 숨결. 물·내·바다 같은 곳에서 나아가려고 몸을 움직이는 숨결. 때로는 “헤엄을 잘 치는 숨결”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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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말 29 무릎셈틀



  볼일이 있어 바깥으로 멀리 다녀와야 할 적에 셈틀을 챙깁니다. 자리에 놓고 쓰는 셈틀은 들고다닐 수 없기에, 포개어 부피가 작은 셈틀을 등짐에 넣어요. 영어로 ‘노트북’이라 하는 셈틀을 2004년 무렵부터 썼지 싶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를 그대로 썼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들고다니는 셈틀 = 노트북”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인 이웃나라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더군요. 이름짓기란 수수하고 쉽다고, 이름이란 삶자리에서 문득 태어난다고, 스스로 즐거이 가리키고 둘레에서 재미있거나 반갑다고 여길 이름은 시나브로 떠오른다고 느꼈어요. “최종규 씨도 ‘노트북’만큼은 우리말로 이름을 못 붙이나 봐요?” 하고 묻는 분이 많았는데 빙그레 웃으면서 “음, 얼른 우리말을 지어내기보다 이 셈틀을 즐겁게 쓰다 보면 어느 날 이름 하나가 찾아오리라 생각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길에서 길손집에서 버스나루에서 셈틀을 무릎에 얹고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아! 나는 이 셈틀을 무릎에 얹어서 쓰네? 다른 사람들도 길에서는 으레 무릎에 얹잖아!” 하고 혼잣말이 터져나왔습니다. 손에 쥐기에 ‘손전화’이듯, 무릎에 얹으니 ‘무릎셈틀’이라 하면 어울리겠구나 싶어요. 책상에 얹는 셈틀은 ‘책상셈틀’이라 하면 어울릴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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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셈틀 (무릎 + 셈틀) : 가볍고 작기에 때로는 접어서 들고 다니다가, 무릎에 얹어서 쓰기도 하는 셈틀. ‘노트북’을 손질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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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말 28 가만히



  가을볕이란 가만히 지나가면서 쓰다듬어 주는 손길 같습니다. 가을바람이란 가만가만 흐르면서 어루만지는 숨빛 같습니다. 찬찬히 하루를 짓습니다. 천천히 오늘을 누립니다. 아이하고뿐 아니라 어른하고 말을 섞을 적에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마주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풀꽃이며 나무하고 말을 나눌 적에도 가만가만 마음을 틔워 생각을 빛냅니다. 찰칵 소리를 내며 어떤 모습을 담는다고 할 적에는, 찍는 쪽하고 찍히는 쪽이 가만히 한마음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글을 쓸 적에도 이와 같지요. 글로 옮기는 사람도,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가만가만 한마음으로 노래하기에 새롭게 만날 만합니다. 저는 빨리달리기(단거리경주)를 아주 못합니다. 오래달리기(장거리경주)라면 눈이 초롱초롱해요. 빨리 달리거나 빨리 가거나 빨리 하자면 허둥지둥 힘겨워요. 느긋이 달리거나 느릿느릿 가거나 느즈막이 하자면 빙그레 웃음이 나면서 즐거워서 춤짓으로 거듭나요. 가만히 가고 싶습니다. 가만가만 가다듬으려 합니다. 가던 길을 가만 멈추고서 가을잎한테 봄꽃한테 여름싹한테 겨울눈한테 가늘게 콧노래를 부르듯 이야기잔치를 펴고 싶어요. 가랑비를 가만히 맞으면서 눈을 감습니다. 가을날이 저물면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이 가깝습니다.


가만히(가만가만·가만하다) : 1.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이. 2. 움직임이 안 드러나게 조용히. 3. 마음을 가다듬어 곰곰이. 4. 말없이 찬찬히. 5. 아무 생각이 없거나 손을 쓰지 않고 그냥 그대로 6. 사람들한테 드러나지 않으면서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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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말 27 들딸 멧딸 밭딸



  어머니 옛집을 어릴 적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요새는 휙휙 가로지르는 길이 곳곳에 뚫립니다만, 예전에는 한참 돌아요. 인천부터 당진 사이도 굽이굽이 멀디멀고, 어머니랑 저는 멀미로 애먹습니다. 오며가며 지치지만 큰고장하고 사뭇 다른 시골에서는 뛰놀 들하고 멧자락이 있고, 시골 누나하고 언니는 “넌 서울(도시)서 살아 다 모르는구나?” 하며 깔깔거리다가도 사근사근 알려주었어요. 딸기꽃을 여덟아홉 살 무렵 처음 보았지 싶어요. “딸기꽃이야. 딸기꽃도 몰라?” “…….” “이다음에 오면 딸기가 빨갛게 익겠네. 그때는 밭에서뿐 아니라 숲에서도 딸기를 딴단다.” 어린 날에는 가게에서 사먹는 딸기만 보았으니 딸기가 어떻게 맺는 줄 모르기도 했습니다. 이 딸기는 딸기꽃이 지고 나서 맺는 열매라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더구나 밭하고 들하고 숲하고 다른 딸기가 있는 줄은 어림도 못 했고요. “하하하, 너는 개암도 모르겠네? 메뚜기는 먹을 줄 아니? 개구리는? 그래도 메추리알은 먹겠지? 저기 처마에 메추리집이 있어서 가끔 메추리알을 하나씩 꺼내서 먹지.” 맨발로 나무를 타고 맨손으로 숲을 누비고 맨몸으로 들바람을 마시면서 ‘딸기’란 이름이 얼마나 달콤한가 하고 돌아봤어요. 들딸·멧딸·밭딸을 비로소 만났어요.


들딸 (들 + 딸기) : 들에서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면서 자라는 딸기.

멧딸 (메 + ㅅ + 딸기) : 멧자락이나 숲에서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면서 자라는 딸기.

밭딸 (밭 + 딸기) : 사람이 따로 밭에 씨앗을 심어서 기르는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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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말 26 달콤이



  저는 김치를 못 먹습니다. 고춧가루를 듬뿍 치면 재채기부터 나옵니다. 찬국수에 동치미를 못 먹고, 달콤이도 못 먹어요. 달콤이를 받아들이는 몸이라면 누가 달콤이를 먹을 적에 달려들거나 눈을 반짝하겠지만, 달콤이를 섣불리 먹었다간 배앓이를 여러 날 하기에 냄새부터 맡고 싶지 않아요. 잎물(차)을 마시는 자리에 곧잘 달콤이 한 조각쯤 같이 놓잖아요? 저는 잎물만 마신다고 여쭈지만 고작 이 한 조각이 얼마나 대수롭냐고 여기는 분이 많습니다. 김치를 못 먹는다고 하면 “한 조각도요? 맛도요?” 하고 되묻는 분이 있는데, 이런 먹을거리 이름이나 모습만 보아도 더부룩하면서 괴롭곤 했어요. 이제는 옆에서 누가 이런 먹을거리를 즐기더라도 더부룩하지는 않고, 괴롭지도 않습니다. 속에서 안 받는 밥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되더군요. 스스로 즐거울 생각을 하고, 스스로 신나는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 아름답게 맞이할 책을 읽고, 스스로 사랑을 기울여 글을 쓰면 돼요. 달콤이는 못 먹지만 달콤가루는 맛봅니다. 곰곰이 생각하자니, 달콤가루도 꿀도 그리 즐기지 않은 몸이네 싶어요. “달달한 뭘 먹고 싶지 않아요?” 하고 묻는 분한테 “아뇨. 조금도요!”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꾸합니다. 아, 숲에서 솟는 샘물은 참 달아요.


달콤이 (달콤하다 + 이) : 1. 달콤한 먹을거리. ‘케이크’를 가리키는 말. 2. 달콤하게 마주하거나 어울리거나 사귀거나 지낼 만한 사람.


달콤하다 : 1. 마음이 끌릴 만큼 부드럽고 넉넉하게 입에 닿다. 즐겁게 먹거나 누릴 만한 맛이다. (감칠맛) 2. 마음이 부드러이 끌릴 만하다. 재미있게 받아들이거나 누릴 만하다. (즐겁다) 3. 부드러우면서 느긋이 감싸서 안기는 듯하다. 부드럽고 느긋해서 가벼이 있을 만하다. 부드러우면서 느긋해서 몸에 힘을 빼고서 있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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