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모든 책은 : 투박하게 ‘나무’라고만 이름을 붙인 책 《나무》를 읽었다. 꾸밈말도 보탬말도 없이 ‘나무’라고만 하는 두 마디로 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집 나무를 비롯해 이 땅에 있는 뭇 나무를 가만히 그리고, 늘 곁으로 다가가서 손을 짚고 품으로 안으면서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가 스미나 하고 돌아보았다. 우리는 어떤 책을 읽을까? 어떤 마음을 읽을까? 어떤 이야기를 읽을까? 글씨로 적어 놓아야만 읽을 수 있는 책일까? 글씨가 없으면 못 읽을 책일까? 책이라는 꼴이 아닌 나무라는 숨결로 있다면, 이 나무가 책인 줄 못 알아챌까? 책이 되어 준 나무를 그리면 늘 이런 말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다. “모든 책은 숲이네.” 우리가 책을 읽을 적에는 늘 숲을 읽는 셈이네. 2019.9.2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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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 저항하고 싶으면 해. 그런데 저항하면 저항으로 끝나. 저항하지 말라고? 왜? 저항을 하지 않으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모두 받아들이라고? 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때리고 짓밟기까지 하는데? 그래, 저항하지 말아 봐. 그냥 다 주고, 더 주고, 가만히 다가가서 네 온사랑으로 네가 ‘그 녀석(또는 그년이나 그놈)’이라고 부르는 그이를 살며시 안아 봐. 그 녀석이 뭘 배우거나 느끼는가를 따지지 마. 오직 네 온사랑만 느끼고 너 스스로 온사랑으로 깨어나서 활짝 웃음짓고 눈물짓는 길만 바라봐. 너는 그 녀석을 보면서 눈물지을 줄 알면 돼. 스스로 괴롭히고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에서 허덕이는 그 녀석을 바라보면서 그저 온사랑으로 눈물을 지을 수 있으면 돼.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눈물을 짓는 온사랑으로 바라보면 바로 너 스스로를 웃음짓는 온사랑으로 다시 안아 줘. 그러면 돼. 2019.9.2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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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주사를 맞다 : 어떤 이는 “예방주사를 맞다”를 ‘앞으로 겪을는지 모를 커다란 고비나 아슬아슬한 때를 잘 이겨내거나 넘길 수 있도록 미리 따끔하고 가볍게 겪다’라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예방주사를 맞다”가 매우 끔찍한 일이라고 여긴다. 왜 그럴까? 예방주사는 병원균을 화학약품으로 섞어서 미리 집어넣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미리 병원균을 몸에 넣어서, 몸에 면역력을 길러 준다고들 말하는데, 그렇게 면역력을 길러 주고 싶으면 ‘에이즈 예방주사’나 ‘암 예방주사’도 놓을 노릇 아닌가? ‘유전자조작식품 피해를 예방하는 주사’를 맞이든지 말이다. ‘방사능 피해 예방주사’를 맞힐 수도 있겠지. 전쟁이 터져서 저쪽 나라에서 이쪽 나라에 ‘생물학 무기’를 쓴다고 할 적에는 ‘독가스 예방주사’도 맞힐 수 있으리라. 자, 똑바로 생각해 보자. 모든 예방주사는 ‘그 병이 걸려도 견딜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을 화학약품으로 섞어서, 화학약품을 방부제로 씌운 다음에 맞힌’다. 이 대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연에서 온 생약’으로 예방주사를 놓는 일은 없다. 더구나 ‘방부제 안 쓰는 예방주사’도 없다. 방부제를 쓰고 화학약품으로 ‘병원균을 만들’어야 사람몸에서 ‘여러 해를 살아남는다’고 하니까. 이 대목이 좀 보이는가? ‘여러 해를 사람몸에서 고스란히 살아남는 화학약품과 방부제 예방주사’를 맞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멀쩡한 사람도 바로 그 병에 걸리기 쉽다. 더구나 ‘병에 안 걸려’도 몸에 억지로 집어넣은 화햑약품하고 방부제 피해가 어떠한가를 정부나 의학계에서는 0.0001%조차 안 밝힌다. 이러한 얼거리를 하나하나 따지고서야 이 말, “예방주사를 맞다”를 생각해 보자. 이런 말을 함부로 써도 되겠는가, 아니면 이런 말을 이제는 걷어치울 노릇인가? 2019.9.23.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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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은 바로 ‘숲’이다. 책이란, 숲에서 얻은 ‘씨앗’이지. ‘책’은 ‘숲에서 살던 나무’를 바꾼 숨결이다. 사람인 우리는 왜 책을 엮어서 짓고 읽을까? 우리로서는 나무(책이 된 나무)를 곁에 두면서 이 별이 흘러온 길을 듣고, 그동안 이 별에 온 숱한 이야기를 살핀다. 먼먼 옛날부터 이 별에서 사람이며 벌레이며 새나 짐승이며 저마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겪었고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알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읽을)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책도 나쁜 책도 없다. 이 별하고 얽힌 이야기가 남은 책일 뿐이다. 그런데 책으로 삼을 나무가 아니라면, 집을 지을 나무가 아니라면, 연필이나 책걸상이나 공책으로 삼을 나무가 아니라면, 땔감으로 삼을 나무가 아니라면, 나무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별을 슬기롭게 읽어서 사랑스레 가꾸는 마음을 북돋우려는 길에 나무를 쓰지 않고, 그냥 마구잡이로 숲을 밀어내어 아스팔트 시멘트 도시를 키우면, 이들 나무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끔직한 미움을 키워서 거꾸로 사람을 들볶는 숨결이 되곤 한다. 생각해 보라. 석탄이나 석유는 예전에 나무였다. 땅밑에 고이 묻어두지 않고 구태여 이 석탄이나 석유를, 또 가스를, 또 우라늄울, 예전에는 모두 나무였으나 꼴이 바뀐 이 덩어리를 활활 태우는 도시 물질문명이 어떤 길을 걷는가? 나무를 숲으로 건사하거나, 나무한테서 이야기를 들을 책으로 삼는 길이 아니라면, 또 나무를 마음으로 만나고 싶은 뜻으로 나무집을 짓거나 나무걸상을 짜거나 땔나무를 쓰는 살림이 아니라면, 그 모든 과학물질문명은 이 별을 망가뜨린다. 모든 책은 이 별을 살피고 지켜보던 나무이다. 모든 책은 우리 사람한테 남긴 선물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는다. 그 때문에 종이책을 읽지 않고도 마음으로 숲 이야기를 읽는다든지, 나무를 곁에 두고서 마음으로 바로 이야기를 읽기도 한다. 우리가 왜 책을 읽는가? 마음으로 나무하고 숲한테서 곧바로 이야기를 읽을 재주를 스스로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책을 안 읽는가? 이 별에서 살아가는 뜻을 모조리 잊어버렸기 때문이요, 사회나 정치나 교육으로 길든 나머지 쳇바퀴를 돌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책이든 된다. 그러나 사회·정치·교육이 거짓투성이로 꾸민 책이라면 불태워야 한다. NASA 우주개발이라든지, 의사와 교사와 정치지도자 같은 이들이 쓴, 우리 마음을 길들여서 종(노예)으로 바꿔 놓으려고 하는 책이라면 불태워야 한다. 책 가운데에는, 참으로 우리 숲이 남긴 사랑이야기가 있지만, ‘숲이 들려주었다는 듯이 꾸민 거짓이야기’가 있다. 이런 거짓책은 솎아내거나 가려낼 줄 알아야 하는데, 아직 우리가 스스로 마음눈을 틔우지 않았다면 거짓책에 속아넘어갈 수 있다. 2019.9.2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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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 바다에서 뭍에서 아주 조그마한 물방울이 아지랑이라는 몸으로 바뀌어 하늘로 가볍게 올라간다. 하늘로 오르려면 ‘겉몸’은 있되 ‘속몸’은 무게를 비워야 한다. 바다나 뭍을 놀이마당 삼아서 신나게 누비며 온갖 삶을 겪은 물방울은 저마다 새로운 터로 나들이를 가려고 시나브로 속몸을 비워서 하늘로 몽실몽실 올라가서 모이는데, 이렇게 모인 모습이 ‘구름’이라는 새 놀이마당이다. 구름이 된 온누리 물방울은 서로 수다를 떤다. “난 저기에 가 볼래.”, “난 저쪽이 궁금해.”, “난 저곳을 아직 안 가 봤으니 오늘 가겠어.”처럼. 이러한 수다가 모이고 모여서 드디어 꽝 하고 터지면 비가 되어 바다나 뭍으로 시원시원 내린다. ‘비’라는 이름으로 바뀐 물방울은 신바람을 내면서 날아내린다. 자, 생각하자. 하늘로 갈 적에는 ‘날아오른다’요, 땅으로 갈 적에는 ‘날아내린다’이다. 사람이란 눈 아닌 물방울이란 눈으로 보자. 땅이나 바다로 날아내리는 빗방울은 신바람을 내니 그토록 빠르게 날아내려도 녹지 않는다. 이와 달리 억지로 때려지은 기계인 비행기나 우주선이 빗방울 같은 빠르기로 날아내렸다가는 바로 불타서 사라지겠지. 노래하며 신나는 빗방울이니 구름에서 땅이나 바다로 날아내릴 적에 멀쩡할 뿐 아니라, 대단히 시원하고 상큼하고 산뜻하며 따뜻하다. 시원하면서 따뜻한 물방울이 바로 ‘비’이다. 이 빗방울은 땅이나 바다로 날아내리면서 꿈꾼다. “즐겁게 씻어야지.” 무엇을 씻는가 하면, 하늘에서 땅이나 바다를 바라보던 물방울 나름대로 ‘앙금이나 때나 찌꺼기나 멍울이나 슬픔이나 생채기나 어둠’을 씻으려는 사랑을 품어서 씻으려 한다. 곧, 비가 내리면 온누리는 엄청나게 깨끗하다. 왜 ‘비가 지나간 하늘’이 눈부시게 새파란 줄 아는가? 비는 하늘부터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땅을 씻고 숲을 씻는다. 숲은 왜 아무도 청소하는 사람이 없어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할까? 빗물이 때 되면 알맞게 찾아가서 씻어 주니까. 그렇다면 도시는 왜 더러울까? 도시는 비를 대단히 싫어하고 미워하고 꺼리는데다가 ‘우산’으로 가리고, 자동차 지붕으로 가리고, 아주 손사래를 치니까. 보라, 비가 오는 날 활짝 웃는 낯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팔을 하늘로 뻗고서 빗방울을 맞아들이고 혀로 날름날름 빗물을 먹는 사람이 이제 얼마나 있는가? 예전에 온누리가 아주 깨끗하던 무렵에는 모든 사람들이 비가 오는 날에 바깥에 서서 두 팔을 하늘로 뻗고서 몸이며 마음을 씻었고, 혀로 곧장 빗물을 받아서 밥으로 삼아 먹었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을 보자. 한국은 일본에서 지은 ‘게릴라성 호우’라는 말을 끌어들여서 쓰더니 요새는 ‘물폭탄’이라는 말까지 끌어들여서 쓴다. 아름다운 비요, 청소부 비요, 사랑님 비인 물방울인데, 이 비한테 ‘게릴라성 호우’나 ‘물폭탄’이라고 하는, 차마 들어줄 수 없는 소름이 돋는 끔찍한 이름을 붙여서 싫어하니, 도시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도시사람은 하나같이 아프고 앓고 짜증이 넘치고 불같이 성내고 악다구니처럼 다투고, 저마다 제 주머니에 돈다발을 쑤셔박으면서도 이웃사람하고 나눌 줄 모르고, 게다가 숲이 가르쳐 주는 슬기를 담은 책 하나 장만해서 읽을 줄 모른다. 빗물이 사람을 어떻게 씻어 주는가 하면,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첫째, 비를 맞으면 몸을 씻으며 새힘을 준다. 둘째, 비를 맞으면 마음을 씻으며 새기운을 준다. 몸에는 힘을, 마음에는 기운을 준다. 몸에서는 때랑 먼지랑 찌꺼기랑 냄새를 씻어 주고, 마음에서는 멍울이랑 생채기랑 아픔이랑 앙금을 씻어 준다. 그리고 비로 몸을 씻는 동안 빗물결이 가만히 사람몸에 스며들어서 빛이 난다. 이 빛이란 밥이다. 비를 맞는 사람은 배고플 일이 없고, 지저분할 일이 없다. 비를 안 맞는 사람은 늘 배가 고프고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아무리 비누질로 씻고 화장을 하더라도 몸에서 때하고 냄새가 하나도 안 가신다. 2019.9.23.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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