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가르치려 들다 : 누가 가르치려 들면 처음에는 좀 쭈뼛한다. 속으로 “네가 뭔데 날 가르치려 들어?”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봐, 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인데, 네가 어떻게 날 가르치지?”라 물어야 맞으니까. 이러다가 얼핏 새로운 생각이 스친다. 조용히 이이 말을 들어 보면, 이이가 가르치려 드는 줄거리보다 ‘이이로서는 무엇을 그렇게 뼛속 깊이 느끼면서 즐겁거나 기뻤기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일까?’ 싶더라. 누가 가르치려 든다면, 이이가 무엇을 가르치려 드는가 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어쩐지 이 대목이 궁금하다. 곰곰이 귀를 기울이다가 새삼스레 생각한다. “아하, 이이는 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구나. 이이는 이이 스스로 배운 즐거움이나 기쁨을 꽃피우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그래서 이이는 바로 이이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려고 할 생각으로 이처럼 말을 터뜨리고 활짝활짝 웃으면서 이야기를 줄줄 잇는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가르치려 드는 이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 언제나 그이 스스로 가르치면서 바로 그이 스스로 새로 배울 뿐이다. 2019.9.2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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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장미와 자동차 : 나는 어릴 적부터 어떤 버스이든 거의 탈 수 없었다. 짧은 길이든 먼 길이든, 버스에서 나는 냄새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속엣것을 게우며 살았다. 그때 어른들은 나더러 ‘자동차 멀미’가 좀 클 뿐이라며 멀미약을 먹거나 귀밑에 붙이면 낫는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멀미약으로는 가라앉힐 수 없었다. 버스이든 자동차이든, 이런 탈거리에 있는 동안에는 죽도록 어지럽고, 탈거리에서 내리면 바깥바람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드디어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서른 몇 해를 ‘자동차 멀미’로만 여기며 살았는데, 이때에 나는 버스이든 자동차이든 안 타고 걸어다녔고, 걸으면서 책을 읽었다. 또는 자전거를 탔다. 인천하고 서울 사이를 가볍게 자전거로 오갔고, 충주하고 서울 사이도 거뜬히 자전거로 오갔다. 서른네 살 무렵,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이 말하던 ‘자동차 멀미’란, 멀미가 아닌 ‘자동차 화학소재 냄새 독성’에 몸이 휘청거린 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둘레에는 자동차 화학소재 냄새 독성만 흐르지 않는다. 아파트는 오롯이 화학덩어리이다. 도시를 가득 채운 모든 가게도 화학덩어리이다. 그나마 내가 손에 쥐던 책도 곰곰이 보면, 천연종이가 아닌 화학종이투성이로 나왔다. 흰종이란 무엇인가? 표백제하고 형광물질을 범벅으로 섞어서 하얀 빛깔이 나게 한다. 흰종이를 만질 적에는 우리 손하고 낯에 표백제하고 형광물질이 그대로 묻는다. 이 사회를 이룬 그들은 왜 굳이 흰종이를 퍼뜨리면서 사람들이 표백제하고 형광물질을 늘 살갗으로 먹도록 내몰겠는가? 천연물질로 만드는 화장품은 없으나, 화학물질로 만든 화장품을 사람들이 얼굴이며 손에 덕지덕지 바르며 스스로 죽음길로 내몬다. 화장품이란 장사는 얼마나 놀라운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마치 ‘고운 얼굴이라도 되는 듯’ 꾸미는 장사 아닌가? 살결을 도와준다는 장삿말을 일삼는 모든 스킨로션은 외려 살결을 이글이글 태울 뿐이지만, 스킨로션을 내다 버리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모기가 문 자리에 모기약을 바르면 피가 막혀 버리지만, 모기약을 안 바르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파리나 벌레를 잡겠다고 벌레잡이약을 뿌리면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 죽는데, 이를 알아채려는 사람이 드물다. 양복이나 정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옷은 거의 화학약품 실로 짠다. 이런 옷을 걸쳐야 마치 예의범절을 차리는 듯 여기는 사회이지만, 바로 이 양복이나 정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옷을 이룬 실(섬유)은 숲에서 오지 않는다. 모두 화학공장에서 나온다. 왜 이런 ‘비 천연 소재 섬유’로 공장에서 찍은 옷을 입어야 예의범절을 차리는 셈이라고 여기도록 가르치거나 길들일까?

여기, 장미나무하고 자동차가 있다. 열두 살 어린이하고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사름벼리야, 너는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 때문에, 이모네에 놀러와도 늘 죽은 낯빛이 되고 힘들고 멀미가 나고 뱃속이 부글부글하잖아?” “응.” “그런데, 왜 자동차 배기가스를 바라보아야 하니?” “응?” “여기 잘 보면, 자동차만 있지 않아. 자, 보렴, 이곳 일산(고양시)이라는 도시는 온통 아파트에다가, 길바닥은 아스팔트이고, 길을 따라 죽 온갖 가게가 늘어서지.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보면 솜실(면)이나 누에실(비단)이나 삼실(마·린넨)이나 모시실로 짠 옷은 거의 아무도 안 입어. 다들 화학실로 짠 옷을 입지. 게다가 사람들은 우리처럼 솜실을 바탕으로 짠 등짐(가방)을 들고 다니려 하지 않아. 다들 화학제품으로 찍은 등짐을 들고 다니면서, 이러한 살림에서 나는 냄새를 느끼려 하지도 않지.” “응, 그래요.” “자, 그럼 생각해 볼까? 아, 여기 보렴. 우리가 걷는 이 길가에 장미나무가 있어.” “네? 장미? 장미가 어디 있어?” “이 나무가 장미나무란다. 우리 집 장미나무하고는 다르게 생겨서 네가 장미인 줄 못 알아볼 수 있단다. 자, 이 장미나무는 전깃줄이며 쇠작대기로 친친 감고 묶어서 반듯하게 펴 놨어. 그러다 보니 너는 이 장미나무를 옆에서 스치면서도 장미인 줄 몰랐을 텐데, 그보다도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가 너무 매캐해서 숨이 막힌다는 생각만 하느라, 막상 곁에서 장미나무가 엄청난 꽃내음을 향긋하게 베푸는 줄 느끼지도 맡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해요.” “얘가 장미꽃이야?” “응, 하얀 장미꽃이네. 아, 저기 노란 장미가 있어.” “어디? 아, 그러네! 노란 장미야!” “여기는 곧 피려고 봉우리가 맺힌 장미야.” “와, 그러네! 아버지, 저기는 빨간 장미가 있어요! 우리 집에는 빨간 장미보다는 분홍에 가까운 빛깔인 장미인데.” “자, 이제 다시 물어볼게.” “네.” “사름벼리 님, 사름벼리님은 도시에 왔을 적에 이 장미나무를 보겠니, 아니면 자동차 배기가스를 보겠니?” “장미꽃이요!” “사름벼리 님은 자동차 배기가스가 매캐하다는 생각만 하겠니, 아니면 자동차는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장미꽃 향긋내음을 생각하겠니?” “장미꽃이요!” 이 이야기를 마치고 몇 걸음을 떼는데, 사름벼리 어린이가 아버지를 불러세운다. “아버지 여기 봐!” “응? 뭐가 있는데?” “여기, 꽃!” 거님길 돌틈에 아주아주 작은 풀꽃 한 송이가 살짝 피어서 빠꼼히 고개를 내민다. 이 풀꽃 이름을 알았으나 잊었다. “그래, 사름벼리 네가 장미꽃 냄새만 생각하면서 이곳에서 나들이를 누리려 하니 온갖 꽃이 너한테 말을 거는구나. 네 곁에 이렇게 꽃이며 나무가 많아. 네가 마음을 틔우니, 온갖 풀꽃에 푸나무에 너한테 고운 내음을 주고 싶어 앞다투어 찾아오는구나. 바로 이 마음을 간직하렴. 네가 너를 스스로 살리는 힘은 바로 네가 스스로 장미꽃이라는 생각이야.” 2019.9.26.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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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안다. 그런데 어른들은 ‘죽음 = 끝’으로 생각하니까, 어른들하고 달리 바라보는 그 죽음이라고 하는 길이 ‘끝’이 아닌 ‘새로운 처음’이라고 마음으로 아는데, 그 때문에, 어른들 눈치를 보면서 헷갈려 한다. 아이들이 일부러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새로운 몸으로 새롭게 날개를 달고 태어나실 할머니를 그리면서 고요히 그림을 그려 보렴,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어 본다. 2019.9.2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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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하다 : 어릴 적에 누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궁금해 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이러다가 생각했지. “내가 궁금한 대목을 왜 남한테 물어야 하지? 내가 궁금하니까 내가 풀면, 다른 사람 눈길이나 슬기나 생각이 아닌, 바로 내가 스스로 눈길이나 슬기나 생각을 키워서 알아내면 되지 않아? 내가 오롯이 내 힘으로 눈길을 키워서 똑바로 볼 줄 알고, 내가 옹글게 슬기를 가꿔서 사랑스레 볼 줄 알며, 내가 씩씩하게 생각을 일으켜서 아름답게 볼 줄 알면, 모든 수수께끼는 눈이 녹듯이 스르르 풀려서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참말 이다음부터는 걱정이나 근심이라고 하는 말이 제 삶에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께끼가 걷히지는 않았다. 다만, 걷히지 않는 수수께끼에 매달리는 일도 걷히더라. 앞으로 풀 수수께끼를 마음 한켠에 두면서 ‘오늘 풀어갈 길’만 바라보고서 온마음을 쓸 수 있더군. 이렇게 스스로 오늘 풀어갈 길만 바라보고서 온마음을 쓰며 지내다 보니, 예전이나 어릴 적에 품은 수수께끼를 풀어줄 실마리가 찾아오네. 그렇다고 어떤 뛰어난 길잡님이나 이슬떨이나 어른이나 스승을 만났다는 뜻이 아니다. 뜻하지 않게 생긴 어떤 일을 스스럼없이 마주하고 보니 바로 이런 일거리에서 ‘예전에 궁금해 한 바로 그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반짝반짝 빛나면서 저를 지켜보더라. 그 실마리가 속삭인다. “자, 이 실마리라는 열쇠를 너한테 줄게. 나는 너한테 열쇠를 건넬 뿐이야. 이 열쇠로 자물쇠를 푸는 몫은 바로 너이지. 너는 네가 하고픈 대로 해. 이 열쇠로 자물쇠를 풀 적에는 두 가지가 찾아온단다. 하나는, 수수께끼를 풀어낸 기쁨, 둘은, 수수께끼를 풀어낸 뒤에 찾아올 허전함.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두렵거나 꺼릴 만하다면 열쇠를 안 받아도 돼.” 나는 마땅히 열쇠를 받는다. 이러고서 자물쇠를 푼다. 참말 마음빛(정령) 목소리 그대로 수수께끼를 풀면 기쁨하고 허전함이 나란히 밀려든다. 왜냐하면, 이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에 ‘저 수수께끼’라는 새로운 생각거리가 바로 나타나니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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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슬기 : 사흘을 오롯이 쓰는 배움판을 다녀오고서 시나브로 한 가지를 보았다. 좋음도 나쁨도 없더라. 기쁨도 안 기쁨도 없더라. 모든 흐름은 그저 사랑일 뿐이더라. 어려움이나 안 어려움이 없는 줄은 예전부터 알아서, 여태 어렵거나 힘든 적은 참말로 없었다. 괴로움이나 안 괴로움도 없는 줄은 똑같이 예전부터 알았기에, 이제껏 겪은 어떤 일을 놓고도 괴로운 적이 참으로 없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자 눈길이었기에, 한국말사전이라고 하는 꽤 까다롭다고 여길 만한 일을, 하나도 안 까다롭다고 여기면서 차근차근 수수께끼를 풀듯, 말풀이를 붙이고 보기글을 지었구나 싶다. 다만, 이렇게 어떤 일은 알면서 살았어도 그러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나로서는 슬기(지혜)를 스스로 열지 않은 줄 느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스스로 되는 슬기라고 느낀다. 이 ‘스스로슬기’를 즐겁게 사랑으로 열어서 나누자. 스스로슬기가 되니 스스로나눔이 되겠지. 스스로슬기라면 스스로사랑이며, 스스로노래요, 스스로춤이고, 스스로웃음일 테지. 이 모든 스스로를 이웃님 누구나 스스럼없이, 참말로 스스럼이 없는 꽃빛으로 듬뿍듬뿍 누리는 길을 지어 보자. 2019.9.2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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